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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서양사 목차 남경태 연표 선사 ~ 위만조선 삼국건국 ~ 신라통일 남북국 고려 조선 건국~연산군 중종~임란 발발 임란~정조 순조~조선 말기 대한제국~현대사 왕가의 기원 서유럽 왕가의 기원 합스부르크와 서유럽 왕가 책 머리에 2009년 통속적인 역사책에 싫증을 느낀 독자에게 2014년 지은이의 향기가 나는 종횡무진 시리즈가 되기를 바라며 프롤로그: 끊임없이 중심을 이동하며 꽃피운 서양 문명 1부 씨앗 1장 두 차례의 혁명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 강에서 일어난 사람들 2장 충돌하는 두 문명 신국의 역사 초승달의 양 끝이 만났을 때 최초의 국제사회 아리아인의 등장 3장 새로운 판 짜기 수수께끼의 해적들 서양의 문자를 만든 페니키아 서양의 종교를 만든 헤브라이 4장 통일, 그리고 중심이동 고대의 군국주의 ..
합스부르크와 서유럽 왕가 위 그림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중심으로 15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약 300년 동안 복잡한 혼맥을 통해 형성되는 서유럽 왕가를 보여준다.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를 비롯해 에스파냐(합스부르크, 부르봉), 영국(튜더, 스튜어트), 프랑스(부르봉)의 여러 왕실이 어지러이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자신의 통혼으로 부르고뉴와 밀라노 일대의 북이탈리아를 손에 넣었으며, 이사벨 부부는 에스파냐를 통합했다. 이 결과를 송두리째 상속받은 사람이 바로 카를 5세다. 그러나 그는 당대에만 합스부르크 제국을 유지했고, 결국 동생(페르디난트 1세)에게 오스트리아를, 아들(벨리페 2세)에게 에스파냐를 물려주고 물러난다. 한편 이사벨 부부의 또 다른 딸 캐서린은 영국..
에필로그 서양 문명의 전 지구적 이동, ‘글로벌 문명’ 다음은 ‘로컬 문명’으로 1. 명령과 계약 서양사의 길고 거친 탐색이 끝났다. 보통 서양사라고 하면 제2차 세계대전으로 끝나고, 그다음은 역사라기보다 시사에 속한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이르는 시대, 즉 현대는 적어도 앞으로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역사로 분류될 것이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는 서양이나 동양이라는 지역의 역사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세계사가 된다. 서양사와 동양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시대는 지났고, 이제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가 전개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의 맨 끝장(7장)에서는 전후 지금까지 세계사의 과정을 간략하게 정리했다. 1만 년에 달하는 장구한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압축했으니 아무래도 거칠 수밖에 없다. 역사 읽기를 ..
미국의 지위와 역할 숲의 호랑이가 두 마리였다가 한 마리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남은 한 마리가 숲의 단독 주인이 되어 모든 동물을 지배할 것이다. 미국산 호랑이도 바로 그렇게 하려 했다. 이제는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숲 전체를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고 모든 신민 위에서 군림하려 했다. 1991년 미국에서 멀고 먼 쿠웨이트와 이라크의 해묵은 영토 분쟁에 끼어든 게 그 예다. 이 문제의 뿌리는 30년 전인 1961년 쿠웨이트가 독립하면서부터 생겨난 것이었으니 새삼스러운 사태가 아니었다. 1980년대에 8년에 걸친 이란-이라크 전쟁에도 공식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던 미국이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사태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선 것은 서아시아의 석유 이권을 노린 경제적 이유만 있는 게 아니라 냉전 ..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1917년 레닌이 위로부터의 혁명을 통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 것은 사회주의의 실현인 동시에 변질이었다. 사회주의 이론을 구성한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분명히 자본주의 사회의 ‘태내에서’ 생겨나야 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한 사회에서 그 생산력을 감당하지 못해 자본주의가 자동 붕괴하고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생산양식으로 이행해야 했다. 그 계기가 사회혁명의 형태를 취할 수는 있지만 경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인위적인 혁명이 될 수 없었다【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특정한 발전 단계에 이르면 기존의 생산 관계, 또는 이전까지 적합했던 소유관계와 갈등을 빚게 된다.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힘이었..
다원화를 향한 추세 냉전 체제는 과도적일 수밖에 없었다. 30년 전쟁 이후 유럽의 역사, 나아가 전 세계 역사의 큰 흐름은 다원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한 차례의 국제전이 끝나면 신흥국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전통을 가진 유럽 세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수천 년의 중앙집권적 제국사를 전개해온 중국 사회에서도 근대에 접어들어 사회 계층의 분화가 뚜렷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 체제는 다원화의 무의식적 흐름을 의식적으로 단순화시키려는 노력이었으나 이런 상태가 영구히 지속될 수는 없었다. 우선 체제는 양대 진영으로 단순해졌어도 국가의 수는 급증했다. 전체가 유럽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에서는 리비아(1951)가 이탈리아로부터, 수단(1956)이 영국으로부터, 콩고(1960)와 알제리(1962)가 프랑스로부..
체제 모순이 낳은 대리전 첫째, 앞으로 유럽 세계에는 국제전이 없을 것이다. 둘째, 전 세계적으로 자유주의 -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 공산주의 진영의 두 체제가 치열한 경쟁을 시작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조합하면 답은 하나다. 즉 이제부터는 유럽 지역이 아닌 곳에서 유럽 세계의 체제 모순이 대리전 혹은 국지전의 양상으로 표출될 것이다. 그렇게 보면 한국전쟁은 세계사적 필연성의 소산이다. 당한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하필 한반도에서 그런 전쟁이 터졌다는 게 억울하지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당시 체제 대립을 국지전으로 표출할 만한 ‘마당’은 한반도 이외에 없었다. 우선 유럽은 제외해야 했고,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도 소련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으므로 열외다. 남은 곳은 서아시아와 동북아시아인데, 실은 서아시..
7장 유럽을 벗어난 유럽 문명 전혀 다른 전후 처리 제2차 세계대전이 수백 년간 유럽 세계를 뒤흔든 전쟁들의 종착역이라는 점은 종전 직후부터 드러났다. 무엇보다 전후 처리가 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17세기 초의 30년 전쟁부터 20세기 초의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3세기 동안 서유럽 각국은 치열한 영토 전쟁을 벌인 뒤 매번 그 결과를 조약으로 수렴하고 새 체제를 수립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전개해왔다. 30년 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을,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은 위트레흐트 조약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엑스라샤펠 조약을, 7년 전쟁은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을, 나폴레옹 전쟁은 빈 회의를, 제1차 세계대전은 베르사유 조약을 낳았고, 이 조약들에 따라 새로운 국제 질서가 성립되는 게 유럽 근대사의 기..
항구적인 국제 질서의 수립 20여 년 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유럽 세계는 사상 처음 겪은 엄청난 전쟁의 규모에 경악했다. 또 그런 만큼 이것으로 전쟁은 끝인 줄 알았다. 이보다 더 큰 전쟁은 없으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한 번만으로 족할 줄 알았던 세계대전은 겨우 20년 뒤에, 그것도 더욱 큰 규모로 터져 나왔다(사망자의 수만 해도 제1차 세계대전의 두 배가 넘었다). 그제야 세계는 얼마든지 더 큰 전쟁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또 그럴 경우 세계는 공멸하리라는 것도 실감했다. 유럽인들은 중세에 대규모 전쟁이 없었던 이유를 새삼 생각해 보았다(십자군 전쟁이야 오래 질질 끌었을 뿐이지 대전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중세가 끝나고 근대에 들어온 뒤부터 대형 국제전들이 연이어 벌어..
변수는 미국 처칠 내각이 성립한 바로 그날(1940년 5월 10일)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본격적인 작전을 개시했다. 공군과의 긴밀한 공조 체제로 작전을 수행하는 독일의 막강한 기계화 부대는 손쉽게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장악하고 프랑스 국경에 다가섰다. 그러나 코앞에까지 접근한 독일군을 두고도 영국과 프랑스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프랑스가 믿은 것은 육군장관 앙드레 마지노의 건의에 따라 1938년에 완공한 마지노선이었다. 독일과의 접경지대를 따라 두꺼운 콘크리트로 벽을 만들고 중화력을 구비하고 공기 조절 장치와 주거 시설, 휴게 시설, 보급 창고까지 갖춘 마지노선, 그러나 이 완벽한 요새에 대한 독일의 대응 방식은 지극히 단순하고도 효과적이었다. 강하면 피하라. 독일군은 마지노선을 굳이 정면 돌..
준비된 전쟁 국제 파시즘의 위협은 생각보다 빨리 모습을 드러냈다. 에스파냐에 파시즘 정권을 세운 것으로 자신감을 얻은 ‘파시즘의 총수’ 히틀러는 더 이상 일정을 늦출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불과 20여년 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작성된 모든 기록을 깨고 전쟁에 관한 새로운 신기록들을 세우게 될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은 이렇게 올랐다. 같은 세계대전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제1차 세계대전과 성격이 달랐다. 제1차 세계대전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들이 선진 제국주의 국가들에 도전한 것이고 ‘정상적인 힘의 대결’로 기존의 판도를 깨려 한 것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파시즘이라는 비정상적인 수단을 동원해 국제 역학의 변화를 꾀한 것이었다. 파시즘이 주도했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은 출발점부터 제1차 세계대전과 달랐..
파시즘의 힘 19세기 말 미국에 필리핀과 쿠바를 빼앗긴 뒤 에스파냐에 남은 식민지는 지브롤터 해협 너머 모로코의 해안 지대와 대서양의 몇몇 섬들뿐이었다. 비록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은 이미 오래전에 영국에 넘겨주었지만, 어느새 유럽의 최후진국이 되어버린 에스파냐를 보면 언제 그런 영광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17세기부터 보수와 수구의 대명사가 된 가톨릭은 여전히 에스파냐를 총본산으로 삼고 있었고, 19세기 후반의 ‘공화국 실험’을 진압하면서 실력자로 나선 군부는 기톨릭과 결탁해 에스파냐의 부패를 총지휘하고 있었다. 게다가 에스파냐는 전통적으로 지방색이 강한 탓에 제대로 된 국민국가의 모습조차 취하기 어려웠다(에스파냐 특유의 지역 분리주의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나라가 힘을 잃으면 ..
6장 최후의 국제전 ‘전범’들의 등장 애초부터 큰 힘을 쓰지 못한 베르사유 체제는 대공황을 겪으면서 아예 주저앉아버렸다. 그러나 베르사유 체제로 타격을 받은 나라들은 오스트리아와 동유럽 신생국들만 빼고는 1930년대부터 일제히 약진하기 시작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파시즘 체제로 국내를 안정시킨 뒤 단기간에 상당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런가 하면 파시즘과 대척적인 사회주의도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소련은 신생국답지 않은 노련한 국가 운영을 선보였다. 1921년부터 신경제정책(NEP)을 도입한 소련은 과감히 자본주의적 요소를 배합하고 공업을 육성시켰으며, 농업의 집단화로 농업 생산력에서도 큰 성과를 이루었다. 레닌의 사후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에서 트로츠키를 누르고 승리한 스탈린(losif Stalin..
