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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우리 한시를 읽다 목차 이종묵(李鍾默) 프롤로그. 시를 읽고 즐기는 법 정조 - 綱目講義 湘素雜記 - 推敲 이규보 - 驅詩魔文 이황 - 陶山十二曲跋 이종묵 - 16~17세기 한시사 연구 1. 시를 소리 내어 읽는 맛 을지문덕 - 與隋將于仲文 정법사 - 詠孤石 고운 - 十二乘船渡海來 / 최치원 - 巫峽重峯之歲 최치원 - 秋夜雨中 이백 - 獨坐敬亭山 도연명 - 詠貧士 최치원 - 題伽倻山讀書堂 김종직 - 紅流洞 홍만종 – 소화시평 상권65 황정욱 - 送人赴遂安郡 2. 잘 빚은 항아리와 잘 짜인 시 김지장 - 送童子下山 정법사 - 詠孤石 박인량 - 使宋過泗州龜山寺 박인범 - 徑州龍朔寺 정지상 - 開聖寺 八尺房 정지상 - 題邊山蘇來寺 최치원 - 登潤州慈和寺 김부식 - 觀瀾寺樓 惠文 - 普賢院 3. 시 속에 울려 ..
에필로그. 우리 한시의 특질 ① 조선의 풍물과 풍속을 담은 조선시 1. 한국 한시는 중국 한시를 닮으려 했다. 1) 중국 한시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누추하다 비난을 퍼부음. 2) 어떤 이들은 시가 뛰어나다는 뜻으로 ‘압록강 동쪽의 구기가 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였음. 2. 우리 시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다 1) 조선 후기에 우리 시에 대한 인식이 생김. 2) 박지원(朴趾源)은 「영처고서(嬰處稿序)」에서 조선풍으로 불러야 될 것이라 함. 3. 정약용(丁若鏞)의 「노인일쾌사육수효향산체 기오(老人一快事六首效香山體 其五)」 老人一快事 縱筆寫狂詞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붓 가는 대로 미친 말을 쓰는 것이다. 競病不必拘 推敲不必遲 험운(險韻)하는 것에 굳이 구애될 게 없고 퇴고로 굳이 더딜 게 없다. 興到卽運..
24. 목민관이 시로 그린 유민도 ① 유민도와 정약용 1. 유민도(流民圖) 1)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때 대학가에는 고통 받는 민중을 그린 걸개그림이 걸려 있곤 했다. 2) 유민도의 연원은 송나라 정협(鄭俠)에서 찾는다. 정협은 여러 차례 왕안석에게 서찰을 보내어 신법이 백성들에게 해를 입힌다고 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얼마 후 안상문의 수문장이 되는데 이때 큰 가뭄이 들어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이 많았음. 정협은 이들 모습을 그려 상소문을 바치자 신종은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혁파함. 3) 조선에선 임진왜란 발발한 지 1년이 된 1593년 5월 9일 『선조실록』에는 죽은 어미의 젖을 물고 있는 아이,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는 자, 구걸하는 남녀, 자식을 버려 나무뿌리에 묶어 놓은 어미 등이 그..
23. 생활의 발견과 일상의 시 ① 일상을 담은 한시 1. 한시의 역할 1) 시는 교양이며 생활이 일부임. 2) 좋은 일로 축하해줄 때도, 벗이나 친지가 죽는 슬픔을 맞이할 때도, 벗이 찾아오거나 떠나갈 때도 시를 지었음. 3) 그렇기 때문에 평범한 일상을 소재한 시들이 많을 수밖에 없음. 2. 서거정(徐居正)의 일상시 1) 서거정은 쉽게 시를 썼던 사람으로 하루에 10수의 시를 지은 적도 있었음. 2) 늘 함께 시를 주고받는 벗들이 있어 그들이 아들을 낳아도, 만나려다 병으로 만나지 못해도, 꽃이나 약재 등 선물을 받아도 시를 지었음. 3. 서거정의 시 誰識酒腸淺 自知詩料貧 뉘 알랴 술 창자 작은 것을, 절로 아네 시의 재료가 빈천하다는 걸. 大醉逢妻諫 苦吟被僕嗔 만취하여 아내 잔소리 듣고, 괴롭게 읊..
22. 시에 담은 풍속화 ① 조선의 풍경을 담은 시들 1. 산수화(山水畵)의 특징 1) 사람을 잘 그리지 않고, 그린다 해도 신선의 풍모를 지니게 그림. 2) 우리 회화사에서 조선의 산수에 조선 옷과 갓을 쓴 조선 사람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8세기 무렵부터임. 3) 정선(鄭敾)이 조선의 산수를 화폭에 담아내고 또 그 안에 조선에 사는 사람을 그림. 2. 진시(眞詩) 운동이 펼쳐지다 1) 정선(鄭敾)이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김창협(金昌協)과 김창흡(金昌翕) 형제가 진경(眞景)과 진정(眞情)을 드러낸 진시(眞詩)를 써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계승한 것임. 2) 16세기 후반부터 당시를 배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고 그 중 뛰어난 작품은 당나라 시인의 시집에 넣어도 부족함이 없을 정..
21. 눈물과 통곡이 없는 만사 ① 진실을 담은 만사 1. 죽음은 예나 지금이나 슬프지만 지금은 죽음의 풍경이 바뀌었고, 문학사에서는 만사(挽詞)나 제문(祭文)이 사라짐. 1) 만사는 통곡을 하기 위해 지은 게 아니라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여 저 세상으로 잘 가라는 인사를 하기 위해 지음. 2) 만사엔 과장이 있어선 안 되며 죽은 자의 생애를 얼마나 압축적으로 표현했는가가 중요함. 2. 노수신(盧守愼)의 「만김대간(挽金大諫)」 珍島通南海 丹陽近始安 진주는 남해와 통하고 단양은 시안에 가깝다. 風霜廿載外 雨露兩朝間 풍상으로 20년을 시달렸으나 은혜를 두 왕조에서 누렸구나. 白首驚時晩 靑雲保歲寒 흰머리 느즈막한 때가 놀라운데 청운에도 세한의 지조 지켰네. 平生壯夫淚 一灑在桐山 평생 함께 한 장부의 눈물, ..
20. 길을 나서는 시인 ① 김시습의 산수벽이 가득한 시 1. 어떤 것에 몰두하는 것을 벽(癖)이라 하며 조선 시인 중엔 산수의 벽이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1) 산과 물에 벽이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산과 물을 찾아 나선다. 2) 조선 전기의 김시습(金時習)이, 후기엔 김창흡(金昌翕)이 대표적임. 김시습(金時習)은 ‘산수에 벽이 있어 시로 늙었다[癖於山水老於詩]’라고 한 대로 평생을 산수에서 노닐면서 지를 지음. 2. 김시습(金時習)의 「산행즉사(山行卽事)」 兒捕蜻蜓翁補籬 아이 잠자리 잡고, 노인 울타리 보수하고 小谿春水浴鷺鶿 작은 시내 봄물엔 가마우지 멱 감네. 春山斷處歸程遠 봄산 끊어진 곳에 귀로 멀기만 하니, 橫擔烏藤一箇枝 등나무 한 가지 어깨에 비껴 매네. 1) 세상이 싫어 산속에 들어갔지만 가..
19. 점철성금(點鐵成金)의 시학 ① 문학을 새롭게 하기 위해 일상어를 쓰다 1. 이속위아(以俗爲雅), 비속어를 잘 사용하여 새로움을 얻는 방법 1) 황정견(黃庭堅)은 문학이 새로워질 수 있는 대안으로 ‘이속위아(以俗爲雅)’와 ‘이고위신(以古爲新)’을 대안으로 내세움. 2) “비속한 것을 이용하여 우아하게 하고 옛것을 사용하여 새롭게 하는 것은 손자와 오기의 병법처럼 백전백승이다.”라고 함. 3) 시를 짓는 사람들은 비속한 단어를 잘 쓰려 하지 않는데 비속한 단어를 잘 구사하면 새로움을 얻을 수 있었음. 4) 18세기 문인 성섭(成涉)이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필원산어(筆苑散語)』에서는 “대게 시인들이 용사(用事)한 것이 비록 이어(俚語)라 하더라도 점화(點化)를 잘하면 점철성금(點綴成金)이 될 수 있다..
18. 짧은 노래에 담은 노래 ① 정철의 소리가 있는 오언절구 1. 오언절구는 짧은 시형이기에 좋은 작품을 짓기 어려움. 1) 우리나라 문집엔 칠언절구>칠언율시>오언율시>오언절구 순으로 담겨 있음. 2) 두보(杜甫)나 한유(韓愈)ㆍ소식(蘇軾) 등의 이름을 날리던 시인조차도 오언절구에 뛰어나진 못했다는 평가를 받음. 2. 5언절구의 성행 1) 우리나라에선 16세기 후반 임억령(林億齡), 백광훈(白光勳), 최경창(崔慶昌), 임제(林悌)와 같은 호남의 문인들 중심으로 제작됨. 2) 절구(絶句)에 당시(唐詩)를 읽는 듯한 흥감을 불어넣은 명편을 제작함. 3) 정철(鄭澈)은 절구에 뛰어난 시인인데, 특히 오언절구에 많은 힘을 기울여 30%나 차지할 정도임. 3. 정철(鄭澈)의 「추일작(秋日作)」 山雨夜鳴竹 草虫秋..
17. 당시와 비슷해지기 ① 청신쇄락(淸新灑落)한 시 1. 이이가 중국 한시를 선발하여 이이(李珥)가 지은 『정언묘선서(精言妙選序)』에서 밝힌 시를 선발한 기준 1) 충담소산(沖淡蕭散): 이 기준을 먼저 들고 수식에 힘쓰지 않아야 자연스러움 속에 오묘한 멋이 깊어진다고 함. 2) 한미청적(閑美淸適): 조용한 가운데 유유자적하며 흥겨움에서 시가 나오므로 사색으로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시를 읽으면 권세나 이익, 명예에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고 함. 3) 청신쇄락(淸新灑落): 매미가 가을바람에 이슬을 맞아 허물을 벗은 것처럼 밥을 지어 먹는 인간의 입에서 나오지 않는 것 같아, 위장 속의 비릿한 피를 씻어내어 영혼과 골격이 맑아져 인간세상의 냄새가 마음을 더럽히지 못한다고 함. 2. 이이(李珥)가..
16. 풍경에 담은 감정의 변화 ① 풍경에 시인의 감정이 담겨 1. 한시와 풍경 1) 풍경 속에 감정이 이입되기도 하고 풍경이 감정과 혼융(混融)되기도 함. 2) 창작방법은 선경후정(先景後情)으로 선경은 시인의 감정을 축발하는 흥의 효과가 있음. 3) 또 다른 창작방법으론 부(賦), 비(比), 흥(興)이 있음. 부(賦) 비(比) 흥(興) 시경 있는 사실을 펼쳐내 그대로 말하는 것. 敷陳其事而直言之者也 저 물건을 끌어 이 물건을 비유하는 것. 以彼物比此物也 먼저 다른 물건을 말함으로 읊고자 하는 내용을 끄집어 내는 것. 先言他物以引起所詠之詞也 신경준 부는 알기가 쉽다. 賦知之易. 위 구절엔 비록 저것이 이것과 같다는 등의 말이 있지만, 아래 구절엔 대응하는 말이 없는 것. 上雖有彼如斯矣等語, 而下無對應之語..
15. 진정한 벗을 위한 노래 ① 이행과 박은의 사귐 1. 벗에 대한 정의 1) 박지원(朴趾源)은 「회성원집발(繪聲園集跋)」에서 ‘두 번째의 나[第二吾]’라 하기도 하고, ‘일이 잘 되도록 주선하는 사람[周旋人]’이라고도 함. 2) 이덕무(李德懋)는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에서 “若得一知己, 我當十年種桑. 一年飼蠶, 手染五絲, 十日成一色, 五十日成五色. 曬之以陽春之煦, 使弱妻, 持百鍊金針, 繡我知己面. 裝以異錦, 軸以古玉. 高山峨峨, 流水洋洋, 張于其間, 相對無言, 薄暮懷而歸也.” 3) 맹자는 ‘상우천고(尙友千古)’라 말함. 2. 이행(李荇)과 박은(朴誾)의 인연 1) 두 사람은 우리 역사에서 내세울 만한 진정한 우정을 나눔. 2) 정조(正祖)는 박은(朴誾)의 시집을 편찬케 하며 「어제제증정읍취헌집권수..
