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역사&절기/한국사 (200)
건빵이랑 놀자
한국사&동양사&서양사 역사 연표(대한제국~현대사) 한국 동양서양1897 고종 환궁 / 대한제국 수립 1894~5 청일 전쟁 / 시모노세키 조약체결1896 헤르츨이 시오니즘 제창 / 제1회 올림픽1898 만민공동회 개최 / 고종, 독립협회 해산령 내림 1898 중국, 무술변법1898 파쇼다 사건(영국과 프랑스 간 우호 성립)1899 최초의 철도 경인선 개통 1899 의회단 사건 발발 19001902 영국,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영일동맹 결성 1903 영국, 벵골 분리 계획 추진 1904 일진회 창립 1904~1905 러일전쟁(일본, 동양의 제국주의 국가로 부상) 1905 을사보호조약 체결 1905 러시아, ‘피의 일요일’ 사건1906 국채보상운동 / 의병운동 재개 1906 인도, 캘커타 대회에서 ..
한국사&동양사&서양사 역사 연표(순조~조선말기) 한국 동양서양1800 순조의 즉위로 세도정치 시작(사대부 체제 복귀)1800 1801 신유박해 / 공노비 완전 폐지 1804 나폴레옹 황제 즉위. 나폴레옹 법전 편찬 1805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 시작 1806 신성 로마 제국 멸망1811 홍경래의 난1810 1812 나폴레옹,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면서 몰락 1814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의 주도로 빈 회의 개최1818 정약용, 『목민심서』 저술 1817 영국, 마라타 연합 대파. 인도 전체를 지배1816~1825 자유주의의 여파로 아르펜티나, 칠레, 콜롬비아 등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가 독립함 1819 영국, 싱가포르에 자유무역항을 설치 18201825~1830 자와 전쟁1829 그리스 독립1832 ..
한국사&동양사&서양사 역사 연표(임란~정조)한국 동양서양1590 일본에 통신사 파견15901590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 1592 임진왜란 발발 1598 앙리 4세가 낭트칙령으로 신교의 자유 허용(위그노 전쟁 종결)1597 일본의 재침략(정유재란) 1598 이순신, 노량해전 승리 / 정유재란 종결 1598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 16001600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의 미쓰나리와 붙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해 일인자로 부상1600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설립1605 사명당, 일본의 조선 포로 송환 1603 에도 바쿠후 시대 개막 / 명, 베이징에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간행1603 영국에 스튜어트 왕조 성립1608 대동법 처음으로 실시 1611 성균관, 정인홍을 유적에서 삭제161016..
한국사&동양사&서양사 역사 연표(중종~임란) 한국 동양서양1506 중종반정(사대부 체제의 시작)1500 1510 3포왜란(일본과 통상 단절)15101512 명, 장거정의 개혁 시작 1514 원각사를 허물고 사찰의 재건을 금함 1513 명, 일조편법 실시 1517 『여씨향약』, 『소학』 번역 반포(유교 사회 드라이브) 1517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개시(종교개혁의 시작)1518 조광조, 현량과 건의 1519 기묘사화(조광조 사사) 1519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합스부르크 제국의 시작)1520 비변사 설치1520 1521 아스테카 제국 멸망 1526 바부르가 무굴 제국 수립1522 마젤란의 세계 일주 성공 1530 1533 잉카 제국 멸망 1534 헨리 8세가 이혼..
한국사&동양사&서양사 역사 연표(조선 건국~연산군) 한국 동양서양1392 조선왕조 성립1390 1394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 1396 정도전의 표전문 사건 1397 랴오둥 정벌 계획 추진 / 동대문 준공 1397 스칸디나비아에 칼마르 동맹 설립1398 이성계 퇴임으로 1차 왕자의 난 발발 / 정종 즉위 / 남대문 준공 1398 티무르가 인도 침략 1399 다시 개경으로 천도 1399 영국, 랭커스터 왕조 설립1400 2차 왕자의 난 / 태종 즉위1400 1401 태종, 신문고 설치 1401 일본 쇼군이 명나라로부터 일본왕 책봉 받음 1402 태종, 호패법 실시 1403 독일, 후스의 종교개혁1404 경복궁 준공 1405 한양으로 재천도 1405~1433 정화가 영락제의 명으로 남해 원정1405 명, 정..
한국사&동양사&서양사 역사 연표(고려시대) 한국 동양서양901 궁예, 태봉(후고구려) 건국900907 당의 절도사 주전충, 당을 멸망시키고 후량을 건국(5대10국 시대 시작) 910 910 교회 개혁의 중심인 클뤼니 수도원 창립 911 노르망디 공국의 성립912 신라 왕실, 김씨에서 박씨로 바뀜 918 한반도에 고려왕조 성립 916 몽골에 대거란국 세워짐 926 발해, 거란의 침략으로 멸망 927 견훤의 궁성 침략으로 신라 왕실, 박씨에서 김씨로 컴백 933 왕건, 후당에게서 작위 받음 936 왕건, 신라와 후백제를 접수하여 후삼국 통일 완성 936 거란, 국호를 요로 바꿈 / 중국, 후당에서 후진으로 교체 939 베트남, 중국의 속국으로 편입됨 945 고려, 왕규의 난 947 중국, 후진에서 후한으로 ..
한국사&동양사&서양사 역사 연표(남북국시대) 한국 동양서양676 신라의 한반도 통일670 689 신라 신문왕, 녹읍 폐지. 대구 천도 불발 687 피핀, 프랑크 왕국 장악698 대조영이 동만주까지 도망쳐와 발해 건국 690~705 당, 최초의 여제 측천무후 집권 700701 일본, 다이호 율령 성립(이 무렵부터 일본이라는 국호 사용) 712 당, 현종 즉위(개원의 치)711 이슬람 제국의 북아프리카 정복, 에스파냐 진출(에스파냐의 이슬람 시대 시작) 717 비잔티움 제국, 이슬람의 동쪽 공격 방어722 신라, 정전 지급 720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 편찬 726 발해 무왕의 동생 대문예, 당으로 망명 726 비잔티움 제국의 레오 3세가 성상 파괴령 반포732 발해 장문휴, 거란과 함께 당의 동북변 공..
한국사와 동양&서양사 역사 연표(삼국건국~신라통일) 한국 동양서양57 박혁거세, 신라 건국기원전50 58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 원정 시작(영국 역사의 출발점) 49 카이사르가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과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넘 46 카이사르가 자신의 이름을 딴 율리우스력 제정37 주몽, 고구려 건국 31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ㆍ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격파20 박혁거세, 왜인을 마한에 사신으로 보냄 27 아우구스투스가 사실상의 황제에 오르면서 로마 제정의 시작18 온조, 백제 건국 4 예수 그리스도 탄생 기원8 외척 왕망이 전한을 멸망시킨 후 신(新) 나라 건국 32 고구려 호동왕자 낙랑 공략 23 유씨 왕실이 왕망으로부터 나라를 되찾으면서 후한 시대 시작 42 금관가야 건국 48 김수..
한국사&동양사&서양사 역사 연표(선사~위만조선) 한국 동양서양30000~10000경 황해가 바다로 바뀜. 공주 석장리 유적기원전1000010500년경 일본, 최초의 토기 제작10000년경 신석기 혁명(농업혁명)의 시작 6000년경 타이, 벼농사 시작7000년경 최초의 도시 예리코 건설5000년경 서울 암사동 유적50004000년경 중앙아시아, 말을 기르기 시작 3500~2000년경 황허 문명, 인더스 문명 발생3500~2000년경 이집트 문명 발생, 최초의 문자 사용 30003000년경 타이, 청동기 사용3100년경 메네스의 이집트 통일 2570년경 이집트 쿠푸 왕이 대피라미드 건설2333 단군 조선의 건국 2350 ‘사계절의 왕’ 사르곤 1세가 수메르와 아카드 일대 통일 2000 2000년경 아리아인의..
종횡무진 한국사 목차 남경태 연표 선사 ~ 위만조선 삼국건국 ~ 신라통일 남북국 고려 조선 건국~연산군 중종~임란 발발 임란~정조 순조~조선 말기 대한제국~현대사 책 머리에 2009년 통속적인 역사책에 싫증을 느낀 독자에게 2014년 지은이의 향기가 나는 종횡무진 시리즈가 되기를 바라며 프롤로그: 한국사를 시작하며 1부 깨어나는 역사 제1장 신화에서 역사로 분명한 시작(단군) 누락된 시대(단군신화) 두 번째 지배집단(기자조선) 중국과의 접촉(위만조선) 지배인가, 전파인가(한4군) 제2장 왕조시대의 개막 마이너 역사 새 역사의 출발점(주몽, 온조, 박혁거세) 중국의 위기=고구려의 기회(삼한, 유리왕, 대무신왕, 낙랑공주) 고구려의 성장통(민중왕, 모본왕,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 물보다 흐린 피(고국천왕..
에필로그: 한국사의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진행중인 역사 1948년 남북한의 경쟁적인 단독 정부 수립으로 한반도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우선 이제부터는 하나가 아닌 둘의 역사다. 더욱이 이 현대사는 아직 진행중이므로 역사라기보다는 시사에 가깝다. 이 책을 이 시점에서 끝맺기로 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적어도 남한에 관한 한 1948년부터 지금까지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유사 이래 최대의 비극이라 할 소모적인 내전이 있었는가 하면, 이승만의 문민독재와 박정희의 군사독재를 겪었고, 그 뒤에도 다시 군사독재와 문민독재가 되풀이되는 간단치 않은 굴곡을 거쳐야 했다. 게다가 1997년부터 몰아친 경제 위기는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와 사회의 영역에서도 향후 넘어야 할 고비가 많음을 시사하고 있다. 주목..
두 개의 정부, 분단의 확정 더 나은 후보들이 즐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결격사유가 가장 크고 가장 권력욕에 찌든 이승만과 김일성이 각각 남한과 북한의 권력을 장악했다는 것은 한반도 전체로 볼 때 크나큰 불운이 아닐 수 없다. 그들보다 조금만 더 역사 의식을 갖추었거나, 조금만 더 권력욕이 덜한 인물들이 집권했다면 한반도의 분단은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승만과 김일성이 대권후보로 자리잡으면서부터 즉각 분단화 작업이 시작된다. 하기야, 혹시라도 한반도가 통일된다면 그들의 권력은 보장받을 수 없을 테니 그들로서는 필사적으로 분단을 바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때마침 민족적인 과제로 부상한 남북협상을 그들이 내심으로 환영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해방 이후 남한과 북한에 서로 다른 주둔..
