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역사&절기/한국사 (54)
건빵이랑 놀자

한국사&동양사&서양사 역사 연표(대한제국~현대사) 한국 동양서양1897 고종 환궁 / 대한제국 수립 1894~5 청일 전쟁 / 시모노세키 조약체결1896 헤르츨이 시오니즘 제창 / 제1회 올림픽1898 만민공동회 개최 / 고종, 독립협회 해산령 내림 1898 중국, 무술변법1898 파쇼다 사건(영국과 프랑스 간 우호 성립)1899 최초의 철도 경인선 개통 1899 의회단 사건 발발 19001902 영국,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영일동맹 결성 1903 영국, 벵골 분리 계획 추진 1904 일진회 창립 1904~1905 러일전쟁(일본, 동양의 제국주의 국가로 부상) 1905 을사보호조약 체결 1905 러시아, ‘피의 일요일’ 사건1906 국채보상운동 / 의병운동 재개 1906 인도, 캘커타 대회에서 ..

한국사&동양사&서양사 역사 연표(순조~조선말기) 한국 동양서양1800 순조의 즉위로 세도정치 시작(사대부 체제 복귀)1800 1801 신유박해 / 공노비 완전 폐지 1804 나폴레옹 황제 즉위. 나폴레옹 법전 편찬 1805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 시작 1806 신성 로마 제국 멸망1811 홍경래의 난1810 1812 나폴레옹,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면서 몰락 1814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의 주도로 빈 회의 개최1818 정약용, 『목민심서』 저술 1817 영국, 마라타 연합 대파. 인도 전체를 지배1816~1825 자유주의의 여파로 아르펜티나, 칠레, 콜롬비아 등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가 독립함 1819 영국, 싱가포르에 자유무역항을 설치 18201825~1830 자와 전쟁1829 그리스 독립1832 ..

한국사&동양사&서양사 역사 연표(임란~정조)한국 동양서양1590 일본에 통신사 파견15901590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 1592 임진왜란 발발 1598 앙리 4세가 낭트칙령으로 신교의 자유 허용(위그노 전쟁 종결)1597 일본의 재침략(정유재란) 1598 이순신, 노량해전 승리 / 정유재란 종결 1598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 16001600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의 미쓰나리와 붙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해 일인자로 부상1600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설립1605 사명당, 일본의 조선 포로 송환 1603 에도 바쿠후 시대 개막 / 명, 베이징에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간행1603 영국에 스튜어트 왕조 성립1608 대동법 처음으로 실시 1611 성균관, 정인홍을 유적에서 삭제161016..

한국사&동양사&서양사 역사 연표(중종~임란) 한국 동양서양1506 중종반정(사대부 체제의 시작)1500 1510 3포왜란(일본과 통상 단절)15101512 명, 장거정의 개혁 시작 1514 원각사를 허물고 사찰의 재건을 금함 1513 명, 일조편법 실시 1517 『여씨향약』, 『소학』 번역 반포(유교 사회 드라이브) 1517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개시(종교개혁의 시작)1518 조광조, 현량과 건의 1519 기묘사화(조광조 사사) 1519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합스부르크 제국의 시작)1520 비변사 설치1520 1521 아스테카 제국 멸망 1526 바부르가 무굴 제국 수립1522 마젤란의 세계 일주 성공 1530 1533 잉카 제국 멸망 1534 헨리 8세가 이혼..

한국사&동양사&서양사 역사 연표(조선 건국~연산군) 한국 동양서양1392 조선왕조 성립1390 1394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 1396 정도전의 표전문 사건 1397 랴오둥 정벌 계획 추진 / 동대문 준공 1397 스칸디나비아에 칼마르 동맹 설립1398 이성계 퇴임으로 1차 왕자의 난 발발 / 정종 즉위 / 남대문 준공 1398 티무르가 인도 침략 1399 다시 개경으로 천도 1399 영국, 랭커스터 왕조 설립1400 2차 왕자의 난 / 태종 즉위1400 1401 태종, 신문고 설치 1401 일본 쇼군이 명나라로부터 일본왕 책봉 받음 1402 태종, 호패법 실시 1403 독일, 후스의 종교개혁1404 경복궁 준공 1405 한양으로 재천도 1405~1433 정화가 영락제의 명으로 남해 원정1405 명, 정..

한국사&동양사&서양사 역사 연표(고려시대) 한국 동양서양901 궁예, 태봉(후고구려) 건국900907 당의 절도사 주전충, 당을 멸망시키고 후량을 건국(5대10국 시대 시작) 910 910 교회 개혁의 중심인 클뤼니 수도원 창립 911 노르망디 공국의 성립912 신라 왕실, 김씨에서 박씨로 바뀜 918 한반도에 고려왕조 성립 916 몽골에 대거란국 세워짐 926 발해, 거란의 침략으로 멸망 927 견훤의 궁성 침략으로 신라 왕실, 박씨에서 김씨로 컴백 933 왕건, 후당에게서 작위 받음 936 왕건, 신라와 후백제를 접수하여 후삼국 통일 완성 936 거란, 국호를 요로 바꿈 / 중국, 후당에서 후진으로 교체 939 베트남, 중국의 속국으로 편입됨 945 고려, 왕규의 난 947 중국, 후진에서 후한으로 ..

한국사&동양사&서양사 역사 연표(남북국시대) 한국 동양서양676 신라의 한반도 통일670 689 신라 신문왕, 녹읍 폐지. 대구 천도 불발 687 피핀, 프랑크 왕국 장악698 대조영이 동만주까지 도망쳐와 발해 건국 690~705 당, 최초의 여제 측천무후 집권 700701 일본, 다이호 율령 성립(이 무렵부터 일본이라는 국호 사용) 712 당, 현종 즉위(개원의 치)711 이슬람 제국의 북아프리카 정복, 에스파냐 진출(에스파냐의 이슬람 시대 시작) 717 비잔티움 제국, 이슬람의 동쪽 공격 방어722 신라, 정전 지급 720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 편찬 726 발해 무왕의 동생 대문예, 당으로 망명 726 비잔티움 제국의 레오 3세가 성상 파괴령 반포732 발해 장문휴, 거란과 함께 당의 동북변 공..

