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은 제정②
기반이 취약했던 3두 정치는 예상외로 오래갔다. 그러나 그 기간은 옥타비아누스가 정치적으로 (또 신체적으로도) 성장한 기간이나 다름없었다. 기원전 40년 안토니우스는 동부, 레피두스는 북아프리카, 옥타비아누스는 서부를 맡아 3두 정치를 순탄하게 이끌었다. 그러나 20년 전의 3두 정치에서도 서부를 차지한 카이사르가 결국 승리하지 않았던가?
영화 <아저씨>에서는 ‘내일 사는 자가 오늘만 사는 자에게 죽는다.’고 말하지만, 현실에서는 ‘상황에 만족하는 자가 만족하지 않는 자에게 죽는다.’ 안토니우스는 3두 정치에 만족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그렇지 않았다. 기원전 36년 그는 레피두스의 군대를 설득해 자기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손발을 제거당한 레피두스는 자연히 3두에서 떨어져나갔고, 남은 두 사람의 경쟁이 더욱 노골화되었다. 하지만 승부의 추는 급속히 기울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동갑내기로 절친한 친구 아그리파(Marcus Vipsanius Agrippa, 기원전 63년경~기원전 12)와 같은 뛰어난 참모들을 거느리고 한창 성장하는 중이었고,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처지에 만족한 데다 파르티아 전쟁에서도 패했던 것이다.
가뜩이나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가서 9개월 동안이나 클레오파트라(cleopatra, 기원전 69∼기원전 30)의 치마폭에서 지냈다. 클레오파트라는 일찍이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추격하면서 이집트에 갔을 때 그의 아이까지 낳은 여인이었다. 안토니우스는 그것마저 옛 상관을 본받으려 했던 걸까?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 머물러 있는 것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좋은 기회였다. 아직 미정복지로 남아 있던 이집트를 향해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고(당시 이집트는 사실상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형식적으로는 속주가 아니었다), 여기서 승리하면 안토니우스는 저절로 제거될 것이었다.
기원전 31년 가을에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함대와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의 연합함대는 그리스 부근의 악티움에서 해전으로 맞섰다. 교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클레오파트라는 뱃머리를 돌려 달아났고, 안토니우스는 그녀를 뒤쫓아가 그 배에 올랐다. 지휘관이 없는 전투의 승패는 뻔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별다른 접전 없이 안토니우스 군대의 투항을 받아들여 악티움 해전을 승리로 끝냈다.
이듬해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까지 추격해왔다는 소식을 들은 안토니우스는 자살로 영욕에 찬 삶을 마감했다. 클레오파트라도 며칠 뒤에 연인의 뒤를 따랐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으로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대가 끊겼다. 역사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그것으로 수천 년에 이르는 이집트 왕국의 역사도 끝났다는 사실이다. 메네스 왕이 첫 이집트 왕국을 세운 이래(32쪽 참조) 3000년이 조금 넘는 시점이었다.
인용
연표: 선사~삼국시대
연표: 남북국 ~ 고려
연표: 조선 건국~임진왜란
연표: 임진왜란~조선 말기
연표: 대한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