분열로 날린 기회 미 군정청의 의도는 어떻든 간에 한국민의 손에 남한을 맡겨두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남한을 일본에 부역한 준전범국으로 보던 태도는 곧 사라졌으나 그런 미군의 기본 입장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아마 미군은 남한 정치 세력들의 수권 능력도 의문시했겠지만, 여기에는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함으로써 예상 외로 남한의 전략적 가치가 중요해진 것도 한몫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 군정청은 인공을 거부한 데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김구와 김규식(金奎植, 1881~1950) 등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오랜 망명과 항일의 경력에도 불구하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여운형의 인공과 김구의 임시정부는 둘 다 결격사유는 좀 있지만 어쨌든 식민지에서 독립한 한반도의 정권 담당자로서 큰 ..
4장 해방 그리고 분단 남의 손으로 맞은 해방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리라고 믿은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한반도가 식민지에서 해방되리라고 믿은 사람도 많지는 않았다. 일본이 세계 최강인 미국을 물리치기 어렵다는 것은 객관적인 전력상 명백했으나 40년이나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해방이 과연 가능하겠냐는 회의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 나가던 일본이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면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어도, 또 1945년 초에 미군이 유황도와 오키나와까지 진출해서 일본 열도의 직접 공략을 눈앞에 두었어도, 사람들은 일본이 무너진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비록 막바지에 달한 일본 제국주의의 시퍼런 서슬에 눌려 변변한 투쟁을 ..
모두가 침묵한 때 히틀러의 도발을 예견이라도 한 걸까? 이미 1938년에 일본 군부는 국민 총동원령을 내렸는데, 아마 2차 대전에 연루되는 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빠른 스타트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재빠르게 운신한 이면에는 사실 중대한 오판이 있었다. 중일전쟁을 시작할 때 일본은 속전속결로 중국을 정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일본이 예상한 대로 중국군은 홍군과 조선 유격대까지 가세했어도 일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대륙을 먹어들어갈수록 중국 정부가 아니라 중국 민중 전체를 상대로 하는 양상으로 바뀌면서 전쟁은 아무래도 장기화될 전망이 커졌다. 게다가 이미 장악한 중국의 동해안도 워낙 넓은 탓에 일본은 점령지를 수비할 병력조차 모자랄 정도였다. 자칫하..
3장 항전과 침묵과 암흑의 시기 홍군 속의 조선군 3ㆍ1운동이 임시정부와 조선공산당을 낳았듯이 중국의 5ㆍ4운동도 중국공산당이라는 새로운 항일운동의 지도부를 탄생시켰다. 다만 중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었고 지식인들이 사회주의의 본산인 소련과 접촉하기가 훨씬 용이했던 탓에 중국공산당은 한반도보다 5년 앞선 1920년에 소련의 지원을 받아서 성립되었다. 그러나 소련은 제국주의 열강의 하나였다가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탈바꿈했고, 중국은 대표적인 식민지ㆍ종속국으로서 반봉건(半封建) 사회였으니, 공산당이라는 이름이 같다고 성격까지 같을 수는 없다. 일단 소련의 권유에 따라 중국공산당은 우익의 국민당과 합작(1차 국공합작)을 이루고 반제국주의 항일투쟁을 전개했으나 곧 합작이 깨지면서 소련 측과도 멀어지게 된다. 그..
일본의 야망 1차 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것은 사실 커다란 역설이다. 비록 박쥐처럼 이중적인 존재이기는 하지만 일본은 ‘체질상’ 동맹국에 가까웠기 때문이다(그런 점은 원래 독일에 붙으려 했다가 달마치야 해안지대를 주겠다는 연합국 측의 막판 제의에 마음을 돌린 이탈리아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같은 색이었던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트너를 이루게 된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연합국의 주축은 시민혁명과 의회민주주의의 역사를 거친 ‘정상적인’ 제국주의 국가들인 데 반해 일본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처럼 시민사회의 토대가 취약하고 의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국가 주도형 후발 제국주의 국가였다. 게다가 일본은 군국주의적 색채마저 농후한 나라였으니, 종전 후 평화를..
세계적 모순의 집약지 한반도에서 동척의 활동과 토지조사사업이 한창이던 1910년대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은 한반도의 사정도 아니었고 식민지ㆍ종속국의 문제도 아니었다. 당시 유럽 세계는 물론이고 멀리 극동의 중국과 일본에게도 초미의 관심사는 1914년 6월 28일 발칸에서 한 발의 총성과 함께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선진 제국주의 열강(연합국)에게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후발 제국주의 열강(동맹국)이 도전한 이 전쟁은, 이미 전 세기 말부터 증폭돼 오던 삼국협상과 삼국동맹 간의 다툼이 빚어낸 사건이었다(『종횡무진 서양사』, 「열매 2」 4장 참조). 그렇다면 전쟁의 성격도 그렇고 전장도 유럽이었으니 한반도에는 별 영향이 없어야겠지만, 중국과 일본이 참전을 선언했기에 문제가 된다. 중국..
2장 식민지 길들이기 주식회사와 토지조사 그 이름으로 보나, 조약의 취지로 보나 한일합병이란 일본과 조선을 한 나라로 통합시킨 조약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금세 드러났다. 합병이라면 조선이 일본의 한 지방처럼 되었다는 뜻일 텐데, 일본 정부는 조선을 지방으로 대우하기보다는 착취하고 이용하는 데 열심이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조약의 제1조는 ‘한반도 전체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일본에게 양도한다’는 것이었으니 도저히 정상적인(?) 합병 조약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일본은 애초부터 한반도를 동반자가 아닌 소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래도 순종(純宗)은 사직을 보존했고 이완용은 권력과 부를 챙겼으니 합병에서 밑진 것은 없다. 그러나 합병을 환영한 그들..
진정한 치욕이란 이토가 죽으면서 공석이 된 통감 자리는 일본의 육군대신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穀)에게로 넘어갔다. 문관 출신인 이토의 후임으로 군 출신 인물이 부임했다는 것은 곧 조선의 식민지화가 임박했음을 말해주는 사실이다(러일전쟁 이후 일본 정부는 군부가 사실상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일본 제국주의는 본격적으로 군국주의 노선으로 전환하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1909년 가을에 대대적으로 전개된 ‘토벌작전’으로 한반도 내의 의병운동은 완전히 진압되었으므로 남은 절차는 합병 조약을 비준하는 것뿐이었다. 일본의 통감은 교체되었어도 일본의 조선 측 파트너는 죽지도 바뀌지도 않았다. 이제 총리대신이 되어 있는 이완용이 바로 그 영원한 파트너다. 1910년 8월 22일 데라우치와 이완용이 비밀..
때늦은 저항 조선의 왕위 교체가 무의미해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니까 순종이 즉위했다고 해서 하등 달라질 건 없다. 오히려 일본으로서는 나이든 고종(高宗)보다 젊은 순종(純宗)이 훨씬 다루기 쉽다. 고종은 40년간이나 재위하면서 조선 국왕으로서의 상징성이 굳어진 데다 러시아와의 친분도 두터울 뿐 아니라 드물긴 하지만 나름대로 실권을 행사한 경험도 있으니 아무래도 껄끄러운 데가 있지만, 순종은 조선 국민들에게 인지도도 비교적 약하고 외국과의 별다른 인맥도 없으니 과도기에 써먹기 딱 좋은 바지저고리다(게다가 그는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하마터면 일본 깡패들의 손에 죽을 뻔한 적도 있으니 기합이 잘 들어 있었을 터이다). 과연 순종이 즉위하면서부터 통감부의 프로그램은 한층 탄력을 받는다. 즉위한 지 불과 ..
1장 가해자와 피해자 식민지를 환영한 자들 어쩌면 러일전쟁의 승패와 상관없이 처음부터 일본의 조선 지배는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전쟁에 임하는 두 나라의 자세가 그렇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은 러시아를 불시에 기습하면서 그 이튿날로 인천을 통해 서울로 입성했다. 그리고 군대를 따라온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고종(高宗)에게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면서 일본을 도우라고 강요했다. 아직 선전포고를 하기도 전이었다. 그 반면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는 2월 12일에 공관 수비대와 함께 일찌감치 서울을 빠져나갔다.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실상 조선의 임자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전쟁 중에도 하야시는 조선의 외부대신(외무장관)인 이지용(李址鎔, 1870~?)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식민지 시대에도 사대부(士大夫)의 후예들은 친일파로 변신하거나 독립운동의 명망가로 거들먹거렸다. 가장 치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해야 할 시기에 한반도에서는 오히려 투쟁의 불꽃이 사그러들었고, 그 결과 일본이 패망한 뒤에도 한반도는 열강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남북한의 정권이 권력욕에 가득한 음모가들의 손아귀로 넘어간 것은 ‘혁명 없는 역사’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후보 단일화 고종(高宗)은 적어도 몇 년간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친러 수구파 정부로 복귀한 조선은 이후 한동안 별 탈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독립협회(獨立協會)를 무참히 짓밟았어도 큰 홍역을 겪은 만큼 나름대로 개화 정책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정부는 유럽 열강과 차례로 수교를 늘려가며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표류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친러 노선을 취하는 이상 조선 정부는 러시아와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러시아가 국제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러시아가 동아시아에서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지역은 만주와 한반도였다. 친러 정권이 부활함에 따라 조선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여긴 러시아는 때마침 1899년 산..
기묘한 제국 고종(高宗)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지내는 동안 조선의 정세는 미묘하게 돌아갔다. 일본은 물러났으나 조선에서 발을 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조정을 손에 넣은 친러파도 결코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사실 침략의 야욕이 아니더라도 그간 조선에 들인 정성을 생각한다면 일본은 조선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조선을 먹기 좋은 떡으로 만들기 위해 내정 개혁에 그토록 애쓴 것이나, 조선 민중의 거센 도전과 강호인 청나라마저 물리친 것을 생각하면 이제 와서 조선에서 손을 뗀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런데 난데없이 러시아라는 놈이 오더니 다 잡아놓은 닭을 털도 뽑지 않고 삼키려 한다. 일본으로서는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삼국간섭만 해도 그렇다. 프랑스와 독일은 들러리만 섰을 뿐, 실제 일본에 대한 국제..
어느 부부의 희비극 1895년 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를 받았다. 청나라는 시모노세키에서 또 하나의 불평등조약을 맺어야 했는데, 이번에는 서양 열강이 아니라 일본이 상대방이었다는 점에서 무척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조약의 내용은 서양 열강이 중국과 체결했던 각종 불평등 조약을 망라하여 모방한 것이었다.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랴오둥 반도와 대만 등을 빼앗았고 막대한 배상금도 받아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승인한다’는 내용이 제1항으로 채택되었다는 점이다(조선 내에서도 그 조항을 증명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모화관이 문을 닫은 것이었다). 물론 조선을 청나라로부터 독립시킨 일본의 의도는 이제부터 청나라 대신 일본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행..