파시즘이라는 신무기 독일에서 히틀러가 나치에 입당하던 1919년에 이탈리아에서도 새로운 정당과 새로운 지도자가 전 국민의 인기를 모으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파시스트당의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였다. 사회주의 운동을 한 무솔리니는 파시즘(fascism)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공식적으로 표방하면서 모든 이탈리아 국민의 결속을 주장했는데, 파시즘이란 ‘결속’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파쇼(fascio)에서 나왔으니 전혀 이상할 것은 없었다【오늘날 파시즘의 원흉으로 꼽히는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사회주의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게다가 소련식 사회주의가 전체주의적 면모를 보였기 때문에 파시즘과 사회주의가 거의 같은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실상..
암흑의 목요일 19세기에 미국은 지리적인 조건을 십분 활용해, 유럽의 복잡한 정세에는 관여하지 않으면서 산업혁명과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19세기 후반부터 산업혁명은 오히려 영국보다 미국이 주도했다). 말하자면 단물만 빼먹은 셈이다. 그 당분은 미국을 급속도로 살찌웠고, 뒤늦게 나선 식민지 경쟁에서도 미국은 유럽 열강에 결코 뒤지지 않는 성과를 올렸다. 1867년에는 재정난에 빠진 러시아 황실로부터 헐값으로 알래스카를 사들였을 뿐 아니라【264쪽의 주 참조. 그런데 20세기 초에 알래스카와 비슷한 운명을 겪을 뻔한 지역이 있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생겨난 중화민국의 임시대총통 쑨원(孫文, 1866~1925)은 혁명정부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만주를 일본에 팔아넘길 구상을 하고 일본의 가쓰라..
5장 불안의 과도기 평화의 모순 중세 이래 몇 차례 있었던 대규모 국제전에서도 늘 그랬듯이, 유럽 세계의 전쟁은 상대방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을 지향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승부의 윤곽이 뚜렷해지면 전쟁을 끝맺고 타협과 협상을 벌였으며, 그 결과로 조약을 맺어 새로운 질서를 수립했다. 그런 점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도 예외가 아니었다. 패전국이라고 해서 나라가 사라지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모두에게 너무 큰 상처였고,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비극이었다. 그래서 유럽 열강과 미국은 베르사유 체제를 통해 전 세계를 아우르는 국제기구를 탄생시킨다. 바로 국제연맹이다. 하지만 17세기 이래 세기마다 한 차례씩 대규모 국제전이 있었는데 왜 하필 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그런 기구를 만..
최초의 사회주의 권력 차르가 물러나자 일단 러시아의 정권은 의회에 넘겨졌다. 의회는 서둘러 임시정부를 구성해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러시아 민중은 이번 혁명을 12년 전처럼 불발로 끝내려 하지 않았다. 혁명을 완성하려면 혁명정부가 필요하다. 그들은 노동자, 농민, 병사가 함께 참여하는 소비에트(‘평의회’)라는 새로운 권력체를 만들었다. 의회가 구성한 임시정부와 민중이 구성한 소비에트 정부가 공존하게 된 것이다. 1905년의 상황과 달라진 것은 소비에트가 생긴 것만이 아니다. 혁명적 대중 외에 볼셰비키라는 혁명의 지도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스위스에 망명해 있던 볼셰비키의 지도자 레닌은 1917년 4월에 러시아로 귀국하면서 ‘4월 테제’를 통해 “모든 권력을 소비에..
혁명의 러시아 1918년 4월 러시아가 전선에서 발을 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또 전후 연합국이 러시아에 거의 전범처럼 취급하고 특히 가혹하게 나온 데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두 가지 이유는 사실 하나였다. 1917년 10월 러시아는 사회주의혁명을 통해 그전까지의 체제와는 전혀 다른 사회주의 공화국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것은 예전의 러시아 제국이고, 전선에서 철수한 것은 새로 생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즉 소련이니 이렇게 본다면 러시아는 ‘배신자’도 아닌 셈이었다. 국가의 위상으로 따진다면 러시아는 전쟁에서 연합국이 아니라 동맹국 측이어야 했다. 러시아 제국은 영국과 프랑스처럼 선진 제국주의 국가도 아니고 서유럽 국가도 아닌, 후발 제국주의 국가에다 슬라브족..
다시 온 수습의 계절 19세기 후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세계 분할이 완료되면서 제국주의 세계 질서가 일단 완성되었다. 어지러운 유럽의 국제 정세는 대립하는 두 개의 축으로 단순화되었다. 남은 것은 전쟁이든 외교든 양측의 이해관계를 정산하는 절차였다. 여기서 현실의 역사는 전쟁을 택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제1차 세계대전은 양대 제국주의 세력이 맞붙은 전형적인 제국주의 전쟁이었으며, 제국주의 질서의 완료이자 새로운 재편을 향한 진통이었다. 이 전쟁에서 기득권층은 신흥 세력을 누르고 전후 질서를 재편하는 권한을 갖게 된 것이다. 17세기 초 30년 전쟁이 끝난 뒤 참전국들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후 질서를 수립했고, 18세기 초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뒤에는 위트레흐트..
신구 열강의 대결 전선은 예상한 것처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한 동맹국으로 갈렸다. 그러나 개전 초기부터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은 한편으로는 명분을 쌓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세력을 늘리기 위해 각자 중립국들을 영입하려는 활발한 외교전을 병행했다. 그 결과로 일본이 연합국 측으로 (‘체질상’으로 일본은 동맹국에 속해야 하지만 영일동맹 때문에 본색을 숨겼다),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측으로 참전했고, 이듬해인 1915년에는 이탈리아가 삼국동맹을 배반하고 연합국으로 참전했으며【이탈리아는 삼국동맹 소속이지만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의 여섯 나라 가운데 국력에서나 군사력에서 가장 약했으므로 어느 쪽으로 가도 별 의미는 없었다. 그러나 전쟁과 더불어 전개된 어지러운 외교전에서 이탈리아의 거취가 가지는..
4장 큰 전쟁과 큰 혁명 최초의 세계대전 빌헬름 2세는 초조했다. 아프리카에서 독일은 아무리 애를 써도 영국과 프랑스가 쳐놓은 두터운 그물을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오스만에까지 접근했다. 오스만의 수도인 이스탄불과 멀리 바그다드를 잇는 철도 부설권을 따내 바그다드에서 베를린까지 연결하려는 계획이었다. 이스탄불의 옛 명칭은 비잔티움이었으므로 이른바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의 3B 정책이었으나, 이것은 케이프(남아프리카)-카이로(이집트)-캘커타(인도)를 잇는 영국의 더 넓은 3C 정책에 가로막혔다【아프리카 분할이 거의 완료된 시점에 뒤늦게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탓에 독일은 굶주린 이리처럼 저돌적이었다. 태평양의 작은 섬들마저 허겁지겁 먹어치운 데서도 알 수 있지만, 독일의 허기가 더 극명하게 드..
태풍의 눈이 된 독일 제국주의 열강의 아프리카 쟁탈전을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그들은 어떻게 정복지를 식민지로 만들었을까? 유럽이 해외 진출을 처음 시작했던 15세기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어 타협을 이루었고 그 타협을 주재한 사람은 로마 교황이었다(28~29쪽 참조). 이제 그런 주재자가 사라진 상황에서 열강은 어떻게 서로의 식민지를 승인하고 타협을 이루었을까? 더구나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에서는 전쟁을 불사했으면서도 묘하게도 그 다툼을 유럽으로 연장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모처럼 짜놓은 유럽의 판도를 깨지는 않은 것이다. 전쟁과 타협이 어우러지는 이런 고도의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축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비스마르크가 식민지 개척에 열성을 보이지 않은 이유는 또 한..
세계 지배에 나선 제국주의 유럽의 판도가 정해지고 유럽에서 더 이상 영토 분쟁의 여지가 없어졌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이제부터 유럽 국가들이 유럽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영토를 놓고 다투리라는 것을 예고한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그전부터 해외 식민지 개척에 분주했던 유럽 각국은 유럽의 국제 질서가 잡히자 1870년대부터 곧바로 식민지 쟁탈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전쟁’에 유럽의 모든 나라가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항구가 없는 지리적 여건상 해외 진출이 불가능할뿐더러 전통적으로 공을 들인 곳이 동유럽이었으므로 해외 진출에 나설 의지도 약했다. 또 러시아는 유럽에서 항구를 얻겠다는 생각을 포기했고, 스칸디나비아와 에스파냐 역시 해외 진출에 나설 힘이 부족했다. ..
3장 제국 없는 제국주의 폭풍 전야의 유럽 독일과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룸으로써 유럽의 판도는 다 짜였다. 이는 다시 말해 유럽 내에서는 이제 영토 분쟁의 여지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럼 1870년대의 시점에서 유럽 각국의 위상을 간단히 정리해두는 게 좋겠다. 이 무렵이면 이미 오늘날 유럽의 구도가 거의 다 드러나 있다. 우선 영국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명실상부한 유럽 최강국이자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리더의 지위에 올랐으면서도 영국은 유럽의 국제 질서에 대한 조정자의 역할을 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이다. 영국은 19세기 후반 대륙에서 어지러이 펼쳐지는 외교전 - 비스마르크가 항상 그 중심에 있었기에 이것을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부른다 - 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통일에 몸 바친 두 사람 프랑스 - 프로이센 전쟁으로 독일이 통일을 이루면서 대륙 중심부의 국제 질서는 다시금 안정을 찾았다. 프랑스는 패전의 충격으로, 또 독일은 ‘신생국’에 따르게 마련인 혼란으로 내부가 불안정했지만, 적어도 전쟁으로 비화할 만한 국제적 분쟁거리는 사라졌다. 이제 교통정리가 필요한 곳은 르네상스 이후 내내 몰락의 길을 걸으면서 서유럽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전락한 이탈리아다. 빈 회의의 결과로 오스트리아의 지배가 복귀하면서 이탈리아는 예전처럼 다시 오스트리아의 세력권인 북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왕국이 들어서 있는 남이탈리아로 나뉘었다(중부에는 여전히 교황령이 있었으나 교황의 권력과 더불어 추락해 약간의 영토만 남아 있을 뿐 현실적인 영향력은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외국의 지배를 ..
