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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서양사 목차 남경태 연표선사 ~ 위만조선삼국건국 ~ 신라통일남북국고려조선 건국~연산군중종~임란 발발임란~정조순조~조선 말기대한제국~현대사 책 머리에2009년 통속적인 역사책에 싫증을 느낀 독자에게2014년 지은이의 향기가 나는 종횡무진 시리즈가 되기를 바라며 프롤로그: 끊임없이 중심을 이동하며 꽃피운 서양 문명 1부 씨앗 1장 두 차례의 혁명산에서 내려온 사람들강에서 일어난 사람들 2장 충돌하는 두 문명신국의 역사초승달의 양 끝이 만났을 때최초의 국제사회아리아인의 등장 3장 새로운 판 짜기수수께끼의 해적들서양의 문자를 만든 페니키아서양의 종교를 만든 헤브라이 4장 통일, 그리고 중심이동고대의 군국주의열매를 주운 페르시아빛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2부 뿌리① 1장 그리스 문명이 ..
에필로그서양 문명의 전 지구적 이동, ‘글로벌 문명’ 다음은 ‘로컬 문명’으로 1. 명령과 계약 서양사의 길고 거친 탐색이 끝났다. 보통 서양사라고 하면 제2차 세계대전으로 끝나고, 그다음은 역사라기보다 시사에 속한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이르는 시대, 즉 현대는 적어도 앞으로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역사로 분류될 것이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는 서양이나 동양이라는 지역의 역사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세계사가 된다. 서양사와 동양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시대는 지났고, 이제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가 전개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의 맨 끝장(7장)에서는 전후 지금까지 세계사의 과정을 간략하게 정리했다. 1만 년에 달하는 장구한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압축했으니 아무래도 거칠 수밖에 없다. 역사 읽기를 ..
7장 유럽을 벗어난 유럽 문명 전혀 다른 전후 처리 제2차 세계대전이 수백 년간 유럽 세계를 뒤흔든 전쟁들의 종착역이라는 점은 종전 직후부터 드러났다. 무엇보다 전후 처리가 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17세기 초의 30년 전쟁부터 20세기 초의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3세기 동안 서유럽 각국은 치열한 영토 전쟁을 벌인 뒤 매번 그 결과를 조약으로 수렴하고 새 체제를 수립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전개해왔다. 30년 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을,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은 위트레흐트 조약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엑스라샤펠 조약을, 7년 전쟁은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을, 나폴레옹 전쟁은 빈 회의를, 제1차 세계대전은 베르사유 조약을 낳았고, 이 조약들에 따라 새로운 국제 질서가 성립되는 게 유럽 근대사의..
6장 최후의 국제전 ‘전범’들의 등장 애초부터 큰 힘을 쓰지 못한 베르사유 체제는 대공황을 겪으면서 아예 주저앉아버렸다. 그러나 베르사유 체제로 타격을 받은 나라들은 오스트리아와 동유럽 신생국들만 빼고는 1930년대부터 일제히 약진하기 시작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파시즘 체제로 국내를 안정시킨 뒤 단기간에 상당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런가 하면 파시즘과 대척적인 사회주의도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소련은 신생국답지 않은 노련한 국가 운영을 선보였다. 1921년부터 신경제정책(NEP)을 도입한 소련은 과감히 자본주의적 요소를 배합하고 공업을 육성시켰으며, 농업의 집단화로 농업 생산력에서도 큰 성과를 이루었다. 레닌의 사후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에서 트로츠키를 누르고 승리한 스탈린(losif Stal..
5장 불안의 과도기 평화의 모순 중세 이래 몇 차례 있었던 대규모 국제전에서도 늘 그랬듯이, 유럽 세계의 전쟁은 상대방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을 지향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승부의 윤곽이 뚜렷해지면 전쟁을 끝맺고 타협과 협상을 벌였으며, 그 결과로 조약을 맺어 새로운 질서를 수립했다. 그런 점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도 예외가 아니었다. 패전국이라고 해서 나라가 사라지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모두에게 너무 큰 상처였고,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비극이었다. 그래서 유럽 열강과 미국은 베르사유 체제를 통해 전 세계를 아우르는 국제기구를 탄생시킨다. 바로 국제연맹이다. 하지만 17세기 이래 세기마다 한 차례씩 대규모 국제전이 있었는데 왜 하필 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그런 기구를..
4장 큰 전쟁과 큰 혁명 최초의 세계대전 빌헬름 2세는 초조했다. 아프리카에서 독일은 아무리 애를 써도 영국과 프랑스가 쳐놓은 두터운 그물을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오스만에까지 접근했다. 오스만의 수도인 이스탄불과 멀리 바그다드를 잇는 철도 부설권을 따내 바그다드에서 베를린까지 연결하려는 계획이었다. 이스탄불의 옛 명칭은 비잔티움이었으므로 이른바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의 3B 정책이었으나, 이것은 케이프(남아프리카)-카이로(이집트)-캘커타(인도)를 잇는 영국의 더 넓은 3C 정책에 가로막혔다【아프리카 분할이 거의 완료된 시점에 뒤늦게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탓에 독일은 굶주린 이리처럼 저돌적이었다. 태평양의 작은 섬들마저 허겁지겁 먹어치운 데서도 알 수 있지만, 독일의 허기가 더 극명하게..
3장 제국 없는 제국주의 폭풍 전야의 유럽 독일과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룸으로써 유럽의 판도는 다 짜였다. 이는 다시 말해 유럽 내에서는 이제 영토 분쟁의 여지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럼 1870년대의 시점에서 유럽 각국의 위상을 간단히 정리해두는 게 좋겠다. 이 무렵이면 이미 오늘날 유럽의 구도가 거의 다 드러나 있다. 우선 영국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명실상부한 유럽 최강국이자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리더의 지위에 올랐으면서도 영국은 유럽의 국제 질서에 대한 조정자의 역할을 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이다. 영국은 19세기 후반 대륙에서 어지러이 펼쳐지는 외교전 - 비스마르크가 항상 그 중심에 있었기에 이것을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부른다 - 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그도 ..
2장 완성된 유럽 세계 드러나지 않은 제국 빈 체제 하에서 유럽의 낡은 중심인 오스트리아가 무너지는 동안, 프랑스와 독일이 시민혁명의 혼돈을 겪고 있는 동안, 러시아와 미국이 명암을 달리하면서도 각기 세계열강의 대열에 끼려 애쓸 무렵, 유달리 잠잠한 나라가 하나 있었다. 바로 영국이었다. 17세기에 일찌감치 시민혁명의 홍역을 치른 영국은 18세기에 여러 차례 벌어진 프랑스와의 맞대결에서 승리한 뒤 가장 먼저 산업혁명의 불꽃을 피워 올리고, 19세기부터는 복잡한 대륙의 정세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고독한 질주를 계속하고 있었다【만약 섬이라는 조건이 아니었다면 17세기 영국의 시민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18세기 초 막강한 프랑스를 물리칠 수 있었을까, 에스파냐에 뒤이어 전 세계에 식민지들을 거느..
7부 열매② 유럽 세계는 영토 분할이 끝나자 자연히 시선을 바깥으로 향한다. 영국을 비롯해 갓 태어난 유럽의 국민국가들은 활발히 세계 정복에 나선다. 그러나 빵은 제한되어 있고 입은 많다. 뒤늦게 국민국가를 이루고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독일은 자신의 몫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남의 것을 빼앗는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 분할이 완료된 20세기 초반에 독일은 영토 재편을 획책하는데, 그것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이다. 전쟁의 와중에 또 하나의 구체제인 러시아가 제국의 명패를 버리고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로 탈바꿈한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전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시민 사회의 역사가 짧은 독일과 이탈리아는 파시즘이라는 신무기로 무장하고 다시 유럽의 질서에..
5장 근대의 완성 중심에서 부는 변화의 바람 변혁의 세기인 18세기에 프랑스의 추락은 역력했다. 세기 벽두에 에스파냐 왕위를 놓고 겨루었다가 그 왕위만 얻고 다른 모든 것을 잃은 프랑스는 이후 거듭된 전쟁에서도 좀처럼 형세를 만회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서유럽 국가가 아닌 ‘준’ 이교도국 러시아와도 동맹을 맺으며 애썼으나 별무신통이었다. 결국 신흥국 프로이센에마저 추월할 지경에 이르렀고, 영국과 한 세기에 걸쳐 인도와 아메리카에서 맞붙은 결과 모두 패배했다. 이제 프랑스는 이류 국가로 전락했다. 비록 미국의 독립을 지원함으로써 영국에 다소나마 앙갚음을 했지만, 중세 내내, 그리고 근대의 문턱에서도 서유럽의 선두 주자이자 터줏대감이던 프랑스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사실 프랑스가 ..
4장 변혁의 18세기 제국의 꿈 일찌감치 영토 국가의 관념을 깨우친 덕분에 프랑스는 30년 전쟁에서 최대의 성과를 거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리슐리외가 사실상 전권을 지배한 루이 13세 치하처럼 ‘총리의 시대’가 계속되었더라면 혹시 모르겠지만, ‘나라의 주인’인 국왕이 직접 나선다면 사태는 달라질 터였다. 과연 절대왕권이 완전히 뿌리를 내린 상황에 걸맞은 절대군주가 탄생했다. 그는 후대에 ‘태양왕’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루이 14세(1638~1715, 재위 1643~1715)다. 30년 전쟁의 후반부를 배후 조종한 리슐리외는 1642년에 죽어 6년 뒤에 벌어진 베스트팔렌 논공행상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그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한 루이 13세도 ..