14. 시로 읽는 소설 ① 양반이 사랑을 시로 표현하는 법 1. 시의 정의 1) 음풍농월(吟風弄月)로 아름다운 자연물을 담아낸 것이 많음. 2) 사람 사는 모든 일(벗을 만남, 잔치, 죽은 영혼을 달램, 실의에 빠짐)에 시가 따라다님. 3) 점잖은 양반이기에 조심스러웠던 주제가 바로 사랑에 관한 시를 쓰는 것이었음. 2. 양반이 체통을 구기지 않으면서 사랑을 노래하는 방법 1) 고대 민간의 노래인 악부(樂府)를 본뜨는 것임. 한(漢) 때 민간의 가요를 채집하던 관청이름이며, 그 관청에서 수집된 민간가요를 말함. 당(唐) 때부터 악부 스타일을 흉내낸 의고악부(擬古樂府)가 지어졌고 양반들은 이 악부체를 빌어 사랑을 노래함. 2) 악부는 하나의 정황만 주어져 잇고 또 정황 자체가 구체적이지 않기에 사랑을 노래..
13. 춘흥과 가진 자의 여유 ① 상황에 따라 봄의 느낌은 달라라 1. 구양수(歐陽脩): 산림(山林)의 문학은 그 기운이 고고(枯槁)하고 관각의 문학은 그 기운이 온윤(溫潤)하다고 함. 2. 서거정(徐居正): 「계정집서(桂庭集序)」에서 기상은 관각과 산림과 불교의 세 가지로 나뉘며 뒤로 갈수록 좋지 않다는 인식을 반영함. 「월산대군시집서(月山大君詩集序)」의 내용과 진배없이 관각문학을 우위에 둠. ② 여유로우니 봄이 좋아라 1. 이규보(李奎報)의 「춘망부(春望賦)」 羯鼓聲高 둥둥 북소리에 紅杏齊綻 살구꽃이 활짝 필 때 望神州之麗景 서울의 고운 봄빛을 바라보면서 宸歡洽兮玉觴滿 임금이 즐겁게 술잔을 기울이는 것은 此則春望之富貴也 부귀한 자의 봄 구경이요. 彼王孫與公子 왕손과 귀공자가 結豪友以尋芳 벗들과 봄놀이..
12. 금강산을 시에 담는 두 방식 ① 금강산에 대한 이야기 1. 금강산에 긍부정의 평가 1) 강세황(姜世晃): “산에 다니는 것은 인간으로서 첫째가는 고상한 일이다. 그러나 금강산을 구경하는 것은 가장 저속한 일이다.” 2) 김정희(金正喜)의 「여권이재(與權彛齋)」 21에서 “매양 금강산에서 노닐고 돌아온 사람 가운데 본 것이 들은 것만 못하다고도 하는데, 이 말도 괴이할 것이 없소. 옛날 제갈량 밑에 있던 한 늙은 군졸이 晉 나라 때까지 생존했는데, 혹자가 제갈량에 대해서 묻자, 그는 ‘제갈량이 살았을 때는 보기에 특이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제갈량이 죽은 뒤에는 다시 이와 같은 사람을 보지 못했소’[每遊此山而歸者, 或以爲見不如聞, 亦無恠也. 昔武侯一老卒, 至於晉時尙存, 或有問武侯者, 對云: ‘見武侯生..
11. 풍경 속의 시인 ① 시인이 시속으로 들어가거나 풍경만 묘사하거나 1. 서경시(敍景詩) 1) 감정은 배제하고 맑은 산과 나무만 포치(布置)한 시. 2) 서경시엔 인간세상의 티끌이 없어 이런 시를 읽으면 한여름 시원한 우물물을 마신 것처럼 시원해짐. 2. 이숭인(李崇仁)의 「제승사(題僧舍)」 山北山南細路分 산은 여기저기에 있고 오솔길 나눠지는데 松花含雨落繽粉 송홧가루 비에 젖어 하늘하늘 진다. 道人汲井歸茅舍 스님 우물에서 물 길어 절로 돌아가고 一帶靑烟染白雲 한 줄기 푸른 안개 흰 구름을 물들이네. 1) 이 시는 그림을 보고 지은 것으로, 『지봉유설(芝峯類說)』 『문장부(文章部)』엔 이 시를 보고 스승 이색이 칭찬하여 명성이 높아졌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음. 2) 검은 옷을 입은 승려가 시에 등장하지만..
10. 시의 뜻을 호방하게 하는 법 ① 부귀영화해야 호방한 시를 쓸 수 있다? 1. 호방한 스케일의 시를 쓸 수 있는 방법 1) 『맹자(孟子)』 「만장(萬章)」 하8의 얘길 통해 ‘詩格=人格’이란 생각이 퍼짐. 2) 성현(成俔)은 「월산대군시집서(月山大君詩集序)」에서 “보통 사람으로 배우려는 이는 힘쓰고 애써 마음을 수고롭게 하고 생각을 두렵게 하여 우환에 젖어들고 공부에 힘을 쓴다. 그런 후에야 쓸 만한 것을 얻어 문장을 짓는데 조탁한 것이 기이함에 힘쓰지만 그 기상은 얇고도 비근한 병폐를 면하지 못한다. 그러나 왕족과 양반은 그렇지가 않다. 사는 곳이 기를 움직이게 하고 기른 것이 몸을 움직이게 하여 거처하는 곳이 높고 보는 것이 원대하여 배움에 힘쓰질 않아도 스스로 유유자적하며, 업을 다듬으려 하지..
9. 시 속의 그림, 그림 속의 시 ① 시 속에 그림이 있다[詩中有畵] 1. 시중유화(詩中有畵): 소식(蘇軾)이 왕유(王維)의 시를 칭찬할 때 했던 말로, 그 이후로 여러 시평에서 쓰임 1) 『소화시평(小華詩評)』 권상 51에서 정도전(鄭道傳)의 「방김거사(訪金居士)」에 대한 평가. 2) 『소화시평(小華詩評)』 권상 62에서 김종직(金宗直)의 「장현촌가(長峴村家)」에 대한 평가. 3) 『동인시화(東人詩話)』 권하 20의 평가 2. 김득신(金得臣)의 「용호(龍湖)/ 용산(龍山)」 古木寒雲裏 秋山白雨邊 흰 눈 속의 고목, 소나기 곁의 가을 산. 暮江風浪起 漁子急回船 저물녘 강에서 풍랑 일어 어부가 급히 배를 돌리는 구나. 1) 정선흥(鄭善興)이란 문신이 이 시가 적힌 부채를 자주 보자 효종이 칭찬을 하고 어..
8. 대동강 부벽루의 한시 기행 ① 대동강과 유적지 1. 옛 노래에 담긴 대동강 1) 손인호의 「한 많은 대동강」: “한 많은 대동강아 대동강 부벽루야 뱃노래가 그립구나. 귀에 익은 수심가를 다시 한 번 불러본다. 편지 한 장 전할 길이 이다지도 없을쏘냐. 아아아, 썼다가 찢어버린 한 많은 대동강아” 2) 나훈아의 「대동강 편지」: “대동강아 내가 왔다, 부벽루야 내가 왔다. 주소 없는 겉봉투에 너의 얼굴 그리다가 눈보라 치던 밤 달도 없던 밤 울면서 떠난 길을 돌아왔다고. 못 본 체하네, 못 본 체하네. 반겨주려마, 한 많은 대동강” 3) 이처럼 대동강은 분단 이래 실향민의 눈물이 어린 장소였음. 2. 대동강의 구조 및 이름 1) 구조: 남강ㆍ무진천ㆍ보통강ㆍ순화강 등과 평양에서 합쳐져 대천을 이룸. 2..
7. 꽃그늘에 어린 미련 ① 울주ㆍ양산ㆍ동래에 시인들의 발길이 머물다 1. 황산강과 시인 1) 울주ㆍ양산ㆍ동래 부근은 천성산 자락을 뒤로 하고 황산강이 흐름. 2)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 권상 33엔 ‘이 일대에 백성들의 집이 대나무 숲 사이에 가물가물 보이는데, 집집마다 남녀가 대나무로 그릇을 만들어 세금과 의식을 해결하는 가난한 마을이었다’고 적혀 있음. 3) 아름다운 황산강 일대에 누정이 일찍부터 발달했기에 시인이 이곳을 찾아 시를 많이 남김. 2. 황산강과 최치원, 김극기 1) 송담서원(松潭書院) 강 쪽에 있던 임경대(臨鏡臺)에서 최치원(崔致遠)이 시를 지었기에 최공대(崔公臺)라고도 불리게 됨. 2) 훗날 정중부의 난을 피해 이십대의 김극기(金克己)는 산천을 떠돌며 임경대에 이르렀고 최..
6. 가난한 시인의 말 ① 시가 사람을 궁하게 하는가? 궁한 사람이 시를 잘 쓰는가? 1. 시가 사람을 궁하게 만든다 1) 시인은 가난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옛 사람은 “시가 사람을 궁하게 한다[詩能窮人]”고 생각함. 2) 이규보(李奎報)는 『구시마문(驅詩魔文)』을 지어 시마의 다섯 가지 병폐 중 마지막에 “네가 사람에게 붙으면 염병에 걸린 듯 몸이 더러워지고 머리가 봉두난발이 되며 수염이 빠지고 외모가 초췌해진다. 너는 사람의 소리를 괴롭게 하고 사람의 이마를 찌푸리게 하며 사람의 정신을 소모시키고 사람의 가슴을 여위게 하니, 환란의 매개요 평화의 도적이다[汝著於人, 如病如疫, 體垢頭蓬, 鬚童形腊, 苦人之聲, 矉人之額, 耗人之精神, 剝人之胸膈, 惟患之媒, 惟和之賊].”라고 썼다. 2. 가난한 사람이 ..
5. 원숙과 참신의 시학 ① 역사 속의 라이벌 1. 정지상↔김부식의 문학적 자질 대결(비교: 한시미학산책) 侍中金富軾, 學士鄭知常, 文章齊名一時 兩人爭軋不相能. 世傳知常有, ‘琳宮梵語罷, 天色淨琉璃’之句, 富軾喜而索之, 欲作己詩, 終不許. 後知常爲富軾所誅, 作陰鬼. 富軾一日詠春詩, 曰: ‘柳色千絲綠, 桃花萬點紅.’ 忽於空中鄭鬼批富軾頰曰: “千絲萬點, 有孰數之也? 何不曰 ‘柳色絲絲綠 桃花點點紅.’” 富軾頗惡之. 後往一寺, 偶登厠, 鄭鬼從後握陰卵, 問曰: “不飮酒何面紅?” 富軾徐曰: “隔岸丹楓照面紅.” 鄭鬼緊握陰卵曰: “何物皮卵子?” 富軾曰: “汝父卵, 鐵乎?” 色不變. 鄭鬼握卵尤力, 富軾竟死於厠中. -『백운소설(白雲小說)』 7 2. 이인로↔이규보의 한시 창작법 대결 1) 이규보(李奎報)는 「답전리지논문서(..
4. 재창조의 시학 ① 김부식(金富軾)의 「감로사차혜소운(甘露寺次惠素韻)」을 통해 김부식의 말년의 꿈을 들여다 보다 俗客不到處 登臨意思淸 속세의 손님 이르지 못하는 곳에, 오르니 마음이 맑구나. 山形秋更好 江色夜猶明 산 모습은 가을에 더욱 좋고, 강빛은 밤에 오히려 분명하네. 白鳥高飛盡 孤帆獨去輕 흰 새는 높이 날아 사라지고, 외로운 배 홀로 감이 가볍다. 自慙蝸角上 半世覓功名 스스로 부끄러워하노라, 달팽이 뿔 위에서 반백 년 동안 공명 찾았으니, 1. 배경지식 1)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엔 김부식을 ‘살이 찌고 체구가 크며, 검은 얼굴에 눈이 튀어나옴’이라 표현함. 2) 노년에 접어든 김부식이 공문(空門)의 벗 혜소(惠素)와 자주 만나 시를 수창(酬唱)함 3) 감로사는 예성..