한국사와 동양&서양사 역사 연표(삼국건국~신라통일) 한국 동양서양57 박혁거세, 신라 건국기원전50 58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 원정 시작(영국 역사의 출발점) 49 카이사르가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과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넘 46 카이사르가 자신의 이름을 딴 율리우스력 제정37 주몽, 고구려 건국 31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ㆍ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격파20 박혁거세, 왜인을 마한에 사신으로 보냄 27 아우구스투스가 사실상의 황제에 오르면서 로마 제정의 시작18 온조, 백제 건국 4 예수 그리스도 탄생 기원8 외척 왕망이 전한을 멸망시킨 후 신(新) 나라 건국 32 고구려 호동왕자 낙랑 공략 23 유씨 왕실이 왕망으로부터 나라를 되찾으면서 후한 시대 시작 42 금관가야 건국 48 김수..

한국사&동양사&서양사 역사 연표(선사~위만조선) 한국 동양서양30000~10000경 황해가 바다로 바뀜. 공주 석장리 유적기원전1000010500년경 일본, 최초의 토기 제작10000년경 신석기 혁명(농업혁명)의 시작 6000년경 타이, 벼농사 시작7000년경 최초의 도시 예리코 건설5000년경 서울 암사동 유적50004000년경 중앙아시아, 말을 기르기 시작 3500~2000년경 황허 문명, 인더스 문명 발생3500~2000년경 이집트 문명 발생, 최초의 문자 사용 30003000년경 타이, 청동기 사용3100년경 메네스의 이집트 통일 2570년경 이집트 쿠푸 왕이 대피라미드 건설2333 단군 조선의 건국 2350 ‘사계절의 왕’ 사르곤 1세가 수메르와 아카드 일대 통일 2000 2000년경 아리아인의..

종횡무진 한국사 목차 남경태 연표선사 ~ 위만조선삼국건국 ~ 신라통일남북국고려조선 건국~연산군중종~임란 발발임란~정조순조~조선 말기대한제국~현대사 책 머리에2009년 통속적인 역사책에 싫증을 느낀 독자에게2014년 지은이의 향기가 나는 종횡무진 시리즈가 되기를 바라며 프롤로그: 한국사를 시작하며 1부 깨어나는 역사 제1장 신화에서 역사로분명한 시작(단군)누락된 시대(단군신화)두 번째 지배집단(기자조선)중국과의 접촉(위만조선)지배인가, 전파인가(한4군) 제2장 왕조시대의 개막마이너 역사새 역사의 출발점(주몽, 온조, 박혁거세)중국의 위기=고구려의 기회(삼한, 유리왕, 대무신왕, 낙랑공주)고구려의 성장통(민중왕, 모본왕,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물보다 흐린 피(고국천왕, 을파소, 산상왕, 동천..

에필로그:한국사의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진행중인 역사 1948년 남북한의 경쟁적인 단독 정부 수립으로 한반도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우선 이제부터는 하나가 아닌 둘의 역사다. 더욱이 이 현대사는 아직 진행중이므로 역사라기보다는 시사에 가깝다. 이 책을 이 시점에서 끝맺기로 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적어도 남한에 관한 한 1948년부터 지금까지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유사 이래 최대의 비극이라 할 소모적인 내전이 있었는가 하면, 이승만의 문민독재와 박정희의 군사독재를 겪었고, 그 뒤에도 다시 군사독재와 문민독재가 되풀이되는 간단치 않은 굴곡을 거쳐야 했다. 게다가 1997년부터 몰아친 경제 위기는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와 사회의 영역에서도 향후 넘어야 할 고비가 많음을 시사하고 있다. 주목..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식민지 시대에도 사대부(士大夫)의 후예들은 친일파로 변신하거나 독립운동의 명망가로 거들먹거렸다. 가장 치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해야 할 시기에 한반도에서는 오히려 투쟁의 불꽃이 사그러들었고, 그 결과 일본이 패망한 뒤에도 한반도는 열강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남북한의 정권이 권력욕에 가득한 음모가들의 손아귀로 넘어간 것은 ‘혁명 없는 역사’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1장 가해자와 피해자 식민지를 환영한 자들 어쩌면 러일전쟁의 승패와 상관없이 처음부터 일본의 조선 지배는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전쟁에 임하는 두 나라의 자세가 그렇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은 러시아를 불시에 기습하면서 그 이튿날로 인천을 통해 서울로 입성했다. 그리고..

3장 위기와 해법 다시 온 왕국의 꿈 대원군이 처음부터 어린 아들이 져야 할 국정의 부담을 대신 떠맡은 것은 아니다. 물론 그는 어린 아들을 위해(?)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었겠지만, 남의 이목이 많고 오늘의 그를 있게 해준 조대비가 시퍼렇게 살아 있다. 게다가 공식적으로는 엄연히 대비의 수렴청정이 진행되고 있는 시기가 아닌가? 비록 대비는 대원군에게 모든 사안에 대해 일일이 자문을 구했지만, 젊은 시절 눈칫밥이라면 원 없이 먹은 그는 아직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대원군이 조대비는 고맙고 미더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국태공(國太公)으로 임명하고 창덕궁 출입 전용문까지 만들어주면서 각별히 배려했으며, 국가의 최대 행사인 경복궁 중건 사업도 그에게 일임했다【1..

2장 허수아비 왕들 무의미한 왕위계승 아무 할 일도 없는 자리지만 순조(純祖)는 그것조차 귀찮았던 모양이다. 1827년에 그는 아직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였음에도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열여덟 살의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난다. 이후 세자는 3년 동안 대리청정을 하는데, 물론 그에게도 역시 특별히 업무라 할 만한 일은 없다. 그는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에 죽었으나 그래도 두 가지 업적은 남겼다. 하나는 대리청정 기간 동안 사실상의 국왕이었으므로 죽은 뒤에 익종(翼宗, 1809~30)이라는 왕의 묘호를 받은 일이고, 다른 하나는 안동 김씨 대신 풍양 조씨 가문에서 아내를 취함으로써 이후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주인이 풍양 조씨로 바뀌게 만든 일이다. 어쨌든 당장 난처해진 것은 순조다. 일..