3장 자본주의의 출범 국부의 탄생 유럽의 17세기 전반부는 역사상 유례없는 전란의 시대였다. 대륙에서는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30년 전쟁이 일어났고, 영국에서는 왕과 의회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무수한 사람이 죽고 많은 도시가 파괴되었으며, 각국의 정치와 사회는 지극히 혼란스러웠다. 문명의 종말인가? 물론 지금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유럽 문명은 종말을 맞기는커녕 이후 더욱 성장하고 더욱 힘을 키워 나중에는 세계 정복에 성공하니까. 그럼 그 죽음과 파괴, 혼란은 어떤 의미였을까?? 배고프면 단결하지만 배부르면 분열하게 마련이다. 빵 덩어리가 작을 때는 그것을 키우기 위해 힘을 합치지만 먹을 만큼 커지면 거기서 각자 제 몫을 더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17세기 전반의 유..
2장 유럽을 낳은 전쟁 화재를 부른 불씨 절충과 타협은 원래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식이 아니다. 잘되어야 문제를 오래 묶어둘 뿐이고, 잘못되면 문제를 더욱 키우게 된다. 전형적인 절충과 타협이었던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바로 그랬다. 가장 큰 불씨는 바로 루터파에 한해서만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다는 점이다. 보수적인 황제파와 가톨릭 측은 당장 불거진 루터파 영방군주들의 불만을 달래는 방식으로 문제를 덮으려 했으나 그것은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할 문제로 키우는 꼴이 되고 말았다(만약 시대의 추세를 따라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더라면 적어도 종교의 외피를 두른 문제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가톨릭의 반성도 있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루터파를 공인하게 된 것은..
6부 열매① 중세적 질서가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는 각개약진밖에 없다. 새로 탄생한 유럽 국가들은 영토와 주권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각인한다. 프랑스와 영국을 선두로 각국은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과 전쟁을 벌인다. 그러나 아직도 중세의 잔재를 버리지 못한 독일은 신성 로마 제국의 명패를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바꾸어 달고 로마 가톨릭이 지배한 좋았던 옛날로 돌아가고자 애쓴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었던 에스파냐는 불운하게도 합스부르크 제국의 본거지가 되면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 한 반면, 영국은 활발한 시민혁명으로 가장 먼저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대외 진출에 나선다. 구체제의 상징이던 프랑스는 뒤늦게 시민혁명을 이루는데, 이 프랑스 혁명은 유럽 전역에 메가톤..
3장 종교의 굴레를 벗고 개혁과 비판의 차이 고향에서 추방된 단테가 「신곡」을 쓰고 있을 때, 또한 그의 고향 피렌체에서 조토가 새로운 사실성의 세계를 화폭에 구현하고 있을 때,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로마 교황 보니파키우스를 납치하고 아비뇽에 자기 마음에 맞는 새 교황청을 열었다. 이 아비뇽 사태는 당시 추락 일로에 있던 교황권이 몰락하는 속도를 더욱 가속시켰다. 중세가 출범한 이래 수백 년 동안 중세 사회에 통합성을 부여해온 로마 교황청은 이제 제 한 몸도 추스르지 못할 만큼 약해졌다. 그렇잖아도 교황청의 간섭을 싫어하던 서유럽의 군주들은 이 기회를 틈타 실 끊어진 연처럼 일제히 교황청과의 인연을 끊고자 했다. 프랑스는 교황청을 아예 접수하는 방법을 구사했고, 영국은 적국인 프랑스의 교황청을 거..
5장 문명의 통합을 낳은 원정 폴리스 체제의 종말 아테네의 시대를 대체한 스파르타의 시대는 짧았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해 무력에서는 그리스의 패자가 될 만한 자격을 보였으나 아테네의 권위를 대신할 수 없었다. 더구나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그리스를 지배하던 시절보다 더욱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폴리스들에 군대와 감독관을 파견하고 공납금의 액수도 더 올린 것이다. 그리스 세계의 체질에 맞지 않는 군국주의에다 민족적인 이질성, 그리고 지나친 독재와 간섭에 폴리스들은 당연히 불만이 많았다. 그러던 차에 스파르타의 지배에 균열이 생기는 일이 터졌다. 기원전 394년 페르시아에서 제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생기자 스파르타는 그 참에 이오니아를 수복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그것은 실..
4장 사상의 시대 민주주의가 가능한 이유 서양의 역사가들은 그리스를 서양 문명의 요람으로 간주한다. 그 이전의 크레타와 더 이전의 오리엔트에서 발달한 문명이 그리스 문명의 선구라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그리스 시대에 와서야 서양 문명의 골격이 갖추어졌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그리스가 오늘날 유럽에 속하기 때문일까? 천박한 유럽 중심주의에 물든 사람들은 실제로 그것을 근거로 삼는다. 하지만 더 충실한 근거를 든다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리스의 민주주의이고, 둘째는 그리스 고전 시대의 사상이다.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근대 민주주의로 부활했으며, 그리스 시대의 철학과 정치사상은 오늘날까지 서양 사상의 원류가 되고 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에 민주주의가 발달했다는 ..
3장 전란의 시대 최초로 맞붙은 동양과 서양 페르시아가 안정을 찾고 명실상부한 세계 제국을 이루자 다리우스의 마음은 다시 서방으로 향했다. 동쪽으로 인도, 남쪽으로 이집트와 리비아를 정복했으니 이제 남은 건 서쪽뿐이다. 인도 내륙은 오지여서 정복의 대상이 아니었다(한편, 다리우스는 북방의 스키타이와 싸워 곤욕을 치른 바 있다. 하지만 이들을 북쪽으로 몰아내 이후 침략을 줄이는 데는 일조했다). 물론 다리우스가 인도에서 동쪽으로 더 멀리 가면 동북아시아 지역에 또 하나의 강력한 문명이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서방의 지중해 세계만 정복하면 다리우스는 ‘천하 통일’을 이루는 셈이었다. 사실 다리우스는 그리스까지 정복할 마음은 별로 없었고 이오니아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페르..
2장 폴리스의 시대 과두정이 낳은 폴리스 이오니아는 오리엔트와 가까운 만큼 그리스 본토보다 선진 문물을 수입하는 데 유리했으나, 원래 그리스 땅이 아니라 이민족들이 사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개척이 쉽지 않았다. 우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안전이었다. 이오니아에 온 그리스인들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딜까? 바로 해안이다. 그리스인은 원래부터 바다에 익숙했을 뿐 아니라 무슨 사태라도 벌어지면 언제든지 배를 타고 도피해야 했으므로 해안에 근거지를 잡았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피난 살림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근거지 주변에 튼튼한 성벽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폴리스의 기원이다. 밀레투스와 에페소스 같은 도시들이 이 무렵에 건설된 이오니아의 그리스 식민시들인데, 특히 밀레투스는 예전부터 있던..
2부 뿌리① 크레타는 지리적 위치 덕분에 오리엔트 문명의 한 자락을 거머쥘 수 있었으나 큰 문명을 담을 그릇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서양 문명의 뿌리는 곧바로 그리스 반도로 넘어간다. 포도와 올리브밖에 자랄 수 없는 척박한 토양,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일찍부터 해상 활동에 나서서 동부 지중해 일대를 주름잡으며 수많은 식민시를 건설한다. 그러나 문명의 뿌리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심을 되찾으려는 오리엔트의 강력한 도전을 물리쳐야 했는데, 그것이 페르시아 전쟁이다. 여기서 승리한 아테네를 중심으로 그리스는 오리엔트와 질적으로 다른 문명을 건설한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서양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1장 그리스 문명이 있기까지 신화가 말해주는 역사 오리엔트에서 배태된 문명의 씨앗이 처음 뿌리를 내린 곳..
4장 통일, 그리고 중심 이동 고대의 군국주의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붕괴로 인한 힘의 공백, 그리고 기원전 10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철기 문명은 오리엔트 세계를 다시금 여러 세력의 각축장으로 만들었다. 이집트는 여전히 존재했으나 건재하지는 않았다. 시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오히려 기원전 10세기~기원전 7세기까지 리비아와 에티오피아의 지배를 받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했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이스라엘 왕국과 페니키아 상인들이 지배하는 도시국가들이 생겨났고, 히타이트의 잔존 세력은 옛 고향 근처인 아나톨리아 동남부로 돌아가 카르케미시, 밀리드, 타발 등의 작은 도시 국가들을 이루고 근근이 살아갔다. 아나톨리아 고원에는 서쪽의 유럽에서 온 프리지아와 새로 통일을 이룬 우라르..
3장 새로운 판 짜기 수수께끼의 해적들 카데시 전투 이후 오리엔트의 쌍웅인 히타이트와 이집트는 묘하게도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한 탓일까? 물론 그 이유도 있겠지만 카데시 전투 이외에 별다른 전쟁이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일단 내부의 문제가 있었다. 이집트는 종교 사제들의 권력과 영향력이 증대하면서 국가의 기틀이 서서히 무너져갔다. 원래 이집트인들이 섬기는 신은 태양신인 레(또는 라)였는데, 여기에 테베를 수도로 삼은 중왕국 초기에 테베의 수호신이던 아몬을 덧붙여 아몬-레 신앙이 생겨났다. 그러나 기원전 14세기의 파라오인 아멘호테프 4세는 수백 년간 섬겨오던 아몬-레를 버리고 일신교적 성격이 강한 또 다른 태양신인 아톤..