대륙의 서열 짓기 대내 안정과 대외 팽창이 순조롭게 연결된 영국과 달리 대륙에서는 여전히 진통이 계속되었다. 독일과 프랑스는 똑같이 1848년의 혁명을 겪었다. 두 나라는 혁명이 실패했으나 그로 인해 지배층이 자유주의 개혁의 숙제를 떠안게 된 것도 똑같았다. 그러나 그 뒤의 사정은 서로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 이후 100년 동안, 나아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독일과 프랑스의 특성은 바로 그 무렵에 뚜렷이 나타난다. 단적으로 말해 두 나라의 차이는 자유주의 세력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원래부터 힘이 약한 독일의 자유주의 세력은 혁명이 실패하자 곧바로 몰락했고, 자유주의 개혁의 총대는 자연스럽게 프로이센 정부가 매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바치는 제관을 거절했지만, 두 가지 ..
2장 완성된 유럽 세계 드러나지 않은 제국 빈 체제 하에서 유럽의 낡은 중심인 오스트리아가 무너지는 동안, 프랑스와 독일이 시민혁명의 혼돈을 겪고 있는 동안, 러시아와 미국이 명암을 달리하면서도 각기 세계열강의 대열에 끼려 애쓸 무렵, 유달리 잠잠한 나라가 하나 있었다. 바로 영국이었다. 17세기에 일찌감치 시민혁명의 홍역을 치른 영국은 18세기에 여러 차례 벌어진 프랑스와의 맞대결에서 승리한 뒤 가장 먼저 산업혁명의 불꽃을 피워 올리고, 19세기부터는 복잡한 대륙의 정세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고독한 질주를 계속하고 있었다【만약 섬이라는 조건이 아니었다면 17세기 영국의 시민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18세기 초 막강한 프랑스를 물리칠 수 있었을까, 에스파냐에 뒤이어 전 세계에 식민지들을 거느릴 ..
변방의 성장: 미국 러시아의 알렉산드르가 농노 해방령을 내린 1861년에 멀리 대서양 서쪽에서도 노예해방 문제가 첨예한 정치적 문제로 제기되었다. 노예해방을 내세우는 북부 출신의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지배에서 독립한 뒤 미국의 역사는 마치 유럽의 근대사를 압축해놓은 것 같은 진행을 보인다. 독립을 이룬 미국은 이제 유럽 각국과 동등한 선상에서 근대국가로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독립전쟁은 유럽 각국이 근대국가로 전환하는 계기를 제공한 종교전쟁과 같은 역사적 위상을 가진다. 하지만 유럽에서 종교전쟁은 각개약진을 위한 출발점을 제공했을 뿐이고 본격적인 국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나폴레옹 전쟁이 ..
변방의 성장: 러시아 러시아 지식인들이 새로운 이념인 사회주의 사상을 특히 환영한 데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유럽 각국이 활발하게 국민국가 체제를 완성해가던 19세기 초반에도 러시아는 여전히 유럽의 후진국을 면치 못했다. 무엇보다 제국이라는 낡은 체제【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이 무너진 뒤 유럽 세계에서 제국은 오스만과 러시아 둘뿐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둘 다 후진국이었다. 이제 제국은 시대착오적이고 낡은 체제임이 명백해졌다. 이 점은 제국 체제가 수천 년간 존속해온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청 제국은 18세기 말부터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19세기 초반부터는 서양 세력의 본격적인 침탈을 받게 되었다】에다 여전히 중세적 신분제가 존속하고 있었다(농노제가 그 대표적인 예다), 워낙 덩치가..
공산주의 이념의 탄생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 그랬듯이, 또 1830년의 7월 혁명이 그랬듯이, 1848년 2월 혁명도 프랑스보다는 인접한 이웃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번에 혁명이 수출된 곳은 독일이다. 빈 체제가 들어선 이래 오스트리아가 힘에도 부치는 유럽 세계의 조정자 노릇을 하고 있는 동안, 프로이센은 착실히 영토와 세력을 확장해 남독일까지 아우르면서 명실상부한 독일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었다【남독일은 원래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이었으므로 전통적으로 프로이센보다는 오스트리아에 더 가까웠다. 흥미로운 것은 오스트리아가 독일 지역보다 중부 유럽의 헝가리와 보헤미아에 더 애착을 보였다는 점이다. 당시 유럽 세계의 변화를 조금이라도 읽는다면 주된 ‘투자 지역’은 그쪽이 아니라 북쪽의 독일이라는 것을 쉽..
다시 온 혁명의 시대 라틴아메리카와 그리스의 독립은 빈 체제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아직은 변방의 사건들이었으므로 빈 체제를 끝장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변방의 바람은 곧이어 중심에도 밀어닥쳤다. 그 무대는 또다시 프랑스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프랑스에는 부르봉 왕조가 복귀했다. 처형된 루이 16세의 동생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 18세(1755~1824, 재위 1814~1824)는 새로 헌법을 제정해 프랑스의 주권은 국왕에게 있음을 천명했다. 그러나 혁명은 무너졌어도 혁명이 이룬 변화는 망각되지 않았다. 새 헌법은 개인의 권리와 평등권, 재산권 등 혁명의 이념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 의회를 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이 자신은 개인적으로 현명한 왕이었고 정치적으로 중립을 취하려 했으나, 혁명..
200년 만의 외교 나폴레옹 전쟁을 끝낸 1814년 9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는 새로운 국제 질서를 모색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실로 오랜만의 외교 테이블이었다.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 이래로 이렇게 대규모의 국제회의는 처음이었으니까. 그때와 마찬가지로 큰 전쟁이 끝났으니 당연히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있어야 했다. 전후 질서와 논공행상, 그것이 빈 회의의 주된 목적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초 유럽의 상황은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었던 17세기 중반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영토 국가의 초창기였던 170년 전에는 일찍 영토의 중요성을 깨우친 나라들이 패전국들의 영토를 적당히 나누어 먹는 식으로 쉽게 합의를 볼 수 있었으나, 이제는 영토 문제라면 유럽의 어느 나라나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판이었으..
1장 각개약진의 시대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 17세기 초 30년 전쟁 이래 나폴레옹 전쟁에 이르기까지 200년에 걸친 전란의 시대는 유럽인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오늘날의 유럽 세계를 탄생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진통 없이 새 생명을 얻을 수 없듯이, 유럽이 중세의 오랜 틀을 깨고 진정한 ‘르네상스’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희생이 필요했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역사에도 고통과 고난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시기 유럽의 진통은 유례없이 길고 고통스러웠다. 어쨌든 유럽인들은 고통의 대가를 얻었다. 이 근대 이후 유럽 세계를 휩쓴 전란의 시발점은 16세기 초 종교개혁으로 잡을 수도 있고, 17세기 초 30년 전쟁으로 잡을 수도 있다(후자의 입장을 택할 경우, 16세기의 전란은 종교..
7부 열매② 유럽 세계는 영토 분할이 끝나자 자연히 시선을 바깥으로 향한다. 영국을 비롯해 갓 태어난 유럽의 국민국가들은 활발히 세계 정복에 나선다. 그러나 빵은 제한되어 있고 입은 많다. 뒤늦게 국민국가를 이루고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독일은 자신의 몫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남의 것을 빼앗는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 분할이 완료된 20세기 초반에 독일은 영토 재편을 획책하는데, 그것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이다. 전쟁의 와중에 또 하나의 구체제인 러시아가 제국의 명패를 버리고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로 탈바꿈한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전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시민 사회의 역사가 짧은 독일과 이탈리아는 파시즘이라는 신무기로 무장하고 다시 유럽의 질서에 도전..
유럽 민족주의의 태동 나폴레옹의 시대가 계속되었더라면 혹시 유럽에서도 강력한 중심을 갖춘 동양식 제국이 성립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유럽의 역사에서는 한 나라가 패권을 장악하는 ‘비정상적인 상태’를 오래 용인하지 않는다. 나폴레옹의 몰락은 사실 자초한 측면이 있었다. 1807년 제국의 서쪽 변방에 있는 포르투갈이 봉쇄령을 어기고 영국과 통상을 재개하자 나폴레옹은 단호히 응징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냥 응징으로 그쳤으면 좋았을 텐데, 리스본을 점령한 프랑스군은 내친 김에 에스파냐까지 제압했다. 나폴레옹은 아예 자기 형을 에스파냐 왕으로 갖다 앉혔다. 그런 그의 오만은 예상치 못한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성난 에스파냐 민중이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왕위 계승 전쟁으로 부르봉 왕조가 들어서면서 프랑스 왕실과 한..
유럽의 황제를 향해 통령은 나폴레옹을 포함해 총 세 명이었으나 사실상 나폴레옹이 유일한 통령임은 나머지 두 통령도, 프랑스 국민도, 나아가 유럽 각국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통령이라는 말로 번역하지만 그말은 원래 ‘콘술(consul)’이다. 그런데 콘술이라면 로마 공화정 시대에 있었던 집정관이 아닌가? 실제로 통령정부 치하의 프랑스는 여러모로 로마 공화정 말기와 비슷했다. 콘술만이 아니라 원로원(상원)도 있었다. 자연히 로마의 콘술이었던 카이사르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로마의 콘술이었던 카이사르는 황제를 꿈꾸다가 실패했으나 나폴레옹은 끝내 그 꿈을 이루었다. 황제가 되기 위한 단계로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을 거쳤듯이, 1802년 나폴레옹은 헌법을 개정해 종신 통령이 되었다(그와 함..
죽 쒀서 개 준 혁명 당시 로베스피에르가 취했어야 할 최선의 방책은 공포 체제를 완화하는 것이었다. 혁명정부의 집권은 확고해졌고, 프랑스는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나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든 시점이었다. 최선이 안 된다면 차선의 방책은 혁명 지도부의 통합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있을 수 있는 내부 논쟁을 허용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정치력이 필요했다. 로베스피에르기는 판단 실수로 최선의 방책을 놓쳤고, 능력 부족으로 차선의 방책을 놓쳤다. 그 결과는 그 개인으로서도, 프랑스 전체로서도 최악이었다. 1794년 7월 27일,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에서 연설하려던 순간 ‘독재 타도’를 외치는 의원들에 의해 전격적으로 체포되었다. 그 날짜를 공화력으로 치면 공화력 2년 ‘열(熱)의 달’, 즉..
국제전으로 번진 혁명전쟁 자코뱅의 목적은 이중적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외국의 간섭을 차단하는 게 목적이고, 대내적으로는 왕과 왕당파의 기를 꺾겠다는 것이었다(대내적인 목적을 더 중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영국에 연전연패한 프랑스 군대는 너무 무기력했다(한때 혁명의 지도자였던 라파예트는 오스트리아에 투항함으로써 혁명의 대열에서 완전히 이탈했다). 먼저 선전포고를 한 것이 머쓱할 만큼 프랑스군은 패전을 거듭했다. 게다가 군사 강국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하고 나섰다. 혁명의 위기이자 프랑스 전체의 위기였다. 자코뱅은 전국에서 의용군을 모집했다. 이미 ‘혁명의 맛’을 본 프랑스 국민들은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호소에 적극 호응해 속속 파리로 모여들었다【‘조국’이라는 말에서 당시 유럽..