11부 불모의 세기 사대부(士大夫) 체제의 완결판은 결국 황폐한 세도정치였다. 국왕은 완전한 허수아비가 되었고, 사대부들은 사리사욕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아들을 왕으로 앉힌 아버지가 시대착오적인 쇄국을 내세우는가 하면 며느리는 그런 시아버지를 내쫓고 외세를 마구잡이로 끌어들였다. 지배층의 이런 무책임과 무능은 급기야 나라마저 빼앗기는 결과를 빚고 만다. ▲ 영화 [자산어보]의 장면. 신유박해로 체포된 정씨 삼형제들. 1장 사대부 체제의 최종 결론 과거로의 회귀 정조(正祖)는 뚜렷한 병명이 없이 등과 머리에 종기가 돋는 일종의 열병을 앓다가 죽었다. 그런 탓에 한참 뒤까지도 그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대수롭지 않은 병인 데다가 발병한 ..

3장 마지막 실험과 마지막 실패 도서관이 담당한 혁신 영조(英祖)가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탕평책(蕩平策)이 효과를 거두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또한 그가 출중한 재질과 뛰어난 학문, 강력한 카리스마 등 군주적 자질을 두루 지녔고 무척 오래 재위했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 모든 요소들이 왕권 강화와 조선의 왕국화에 나름대로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보다 훨씬 중요한 요소가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북아의 질서가 송두리째 변했다는 사실이다. 청나라가 대륙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곧 황제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물론 청나라에도 황제는 있다. 그것도 건륭제(乾隆帝, 1711~99)라는 뛰어난 황제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는 조선을 포함해서 역대 한반도 왕조들이 충심으로 사대했..

2장 한반도 르네상스 새로운 학풍 정치 행정이 정상화되고 제도가 정비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왕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건물의 골조가 튼튼해지고 외관이 다듬어졌다면 실내 인테리어도 그에 어울리도록 꾸며야 할 것이다. 당당한 왕국의 면모를 갖춘 새 조선에 어울리는 인테리어 작업이란 바로 학문, 지식, 예술 등의 문화 부문을 강화하는 일이다. 사실상의 재건국이라는 중요한 시기의 왕이라면 무엇보다 카리스마와 다재다능이 필요할 터이다. 이 두 가지 재질에서 영조(英祖)는 과연 시대적 요구에 정확히 부응하는 군주였다. 그는 권력과 권위로도 사대부를 확실히 제압했을 뿐 아니라 학문에서도 결코 여느 사대부(士大夫)에 뒤지지 않았다. 조선의 역대 어느 왕보다도 경연을 많이 실시했다는 게 그 점을 말해준다【경연의 기록은..

10부 왕정복고 중국이 중화로 컴백할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일부 사대부(士大夫)들은 소중화(小中華)의 정신병을 버리고 실학의 학풍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더 중요한 변화는 조선의 국왕이 비로소 왕정의 의미와 필요성을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탕평책으로 당쟁을 잡았다 싶은 순간 영조는 개혁의 고삐를 늦췄고, 왕당파와 친위대를 육성함으로써 왕권을 다잡았다 싶은 순간 정조는 복고로 돌아섰다. 1장 조선의 새로운 기운 되살아난 당쟁의 불씨 장희빈은 1701년 인현왕후가 죽은 뒤 곧바로 사약을 받았으나 그래도 그녀가 남긴 아들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복위된 뒤에도 인현왕후는 끝내 후사가 없었고 이듬해에 맞아들인 셋째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도 아이를 낳지 못한 탓에, 장희빈의 소생인 세자를 ..

6장 조선판 중화세계 세계화 시대의 중화란?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이 이제 조선만이 지구상에 홀로 남은 문명 국가라는 허구적 위기감과 허황한 자부심을 키우며 안으로 웅크러들고 있을 무렵, 공교롭게도 지구상의 수많은 지역들은 오히려 속속들이 개방되고 있었다. 바야흐로 유럽 문명이 세계 각지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후대의 동양 역사가들은 이 과정을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극동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고, 인류 문명사 전체로 보면 그 과정은 서로 독립적으로 발생하고 발전해 온 지구상의 모든 문명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거대한 ‘세계화’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그 세계화의 완성은 20세기에 이루어진다). 세계 진출에 나선 유럽인들의 전략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토착 문명..

5장 복고의 열풍 시대착오의 정신병 불과 두 달 동안의 전쟁이었지만 병자호란(丙子胡亂)은 7년 동안 벌어진 임진왜란에 비해 결코 피해가 적지 않았다. 전란으로 인한 파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다지 큰 피해는 없었다. 청군은 온갖 약탈과 방화, 강간을 저질렀지만 기간이 길지 않았으므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일본군이 저지른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임진왜란으로 이미 주요 궁궐들이 소실되어 있었으니까 더 이상 불타 없어질 건물도 별로 없었다. 따라서 이번 전란의 피해는 물질적인 것보다 사회적인 데 있다. 우선 청군에 의해 붙잡혀간 사람이 무려 50만에 달한다는 게 커다란 사회문제다. 전쟁포로가 그렇게나 많았을까? 물론 그건 아니다. 청나라는 조선을 마음대로 유린하면서 돈이 있거나 신분이 높..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사대부에 도전한 국왕 정철(鄭澈)이 이루지 못한 ‘건저(建儲)의 꿈’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마자 실현되었다. 북쪽으로 도망치던 선조(宣祖)는 평양에 이르렀을 때 황급히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것이다. 자칫 잘못하다가 왕실 사직이 끊어지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해결했어도 죽어 조상들을 뵐 수 없으리라는 판단이었을 게다. 광해군(光海君)에게는 친형 임해군이 있었지만, 그는 성질이 포악해서 세자 책봉을 받지 못했다(물론 사대부들의 구미에 맞는 후보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난리 덕분에 세자가 된 광해군은 공교롭게도 그 난리가 끝나면서 세자 자리를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1600년에 의인왕후가 죽은 게 그에게는 큰 불운이다. 어차피 마흔이 넘은 그녀가 아이를 낳을 ..