2장 충돌하는 두 문명 신국의 역사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3000년 동안 수십 개의 왕조가 등장하고 퇴장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결코 단일한 역사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편의상 그것들을 뭉뚱그려 이집트 왕국이라고 부르고 각 왕조에 일련번호를 매겨 구분하지만, 각각의 왕조는 사실상 별개의 나라나 다름없었다(우리 역사에 등장했던 고대 삼국과 고려, 조선을 ‘한반도 왕국’이라고 통칭할 수 있을까?). 당시 이집트인들은 단일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역사를 진행한 게 아니었다. 고대 중국인들에게는 중국이 곧 천하였듯이, 이집트인들에게 이집트란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세계 전체였다. 고대 중국인들에게 천하의 주인은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였다. 반면 이집트인들의 ‘천자’는 바로 파라오였다. 사실 파라오는 천자..
1부 씨앗 문명의 빛이 처음 내리쬐인 지역은 오늘날 터키에 해당하는 아나톨리아 고원으로 추정된다. 그와 거의 동시에 남쪽 나일 삼각주에서도 이집트 문명이 싹튼다. 두 문명은 초승달 모양의 이 일대를 점차 환하게 밝힌다. 초승달의 양 끝이 만나면서 오리엔트 문명이 생겨나고 인류 역사상 최초의 국제사회가 형성되지만, 이 지역은 갈수록 확대되는 문명을 담당할 중심지가 되지 못한다. 오리엔트 문명은 점차 서쪽으로 중심을 이동하면서 유럽 대륙의 동쪽 끝자락인 크레타와 그리스에 전해진다. 이후 오리엔트는 문자(알파벳)와 종교(그리스도교)의 두 가지 큰 선물을 서양 문명에 전함으로써 뿌리의 역할을 다한다. 1장 두 차례의 혁명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 그것은 혁명이었다. 인류는 마치 500만 년 전에 탄생한 이..
프롤로그: 끊임없이 중심을 이동하며 꽃피운 서양 문명 바람에 날려간 씨앗이 인류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을 말할 때 사람들은 흔히 4대 문명의 발상지라는 말을 쓰지만, 실은 2대 문명이라고 해야 한다. 먼저 하나는 황허 문명인데, 이것은 지금 동양 문명의 뿌리다. 나머지 세 문명은 황허 문명처럼 궤적이 확실하지 않다. 인더스 문명은 도시 유적만 남겼을 뿐 후대에 전승되지 않았고,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은 한데 합쳐져 서양 문명의 모태가 되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문명은 크게 동양 문명과 서양 문명의 두 가지인 셈이다(물론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아메리카에도 고대 문명이 있었지만, 오늘날과의 관련성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마이너’ 문명일 수밖에 없다). 동양 문명은 곧 중국 문명이다. 중..
중국사(中國史) 목차 개요: 중국역사개관 1) 고대시대(古代時代)중국역사십팔사략삼황(三皇) 시대천황씨 & 지황씨인황씨 & 유소씨 & 수인씨복희씨 & 신농씨오제(五帝)의 시대황제씨황제의 아들태평성대를 누린 요순시대‘격양가’와 요(堯) 임금효로 선양 받은 순임금하왕조와 상왕조의 흥망치수를 잘한 우왕 2) 은주시대(殷周時代)중국역사십팔사략상나라의 탕왕과 주왕은혜가 새에게도 미친 탕왕주나라의 고공단보와 문왕공평무사한 문왕은나라 정벌과 백이숙제은나라 폭군 주왕백이와 숙제태공망 여상의 이야기문왕, 여상을 만나다주공의 치세와 유왕과 포사의 폭정신중하게 행동한 주공 단포사에게 빠진 유왕 3) 춘추시대(春秋時代)중국역사십팔사략최초의 패자 제환공과 관중제환공의 등극관중과 포숙아고난을 겪고 등극한 진문공송양공초장왕오나라..
9. 삼국시대(三國時代) 1. 개요 ① 삼국시대의 정립(鼎立) 1. 황건적의 난을 계기로 군웅이 할거하게 되었으며, 이 가운데 천하를 삼분하여 대치하고 있던 촉한(蜀漢)ㆍ위(魏)ㆍ오(吳)를 삼국시대라 함. 2. 조조(曹操)는 후한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를 맞아들여 천자의 명을 빙자하였으며 당대 명문 출신인 원소를 격파하여 중원 통일의 기초를 마련함. 3. 208년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대군을 강동에 결집시켜 손권ㆍ유비 연합군과 적벽대전을 벌였으나 대패하여 삼국이 정립하는 형세가 됨. ②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기 1. 삼분하여 대치해 있던 삼국은 위의 뒤를 이은 진(晉) 나라에 의해 멸망됨. 위(魏)를 정통으로 삼기에 위진남북조 시대라 부름. 2. 촉한을 토벌한 공로로 진왕(晉王)이 된 사..
7. 2차에 걸쳐 일어난 당고(黨錮)의 화(禍) ① 2차에 걸친 당고의 화 1. 양기의 부인인 손수(孫壽)는 남편의 권력과 동등할 정도로 위세를 부림. 2. 뇌물을 받고 죄를 용서해주었기 때문에 손수의 집에는 뇌물을 바치려는 행렬이 늘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함. ② 1차 당고(黨錮)의 화 1. 이런 혼란 가운데 양태후가 죽었으며 양기의 누이동생으로 환제(桓帝)의 황후였던 양씨도 세상을 떠남. 2. 환제는 이런 틈을 타 양씨 가족을 몰아내기로 함. 3. 환관 당형(唐衡)을 불러 몰아낼 계책을 물으며 모든 호위병들을 집결시켜 양씨 토벌 계획을 실행하여 성공시킴. 4. 그런 기쁨도 잠시 양씨 토벌에 공이 있는 다섯 환관이 열후의 자리에 올라 정치를 자기 마음대로 함. 5. 대학 유생들이 이에 반발하자 환관들은 ..
6. 우허의 활약, 그리고 두태후와 양기(梁冀)의 횡포로 서서히 저무는 후한 ① 외척 두태후(竇太后)의 섭정과 환관 1. 화제(和帝)가 10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그의 어머니 두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면서 두씨 일족이 권력을 장악하게 됨. 2. 장성한 화제는 이러한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측근인 환관 정중(鄭衆)에게 의지하게 됨. 3. 후한의 후반기는 외척과 환관이 번갈아 정권을 농락하는 일이 계속됨. ② 양기(梁冀)의 횡포 1. 양기(梁冀)는 순제(順帝) 황후의 오빠로서, 자신의 누이가 순제의 황후가 되어 서서히 권력을 손에 쥠. 2. 그는 아버지를 집금오(執金吾)에, 자신을 그 아래 자리인 양읍후에 봉한 후 차츰 관직을 높여 대장군 자리를 승계함. 3. 3년 후 순제가 30세로 죽자 두 살의 황태자가..
8. 후한 시대(後漢時代) 1. 혼란의 시작과 한나라를 장악한 왕망 ① 호족의 대두 1. 향촌 사회는 자치 운영으로 유지되었으나, 화폐 경제의 유입으로 돈이 많은 호족이 등장함. 2. 농민들은 점점 빈곤해져 유랑민ㆍ도적이 되거나 대부분 호족의 농지를 소작하며 노비가 되기도 함. 3. 이와 같이 공동체 관계가 무너졌을 뿐 아니라 빈농의 반란이 일어나 사회적, 경제적 위기가 초래됨. ② 왕망의 명망과 관직 진출 1. 왕망(王莽)은 원제(元帝)의 황후 왕씨의 동생인 왕안(王晏)의 아들로, 원제가 죽고 어린 나이로 성제(成帝)가 즉위하자 황후인 왕씨가 실권을 장악함. 2. 왕씨의 일족이었으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기에 가난하여 공부를 열심히 하였으며 효도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음. 3. 왕망은 왕..
7. 전한의 기틀을 제대로 닦은 문경지치의 시대 ① 문제(文帝)의 국치 1. 손수 농사를 지으며 솔선수범했으며, 모두 농사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계몽하고 가난한 농민에게는 오곡의 씨앗을 대여해 줌. 2. 고조의 1/15 세(稅)를 1/30 세(稅)로 바꿔 시행하고 농지와 조세를 12년 동안 면제하여 사회와 경제를 크게 발전시킴. 3. 검약을 기본으로 삼고 가장 총애하는 신부인(愼夫人)에게도 검약을 강조하였으며 어진 정치를 베풀어, 한 왕실이 가장 융성해짐. ② 경제(景帝)의 국치 1. 문제(文帝)가 제위 23년 만에 죽고 그 뒤를 이어 경제가 즉위함. 2. 아버지를 본받아 백성을 잘 다스리고 법과 제도의 정비에 힘씀. 3. 노장사상인 여민휴식(與民休息) 정책을 실시하여 사회 경제는 전무한 발전을 이뤘고 사..
7. 전한시대(前漢時代) 1. 개요 ① 특징 1. 한고조 유방은 봉건제의 장점과 군현제(郡縣制)의 장점을 살린 군국제(郡國制)로 한왕조의 기틀을 접음. 2. 초기엔 한신과 팽월 등 창업 공신들을 숙청하여 황제권을 강화했으며 문제(文帝)ㆍ경제(景帝) 때엔 선정이 베풀어져 태평성대였음. 3. 무제(武帝)는 대내적으론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운영할 방안을 마련하고 대외적으론 흉노를 정벌하고 변방을 개척하며 전성기를 구가함. 4. 화려한 외형의 이면에는 재정이 궁핍해지고 외척이 정치에 관여하는 혼란이 있어 14대 평제 때에 이르면 외척 왕망(王莽)이 한나라를 찬탈하고 신(新)이란 나라를 세움(이때부터 후한임). 5. 신은 제도개혁에 실패하여 15년 만에 망하여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다시 한왕조를..