혁명은 전쟁을 부르고 혁명의 초기에서 가장 균형 잡힌 사고를 한 지도자는 라파예트(L. Fayette, 1757~1834)일 것이다. 그는 일찍이 미국의 독립전쟁에서도 공을 세워 미국과 프랑스에서 두루 인기와 명성이 높았으며, 인권선언의 작성을 담당한 혁명의 주역이었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침착하게 혁명을 주도한 그는, 당시 국민의회가 채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제도는 입헌군주제라고 생각했다. 그의 주장이 반영되어 국민의회는 1791년부터 입헌군주제와 단원제를 골간으로 하는 프랑스 최초의 헌법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들어갔다. 헌법이 제정되면 국민의회는 이룰 것을 다 이루는 셈이다. 그럼 혁명은 완성되는 걸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혁명과 같은 매머드급 태풍이 일어나면 혁명 세력..
평민들의 세상 미국의 독립은 영국의 패권 전략을 저지했다는 점에서 프랑스의 왕실에 기쁨을 주었지만, 그 때문에 가뜩이나 좋지 않던 왕실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유럽도 아닌 아메리카 영국 식민지의 독립 전쟁까지 지원하느라 프랑스의 국고는 텅 비었다.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견디다 못한 루이 16세는 마침내 1789년에 삼부회를 소집했다. 재정난에 시달리는 왕실이 의회를 소집하는 것은 어딘가 낯익은 전술이다. 삼부회는 명색이 의회지만 1614년 루이 13세의 섭정인 마리가 소집한 이후 한 번도 소집한 적이 없었으니 (123쪽 참조) 무려 175년만의 재소집이었다. ‘바로 전의 삼부회’가 소집된 때는 프랑스가 잘나가던 무렵으로 리슐리외라는 유능한 재상을 얻었으나, 이번 삼부회는 오히려 1628년 영국의 찰스..
5장 근대의 완성 중심에서 부는 변화의 바람 변혁의 세기인 18세기에 프랑스의 추락은 역력했다. 세기 벽두에 에스파냐 왕위를 놓고 겨루었다가 그 왕위만 얻고 다른 모든 것을 잃은 프랑스는 이후 거듭된 전쟁에서도 좀처럼 형세를 만회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서유럽 국가가 아닌 ‘준’ 이교도국 러시아와도 동맹을 맺으며 애썼으나 별무신통이었다. 결국 신흥국 프로이센에마저 추월할 지경에 이르렀고, 영국과 한 세기에 걸쳐 인도와 아메리카에서 맞붙은 결과 모두 패배했다. 이제 프랑스는 이류 국가로 전락했다. 비록 미국의 독립을 지원함으로써 영국에 다소나마 앙갚음을 했지만, 중세 내내, 그리고 근대의 문턱에서도 서유럽의 선두 주자이자 터줏대감이던 프랑스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사실 프랑스가 추락..
집안의 호랑이 7유럽의 지배자들만 영토 국가의 개념을 굳게 다진 것은 아니었다. 유럽에서 폴란드가 사라질 즈음, 신대륙 아메리카에서는 한 나라가 생겨났다. 바로 미국이었다. 7년 전쟁에서 영국이 프로이센의 편을 든 이유는 오로지 프랑스가 개입했기 때문이고, 프랑스의 개입을 저지한 이유는 오로지 아메리카에서 프랑스를 확실히 누르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래서 영국은 전쟁 기간 중 유럽에서는 체면치레만 하고 유럽을 제외한 세계 각지에서 프랑스와 적극적으로 싸웠다. 그 성과가 바로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를 누르고 동양 최대의 식민지인 인도를 완전히 손에 넣은 것이었고, 신대륙에서 프랑스를 확실히 따돌리고 패권을 차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도의 경우는 100점짜리였으나 아메리카의 경우는 0점짜리였다. ..
‘제3세계’의 변화 7년 전쟁은 불과 몇 년 전에 끝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완결지은 것이지만 그 전쟁과는 디른 측면이 있었다. 무엇보다 큰 차이는 참가 선수가 늘어났다는 것, 그중에서도 러시아가 중세 이후 처음으로 서유럽의 역사에 끼어들었다는 점이다. 15세기 말 모스크바 공국이 정치적·종교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한 이후(1권 457~458쪽 참조) 러시아는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나라들과 관계(주로 전쟁)를 맺었을 뿐 서유럽의 국제 질서에 뛰어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실 러시아는 서유럽의 어느 국가보다 먼저 중앙집권과 근대 국가 체제를 이루었다. 비잔티움 제국을 모델로 삼았으니 중앙집권이야 원래부터 당연한 것이었고, 서유럽의 프랑스가 위그노 전쟁에 휘말려 있던 16세기 후반 이..
떠오르는 프로이센 위트레흐트 조약에는 워낙 큰 규모의 영토 분할이 많았던 탓에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사항도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국이었던 프로이센이 왕국으로 승인된 것이다. 1701년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 Friedrich I(1657~1713, 재위 1701~1713)는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었다. 강적 프랑스를 맞이해 조금의 도움이라도 절실한 연합국 측은 당시 프로이센 ‘선제후’를 프로이센 ‘왕’으로 격상시켜주었다(사실 그전부터 제후국이라기보다는 독립국이었으므로 내용상으로는 달라진 게 없다). 그러나 얼마 뒤에 벌어질 사태를 미리 알았더라면 제후의 독립을 승인한 오스트리아 황제는 무덤 속에서도 땅을 치고 후회하지 않았을까? 새 나라의 기틀을 놓은 것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
추락하는 프랑스 최대의 번영 속에서 최악의 실정을 거듭한 펠리페 2세 이후 17세기의 100년 동안 에스파냐는 계속 몰락했다. 펠리페 3세 때는 네덜란드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고, 펠리페 4세 때는 포르투갈이 독립하고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네덜란드의 독립도 확정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일한 업적이라면 오로지 대를 이어왔다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펠리페 4세의 아들 카를로스 2세(Carlos Ⅱ, 1661~1700, 재위 1665~1700) 때는 그 유일한 업적마저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결혼에 재혼까지 했는데도 후사가 없었다. 재산도 잃은 판에 혈통도 끊어질 처지, 합스부르크 가문은 최대의 시련을 맞았다. 망해도 3년은 가는 게 부자라면, 합스부르크 가문은 망해도 300년은 갈 터였다. 비록 보헤미..
4장 변혁의 18세기 제국의 꿈 일찌감치 영토 국가의 관념을 깨우친 덕분에 프랑스는 30년 전쟁에서 최대의 성과를 거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리슐리외가 사실상 전권을 지배한 루이 13세 치하처럼 ‘총리의 시대’가 계속되었더라면 혹시 모르겠지만, ‘나라의 주인’인 국왕이 직접 나선다면 사태는 달라질 터였다. 과연 절대왕권이 완전히 뿌리를 내린 상황에 걸맞은 절대군주가 탄생했다. 그는 후대에 ‘태양왕’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루이 14세(1638~1715, 재위 1643~1715)다. 30년 전쟁의 후반부를 배후 조종한 리슐리외는 1642년에 죽어 6년 뒤에 벌어진 베스트팔렌 논공행상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그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한 루이 13세도 그 ..
세계 정복을 향해 영국이라는 튼튼한 계승자가 있었기에 에스파냐가 몰락해도 서유럽 문명의 세계 진출은 위축되기는커녕 그 반대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하지만 영국보다 먼저 그 바통을 이어 받은 것은 네덜란드였다. 영국이 엘리자베스 시대의 번영을 이어가지 못하고 내전의 도가니에 휘말려 있는 동안,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에서 독립해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순식간에 최대의 무역국으로 급성장했다. 플랑드르 시절부터 중개무역에는 일가견이 있는 데다 모직물 산업과 조선업의 발전까지 등에 업은 네덜란드의 무역은 말 그대로 ‘무역풍에 돛단 격’이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피땀 흘려 닦아놓은 대서양 항로에는 점차 네덜란드의 상선들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항로에는 원래 임자가 없는 데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이베리아의 항로 독점..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바람 그런데 중상주의에는 문제가 있다. 우선 보호관세가 제 구실을 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게 있다. 그것은 바로 국내 산업이다. 수출할 물건이 없는데 수출에 집중할 수는 없다. 따라서 국내에 어느 정도의 산업 기반이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처음에는 에스파냐를 본받아 상업과 무역에만 관심을 가졌던 각국은 점차 산업과 공업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자 중세 말기부터 번영하기 시작한 자치도시들에 새삼 눈길이 갔다. 사실 중상주의는 13세기 자치도시의 상인들이 이미 실험했다가 역시 마찬가지 문제점을 느끼고 포기한 정책이었다(물론 그때는 국가라는 강력한 정치체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상업과 무역은 잘하면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보면 물자를 유통시키는 것일 뿐 생산과는 무..
3장 자본주의의 출범 국부의 탄생 유럽의 17세기 전반부는 역사상 유례없는 전란의 시대였다. 대륙에서는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30년 전쟁이 일어났고, 영국에서는 왕과 의회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무수한 사람이 죽고 많은 도시가 파괴되었으며, 각국의 정치와 사회는 지극히 혼란스러웠다. 문명의 종말인가? 물론 지금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유럽 문명은 종말을 맞기는커녕 이후 더욱 성장하고 더욱 힘을 키워 나중에는 세계 정복에 성공하니까. 그럼 그 죽음과 파괴, 혼란은 어떤 의미였을까?? 배고프면 단결하지만 배부르면 분열하게 마련이다. 빵 덩어리가 작을 때는 그것을 키우기 위해 힘을 합치지만 먹을 만큼 커지면 거기서 각자 제 몫을 더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17세기 전반의 유럽이..
근대의 문턱에 들다 한바탕 홍역을 치렀으니, 하마터면 영원히 잃을 뻔한 왕위를 되찾은 찰스 2세(1630~1685, 재위 1660~1685)나 ‘근본도 없는 왕조’를 섬기게 될 뻔한 의회 측이나 피차 조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아직 영국의 왕과 의회는 합일을 이루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양측은 완만하지만 확고하게 각자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나갔다. 찰스는 국교회를 강화하기 위해 총교적으로 신교보다 더 가까운 가톨릭을 중흥시켰고, 그 일환으로 프랑스의 루이 14세와도 친교를 맺었다(나중에 보겠지만 프랑스는 30년 전쟁 이후 다시 가톨릭으로 되돌아왔다). 또 의회는 최초로 여당과 야당의 구분이 생겨났다. 여당인 토리당은 예전의 왕당파였고, 야당인 휘그당은 예전의 의회파였으니 성..