3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남풍) 정세 인식의 차이 정철(鄭澈)은 한직을 떠돌던 시기에 소일거리 삼아 노래들을 지었지만, 아예 그걸 업으로 삼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런 노래들이니까. 정여립의 사건을 계기로 화려하게 중앙 관직에 컴백했어도 정철은 평안한 만년을 즐길 팔자가 아니다. 그 공로로 그는 우의정에서 좌의정으로 한 계급 특진했으나 얼마 안 가 동인의 역공을 받아 침몰하고 만다. 세자 책봉이 연관되어 있기에 건저(建儲, ‘儲’란 세자를 뜻한다) 문제라고 불리는 이 사건 역시 전형적인 말만의 음모다. 선조(宣祖)는 아들이 많으나 불행히도 ‘꼭 필요한 아들’이 없었다. 후궁에게서 낳은 아들은 많지만 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와의 사이에서는 아들은커..

2장 병든 조선 양아치 세상 고려의 묘청(妙淸)과 신돈(辛旽), 조선의 조광조(趙光祖) -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실패한 개혁가라는 사실이다. 세 사람 모두 처음에는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 국왕에게 중용되었으나 지나치게 개혁을 서둘다가 결국 국왕의 신임을 잃으면서 수구 반대파의 역공에 휘말려 죽음으로 급행료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같은 실패라 해도 고려와 조선의 경우는 서로 다르다. 조광조는 묘청이나 신돈처럼 군사 행동을 일으키거나 실제로 역모를 꾀한 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당했으니 말하자면 가장 억울한 케이스다. 영리하고 유능한(?) 음모가만 있으면 ‘말만의 역모’로 반대파의 수많은 인물들을 떼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을 정도로 조선의 병은 깊어졌다. 이런 사건을 사화(士禍)라고 부르니까 뭔가..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조선은 마침내 왕국에서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바뀌었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사대부들은 권좌에 오르자마자 자기들끼리 편을 갈라 새로운 권력다툼을 벌인다. 그들이 진흙탕 싸움에 몰두해 있는 동안 비중화세계는 거대한 도약을 시작한다. 일본과 여진이 차례로 중화세계에 도전함으로써 마침내 중화의 본산인 명나라가 멸망한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들은 희한하게도 그것을 중화의 중심이 조선으로 옮겨온 거라고 판단한다.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1장 개혁과 수구의 공방전 개혁의 조건 ‘반정(反正)’이라는 이름의 쿠데타로 즉위한 왕답게 중종의 치세는 대대적인 개혁의 바람으로 시작된다. 태종과 세조가 그랬듯이 원래 정..

3장 군주 길들이기 폭탄을 품은 왕 당연한 말이지만 원래 강한 왕권은 강한 왕의 것이다. 그런데 대개 강한 왕이란 새 왕조를 세우거나 정변으로 집권한 왕인 경우가 많다. 건국자나 성공한 쿠데타의 리더는 그 인물됨과 상관없이 강력한 카리스마를 공인받을 수 있으며, 이는 자연히 강력한 왕권으로 이어진다. 지금까지 본 조선 초기의 역사에서는 태종과 세조가 그런 임금이었다. 그 뒤를 이은 세종과 성종은 사실 전 왕들이 다져놓은 강력한 왕권 덕분에 왕권과 신권, 즉 국왕과 사대부(士大夫)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안정과 번영의 치세를 누릴 수 있었다. 이렇듯 왕권이 강하면 사대부는 자연히 국왕에게 협조하면서 관료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왕권이라도 몇 대에 걸쳐 약발이 지속되기는 어렵..

2장 진화하는 사대부 특이한 ‘반란’ 아무리 3차 건국자로서 강력한 왕권을 누렸다지만 세조에게는 단종(端宗)의 폐위와 살해, 금성대군을 위시한 형제들 간의 분쟁, 소장파 사대부(士大夫)들의 거센 도전 등 일련의 사건들이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었다. 그가 소수의 측근들만 믿고 중용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덕분에 한명회(韓明澮)를 비롯해서 정인지, 권남, 신숙주, 정창손 등 일찍이 수양대군 시절부터 세조를 따랐던 3차 건국의 공신들은 막강한 정치적 권세와 막대한 경제적 부를 누렸다【특히 한명회는 세조의 심복을 넘어 수족과 같은 사랑을 받았다. 심지어 세조는 그를 나의 장량 이라고 부르면서 끔찍이 아꼈는데, 세조 역시 자신이 조선의 새 건국자임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정도전이 조선의 장량이라고 자칭한 ..

8부 왕국의 시대 이미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는 단순한 관료의 선을 넘어섰다. 그러나 사대부들의 도전은 일단 실패로 끝나고, 조선은 다시 왕국화의 행정을 밟는다. 문제는 세조의 강력한 지배 전략으로 위축된 가운데서도 권력을 향한 사대부들의 야망은 결코 사그러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들은 먼저 자기들끼리의 세력 다툼을 통해 힘을 결집한 다음 사림파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왕권 타도 작업에 들어간다. 1장 왕권의 승리 3차 왕자의 난 세종의 기대와는 달리 ‘조선의 영락제(永樂帝)’는 그의 아버지 태종이 아니라 아들인 수양대군이었다. 태종은 그래도 왕위를 놓고 형제들 간에 다툼을 벌인 것이지만, 수양대군은 바로 50년 전 명나라 영락제가 그랬듯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조카를 죽인 비정한 삼촌..