3. 시 속에 울려 퍼지는 노랫가락 ① 정지상(鄭知常)의 「송인(送人)」, 민가(民歌)를 끌어와 절창이 되다 雨歇長堤草色多 비 그친 긴 둑에 풀빛 짙은데 送君南浦動悲歌 그대 보낸 남포엔 슬픈 노래 흐르네. 大同江水何時盡 대동강의 물은 언제나 마를꼬 別淚年年添綠波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해지는 걸. 1. 평양 부벽루에 당당히 걸려 있는 작품으로 중국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는 자부심을 지님(성수시화). 2. 이별은 봄이 가장 극적인 효과를 냄(죽었던 만물의 소생↔멀쩡히 있던 이의 사라짐): 2구에서 봄날 남포의 이별은 더욱 서러움. 3. 강엄(江淹)이 지은 「별부(別賦)」의 ‘봄풀 푸른색이고 봄물 푸른 물결인데 그대 보낸 남포에서 속상하는 걸 어찌할꼬[春草碧色 春水綠波 送君南浦 傷如之何]’를 보고 ..
2. 잘 빚은 항아리와 잘 짜인 시 ① 법에 맞는 한시, 율시의 정착 1. 한시의 시체 고시(古詩) 율시(律詩) 비교적 자유롭게 쓰는 시 절구처럼 압운을 함 평측을 고름 2연과 3연엔 반드시 대(對)를 해야 함. 2. 율시의 정비 1) 중국에선 당나라 초엽에 율시가 정비됨. 2) 최초로 등장한 작품은 8세기에 쓴 김지장의 「송동자하산(送童子下山)」임. 하지만 6세기의 고구려 승려 정법사의 시가 율시에 근접해 있음. ② 잘 다듬어진 시를 보다 [정법사(定法師)의 「영고석(詠孤石)」] 逈石直生空 平湖四望通 먼 바위 곧장 하늘을 향해 솟아있고 평평한 호수 네 방향으로 통하였네. 巖根恒灑浪 樹杪鎭搖風 바위 뿌리 항상 물결에 씻기고 나뭇가지 항상 바람에 흔들리지. 偃流還漬影 侵霞更上紅 물결에 누우니 도리어 그림자..
1. 시를 소리 내어 읽는 맛 ① 최치원 이전의 명작과 최치원의 명작 감상 1. 최치원 이전(以前)엔 두 작품이 명품으로 뽑힘. 1)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여수장우중문(與隨將于仲文詩)」: 우중문에게 이 시를 보내 화를 돋워 살수로 유인하여 대군을 물리쳤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실려 있음. 2) 정법사(定法師)의 「영고석(詠孤石)」: 중국의 어떤 시와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기에 삼국시대에도 뛰어난 시인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음. 2. 최치원(崔致遠): 857~?, 신라의 학자ㆍ경세가. 호는 고운(孤雲)ㆍ해운(海雲)임. 12살에 당으로 건너가 18살에 급제했고, 28살에 귀국했고, 38살에 『시무책(時務策)』을 지었으나 채택되지 못해, 40살에 가야산(伽倻山)에 은둔함. 한시 문집을 남겼기에 문학의 비조..
프롤로그. 시를 읽고 즐기는 법 ① 시의 본령은 아름다움이며 음풍농월이다 (정조의 『강목강의(綱目講義)』) 정조가 주자(朱子)의 『자치통감절목(資治通鑑綱目)』을 열람하고 그 가운데 의문스러운 것들을 뽑아 문목(問目)을 만들었는데, 모두 695개 항목이었다. 그것을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에게 나누어 주어 한 사람이 각기 한 항목씩 조목별로 답을 짓도록 하고, 다시 초계문신(抄啟文臣) 심진현(沈晉賢) 등에게 답한 말을 산삭(산삭)하고 요약하여 문목 밑에 붙여 책자로 만들게 한 것이다. 『정조실록(正祖實錄)』 15年 5月 3日 해와 달과 별은 하늘의 무늬가 되고, 산과 천과 풀과 나무는 땅의 무늬가 되니, 글에도 무늬가 있음이 또한 그러하다. 반드시 씻어내고 닦아 윤택하게 하며 환하게 노출시키며, 찬란하게 드..
한국한시사(韓國漢詩史) 목차 민병수(閔丙秀) 1. 서설(序說) 1) 한시연구의 과제 2) 자료의 선택 문제 ⑴ 『청구풍아(靑丘風雅)』와 송시학(宋詩學)의 극복 ⑵ 『국조시산(國朝詩刪)』과 격조론 ⑶ 『기아(箕雅)』와 절충론 ⑷ 풍요(風謠)와 위항시인(委巷詩人)의 의지 ⑸ 『대동시선(大東詩選)』과 민족의식(民族意識) 3) 작품의 평가 문제 ⑴ 고려의 시화집 ⑵ 조선의 시화집 2. 한시의 초기 모습 1) 대륙(大陸)의 노래 ⑴ 공후인(箜篌引) ⑵ 황조가(黃鳥歌) ⑶ 인삼찬(人蔘讚) 2) 북방(北方)의 기개(氣槪) ⑴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與隋將于仲文) ⑵ 정법사의 영고석(詠孤石) 3) 남방(南方)의 서정(抒情) ⑴ 진덕여왕의 직금헌당고종(織錦獻唐高宗) ⑵ 김지장의 송동자하산(送童子下山) ⑶ 설요의 반속요(..
이은찬(李殷瓚, 1878 고종15~1909 융희3)은 양평 출신의 유생이다. 홍천에서 거의한 관동의병장 이인영(李麟榮) 등과 함께 서울까지 진격하려다가 패퇴, 후일 밀정의 고발로 체포ㆍ처형되었다. 『독립운동지혈사(獨立運動之血史)』에 우국시 한 수가 전한다. 一枝李樹作爲船 오얏나무 한 가지로 배를 만들어 欲濟蒼生泊海邊 온 겨레 건지고자 바닷가에 이르렀네. 未得寸功身先溺 한 치 공도 못세우고 이 몸 먼저 빠졌으니 誰算東洋樂萬年 뉘라서 동양 평화 도모하리요? 뜻한 바 있어 거의하였다가 이루지 못하고 먼저 가게 된 안타까운 우국충정이 잘 나타나 있다 정환직(鄭煥直, 1854~1907)은 영천(永川) 출신이다. 을사늑약에 통분한 고종의 밀지를 받아 아들 용기(鏞基)와 이한구(李韓久) 등에게 거의할 것을 지시, 후..
이인영(李麟榮, 1867 고종4~1909 융희3)은 초기의 을미거사 때 유인석(柳麟錫)ㆍ이강년(李康秊) 등과 기의하였다가 후일 정미거의(丁未擧義) 때 다시 참가, 13도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허위(許蔿)ㆍ민긍호(閔肯鎬)ㆍ이강년(李康秊) 등과 함께 일거에 서울에까지 진공하였다가 중도에서 부친상으로 퇴거하였다. 『기려수필(騎驢隨筆)』에 옥중에서 지은 임절시 1수가 전하고 있다. 分明日月懸中州 밝고 밝은 해와 달 중주(中州)에 떠 있는데 四海風潮濫○流 온누리에 새 물결 넘쳐 흐르는구나. 蚌鷸緣何相持久 조개와 황새는 어쩌면 저렇게 붙들고만 있는가? 西洲應見漁人收 서양의 어부들이 틀림없이 쓸어 가리라.322) 이 시에는 동양과 서양 사이에 개재하고 있는 이질 감각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공연히 서로 싸우기만 하다가..
의병항쟁은 대체로 그 항쟁을 전개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에 따라 이를 전후 2차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의 반포에 반발하여 기의(起義)한 것이 그 전기의 항쟁이며, 을사늑약을 전후한 시기에 국권수호를 위하여 거의(擧義)한 것이 그 후기의 항쟁이다. 그러나 의병장 중에는 초기의 의병항쟁을 주도한 척사파 지도자들과 같이 명망이 있는 학자들도 있었지만, 을사늑약 이후의 의병항쟁에 참가한 의병장들은 그 대부분이 지방의 궁유(窮儒)가 아니면 상민(常民) 계층에 속하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적이나 시문ㆍ잡저와 같은 문학적인 업적은 그 대부분이 처음부터 없었거나 아니면 처음에 있었더라도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우국의 시편이나 임절시를 전하고 있는 의병장으로..
사조(詞藻)라면 일반적으로 한시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는 「황성신문(皇城新聞)」을 비롯하여 한말의 학술지에 마련된 사조란(詞藻欄) 즉 한시 발표에 제공된 문예란을 말한다. 학술지로는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를 비롯하여 「대한협회회보(大韓協會會報)」, 「대한학회월보(大韓學會月報)」, 「서우회보(西友會報)」, 「기호흥학회월보(畿湖興學會月報)」,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 등이 그 중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대한협회는 그 성격상 대한자강회를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서우회보(西友會報)」의 발행기관인 서우학회는 뒤에 서북학회로 통합되었다.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는 창간된 것이 1910년이므로 한말의 학술지로서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가지지 못했다. 그..
이기(李沂, 1848 헌종14~1909 융희3, 자 伯曾, 호 海鶴)는 한말의 우국지사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민중계몽과 항일운동에 진력하였으며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려다가 유배형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유형원ㆍ정약용(丁若鏞) 등의 학통을 계승하여 당시의 전제ㆍ관제 등 개혁의 필요성과 방법에 대하여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우국상시(憂國傷時)로 일관한 삶처럼 이기(李沂)의 시문(詩文) 또한 시국에 대한 비분강개와 국가에 대한 우국충정(憂國衷情)이 주조를 이루었다. 그의 우국시(憂國詩) 중에서 「삼호사(三虎詞)」와 「독황성보(讀皇城報)」가 특히 유명하다. 「삼호사(三虎詞)」는 세 마리의 호랑이가 싸우는 모습을 통하여 정부가 일본과의 싸움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피력하였으며, 「독황성보(..
이남규(李南珪, 1855 철종6~1907 융희1, 자 元八, 호 修堂)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ㆍ석루(石樓) 이경전(李慶全)의 예손(裔孫)이다. 북인(北人)의 중심세력에서 일탈하여 남인(南人)으로 색목(色目)을 옮기는 동안, 그 가문은 지배벌열(支配閥閱)에서 소외되었으며, 그 뒤로 그들은 문장(文章)과 풍절(風節)을 닦는 사대부의 수업으로 일관해 왔다. 이러한 가학(家學)의 전통에 의해 체질화된 수당(修堂)의 사대부적 사고는 격동하는 구한말의 정치적 와중에서도 불굴의 주체적 의지를 다지는 데 큰 힘이 되었다. 28세가 되던 해, 즉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던 해에 문과에 올라 갑오(甲午)ㆍ을미(乙未)의 격동 속에서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ㆍ동부승지(同副承旨)ㆍ영흥부사(永興府使)의 벼슬을 거치..
2. 우국(憂國)의 시인(詩人) 한말(韓末)이라는 역사 단계는 정확하게 말해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성립에서부터 비롯하며, 그것은 근대화라는 시대적 임무 수행이 강조되었던 시기라는 점에서 일단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일찍이 한국사가 체험한 어떠한 역사 단계에 있어서도 서구의 ‘근대’를 스스로 시험한 일이 없는 전통사회의 보편적 질서에서 볼 때, ‘개국(開國)=개화(開化)’를 근대화의 결정론으로 파악한 인식체계는 한국의 근대사로 하여금 그 시발(始發)에서부터 망국의 민족사로 얼룩지게 한 것임에 틀림없다. 대한제국의 성립은, 형식적으로는 국호가 ‘조선(朝鮮)’에서 ‘한(韓)’으로 바뀌고, 왕(제후)의 나라가 황제의 나라로 격상한 것을 의미하지만, 그러나 이것을 주도한 세력이 침략적인 제국주의 일본이..
박규수(朴珪壽, 1807 순조7~1877 고종14, 자 桓卿ㆍ瓛卿ㆍ鼎卿, 호 瓛齋ㆍ桓齋ㆍ桓齋居士)는 구한말의 대표적인 개화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다.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인 그는, 북학파가 주창했던 실사구시의 학풍에 눈떠 중농주의적인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정약용(丁若鏞)과 서유구(徐有榘)를 사사하기도 하였다. 그가 일생을 통해서 배웠던 학자로는 박지원(朴趾源)ㆍ정약용(丁若鏞)ㆍ서유구(徐有榘)ㆍ김매순(金邁淳)ㆍ조종영(趙鐘永)ㆍ 홍석주(洪奭周)ㆍ윤정현(尹定鉉) 등이 있고, 남병철(南秉哲)ㆍ김영작(金永爵)ㆍ김상현(金尙鉉)ㆍ신응조(申應朝) 등과 교유하였으며, 그의 문하(門下)에서 김옥균(金玉均)ㆍ박영효(朴泳孝)ㆍ김윤식(金允植)ㆍ유길준(兪吉濬) 등 개화사상의 선구자들이 배출되었다. 1848년(헌종14)에 증광시(增..