크롬웰 왕조 찰스 1세는 의회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겠다는 자세였으나 의회의 태도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경했다. 의회는 왕이 자의적으로 행사하던 사법권과 종교재판권을 제한했고, 두 명의 흉적, 로드와 스트래퍼드를 처단하라고 요구했다. 어쩔 수 없이 찰스는 전횡의 도구였던 성실법원(星室法院, Star Chamber)【튜더 왕조의 개창자로 왕권 강화에 힘쓴 헨리 7세는 웨스트민스터 궁전 내에 특별 법정을 만들어 운영했다(‘성실’이란 이름은 이 방의 천장에 별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의 법체계는 대륙보다 크게 뒤떨어져 있어 일종의 관습법인 코먼로(common law)가 지배했으므로 성실법원은 이 결함을 극복하려는 의미가 있었다. 이것은 영국사의 한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성실..
정치와 종교의 도가니 유럽의 정치 지형을 크게 바꾼 30년 전쟁에 영국이 개입하지 못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영국 역시 대륙에 못지않은 복잡한 격변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스파냐 무적함대의 격파로 영국을 새로운 해상 강국으로 만들고, 셰익스피어로 대표되는 ‘영국 르네상스’를 지원한 엘리자베스 1세가 45년을 재위한 끝에 1603년 일흔 살의 나이로 죽자 튜더 왕조는 대가 끊겼다. 젊은 시절 그녀에게는 유럽의 여러 군주가 구혼했지만, 엘리자베스는 오히려 그것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여러 가지 외교적 실익을 얻어냈다【구혼자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다. 통혼 정책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 그는 엘리자베스의 배다른 언니인 메리 1세와 결혼했으면서도 그녀가 죽자 엘리자베스에게 ..
사라진 것과 생겨난 것 한 명의 귀재가 두 명의 영웅을 조종한 30년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났다. 길다고 하면 긴 30년이었으나 전쟁 기간보다도 전쟁의 특징을 더 잘 드러내주는 것은 유럽 최초의 국제전이라는 사실이다. 관련된 나라만 해도 합스부르크 제국의 세습령인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에스파냐, 보헤미아, 헝가리 등 제국의 속국들, 독일의 영방국가들, 여기에 덴마크, 스웨덴, 네덜란드, 프랑스 등 수십 개국에 달했다. 영국을 제외한 서유럽의 모든 나라가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이다. 이전까지 유럽의 역사상 30년 전쟁보다 큰 규모의 전쟁은 있었어도, 유럽 세계가 이처럼 각 나라별로 나뉘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 적은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 문제가 전쟁의 계기였지만..
국제전과 복마전 보헤미아 신교도 귀족들의 노림수는 빗나갔다. 믿었던 프리드리히 5세와 칼뱅파 연합은 막상 뚜껑이 열리고 보니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 독일에서 칼뱅파는 아직 가톨릭은커녕 루터파보다도 세력이 약했다. 게다가 페르디난트는 1619년에 제위도 차지하면서 가톨릭의 새로운 맹주로 떠올랐다. 힘을 얻은 독일의 가톨릭 동맹은 황제와 ‘또 다른 동맹’을 맺었다. 여기에 가톨릭 문제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약방의 감초처럼 끼어드는 에스파냐까지 합세했다. 보헤미아 신교파는 사면초가에 처했다. 결국 1620년 그들은 프라하 부근에서 황제군에게 패배하고 뜻을 접어야 했다. 잠시 그들과 운명이 엮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국외로 도망쳐버렸다. 이로써 반란은 진압되었고 보헤미아는 원래대로 합스부르크의 소유가 되었다..
2장 유럽을 낳은 전쟁 화재를 부른 불씨 절충과 타협은 원래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식이 아니다. 잘되어야 문제를 오래 묶어둘 뿐이고, 잘못되면 문제를 더욱 키우게 된다. 전형적인 절충과 타협이었던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바로 그랬다. 가장 큰 불씨는 바로 루터파에 한해서만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다는 점이다. 보수적인 황제파와 가톨릭 측은 당장 불거진 루터파 영방군주들의 불만을 달래는 방식으로 문제를 덮으려 했으나 그것은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할 문제로 키우는 꼴이 되고 말았다(만약 시대의 추세를 따라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더라면 적어도 종교의 외피를 두른 문제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가톨릭의 반성도 있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루터파를 공인하게 된 것은 가..
종교전쟁의 개막 프랑수아 1세가 신교를 탄압한 것은 가뜩이나 어지러운 서유럽의 종교적 지형을 더욱 큰 혼란에 빠뜨렸다. 그의 아들 앙리 2세(Henri Ⅱ, 1519~1559, 재위 1547~1559)는 모든 면에서 아버지의 유지를 충실히 받들었는데, 특히 신교의 탄압에서는 한술 더 떴다. 사실 그가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맺어 아버지가 남긴 숙제를 해결하고 합스부르크와 타협한 데는 종교적인 이유가 컸다. 스위스에서 칼뱅교도들이 대거 프랑스로 이주하자 그는 대외 전쟁보다 대내의 종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약 체결을 기념하는 마상 경기에서 그만 근위대장이 잘못 던진 창을 맞고 마흔 살의 한창 나이에 죽었다. 그는 자신의 신교 탄압이 복잡한 종교전쟁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
영토 국가의 선두 주자 중세의 해체는 변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서쪽 변방(이베리아)에서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남쪽 변방(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빛나고, 동쪽 변방(독일)에서 종교개혁의 파도가 휩쓰는 동안, 서유럽의 전통적 중심지인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물론 바깥에서 볼 때 그랬다는 이야기다. 원래 변방에서는 변화를 추구하지만 중심에서는 안정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사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가운데서도 프랑스에서는 의연히 중세의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중세의 절정이라면 분권화의 완성? 그렇지는 않다. 분권화가 중세의 커다란 특징인 것은 분명하지만, 유럽 전체를 놓고 볼 때 그런 것이고, 각 지역별로는 중앙집권화를 향한 완만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 중세의 분권화는 원시..
세계 진출의 계승자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긴다.”라고 했던가? 항로 개척을 통해 전 세계로 향하는 문들을 모두 열어놓은 에스파냐가 곰이라면 그것을 바탕으로 네덜란드와 영국은 세계 지배에 나서서 알짜 수익을 거두었다. 원래 일하는 자와 누리는 자가 늘 달랐던 게 인류 역사 아닌가? 아무리 ‘가문의 내력’이라지만 펠리페 2세의 통혼은 정도를 지나친 감이 있었다. 그는 포르투갈 왕녀, 영국 여왕, 프랑스 왕녀, 합스부르크 왕녀와 네 차례나 결혼을 했는데, 이것이 모두 성공했더라면 그의 대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시 부활하는 것은 물론 서유럽 세계는 16세기에 왕실들의 혼맥을 통해 정치적 통합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펠리페가 통혼의 결실을 거둔 것은 포르투갈을 상속받아 합병한 것뿐이었다...
1장 영토와 주권의 의미 누더기 제국 거의 동시에 진행된 르네상스와 항로 개척, 종교개혁을 통해 서유럽 세계는 중세의 흔적을 걷어내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출발선에 서게 되었다. 아직은 다가오지 않았지만, 그 새로운 시대란 곧 서유럽 각국이 근대적인 영토와 주권을 가진 국가로서 발돋움하면서 서로 국력을 키우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는 시대, 지금의 서양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시대를 가리킨다. 그럼 그 이전의 국가들은 그렇지 않았던가? 중세의 국가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영토 국가도, 주권국가도 아니었다. 영토는 있었지만 오늘날과 같이 국경선으로 꼼꼼히 구획된 개념의 영토가 아니라 봉건 영주의 지배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점(點) 개념의 영토였다【이는 일찍부터 선(線) 개념의 영토 국가가 성립한 동양의 ..
6부 열매① 중세적 질서가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는 각개약진밖에 없다. 새로 탄생한 유럽 국가들은 영토와 주권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각인한다. 프랑스와 영국을 선두로 각국은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과 전쟁을 벌인다. 그러나 아직도 중세의 잔재를 버리지 못한 독일은 신성 로마 제국의 명패를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바꾸어 달고 로마 가톨릭이 지배한 좋았던 옛날로 돌아가고자 애쓴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었던 에스파냐는 불운하게도 합스부르크 제국의 본거지가 되면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 한 반면, 영국은 활발한 시민혁명으로 가장 먼저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대외 진출에 나선다. 구체제의 상징이던 프랑스는 뒤늦게 시민혁명을 이루는데, 이 프랑스 혁명은 유럽 전역에 메가톤급 ..
기묘한 종교개혁 대륙을 휩쓴 종교개혁의 바람은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영국을 대륙으로부터 분리하고 있는 것은 강이 아니라 바다이듯이, 영국의 종교개혁은 대륙과 전혀 다르게, 아주 기묘한 동기에서 시작되어 기묘한 과정을 거쳐 기묘한 결과를 낳게 된다. 장미전쟁을 종식시키고 튜더 왕조의 문을 연 헨리 7세는 새 왕조의 개창자라는 자격으로 강력한 왕권을 누렸다(이 때문에 영국에서는 대륙보다 먼저 절대주의가 발달했다). 그가 닦아놓은 기반은 그의 차남으로 왕위를 계승한 헨리 8세(Henry Ⅷ, 1491~1547, 재위 1509~1547)의 시대에 더욱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권력에서는 대륙의 어느 군주도 부럽지 않았던 헨리 8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게 있었다. 바로 아들이었다. 형..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농민전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루터파 군주들은 반루터파 군주들과 약간 다른 행동을 취했다. 혼란의 와중에도 그들은 루터의 가르침대로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교회를 프랑스와 영국에서처럼 국가 체제 안으로 포함시켰다. 때마침 카를 5세가 독일에 없었기 때문에 그 작업은 더 쉬웠다. 카를 5세는 1521년 루터를 추방한 직후 에스파냐로 가서 10년 가까이 지냈던 것이다. 그는 에스파냐 왕의 명함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외가인 에스파냐에 더 애착을 가졌다(그러나 그가 에스파냐에 오래 머문 이유는 당시 오스만 제국이 동방 진출에 나서 오스트리아까지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05쪽 참조). 독일(오스트리아)로 돌아온 카를 5세의 눈에 루터파 영방군주들의 행동이 곱게 보였을 리 만..
루터의 허상과 실상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교황 레오 10세가 발급한 면죄부의 부당성을 폭로하는 95개 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의 문에 내걸었다【당시 비텐베르크 교회의 문은 게시판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니 루터가 그곳에 대자보를 붙인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교황의 면죄부가 독일에서 팔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면죄부는 레오 10세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신축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급한 것이었다. 대성당 신축은 전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계획한 것인데,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건축가인 브라만테가 설계를 맡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독일 종교개혁의 방아쇠를 당겼다고 할 수도 있다. 그 무렵..