도발된 전쟁과 강요된 개혁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시킨 1894년 5월 31일, 농민군에 못지 않게 이를 기뻐해 준 자들이 있었다. 바로 현해탄 건너편 메이지 정부의 지도부다. 같은 날 제국의회는 정부 불신임안을 제기했던 것이다(아무리 ‘제국’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어도 ‘의회’인 이상 정부와의 갈등은 있게 마련이다). 메이지 정부가 발족한 이래로 최대의 정치적 위기였으나 그 지속 기간은 극히 짧았다. 전주성 함락의 소식을 들은 민비 정권이 청나라에 진압 병력을 요청하자마자 톈진조약이 발효되었고, 이제 메이지 정부는 내부의 위기를 바깥으로 누출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수상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한양발 급전을 듣고 하늘이 도운 것이라며 기뻐했을 정도다(그는 바로 앞에 나온 요시..
내전의 국제화 애초부터 안 되는 싸움이었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조선 역사상 변방의 반란, 민란, 사대부(士大夫)의 반란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갑신정변(甲申政變)처럼 물리적 기반이 취약한 쿠데타 세력은 없었다. 게다가 조선의 사정은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두 메이저가 간섭하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내부 쿠데타가 어려운 조건이었다. 따라서 김옥균(金玉均)이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면 두 나라 중 하나는 반드시 잡아야 했으나, 불행히도 그는 일본에 의존하기보다는 주체적으로 개혁과 개화를 이루고자 했고 일본 측도 그가 일본을 활용 대상으로만 삼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당시의 조선은 내부 개혁을 꾀하는 일체의 시도 자체가 불가능해진 상태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실패로 조선에서 개..
사흘간의 백일몽 건수만 있으면 싸우는 게 원래 조선 사대부(士大夫)들의 빛나는 전통이다. 조선이 왕국이었던 초기 100년을 제외하면 조선의 사대부들은 늘 두 파로 나뉘어 서로 싸워왔다. 때로는 각기 다른 왕위계승권자를 끼고서 다뤘는가 하면, 제법 그럴듯해 보이는 이념 논쟁으로 갈라서기도 했고, 대외의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이냐를 두고 싸우기도 했다. 이는 단일한 권력자(국왕)가 아닌 집단적 권력체가 지배하는 체제의 생리 상 불가피한 것이었다. 따라서 국난에 처한 19세기 말에도 그 점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개화와 위정척사로 맞서던 형국이 이제 개화당과 사대당의 대립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애초에 개화를 주장하고 집권했던 민씨 정권이 노선을 선회하는 것은 이 시점에서다. 전선이 달라지자 민씨 일파는 느닷없이..
4장 되놈과 왜놈과 로스케 사이에서 개혁 없는 개화의 결론 타의에 의한 개화였지만 개화를 주장한 것은 민씨 정권이었으므로 개항 이후 민씨 가문의 조정 진출은 비약적으로 늘었다. 대원군의 축출을 주도했던 민비(閔妃)의 오빠 민승호(閔升鎬, 1830~74)를 비롯해서 민규호(閔奎鎬, 1836~78), 민겸호(閔謙鎬, 1838~82) 등 가문의 중핵들은 거의 대부분 개화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여기서 흥미로운 인물은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이다. 그는 민비(閔妃)의 조카로 일찍부터 가문의 촉망받는 젊은이였는데, 아버지 민태호(閔台鎬, 1834~84)가 골수 위정척사파였던 것과는 반대로 개화파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지위가 지위인 만큼 스물도 되기 전부터 그의 집 사랑방에는 홍영식(洪英植, 1855..
또 하나의 해법: 문 열기 똑같이 남의 손에 의해 강제로 개항을 당한 처지였지만 일본과 조선의 차이는 불과 20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컸다. 일본은 서양 열강의 압력으로 문호를 개항했으나 그 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이루면서 아시아 최초의 제국주의 국가로 도약했고, 조선은 그 일본에 의해 개항되면서 신흥 제국주의의 성장을 위한 발판으로 전락했다. 두 나라가 그렇듯 큰 차이를 보이게 된 이유는 뭘까? 단지 개항을 강요한 상대방이 달랐기 때문일까? 이를테면 일본은 선진 제국주의에 의해 개항된 탓에 도약을 이루었고 조선은 후발 제국주의에 의해 개항된 탓에 비참한 운명으로 전락한 걸까? 그렇지는 않다. 흔히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일본은 19세기 중반에 개항과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단기간에 비약적인 ..
잘못 꿴 첫 단추 대원군과 위정척사파의 밀월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서양 열강의 침략으로 국란을 맞았을 때는 이해관계가 같으니까 서로 의기투합할 수 있다. 그러나 애초부터 중앙집권적 왕국을 꿈꾸는 대원군과 사대부 체제의 좋았던 옛날에 향수를 품고 있는 조정 대신들이 언제까지나 찰떡궁합이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과연 위기가 그런 대로 가라앉고 나서 갈등은 즉각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먼저 시비를 건 쪽은 대원군이다.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끝나자마자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대원군으로서는 골수 성리학자들의 고리타분한 입장도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만 그보다도 전후 복구와 경복궁 재건축 등으로 돈 들 데가 많은 마당에 여전히 많은 토지를 지닌 데다 면세의 혜택까지 누리고 있는 서원들이 ..
격변기의 비중화세계 대원군 자신도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끝나고부터는 쇄국의 결심을 굳혔다. 그렇다면 조정의 분위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항로(李恒老, 1792~1868), 기정진(奇正鎭, 1798~1879) 등 원로대신들은 물론이고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유인석(柳麟錫, 1842~1915) 등 소장파와 유생들까지 일제히 존화양이(尊華洋夷, 중화를 숭상하고 서양 오랑캐를 배척한다는 정신)를 목청껏 외친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실학의 냄새마저도 없는 골수 성리학자들이었으니, 말하자면 실로 오랜만에 수구 대통합이 이루어진 셈이다(더욱이 그들은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사업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이제는 그런 갈등도 사라졌다). 중화세계라는 자신들의 ‘지구’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나선 이 ‘독..
한 가지 해법: 문 닫기 왕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 여러 가지 방책을 저울질하던 대원군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간 사건은 어찌 보면 우연한 ‘사고’에서 비롯되었다. 1865년 말 두만강 쪽에서 러시아가 통상을 요구해 온 게 그 계기다. 물론 조정의 분위기는 결사 반대인데, 그때 대원군의 측근 인물로 그리스도교도였던 남종삼(南鍾三, 1817~66)이 대원군에게 묘한 제안을 했다. 영국, 프랑스와 결탁해서 러시아의 진출을 막자는 것이다(아마 그는 선교사들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과 아시아 곳곳에서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저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 그 제안이 옳든 그르든 그는 조정의 개구리들 보다는 훨씬 시대의 흐름에 밝았다고 하겠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면 ..
3장 위기와 해법 다시 온 왕국의 꿈 대원군이 처음부터 어린 아들이 져야 할 국정의 부담을 대신 떠맡은 것은 아니다. 물론 그는 어린 아들을 위해(?)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었겠지만, 남의 이목이 많고 오늘의 그를 있게 해준 조대비가 시퍼렇게 살아 있다. 게다가 공식적으로는 엄연히 대비의 수렴청정이 진행되고 있는 시기가 아닌가? 비록 대비는 대원군에게 모든 사안에 대해 일일이 자문을 구했지만, 젊은 시절 눈칫밥이라면 원 없이 먹은 그는 아직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대원군이 조대비는 고맙고 미더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국태공(國太公)으로 임명하고 창덕궁 출입 전용문까지 만들어주면서 각별히 배려했으며, 국가의 최대 행사인 경복궁 중건 사업도 그에게 일임했다【186..
서학에는 동학으로 순조(純祖) 때부터 전통으로 자리잡은 ‘국왕 = 허수아비’의 등식이 있으니 고종(高宗)은 열한 살이 아니라 스물한 살이라 해도 아무런 실권을 가질 수 없다. 그럼 또 다시 풍양 조씨가 컴백한 걸까? 그런데 여기서부터 사정이 달라진다. 일단 캐스팅에 성공하면서 자신의 뜻을 이룬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으로 고종(高宗)의 치세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 번 가세가 몰락한 풍양 조씨는 대비의 소망과는 달리 세력을 회복하지 못한다(아무리 무도한 세도가문이라 해도 세도를 휘두를 만한 ‘인재’가 필요한 법이다). 그래서 권력은 자연히 그녀의 파트너인 이하응에게로 옮겨온다. 그가 바로 조선의 마지막 대원군이자 그 전까지의 대원군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실권을 지닌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다(그도 그럴..
총체적 난국 밖에서는 서양 열강의 군함과 상선들이 돌아다니고 안에서는 백성들의 조짐이 심상치 않다. 조선은 점점 총체적인 난국으로 빠져든다. 어찌 보면 정부가 무능하고 부패한 탓만도 아니다. 환곡의 폐단을 없앨 방법을 모색하고, 뇌물을 받는 지방관에게 가중처벌법을 적용하고, 방납(防納)【방납이란 조선 초부터 성행한 것으로서, 중앙 관청의 서리들이 지방에서 올라 오는 공물을 가지고 농간을 부려 이익을 사취하는 행위다. 그 절차를 보면, 지방에서 올라오는 공물을 갖가지 구실을 달아 퇴짜를 놓은 다음 공물 납부를 대행해주겠다면서 그 과정에서 떡고물을 받아 먹는 식이다. 물론 불법이지만 정부에서는 서리들에게 따로 급료를 주지 않았으므로 알고서도 묵인해주었으니 관례나 다름없었다(말하자면 ‘공인된 불법’인 셈인데,..
한양에 간 원범총각 피로 얼룩진 헌종(憲宗)의 치세는 물로도 얼룩졌다. 15년에 이르는 그의 재위 기간 중에서 9년이나 홍수 피해를 입었으니 그 점에서는 순조(純祖)의 치세에 못지 않다. 한 가지 더 닮은 꼴이 있다면 사실상의 통치자(세도가의 보스)가 수를 다하고 죽자 얼마 뒤에 왕도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사실이다. 김조순(金祖淳)이 죽고 순조가 뒤를 따랐듯이, 1840년에 조만영(趙萬永)이 죽자 헌종(憲宗)도 3년 뒤에 스물두 살의 나이로 죽었다. 순조(純祖) 부부의 운명은 기구하기도 하다. 일찍이 순조는 아들 익종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가 아들이 일찍 죽는 바람에 다시 재위하는 고초(?)를 치렀지만, 순조의 아내는 손자인 헌종(憲宗)에게 친정을 맡기면서 수렴청정을 거두었다가 헌종이 일찍 죽는 바람에 ..