6. 초한쟁패(楚漢爭霸) 1.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 1. 호해(胡亥)의 폭정: 반대파 숙청 및 이사까지 요참형(腰斬刑)으로 죽이고 잦은 장정과 징집으로 원성 높아짐. 2. 북쪽 변방 수비의 명을 받고 어양으로 향하던 중 폭우로 기일 내 도착이 불가능해지자 인솔자 죽이고 항쟁 시작. 3. 진(陳)을 함락하고 진승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나 부하에 살해당함으로 6개월 만에 끝났고 반란은 계속 발생함. 2. 항우와 유방 ① 항우(項羽) 1. 초(楚) 귀족의 후예로 명장 항연(項燕)의 아들이자, 숙부 항량(項梁)에게 의지하여 병법을 배움. 2. 진시황의 순수(巡狩)를 보고 자신도 저 자리에 있겠다고 꿈을 키웠으며 진승과 오광의 난을 접하고 회계군수를 죽이고 군사를 모음. ② 유방(劉..
5. 진나라 시대 1. 여불위(呂不韋)의 통일제국을 위한 큰 그림 ① 여불위(呂不韋)와 자초(子楚) 1. 전국 말기의 대상인으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하여 재산을 축적한 대부호임. 2. 어느 날 조나라 수도 한단에 갔다가 인질로 와 있는 진나라 왕자로 진소왕의 둘째 아들 안국군(安國君)의 가운데 아들로 비중 없는 인물이었던 자초(子楚)를 만나게 되었고, 사귀어 둠. ② 여불위의 큰 그림 1. 자초를 등극시키기 위해 빈객과 사귈 수 있는 돈을 줬고 안국군이 사랑하는 화양부인(華陽夫人)의 입김을 빌리기로 함. 2. 화양부인은 그의 언니 말을 잘 따른다는 걸 알고 제물을 주어 자초에 대해 좋은 평을 얘기하도록 언니를 구워삶음. 3. 언니는 자식이 없는 동생 화양부인에게 자초를 후계자로 삼아..
4. 전국시대(戰國時代) 1. 정세와 위나라의 오기(吳起) ① 정세 1. 진(晉)의 실권이 대부에게 넘어가 BC 453년에 조(趙)ㆍ위(魏)ㆍ한(韓)으로 분열됨. 2. 전국칠웅(戰國七雄)이 등장했고 위(魏)ㆍ제(齊)ㆍ진(秦) 세 나라가 가장 강국이었음. ② 상황 위(魏)가 제(齊)의 서쪽, 조(趙)의 수도 한단(邯鄲)을 공략, 초(楚)의 황하 이남을 차지함. ③ 공자의 제자 자하의 문하생인 오기(吳起)의 오기(傲氣) 오기의 이동 동선 위(魏)⇒노(魯)⇒위(魏)⇒초(楚) 1. 위(魏) 출신으로 등용되길 바랐으나 되지 않자 30명을 죽이고 ‘등용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떠나, 노(魯)에서 관직을 얻음. 2. 제(齊)가 노(魯)를 공격할 때 노(魯)의 장군으로 등용하려 했으나 오기의 부..
3. 춘추시대(春秋時代) 1. 개요 ① 주나라와 춘추전국 시대의 구분 동주(西周)서주(東周)=춘추전국(春秋戰國)BC 11세기~771년 낙양(洛陽)으로 도읍 옮기기 전BC 770~256 낙양 천도 후 진(秦) 통일 전까지 ②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차이점 춘추(春秋)전국(戰國)국명유래공자(孔子)가 쓴 역사서 이름에서 유래유향(劉向)이 쓴 책의 이름에서 유래국가개념자연발생적 성읍국가모든 권력이 전제군주에게 있는 영토국가특징춘추오패(春秋五覇)가 등장하나, 주(周)의 권위는 인정진(晉)이 조(趙)ㆍ위(魏)ㆍ한(韓)으로 분리되며 약육강식의 세상전쟁양상전차중심 전투, 무기는 청동기보병 중심 전투, 무기는 철기, 쇠노의 등장 2. 춘추 최초의 패자 제환공과 그의 모사 관중 ① 치열한 왕위 쟁탈 1. 희공..
4. 태공망 여상의 이야기 ① ‘태공망(太公望)’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 1. 여상(呂尙)은 주(周)의 기틀을 다진 인물로, 젊었을 때 글공부만 하다가 서백(西伯)인 문왕(文王)에 의해 발탁됨.2. 고공단보(古公亶父)가 기대하는 인물이라 하여 ‘태공망(太公望)’이라 불리었고, 성이 강(姜)씨이기에 ‘강태공(姜太公)’이라 불림. ② 아내에게 분풀이한 여상 가난을 이기지 못한 아내를 제(齊, 강태공에게 분봉됨)에 귀국하는 길에 보게 되지만, ‘쏟아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覆水不返盆]’며 쳐다보지도 않음. 인용개관사기목차동양사문왕이 여상을 만나다
2. 은주(殷周)시대상(商) 나라로 불리다가 반경(盤庚) 왕이 마지막으로 옮긴 도읍지가 은(殷)이기에 은나라로도 바꿔부르게 됨 1. 상나라의 탕왕과 주왕 ① 탕(湯) 임금의 내력 1. 시조가 ‘설(契)’이며 설은 우임금을 도와 치수에 많은 공을 세움. 설(契)의 14대 손임. 2. 왕과 귀족으로 정권을 구성했으며 고대 국가의 면모를 갖춤. ② 상(商) 나라 말기의 풍경 주(紂)는 젊었을 땐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유역을 넓혔으나, 달기(妲己)의 꾀임으로 충신 비간(比干)을 죽임. 2. 주나라의 고공단보와 문왕 ① 주나라의 기틀 다듬기 1. 후직(后稷)의 11대 손인 고공단보(古公亶父) 때에 기산(岐山)으로 도읍을 옮겨 기틀을 갖춤. 2. 고공단보(古公亶父)에겐 태백(太伯)ㆍ우중(虞仲)ㆍ..
1. 고대(古代) 시대 1. 삼황(三皇) 시대 ① 삼황(三皇) 1. 삼황(三皇)을 나누는 방식엔 여러 이설(異說)이 있다. ① 복희씨(伏羲氏)ㆍ여와씨(女誣氏)ㆍ신농씨(神農氏)② 천황씨(天皇氏)ㆍ지황씨(地皇氏)ㆍ인황씨(人皇氏)로 되어 있거나 여와씨(女誣氏)→수인씨(燧人氏)로 되어 있기도 함 2. 업적이름업적복희씨(伏羲氏)팔괘(八卦) 제작, 고기 잡는 법 전수신농씨(神農氏)농사 기술 전수여와씨(女誣氏)황토와 물을 섞어 인간 창조. 3. 의의: 정식 역사라 할 순 없으나, 신화 가운데 중국 원시부족 사회의 생활 모습이 투영됨. 2. 오제(五帝)의 시대 ① 오제(五帝) 1. 오제(五帝): 소호(少昊)ㆍ전욱(顓頊)ㆍ제곡(帝嚳)ㆍ제요(帝堯)ㆍ제순(帝舜) 2. 황하 중류 지역에 황제(黃帝)를 ..
중국사 개관(槪觀) 1) 고대시대 & 춘추전국시대 & 진나라 夏ㆍ殷(BC 2070~6C)周ㆍ春秋戰國(11C~256 , 770~221)秦(221~206)시대배경황하문명시작西周11C~771 / 호경(鎬京)시황제 통일東周770~256 / 낙양(洛陽)사회ㆍ정치 체제 1. 봉건제(封建制) 붕괴2. 철제 농기구 사용1. 문자통일(소전)2. 만리장성 축조학문 경향 제자백가(諸子百家)법가사상 통치이념유가ㆍ도가의 경향춘추전국(春秋戰國)유가(儒家)공자, 맹자, 순자도가(道家) 노자, 장자문학사하은(夏殷) 이전요(堯)의 「격양가(擊壤歌)」진(秦)1. 분서갱유(焚書坑儒)로 낮은 문화 수준.2. 이사(李斯) 「간축객서(諫逐客書)」: 소체(騷體)와 부체(賦體) 조화은대 문학갑골문(甲骨文)선진(先秦)북방: 시경(詩經)① 민간의..

종횡무진 동양사 목차 남경태 연표선사 ~ 위만조선삼국건국 ~ 신라통일남북국고려조선 건국~연산군중종~임란 발발임란~정조순조~조선 말기대한제국~현대사 책 머리에2009년 통속적인 역사책에 싫증을 느낀 독자에게2014년 지은이의 향기가 나는 종횡무진 시리즈가 되기를 바라며 프롤로그: 동양의 태어남과 자람, 그리고 뒤섞임 1부 태어남 제1장 중국이 있기까지신화와 역사의 경계구름 속의 왕조를중화 세계의 영원한 고향기나긴 분열의 시대최초의 통일을 향해동양 사상의 뿌리(유가, 도가, 묵가, 법가) 2장 인도가 있기까지굴러온 돌의 승리인도와 종교정치적 공백이 이룬 통일 3장 일본이 있기까지금속의 빛을 던져준 야요이 문화빛은 서방에서왜에서 일본으로(쇼토쿠 태자) 2부 자람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1..