독일의 문제 바깥의 비판자를 처형해 급한 불은 껐지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개혁이 필요했다.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한 교황청의 추기경과 수백 명에 이르는 서유럽 각국의 주교, 수도원장, 신학자 들은 교회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수도원 운동이 구해주었던 것을 생각했다. 이제는 재야인 수도원도 ‘제도권’ 못지않게 타락했으니 불가능한 일, 그렇다면 중세에 수도원이 한 역할을 수행할 새로운 개혁 기구가 있어야 한다. 적어도 이런 문제를 놓고 계속 논의할 수만 있다면 어느 정도 개혁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종교회의, 즉 공의회를 상설 기구로 만들어 교회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지는 데 합의를 보았다. 공의회에서 공의회를 상설화하자는 희한한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이 새로운 시도는 ..
3장 종교의 굴레를 벗고 개혁과 비판의 차이 고향에서 추방된 단테가 「신곡」을 쓰고 있을 때, 또한 그의 고향 피렌체에서 조토가 새로운 사실성의 세계를 화폭에 구현하고 있을 때,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로마 교황 보니파키우스를 납치하고 아비뇽에 자기 마음에 맞는 새 교황청을 열었다. 이 아비뇽 사태는 당시 추락 일로에 있던 교황권이 몰락하는 속도를 더욱 가속시켰다. 중세가 출범한 이래 수백 년 동안 중세 사회에 통합성을 부여해온 로마 교황청은 이제 제 한 몸도 추스르지 못할 만큼 약해졌다. 그렇잖아도 교황청의 간섭을 싫어하던 서유럽의 군주들은 이 기회를 틈타 실 끊어진 연처럼 일제히 교황청과의 인연을 끊고자 했다. 프랑스는 교황청을 아예 접수하는 방법을 구사했고, 영국은 적국인 프랑스의 교황청을 거부하..
인간 정신의 깨어남 르네상스라고 하면 미술을 맨 먼저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네상스가 인류 역사, 특히 서양의 역사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학문 분야였다. 미술처럼 화려한 조명을 받지는 못했어도 르네상스 시기 학문적 사고의 변화는 이후 수백 년 동안 서양 문명이 발달하고 마침내 전 세계의 패자가 되는 데 필수적인 거름이었다. 인간을 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게 한 인문주의는 실로 오랜만에 인간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었다. 중세에는 인간의 위상과 세계 내에서의 역할이 신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규정되었으므로 인간을 설명하느라 애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고전 시대 이래 처음으로 인간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는 계기를 얻었다. 오랫동안 인간은 ‘세계의 일부’이기만 했으나 이제부터는 세계를 마주..
알프스를 넘은 르네상스 북이탈리아의 자치도시들이 르네상스를 발전시킨 비옥한 토양이었다면, 북방(알프스 북쪽을 가리킨다)에도 그에 못지않은 환경이 또한 군데 있었다. 바로 플랑드르였다. 이곳은 교황권과 황제권이 대립을 빚은 북이탈리아의 독특한 정치 상황만 제외하면 북이탈리아와 여러모로 닮은 지역이었다. 북해 무역을 바탕으로 쌓은 한자동맹 도시들은 재력에서 북이탈리아에 뒤지지 않았으며, 강력한 지역적 통일 권력이 없다는 점도 비슷했다. 플랑드르에서 피렌체의 조토와 같은 선구자의 역할을 한 화가는 후베르트 반에이크(Hubert van Eyck, 1370년경~1426)와 얀 반에이크(Jan van Eyck, 1395년간~1441) 형제였다. 그들은 유화 기법【르네상스 시대 이전, 수천 년 동안 화가들이 사용한 ..
‘작은 로마’가 만든 르네상스 조토가 새롭게 불을 지핀 사실성의 불꽃은 15~16세기 마사초, 보티첼리 등의 피렌체 화가들에게 계승되었다. 이 과정에서 회화의 소재는 성서에 머물지 않고 더욱 폭을 넓혀 그리스 신화에까지 확대되었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고전 문화의 부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 불꽃을 이어받아 커다란 횃불로 만든 예술가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3대 거장으로 불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 라파엘로(Raffello Sanzio, 1483~1520)였다. 이들은 그리스도교에 의해 죄악시되던 인간의 ‘신체’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냈고, 성서와 신화의 내용을 빌려 인간의 모습을 표현했다【르네상스 시대에 ..
사실성에 눈뜨다 중세의 중반기까지 동방의 로마 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이 모든 분야에서 서유럽을 앞섰다는 것은 앞에서도 본 바 있다. 여기에는 하드웨어만이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포함된다. 정치와 경제, 사회제도 등이 하드웨어라면, 문화와 예술은 소프트웨어다. 소프트웨어가 발달하는 속도는 대체로 하드웨어보다 느리다. 중세가 한창 변화의 와중에 있었던 12~13세기쯤이면 서유럽 세계는 다른 면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을 거의 따라잡았으나 문화와 예술은 아직 미치지 못했다. 특히 미술에서는 여전히 ‘비잔티움풍’이 가장 선진적이고 첨단의 유행이었다(그런 탓에 오늘날에도 비잔티움이라고 하면 흔히 제국보다 미술양식을 먼저 떠올린다). 이런 구도를 깨뜨린 사람이 피렌체의 조토(Giotto di Bondone, 1266년경~..
문학이 문을 열다 14세기 벽두에 피렌체의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는 「신곡 (La divina commedia)」이라는 방대한 서사시를 지었다. 그전에도 영국의 영웅서사시 「베오울프(Beowult)라든가 프랑스의 무훈서사시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 등과 같은 중세의 서사시는 간혹 있었으나, 그것들은 전해 내려오는 민담에 여러 차례 살을 붙여 이루어진 것이었으므로 신곡 처럼 지은이가 분명한 작품들은 아니었다. 게다가 「신곡」은 분량에서도 그것들의 세 배가 넘었다. 또한 「신곡」은 중세의 서사시들과 두 가지 점에서 질적으로 달랐다. 하나는 ‘신의 희곡’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의 영역을 주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신곡」은 단테 자신이 안..
2장 신에게서 인간으로 부활인가, 개화인가 르네상스(Renaissance)는 프랑스어로 ‘부활’이라는 뜻이다. 무엇이 부활했다는 것일까? 그리스의 고전 문화가 부활했다는 이야기다. 언제 어디서? 14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고, 이것이 점차 북쪽으로 퍼져나가 16세기 무렵에는 서유럽 전체가 르네상스 문화를 공유하게 되었다. 그럼 르네상스의 역사적인 의의는 무엇일까? 르네상스는 서유럽이 1000년에 달하는 오랜 중세를 끝내고 근대사회로 접어드는 이행기라는 성격을 지닌다. 학자에 따라서는 르네상스를 중세의 끝자락에 놓기도 하고 근대의 출발점에 위치시키기도 한다. 이상이 르네상스에 관한 사전적인 지식이자 동시에 박제화된 지식이다. 하지만 이 내용은 설명보다 더 많은 의문을 안겨준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정복의 결실 대항해시대에 유럽인들은 지구의 끝을 보았다. 물론 지구상 어느 곳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었고, 그 대부분은 나름대로 문명사회를 이루고 있었지만, 적어도 전 세계를 처음으로 하나의 관점에서 인식하게 된 것이 유럽인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요컨대 당시 지구 전체의 모습을 알고 있는 것은 유럽인들뿐이었다(중국인들은 오래전부터 ‘천하’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천하는 중국이 중심이고 사방이 오랑캐 땅인 ‘우물 안 천하’에 불과했다). 아는 것은 힘이고 지식은 곧 권력이다. 세계의 정체를 먼저 인식한 유럽 문명은 결국 세계의 중심이라는 지위를 획득하고 글로벌 문명을 선도하게 된다. 그 출발점이 바로 대항해시대, 정복의 시대다. 이 시대에 유럽의 경제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동쪽 아시아에서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 동방으로 진출한 포르투갈은 목표로 삼았던 향료 원산지와 직거래함으로써 탐험의 열매를 신속히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이것은 엔리케 이후 포르투갈의 일관된 정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뒤늦게 시작한 덕분에 오히려 더 큰 횡재를 한 것은 에스파냐였다. 동쪽 항로를 포르투갈에 선점당한 에스파냐도 원래는 서쪽으로 가서 향료 원산지를 찾으려 했으나 그 과정에서 신대륙이라는 엄청난 열매를 얻게 된 것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에도 한동안 에스파냐의 탐험가들은 신대륙 내부를 탐험하기보다 향료를 찾기 위한 항로를 개척하는 데 더 열을 올렸다. 그러나 곧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손에 쥔 것이 항로와 향료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이어 수많은 탐험가가 신대륙으로 ..
문명의 얼굴을 한 야만 마젤란은 필리핀에서 원주민 부족과 싸우다 전사하고 동료들만 귀환했지만, 같은 시기 에스파냐 탐험대가 아메리카를 다루는 과정은 포르투갈의 경우와 현저히 달랐다. 1511년 쿠바를 정복하고 이곳에 근거지를 차린 에스파냐는 본국에서 아예 대규모의 군대를 데려다놓았다.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다. 탐험가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아메리카에는 제법 힘깨나 쓰는 원주민 국가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에스파냐는 탐험대라는 간판을 내리고 대신 ‘원정대’의 깃발을 세우기로 했다. 이제 에스파냐는 원주민들에 대한 본격적인 정복 전쟁에 나섰다. 포르투갈이 탐험대 → 상선의 세련된 코스를 밟았다면, 에스파냐는 탐험대 → 원정대라는 무식한 코스를 택한 셈이다. 에스파냐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직..
땅따먹기 게임 엔리케의 원대한 꿈이 실현된 것은 그의 사후였다. 포르투갈 왕 주앙 2세는 작은할아버지인 엔리케의 유지를 받들어 대서양 탐험대를 계속 지원했다. 마침내 1488년, 탐험을 시작한 이래 가장 큰 성과가 이루어졌다. 그전 해에 리스본을 출발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Bartolomeu Dias, 1450년경~1500)가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까지 갔다가 포르투갈로 귀국한 것이다. 아프리카의 끝을 발견했으니 이제 그곳만 돌아 동쪽으로 가면 인도를 찾을 수 있을 터였다. 폭풍으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디아스는 그곳을 ‘폭풍의 곶’이라고 이름 지었으나 주앙 2세의 생각은 달랐다. 폭풍을 겪은 것은 선원이고 국왕에게는 어쨌거나 향료를 발견하기 위한 새로운 출발점이 될 뿐이다. 그래서 주앙 2세는 ..
1장 다른 세계를 향해 신앙과 양념 15세기 중반 이베리아 반도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당시에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1권 462쪽에서 보았듯이 곧 통합을 이루니까 이제부터는 에스파냐를 나라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다)는 수백 년동안 진행된 레콘키스타가 거의 완료되었음에도 별로 기쁘지 않았다. 뒤늦게 중앙집권적 왕국의 기틀을 갖춘 두 나라는 오히려 그것을 계기로 새삼 자신들의 처지를 자각하게 되었을 뿐이다. 서유럽 세계에서 어느새 그들은 후진국이 되어 있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은 로마 교황과 독일 황제가 권력 다툼을 벌이는 지역이었으므로 정치적 여건상 그렇다 치지만, 이베리아는 오랜 이슬람 지배로 서유럽 문화권에서 배제되어 있었던 탓에 남들이 토끼처럼 달려갈 때 거북이처럼 기어온 것이다. 로마 ..