2장 허수아비 왕들 무의미한 왕위계승 아무 할 일도 없는 자리지만 순조(純祖)는 그것조차 귀찮았던 모양이다. 1827년에 그는 아직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였음에도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열여덟 살의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난다. 이후 세자는 3년 동안 대리청정을 하는데, 물론 그에게도 역시 특별히 업무라 할 만한 일은 없다. 그는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에 죽었으나 그래도 두 가지 업적은 남겼다. 하나는 대리청정 기간 동안 사실상의 국왕이었으므로 죽은 뒤에 익종(翼宗, 1809~30)이라는 왕의 묘호를 받은 일이고, 다른 하나는 안동 김씨 대신 풍양 조씨 가문에서 아내를 취함으로써 이후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주인이 풍양 조씨로 바뀌게 만든 일이다. 어쨌든 당장 난처해진 것은 순조다. 일찌감..
불모의 땅에 핀 꽃 난세를 살았던 만큼 정약용의 사상은 혼란스러울 정도로 복잡다단하다. 우선 그는 무척 폭넓은 오지람을 자랑한다. 지금의 학문 분류로 말하면 그는 철학, 문학, 역사, 언어학 등 인문학은 물론이고 정치학, 행정학, 법학, 경제학 등 사회과학, 나아가 과학기술과 종교 분야까지 아우르는 백과사전적 지식인에 속한다. 사실 정약용이 실제 이상으로 과대포장된 데는 그렇듯 분야를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으로 활약한 덕택이 크다. 물론 처음부터 정약용(丁若鏞)이 박학다식과 팔방미인을 자랑했던 것은 아니다. 무릇 조선의 학자-관료라면 거의가 그렇듯이 그도 역시 관리로 재직하던 젊은 시기까지는 학문이라 해봤자 ‘과거용’ 유학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라면 거의가 다 그렇듯이 그도 역시 정쟁..
혼돈의 시작 개인적으로 보면 김조순(金祖淳)은 품성이 너그럽고 권력욕이 없을뿐더러 탕평책(蕩平策)의 지지자였던 탓에 정조(正祖)에게서도 두터운 신임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초대 보스가 되었다는 사실은 세도정치가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발명품이 아니라 수백 년간 진화해 온 사대부(士大夫) 체제의 피할 수 없는 결론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따라서 세도정치의 책임을 김조순에게 묻거나, 그의 가문이자 나중에 세도정치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안동 김씨 집안에게 전가할 수는 없겠다(무사안일주의적 성향 때문에 기생 출신의 첩실이 국정을 주무르는 것을 용인했으니 김조순(金祖淳)의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역사학자들은 흔히 세도정치의 기원을 정조(正祖) 초기에 집권했던 홍국영이라고 말하는..
1장 사대부 체제의 최종 결론 과거로의 회귀 정조(正祖)는 뚜렷한 병명이 없이 등과 머리에 종기가 돋는 일종의 열병을 앓다가 죽었다. 그런 탓에 한참 뒤까지도 그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대수롭지 않은 병인 데다가 발병한 지 20일도 채 못 되어서 죽은 과정이 아무래도 미심쩍기는 하다. 그러나 정황상으로 보면 독살의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범인은 노론 벽파밖에 없는데, 만년의 정조는 이미 개혁을 포기했으므로 그들과 갈등을 빚을 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독살설이 완전히 잦아들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그의 사후 곧바로 모든 체제가 예전 상태로 돌아갔기 때문일 터이다. 정조가 죽자 규장각(奎章閣)은 본래의 기능인 도서관으로 권한이 축..
11부 불모의 세기 사대부(士大夫) 체제의 완결판은 결국 황폐한 세도정치였다. 국왕은 완전한 허수아비가 되었고, 사대부들은 사리사욕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아들을 왕으로 앉힌 아버지가 시대착오적인 쇄국을 내세우는가 하면 며느리는 그런 시아버지를 내쫓고 외세를 마구잡이로 끌어들였다. 지배층의 이런 무책임과 무능은 급기야 나라마저 빼앗기는 결과를 빚고 만다. ▲ 영화 [자산어보]의 장면. 신유박해로 체포된 정씨 삼형제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미완성 교향곡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고 개혁 의지에 충만했던 정조(正祖)는 조선 역사상 보기 드문 출중한 군주였다. 비록 어린 시절 겪었던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이 그에게 내내 심적ㆍ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한 탓에 다소 불안정한 행마를 보이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 그가 설정한 왕국 건설의 목표는 옳았고, 그것을 위해 그가 추진한 여러 개혁도 대체로 올바른 것이었다. 그러나 꿈이 실현되려는 순간에 느닷없이 수구적인 자세로 돌아 버렸다는 점에서 그는 할아버지인 영조(英祖)와 닮은꼴이다. 조선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던 북학을 갑자기 거부하고,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기묘한 조치를 들고 나와 복고주의로 역행한 이유는 뭘까? 영조처럼 과속을 겁낸 탓일까? 개혁피로감일까? 아니면 그리스도교가 퍼지는게 그토록 두려웠을까..
정조의 딜레마 규장각(奎章閣)을 정치 개혁의 실무자로 삼고, 실학자들에게는 전반적인 사회 개혁에 필요한 이론과 이데올로기를 만들게 한다. 만약에 있을지 모르는 보수파의 반동에 대해서는 장용영(壯勇營)을 물리력으로 구축하고, 화성을 미연의 사태에 대비하는 대피처로 삼는다. 정조(正祖)의 이런 시나리오는 완벽했다. 그러나 시나리오가 좋다고 해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대박이 터지려면 좋은 시나리오에 감독의 능력과 의지가 보태져야만 한다. 개혁 드라마의 모든 일을 도맡은 정조는 기획, 제작, 시나리오 작업까지 완벽하게 진행했으나 마지막 감독의 단계에서 무너진다. 조선의 마지막 실험이 실패의 조짐을 보이는 것은 이때부터다. 공교롭게도 그 단초는 그리스도교가 제공했다. 이수광(李睟光)과 소현세자가 ..
반정의 예방조치 정조의 즉위가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를 죽인 노론은 정조가 세자로 책봉되자 그마저도 살해하려 했으며, 실제로 ‘작업’에 들어가기도 했다(물론 그들은 그가 즉위한 다음에 있을 정치 보복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때 정조를 구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은 홍국영(洪國榮, 1748~81)이라는 자였다. 이미 여러 차례 보았듯이 중요 사건이 있을 때마다 입장에 따라 분열하는 것은 조선 사대부(士大夫)들의 생리다. 장헌세자의 죽음을 두고도 노론은 두 세력으로 나뉘었다. 세자의 죽음을 당연한 것이라 여기는 매파는 벽파(僻派)를 이루었고 그 사건을 안타까이 여기는 비둘기파는 시파(時派)로 분류되었는데, 시파에는 옛 소론과 남인의 세력까지 가세했다. 소수였기에 ‘치우친 파’, 즉 벽파라고 불리..
3장 마지막 실험과 마지막 실패 도서관이 담당한 혁신 영조(英祖)가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탕평책(蕩平策)이 효과를 거두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또한 그가 출중한 재질과 뛰어난 학문, 강력한 카리스마 등 군주적 자질을 두루 지녔고 무척 오래 재위했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 모든 요소들이 왕권 강화와 조선의 왕국화에 나름대로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보다 훨씬 중요한 요소가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북아의 질서가 송두리째 변했다는 사실이다. 청나라가 대륙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곧 황제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물론 청나라에도 황제는 있다. 그것도 건륭제(乾隆帝, 1711~99)라는 뛰어난 황제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는 조선을 포함해서 역대 한반도 왕조들이 충심으로 사대했던 ..
사대부의 거부권 비록 현실 정치에 반영되지는 못했어도 조선에서 새로운 학풍이 만개할 무렵 때마침 중국에서도 주목할 만한 학문적 발전이 있었다. 그것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강희제의 시대에 시작된 백과사전 프로젝트가 오랜 작업 끝에 옹정제(雍正帝, 1678~1735) 대에 이르러 완성된 것이었다. 1725년에 간행된 백과사전은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이라는 거창한 제목답게 현재까지 나온 모든 문헌들을 총망라해서 무려 1만 권의 책으로 엮은 엄청난 규모다【비슷한 시기에 서양에서도 방대한 백과사전이 편찬된 것을 보면 가히 세계적으로도 백과사전의 시대였던 모양이다. 1751년 프랑스에서는 계몽사상가들이 모여 인류의 모든 학문을 백과사전으로 담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주도하고 볼..
경계를 넘지 못한 실학 실학이라는 용어는 18세기에 새로 등장한 학풍을 가리키지만, 원래는 19세기말과 20세기 초 일제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던 무렵에 민족 주체성을 고취하기 위해 학자들이 만들어낸 말이다(그러므로 당대에는 실학이라 부르지 않았다). 물론 실학이라는 용어는 예로부터 있었고 한반도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두루 쓰던 말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이를테면 고려시대에는 불교에 대해 유학을 가리켜 실학이라 했고, 조선 초에는 원시 유학, 즉 육경학이나 사장학(詞章學)에 대해 성리학을 실학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의미는 달라도 여러 용례에서 공통점은 찾을 수 있다. 즉 실학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기존의 학풍에 대해 새롭고 진보적인 학풍을 가리키는 용어였던 것이다. 호락논쟁(湖..
2장 한반도 르네상스 새로운 학풍 정치 행정이 정상화되고 제도가 정비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왕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건물의 골조가 튼튼해지고 외관이 다듬어졌다면 실내 인테리어도 그에 어울리도록 꾸며야 할 것이다. 당당한 왕국의 면모를 갖춘 새 조선에 어울리는 인테리어 작업이란 바로 학문, 지식, 예술 등의 문화 부문을 강화하는 일이다. 사실상의 재건국이라는 중요한 시기의 왕이라면 무엇보다 카리스마와 다재다능이 필요할 터이다. 이 두 가지 재질에서 영조(英祖)는 과연 시대적 요구에 정확히 부응하는 군주였다. 그는 권력과 권위로도 사대부를 확실히 제압했을 뿐 아니라 학문에서도 결코 여느 사대부(士大夫)에 뒤지지 않았다. 조선의 역대 어느 왕보다도 경연을 많이 실시했다는 게 그 점을 말해준다【경연의 기록은 후..