에필로그: 문명의 뒤섞임, 차이와 통합을 아우르는 시대로 1. 이것으로 중국ㆍ인도ㆍ일본의 동양 3국을 다룬 동양사의 여정은 끝났다. 모두 1940년대 후반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전후 질서’가 수립된 시점 언저리에서 끝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이후의 역사는 다른 시대, 즉 ‘현대‘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이 현대는 ‘진행 중의 역사’이므로 역사라기보다는 ‘시사(時事)’에 가깝다. 따라서 역사책보다는 신문을 참고하는 게 더 좋을 듯하다. 게다가 현대의 역사는 한 지역의 역사가 아니다. 지금까지는 동양사를 세계사에서 떼어내 별도로 이해하는 방식이 유용했으나 이제부터는 전 세계를 하나의 역사권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현대의 역사는 더 시간이 지나야만 지금과 같은 의미의 ‘역사’로 서술될 수..

9장 도발로 수미일관한 일본 1. 내전을 국제전으로 하극상의 절정 100년에 걸친 센고쿠 시대를 끝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장수로서의 용맹과 정치 지도자로서의 지략이 두루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결국 그 자신이 센고쿠 시대를 특징지은 하극상의 제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1582년에 노부나가는 출병을 앞두고 교토의 혼노사(本能寺)에 머물다가 예기치 않게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 1528~1582)의 배신으로 반란군에 포위된 상황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당시 그가 혼노사에 간 이유는 모리(毛利) 가문을 공격하던 부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가 지원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노부나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모리 측에게 그 사실을 숨긴 채 즉각 강화..

8장 외부에서 온 인도의 통일 1. 분열된 조국과 통일된 식민지 남의 집에서 벌인 힘겨루기 18세기 중반 이후 무굴 제국은 1차 부도가 난 상태에서도 100년이나 더 존속하다가 1858년에야 ‘최종 부도’ 처리되었다. 이 기간 동안 무굴은 제국의 지위가 아니라 한낱 지방정권에 불과한 위상으로 그저 명맥만 이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무굴이 남긴 정치적 공백은 누가 메웠을까? 중국과 달리 인도의 역사는 통일 제국이 아니라 늘 분권화된 상태가 중심이었다. 그렇다면 인도 역사상 최대의 제국이 쇠락했을 때 그 찬란한 통일의 빛만큼 짙은 분열의 그늘이 드리워진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번은 그 이전의 어떤 분열기와도 달랐다. 과거의 분열은 기본적으로 인도 토착 왕조들이나 인근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국가들이 세력 다..

3부 섞임 몽골 제국 시절부터 중국은 일찌감치 세계화의 길로 나선다. 그러나 낡은 제국 체제는 발전에 내내 걸림돌이 되었고, 결국 중국은 밀려오는 서양 세력 앞에 비참하게 몰락한다. 통일보다 분열이 자연스러웠던 인도는 영국의 손에 의해 통일을 이루면서 식민지 시대를 맞는다. 일본의 대외 진출은 곧 침략 전쟁이었다. 한반도를 놓고 중국과 경쟁하던 일본은 마침내 꿈을 이루지만 군국주의의 덫에 걸려든다.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1. 역사상 가장 강했던 제국 슈퍼스타의 등장 한족의 송 제국을 강남으로 밀어내고 화북을 지배한 거란의 요나 여진의 금은 예전과 같은 유목 국가가 아니었다. 예전의 북방 민족들은 힘이 강성해지면 중국을 침략하고 약탈하는 데 그쳤지만, 요와 금은 아예 중원에..

6장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1. 무한 내전의 출발 모방의 한계 645년의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을 통해 일본은 비로소 고대국가의 기틀을 갖추고 당대의 동북아시아 여러 민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7세기 중반이면 한참 늦은 출발이기는 하지만, 중국 문화권의 한반도보다 800년이나 늦게 신석기시대를 졸업한 일본 민족으로서는 비약적인 발전이라 하겠다. 그런 성과를 이룬 데는 섬나라라서 외적의 침입이 없었다는 지리적 여건과 아울러 일본 민족 특유의 뛰어난 모방 솜씨가 큰 역할을 했다【섬이란 사실 양면적인 조건이다. 외부의 ‘침략’을 막기에는 더없이 좋지만 동시에 외부의 ‘영향’마저 가로막혀 폐쇄적으로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양면적 조건은 주체의 역량에 따라 좋게 작용할 수도 있고 나쁘게 작용..

5장 분열이 자연스러운 인도 1. 짧은 통일과 긴 분열 법에 의한 정복 인도 최초의 통일 제국인 마우리아 왕조는 기원전 322년부터 기원전 187년까지 불과 150년밖에 존속하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 지중해의 로마 제국과 중국의 한 제국이 400년 이상이나 수를 누린 것에 비하면 마우리아는 미니 제국인 셈이다(인도 역사에서는 무굴제국을 제외하면 나중에도 수명이 200년 이상 지속된 왕조가 거의 없었다). 그런 만큼 제국의 성격도 크게 다르다. 마우리아를 비롯해 인도의 역대 통일 왕조들은 중국이나 유럽의 제국에 비해 그다지 강력한 힘을 지니지 못했다. 남인도(인도 반도)까지 포함한 인도 아대륙 전체를 강역으로 하는 국가가 출현한 것도 근대에 와서의 일이다. 사실 인도 역사에서는 중국의 역대 왕조들처럼 ..

2부 자람 나라와 민족의 꼴이 제법 갖추어지면서 중국, 인도, 일본은 독자적 발전의 시대를 맞는다. 제국 체제로 접어든 중국은 동아시아 문명권의 중심이자 국제 질서의 핵으로 자리 잡는다. 중국과 달리 인도는 내내 분권화된 역사를 전개하다가 결국에는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받는다. 일본은 대륙과의 교류를 끊고 치열한 내전의 역사로 접어드는데, 그 결과 무사 정권이 탄생하게 된다.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1. 중화의 축 죽 쒀서 개 준 통일 기원전 221년 최초로 드넓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나서 진(秦)의 왕인 정(政)이 최초로 한 일은 자신의 호칭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 중국 대륙이 하나의 강력한 제국을 이루었으니 과거 제후들의 호칭인 왕(王)이나 공(公)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3장 일본이 있기까지 금속의 빛을 던져준 야요이 문화 우리나라 역사를 처음 배울 때 신석기시대의 유물로 빗살무늬토기라는 것이 나온다. 일본의 신석기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줄무늬토기가 있었다. 빗살무늬는 한자어로 즐문(櫛文)이지만 줄무늬는 새끼줄로 만들기 때문에 승문(繩文)이라고 하는데, 일본식 발음으로는 조몬이다. 그래서 기원전 8000년경부터 시작된 일본의 신석기 문화를 조몬 문화라고 부른다. 앞서 중국이나 인도의 역사에서는 생략한 신석기시대를 일본의 역사에서 소개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중국은 문명의 발상(황허 문명)에서부터 씨족국가, 고대국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자생적이고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또 인도는 인더스 문명이라는 발달한 자생적인 문명이 있었으나 아리아인의 침입으로 파괴되고 이후에는 예전..

2장 인도가 있기까지 굴러온 돌의 승리 인도의 서쪽 경계 부근을 흐르는 인더스 강 유역은 유명한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다.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마셜은 인더스 강 일대의 모헨조다로에서 대규모 작업을 벌인 끝에 인류 초기 문명의 유적을 찾아냈다. 사막 한가운데 있었던 덕분에 비교적 잘 보존된 상태로 모습을 드러낸 모헨조다로 유적은 바둑판 모양의 도시 구획에다 벽돌로 쌓은 주택, 도로와 하수도 시설, 커다란 목욕탕, 공회당 등 고대 로마에 못지않은 수준의 문명을 보여주었다. 로마에 비해 3000년이나 앞선 기원전 3000년 무렵에 이미 인도에는 이런 선진 문명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도의 역사는 인더스 문명 이후 1000여 년 동안 후대에 알려지지 않았다. 인도의 역사가 다시 ‘진행’되는 것은 ..

1부 태어남 황허 문명을 계승한 중원 문명은 발상지를 중심으로 점차 문명의 빛을 밝힌다. 주나라는 중국 왕조의 기틀을 만들고 춘추전국시대에는 중국 사상의 토대가 놓인다. 종교의 나라답게 인도의 역사는 처음부터 종교와 밀접하게 맞물린다. 일본은 대륙에서 문명을 전해받지만 중국과 다른 ‘작은 천하’를 이루면서 특유의 고립된 역사를 전개한다. 1장 중국이 있기까지 신화와 역사의 경계 나는 바오밥 나무란 교회만큼이나 큰 나무라는 것을 어린 왕자에게 이야기해주었다.그는 영리하게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하지만 바오밥 나무도 크기 전에는 조그마할 거 아냐?”-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아무리 큰 나라라도 처음에 생길 때는 아주 작고 평범하게 마련이다. 고만고만한 여러 마을이 뒤섞여 살..

프롤로그:동양의 태어남과 자람, 그리고 뒤섞임 동양이라는 말 보통 해가 뜨는 방향을 동쪽이라고 말하지만, 지구는 둥그니까 어디가 동쪽이라고 못 박을 수는 없다. 동양이라는 명칭은 사실 유럽인의 시각에서 나왔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 고대와 중세의 유럽인들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이 지구의 전부라고 여겼다. 그나마도 그들이 아는 아시아는 소아시아와 인도에 불과했고, 아프리카는 사하라 이북에 국한되었다. 아프리카는 유럽의 남쪽에 있으므로 동서 방향과는 무관하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서쪽에 있다고 믿었고, 유럽에서 동쪽으로 멀리 뻗어 있는 아시아를 동양(East)이라고 불렀다. 당시 유럽인들은 아직 동방의 끝까지 와본 적이 없었으므로 주로 지금의 서아시아 지역을 ..