5부 꽃 중세의 줄기가 피워낸 꽃은 세 송이다. 먼저 유럽 세계의 막내인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대륙의 서쪽 끝이라는 지리적 여건을 충분히 활용해 대서양 항로를 개척한다. 이들이 유럽으로 가져온 막대한 부는 유럽 문명을 세계의 중심으로 만드는 데 커다란 밑천이 되었다. 한편 정정이 복잡한 북이탈리아에서는 인간을 신에게서 해방시킨 르네상스 문화운동이 일어난다. 인문주의의 파도가 알프스를 넘어 북유럽으로 밀려들면서, 원래부터 종교적 모순이 첨예했던 독일 지역에서는 종교개혁의 물꼬가 터진다. 이제 중세의 큰 특징이던 종교적 통합성은 완전히 무너지고, 유럽 세계는 다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는 끝 전쟁을 통해 개별 국가를 이루려는 움직임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서유럽 왕가의 기원 1 프랑스, 독일, 영국의 교과서에는 마르텔의 이름을 샤를, 카를, 찰스로 각기 다르게 표현하고 있지만 모두 같은 말이므로 우리로서는 아무렇게나 써도 좋다. 마르텔은 ‘쇠망치’라는 뜻인데, 이름에 걸맞게 그는 메로빙거 왕조가 약해지는 틈을 타서 지금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동부, 독일 서부 등 서유럽의 요지를 통일했으며, 더 중요한 성과로 732년 프랑스 중서부 투르, 푸아티에까지 진출한 이슬람군을 막아내 유럽 문명을 수호하는 역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궁재(재상)의 신분이었으나 그의 후손들은 조상의 음덕으로 정식 왕조를 열게 된다. 2 아버지처럼 그도 처음에는 궁재로 출발했으나 곧 자신이 옹립한 허수아비 메로빙거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카롤링거 왕조를 열었다. ‘신성의 권력’ ..
중세 경제를 굴린 도시 대학의 탄생이 가능했던 것은 도시가 발달한 덕분이기도 했다. 도시가 없었다면 교사와 학생의 조합이 생겨날 수 없으므로 대학의 설립 자체가 불가능했을 테니까. 그런데 도시는 인류 문명이 탄생할 때부터 있었던 게 아닌가? 역사상 최초의 도시로 알려진 예리코는 기원전 7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만 해도 1500년 전에 생겼으니, 도시라면 중세에 새로 생긴 게 결코 아니다. 하지만 중세의 도시는 다르다. 중세에는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라는 사전적 의미의 도시도 있었지만, 중세의 특색을 잘 보여주는 새로운 도시도 생겨났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상공업 도시다. 서양 고대의 도시나 동양의 도시는 대부분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로 세워졌다. 그에 비해 서양 중세의 도시는 ..
대학과 학문 탁발수도회는 중세 사람들에게 심신의 위안을 주었지만, 후대의 사람들에게는 더 큰 선물을 주었다. 바로 학문의 발달에 수도사들이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종교계의 ‘재야’였던 만큼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쿠스회의 두 수도회는 종교의 개혁에만 공헌한 게 아니었다. 수도사들은 당시 생겨나기 시작한 대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했다. 13세기 이탈리아의 철학자 보나벤투라, 영국의 철학자 윌리엄 오컴 등은 프란체스코 수도사였으며,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그리고 그의 제자이자 중세 최대의 석학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년경~1274)는 도미니쿠스회 수도사였다. 사실 탁발수도회가 대학과 학문의 발달에 이바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시의 대학은 수도원에서 창설했고, 당시의 학문이..
8장 중세적인, 너무나 중세적인 세계의 중심은 교회 중세 하면 맨 먼저 생각나는 것은 교회다. 그만큼 중세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은 지대했다. 교회는 단순한 종교 기관이 아니라 정치·사회·문화·학문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세속의 모든 영역에 대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독자적인 사법권과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조직이었다. 정치적으로 보면,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1000년간 전개된 중세의 역사는 분권화를 향한 끊임없는 흐름이었다. 제국이라는 지역적 중심은 사라졌다. 서유럽에서는 프랑크가 잠시 제국 체제를 부활시키려 하나 곧 실패했고, 동유럽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이 계속 존재하나 전성기인 11세기를 넘어가면서부터는 사실상 왕국보다 못한 수준으로 전락했다.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경계심에서 어떻게든 서유럽에서 ..
조연들의 사정 왕실에서는 절대주의가 성장하고 일반 백성들에게서는 국민 의식이 싹텄다면, 이미 중세 봉건국가의 특성은 거의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런 나라는 프랑스와 영국에 불과했다. 그럼 이 두 주인공을 제외한 서유럽 세계의 나머지 조연들에서는 중세의 해체가 어느 정도로 진행되고 있었을까? 가장 중요한 조연인 독일은 대공위 시대를 거쳐 합스부르크 왕조가 새로 들어섰어도 통일은커녕 영방국가 체제가 더욱 굳어져만 갔다. 실제로 당시 독일 지역의 판도에서는 오늘날 통일 국가인 독일의 모습을 전혀 읽어낼 수 없다. 남부인 슈바벤과 바이에른 일대는 대체로 황제 직할령이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영방국가들로 쪼개져 있었으며, 발트 해와 북해에 면한 북부의 도시들은 14세기 중반부터 한자동맹(Hansibund)이..
영광을 가져온 상처 전장이 프랑스였던 만큼 프랑스는 전쟁에서 승리하고서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전쟁 기간 동안 고용한 용병들의 급료를 지불하지 않은 탓에 이들이 도적 떼로 변하면서 피해가 더욱 극심했다. 프랑스만큼은 아니어도 영국 역시 피해가 컸다. 우선 막대한 전쟁 비용으로 인해 재정 위기를 맞았을 뿐 아니라 도버 해협 연안의 칼레 지방을 제외한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를 전부 잃었다(이것으로 프랑스 내의 영국령에 관한 두 나라 간의 분쟁은 완전히 정리되었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경제적으로는 피해가 막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전쟁을 계기로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잔 다르크 덕분에 왕위에 오른 샤를 7세는 용병의 폐해를 막기 위해 참전 기사들을 위주로 상비군을 편성했는데, 영국을 물리..
변방과 중심의 대결 프랑스와 영국의 분쟁은 사실 윌리엄의 영국 정복에서 그 씨앗을 찾을 수 있다. 이민족이 왕실의 주인이 되었으니 애초부터 문제가 없을 수 없었다. 게다가 영국에 앙주 왕조가 들어선 것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키운 격이었다. 앙주 가문의 지배하에 있었던 대륙 영토의 소유권이 애매해졌기 때문이다. 영국이 앙주의 것인가, 아니면 앙주의 프랑스 영토가 영국의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필리프 2세가 노르망디와 앙주를 정복한 것은,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되찾은 것이지만 영국의 입장에서는 빼앗긴 것이었다. 일단 생 루이의 조정안으로 분쟁이 표면화되는 것은 넘겼으나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그의 뒤를 이은 프랑스의 왕들은 가스코뉴를 영국에 공식적으로 넘겨준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 영국..
중심: 절대왕권의 시작 유럽의 변방에서 새로운 정치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대륙의 중심 프랑스에서는 카페 왕조의 권력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앙주를 접수해 프랑스를 강국으로 만든 필리프 2세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아들을 왕위 계승자로 삼고 카페 왕조의 세습제를 확고히 다졌다. 그러나 정작으로 그 조치가 빛을 본 것은 그의 손자 시대였다. 아버지인 루이 8세가 짧은 재위 기간을 마치고 죽자 왕위를 계승한 루이 9세(재위 1226~1270)의 시대에 카페 왕조는 전성기를 맞게 된다. 카페 왕조의 가장 위대한 군주로 칭송받는 그는 별명도 그럴듯하게 성왕(聖王), 즉 생 루이(saint Louis)였다. 할아버지와 손자의 전성시대라고 해야 할까? 비슷한 시기 프리드리히 1세와 2세가 독일을 강국으로 만들었다면,..
7장 해체되는 중세 변방: 새로운 정치제도의 등장 지금까지 우리는 십자군 시대인 11~13세기 무렵 유럽의 정세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즉 이베리아 반도에서부터 스칸디나비아까지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그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지역은 영국이다. 당시 영국의 역사는 유럽 봉건 체제의 역사를 압축해놓은 것 같은 진행을 보인다. 대륙에서 중세 초기에 프랑크 왕국이라는 강력한 중심이 생겨났다가 이후 프랑크가 무너지고 중세 사회가 발전하면서 분권화가 전개되었듯이, 영국에서도 윌리엄의 정복으로 강력한 왕권이 성립했다가 이후 대륙의 질서에 편입되면서 왕권이 무너지고 귀족들의 분권화가 전개되었다(그 결과가 마그나카르타다). 더구나 그 기간 동안 영국 내에서는 수백 년에 걸쳐 발달한 대륙의 봉건 체제가 단기간에 숙성되었으니..
오지에서 차세대 주자로: 스칸디나비아 11~13세기 무렵 독일과 이탈리아가 ‘서유럽 대학’의 복학생이라면, 스칸디나비아는 아직 입학하지도 않은 입시 준비생쯤 된다. 아무리 지역적으로 서유럽의 북방에 치우쳐 있다지만 노르만 민족이동이 일어난 지도 벌써 수백 년이 지났는데 어찌 된 일일까? 사실 스칸디나비아는 노르만의 이동으로 오히려 피해를 본 셈이었다. 지역 전체가 서유럽 세계로 편입된 게 아니라 ‘일부 사람들’만 서유럽과 러시아로 이동해갔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향을 떠난 그들은 고향과 서유럽 선진 문명권을 이어준 게 아니라 아예 타향에서 딴살림을 차려버렸다. 따라서 ‘남은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스칸디나비아에 선진 문명의 빛을 끌어들여야 했다. 서유럽은 스칸디나비아에 자립이 가능할 만한 넉넉한 밑천을..
서유럽의 그늘: 독일과 이탈리아 십자군 전쟁이 진행된 11~13세기는 서유럽의 원형이 생겨난 시대다【서유럽 세계가 형성되는 계기는 얼추 세 가지로 잡을 수 있다. 앞서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서유럽의 원시적 형태가 생겨난 것이 1차 계기라면, 십자군 시대는 2차 계기가 된다. 마지막 3차 계기는 근대 유럽을 낳은 17세기 30년 전쟁부터 20세기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전란기다】. 이 무렵 서유럽 세계는 지역 전체적으로는 분권화가 가속화되면서 각국 내부에서는 중앙집권화가 추진되고 있었다. 이 시대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서유럽의 일원으로 편입되었고, 프랑스와 영국은 서로 갈등과 반목 속에서 초기 국민국가로 성장해갔다. 편입생과 재학생이 꾸준히 학업에 열중하는 것은 휴학생에게도 큰 자극을 주었다. 뒤늦게 ..
