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숙주의
Rigorism
원칙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원칙은 사고와 행동의 객관적인 기준으로 기능한다. 원칙을 지키는 사람은 사회의 표준형 인간으로 간주되며, 다른 사람들의 모범으로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원칙에는 부작용도 있다. 원칙을 지나치게 고수하는 사람은 사고와 행동이 경직되기 쉬우며, 다양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원칙에서 벗어난 사람을 좀처럼 용납하지 못하고, 차이에 대해 관용을 보이려 하지 않는다. 이렇게 엄격하고 완고하게 원칙에 집착하는 태도를 가리켜 엄숙주의라고 말한다.
엄숙주의는 원래 도덕적 법칙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근엄하고 진지한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엄숙주의는 18세기에 교회의 법과 도덕을 문자 그대로 엄격하게 해석하려 했던 신학 윤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 엄숙주의자들을 더욱 엄숙하게 만든 것은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개연론(蓋然論, probabilism)이었다.
16세기에 예수회가 주장한 개연론은 교회의 법과 도덕을 좀 더 유연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 기본적 내용은 오늘날 법에서 말하는 무죄 추정의 원칙과 비슷하다. 어떤 행동이 죄가 되는지 안 되는지를 확실히 알 수 없을 때는 개연적인 견해에 따라 허용 여부를 결정한다. 어떤 것이 개연적인 견해인지는 적절한 논거를 제시하거나, 공인된 권위자가 그 견해에 지지를 표명해 결정한다.
이에 대해 가톨릭교회는 당연히 발끈했다. 교회가 보기에 개연론은 너그럽고 유연한 입장이 아니라 교회법을 파괴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 개연론이 통용된다면 그나마 종교개혁으로 현실적 권력과 권위를 잃은 교회의 위상은 더욱 추락할 게 뻔했다. 그래서 교회 측은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 생겨난 고증학처럼 훈고학적인 원칙론을 대항 논리로 내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엄숙주의다.
고루하고 보수적인 가톨릭교회의 엄숙주의와는 별개로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도덕철학도 엄숙주의로 분류된다. 칸트는 그 전까지 도덕을 의지와 연관시키던 도덕론을 거부하고 도덕을 의무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짜 도덕은 의무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재민을 돕자는 텔레비전 캠페인을 보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ARS 전화를 걸었다면, 그것은 칭찬받을 행위이기는 해도 도덕적인 행위는 아니다. 똑같은 자선 행위라 해도 의무에서 우러나와야만 도덕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즉 ‘도와주고 싶다’가 아니라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 진정한 도덕적 태도다.
도덕은 의지가 아니라 인간의 의무이며 누구나 따라야 할 법칙이다. 그래서 칸트는 도덕을 정언명령(定言命令)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도덕을 단순한 선택 사항이 아니라 법칙과 명령으로 보았기 때문에 칸트의 도덕철학은 엄숙주의라고 불린다. 스스로의 결심과 원칙에 따라 쾌락을 멀리하고 고행을 선택하는 금욕주의도 엄숙주의의 한 변형이다.
순수한 엄숙주의자인 칸트나 금욕주의자에게는 안타깝게도 현대의 엄숙주의는 지나친 근엄함으로 인해 종종 조롱을 받는다. 법과 정치, 문화와 예술에서 경직된 권위는 저항을 낳게 마련인데, 아직 권위의 껍데기가 남아 있는 탓에 그 저항은 직접적인 도전보다 풍자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엄숙주의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엄숙주의가 희화화되는 것이므로 풍자는 엄숙주의에 일격을 가하는 가장 효과적인 공략법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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