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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술 한시 특강 - 5. 천기를 문학에 담으려던 사람들 본문

연재/배움과 삶

김형술 한시 특강 - 5. 천기를 문학에 담으려던 사람들

건방진방랑자 2021. 12. 19.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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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천기를 문학에 담으려던 사람들

 

 

조선에 이렇게 생기발랄하게 시를 쓰고 문장을 쓰자는 논의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 공안파(公安派)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공안파의 대표주자인 원굉도와 이지 같은 인물은 억눌려 있던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래서 원굉도는 아예 본성에 맡기고 발하면 오히려 사람의 희노애락과 기호정욕에 통할 수 있으니, 이것이 기쁠 만하다[任性而發, 尚能通於人之喜怒哀樂, 嗜好情欲, 是可喜也].”라는 충격적인 말까지 했으며, 이지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곧 진짜 마음이다[夫童心者, 眞心也].”라는 말까지 했다.

 

유학에선 억눌러야 했던 기(), ()에 방해만 된다고 보았던 기()를 그들은 한없이 긍정하며 심즉리(心卽理)성리학의 성즉리(性卽理)’와 완전히 반대되는 얘기라는 말까지 하기에 이른다. 그러니 그들에겐 자유분방하게 자신의 생각들을 펼쳐내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게 더 이상 걸림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풀어낼 때 거기에 마음이 자리하고 그 마음이야말로 이치를 제대로 담아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늘 이상적으로 남아 있는 중국의 산악이나 중국의 바다를 그렸지만 이때부턴 조선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공안파를 비판한 김창협

 

바로 이런 새로운 논의들이 조선 사회를 휩쓸며 영향을 끼쳤고 그에 따라 조선시 선언과 같은 우리 것을 표현해 낸다는 생각이 가능하게 됐다는 점이다.

 

하지만 형술쌤은 그쯤에서 멈춰선 안 된다는 말을 힘주어 얘기했다. 분명히 공안파의 이론에 영향을 받은 게 확실하지만 그들과 조선 후기 백악시단(白嶽詩壇) 사이엔 엄청난 격절(隔絶)이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볼 땐 김창협의 논의나 공안파의 논의나 얼핏 비슷해 보이는데 도대체 뭐가 다르다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둘 사이엔 자유분방하고 정감을 그대로 담아내려는 마음은 같기에 천기(天機)’를 중시하고 개성적인 글쓰기를 긍정했던 것이니 말이다.

 

그때 김창협이 공안파에 대해 평가했던 말을 들려주신다. 김창협은 공안파의 글을 읽다보면 백정이 술을 마시고 불경을 읊조리는 격이라 평가했다고 한다. 그건 외설과 예술사이만큼이나 사람들에게 아리송하게 느껴지는 어느 경계에 대한 이야기였으리라. 김창협이 볼 때 공안파들은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을 자유분방하게 넘나들며 추태를 부리는 술주정뱅이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같은 천기(天機)’를 얘기했으면서도 둘 사이엔 전혀 다른 천기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공안파의 천기와 백악시단 천기는 다르다

 

그러면서 주희가 제자와 나눴던 천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서 들려준다. 주희의 제자는 천기라는 개념은 장자가 쓴 것이기에 유학을 하는 사람은 그 말을 쓰면 안 되지 않습니까?”라고 따지자, 주희는 누가 썼던 그 말 자체가 중요한 말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그 사람 때문에 그의 좋은 말을 재단해선 안 된다.’라는 식으로 대답을 해준다. 그 말은 곧 천기라는 단어가 어떻게 유교에 편입되었는지 그리고 그게 어떤 흐름을 통해 김창협을 위시한 백악시단에게까지 퍼지게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라 할 수 있다.

 

김창협과 홍세태가 천기라는 말을 쓸 지라도 그건 공안파의 논의를 그대로 이어받아 말한 것이 아니라, 성리학의 테두리 안에서 새롭게 정의된 천기라는 개념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소화시평 스터디를 할 때 관조(觀照)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성리학자들에게 관조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미 천지만물엔 이치가 깃들어 있기 때문에 사물에 정신을 집중한 채 보고 있으면 사물의 이치가 그대로 나에게 이르러 오며 그걸 통해 활연관통(豁然貫通)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자연을 관조하려 노력했으며 조선 후기에 이르면 이를수록 자연을 있는 그대로 핍진하게 담아내는 시들이 늘어나게 된단다.

 

그러고 보니 박지원에게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 보이긴 한다. 그의 아들 박종채가 아버지에 대해 남긴 기록인 과정록(過庭錄)에 보면 관조하려 애썼던 아버지의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다. 연암협에 살 때 아버지는 당을 내려오지 않을 때도 있었는데 그러다 관심이 있는 외물을 만나면 아무런 말도 없이 느긋이 내려다보며 비록 외물의 지극히 은미한 것, 예를 들면 풀과 짐승과 벌레들은 모두 지극한 경지가 있으니 만들어진 자연스런 오묘함을 볼 수가 있다[雖物之至微, 如艸卉禽蟲, 皆有至境, 可見造物自然之玅]”고 말해줬다는 것이다. 사물 안에 이미 만물의 이치가 구비되어 있으니 그것을 보려 노력해야 한다는 말과 김창협이 제월당기(霽月堂記)에서 외친 말이 겹쳐 보이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관조는 생물에 내재하는 理를 그대로 수용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다.  

 

 

 

 

인용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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