봉건제의 본산: 프랑스 영국에 새 왕조를 건설한 앙주 가문은 분명히 프랑스의 유력 가문이다. 그런데 왜 이 분쟁에 프랑스 왕가는 개입하지 않은 걸까? 오늘날과 같은 국가 개념으로 본다면 당연히 프랑스 정부가 관여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중세 프랑스는 오늘날과 같은 국가가 아닐뿐더러 당시 서유럽을 제외한 전 세계에 존재하던 ‘일반적인 왕국’, 즉 초기 영토 국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라였다. 서유럽에서 가장 유서 깊고 전통적인 프랑스가 어찌 된 일일까? 물론 프랑스에도 왕이 있었고, 왕조도 있었다. 서유럽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클로비스가 프랑스의 초대 국왕이며, 서유럽 왕실들의 모태를 이룬 카롤링거 왕조는 바로 프랑스의 왕조가 아니던가? 역사로만 본다면 어디에도 뒤질 게 없는 프랑스다. 그러나..
서유럽의 확대: 영국의 편입 이베리아 반도와 더불어 십자군 시대에 서유럽 세계로 편입된 곳은 영국이다. 1066년 노르망디 공으로서 영국 왕이 된 윌리엄 1세는 정복왕이라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게 앵글로색슨 시대의 관습과 제도를 거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유지했다. 일단 목적한 바를 이루었으니 더 이상의 성가신 제도 개혁 같은 것은 원치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그로서도 한 가지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부하들의 논공행상이었다. 자신을 믿고 바다를 건너와 해럴드를 물리치고 영국을 정복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노르망디 출신 가신과 기사 들만큼은 어떻게든 배려해야 했다. 윌리엄은 무엇으로 공을 논하고 상을 주었을까? 물론 토지다. 신천지를 정복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굳이 기존의 앵글로 색슨..
6장 국민국가의 원형 서유럽의 확대: 이베리아의 변화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했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 못지않게 기뻐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 북부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이베리아라면 바로 에스파냐, 8세기 초반 이슬람의 침략을 받아 이슬람 문명권의 일부로 편입된 지역이 아니던가? 그리고 곧이어 9세기에 이슬람의 손으로 넘어간 시칠리아와 더불어 수백 년 동안 이슬람이 지배하는 유럽으로 남아있던 곳이 아닌가? 그 이슬람이 이제 서유럽 연합군에 의해 무너졌다니! 지중해 동쪽 끝에서 날아온 승전보는 지중해 서쪽 끝에서 가장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원래 이슬람이 에스파냐의 전 지역을 지배한 게 아니었다. 마르셀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온 이슬람군을 격파한 뒤 이슬람은 이베리아 반도..
해체의 시작 앞서 본 것처럼, 십자군 전쟁에는 성지 탈환이라는 대의명분과 더불어 서유럽의 군주와 귀족, 기사, 농민 등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신분과 처지에 따라 이해관계는 다양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영토 확장을 통해 부족한 토지를 확보하고 농민 이주로 인구 증가를 소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에서 서유럽 세계는 그런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십자군 전쟁은 일단 실패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모든 게 그렇듯이 성공이나 실패라는 일의적인 규정은 무의미하다. 역사적 사건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을 계기로 무엇이 달라졌는가다. 십자군은 서유럽 세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만약 서유럽이 적어도 비잔티움 제국 정도의 느슨한 중앙집권 체제만 갖추었더라도 ..
성전에서 추악한 전쟁으로 우르바누스는 정세 분석의 능력과 선동 솜씨도 탁월했지만 뛰어난 전략가이기도 했다. 그가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십자군을 계기로 서유럽은 실제 역사보다 일찍 전 세계의 패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그는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 지 3년 만인 1099년에 죽었다). 그는 당시 서유럽에 넘쳐나는 유능한 기사들로 십자군을 편성해 속전속결로 성지 탈환을 완료할 생각이었다. 그 무렵 서유럽은 수백 년 동안 큰 전쟁이나 전염병 한 번 없는 안정기를 누리고 있었다. 따라서 속도는 느리지만 농업 생산력이 상당히 발달했고, 인구도 큰 폭의 증가세를 보였다. 유럽 세계는 거의 전역이 속속들이 개척되고 개간되었으나 토지의 증가에는 한계가 있었다(우르바누스는 십자군을 구상할 때 분명히 이런 토지 부족 현상을 염..
그리스도교의 ‘지하드’ 그레고리우스는 강경책으로 불행을 자초했지만, 그의 뒤를 이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전임 교황이 닦아놓은 기반을 한껏 이용해 교회의 힘을 더욱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서유럽 군주들은 교회와의 관계가 좋지 않을뿐더러 자기들끼리도 반목했다.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뭐니 뭐니 해도 바깥에 대적이 있는 게 가장 좋다. 일찍이 그리스 폴리스들의 분열을 막은 것도 페르시아의 침략이었고, 프랑크가 통일 왕국으로 발전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슬람이라는 바깥의 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르바누스는 그리스도교권의 단결도 도모하고 새로 정비한 교회의 힘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1095년 11월에 클레르몽 공의회를 열었다. 회의의 주제는 바깥에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서유럽의 바깥..
대결과 타협 11세기 후반 알렉산데르 2세에 뒤이어 교황으로 선출된 그레고리우스 7세는 클뤼니 수도원 출신이었다. 그는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 운동으로 시작된 교권 독립 문제를 매듭짓기로 마음먹었다. 교권 독립은 원래 당연한 것이니 예전과 같은 수세적인 자세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직자 임명권은 세속 군주를 포함한 어떠한 속인도 가질 수 없고 오로지 교회에만 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전까지도 그 문제를 놓고 싸웠으니 새로울 건 없었지만, 이제 교황은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한 셈이었다. 당장의 현안은 밀라노의 주교를 선출하는 문제였다. 그레고리우스의 방침이 성공하려면 그는 여기서부터 자신의 원칙을 적용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이제부터는 독일이라고 불러도 ..
5장 십자가 없는 십자군 땅에 내려온 교회 영주의 장원에는 교회가 하나씩 있었다. 교회는 종교 조직이면서도 현실에 존재하는 기구다. 그럼 이 교회는 누구의 관할을 받아야 할까? 종교 계통상으로는 로마 교황의 지휘를 받아야 마땅하겠지만 실상은 영주의 지배를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교회는 ‘순수한’ 종교 조직인 것만이 아니라 막대한 토지를 지닌 대지주이기도 했던 것이다(더구나 오늘날도 그렇듯이 당시 교회 재산은 면세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토지를 교회에 기증하고 각종 혜택마저 부여하는 영주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었다. 사실 중세 초기까지만 해도 교회는 봉건 군주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샤를마뉴의 시대에는 정복 사업이 진행 중이었으므로 피정복지의 주민들을 통합하는 데는 종교만 한 수단이 없었다. 또한 노..
분권적 질서의 시작 봉건제의 두 가지 뿌리가 종사와 은대지의 관습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서양의 봉건제는 동양의 그것과 크게 달랐다. 중국의 봉건제도 충성의 대가로 군주가 가신들에게 토지를 하사한다는 점에서는 같았으나, 실제로는 서양의 경우보다 훨씬 수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흔히 중국은 주나라 시대에만 봉건제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최초의 통일 제국인 진의 군현제, 그 뒤를 이은 한의 군국제(郡國制), 당의 번진 등은 모두 봉건제의 성격을 보여준다. 드넓은 중국 대륙을 지배하려면 중앙 권력 하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변방의 수비를 위해서는 그 지역의 영토와 자치권을 제후들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중국 황제는 변방을 국(國) 또는 군(郡)이라 부르..
장원의 왕과 세 가지 신분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 내에서 왕으로 군림했다. 초기에 은대지를 받았을 무렵에는 원래의 땅 주인인 상급 영주에게 세금(일종의 토지 이용료)을 내야 했으나 은대지가 봉토의 개념으로 바뀌면서 영주들은 불입권(immunity)을 가지게 되었다. 불입권이란 원래 로마 시대에 황제가 설정한 면세지에서 비롯된 제도지만, 영주들이 은대지가 아니라 봉토를 소유하게 되면서부터는 면세만이 아니라 광범위한 자치권을 뜻하는 개념이 되었다. 따라서 상급 영주라 해도 하급 영주의 권한을 직접적으로 침해하지는 못했다. 물론 전쟁이라는 방식을 통해 제압할 수는 있었지만. 봉건 영주들이 이렇게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데는 경제적인 원인도 있었다. 그들은 자기 영지 내의 농민(농노)들을 사실상 소유하..
게르만 전통이 낳은 봉건제 중세를 형성한 것은 로마-게르만 문명이었다. 로마가 중세에 남긴 유산이 그리스도교라면 게르만 전통은 중세에 무엇을 물려주었을까? 그것은 바로 봉건제다. 물론 봉건제가 성립한 데는 로마의 전통도 적지 않게 연관되어 있지만, 봉건제는 기본적으로 게르만 전통에 따른 사회체제라고 할 수 있다. 봉건제는 정치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사회경제사를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역사학자들은 봉건제의 경제적 측면을 특히 강조하는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그들은 중세 후기,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맹아가 숙성할 무렵의 봉건제를 중시한 탓에 그런 입장을 취하는 것이지만, 중세 초기에 봉건제를 낳은 동인은 주로 정치적인 데 있었으며, 중세 내내 봉건제의 이런 성격은 크게 변하..
4장 하늘 하나에 땅 여럿 그리스도교 대 그리스도교 게르만의 민족이동과 노르만의 민족이동은 여러 가지로 닮은꼴이다. 둘 다 북쪽에서 남하해 기존의 유럽 세계를 재편성했다. 게르만족은 로마 말기에 이동을 시작해 지중해 세계 중심의 로마 문명을 더 북쪽, 유럽의 심장부로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정치적으로는 서유럽 세계의 원시적 형태를 형성했고, 문명적으로는 로마 문명을 이어받아 로마-게르만 문명, 즉 유럽 문명(서양 문명)으로 키워냈다. 또 노르만족은 게르만족이 시작한 모든 것을 완성하는 역할을 했다. 정치적으로는 서유럽 세계를 완성했고, 문명적으로는 서양 문명의 폭을 유럽 전역으로 확대했다. 그 두 가지 변화가 종합적으로 작용해 서양 문명의 뿌리(로마 문명)는 줄기(중세 문명)로 자라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