등용문(登龍門) 河津一名龍門, 水險不通, 魚鼈之屬, 莫能上. 江海大魚, 薄集龍門下數千, 不得上, 上則爲龍也. 『후한서(後漢書)』 「이응전(李應傳)」 해석 河津一名龍門, 水險不通, 황하(黃河) 상류의 하진(河津)을 일명 용문이라 하는데 물길이 험해 통하질 않으니 魚鼈之屬, 莫能上. 물고기와 자라의 무리들이 오를 수가 없다. 江海大魚, 薄集龍門下數千, 양자강과 바다의 큰 물고기들이 용문의 아래에 가까이 모인 것이 수천 마리인데 不得上, 上則爲龍也. 『후한서(後漢書)』 「이응전(李應傳)」 오를 수 없지만 오른다면 용이 된다. 인용 고사성어
현인을 모시기 위한 주공의 고군분투 주공악발(周公握髮) 『史記』曰. 武王崩, 周公相成王. 使其子伯禽, 代就封於魯, 戒之曰: “我文王之子, 武王之弟, 成王之叔父, 我於天下亦不賤矣. 然我一沐三握髮, 一飯三吐哺, 起以待士, 猶恐失天下之賢人. 子之魯, 愼無以國驕人.” 해석 『史記』曰. 『사기』에 실린 내용이다. 武王崩, 周公相成王. 무왕이 붕어(崩御)하시자 주공이 성왕을 도왔다. 而使其子伯禽, 代就封於魯, 戒之曰: 아들 백금에게 대신하여 노나라의 봉지(封地)로 나가게 하며 그를 경계했다. “我文王之子, 武王之弟, “나는 문왕의 자식이고 무왕의 아우이며 成王之叔父, 我於天下亦不賤矣. 성왕의 숙부로 나는 천하에 또한 천하지 않다. 然我一沐三握髮, 그러나 나는 한 번 머리 감을 때 머리카락을 세 번 쥐어야 했고 一飯..
순망치한(脣亡齒寒) 한 나라가 망하면 이웃나라도 망하게 된다 晉侯復假道於虞, 以伐虢. 宮之奇諫曰: “虢, 虞之表也, 虢亡, 虞必從之. 晉不可啓, 寇不可翫. 一之謂甚, 其可再乎? 諺所謂輔車相依, 脣亡齒寒者. 其虞ㆍ虢之謂也.” 公曰: “晉, 吾宗也, 豈害我哉?” … (중략) … 弗聽, 許晉使. 宮之奇以其族行曰: “虞不臘. 在此行也, 晉不更擧矣.” … (중략) … 冬十二月丙子朔, 晉滅虢, 虢公醜奔京師. 師還, 館于虞, 遂襲虞, 滅之.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5년 해석 晉侯復假道於虞, 以伐虢. 진후인 헌공(獻公)이 우나라에 길을 빌려 괵나라를 치려 했다. 宮之奇諫曰: “虢, 虞之表也, 궁지기가 간했다. “괵나라는 우나라의 겉면이니 虢亡, 虞必從之. 괵나라가 망하면 우나라도 반드시 따라 망할 ..
배수지진(背水之陣) 목숨을 걸고 도전하다 諸將問信曰: “兵法, 右倍山陵, 前左水澤, 今者將軍令臣等, 反背水陣以勝, 何也?” 信曰: “此在兵法, 顧諸君不察耳, 『兵法』不曰: ‘陷之死地而後生, 置之亡地而後存乎.’ 且信非得素拊循士大夫也, 此所謂驅市人而戰. 予之生地, 皆走, 寧得而用之乎.” 諸將皆服. 『通鑑節要』 「漢紀」 高祖 1년 해석 諸將問信曰: 여러 장수들이 한신에게 물었다. “兵法, 右倍山陵, 前左水澤, “병법에는 산과 언덕을 오른쪽과 등에 지고 물과 연못을 앞과 왼쪽에 둔다고 했습니다. 今者將軍令臣等, 反背水陣以勝, 何也?” 지금 장군은 신하들에게 도리어 물을 등지고 진을 치게 했지만 이건 건 어째서입니까?” 信曰: “此在兵法, 顧諸君不察耳, 한신이 말했다. “이것은 병법에 있는 것인데 다만 그대들이 ..
구상유취(口尙乳臭) 유치한 사람 漢王, 使酈食其, 緩頰往說魏王豹, 且召之, 豹不聽. 於是, 漢王以韓信ㆍ灌嬰ㆍ曹參, 俱擊魏, 漢王問食其, “魏大將誰也?” 對曰: “柏直.” 王曰: “是口尙乳臭, 安能當韓信, 騎將誰也?” 曰: “馮敬.” 曰: “是秦將馮無擇子也, 雖賢, 不能當灌嬰. 步卒將誰也?” 曰: “項它.” 曰: “不能當曹參, 吾無患矣.” 『통감절요(通鑑節要)』 해석 漢王, 使酈食其, 緩頰往說魏王豹, 한왕이 역이기에게 비유를 써가며 위왕 표에게 가서 설득하게 하고 且召之, 豹不聽. 또 그를 불렀지만 표는 듣질 않았다. 於是, 漢王以韓信ㆍ灌嬰ㆍ曹參, 俱擊魏, 이에 한나라왕은 한신ㆍ관영ㆍ조참에게 함께 위나라를 치게 했고 漢王問食其, “魏大將誰也?” 한나라 왕이 역이기에게 “위나라 대장군은 누구인가?”라고 묻자..
원교근공(遠交近攻) 먼 나라와 친하고 가까운 나라는 공격하는 외교정책 魏人范雎亡入秦, 說秦王曰: “以秦國之大, 士卒之勇, 以治諸侯, 譬如走韓廬而搏蹇兎也, 而閉關十五年, 不敢窺兵於山東者, 是穰侯爲秦謀不忠, 而大王之計, 亦有所失也.” 王跽曰: “願聞失計.” 雎曰: “夫穰侯越韓ㆍ魏而攻齊, 非計也. 今王不如遠交而近攻, 得寸, 則王之寸也; 得尺, 則王之尺也. 今夫韓ㆍ魏, 中國之處而天下之樞也. 王若欲霸, 必親中國, 以爲天下樞, 以威楚ㆍ趙. 楚ㆍ趙皆附, 齊必懼矣, 齊附, 則韓ㆍ魏因可虜也.” 王曰: “善! 乃以范雎爲客卿, 與謀國事.” 『통감절요(通鑑節要)』 「주기(周紀)」 난왕(赧王) 58년 해석 魏人范雎亡入秦, 說秦王曰: 위나라 사람인 범저가 도망쳐 진나라에 들어가 진나라왕에게 유세했다. “以秦國之大, 士卒之勇, 以..
양상군자(梁上君子) 가난하기에 나쁜 짓을 하다 陳寔, 字仲弓, 潁川許人也. … (중략) … 寔在鄕閭, 平心率物. 其有爭訟, 輒求判正, 曉譬曲直, 退無怨者. 至乃歎曰: “寧爲刑罰所加, 不爲陳君所短.” 時歲荒民儉. 有盜夜入其室, 止於梁上, 寔陰見, 乃起自整拂, 呼命子孫, 正色訓之曰: “夫人不可不自勉. 不善之人, 未必本惡, 習以性成, 遂至於此, 梁上君子者是矣.” 盜大驚, 自投於地, 稽顙歸罪. 寔徐譬之曰: “視君狀貌, 不似惡人. 宜深剋己反善, 然此當由貧困.” 令遺絹二匹, 自是一縣無復盜竊. 『후한서(後漢書)』 「진식열전(陳寔列傳)」 해석 陳寔, 字仲弓, 潁川許人也. 진식의 자는 중궁이고 영천 허 사람이다. … (중략) … 寔在鄕閭, 平心率物. 진식이 고향이 있을 적에 마음에 평상심을 유지했고 사물에 모범이 되었다..
백년하청(百年河淸) 전혀 이루어질 희망이 없다 冬, 楚子囊伐鄭, 討其侵蔡也. 子駟ㆍ子國ㆍ子耳, 欲從楚, 子孔ㆍ子蟜ㆍ子展, 欲待晉. 子駟曰: “周詩有之曰: ‘俟河之淸, 人壽幾何. 兆云詢多, 職競作羅.’ 謀之多族, 民之多違, 事滋無成. 民急矣, 姑從楚, 以紓吾民, 晉師至, 吾又從之. 敬共幣帛, 以待來者, 小國之道也. 犧牲玉帛, 待於二竟, 以待彊者, 而庇民焉. 寇不爲害, 民不罷病, 不亦可乎.”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8년 해석 冬, 楚子囊伐鄭, 겨울에 초나라 자낭이 정나라를 친 것은 討其侵蔡也. 정나라가 채나라를 침범한 것에 대한 토벌이었다. 子駟ㆍ子國ㆍ子耳, 欲從楚, 자사ㆍ자국ㆍ자이는 초나라를 따르려 했고 子孔ㆍ子蟜ㆍ子展, 欲待晉. 자공ㆍ자교ㆍ자전은 진나라를 기다리려 했다. 子駟曰: “周詩有..
자신의 주제를 넘어서 베푸는 인정 송양지인(宋襄之仁) 冬十一月己巳朔, 宋公及楚人戰于泓. 宋人旣成列, 楚人未旣濟. 司馬曰: “彼衆我寡, 及其未旣濟也, 請擊之.” 公曰: “不可.” 旣濟而未成列, 又以告, 公曰: “未可.” 旣陳而後擊之, 宋師敗績, 公傷股, 門官殲焉. 國人皆咎公, 公曰: “君子不重傷, 不禽二毛. 古之爲軍也, 不以阻隘也. 寡人雖亡國之餘, 不鼓不成列.”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22년 해석 冬十一月己巳朔, 겨울 11월 기사 초하루에 宋公及楚人戰于泓. 송양공(宋襄公)이 초나라 사람들과 홍수(泓水)에서 싸웠다. 宋人旣成列, 楚人未旣濟. 초나라 사람들이 이미 대열을 정비했지만 초나라 사람은 아직 건너질 않았다. 司馬曰: “彼衆我寡, 及其未旣濟也, 사마가 말했다. “저 군사들은 많고 우리들..