건국의 분위기 왕국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는 왕과 신민이다【서양식 왕국이라면 또 한 가지의 중요한 요소로서 영토를 들어야겠지만, 일찍부터 영토국가의 개념이 발달했던 동양식 왕국에서 영토란 나라가 존재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므로 굳이 왕국의 구성 요소에 포함시킬 필요가 없다. 문명의 발생기부터 동양에서는 지리적 중심이 튼튼했던 탓에 왕조 시대가 개막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영토국가가 발생했다. 그에 비해 서양에서는 왕과 신민의 역사는 오래지만 영토국가의 면모를 갖춘 왕국이 등장하는 것은 16세기 절대주의 시대의 일이다. 중세 유럽의 왕국들은 ‘선 개념’의 국가가 아니라 장원을 중심으로 하는 ‘점 개념’의 국가였다(서양사와 동양사를 비교해보면 확연히 알 수 이 지리적 차이는 서양 문명과 동양 문명의 성격..
왕국으로 가는 길 사대부(士大夫) 정치를 더 보편적인 개념으로 표현한다면 과두정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과두정치의 장점은 어느 누구도 권력을 독점하도록 놔두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역사적으로 그 대표적인 사례는 고대 로마의 원로원 정치다(흔히 이 시기 로마의 정치 체제를 공화정이라 부르지만 근대적 의미의 공화정과는 크게 다르므로 과두정치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원래 원로원이 생겨나기 이전에 로마는 에트루리아 왕의 전제적 지배를 받고 있었다. 기원전 6세기 말에 로마인들은 폭정을 일삼던 독재자 타르퀴니우스를 내쫓고 원로원을 성립시켜 최초의 고대 공화정을 이루었다. 여기에는 비슷한 시기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발달한 고대 민주주의 정치의 영향이 컸다(당시 이탈리아 남부는 마그나 그라이키아라..
1장 조선의 새로운 기운 되살아난 당쟁의 불씨 장희빈은 1701년 인현왕후가 죽은 뒤 곧바로 사약을 받았으나 그래도 그녀가 남긴 아들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복위된 뒤에도 인현왕후는 끝내 후사가 없었고 이듬해에 맞아들인 셋째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도 아이를 낳지 못한 탓에, 장희빈의 소생인 세자를 교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태생에 결격사유가 있는 세자의 왕위계승이 순조롭기는 어렵다. 마침 숙종(肅宗)에게는 적자는 없어도 서자는 또 있었다.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있었던 1694년 또 다른 후궁인 숙빈 최씨가 아들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을 낳은 것이다. 최씨 역시 원래 궁녀의 시중을 드는 무수리의 신분이었으니 연잉군도 신분상 하자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따라서 세자나 연잉군이나 서자에다 하자까..
10부 왕정복고 중국이 중화로 컴백할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일부 사대부(士大夫)들은 소중화(小中華)의 정신병을 버리고 실학의 학풍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더 중요한 변화는 조선의 국왕이 비로소 왕정의 의미와 필요성을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탕평책으로 당쟁을 잡았다 싶은 순간 영조는 개혁의 고삐를 늦췄고, 왕당파와 친위대를 육성함으로써 왕권을 다잡았다 싶은 순간 정조는 복고로 돌아섰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왕국의 조짐 숙종(肅宗)의 치세는 당쟁의 정점이라 할 만큼 사대부(士大夫)들의 극심한 정쟁로 조정이 얼룩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남긴 후유증이 완전히 극복된 시기이기도 했다. 광해군(光海君) 때부터 시작된 양전사업이 완성을 본 것도, 대동법(大同法)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것도, 5군영이 최종적으로 완비된 것도 모두 이 시기의 일이다. 상평통보가 유통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사회경제적 배경이 숙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압록강변의 무창(茂昌)과 자성(慈城)에 2진을 설치하고 청나라와 국경을 명확히 설정했으며, 일본에 오랜만에 통신사를 보내 교역을 재개했고, 어부 안용복(安龍福)의 노력으로 울릉도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안용복은 일본의 바쿠후 정권으..
당쟁의 정점 비록 용두사미였으나 그래도 북벌 준비로 바빴던 효종(孝宗)에 비해 현종(顯宗)은 그저 15년 동안 왕으로 무위도식하면서 지내다가 죽었다. 조선의 왕명록에 18대 왕으로 이름을 등재한 게 그의 가장 큰 업적이랄까? 그래도 그의 치세에 관해 사대부들은 할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치세 말기에 예송논쟁으로 남인이 집권했기에 『현종실록』은 남인의 관점을 반영했으나, 이후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으로 개찬되는 등 곡절이 있었으니 말이다. 선조(宣祖)에 이어 두번째로 실록이 수정된 경우다. 그러나 이 전통은 다음 왕들에게도 이어져 『숙종실록』 다음에는 『숙종보궐실록(肅宗補闕實錄)』이, 『경종실록』 다음에는 『경종수정실록(景宗修正實錄)』이 새로 편찬된다. 이 시기 당쟁이 얼마나 치..
6장 조선판 중화세계 세계화 시대의 중화란?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이 이제 조선만이 지구상에 홀로 남은 문명 국가라는 허구적 위기감과 허황한 자부심을 키우며 안으로 웅크러들고 있을 무렵, 공교롭게도 지구상의 수많은 지역들은 오히려 속속들이 개방되고 있었다. 바야흐로 유럽 문명이 세계 각지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후대의 동양 역사가들은 이 과정을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극동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고, 인류 문명사 전체로 보면 그 과정은 서로 독립적으로 발생하고 발전해 온 지구상의 모든 문명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거대한 ‘세계화’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그 세계화의 완성은 20세기에 이루어진다). 세계 진출에 나선 유럽인들의 전략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토착 문명권의..
소중화의 시작 효종(孝宗)의 죽음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물론 북벌은 어차피 실행에 옮기지도 못할 허망한 꿈이었으니 북벌이 중단된 문제는 아니다. 또 그의 아들 현종(顯宗, 1641~74, 재위 1659~74)이 순조롭게 왕위를 이었으니 왕위계승 문제도 아니다. 새로 등장한 논란거리는 바로 장례 예절에 관한 문제다. 왕이 죽었으니 모두들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하지만 얼마나 입을 것인가, 즉 복상(服喪) 기간을 얼마로 정할 것인가는 문제가 된다. 알다시피 효종은 형인 소현세자가 죽음으로써 둘째 아들로서 왕위에 올랐다. 집안의 혈통으로 보면 둘째지만 나라의 혈통으로 보면 국왕이니까 맏이에 해당하는 자격으로 볼 수도 있다. 그게 왜 중요할까? 우선 그의 계모인 자의..
허망한 북벌론 집권 사대부(士大夫)들이 온통 오랑캐에 대해 절치부심하고 있을 무렵, 그들과는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는 오히려 오랑캐 나라의 심장부에 머물면서 오랑캐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 오랑캐를 통해 멀리 서양의 문물까지 열심히 익히려 한 인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사대부 신분이 아니었기에 고리타분한 성리학적 세계관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쯤이면 그가 누군지는 명확해진다. 바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끝난 뒤 청나라의 선양(瀋陽)【랴오둥 한복판에 자리잡은 선양은 누르하치 시대에 청나라의 수도였다. 청나라가 대륙을 정복하면서 수도는 베이징으로 옮겼으나 그 뒤에도 동북 지역의 주도로 기능했으며, 현재도 랴오닝성의 성도(省都)다. 선양을 우리식으로 읽으면..
5장 복고의 열풍 시대착오의 정신병 불과 두 달 동안의 전쟁이었지만 병자호란(丙子胡亂)은 7년 동안 벌어진 임진왜란에 비해 결코 피해가 적지 않았다. 전란으로 인한 파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다지 큰 피해는 없었다. 청군은 온갖 약탈과 방화, 강간을 저질렀지만 기간이 길지 않았으므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일본군이 저지른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임진왜란으로 이미 주요 궁궐들이 소실되어 있었으니까 더 이상 불타 없어질 건물도 별로 없었다. 따라서 이번 전란의 피해는 물질적인 것보다 사회적인 데 있다. 우선 청군에 의해 붙잡혀간 사람이 무려 50만에 달한다는 게 커다란 사회문제다. 전쟁포로가 그렇게나 많았을까? 물론 그건 아니다. 청나라는 조선을 마음대로 유린하면서 돈이 있거나 신분이 높은 ..
중화세계의 막내 홍타이지는 조선이 적대관계로 돌아서지 않는 한 조선을 침략할 의도는 없었다. 원래 역사적으로도 북방의 비중화세계는 중화세계의 본진인 중원을 정복 대상으로 삼았을 뿐 한반도를 타깃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후금의 조상인 금나라 시절에도 그들은 고려가 사금(事金, 금나라에 사대함)의 자세로 돌아서자 곧바로 말머리를 돌려 중원으로 쳐들어가지 않았던가? 한반도를 공격한 것은 오히려 중화세계였지 비중화세계가 아니었다(고대에 한족 왕조인 수와 당이 고구려를 침략한 게 그것이다). 고려시대에 거란과 몽골의 공격을 받은 이유는 고려가 이상하리만큼 중화세계에 강한 소속감을 보이면서 그들을 적대시했기 때문이다(왕건의 「훈요 10조」가 그런 예다). 따라서 그때도 고려가 최소한 중립적인 입장이라도 취했다면 전란..
수구의 대가 역사의 시계추를 되돌리고 왕국을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복원시켰다는 점에서 인조반정(仁祖反正)은 100여 년 전의 중종반정(中宗反正)과 같은 이름으로 불릴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수많은 공신들이 책봉되는 것은 당연할 터이다. 왕당파를 주도한 대북파의 보스들인 이이첨과 정인홍 등은 처형되었고, 반정을 주도한 소장파 서인들을 비롯해서 50여 명이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새 정권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부터 삐걱거린다. 사실상 반란의 물리력을 담당하고서도 2등 공신으로 책봉된 데다 중앙 관직이 아닌 평안도로 배속된 이괄은 불만이 가득하다. 굳이 말하자면 새 정권의 의도는 북방의 정세가 워낙 화급한지라 국경 수비를 강화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괄로서..
곡예의 끝 만주쪽에서 보기에는 중원보다 더 가까운 게 한반도이며, 중국보다 더 약한 게 조선이다. 누르하치는 물론 조선을 타깃으로 삼고 있지는 않지만, 중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조선이 걸림돌이라고 판단되면 언제든 공격해 올 것이다. 일단 광해군은 대포를 새로 만들게 하고 북도의 군 지휘관들을 교체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하지만 새 지휘관들이 새 대포를 사용하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게 그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한편으로 국방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북아의 새로운 정세를 맞아 외교에 주력한다. 그에게는 일찍이 조선의 어느 임금도 해본 적이 없고 할 필요도 없었던 국제 외교라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다. 알다시피 열강 사이에서 약소국이 벌이는 외교란 줄타기처럼 섬세하고 ..