황현(黃玹, 1855 철종6~1910, 자 雲卿, 호 梅泉)은 전남 광양의 한미한 시골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구한말의 급박한 정세 속에서 가장 많은 우국시를 남긴 당시 문단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소년 시절부터 청운(靑雲)의 꿈을 간직했으나 34세에 겨우 진사(進士)가 됐으며, 이것도 상경(上京)한 지 10여년 만에 얻은 결과였다. 창강(滄江)과 마찬가지로 이건창(李建昌)의 발천(發薦)으로 서울의 문인들에게 알려지면서 시명(詩名)이 드러났으며 이를 계기로 이건창(李建昌)ㆍ김택영(金澤榮) 등과 문우(文友)의 교분을 다지게 되었다. 그는 문보다는 시에서 빼어났으며, 특히 절구에서 보여준 굳센 힘은 강직한 그의 성품과 함께 타고난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백면서생(白面書生) 시절의 시 가운데 수작(秀..
김택영(金澤榮, 1850 철종1~1927, 자 于霖, 호 滄江ㆍ韶濩堂)은 개성출신이다. 개성은 정치적으로는 조선시대 500년 동안 정권에서 소외된 지역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상업도시로 각광을 받은 곳이다. 창강(滄江)의 가계는 무반(武班) 출신의 상인 집안이다. 그는 일찍이 과거로 발신(發身)할 것을 꿈꾸었지만 41세에야 겨우 진사(進士)가 되었고 편사국(編史局) 주사(主事)ㆍ중추원서기관(中樞院書記官) 겸내각기록국사적과장(兼內閣記錄局史籍課長) 등을 지냈으나 곧 귀향하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문학세계의 이면에는 배척받은 개성 출신으로서의 비감이 도사리고 있으며 소중화(小中華)를 우습게 여기던 그의 모화(慕華)의 감정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그 해 그는 끝내 조국을 등지고..
이건창(李建昌, 1852 철종3~1898 광무2, 자 鳳藻ㆍ鳳朝, 호 寧齋, 堂號 明美堂)은 강화도 사곡(沙谷)에서 태어났다. 피난지(避難地) 수도(首都)라는 치욕스런 역사의 현장인 강화도는 이건창(李建昌)의 가문(家門)에 있어서는 신임옥사(辛壬獄事)와 나주벽서(羅州壁書) 사건으로 이어지는 정쟁(政爭)으로부터의 피신처이기도 하였으며 양명학(陽明學)이라는 가학(家學)을 이룩한 고장이기도 하다. 이건창(李建昌)은 병인양요(丙寅洋擾)에 조부(祖父) 시원(是遠)의 순절(殉節)을 계기로 강화별시(江華別試)에 15세의 어린 나이로 급제하였다. 그 뒤 벼슬이 참판에 이르는 동안 47년의 생애 가운데 태반을 묘당(廟堂)에서 보냈지만, 관인으로서는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오히려 문명(文名)으로 영채(英彩)를 발하였다. 그..
강위(姜瑋, 1820 순조20~1884 고종21, 자 仲武ㆍ堯章ㆍ韋玉, 호 秋琴ㆍ慈屺ㆍ聽秋閣ㆍ古懁堂)의 가계는 조선중기 이후 문관직과 멀어지기 시작하여 그가 태어날 무렵에는 이미 무반신분(武班身分)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는 벼슬이 차단된 신분적 한계로 말미암아 일찍이 과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학문과 문학에 전념하게 되었지만, 잠시 과거에 뜻을 두고 공부할 시절에는 영의정을 지냈던 정원용(鄭元容)의 집에 기숙하며 그의 손자였던 건조(健朝)와 함께 수학하였다. 또한 당시 이단으로 지목받던 민노행(閔魯行)을 찾아가 4년간 수학하였으며, 민노행의 유언에 따라 제주도에 귀양가 있던 김정희(金正喜)에게도 5년 남짓을 배웠다. 그러나 민노행과 김정희(金正喜)는 모두 고증학에 매료된 대가였으므로, 강위도 또한 고증학..
9. 한시(漢詩) 문학(文學)의 종장(終章) 1. 한말(韓末)의 사대가(四大家) 구한말(舊韓末)은 1800년대 후반부터 1910년대에 이르는 4,50년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전의 전통시대와 그 이후의 일제 식민지 시대와의 불연속상에 놓인 불행한 시기였으며 또한 전통질서의 극복과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침탈을 부정해야 하는 역사적 사명이 주어진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 과정에서 지성인들의 대응 방식은 크게 개화(開化), 위정척사(衛正斥邪), 동학(東學) 등의 상이한 활동을 통해 민족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어려움을 감내해야만 했다. 문학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시대적 당위는 그대로 표출되었다. 1890년대의 「독립신문(獨立新聞)」(1896)이나 「황성신문(皇城新聞)」(1898)에 게재..
황오(黃五, ?~?, 호 綠此)는 그를 알게 해주는 어떤 문자(文字)에도 그의 신분이 밝혀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분명히 사회로부터 대접받지 못한 신분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최영년(崔永年)이 쓴 「황녹차선생시집서(黃綠此先生詩集序)」에 의하면, 황오(黃五)가 불가와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나 구체적인 사실은 알 수가 없다[先生佛緣出世, 卓犖不羈, 寄托高風]. 두둥실 거침없이 내닫기만 한 그의 삶의 방식은 그가 이룩한 시의 세계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소재가 광범할 뿐 아니라 꾸미는 일을 도무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굳세고 거칠고 힘찰 뿐이다. 다음의 작품을 보기로 한다. 小姑十四大於余아가씨는 열네살 나보다 큰데學得秋千飛鷰如그네를 배워서 제비처럼 나네.隔窓未敢高聲語창문 너머 감히 큰 소리로 말 못..
변종운(卞鍾運, 1790 정조14~1866 고종3, 자 朋七, 호 肅欠齋)은 역관 출신으로 시문에 능하였다. 이유원(李裕元)ㆍ윤정현(尹定鉉)ㆍ김공철(金公轍) 등과 깊은 친분을 맺고, 이들이 사행(使行) 길에 오를 때에는 반드시 수행했다 한다. 이유원은 변종운(卞鍾運)의 시를 가리켜 “고상하고 예스러우며 편벽됨을 피했다[高古避僻].”이라 하였고, 이재원은 “성정이 발하는 것에 수식의 화려함을 힘쓰지 않았고 음운과 격조는 고상하길 바라지 않아도 스스로 고상했다[性情所發, 不務藻華, 其音韻格調不冀高而自高].”라 하였는데, 이러한 평가는 바로 변종운(卞鍾運)의 시가 대체로 평이하면서도 격조가 높음을 가리킨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그는 그의 불평음(不平音)을 토로할 때에도 그 분위기는 안온하며 표현기법에 있어서도..
장지완(張之琬, 1806 순조6~1858 철종9, 자 玉山, 호 枕雨堂)은 4대에 걸친 무변(武弁) 가계에서 율과(律科) 출신으로 변전(變轉)한 중인(中人)으로 처음에는 아버지 덕주(德冑)에게서 수학하였으나 뒤에 이학서(李鶴棲)의 문인이 되었고, 김초암(金初菴)과 홍직필(洪直弼)을 찾아가 성리학을 배우기도 하였다. 장지완(張之琬)의 생애를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전이나 행장 등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역정은 알 수 없으나,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고서도 대접받지 못하는 기술관(技術官)의 고뇌를 우회적으로 토로한 술회시(述懷詩)가 산견(散見)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인간경애(人間境涯)를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그가 문학에 바친 열성은 비연시사(斐然詩社)의 결성과 『풍요삼선(風謠三選)』의 간행에 주동적인..
현기(玄錡, 1809 순조9~1860 철종11, 자 信汝, 호 希菴)는 역관 출신이지만 시작(詩作)에 뛰어나 당시의 사람들이 시신(詩神)이라 불렀다. 그는 출신신분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길이 없자 가난과 음주와 시작으로 평생을 보냈으며, 서로 세한붕(歲寒朋)으로 일컫던 정지윤(鄭芝潤) 이 죽자 풍악산에 들어가 스스로 추담선자(秋潭禪子)라 하고 선문(禪門)에 의탁하였다. 많지 않은 그의 시작들이 문하생 김석준(金奭準)에 의해 수집되어, 현재 『희암시략(希菴詩略)』에 34수가 전하고 있다. 현기의 시세계는, 스스로 ‘기(奇)’를 좇지 않았지만 시상이 기발한 것이 특색이다. 「차동파운시매은(次東坡韻示梅隱)」을 보기로 한다. 飢時噉飯飽時眠 배고플 때 밥먹고 배부르면 잠드니 一粟人間寄渺然 창해에 좁쌀 같은..
정지윤(鄭芝潤, 1808 순조8~1858 철종9, 자 景顔, 호 壽銅)은 성품이 경개(耿介)하고 얽매이기 싫어하며 ‘벽오기굴(僻奧奇堀)’하였으나 문자(文字)에 매우 총명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기이하게 여겨 정지윤(鄭芝潤)을 머물게 하여 소장한 도사(圖史)를 읽게 했다 한다. 최성환(崔瑆煥)이 그의 시고(詩藁)를 수집하여 하원시초(夏園詩抄) 1권을 간행하였다. 정지윤(鄭芝潤)의 문학론은 장지완(張之琬)과 마찬가지로 성령론적이다. 성령이 한번 붙으면 붓끝을 다할 따름이지 시체(時體)나 신풍(新風)을 좇거나 섬세한 것을 다투지 않는다 性靈一付央毫尖, 不遂時新競巧纖. 『夏園詩草」, 「丁未臘月」 其一 여기서 보이는 성령 역시 인간이 지닌 영묘한 정신작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결국 ..
8. 하대부(下大夫)의 방향(芳香)과 불평음(不平音) 조선후기에 이르러 시단에도 새로운 경향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기할 만한 것은 이른바 위항인(委巷人)의 진출이 상당한 세력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사실이다. 특히 하대부(下大夫) 일등지인(一等之人)으로 자처한 의(醫)ㆍ역(譯) 및 율과(律科) 출신의 중인들은 스스로 그들을 구속하고 있는 신분의 굴레에서 일탈할 수 없는 한계를 감수하면서, 독자적인 시세계를 향유하는데 성공한 시인들도 있다. 물론 역관 출신의 시인 가운데에도 회화시로 이름 높은 이상적(李尙迪)과 같이 이미 이들의 시작이 사대부의 권역(圈域)에 함께 자리할 수 있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시로써 자신의 이름을 신후(身後)에까지 남기는 것으로 자족(自足)하는 위항시인(委巷詩人..
김정희(金正喜, 1786 정조10~1856 철종7, 자 元春, 호 秋史ㆍ阮堂ㆍ禮堂ㆍ詩庵ㆍ果坡ㆍ老果) 역시 신위(申緯)와 마찬가지로 시서화(詩書畵) 모두에 발군(拔群)의 역량을 과시했다. 그는 시인, 서도가, 화가, 정치가, 경학자로서 그 어느 분야에서도 빼놓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남을 과시했다. 실제로 학문과 예술이 상호 융화되어 그 폭이 끝간 데 없이 호한(浩澣)할 뿐만 아니라, 교유관계도 역시 그 폭이 넓었다. 당시 청대의 석학으로 추숭받던 옹방강(翁方綱)ㆍ완원(阮元)으로부터 고증학(考證學)과 금석학(金石學) 및 박학다식(博學多識)의 계몽(啓蒙)을 입은 바 있고, 일찌기 스승으로 삼았던 박제가(朴齊家)로부터 시서화(詩書畵)의 역량을 전수받았는가 하면, 당대에 명망 높은 신위(申緯)ㆍ조인영(趙寅永)ㆍ권돈..
신위(申緯, 1769 영조45~1845 헌종11, 자 漢叟, 호 紫霞ㆍ警修堂)는 시(詩)ㆍ서(書)ㆍ화(畵) 삼절(三絶)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1799년에 알성문과(謁聖文科)의 을과(乙科)에 급제하면서 환로에 올랐고, 10여년을 한직(閑職)에 머물다가 1812년에는 서장관 자격으로 연행하여 당대의 대학자로 알려진 청(淸)의 옹방강(翁方綱)을 만나 교유하였다. 이후 병조참판(兵曹參知)ㆍ병조참판(兵曹參判)ㆍ강화부 유수(江華府 留守)ㆍ도승지(都承旨)ㆍ이조참판(吏曹參判)ㆍ호조참판(戶曹參判) 등을 차례로 지냈지만, 몇 차례의 유배와 탄핵을 받는 과정을 겪으면서 순탄하지 않은 일생을 보냈다. 그의 시편은 김택영이 600여수를 정선한 『신자하시집(申紫霞詩集)』이 간행되어 전하고 있다. 그의 문학활동에 직접적인 영향..