갈피가 잡히지 않아 혼란스럽다 오리무중(五里霧中) 張楷字公超, 通『嚴氏春秋』ㆍ『古文尙書』, 門徒常百人. 性好道術, 能作五里霧. 時關西人裴優, 亦能爲三里霧, 自以不如楷, 從學之, 楷避不肯見. 桓帝卽位, 優遂行霧作賊, 事覺被考, 引楷, 言從學術. 楷坐繫廷尉詔獄, 積二年, 恒諷誦經籍, 作『尙書』注. 後以事無驗, 見原還家. 建和三年, 下詔, 安車備禮聘之, 辭以篤疾, 不行. 年七十, 終於家. 『후한서(後漢書)』 「장해열전(張楷列傳)」 해석 張楷字公超, 通『嚴氏春秋』ㆍ『古文尙書』, 장해의 자는 공초인데 『엄씨춘추』와 『고문상서』를 통달하여 門徒常百人. 문하생이 항상 100명이나 됐다. 性好道術, 能作五里霧. 성품이 도술을 좋아해 5리의 안개를 만들 수 있었다. 時關西人裴優, 亦能爲三里霧, 이때에 관서사람 배우는 또..
초나라의 애국시인 굴원 屈原, 名平, 楚之同姓. 爲懷王左徒, 博聞强志, 明於治亂. 嫺於辭令, 王甚任之. 上官大夫與之同列, 爭寵而心害其能, 因讒之, 王怒而疏平. 後秦昭王欲與懷王會, 平曰: “秦虎狼之國, 不如無行.” 懷王稚子子蘭勸王行, 王死於秦. 長子頃襄王立, 以子蘭爲令尹. 子蘭使上官大夫, 短原於王, 王怒而遷之. 原至江濱, 被髮行吟澤畔, 顔色憔悴, 形容枯槁. 漁父問曰: “子非三閭大夫歟, 何故至此?” 原曰: “擧世混濁, 而我獨淸; 衆人皆醉, 而我獨醒, 是以見放.” 漁父曰: “夫聖人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 擧世混濁, 何不隨其流而揚其波; 衆人皆醉, 何不餔其糟而啜其醨? 何故懷瑾握瑜, 而自令見放爲.” 原曰: “吾聞之, 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 誰能以身之察察 受物之汶汶者乎? 寧赴湘流, 而葬乎江魚腹中耳, 又安能以皓..
완벽(完璧) 결점이 없다 趙王得楚和氏璧, 秦昭王欲之, 請易以十五城. 趙王以問藺相如, 對曰: “秦以城求璧, 而王不許, 曲在我矣, 我與之璧, 而秦不與我城, 則曲在秦. 臣願奉璧而往. 使秦城不入, 請完璧而歸.” 相如至秦, 秦王無意償趙城. 相如乃紿秦王, 復取璧, 遣使者懷歸趙. 而以身待命於秦, 秦王賢而弗誅, 禮而歸之. 趙王以相如爲上大夫. 『통감절요(通鑑節要)』 「주기(周紀)」 난왕(赧王) 32년 해석 趙王得楚和氏璧, 조나라 왕이 초나라 화씨의 구슬을 얻었는데 秦昭王欲之, 請易以十五城. 진소왕이 그걸 욕심내어 15개 성으로 바꾸길 청하였다. 趙王以問藺相如, 對曰: 조나라 왕이 인상여에게 물으니 인상여가 대답했다. “秦以城求璧, 而王不許, “진나라가 성으로 구슬을 구하려 하는데 왕이 허락지 않으면 曲在我矣, 잘못은 저..
스스로를 추천하여 실력발휘한 모수 秦以王陵, 攻邯鄲. 武安君曰: “邯鄲實, 未易攻也, 且諸侯之救, 日至, 破秦軍必矣.” 辭疾不行. 乃以王齕, 代王陵. 趙王, 使平原君, 求救於楚, 平原君, 約, 其門下食客文武備具者二十人, 與之俱, 得十九人, 餘無可取者. 毛遂自薦於平原君, 平原君曰: “夫賢士之處世也, 譬若錐之處囊中, 其末立見. 今先生處勝之門下三年於此矣, 勝未有所聞, 是先生無所有也.” 毛遂曰: “臣乃今日, 請處囊中爾. 使遂蚤得處囊中, 乃穎脫而出, 非特其末見而已.” 平原君乃與之俱, 十九人相與目笑之. 平原君至楚, 與楚王言合從之利害, 日出而言之, 日中不決. 毛遂按劒歷階而上, 謂平原君曰: “從之利害, 兩言而決爾. 今日出而言, 日中不決, 何也?” 楚王怒叱曰: “胡不下? 吾乃與而君言, 汝何爲者也?” 遂按劒而前曰: “王之..
조창의 모함으로 옥사 당한 정숭 尙書令趙昌佞諂, 素害崇, 知其見疏, 因奏. “崇與宗族通, 疑有姦, 請治.” 上責崇曰: “君門如市人, 何以欲禁切主上?” 崇對曰: “臣門如市, 而臣心如水, 願得考覆.” 上怒, 下崇獄, 窮治, 死獄中. 『자치통감(資治通鑑)』 해석 尙書令趙昌佞諂, 상서령 조창이 아첨하길 좋아해 素害崇, 知其見疏, 평소에 정숭을 해치려 했는데 황상과 사이가 멀어졌음을 보아 알고 因奏. 그로 인해 주청했다. “崇與宗族通, 疑有姦, “정숭이 친척들과 내통하여 간사한 일을 꾸미나 의심되오니, 請治.” 이 일을 처리해주시길 청하옵니다.” 上責崇曰: 임금께서 정승을 꾸짖었다. “君門如市人, 何以欲禁切主上?” “그대 집 문이 저자거리 같은데 어째서 나와 관계를 끊으려 하는가?” 崇對曰: “臣門如市, 而臣心如..
계명구도(鷄鳴狗盜) 하잘 것 없어 보이지만 요긴한 재주 秦王聞孟嘗君之賢, 使涇陽君, 爲質於齊以請, 孟嘗君來入秦. 秦王以爲丞相, 或謂秦王曰: “孟嘗君相秦, 必先齊而後秦, 秦其危哉.” 秦王乃以樓緩爲相, 囚孟嘗君, 欲殺之. 孟嘗君, 使人, 求解於秦王幸姬. 姬曰: “願得君狐白裘.” 孟嘗君有狐白裘, 已獻之秦王, 無以應姬求. 客有善爲狗盜者, 入秦藏中, 盜狐白裘以獻姬, 姬乃爲之言於王而遣之. 王後悔, 使追之. 孟嘗君至關, 關法, 鷄鳴, 而出客. 時尙早, 追者將至, 客有善爲鷄鳴者, 野鷄聞之, 皆鳴. 孟嘗君乃得脫歸. 『통감절요(通鑑節要)』 「주기(周紀)」 난왕(赧王) 17년 해석 秦王聞孟嘗君之賢, 使涇陽君, 진나라 왕이 맹상군이 어질다는 걸 듣고 경양군에게 爲質於齊以請, 孟嘗君來入秦. 제나라의 인질이 되어 보길 청하니 맹..
의려이망(倚閭而望) 문에 기대어 기다리는 애틋한 부모의 마음 齊淖齒之亂, 王孫賈從湣王, 失王之處. 其母曰: “汝朝出而晩來, 則吾倚門而望, 汝暮出而不還, 則吾倚閭而望. 汝今事王, 王走, 汝不知其處, 汝尙何歸焉?” 王孫賈乃攻淖齒, 殺之. 於是, 齊亡臣, 相與求湣王子法章, 立以爲齊王, 保莒城, 以拒燕. 『통감절요(通鑑節要)』 「주기(周紀)」 난왕(赧王) 32년 해석 齊淖齒之亂, 王孫賈從湣王, 제나라 요치의 난으로 왕손가는 민왕을 수행하다가 失王之處. 왕이 계신 곳을 잃어버렸다. 其母曰: “汝朝出而晩來, 則吾倚門而望,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아침에 나가 늦게 돌아오면 나는 문에 기대어 기다렸고 汝暮出而不還, 則吾倚閭而望. 네가 저녁에 나가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마을문에 기대어 기다렸다. 汝今事王, 王走,..
삼고초려(三顧草廬) 인재를 구하고자 하는 절실함과 윗사람을 향한 노력의 진심 玄德曰: “大丈夫, 抱經世奇才, 豈可空老於林泉之下? 願先生, 以天下蒼生, 爲念, 開備愚魯, 而賜敎.” 孔明笑曰: “願聞將軍之志.” 玄德, 移坐促席, 而告曰: “漢室, 傾頹, 奸臣, 竊命, 備不量力, 欲伸大義於天下, 而智術淺短, 迄無所就. 惟先生, 開其愚, 而拯其厄, 實爲萬幸.” 孔明曰: “自董卓, 造逆以來, 天下豪傑, 竝起. 曹操, 勢不及袁紹, 而竟能克紹者, 非惟天時, 抑亦人謀也. 今操, 已擁百萬之衆, 挾天子, 以令諸侯, 此誠不可與爭鋒. 孫權, 據有江東, 已歷三世, 國險而民附, 此可用爲援, 而不可圖也. 荊州, 北據漢水, 利盡南海, 東連吳會, 西通巴ㆍ蜀, 此用武之地, 非其主, 不能守. 是殆天所以資將軍, 豈可棄乎? 益州, 險塞, 沃..