남풍 뒤의 북풍 국왕의 승리일까? 그럼 조선은 왕국으로 되돌아간 걸까? 아직 확실치 않으나 광해군(光海君)은 그렇다고 믿었다. 벌써 100년을 지배해 온 사대부 세력이 그렇듯 쉽게 권력을 내놓을 리는 없지만, 사태를 낙관한 그는 이제야 비로소 국왕 본연의 임무를 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사실 그는 왕권을 다지는 중에도 전란으로 얼룩진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건축을 서두른 게 상징적인 재건이라면, 즉위하자마자 시행한 대동법(大同法)은 실질적인 국가 재건 사업에 해당한다. 전란으로 국토가 초토화되었으니 가장 시급한 게 토지와 조세제도다. 남아 있는 토지라도 추슬러 놓아야 농업 생산이 이루어질 뿐 아니라 무엇보다 전후 복구를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한데 그 재..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사대부에 도전한 국왕 정철(鄭澈)이 이루지 못한 ‘건저(建儲)의 꿈’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마자 실현되었다. 북쪽으로 도망치던 선조(宣祖)는 평양에 이르렀을 때 황급히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것이다. 자칫 잘못하다가 왕실 사직이 끊어지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해결했어도 죽어 조상들을 뵐 수 없으리라는 판단이었을 게다. 광해군(光海君)에게는 친형 임해군이 있었지만, 그는 성질이 포악해서 세자 책봉을 받지 못했다(물론 사대부들의 구미에 맞는 후보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난리 덕분에 세자가 된 광해군은 공교롭게도 그 난리가 끝나면서 세자 자리를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1600년에 의인왕후가 죽은 게 그에게는 큰 불운이다. 어차피 마흔이 넘은 그녀가 아이를 낳을 가능..
낯부끄러운 공신들 현대 사회라면 난리를 겪고도 정권이 바뀌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사태에 대한 책임이 있든 없든 임진왜란(壬辰倭亂) 정도의 재앙이 있었다면 권력자만이 아니라 권력의 구조도 바뀌어야 하는 게 정상이다. 왕조시대라 해도 충분히 그럴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성리학적 세계관에서도 민심은 곧 천심이라 했으니 그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면 온 백성을 도탄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은 조선의 지배층은 깨끗이 반성하고 말끔히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조선의 지배층에게는 변명할 근거가 충분하다. 그것은 바로 조선의 권력 구조가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책임을 묻는다면 당연히 임금과 사대부(士大夫)들이 져야 한다. 그러나 임금인 선조(宣祖)는 전쟁이 터지고 한 달도 못 되어 버선발로 도망쳤으면서도..
협상과 참상 두 나라가 서로 영토 다툼을 벌인 것도 아니고, 한쪽은 엄연히 침략자요 다른 쪽은 분명한 피해자다. 그런데도 휴전 협상이라니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일단 조선은 약자로서 굴욕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묘한 것은 휴전 협상 테이블의 좌석 배치다. 정작 전란의 피해를 입었으면서도 협상 테이블에 조선 대표의 자리는 없다. 전통적으로 조선은 외교권과 군사권을 중국에 일임했던 탓이다. 그래서 협상의 양 주체는 일본의 도요토미와 명나라의 심유경으로 정해졌는데, 여기서 또 다시 묘한 일이 벌어진다. 도요토미가 제시한 강화의 조건이 워낙 터무니없는 것이다. 모두 일곱 개 조항 중에서 감합(勘合) 무역(오늘날의 무역 쿼터제에 해당한다)을 재개하라는 요구는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명나라의 황..
영웅의 등장 임진왜란(壬辰倭亂)은 흔히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명나라를 칠 테니 문을 열라는 구실을 내세워 조선을 침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 정복이 단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구실’이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도요토미는 대륙을 공격할 의도를 품고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멀리 인도까지 침략할 구상을 품고 있었다(물론 그는 실패했지만 그의 구상은 20세기에 현실화된다. 이렇게 보면 일본의 대륙 침략은 이미 일본 열도가 통일되는 시기부터 예고되어 있었던 셈이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폐쇄적이었던 중화세계와는 달리 일본은 이미 일찍부터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교역을 하고 있었으며(중국과 조선은 조공을 통하지 않은 사무역을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15세기 중반에는 포르투갈 상인들과 ..
3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남풍) 정세 인식의 차이 정철(鄭澈)은 한직을 떠돌던 시기에 소일거리 삼아 노래들을 지었지만, 아예 그걸 업으로 삼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런 노래들이니까. 정여립의 사건을 계기로 화려하게 중앙 관직에 컴백했어도 정철은 평안한 만년을 즐길 팔자가 아니다. 그 공로로 그는 우의정에서 좌의정으로 한 계급 특진했으나 얼마 안 가 동인의 역공을 받아 침몰하고 만다. 세자 책봉이 연관되어 있기에 건저(建儲, ‘儲’란 세자를 뜻한다) 문제라고 불리는 이 사건 역시 전형적인 말만의 음모다. 선조(宣祖)는 아들이 많으나 불행히도 ‘꼭 필요한 아들’이 없었다. 후궁에게서 낳은 아들은 많지만 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와의 사이에서는 아들은커녕 ..
당쟁의 사상적 뿌리 심의겸과 김효원의 인물됨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치졸한 당쟁을 시작했다고 해서 그들이 치졸한 인물이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심의겸은 내내 검소하게 생활했고, 특별히 권세를 부리지도 않았으며, 공명정대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고자 했다. 또한 김효원 역시 나중에는 당쟁의 발생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느끼고 스스로 자중하여 지방관으로 일하다 죽었다. 따라서 당쟁의 책임을 그들 개인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당쟁은 왜 일어났을까? 그것은 사실 조선이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접어든 데 따르는 필연적인 현상이다(같은 시기 명나라에서도 역시 사대부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당쟁이 격화되었다는 사실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중종(中宗) 대에 이르러 국왕은 실권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했..
사대부들의 집안 싸움 국왕마저 선택할 만큼 권력을 확고히 장악했고, 숙적인 훈구파와 외척도 사라진 데다가, 이념도 성리학으로 완전 통일되었다. 그렇다면 사대부(士大夫)들 간의 권력다툼은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이제부터 사이좋게 권력을 분담하고 조선을 지배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실제의 역사는 전혀 그렇지 않다. 다툴 이유가 모두 사라졌는데도 사대부들은 오히려 전보다 더욱 큰 규모로, 더욱 심하게 다투기 시작한다. 외부의 적이 없어졌는데도 그들은 자기들끼리 파당을 만들어 싸운다. 이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당쟁이고, 세련된 용어로 포장하면 붕당정치(朋黨政治)다. 차라리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무장 조직을 동원해서 내전을 벌이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니다. 차라리 ..
동북아 질서의 근본 구조 영원히 지속될 줄 알았던 윤원형의 권세는 1565년 문정왕후가 죽으면서 끝난다. 조카 명종(明宗)은 외삼촌이 섭섭하다 할 만큼 곧바로 그의 관직을 삭탈하고 유배령을 내렸으며, 정치적 생명을 끝낸 윤원형은 얼마 안 가 유배지에서 생물학적인 생명도 끝냈다. 두 양아치가 죽자 그제서야 명종은 인재를 모으고 어지러운 정국을 수습해 보려 애썼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제 와서 새삼 조선을 왕국으로 복원한다는 것도 불가능했지만, 그보다도 2년 뒤인 1567년에 서른셋의 한창 나이로 병에 걸려 파란만장한 삶을 마친 것이다. 권신들도 죽고 왕도 죽으면서 오랜만에 사림파는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 우선 그들이 할 일은 당연히 세자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는 것이지만,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는 이미 ..
윗물이 흐리면 양재역에 대자보를 붙인 인물이 지적한 대로 차라리 조선이 곧 망했다면 우리 역사 전체로 볼 때 더 좋았을 것이다. 어떤 왕조, 어떤 체제라 해도 그 무렵의 조선보다는 나았을 테니까. 사실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바뀐 조선에서 만약 반란이 일어나 당시 세계적 추세에도 어울리는(그 무렵 서유럽 각국에서는 절대왕정이 탄생되고 있었다) 강력한 왕권의 왕국이 들어섰다면, 한반도는 사회 진화의 정상적 궤도로 복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최소한 얼마 뒤에 벌어지게 될 임진왜란(壬辰倭亂)에서 그토록 무력하게 대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자보의 필자가 전망한 것과는 달리 조선은 중앙정치가 높아가는 가운데서도 망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한다. 그렇게 생명이 질긴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
2장 병든 조선 양아치 세상 고려의 묘청(妙淸)과 신돈(辛旽), 조선의 조광조(趙光祖) -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실패한 개혁가라는 사실이다. 세 사람 모두 처음에는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 국왕에게 중용되었으나 지나치게 개혁을 서둘다가 결국 국왕의 신임을 잃으면서 수구 반대파의 역공에 휘말려 죽음으로 급행료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같은 실패라 해도 고려와 조선의 경우는 서로 다르다. 조광조는 묘청이나 신돈처럼 군사 행동을 일으키거나 실제로 역모를 꾀한 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당했으니 말하자면 가장 억울한 케이스다. 영리하고 유능한(?) 음모가만 있으면 ‘말만의 역모’로 반대파의 수많은 인물들을 떼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을 정도로 조선의 병은 깊어졌다. 이런 사건을 사화(士禍)라고 부르니까 뭔가 그..
비중화세계의 도약 사실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은 시대적 당위성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그가 꿈꾼 성리학 이념의 사대부(士大夫) 국가가 최선의 선택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라도 조선은 근본적으로 개혁되어야 했다. 그 이유는 바로 바깥에 있다. 이 세상에 조선이라는 나라 하나만 존재한다면 개혁의 범위와 스피드가 전혀 중요하지 않겠으나, 한반도를 둘러싼 바깥 세상이 크게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만이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혹시 조광조(趙光祖)는 그러한 시대적 조류를 인식한 탓에 개혁에서 조급증을 보인 게 아니었을까? 우선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서는 종교개혁의 바람이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조선이 건국 준비에 여념이 없던 14세기 말부터 유럽 사회는 후대에 ..
시대를 앞서간 대가 현량과(賢良科)를 관철시킨 것만 해도 괜찮았다. 비록 반발은 컸으나 기본 취지가 좋은 데다 전 사회가 개혁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어 반대의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못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간의 성과에 지나치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 탓일까? 조광조(趙光祖)는 내친 김에 코너에 몰린훈구파에게 치명타를 가했는데, 결국 그 펀치는 자신에게 돌아오고 만다. 현량과를 통해 자파 인물들을 많이 등용한 데 자신감을 가진 조광조는 1519년 10월 드디어 정국 공신들에 대한 숙청 작업에 나섰다. 아마 그 자신도 개혁의 롱런과 완성을 위해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고비라 여겼겠지만, 최종 타깃이 된 공신 세력의 입장은 그보다 훨씬 비장할 수밖에 없다. 개혁 세력은 칼자루를 쥐었고 수구 세력은 칼날을 움켜..