7. 추사(秋史)와 자하(紫霞)의 변조(變調) 당시(唐詩)를 선호하는 우리나라 시인들의 기본 성향은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도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시인들이 실제로 제작한 한시작품의 대부분은 시의 뜻이 넓고 깊은 개념(槪念)의 시(詩)를 써 왔으며, 특히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성향의 시작(詩作)으로 독자적인 시세계를 이룩하여 우리나라 한시의 높은 수준을 과시한 시인이 배출되기도 했다. 그 사람이 곧 신위(申緯)이며, 이 시인에게 직접ㆍ간접으로 영향을 준 또다른 시인이 김정희(金正喜)다. 김정희(金正喜)는 신위(申緯)보다 17년 연하이지만, 신위 시의 창작에 직접 조언(助言)을 하는 등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위의 시적 성향은 율조(律調)를 중요시하는 당시(..
이서구(李書九, 1754 영조30~1825 순조25, 자 洛瑞, 호 惕齋ㆍ薑山ㆍ席帽山人) 역시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의 인연으로 후세에 이덕무(李德懋)ㆍ유득공(柳得恭)ㆍ박제가(朴齊家)와 더불어 후사가(後四家)로 일컬어지고 있지만, 그가 속한 사회적 신분이나 그가 향유한 문학세계는 이들과 함께 묶여지지 않는다. 그는 본관이 전주이며, 중종(中宗)의 7자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宣祖)의 12자인 인흥군(仁興君)의 후손이다. 나머지 삼가(三家)와 달리 적출(嫡出)인 그는 20대에 백탑(白塔)을 중심으로 시활동을 벌였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관료로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 그러나 몇 차례의 유배 생활을 감수해야만 했던 그는 사환(仕宦) 중에도 늘 은거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저술로는 『척재집(惕齋集)』과 ..
박제가(朴齊家, 1750 영조26~1805 순조5, 자 次修ㆍ在先ㆍ修其, 호 楚亭ㆍ貞蕤ㆍ葦杭道人)는 본관이 밀양이며, 승지(承旨) 평(坪)의 서자(庶子)이다. 소년시절부터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나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19세를 전후하여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이덕무(李德懋)ㆍ유득공(柳得恭) 등과 교유하였고, 1776년에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 시편이 올라 청(淸)의 이조원(李調元)과 반정균(潘庭筠)으로부터 호평(好評)을 받았다. 1779년에 이덕무(李德懋)ㆍ유득공(柳得恭)ㆍ서리수(徐履修) 등과 초대 규장각 검서관에 배수되었으며, 1778년, 1790년(두 차례), 1801년의 연행을 통하여 대륙의 문물을 직접 목도하고 가까이 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연행에서 청(淸)의 석학인 이조원..
유득공(柳得恭, 1748 영조24~1807 순조7, 자 惠風ㆍ惠南, 호 泠齋ㆍ泠庵ㆍ古芸堂)은 당대 서자는 아니지만, 서류가계(庶流家系)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증조(曾祖) 이래로 일문(一門)의 사회적 진출에는 일정한 제한이 가해진 것으로 보인다. 소년시절부터 홍대용(洪大容)과 박지원(朴趾源) 문하(門下)에 출입하면서 이덕무(李德懋)ㆍ박제가(朴齊家)ㆍ이서구(李書九)와 교유하였고, 20대에는 개경(開京)ㆍ서경(西京)ㆍ공주(公州)ㆍ부여(扶餘) 등을 유람하며 민간의 인정물태(人情物態)를 두루 체감할 수 있었던 경험이 곧바로 「송도잡절(松都雜絶)」, 「서경잡절(西京雜絶)」, 「웅주잡절(熊州雜絶)」 등의 죽지사(竹枝詞)를 낳게 하였음은 물론, 이후 우리나라의 역사를 새롭게 인식한 역사서의 저술이나 31세에 지은 「이십..
이덕무(李德懋, 1741 영조17~1793 정조17, 자 懋官, 호 炯庵ㆍ雅亭ㆍ靑莊官ㆍ嬰處ㆍ東方一士)는 멀리 정종대왕(定宗大王)의 별자(別子)인 무림군(茂林君)의 후예(後裔)이지만, 부(父) 성호(聖浩)와 모(母) 반남박씨(潘南朴氏) 사이에서 서자(庶子)로 태어났기 때문에 크게 등용되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이덕무(李德懋)의 시세계는 법고(法古)와 창신(創新)을 결합하고 진심(眞心)과 진상(眞象)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박지원(朴趾源)이 「영처시고서(嬰處詩稿序)」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덕무(李德懋)는 이백(李白)ㆍ두보(杜甫)ㆍ황정견(黃庭堅)ㆍ진사도(陳師道) 등의 옛시인에게 얽매일 까닭이 없다고 하였으며, 그래서 그는 진솔한 생활모습과 정서를 담은 풍속시를 많이 남겼으며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 찬 죽지사..
박지원(朴趾源, 1737 영조13~1805 순조5, 자 仲美, 호 燕巖)은 명문가(名門家)인 반남박씨(潘南朴氏)의 후예임에도 불구하고, 과업(科業)에 특별한 집착을 보이지 않았다. 30세에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에게서 지구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접하였거니와, 노론(老論) 벽파(僻派)로 몰려 당대의 실력자인 홍국영(洪國榮)을 피해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하기도 하였고, 삼종형(三從兄)인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44세에 연행(燕行)을 하기도 하였다. 말년(末年)에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가 온포(蘊抱)를 펼 수 있었던 것은 문장(文章)이다. 율문(律文)보다는 산문(散文)에 승(勝)하여서, 「허생전(許生傳)」ㆍ「양반전(兩班傳)」ㆍ「호질(虎叱)」 등은 그의 기지(機智)와 풍자정신(諷刺精..
6. 후사가(後四家)와 죽지사(竹枝詞) 천기(天機)ㆍ진기(眞機)ㆍ본색(本色)ㆍ진색(眞色) 등을 강조하면서 진솔(眞率)한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출해야 한다고 주장한 삼연(三淵)의 문학론은, 홍세태(洪世泰)를 필두(筆頭)로 한 위항시인(委巷詩人)들과 정선(鄭敾)ㆍ이병연(李秉淵)ㆍ조영석(趙榮祏) 등의 백악사단(白岳詞壇)으로 이어지다가 19세기에 이르러 쇠퇴하게 된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왕성한 활동을 벌인 연암(燕巖)과 후사가(後四家)는 국내적으로는 삼연(三淵)의 문학론을 잇고 있다. 백악산(白岳山) 밑을 중심거점으로 동호인 그룹을 형성했던 동국진경산수화(東國眞景山水畵)의 거장 정선(鄭敾), 동국진경풍속화(東國眞景風俗畵)의 대가 조영석(趙榮祏), 동국진체(東國眞體)로 유명한 이병연(李秉淵) 등이 똑같이 백악..
김매순(金邁淳, 1776 정조1 ~1840 헌종6, 자 德叟, 호 臺山) 역시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와 같이 ‘대연문장(臺淵文章)’으로 일컬어지는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문장가이다. 세도가벌인 안동김씨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김상헌(金尙憲)ㆍ김수항(金壽恒)ㆍ김창협(金昌協)ㆍ김창흡(金昌翕)으로 이어지는 가계만 보아도 그의 문장이 어디서 온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김매순(金邁淳) 자신이 “경학과 문장이 합하여 하나가 된 사람으로는 오직 우리 집안의 여러 조상이 그러하였을 뿐[經學文章合而爲一者, 惟吾家諸祖爲然. 「答族姪士心」]”이므로 이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한 말이 이를 입증해준다. 20세의 나이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오른 그는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선발되는 영광을 누리면서 예문관(藝文館)ㆍ홍문관(弘文館..
홍석주(洪奭周, 1774 영조50~1842 헌종8, 자 成伯, 호 淵泉)는 대산(臺山) 김매순(金邁淳)과 함께 ‘연대문장(臺淵文章)’으로 이름을 얻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문장가이다. 선조의 부마였던 홍계원(洪桂元) 이후 꾸준히 고관대작(高官大爵)의 영예를 누린 그의 가계는 조선후기에 이르러 더욱 융성하게 되었으며, 아우 길주(吉周)와 현주(顯周) 등도 현달(顯達)하였다. 김창협(金昌協)ㆍ박지원(朴趾源)의 뒤를 이어 한 장석(韓章錫)ㆍ김윤식(金允植)ㆍ이건창(李建昌)ㆍ김택영(金澤榮) 등에 이르는 중간단계에서 고문가(古文家)의 전통을 빛낸 큰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풍산세고(豊山世稿)』를 간행하면서 “우리 집안이 문학을 전수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 십팔대인데 그 성취한 바의 깊이와 높이를 우리 자손들이..
이가환(李家煥, 1742 영조18~1801 순조1, 자 廷藻, 호 錦帶ㆍ貞軒)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을 개척한 이익(李瀷)의 종손(從孫)이며, 엄격한 학자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이용휴(李用休)의 아들이다. 남인(南人) 가계(家系)의 학풍을 체감하며 성장할 수 있었던 그는 환경과, 천주교 신자인 이승훈(李承薰)이 그의 외숙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가 천주교에 관심을 가질 조건도 함께 곁들여 있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적으로 교유한 사람들 중에는 정약용(丁若鏞)ㆍ이벽(李檗)ㆍ권철신(權哲伸) 등 남인계 천주교 신자가 많았다. 일찍이 박람강기(博覽强記)로 이름을 얻은 그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가학(家學)에 숙달하여 실학자적 소양과 문장력을 겸비하였으나 그의 명성에 걸맞는 저술이 없는 것이 흠으..
5. 경세가(經世家)의 시편(詩篇) 실천적인 유교이념으로 무장된 학자들은 물론, 사장(詞章)으로 이름을 얻은 문장가(文章家)들도 마땅히 경술(經術)로써 명군(明君)을 보좌해야만 하며 문장(文章)으로 경국(經國)의 대업(大業)에 이바지하여야 한다. 정약용(丁若鏞)은 그가 제작한 「탐진농가(耽津農歌)」 등을 통하여 농촌 백성들의 소박한 삶과 고난의 현실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으며, 홍석주(洪奭周)ㆍ김매순(金邁淳)도 고문(古文) 문장가(文章家)의 체질에 걸맞게 화평전실(和平典實)한 시작(詩作)으로 경세(經世)의 일념(一念)을 잃지 않고 있다. 정약용(丁若鏞, 1762 영조38~1836 헌종2, 初字 歸農, 자 美鏞ㆍ頌甫, 호 茶山ㆍ三眉ㆍ與猶堂ㆍ俟菴)은 진주목사였던 재원(載遠)의 4남 2녀 중 제 4남으로 경기도..
박윤묵(朴允默, 1771 영조47~1849 철종1, 자 士執, 호 存齋)은 정이조(鄭彛祚)의 문인으로 규장각서리(奎章閣書吏)와 평신첨사(平薪僉使)를 지냈다. 그의 시는 간결하고 정밀하여 당인(唐人)의 풍격(風格)이 있다고 말한다. 그의 「우중배대학사석재윤공묘(雨中拜大學士碩齋尹公墓)」를 보기로 한다. 三十年間九度過삼십년 사이에 아홉 번을 지나는데法華山色尙嵯峨법화산(法華山) 모습은 아직도 우뚝하다.松深古道靈風起소나무 우거진 옛 길엔 시원한 바람 불고花落荒原暮雨多꽃 떨어진 거친 들엔 저녁비 내린다.楸舍簡編猶剩馥개암나무 집 책에는 남은 향기 가득하고梣灘樵牧亦悲歌침탄에 초동은 슬픈 노래 부른다.忽聞蜀魄啼無盡갑자기 저렇게 울어대는 두견새 소리 들리니可柰枝頭怨血何나무가지 위에 뿌린 피는 어찌 하겠는가. 박윤묵(朴允默..