백미(白眉) 재능이 뛰어난 이 馬良字季常, 襄陽宜城人也. 兄弟五人, 竝有才名, 鄕里爲之諺曰: “馬氏五常, 白眉最良.” 良眉中有白毛, 故以稱之. -『三國志』 「촉서(蜀書)」 마량전(馬良傳) 해석 馬良字季常, 襄陽宜城人也. 마량의 자는 계상으로 양양 의성 사람이다. 兄弟五人, 竝有才名, 형제 다섯 사람이 함께 재주에 따른 명성이 있었는데 鄕里爲之諺曰: 마을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말했다. “馬氏五常, 白眉最良.” “마씨의 다섯 형제 중에 흰 눈썹을 지닌 이가 가장 뛰어나다.” 良眉中有白毛, 故以稱之. -『三國志』 「촉서(蜀書)」 마량전(馬良傳) 마량의 눈썹 가운데 흰 털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인용 고사성어 수업실연
망매지갈(望梅止渴) 매화를 상상하니 갈증이 멈추네 操曰: “適見枝頭梅子靑靑, 忽感去年征張繡時. 道上缺水, 將士皆渴. 吾心生一計, 以鞭虛指曰: ‘前面有梅林.’ 軍士聞之, 口皆生唾, 由是不渴. 今見此梅, 不可不賞, 又値煮酒正熟, 故邀使君小亭一會.” -『삼국연의(三國演義)』 해석 操曰: “適見枝頭梅子靑靑, 忽感去年征張繡時. 조조가 유비에게 말했다. “마침 가지 끝에 매화열매가 푸른 걸 보니 갑자기 작년에 장수를 칠 때가 생각났소. 道上缺水, 將士皆渴. 길가에 물이 없어 장수와 졸병들이 모두 갈증이 났네. 吾心生一計, 以鞭虛指曰: ‘前面有梅林.’ 나는 내심 한 계책을 내어 채찍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앞에 매화숲이 있다.’고 말했지. 軍士聞之, 口皆生唾, 由是不渴. 군사들이 이 말을 듣고 입에서 모두 침이 생겨 ..
도원결의(桃園結義) 복숭아 나무 아래서 의형제를 맺다 次日, 於桃園中, 備下烏牛白馬祭禮等項, 三人焚香再拜而說誓曰: “念劉備ㆍ關羽ㆍ張飛, 雖然異姓, 旣結爲兄弟, 則同心協力, 救困扶危, 上報國家, 下安黎庶. 不求同年同月同日生, 只願同年同月同日死. 皇天后土, 實鑒此心, 背義忘恩, 天人共戮.” 誓畢, 拜玄德爲兄, 關羽次之, 張飛爲弟. -『삼국연의(三國演義)』 해석 次日, 於桃園中, 備下烏牛白馬祭禮等項, 다음날 복숭아 동산에서 까마귀 소와 흰 말과 제사용품 등의 항목을 갖추고 三人焚香再拜而說誓曰: 세 사림이 향을 사르고 재배하며 맹세했다. “念劉備ㆍ關羽ㆍ張飛, 雖然異姓, 旣結爲兄弟, “바라건대 유비와 관우와 장비가 비록 다른 성이지만 이미 맺어 형제가 되었으니 則同心協力, 救困扶危, 같은 마음으로 협력하여 곤궁함..
계륵(鷄肋) 修字德祖, 好學, 有俊才, 爲丞相曹操主簿, 用事曹氏. 及操自平漢中, 欲因討劉備, 而不得進, 欲守之, 又難爲功. 護軍不知進止何依. 操於是出敎, 唯曰: “鷄肋.”而已. 外曹莫能曉, 修獨曰: “夫鷄肋, 食之則無所得, 棄之則如可惜, 公歸計決矣.” 乃令外白稍嚴, 操於此廻師. 修之幾決, 多有此類. 修又嘗出行, 籌操有問外事, 乃逆爲答記, 勅守舍兒. 若有令出, 依次通之. 旣而果然 如是者三. 操怪其速, 使廉之知狀, 於此忌修. 且以袁術之甥, 慮爲後患, 遂因事殺之. - 『후한서(後漢書)』 「양웅열전(楊震列傳)」 해석 修字德祖, 好學, 有俊才, 양수(楊修)의 자는 덕조인데 배우길 좋아하고 넉넉한 재주가 있어 爲丞相曹操主簿, 用事曹氏. 승상 조조의 주부가 되어 조씨의 일을 도맡아 했다. 及操自平漢中, 欲因討劉備, ..
거안제미(擧案齊眉) 남편을 정성스레 대우하다 梁鴻字伯鸞, 扶風平陵人也. … (중략) … 後受業太學, 家貧而尙節介, 博學無不通. … (중략) … 鄕里勢家慕其高節, 多欲女之, 鴻竝絶不娶. 同縣孟氏有女, 肥醜而黑, 力擧石臼. 擇對不嫁, 至年三十, 父母問其故, 曰: “欲得賢如梁伯鸞者.” 鴻聞而聘之. … (중략) … 遂至吳, 依大家皐伯通, 居廡下, 爲人賃舂. 每歸, 妻爲具食, 不敢於鴻前仰視, 擧案齊眉. 伯通察而異之曰: “彼傭能使其妻敬之如此, 非凡人也.” 乃方舍之於家. -『후한서(後漢書)』 「일민전(逸民傳)」 해석 梁鴻字伯鸞, 扶風平陵人也. 양홍의 자는 백란으로 부풍 평릉의 사람이다. … (중략) … 後受業太學, 家貧而尙節介, 훗날 태학에서 수업을 받았는데 집은 가난했지만 절개를 숭상했고 博學無不通. 널리 배워 통..
닭갈비 鷄肋 操收兵於斜谷界口扎住. 操屯兵日久, 欲要進兵, 又被馬超拒守; 欲收兵回, 又恐被蜀兵耻笑, 心中猶豫不決. 適庖官進鷄湯. 操見碗中有鷄肋, 因而有感於懷. 正沉吟間, 夏侯惇入帳, 禀請夜間口號, 操隨口曰: “鷄肋, 鷄肋.” 夏侯惇傳令衆官, 都稱鷄肋. 行軍主簿楊修, 見傳鷄肋二字, 便敎隨行軍士, 各收拾行裝, 準備歸程. 有人報知夏侯惇. 惇大驚, 遂請楊修至帳中間曰: “公何收拾行裝?” 修曰: “以今夜號令, 便知魏王不日將退兵歸也. 鷄肋者, 食之無肉, 棄之有味. 今進不能勝, 退恐人笑, 在此無益, 不如早歸. 來日魏王必班師矣, 故先收拾行裝, 免得臨行慌亂.” -『삼국연의(三國演義)』 해석 操收兵於斜谷界口扎住. 조조가 병사들을 사곡의 입구에 거두어 주둔시켰다. 操屯兵日久, 조조가 병사를 주둔시킨 지 오래되었는데 欲要進兵, ..
거안제미(擧案齊眉) 남편을 정성스레 대우하다 梁鴻字伯, 扶風平陵人也. 家貧而尙節介. 同縣孟氏有女, 肥醜而黑, 力擧石臼. 擇對不嫁., 曰: “欲得賢如梁伯者.” 鴻聞而聘之, 字之曰‘德曜,’ 名孟光. 至吳爲人賃, 每歸, 妻爲具食, 不敢於鴻前, 仰視, 擧案齊眉. -『후한서(後漢書)』 「양홍전(梁鴻傳)」 梁鴻字伯, 扶風平陵人也. 家貧而尙節介. 同縣孟氏有女, 肥醜而黑, 力擧石臼. 擇對不嫁., 曰: “欲得賢如梁伯者.” 鴻聞而聘之, 字之曰‘德曜,’ 名孟光. 至吳爲人賃, 每歸, 妻爲具食, 不敢於鴻前, 仰視, 擧案齊眉. -『후한서(後漢書)』 「양홍전(梁鴻傳)」 해석 梁鴻字伯, 扶風平陵人也. 家貧而尙節介. 양홍의 자는 백으로 부평 평릉 사람이다. 집은 가난했지만 절개를 숭상했다. 同縣孟氏有女, 肥醜而黑, 같은 고을에 맹씨의..
풀을 묶어 은혜를 갚다 結草報恩 秋七月, 秦桓公伐晉, 次于輔氏. 壬午, 晉侯治兵于稷, 以略狄土, 立黎侯而還. 及雒, 魏顆敗秦師于輔氏, 獲杜回, 秦之力人也. 魏武子有嬖妾, 無子. 武子疾, 命顆曰: “必嫁是.” 疾病則曰: “必以爲殉.” 及卒, 顆嫁之曰: “疾病則亂, 吾從其治也.” 及輔氏之役, 顆見老人結草以亢杜回, 杜回躓而顚, 故獲之. 夜夢之曰: “余而所嫁婦人之父也. 爾用先人之治命, 余是以報.” -『春秋左氏傳』 「宣公」15년 해석 秋七月, 秦桓公伐晉, 次于輔氏. 가을 7월(기원전 594년) 진나라 환공이 진나라를 치러 진(晉) 나라의 보씨에 주둔했다. 壬午, 晉侯治兵于稷, 임오일에 진경공(晉景公)이 직에서 군대를 훈련하고 以略狄土, 立黎侯而還. 적토를 공략하여 여후를 세우고 돌아왔다. 及雒, 魏顆敗秦師于輔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