꿈과 현실 사이 연산군(燕山君)이 일으킨 무오사화(戊午士禍)는 훈구파의 사주를 받아 사림파를 박살낸 사건이었으나, 대형 사건들이 으레 그렇듯이 예상하지 않았던 엉뚱한 결과도 낳았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사림파의 새로운 리더를 길러낸 것이다. 열일곱 살 때 지방의 관리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평안도 희천으로 간 소년 조광조(趙光祖)는 거기서 뜻하지 않은 기연을 맺게 된다. 때마침 희천에는 무오사화로 유배된 김굉필(金宏弼)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김굉필은 그 이듬해에 순천으로 유배지를 옮겼으나 1년 동안 조광조(趙光祖)가 그에게서 배운 것은 적지 않았다. 학문과 경륜만이 아니라 장차 미래의 조선을 이끌게 될 사림파의 학맥을 얻었으니까. 친구들에게서 ‘광인(狂人)’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학문에 전념했던 조..
1장 개혁과 수구의 공방전 개혁의 조건 ‘반정(反正)’이라는 이름의 쿠데타로 즉위한 왕답게 중종의 치세는 대대적인 개혁의 바람으로 시작된다. 태종과 세조가 그랬듯이 원래 정변으로 즉위한 왕은 개혁의 기치를 높이 치켜세우게 마련이다. 그러나 중종의 경우는 좀 다르다. 국왕의 ‘임명권자’가 사대부(士大夫)였던 만큼 중종이 개혁의 주체는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종의 옥새가 찍힌 각종 개혁 조치는 실상 사대부가 입안하고 시행한 것이었다(게다가 중종은 형과는 달리 성품이 유약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니 사대부의 입맛에 꼭 맞는 군주다). 연산군(燕山君)의 전제 왕정을 타도한 사대부가 꿈꾸는 조선은 국왕이 상징적 존재로 군림하면서 사대부가 국정의 모든 부문을 관장하는 나라다. 그럴듯한 용어로 윤색하자면 사대부(..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조선은 마침내 왕국에서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바뀌었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사대부들은 권좌에 오르자마자 자기들끼리 편을 갈라 새로운 권력다툼을 벌인다. 그들이 진흙탕 싸움에 몰두해 있는 동안 비중화세계는 거대한 도약을 시작한다. 일본과 여진이 차례로 중화세계에 도전함으로써 마침내 중화의 본산인 명나라가 멸망한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들은 희한하게도 그것을 중화의 중심이 조선으로 옮겨온 거라고 판단한다.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사대부의 승리 어쨌든간에 국왕의 총체적 공격을 받은 사대부(士大夫)는 일단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덕분에 훈구와 사림의 수뇌부가 몰락한 것은 오히려 사대부 세력이 전열을 새로 정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한바탕 회오리가 몰아친 뒤 2년이 지난 1506년 연산군(燕山君)에게 미움을 받아 이조참판과 경기도 관찰사에서 좌천된 성희안(成希顔, 1461~1513)과 박원종(朴元宗, 1467~1510)은 사대부의 기득권층이 물갈이된 틈을 타서 새로운 리더가 되고자 한다. 마침 성희안은 문신이고 박원종은 무신이니 역할 분담도 좋다. 이들은 화를 면한 조정의 대신들과 지방의 유배자들을 움직여 세를 불리고 무사들마저 끌어모아 정권 타도 계획을 구체화한다(연산군은 유배자들이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걱정에서 그..
연속되는 사화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연산군(燕山君)의 가슴 속에 품은 폭탄을 터뜨린 게 아니라 뇌관만 겨우 건드렸을 뿐이다. 그에게는 아직 풀지 못한 한이 있다. 그것은 바로 비명에 죽어간 그의 생모와 관련된 한이다. 포악하고 무도한 이상성격에다 출생의 비밀이 어우러졌다. 전형적인 3류 드라마의 주제다. 불행히도 그 드라마가 연극 무대가 아닌 현실의 무대에서 상연되면서 조선은 3류 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무오사화를 통해 사대부(士大夫)들은 중요한 신무기를 얻었다. 모함만으로도 반대파를 숙청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구체적인 역모의 증거 같은 것도 필요없고 그저 세 치 혀만 잘 놀리면 된다. 그런 다음에는, 성질은 더러워도 멍청하기 그지없는 꼭두각시 연산군이 다 알아서 처리해줄 것이다. 그..
3장 군주 길들이기 폭탄을 품은 왕 당연한 말이지만 원래 강한 왕권은 강한 왕의 것이다. 그런데 대개 강한 왕이란 새 왕조를 세우거나 정변으로 집권한 왕인 경우가 많다. 건국자나 성공한 쿠데타의 리더는 그 인물됨과 상관없이 강력한 카리스마를 공인받을 수 있으며, 이는 자연히 강력한 왕권으로 이어진다. 지금까지 본 조선 초기의 역사에서는 태종과 세조가 그런 임금이었다. 그 뒤를 이은 세종과 성종은 사실 전 왕들이 다져놓은 강력한 왕권 덕분에 왕권과 신권, 즉 국왕과 사대부(士大夫)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안정과 번영의 치세를 누릴 수 있었다. 이렇듯 왕권이 강하면 사대부는 자연히 국왕에게 협조하면서 관료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왕권이라도 몇 대에 걸쳐 약발이 지속되기는 어렵다...
사대부의 분화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변증법의 법칙만이 아니다. 사대부(士大夫) 세력도 점점 수가 늘면서 더 이상 동질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더욱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리고 정변이 일어날 때마다 공신들이 대거 인플레되는 탓에 이제 번듯한 사대부라면 누구나 공신 한 명쯤은 조상으로 두고 있을 정도다(공신의 부와 지위는 세습이 허용된다는 점을 상기하라), 특히 예종(睿宗)에 이어 성종에게도 딸을 시집 보내 2대 연속해서 임금의 장인이 된 한명회(韓明澮)의 기세는 자못 하늘을 찌를 듯하다【예종의 비는 장순왕후이고 성종의 비는 공혜왕후인데, 둘 다 한명회(韓明澮)의 딸이다. 그런데 예종과 성종은 삼촌-조카 사이니까 성종은 숙모의 동생을 아내로 맞아들인 격이다. 더구나 두 여자는 모두 후궁..
세종의 닮은꼴 예종(睿宗)은 남이의 기묘한 반란을 진압한 것을 거의 유일한 치적으로 남기고 재위 1년을 겨우 넘긴 1469년 11월에 병으로 죽었다. 그토록 강력했던 아버지 시절의 왕권을 크게 약화시킨 게 또 다른 ‘치적’이라 할까? 어차피 그가 살아 있을 때도 실제 국정은 어머니가 맡았으니 후계자를 정하는 문제도 그녀의 몫이다. 예종의 아들이 너무 어려 즉위할 수 없다고 본 정희왕후는 예종의 형인 덕종의 열세 살짜리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데, 모두 자신의 아들이고 손자이니 그녀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예종의 조카가 왕위를 이은 셈인데, 아직도 부자 승계의 원칙이 확고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이렇게 해서 조선의 9대 왕인 성종(成宗, 1457~94, 재위 1469~94)이 즉위했다. 스무 살이..
2장 진화하는 사대부 특이한 ‘반란’ 아무리 3차 건국자로서 강력한 왕권을 누렸다지만 세조에게는 단종(端宗)의 폐위와 살해, 금성대군을 위시한 형제들 간의 분쟁, 소장파 사대부(士大夫)들의 거센 도전 등 일련의 사건들이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었다. 그가 소수의 측근들만 믿고 중용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덕분에 한명회(韓明澮)를 비롯해서 정인지, 권남, 신숙주, 정창손 등 일찍이 수양대군 시절부터 세조를 따랐던 3차 건국의 공신들은 막강한 정치적 권세와 막대한 경제적 부를 누렸다【특히 한명회는 세조의 심복을 넘어 수족과 같은 사랑을 받았다. 심지어 세조는 그를 나의 장량 이라고 부르면서 끔찍이 아꼈는데, 세조 역시 자신이 조선의 새 건국자임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정도전이 조선의 장량이라고 자칭한 것을..
3차 건국 성삼문은 아마 세조에 대해서보다 그 측근들에 대해 더 큰 분노를 품었던 듯하다. 김질에게도 그는 한명회(韓明澮) 같은 무리를 처단해야 하며 신숙주는 오랜 친구지만 죽어 마땅하다고 토로한 바 있다. 그가 그렇듯 분노한 이유는 명백하다. 불사이군(不事二君), 세조 앞에서도 당당히 밝혔듯이 신하의 몸으로 두 임금을 섬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임금을 기꺼이 섬기는 한명회나 신숙주가 오히려 세조보다 더 미웠을 것이다. 물론 그의 충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의문점이 남는다. 어쨌거나 세조는 현직 왕이므로 그의 거사는 반역이요 쿠데타다. 그렇다면 단종(端宗) 복위라는 그의 대의명분은 과연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 걸까? 사실 조선 건국 이후 세조까지 일곱 임금 가운데 정상적으로, 즉 맏..
사육신의 허와 실 단종(端宗)이 즉위하면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알력이 노골화되자 조정 대신들도 앞다투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어느 줄이 더 길까? 말할 것도 없이 안평의 줄이다. 황보인과 김종서 같은 원로들만이 아니라 집현전 출신의 젊은 학자-관료【여기서 ‘학자-관료’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조선의 경우 학자와 관료의 구분이 없거나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유학의 본성 자체가 국가 경영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인 데다가 조선은 처음부터 유교왕국을 표방하고 나섰으므로 학자와 관료는 이념적으로나 신분적으로 거의 일치한다. 물론 관직에 진출하지 않은 학자들도 있었고, 또 거꾸로 학문적 소양이 깊지 못해 학자라고 불릴 자격에 미달하는 관료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소수였고 정치 엘리트가 되지 못했기에 큰 의미가 없다. ..