천수경(千壽慶, ? ~1818 순조18), 자 君善, 호 松石園ㆍ松石道人)은 일정한 직업을 갖지 못하고 서당의 훈도(訓導)로 근근히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천수경(千壽慶)은 시에 능했으며, 또한 자신의 생활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그의 시에서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자족적인 삶을 구가하며 초연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도처에 투영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일섭원(日涉園)」이다. 堆霞復拳石 上有松樹閒 쌓인 노을 거듭 돌을 휘감고 그 위에 소나무 한가히 서 있다. 誅茅寔爲此 柴扉溪上關 띠풀 베고 집을 지은 것은 이 때문이니 사립문은 시냇가에 닫혀 있다네. 軒窓容我膝 林木怡我顔 처마끝 창가에 이 몸 하나 앉을 만하고 숲의 나무는 내 얼굴 편안하게 해준다. 有時看白雲 鎭日..
정민교(鄭敏僑, 1697 숙종23~1731 영조7, 자 季通, 호 寒泉)는 정래교(鄭來僑)의 막내 동생으로, 일찍이 사예(詞藝)로써 진사에 올랐으나 낙척자방(落拓自放)하다가 일찍 죽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형에 앞서 『소대풍요』에 이름을 전하고 있다. 그 사람됨이 자못 소탕하고 구속되는 바가 없었으며, 술을 좋아하고 멀리 여행하기를 좋아하였다 한다. 이들 형제는 삼연(三淵)을 추숭하며 삼연(三淵)의 문하생과 어울려 함께 시작활동을 하는 한편, 홍세태(洪世泰)를 비롯한 여타의 위항시인들과 함께 백사(白社)를 결성하는 등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하였다. 특히 정민교(鄭敏僑)는 여행을 즐겼기 때문에 기행시가 많은데, 오원(吳瑗)은 이에 대하여 “여행의 뇌소(牢騷)를 읊은 것은 모두 정이 진실되고 시어가 새로우며 ..
정래교(鄭來僑, 1681 숙종7~1757 영조33, 자 潤卿, 호 浣巖)는 그의 아우 정민교(鄭敏僑)와 더불어 시문에 뛰어나 당대 사대부들의 추중을 받았던 위항인이다. 1705년 역관으로 통신사의 일원이 되어 일본에 갔다가 그 곳에서 시명(詩名)을 날리기도 하였다. 사대부 문인(文人)으로는 김창협(金昌協)ㆍ김창흡(金昌翕)을 따랐으며, 위항인(委巷人)으로는 홍세태(洪世泰)를 좇아 교유하였다. 정래교(鄭來僑)의 시를 두고 이천보(李天輔)는 “그의 시는 소탕연양(疏湯演瀁)하여 시인의 태도를 얻었는데, 가끔 성조(聲調)가 강개(慷慨)하여 연조(燕趙)의 격축지사(擊筑之士)가 위 아래로 치고받는 것과 같은 점이 있다. 대개 그 연원은 홍세태(洪世泰)에게서 나온 것이니, 천기(天機)로부터 얻음이 또한 많다[其爲詩也疏..
차좌일(車佐一, 1755 영조31~1809 순조9, 자 叔章, 호 四名子)은 차천로(車天輅)의 후손으로 서화(書畵)는 물론 음율, 사예(射藝)에도 능했던 시인이다. 홍양호(洪良浩)ㆍ정약용(丁若鏞) 등과 시로써 사귀었으며, 잠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을 살기도 하였으나 송석원 시사의 일원으로 풍류를 즐긴 일생이었다. 경외(境外)의 사림(詞林)으로 자처한 그였지만, 그는 끝내 “세세생생에 다시는 이 땅에 태어나지 않겠다[哭曰: 世世生生, 不願爲本邦人也. (行狀)]”고 통곡하였다 한다. 차좌일(車佐一)의 「산양역(山陽驛)」은 그러한 그의 삶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落日山陽驛 歸程問牧童 산양역에 해가 질 무렵, 갈 길을 목동에게 묻는다.一身無煖氣 四面有寒風 온 몸에 온기라곤 없는데 사방에는 찬 바람이 분..
장혼(張混, 1759 영조35~1828 순조28, 자 元一, 호 而已广ㆍ空空子)은 규장각서리(奎章閣書吏)를 지낸 인물로, 시에 능하여 명성이 자자하였으며 그를 좇는 위항의 무리도 많았다 한다. 고대(古代)로부터 명말(明末)까지의 중국 역대 시를 넓게 선발하여 『시종(詩宗)』을 편찬하기도 하고, 많은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 장혼(張混) 문하의 위항시인들이 다음 시기의 위항문학을 선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시사적 위치는 더욱 중요하다 하겠다. 장혼(張混)은 모든 것을 체관한 인생관, 생활관을 말해주는 이이엄(而已广)이라는 그의 자호(自號)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인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의 방식대로 자오하였으며 오직 ‘문학지교(文學之交)’ 만이 영세(永世)할 수 있다고 하였다. 장혼(張混)의 ..
고시언(高時彦, 1671 현종12~1734 영조10, 호 省齋, 자 國美)은 여러 차례 중국에 다녀온 한어역관(漢語譯官)으로, 역시 시에 뛰어났으며 경사(經史)에도 뛰어났다 한다. 채팽윤과 더불어 위항시의 집성인 『소대풍요(昭代風謠)』의 편찬에도 참여하였지만 간행(刊行)을 보지 못하고 죽어, 그의 시편이 『소대풍요(昭代風謠)』「별집(別集)」에 수록되어 있다. 「소대풍요권수(昭代風謠卷首)」의 제사(題辭)를 통하여 그는 “『동문선』과 더불어 서로 표리를 이루어 한 시대의 풍아를 찬란히 감상할 수 있다. 귀천의 나은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하늘이 재주를 빌려주어 시를 잘 읊조리는 것은 한 가지다[與東文選相表裏, 一代風雅彬可賞, 貴賤分岐是人爲, 天假善鳴同一響]”라 하여 신분에는 서로 차이가 있지만, 위항인의 문..
이언진(李彦瑱, 1740 영조16~1766 영조42, 자 虞裳, 호 松穆館)은 홍세태(洪世泰)ㆍ이상적(李尙迪)ㆍ정지윤(鄭芝潤)과 더불어 역관사가(譯官四家)로 일컬어지는 시인으로 영조 때의 시단에서 혜성같은 존재로 평가된 바 있다. 특히 그는 24세에 일본에 통역관으로 따라가 그곳에서 시명을 떨침으로써 유명해졌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시재에도 불구하고 일찍 요절함으로써 천재시인으로서의 안타까움을 더욱 절실하게 돋보여 평가되기도 하여, 박지원(朴趾源) 등 여러 문인들에게서 입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문집(文集) 『송목관집(松穆館集)』 이 전하고 있다. 이언진(李彦瑱)의 시의 특징은 전통적인 한시의 대부분이 칠언 일색임에 비해, 이언진(李彦瑱)은 파격적으로 육언절구(六言絶句)를 즐겨 짓고 있음을 지적..
4. 위항인(委巷人)의 선명(善鳴) 서울의 서대문 밖 인왕산 옥계 기슭에 천수경(千壽慶)ㆍ차좌일(車佐一)ㆍ최북(崔北)ㆍ장혼(張混)ㆍ왕태(王太) 등이 모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로 송석원(松石園)이란 편액을 걸고 시회를 결성하였다. 이 시사에서 삼사십명 때로는 백여명 씩 모여서 시를 읊었다고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실로 위항문학의 전성기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이 송석원시사는 1786년 여름부터 1820년 무렵까지 30여년 존속하면서 당시의 사대부 문단 못지 않은 시문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들은 자연을 벗삼아 세속에 물들지 않음을 자부하면서 자신들의 문학을 사대부의 문학과 구별하여 ‘경외(境外)의 사림(詞林)’이라 자존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위항시인으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조..
이용휴(李用休, 1708 숙종34~1782 정조6, 자 景命, 호 惠寰齋)는 이익(李瀷)의 조카로 가학(家學)을 계승하여 영정대(英正代)의 학계(學界)에 크게 영향을 끼친 문인이다. 시역시 학자풍 그대로 엄격하기만 하다. 그의 시세계는 이덕무(李德懋)의 말과 같이 격률(格律)이 엄고(嚴苦)하고 자구(字句)마다 근거가 분명하였으며 음풍농월(吟風弄月)을 일삼지 않았다[詩力追中國, 恥作鴨江以東語, 格律嚴苦, 藻采煥曄, 別關洞天, 峭絶無隣, 博極墳典, 字句有根 …… 不徒作月露風花, 爲無用之言也]. 그래서 그의 시작의 대부분은 연작(連作) 송별시(送別詩)와 만시(挽詩)로 채워져 있으며 이를 통하여 그는 그의 관풍(觀風)의 의지를 확연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이용휴(李用休)의 시세계는 다음의 「전가(田家)..
김려(金鑢, 1766 영조 42~1822 순조 22, 자 士精, 호 藫庭)는 소위 ‘강이천사건(姜彛天事件)’에 연루되어 정조로부터 패관소품(稗官小品)에 힘쓰는 자라 지탄받고 유배됨으로써 유명해진 문인이다. 이 사건의 확대로 김려(金鑢)는 10년 가까이 유배생활을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옥사와 유배생활을 통해 김려(金鑢)는 새롭게 역사와 문학을 바라보게 된다. 김려(金鑢)가 만년에 편집한 방대한 분량의 야사총서 『한고관외사(寒皐觀外史)』는 당론에 왜곡된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는 작업이었다. 한편 김려(金鑢)는 자신을 비롯한 주위 문우들의 시문을 수집하여 『담정총서(藫庭叢書)』를 편집하였는데, 특히 이옥(李鈺)의 전(傳)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수집, 정리하였으며 그의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김려(金鑢..
이학규(李學逵, 1770 영조46~1835 헌종1, 자 醒叟, 호 洛下生)는 이용휴(李用休)의 외손으로 그 계보는 남인계 실학자에 이어져 있는 문인이다. 일찍이 정조의 지우를 받으면서 문명을 얻었으나, 곧 신유사옥(辛酉事獄)에 연루되어 24년간이란 긴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따라서 낙하생의 문학세계는 바로 이러한 유배생활과 밀접하게 관계를 갖게 된다. 낙하생이 교유한 인물들로 이가환(李家煥)ㆍ정약용(丁若鏞)ㆍ신위(申緯) 등을 꼽을 수 있는데, 특히 정약용(丁若鏞)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낙하생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각기 유배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편지와 시를 주고받으면서 교유하였다. 8살 아래인 낙하생은 다산이 유배지 김해(金海)로 보내오는 시작에 크게 고무되어 왕성한 시작활동을 보이고 있다. ..
이른바 강화학파(江華學派)는 조선 숙종(肅宗) 연간에서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지연(地緣)과 혈연(血緣)을 바탕으로 새로운 학풍을 형성한 문인 학자들의 학맥을 지칭한다.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가 만년(晩年)에 강화도에서 양명학(陽明學)을 천명하였을 때 그 문하에서 이광명(李匡明)ㆍ이광신(李匡臣)ㆍ이광려(李匡呂)ㆍ이광사(李匡師)ㆍ신대우(申大羽) 등이 배출되었으며, 또한 이 학맥은 구한말 이건방(李建芳)ㆍ이건창(李建昌)ㆍ정인보(鄭寅普)에까지 이른다. 이들은 신임옥사(辛壬獄事)의 여얼(餘孽)로 이 고경(苦境)을 걷게 되면서 양명학(陽明學)을 가학(家學)으로 이어 전하게 되었으며 후일 이건창(李建昌)의 조부(祖父) 이시원(李是遠)에 이르러 강화도령철종(江華道令哲宗)이 등극(登極)함에 따라 처음으로 환로(宦路)..
홍양호(洪良浩, 1724 영조1 ~1802 순조2, 자 漢師, 호 耳谿)는 소론 명문가 출신으로 영정(英正) 양조(兩廟)의 인정을 받아 노론 정권 속에서도 벼슬길이 비교적 순탄하여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의 영직(榮職)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는 관풍(觀風)의 의지가 남다른 바 있어 여항인의 시선집인 『풍요속선(風謠續選)』에 천기론(天機論)을 개진하는 서문을 쓰기도 하였고, 또 시조를 한역하여 「청구단곡(靑丘短曲)」을 짓는가 하면, 민요를 채집하여 「홍주풍요시십장(洪州風謠詩十章)」을 짓기도 하였다. 이로써 보면 이계(耳谿)의 문학적 관심은 정통의 한시 뿐 아니라 여염의 민요에까지 매우 폭넓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계(耳谿) 한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국문시가와 민요의 수용양상이라..