3장 팍스 코레아나 무혈 쿠데타 제2의 건국자답게 태종은, 그리 길다고 볼 수 없는 18년의 재위 기간 동안 다방면으로 폭넓은 치적을 남겼다. 그것도 중앙관제나 지방 행정제도, 군제, 토지제도 등과 같은 굵직한 하드웨어의 정비 작업만이 아니라 소프트웨어에서도 섬세하면서 창발적인 솜씨를 보였다. 비록 자신의 손으로 사대부 세력을 제거하기는 했으나 그도 역시 유학 이념을 지향하는 군주였다(다만 국왕 중심의 유교왕국을 꿈꾸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념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그는 유학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을 강화하고 지방의 향교(鄕校)를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또한 백성들을 위해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는가 하면 호패(號牌)를 도입해서 유민을 방지하는 등 철의 군주답지 않은 모습도 선보였다【물론 신..

2장 왕자는 왕국을 선호한다 붓보다 강한 칼 이성계는 조선의 건국이 최종 목표였겠지만 정도전(鄭道傳)의 목표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성계가 조선의 얼굴이라면 정도전은 조선의 두뇌이며, 이성계가 시공자라면 정도전은 건축가다. 그러므로 이성계는 건물이 다 올라간 것에 만족할 수 있어도 정도전은 인테리어까지 마쳐야만 완공이라고 본다. 게다가 중국의 까다로운 준공 검사에 합격하려면 인테리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성계가 아직도 조선 국왕으로 책봉되지 못하고 고려권지국사에 머물러 있는 게 그 증거다. 컴백한 유교제국 명나라와 좋은 짝을 이루려면 조선도 유교왕국으로 거듭나야 한다. 붓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조선경국전』으로 이념적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은 지배 이데올로기로 갓 자리잡은 유학을 확고히..

7부 유교왕국의 완성 유교왕국이란 원래 왕과 사대부를 축으로 하는 이중 권력 체제다. 초기의 승자는 왕이었다. 건국 초기부터 사대부 체제를 이룩하고자 했던 정도전(鄭道傳)의 구상은 당연히 왕국 체제를 선호하는 왕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다. 그 덕분에 세종까지는 국왕이 사대부를 관료로 거느리는 정상적인 왕국 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으나, 머리가 커진 사대부들은 점차 왕권에 대한 도전을 꿈꾸게 된다. 1장 건국 드라마 조선의 기획자 작은 사물이 큰 사물에 이끌리는 것은 자연 법칙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면서도 다른 면에서 보면 ‘자연 현상’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 자연과 달리 의지를 지닌 사물, 이를테면 인간이나 인간 집단은 그 자연 법칙에 종속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사대(事..

3장 해방, 재건, 그리고 멸망 개혁의 실패가 부른 몰락 권문세족의 태생적 결함은 결국 현실로 드러났다. 원나라와 운명공동체로 출발한 그들이었으니 몰락도 원나라와 함께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13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원나라가 급작스럽게 힘을 잃기 시작한 것이다. 세조 이래 원 황실은 한화 정책에 열심이었으나 북방민족이 한족으로 탈바꿈할 수는 없었고 유목문명이 농경문명을 흡수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일찍부터 제위의 세습제가 발달한 한족 왕조와는 달리 몽골의 관습에는 제위 계승을 위한 고정된 제도가 없었으므로 권력다툼이 더욱 심했다. 장기 집권했던 세조 이후 14세기 후반까지 70여 년 동안 즉위한 황제만도 10명에 이를 정도였다. 게다가 경제에 어두웠던 원 황실은 국가재정을 제대로 운영하..

2장 최초의 이민족 지배 다시 부는 북풍 처음부터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양측이 첫 대면을 한 것은 1218년 몽골에 쫓긴 거란이 한반도 북부로 밀려들어왔을 때다. 몽골군은 서경 동쪽의 강동성에 거란을 몰아넣고 고려에 군량 지원을 요청했다. 고려의 중앙정부는 고민했으나 당시 서북면 원수(元帥)를 맡고 있던 조충(趙沖, 1171~1220)이 군량을 보내자 정부에서도 김취려(金就礪, ?~1234)를 지휘관으로 삼고 병력을 보내 이듬해 1월에 양측이 함께 거란의 잔당을 소탕하는 형식을 취했다(당시 조충은 고려로 보내진 거란 포로들을 북부의 각 주현으로 분산시켜 특정 구역에 모여 살게 했는데, 이것이 후대에 거란장契丹場으로 불리게 된다). 이렇듯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조충과 김취려는 몽..

6부 표류하는 고려 중앙집권화를 이루지 못한 대내적 문제와 시대착오적인 중화세계의 일원으로 남으려 한 대외적 문제는 결국 고려 사회의 붕괴를 앞당긴다. 내부 문제는 무신정변을 불러 때이른 ‘군사독재’를 성립시켰고, 외부 문제는 몽골의 침략을 불러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식민지 시대를 열었다. 몽골이 물러가자 고려는 부활의 기회를 잡았으나, 신진사대부들은 다시금 중화세계의 낡은 우산 밑으로 기어든다. 1장 왕이 다스리지 않는 왕국 쿠데타의 조건 강감찬(姜邯贊), 서희(徐熙), 윤관(尹瓘), 김부식(金富軾) -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 쉽다. 모두 위기에 처한 고려를 구한 명장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한 답이다. 위기의 국가를 구한 건 사실이나 ‘명장’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

3장 안정의 대가 전성기 코리아 1010년 요나라의 2차 침략을 받았을 때 현종은 대장경을 조판할 것을 명했다. 그 의도는 부처의 힘을 빌려 전란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거란도 역시 독실한 불교 국가였으니 부처라 해도 과연 어느 편의 손을 들어줘야 할지 난감했을 것이다(이 대장경의 판은 나중에 몽골 침략 때 불타 없어졌고, 지금 전하는 팔만대장경은 몽골 침략을 막으려는 목적에서 새로 조판한 것이다). 차라리 현종으로서는 나주까지 도망치지 말고 개경에 남아 궁성과 수도의 백성들을 구하는 게 훨씬 당당한 태도가 아니었을까? 대장경의 조판 이외에도 현종은 성종(成宗)이 중단시켰던 거국적 불교 행사인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를 부활시켰으니 불교에 대한 신심이 상당히 깊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