1장 왕권의 승리 3차 왕자의 난 세종의 기대와는 달리 ‘조선의 영락제(永樂帝)’는 그의 아버지 태종이 아니라 아들인 수양대군이었다. 태종은 그래도 왕위를 놓고 형제들 간에 다툼을 벌인 것이지만, 수양대군은 바로 50년 전 명나라 영락제가 그랬듯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조카를 죽인 비정한 삼촌이 된다. 게다.가 그런 그의 행위는 이른바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후대에 더욱 오명을 떨친다. 박팽년(朴彭年, 1417~56), 성삼문, 이개(李塏, 1417~56), 하위지(河緯地, 1412~56), 유성원(柳誠源, ?~1456), 유응부(兪應孚, ?~1456) 등 여섯 명의 충신이 죽음으로써 단종(端宗)에 대한 충의를 지켰다는 데서 나온 사육신이라는 이름은 지금까지도 불의에 항거한 절개의 상징으로 받들어지지만..
8부 왕국의 시대 이미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는 단순한 관료의 선을 넘어섰다. 그러나 사대부들의 도전은 일단 실패로 끝나고, 조선은 다시 왕국화의 행정을 밟는다. 문제는 세조의 강력한 지배 전략으로 위축된 가운데서도 권력을 향한 사대부들의 야망은 결코 사그러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들은 먼저 자기들끼리의 세력 다툼을 통해 힘을 결집한 다음 사림파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왕권 타도 작업에 들어간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세종이 뿌린 악의 씨 역사와 법, 인문학과 과학 등 각 분야의 학문을 발전시키고, 독자적인 한글을 만들고, 북변의 영토까지 개척한 세종의 활약은 그야말로 종횡무진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세종은 조선이라는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물론 통신장비(대외 관계)에 이르기까지 두루 갖추어 명실상부한 유교왕국의 모범 답안을 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세종의 개인적 능력과 집현전 학자들의 성실한 노력이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성과를 순전히 주체 역량의 공로로만 돌릴 수는 없다. 무엇보다 세종은 좋은 무대를 만났기에 좋은 공연을 남길 수 있었다. 대내적으로는 개국공신 사대부들이 물러나고 국왕의 직속 사대부들이 성장하는 세대교체기였기에 그는 처음부터 왕권에 대한 위협을 전혀 받지 않을 수 있..
유교왕국의 모범 답안 세종이 굳이 훈민정음을 만들어내려 했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독자적인 문자가 없어서 불편한 적이 한두 해도 아닌데 하필 그 무렵에 한글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공식적인 이유는 ‘백성에게 바른 소리를 가르친다’는 훈민정음의 뜻 그대로다. 『훈민정음』의 유명한 첫 구절을 보면 한글을 만든 분명한 취지가 밝혀져 있다.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서 문자(한자)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 내가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편하게 쓰도록 하리라[나랏〮말〯ᄊᆞ미〮 中듀ᇰ國귁〮에〮달아〮 文문字ᄍᆞᆼ〮와〮로〮서르ᄉᆞᄆᆞᆺ디〮아니〮ᄒᆞᆯᄊᆡ〮 이〮런젼ᄎᆞ〮로〮어..
문자의 창조 문화군주 세종의 풍모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업적은 바로 한글을 창제한 것이다. 숱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만들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오늘날 화폐의 주인공이 되는 영예까지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1446년 9월 세종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발표하면서 유사 이래 처음으로 ‘우리 문자 시대’의 문을 연다. 물론 한글이 없었을 때는 한자를 썼다. 또 한자로 표기할 수 없는 고유의 말은 한자의 음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이두(吏讀)를 썼다(향가에서처럼 순수하게 한자의 음만을 빌려 문장 전체를 표기한 것을 향찰鄕札이라고 부르지만 이두와 같은 원리이므로 이두에 포함시키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말은 전통적인 우리말을 쓰되 글은 중국의 한자를 가져다 쓴 셈이니 문제가 없을 수 없다. 알다시피 언..
역사상 유일한 문화군주 결과적으로 보면 사대부의 선택은 옳았다. 즉위 과정에 문제가 있었지만 어쨌든 세종은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태종은 그를 세자로 책봉하는 근거로 ‘천성이 총명하고 학문에 부지런하다’는 것과 ‘정치에 관한 큰 줄기를 안다’는 것을 들었는데, 후자의 자질이 그의 즉위를 결정한 요소라면(그 말을 바꾸면 사대부와의 관계가 좋다는 뜻이니까) 전자의 자질은 즉위 후 그의 활약을 예고하는 요소다. 그래서 세종의 치세는 조선 역사상 가장 번영하고 평화로운 시대이자, 한반도 전체 역사로 보면 8세기 초반의 제1기, 11세기 중반의 제2기에 이어 세번째로 맞이하는 ‘팍스 코레아나(Pax Koreana)’의 시대가 된다(그 세 차례의 번영기가 모두 50년을 넘지 못했다는 게 큰 아쉬움이지만), 더..
3장 팍스 코레아나 무혈 쿠데타 제2의 건국자답게 태종은, 그리 길다고 볼 수 없는 18년의 재위 기간 동안 다방면으로 폭넓은 치적을 남겼다. 그것도 중앙관제나 지방 행정제도, 군제, 토지제도 등과 같은 굵직한 하드웨어의 정비 작업만이 아니라 소프트웨어에서도 섬세하면서 창발적인 솜씨를 보였다. 비록 자신의 손으로 사대부 세력을 제거하기는 했으나 그도 역시 유학 이념을 지향하는 군주였다(다만 국왕 중심의 유교왕국을 꿈꾸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념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그는 유학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을 강화하고 지방의 향교(鄕校)를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또한 백성들을 위해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는가 하면 호패(號牌)를 도입해서 유민을 방지하는 등 철의 군주답지 않은 모습도 선보였다【물론 신문고..
2차 건국 태종은 정식 임금으로 즉위하기 전, 그러니까 형인 정종의 세제(世弟)로 책봉된 다음부터 곧바로 사실상의 국왕으로서 국정을 담당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뻔하다. 쿠데타로 집권한 경우 늘 그렇듯이 두 번 다시는 그런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아무리 개국초기증후군이라 해도 고려의 경우보다 왕자들이 직접 칼을 들고 나선 조선의 경우는 좀 심했다. 사태가 그렇게까지 격화된 이유는 왕자들이 자기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종은 정치와 군사를 확실히 분리하기로 마음먹는다. 몽골 지배기 초에 설치된 귀족들의 의결기구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議政府)로 개편하고, 지휘권이 저마다 다른 사병 조직들을 흡수해서 삼군부(三軍府)를 설치한 것은 그..
유교왕국의 모순 조선의 2대왕 정종은 고려의 2대왕인 혜종과 같은 처지다. 서열상 맏이인 덕택에 왕위를 물려받기는 했으나 오랜 기간 왕좌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그 자신이 잘 안다. 더구나 그에게는 후사도 없다(아들은 있었지만 정비正妃 소생이 아니었으므로 방번, 방석 형제까지 서자로 취급된 판에 왕위계승권을 바랄 수는 없다). 그래도 시한부 삶을 조금이나마 연장해보기 위해 그는 즉위한 직후 개경으로 천도해서 한양의 악몽을 떨쳐내려 하지만 그가 물러나야 하는 상황은 예상보다 일찍 닥친다. 2라운드의 시작이다. 서열에 따르자면 다음 왕위계승권은 셋째인 이방의(李芳毅, ?~1404)에게 있으나 그는 일찌감치 왕위를 포기하고 다섯째인 방원을 밀고 있다. 그로서는 현명한 선택이지만 두번째 분쟁은 바로 여..
2장 왕자는 왕국을 선호한다 붓보다 강한 칼 이성계는 조선의 건국이 최종 목표였겠지만 정도전(鄭道傳)의 목표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성계가 조선의 얼굴이라면 정도전은 조선의 두뇌이며, 이성계가 시공자라면 정도전은 건축가다. 그러므로 이성계는 건물이 다 올라간 것에 만족할 수 있어도 정도전은 인테리어까지 마쳐야만 완공이라고 본다. 게다가 중국의 까다로운 준공 검사에 합격하려면 인테리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성계가 아직도 조선 국왕으로 책봉되지 못하고 고려권지국사에 머물러 있는 게 그 증거다. 컴백한 유교제국 명나라와 좋은 짝을 이루려면 조선도 유교왕국으로 거듭나야 한다. 붓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조선경국전』으로 이념적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은 지배 이데올로기로 갓 자리잡은 유학을 확고히 안..
유교왕국을 꿈꾸며 주원장(朱元璋)이 조선을 회의적으로 바라본 데는 사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볼 때 조선은 생겨날 필요가 없는 나라다. 이미 고려 말에 명나라를 섬기겠다는 세력이 확실히 자리를 굳힌 마당에 왜 굳이 새 왕조를 세워야 했을까? 중국의 원-명 교체는 민족 주체가 바뀌었으니 나름대로 필연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겠지만, 고려-조선 교체에는 그런 필연성이 없다. 바꿔 말하면 고려와 조선은 성격상의 차이가 없고 겨우(?) 왕실의 성씨만 달라졌을 뿐이다. 주원장과 정도전(鄭道傳)이 허허실실한 신경전을 벌인 이유도 서로가 그런 배경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부터라도 차이를 만들면 된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뀔 만한 타당하고 합리적인 명분을 만들어내야 한다. 정도전(鄭道傳)은..
두 신생국의 신경전 가장 중요한 국호가 결정되자 정도전의 조선 기획은 더욱 가속화되고, 그에 따라 그의 재능도 더욱 빛을 발한다. 우선 그는 이성계의 덕을 칭송하기 위해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일종의 간이 오페라인 「문덕곡(文德曲)」,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錄)」을 지어 작사ㆍ작곡ㆍ안무의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현재 음률은 전하지 않고 『악학궤범樂學軌範』에 가사와 일부 춤동작만이 전한다). 그러나 이런 예능의 자질은 그가 지닌 능력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곧이어 그는 군사제도를 정비해서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만들어 병권을 장악하고 직접 군사 조련까지 담당하면서 폭넓은 오지랖을 마음껏 과시한다. 1394년에 접어들자 그는 잠시 짬을 내서 국가 운영 지침서인 『조선경국전』을 저술하는가 싶더..
1장 건국 드라마 조선의 기획자 작은 사물이 큰 사물에 이끌리는 것은 자연 법칙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면서도 다른 면에서 보면 ‘자연 현상’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 자연과 달리 의지를 지닌 사물, 이를테면 인간이나 인간 집단은 그 자연 법칙에 종속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사대(事大)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선택적인 행위다. - 『역사의 물리학』 중에서 14세기 말의 동북아시아는 활기에 넘친다. 한 세기 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다가 다시 한족 왕조가 들어선 중국과 새 왕조로 말을 갈아 탄 한반도는 바야흐로 건국과 재건의 활발한 시즌을 맞았다. 몽골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었던 같은 처지의 신생국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두 나라는 죽이 잘 맞지 않지만 어차피 서로 바쁜 초기의 건설기가 끝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