신광수(申光洙, 1712 숙종38~1775 영조51, 자 聖淵, 호 石北)는 미미한 남인 가문 출신으로 문명(文名)이 자자했음에도 과거진출에 어려움을 겪었던 시인이다. 그의 科詩인 「관산술마(關山戌馬)」는 당대에 노래로 가창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지만 그는 끝내 문과에 오르지 못했다. 이와 같이 석북은 평생 과거에 소용되는 글에 매달리면서도 한편으로 많은 기행시와 세태시들을 남기고 있다. 이 시들은 직접 자신의 어려운 삶을 토로하기도 하고, 또 자기와 같이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사실적으로 그리기도 하였다. 몰락양반의 참상을 형상화한 「송권국진가(送權國珍歌)」,어린 계집종의 고난을 핍진하게 묘사한 「채신행(採薪行)」, 영릉참봉시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의 참상을 그린 「납월구일행(臘月九日行)」 등은 현실..
최성대(崔成大, 1691 숙종17~?, 자 士集, 호 杜機)는 문과 급제후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으나 불기(不羈)의 기질로 벼슬살이에 매이지 않고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많은 시를 남겼다. 두기는 “지나는 곳의 산천과 고을의 풍요(風謠)와 물색(物色)이 마음에 와 닿으면 곧 시로 읊어내어 그 정취(情趣)와 성향(聲響)이 시원스럽게 옛시와 합치하였다[所過山川墟里 風謠物色 有感於心 輒發吟哦 情趣聲響 泠然合於古. -李壽鳳, 「杜機詩集序」].”고 한다. 이러한 그에 대하여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도 ‘고악부(古樂府)의 유조(遺調)’가 있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실제로 『두기시집(杜機詩集)』에서 가(歌)ㆍ사(詞)ㆍ곡(曲)ㆍ편(篇) 등의 시제(詩題)를 유난히 많이 채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노래를 연상시키는..
3. 기속시인(紀俗詩人)의 낭만(浪漫) 조선후기에 이르러 새로운 조선시를 모색하는 움직임이 여러 가지 방면에서 나타난다. 엄격한 관풍(觀風)의 의지로 풍속을 징험하고 세태를 반영하려는 시작(詩作)들이 나타나는가 하면 죽지사(竹枝詞) 또는 악부풍(樂府風)으로 변방의 풍속이나 민간의 서정을 사실적이면서 낭만적으로 그려내려는 노력들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신유한(申維翰)의 「일본죽지사(日本竹枝詞)」, 신광수(申光洙)의 「관서악부(關西樂府)」, 홍양호(洪良浩)의 「북새잡요(北塞雜謠)」, 김려(金鑢)의 「사유악부(思牖樂府)」 등도 이에 속하는 것들이다. 신유한(申維翰, 1681 숙종7~1752 영조28, 자 周伯, 호 靑泉)은 한미한 가문출신【서류(庶流)로 생각되기도 했음】으로 평생을 말단에서 전전하며 가난하게 지..
이병연(李秉淵, 1671 현종12~1751 영조27, 자 一源, 호 槎川)은 그의 아우 이병성(李秉成)과 함께 김창협(金昌協)과 김창흡(金昌翕)의 문하에서 시명(詩名)을 드날린 문인이다. 같은 문하인 윤봉조(尹鳳朝)나 이천보(李天輔) 등에게서 이미 인정을 받았을 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이덕무(李德懋)에게서도 “사천과 같은 때에 화가로는 관아재 조영석, 겸재 정선이 함께 백악산 아래에 살면서 문채와 풍류가 일시에 찬란했다[槎川之時 畫則趙觀我齋榮祏 鄭謙齋㪨 俱居白岳下 文采風流 輝暎一時 「淸脾錄」].”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그는 김창협(金昌協)ㆍ김창흡(金昌翕)에 의해 주도된 진시운동을 계승하여 조선의 산천을 시로써 형상화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시작(詩作) 활동은 그의 평생 지기(知己)인 겸재 정..
오광운(吳光運, 1689 숙종15~1745 영조21, 자 永伯, 호 藥山)은 고시언과 채팽윤이 편찬하다가 못다하고 간 『소대풍요(昭代風謠)』를 마무리하여 간행하는 등 적극적으로 위항문학을 세상에 드러나게 한 문인기도 하다. 오광운(吳光運)은 사대부문학 뿐만 아니라 ‘천(天)’을 온전히 간직한 위항문학을 포괄해야만 조선문학의 전체적인 조망이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양반들이 홀로 감당할 수 없어 중인이나 한미한 선비의 집【규두(圭竇): 규(圭) 모양의 길쭉한 쪽문이라는 뜻으로, 지극히 빈한한 선비의 거처를 가리킨다. 『예기』 유행(儒行)에 “선비는 가로 세로 각각 10보(步) 이내의 담장 안에서 거주한다. 좁은 방 안에는 사방에 벽만 서 있을 뿐이다. 대를 쪼개어 엮은 사립문을 매달고, 문 옆으로 규 모양의..
남유용(南有容, 1698 숙종24~1773 영조49, 자 德哉, 호 雷淵)은 영조 시대의 문풍을 주도한 관각문인(館閣文人)이었지만, 앞서 살핀 이들과 마찬가지로 천기론적 시론을 펼치면서 시작을 겸하였다. 남유용(南有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하에 가득한 것이 모두 나의 시이다. 그 항상된 것은 산천초목(山川草木)에 있고 그 변하는 것은 풍운연월(風雲煙月)에 있다 天下者皆吾詩也, 其常在山川草木, 其變在風雲煙月. 『雷淵集』, 「鐘巖詩卷跋) 이 발언을 통해 경물에 대한 관심을 시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러한 남유용(南有容)의 시세계를 다음의 「기우(騎牛)」를 통해 보기로 한다. 春雨濛濛過一簑 봄비가 몽롱하게 도롱이를 스쳐지나는데 片雲出峽與婆娑 조각 구름은 골짜기를 너울너울 빠져나간다. 極知..
홍세태(洪世泰, 1653 효종4~1725 영조1, 자 道長, 호 柳下)는 역관출신으로 그 시명이 국내뿐 아니라 일본에까지 알려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위항시인이다. 홍세태(洪世泰)는 스스로 『유하집(柳下集)』 권6 「추회시(秋懷詩)」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骨相判爲當世棄 뼈의 생김새야 판이하여 당세를 위해 버려졌지만 文章留與後人知 문장만은 남아 후배들에게 알려지리. 이처럼 문학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정립코자 하였다. 이에 그는 역관이라는 자신의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을 ‘독서지사(讀書之士)’ 또는 ‘소유(小儒)’로 인식하면서 평생을 가난 속에서 여행과 시업(詩業)으로 일관하였다. 또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위항인 48인의 작품을 모아 『해동유주(海東遺珠)』를 편찬하여, 이 다음의 『소대풍요(昭代風謠)..
조성기(趙聖期, 1638 인조16~1689 숙종15, 자 成卿, 호 拙修齋)는 높은 포부와 학문이 있었지만 세상에 쓰이지 못했던 문인이다. 특히 그는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어 농암(農巖)ㆍ삼연(三淵) 형제에게서 높이 평가받았으며, 또 그들과 서로 시에 대한 견해를 주고받기도 하였다. 스스로 다음과 같이 작시(作詩)의 원칙을 밝히기도 했다. 이런 까닭으로 내가 꽃을 볼 적에 일찍이 외부의 노랗고 붉은 것을 탐하여 볼 뿐만이 아니라 실제론 사물에 따라 형체에 부여된 변화롭고 기교로우며 무궁하면서도 오묘한 조화와 때에 따라 피고 지는 생물의 색과 모습의 쉼이 없음을 감상한다. 是以僕之看花, 未嘗耽看外面之黃紅而已, 實賞其隨物賦形化工無窮之妙造, 逐時榮悴物色生態之不息. 작시(作詩)의 원칙을 밝힌 그대로, 그의..
김창흡(金昌翕, 1653 효종4~1722 경종2, 자 子益, 호 三淵)은 문보다는 시에 뛰어나 형 김창협(金昌協)의 문장과 병칭되기도 한다. 홍만종(洪萬宗)이 『시평보유(詩評補遺)』 하편(下篇)에서 “삼연 김창흡은 과거시험 공부를 일삼지 않고 시재로 세상에 이름이 나 이따금 흥을 붙여 지은 작품이 격조가 높고 마음이 깊어 남들이 도달할 수 없다[金昌翕三淵, 不事科業, 以詩名於世, 時時寓興之作, 格高心玄, 人莫能及].”라 한 그대로, 삼연(三淵)의 일생은 시로 시작해서 시로 끝났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특히 삼연(三淵)은 새로운 이론과 창작의 실천을 통하여 18세기 시단에 활력과 변화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삼연(三淵)을 지지하는 많은 작가들에 의하여 이후 그는 이 시기 시단의 맹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
2. 백악시단(白嶽詩壇)과 진시운동(眞詩運動) 17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인왕산(仁旺山)과 북악산(北嶽山) 사이의 산록(山麓, 壯洞)에 시단(詩壇)을 만들고, 새로운 시를 써야 한다고 다짐하는 일군의 시인들이 모여 들면서, 조선후기 시단에 새로운 기풍이 일기 시작했다. 이들이 함께 모인 곳을 백악시단(白嶽詩壇)이라 부르기도 하고 이 새로운 시세계의 지향을 모색하는 움직임을 ‘시운동(詩運動)’이라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김창협(金昌協)과 김창흡(金昌翕) 형제가 중심이 되고, 이들의 문하에서 이병연(李秉淵)ㆍ이하곤(李夏坤)ㆍ김시민(金時敏)ㆍ김시보(金時保)ㆍ유척기(兪拓基)ㆍ홍세태(洪世泰) 등이 호응하여 조선후기 소단(騷壇)에 참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화단(畵壇)에서도 겸..
홍만종(洪萬宗, 1643 인조21 ~1725 영조1, 자 于海, 호 玄默子)은 정두경(鄭斗卿)에게 시를 배웠고, 김득신(金得臣)과 망년의 사귐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저술활동에 주력하여 『해동이적(海東異蹟)』(24세), 『소화시평(小華詩評)』(33세), 『순오지(旬五志)』(36세), 『시평보유(詩評補遺)』(49세),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63세), 『증보역대총목(增補歷代總目)」(64세), 『시화총림(詩話叢林)』(70세), 『명엽지해(蓂葉志諧)」(미상) 등을 남기고 있다. 이 중 『소화시평(小華詩評)』ㆍ『시평보유(詩評補遺)』ㆍ『시화총림(詩話叢林)』 등은 각각 우리나라 비평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강백년(姜栢年, 1603 선조36~1681 숙종7, 자 叔久, 호 雪峰)은 특별한 시론(詩論)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정두경(鄭斗卿)ㆍ김득신(金得臣) 등과 종유하며 당시풍의 아름다운 시편을 많이 남겼다. 「금강도중(金剛道中)」을 보인다. 百里無人響 山深但鳥啼 백리를 지나도록 사람 말 들리지 않고 산이 깊어 다만 새 소리만 들리네. 逢僧問前路 僧去路還迷 중을 만나 갈 길을 물어 보았지만 중 떠나자 길이 다시 혼미해지네.. 이 시를 정두경(鄭斗卿)에게 보이자, 정두경(鄭斗卿)은 승구(承句)의 단(但)을 산(山)자로 바꾸면 더욱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고, 이에 강백년도 동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득신(金得臣)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姜叔久栢年 金剛山道中詩曰 百里無人響 山深但鳥啼 逢僧問前路 僧去路還迷 ..
김득신(金得臣, 1604 선조37~1684 숙종10, 자 子公, 호 柏谷)은 시화서(詩話書) 『종남총지(終南叢志)』를 저술한 시론가이며 시인이다. 그는 정두경(鄭斗卿)ㆍ임유후(任有後)ㆍ홍석기(洪錫箕)ㆍ홍만종(洪萬宗) 등 당대의 시인들과 망년의 사귐을 맺었다. 그가 교유했던 이들이 대체로 당시(唐詩)를 숭상하였거니와 그 자신도 또한 당풍(唐風)에 경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의 시를 평할 때의 기준이 당시에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는 타고난 천재로 시를 쓴 시인이기보다 후천적인 단련으로 좋은 시를 남긴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독수기(讀數記)」에서 「백이전(伯夷傳)」을 일억독(一億讀)했다고 하고 자신의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라 이름 붙였다 하거니와, 그를 곁에서 본 홍만종(洪萬宗)도 서슴없이 그의 재질이..