2장 고난에 찬 데뷔전 중국화 드라이브 송나라 초기에 고려가 잠시 중국과 교류를 단절한 이유는 새로 생긴 송나라가 과연 대륙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기야 907년에 당나라가 망한 뒤 50년도 채 못되는 기간에 벌써 다섯 왕조가 교체되었으니 충분히 할 수 있는 우려다. 게다가 당시 광종(光宗)은 5대의 마지막 왕조인 후주와 우호를 맺은 지 얼마 안 되었던 터라, 후주의 무관으로 있다가 제위를 빼앗고 송나라를 건국한 조광윤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울 수는 없었다(그랬기에 광종은 연호를 별도로 정하고 황제를 자칭하며 한껏 호기를 부린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광윤이 대륙의 새 임자라는 사실은 점차 분명해진다. 그래서 972년에 광종은 송에 사신을 보내 수교를 청하는데..

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당 - 신라에서 송 - 고려로 멤버를 교체한 중화세계는 어느새 강성해진 비중화세계의 거센 도전에 시달린다. 왕건의 모순에 찬 「훈요 10조」는 중화 대 비중화의 대결 구도를 예고한다. 하지만 고려는 중앙집권화를 이루지 못한 데다 고구려의 후예라는 구호와는 반대로 신라의 경주 정권을 계승한 데 불과했기에 중화 세계의 ‘약한 고리’로 남았고, 거란의 요와 여진의 금으로 이어지는 비중화세계의 만만한 타깃이 될 수밖에 없었다. 1장 모순된 출발 첫째 모순 중앙정부 vs 지방 호족 무혈 쿠데타로 고려를 세웠고, 평화롭게 신라 정권을 인수했으며,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후백제마저 접수해 후삼국 통일을 이룬 왕건은 정말 억세게 운좋은 사나이였다. 그러나 역시 공짜란 없는 걸까? ..

3장 단일왕조 시대의 개막 왕실의 진통 만주에서 발해가 전성기의 마지막 단꿈에 취한 나머지 랴오둥 진출의 찬스를 놓치고 있을 무렵 한반도의 신라에게는 아예 아무런 찬스도 없었다. 중국이 힘을 잃자 신라는 마치 부모를 여린 아이처럼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진성여왕이 최치원(崔致遠)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에서 보듯이 왕실에서는 나름대로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나 이미 신라는 경주 귀족들이 왕권마저 좌지우지하는 단계였으므로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사실 7세기 초반 두 여왕의 시대 이래 200여 년 만에 다시 여왕이 즉위하게 된 사정도 그런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200년 전의 두 여왕은 비록 비정상적이기는 해도 신라의 도약을 마련하기 위한 토대로 기능했지만, ..

2장 소용돌이의 동아시아 흔들리는 중심 사실 원성왕(元聖王)이 독서삼품과를 시행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는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다는 핸디캡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 왕인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상대등이었던 그는 다른 대권 후보였던 왕손 김주원(金周元, 김춘추의 6세손)을 누르고 즉위했던 것이다【이 문제는 한참 뒤인 822년에 반란을 부르는 계기가 된다.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은 아버지가 즉위하지 못한 원한을 40년이나 잊지 않고 있다가 웅천주 도독으로 부임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지금의 전북과 충청도 일대를 장악하고, 장안국이라는 국호와 경운이라는 연호까지 제정하면서 한때 기세를 올렸으나 결국 경주 귀족들에게 진압되어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나..

4부 한반도의 단독정권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신라의 삼국통일은 중화세계의 완성이다. 따라서 중화 질서의 변방인 신라는 중국이 붕괴하면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는 처지다. 중화의 질서가 정점에 달한 8세기 초반에 잠시 번영을 누렸던 신라는 중국이 당말오대의 위기에 빠지자 극심한 혼란기로 접어든다. 발해가 포기한 랴오둥을 무대로 거란이 비중화세계의 대표주자로 성장하는 가운데 한반도의 단독정권은 고려에게로 넘어간다. 1장 새 질서와 번영의 시대 큰 통일과 작은 통일 당의 식민지 총독부 격인 안동도호부가 랴오둥으로 옮겨간 것은 신라의 저항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의 정책 변화에도 이유가 있었다. 당시 신라는 당에 정면으로 대립할 처지도 아니었고 그럴 의지도 없었다. 만약 신라가 당에 저항하면서도 사대하..

3장 통일의 무대 시나리오 1 약한 고리 끊기 백제 의자왕(義慈王)의 행적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즉위 초기 빛나는 대외 전과를 올린 것과 달리 후기에 가서는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방탕해지는 것이다. 전쟁보다는 주로 외교에 주력하던 아버지 무왕(武王)과 달리 그는 즉위 초부터 적극적인 신라 공략에 나서서 짭짤한 전과를 올렸다. 비록 대야성 정복으로 기세가 최대로 올랐을 때 원래부터의 목표였던 한강 하류 수복을 시도했다가 선덕여왕이 당나라에 SOS를 치는 바람에 물러서긴 했지만, 당나라가 고구려 원정으로 손이 비는 틈을 이용해서 다시 신라의 일곱 성을 획득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곳곳에서 신라의 명장 김유신에게 발목을 잡히는 일만 없었더라면 아마 의자왕은 그 참에 한강 하류는 물론 신라 본토까..

2장 통일 시나리오 동북아 네 나라의 입장 반도 북쪽에서 수나라와 고구려가 대회전을 벌이던 무렵 반도 남쪽의 두 나라는 숨죽인 채로 그 승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 전쟁에 영향을 미칠 수 없지만 전쟁의 결과는 곧 그들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따라서 두 나라는 무엇보다도 줄을 잘 서야 한다는 생각에 사태를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고구려에 적대적이고 중국에 사대하고 있는 처지였으므로 그들이 응원하는 측은 당연히 수나라다(당시까지는 한반도 단일민족의식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백제와 신라의 입장이 약간 다르다는 사실이다. 사실 그 전쟁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예고되어 있었으므로 백제와 신라 역시 팔짱만 끼고 앉아 있지는 않았다. 수 양제가 마음 속으로 원정 일정..