1. 시론가(詩論家)의 시업(詩業)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 양난(兩亂) 이후의 황량한 시단에 전대(前代)의 시작(詩作)들을 정리하는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된다. 시선집을 다시 내고, 시화를 창작하거나 기존의 시화를 모아 새로이 총집으로 발간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 대표적 인물이 남용익(南龍翼)ㆍ김득신(金得臣)ㆍ홍만종(洪萬宗) 등이다. 이들은 스스로 전인(前人)들의 시작(詩作)을 수집ㆍ정리ㆍ비평하고 있지만, 그들이 생산한 시작(詩作)이 반드시 비평가의 명성에 걸맞는 것은 아니다. 남용익(南龍翼, 1628 인조6~1692 숙종18, 자 雲卿, 호 壺谷)은 숙종년간(肅宗年間) 오랫동안 예조판서ㆍ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시선집 『기아(箕雅)』를 편찬하는 한편, 시화비평서(詩話批評書) 『호곡시화(壺谷詩話)..
8. 조선후기(朝鮮後期)의 황량(荒凉)과 조선시(朝鮮詩)의 자각(自覺)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은 시단까지도 황량하게 하였다. 흔히 천하가 어지러울 때 인물이 배출된다고 하지만, 목릉성세(穆陵盛世)의 풍요는 오로지 전 시대의 안정에 힘입은 결과이며 병란 때문에 인물이 쏟아져 나온 것은 결코 아니다. 이후 숙종(肅宗)대에 이르는 70여년간의 시단은 문자 그대로 황량과 적막만이 있을 뿐이다. 다만 정두경(鄭斗卿)과 이민구(李敏求)가 적막에서 일어나 우뚝하게 시단을 돋보이게 하였다. 숙종대에 이르러 모처럼 태평성세를 구가하는 안정을 되찾았지만 정치 내부에서 불붙기 시작한 당론(黨論)의 가열로 사림(士林)은 빛을 잃고 소단(騷壇)은 다시 산림(山林) 속으로 자복(雌伏)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 왕..
최대립(崔大立, ?~?, 자 秀夫, 호 蒼厓)은 임준원(林俊元)ㆍ최승태(崔承太)ㆍ유계홍(庾繼弘)ㆍ김부현(金富賢) 등과 어울려 낙사(洛社)를 결성하여 시회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이들은 모두 각체시(各體詩)를 두루 시범(示範)하여 뒷날 『소대풍요(昭代風謠)』와 같은 위항시집(委巷詩集)을 빛내고 있다. 최대립(崔大立)의 「상실후야음(喪室後夜吟)」(七絶)과 「풍중화(風中花)」(七古)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睡鴨薰消夜已關 향로에 불기 가시며 밤도 이미 끝났는데 夢回虛閣枕屛寒 꿈에 잠긴 빈 집에는 베개와 병풍이 썰렁하구나. 梅梢殘月娟娟在 매화가지 끝, 지는 달만은 곱디 곱게 남아서 猶作當年破鏡看 그때의 깨어진 거울을 보게 하는구나. 『소대풍요(昭代風謠)』 권3. 이 시의 제목이 「상실후야음(喪室後夜吟)」인 데서 알..
김효일(金孝一, ?~?, 자 行源, 호 菊潭)은 금루관(禁漏官)을 지낸 위항시인으로 역시 시에 능하여, 『육가잡영(六歌雜詠)』에 41수의 시를 전하고 있다. 자신의 처지와 생활을 평담하게 표백하고 있는 「만음(漫吟)」을 보기로 한다. 樂在貧還好 閑多病亦宜 즐거움이 있어 가난도 도리어 괜찮고 한가로움 많아 병 또한 편안하네. 燒香春雨細 覓句曉鍾遲 향불을 태우노라니 봄비가 가랑가랑 내리고 시구를 찾노라니 새벽 종소리 드디 울리네. 巷僻苔封逕 窓虛竹補籬 궁벽진 마을에 이끼는 길을 덮고 빈 창에는 대나무가 부서진 울타리를 기웠네. 笑他名利客 終歲任驅馳 우습구나. 저 부귀영화를 좇는 무리들 한 해가 다가도록 달려가기만 하네. 이 시 또한 좌절하고 있는 작자 자신의 평범한 삶의 주변 부분들을 옮고 있다. 그러나 미..
위항인(委巷人)이란 ‘거리에 버려진 사람’이라는 것이 본래의 뜻이다. 사회로부터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래서 위항시인이란 대체로 중간계층의 신분에 속하는 시인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실제로는 이른바 ‘하대부일등지인(下大夫一等之人)’으로 자처(自處)하는 의역중인(醫譯中人), 서리(胥吏) 등이 핵을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 서류(庶流)와 하천인(下賤人)들이 포함되기도 한다. 곧 사대부의 반열에는 참여하지 못하지만, 사실상 평민보다는 우위에 있는 이른바 여항의 시인들이다. 이들의 시작(詩作)이 궁극적으로 사대부들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점에서 보면 그 독자적 영역을 인정하기 어렵지만, 한편 사대부와 구별되는 계층에 속하는 지식인이 집단으로 문학활동을 전개한 사실에서 보면 조선..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 명종18~1589 선조22, 本名 楚姬, 자 景樊, 호 蘭雪軒)은 엽(曄)의 딸이자 균(筠)의 누이로 이달(李達)에게 당시(唐詩)를 배워 시재(詩才)를 떨친 여류 한시의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는 시인이다. 난설헌(蘭雪軒)의 시(詩)는 중국과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난설헌(蘭雪軒)은 어려서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8세 때 이미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이라는 명편을 지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기림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남편 김성립(金誠立)과 금슬(琴瑟)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시어머니와의 불화, 자식들의 요사(夭死), 친정의 몰락 등 계속되는 시련으로 불우한 생애를 보내야만 하였다. 특히 난설헌(蘭雪軒)의 시 역시 규방의 정한과 삶의..
계생(桂生, 1573 선조6~1610 광해군2, 일명 癸生ㆍ癸娘ㆍ香今, 자 天香, 호 梅窓ㆍ蟾初)은 부안(扶安)의 명기(名妓)로 가금(歌琴), 한시, 시조에 능한 여류시인(女流詩人)이다. 아전 이양종(李陽從)의 딸로 개성의 명기(名妓) 황진이(黃眞伊)와 쌍벽을 이루었으며 당대의 문사 유희경(劉希慶), 허균(許筠) 등과 교유가 깊었으나 38세로 요절하였다.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 권하 99번에서 근세의 송도(松都) 황진이(黃眞伊)와 부안(扶安)의 계생(桂生)은 그 사조(辭藻)가 문사들과 더불어 다툴 만하니 기이하다고 칭송하였다. 유희경의 『촌은집(村隱集)』에 계생에게 준 시 7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증계낭(贈癸娘)」 시를 보면 “일찍이 남국 계랑의 명성을 들었거니 시운(詩韻)과 가..
이옥봉(李玉峰, ?~?)은 조선중기의 여류시인으로 옥봉(玉峰)은 그의 호(號)다. 옥봉은 옥천군수(沃川郡守) 이봉(李逢)의 서녀(庶女)로 태어나 조원(趙瑗)의 소실(小室)이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직전 35세를 전후하여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시는 대부분 산일(散逸)되었으나 조원(趙瑗)의 현손(玄孫)인 조정만(趙正萬)이 편한 『가림세고(嘉林世稿)』 편말(編末)에 수록되어 있는 「옥봉집(玉峰集)」에 32수가 전하고 있다. 『가림세고(嘉林世稿)』는 조원(趙瑗)ㆍ조희일(趙希逸)ㆍ조석형(趙錫馨) 등 삼대(三代)의 시문 3권과 옥봉의 시로 편차되어 있다. 허균(許筠)은 옥봉의 시를 맑고 굳세며(淸健ㆍ淸壯) 여성의 화장기가 없어 가작이 많다고 평가하였으며 신흠(申欽)과 홍만종(洪萬宗)도 옥봉이 시문에 ..
황진이(黃眞伊, ?~?, 本名 眞, 一名 眞娘, 妓名 明月)는 중종(中宗) 때의 명기(名妓)로 시서(詩書)와 음률(音律)에 능통하였다. 그는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출중한 미모와 예술적 재능을 타고나 15세에 기적(妓籍)에 투신한 이후 당대의 문인 명유와 교유하여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당시 생불(生佛)이라 일컬어지던 천마산(天磨山)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파계시킨 일과 시조 한 수로 벽계수(碧溪守)를 매료시킨 일, 소세양(蘇世讓)과의 교유, 서경덕(徐敬德)과의 사이에 사제관계(師弟關係)가 이루어진 사연 등은 널리 알려진 것들이다. 특히 그는 서경덕(徐敬德)으로부터 당시(唐詩)를 배우게 되어 그의 문학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
백대붕(白大鵬, ? ~ 1592 선조25, 자 萬里)은 조선중기 천예출신(賤隸出身)의 시인으로 유희경(劉希慶)과 함께 조선후기 위항문학(委巷文學) 발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출생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학산초담(鶴山樵談)』등에 유희경(劉希慶)ㆍ정치(鄭致)ㆍ허봉(許篈)ㆍ심희수(沈希洙) 등과 교유하였다는 기사를 참고로 한다면 아마도 출생연대는 1550년대 전후로 추정된다. 「취음(醉吟)」시에서 자신의 신분이 군함과 수운의 업무를 행하는 전함사(典艦司)의 노예라고 밝히고 있으나 이 역시 사실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허균(許筠)은 그가 궁궐의 개폐와 왕명의 전달을 맡는 액정서(掖庭署)의 사약(司鑰)을 역임하였다고 하였으나 천인 신분의 그가 정6품 잡직(雜職)인 이러한 지위에 어떠한..
8. 풍요(豊饒) 속의 음지(陰地) 사대부(士大夫) 계층에서 목릉성세(穆陵盛世)의 풍요를 누리고 있을 때 이들과 다른 처지에서 외롭게 시를 쓴 시인(詩人)들도 있다. 천예(賤隸) 출신인 유희경(劉希慶)ㆍ백대붕(白大鵬)과, 사대부(士大夫) 계층의 유희적 애정의 대상으로 일세에 풍류를 과시한 황진이(黃眞伊)ㆍ이옥봉(李玉峰)ㆍ계생(桂生)과 같은 기녀(妓女)들이 그들이다. 그런가 하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위항인(委巷人)의 신분으로 『육가잡영(六家雜詠)』과 같은 위항시집(委巷詩集)을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최기남(崔奇男)ㆍ김효일(金孝一)ㆍ최대립(崔大立) 등도 모두 음지(陰地)에서 시를 쓴 이 시대의 시인들이다. 유희경(劉希慶, 1545 인종1~1636 인조14, 자 應吉, 호 市隱ㆍ村隱)은 조선중기의 천예(賤隸..
정두경(鄭斗卿, 1597 선조30~1673 현종14, 자 君平, 호 東溟)은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으로 정언(正言)ㆍ교리(校理) 등을 역임하고 만년에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뒤에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어적십난(禦敵十難)」의 상소를 올렸으며 1650년 풍시(諷詩) 27수를 효종에게 올려 호피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그는 을사사화(乙巳士禍)의 간흉(奸凶) 정순붕(鄭順朋)의 증손으로 이것이 그의 사회적 진출에 멍에가 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의 조상 중에는 렴(磏)과 같은 문사(文土)가 있으며 아버지 지승(之升)도 문명(文名)을 떨쳐 대대로 문장가를 배출한 가계(家系)를 이어 그 역시 시명(詩名)으로 일세(一世)를 울렸다. 임병양난(壬丙兩亂) 이후 숙종대(肅宗代)에..
이명한(李明漢, 1595 선조28~1645 인조23, 자 天章, 호 白洲)은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시인이요, 문장가로 관각응제(館閣應製)의 외교서가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으며 아버지 정구(廷龜), 아들 이상(一相)과 더불어 삼대(三代)가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명문가 출신으로 당시의 문단을 빛내었다. 이명한(李明漢)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반대하였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척화파(斥和派)로 지목되어 두 차례나 심양에 끌려가는 등 절의지사(節義志士)의 삶을 영위하였는데 그가 심양으로 잡혀갈 때 지은 육수(六首)의 시조는 인구에 널리 회자되기도 하였다. 이명한(李明漢)은 이식(李植)과 장유(張維)로부터 시재(詩才)를 인정받는 등 당시 문단에서 주목을 받았다. 후대에 김만중(金萬重)과 홍만종(洪萬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