3부 통일의 바람 중국의 질서가 변한 것은 삼국 중 가장 후발주자인 신라에게 찬스를 제공한다. 백제와 고구려가 가지고 있었던 한반도 중부의 영토를 손에 넣은 신라는 자연히 두 나라의 타깃이 된다. 신라를 이 위기에서 구해준 것은 중국의 새로운 통일제국인 수와 당이다. 변방 정리의 일환으로 중국이 고구려를 침공함으로써 고구려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중국적 질서를 재빠르게 받아들인 신라가 한반도의 단독 정권으로 발돋움한다. 1장 역전되는 역사 밀월의 끝 지증왕과 법흥왕의 2대에 걸쳐 급속히 진행된 신라의 ‘재건국’ 과정을 보면 후발주자의 이득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고구려와 백제가 수백 년 동안 서서히 이룬 선진화 프로젝트를 신라는 불과 50년도 못되는 기간에 완수했다. 이것으로 새 나라의 하..

4장 진짜 삼국시대 기묘한 정립 장수왕(長壽王)의 백제 정벌로 이제 한반도의 서열은 분명해졌다. 고구려는 충청도 일대까지 영역을 넓혀 명실상부한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북위와 한층 돈독해진 우애를 유지했다. 북위의 효문제(孝文帝)는 고구려의 힘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개인적으로 장수왕에 대한 존경의 마음도 다소 있었던 듯하다. 서열상으로는 고구려가 북위를 받드는 처지였으나 효문제는 특히 고구려에 대한 안배에 신경을 썼다. 당시 북위의 황실에 오는 사신들의 공식 서열을 보면, 물론 강남의 제(齊, 479년 송나라가 멸망하면서 강남의 남조는 제나라로 바뀌었다. 그래서 남제라고도 부른다)나라 사신이 서열 1위였고 2위는 단연 고구려였다. 잘 나가는 고구려,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자의 ..

3장 뒤얽히는 삼국 비운의 왕 이후의 역사까지 통틀어 백제의 최전성기는 4세기 후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시대였다. 이 무렵 백제는 동쪽으로는 신라와의 해묵은 불화를 해소했고, 북쪽으로는 강국 고구려와의 실력 대결에서 승리했다. 게다가 서쪽 바다 건너로는, 비록 통일제국의 지위에서는 물러났으나 여전히 중국의 강남을 지배하고 있는 동진과 수교했고, 남쪽 바다 건너로는 일본과도 친교를 맺었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강대국의 면모다. 형세가 유리할 때 승부를 결정지어야 하는 건 바둑만이 아니다. 백제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이 전사한 것은 판을 닦을 수 있는 결정적인 찬스였다. 아마도 그랬더라면 한반도의 역사에서 삼국시대라는 말은 일찌감치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초고..

2장 깨어나는 남쪽 백제의 도약 고구려가 중국의 정세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무렵 한반도 중부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정식으로 첫 대면을 하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양측의 상견례는 영 험악한 분위기다. 고구려에서 명림답부(明臨答夫)의 쿠데타가 발생할 즈음, 그러니까 167년에 신라가 3만에 가까운 대군으로 한강 중류까지 치고 올라가는 사태가 벌어진다. 다행히 신라의 병력을 보고 겁을 먹은 백제가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 전투 상황으로까지 치닫지는 않았지만 이 사태는 장차 백제와 신라가 어떤 관계로 엮이게 될지를 말해주는 예고편인 셈이었다. 사실 두 나라가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이미 100년 전부터다. 백제의 다루왕(多婁王)과 신라의 탈해왕(脫解王) 시절이던 기원후 64년에 두 나라는 오늘날..

1장 고구려의 역할 중국발 통신 다양한 미스터리와 숱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2세기를 마칠 즈음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한반도의 왕조들은 그럭저럭 나라꼴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왕위 세습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관제를 비롯한 초보적인 제도들도 생겨났으니 이제부터는 버젓한 왕국이라 해도 별 하자는 없을 듯하다(거꾸로 말하면 그 전까지는 왕국이라고 부르기에 미비한 점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이 나라들은 서로 이리저리 얽히며 올망졸망 살아가면서 아주 조금씩 발전해 갔으리라. 하지만 세상에는 한반도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반도의 서쪽에는 이곳보다 훨씬 크고 일찍이 이곳에 문명의 빛을 전해주었던 중국 세계가 있다. 3세기부터 중국 대륙에 몰아친 격변의 회오리는 한반도 역사에 또 한 ..

왕조시대의 개막 마이너 역사 신화로 시작해서 역사를 남긴 고조선과 함께 한반도 역사의 가장 초기 시대도 끝났다. 기원전 2333년이라는 단군기원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고조선의 역사가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시대를 뭉뚱그려 고조선 시대라고 부르는 데, 어떤 면에서는 달리 이름을 지어 붙일 만한 게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고조선이 우리 역사에 남긴 흔적은 상당히 뚜렷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은 언제 있었다 사라졌나 싶을 만큼 자취가 묘연하다. 더구나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한반도 역사에 등장하는 왕조들은 고조선을 계승하지도 않았고 문명적 연속성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서 고조선은 어떤 의미일까? 그저 단군이라는 상징적인 ..

1장 신화에서 역사로 분명한 시작 역사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시조(始祖)를 둔 민족만큼 부러운 게 또 있으랴? 시조가 있으면 민족의 기원과 역사의 시작이 분명하다. 다만 그렇게 분명한 시작은 역사가들에게 의지할 만한 출발점을 주지만, 그와 더불어 커다란 숙제도 안겨준다. 출발점 자체를 해명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이전의 역사는 미궁에 빠져 버리기 때문이다.-『기원의 역사』 중에서 우리 역사는 처음이 아주 분명하다. 그 이유는 단군(檀君)이라는 민족의 시조가 있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역사를 봐도 우리 역사만큼 시조가 분명한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단군은 시조보다 국조(國祖)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물론 시조에 해당하는 존재는 흔히 있다. 그러나 다른 민족의 시조들은 거의 모두 ..

프롤로그: 한국사를 시작하면서 사람과 땅 우리의 교육 과정에는 국사(國史)라는 과목이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역사’라는 뜻이겠지만, 원래 역사에는 국적이라는 게 없다. 역사는 그저 역사일 뿐이다. 따라서 ‘국사’ 즉 ‘national history’라는 것은 없고 그냥 ‘history’만 있다. 최초의 역사가로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가 『역사』라는 책을 쓸 때부터 역사란 ‘지나간 이야기’라는 뜻일 뿐 특정한 국경을 내포하는 것은 아니었다. 영국사나 프랑스사라는 말을 쓰기는 하지만, 그 경우 영국이나 프랑스는 나라 이름이라기보다는 땅이나 지역을 가리키는 뜻에 가깝다. 영국이나 프랑스가 정식 국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와서의 일이다. 결코 보편적이지 않은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국..

책 머리에 통속적인 역사책에 싫증을 느낀 독자에게 역사라는 말을 앞에 놓고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따분하고 고리타분하다’는 부정적인 반응,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재미있는 교양 지식’이라는 긍정적인 반응. 서로 정반대 평가지만 둘 다 옳다. 역사란 옛날에 있었던 사건들을 다루는 것이니, 오늘을 바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따분하고 고리타분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역사는 철학이나 언어학과 같은 골치 아픈 인문학에 비해 그래도 쉽고 만만해 보이니, 학문 중에서는 그래도 재미있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두 가지 입장 모두 옳지 않다. 어제 없는 오늘이 없으니, 역사란 실상 오늘의 모습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사실 오늘의 일도 내일이면 ‘따분하고 고리타분한 역사..

지은이의 향기가 나는 종횡무진 시리즈가 되기를 바라며 깊으면 좁아지고 넓으면 얕아지게 마련이다. 그럼 깊으면서도 넓을 수는 없을까? 16년 전 종횡무진 시리즈를 시작할 때부터 늘 나를 괴롭혀온 질문이다. ‘종횡무진(縱橫無盡)’이라는 표제가 말해주듯이, 이 시리즈는 전문가용 학술서가 아니라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일반 독자를 위한 대중서다. 하지만 넓어지면 얕아진다는 대중서의 ‘숙명’을 피하기 위해 나는 일반 대중서에는 없는 요소들을 과감히 끌어들였다. 구어적인 서술 방식이라든가 빠른 진행은 대중서 특유의 생동감을 불어넣으려는 시도였지만, 대담한 사건 연결이나 인물 비교는 역사 교과서나 대중서에서 볼 수 없는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한 결과였다. 이렇게 두 마리 토끼를 쫓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역사를 단순한 사실의..
함흥차사(咸興差使) 심부름 간 사람이 오질 않는다 芳碩變後, 太祖棄位, 奔于咸興. 太宗屢遣中使, 問安, 太祖輒彎弓而待之, 前後相望之使, 未敢道達其情. 時問安使, 無一得還者. 太宗問: “群臣誰可遣?” 莫有應之者, 判承樞府事朴淳, 挺身請行. 『축수편(逐睡篇)』 太祖晩年, 有豐沛之戀, 禪位世子, 行北闕, 不肯回鑾. 朝廷每請奉還, 而不得請. 前後使者十輩, 皆不得還, 此所謂咸興差使也. 判承樞朴淳, 慷慨請行, 至咸興. 遙望行宮, 故以子馬繫于樹, 騎母馬而行, 馬回顧躑躅不能進. 及上謁, 淳上王布衣交也, 懽然道故款待. 仍問曰: “繫子馬于樹, 何也?” 對曰“ ”妨於行路, 故繫之, 則母子不忍相離. 雖微物, 亦至情也.” 固涕淚嗚咽, 上王亦汪然感涕. 一日與淳局戱, 適有鼠啣子, 墮屋至死, 不相捨. 淳復推局, 伏地而泣, 上王戚然,..
문체반정과 열하일기 정리 고미숙『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 2010년, 109~145쪽 1. 문체반정의 전개 1784년 - 정조, 명청 문집에 대한 회의를 시작하다 명나라와 청나라 이래의 문장은 많이 험하고 괴상하며 가시가 돋쳐 신랄함이 많아 나는 보고 싶지가 않다. 그런데 지금 사람은 명청인의 문집 보길 좋아하니, 어떠한 재미가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 어찌 또한 문장의 맛이 있으나 내가 그것을 맛볼 수가 없는 건가?明淸以來, 文章多險怪尖酸, 予不欲觀. 今人好看明淸人文集, 不知何所味也. 豈亦有味, 而予不能味之耶? -『弘齋全書』 161 1. 정조의 눈에 소품체, 소설 등의 문체가 들어가 회의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유행함. 2. ‘내가 그것을 맛볼 수가 없는 건가?’라는 말..
사화(士禍) 정리 1. 무오사화(戊午士禍)연산군 시기내용김일손이 사초(史草)에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칭찬하는 글을 남김(세조의 찬탈 비방)결과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김일손의 사림파 수십 명을 형벌에 처함. 2. 갑자사화(甲子士禍)연산군 시기내용성종 후궁으로 왕비가 된 어머니 윤씨가 모함으로 폐비가 되어 죽게 된 사실을 알게 됨.결과폐비 윤씨를 쫓아내는데 일조한 신하를 모조리 죽임. 중종반정(中宗反正)난폭해진 연산군에 훈구파도 위기감을 느껴 이복동생을 왕위에 앉힘. 3. 기묘사화(己卯士禍)중종 시기내용기를 펴지 못하는 중종도 조광조의 개혁노선(소격서 폐지, 위훈삭제, 현량과 실시)을 좋아했으나 남곤ㆍ심정 등이 역모한다고 모함함.결과조광조를 따르는 사림파를 잡아 귀양 보내거나 죽임. 조광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