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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기획주제 Ⅱ ‘한문 고전 읽기의 고전 교육 실천방안 탐색’ 발표 ‘한문 고전 읽기’ 중 유가 경전·제자서 활용에 대한 이론과 적용 모색 발표자 : 김수경(공주대) ∥ 토론자 : 공민정(세종시교육청) ‘한문 고전 읽기’ 중 유가 경전⋅제자서 활용에 대한 이론과 적용 모색 김수경(국립공주대) 목차 Ⅰ. 서론 Ⅱ. 유가 경전⋅제자서의 범위와 성격 Ⅲ. 2015개정 교과서 중 유가 경전⋅제자서의 활용 양상 Ⅳ. 유가 경전⋅제자서 글감 활용에 대한 이론적 접근 Ⅴ. 여론 Ⅰ. 서론 본 발표는 2022 개정교육과정에 따른 고등학교 진로 선택 과목 ‘한문 고전 읽기’의 교과서 편찬 과정이나 수업 운영 과정에서 유가 경전⋅제자서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교수학습 방안을 모색하는 데 주요 목적이 있다. 2022 개정..
전공 한문 논문 목차 한시 백악시단(白嶽詩壇)의 진시 연구(眞詩 硏究)(김형술)향랑고사를 수용한 한시의 의미(전경원)한국시화에 나타난 존당파(尊唐派)ㆍ존송파(尊宋派)의 평론연구(박순철)「소경에게 시집간 여자[道康瞽家婦詞]」를 읽고(임형택)현실주의의 발전과 서사한시(임형택)16~17세기 한시사 연구(이종묵)한국한시약사(민병수)당나라 시풍 문학 고문이란 무엇인가?(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한문학에 나타난 이속(俚俗)의 수용 양상(김영주)고려시대의 고문의식(김건곤)조선전기 사대부 문학(임형택)여항문학과 서민문학(임형택)이계 홍양호의 의원전에 나타난 인물 형상(진재교)인성교육의 측면에서 본 「양사룡전」의 자료적 가치(김형술)‘진아(盡我)’ 정신으로 본 「양사룡전(梁四龍傳)」의 입전의식(김형술)이기발(李起浡)의 「송경..
9. 김시습의 저술로는 어떠한 것이 있었다 김안로의 『용천담적기』 6에 보면, “매월당은 금오산에 들어가 책을 써서 석실(石室)에 넣어두고 이르길,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入金鰲山 著書藏石室 曰後世必有知岑者]”라는 기록이 있다. 남효온의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는 “매월당이 쓴 시는 수만여 편에 이르지만, 널리 퍼져 나가는 동안에 거의 흩어져 사라져 버렸고, 조신(朝臣)과 유사(儒士)들이 몰래 자기의 작품으로 삼았다”라는 기록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용장사’ 조항에서는 김시습의 저술로 『매월당시집』과 『금오신화(金鰲新話)』 이외에 『역대연기(歷代年記)』를 열거하였다. 또한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 권14에 의하면, 김시습의 작품으로 『금오신화(金鰲..
8. 『금오신화(金鰲新話)』는 후대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일본의 소설 『오토기보코(伽婢子)』에 영향을 주었다. 『오코기보코』는 아사이 료오이(淺井了意, ?~1691)가 1666년에 지은 소설집이다. 이 소설집은 일본 괴담소설을 대표하며, 총 68화의 번안물로 이루어져 있다. 아사이 료오이는 번안을 할 때에 오조소설(五朝小說)로부터 44화, 『전등신화구해(剪燈新話句解)』로부터 18화를 이용하였고, 『금오신화(金鰲新話)』로부터 2화를 이용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금오신화(金鰲新話)』에서 직접 번안한 것은 그리 많은 양이 아니다. 다만 『금오신화(金鰲新話)』와 『전등신화구해(剪燈新話句解)』를 중심으로 하는 전기소설의 세계가 이 작품에 주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다. 『금오..
7. 『금오신화(金鰲新話)』가 담고 있는 문학적ㆍ철학적 메세지는 무엇인가 『금오신화(金鰲新話)』의 문학적ㆍ철학적 가치에 대하여, 기왕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점들에 주목하여 왔다【『금오신화』에 관한 기왕의 연구 가운데 대표적인 것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임형택(林熒澤), 「현실주의적 세계관과 금오신화」, 『국문학연구』 13, 서울대학교 국문학연구회, 1971. / 이재호(李載浩), 「금오신화 고, 작자 김시습의 저항정신을 중심으로」, 『논문집』 14, 부산대학교, 1972. / 조동일(趙凍一), 「초기 소설의 성립과 초기 소설의 유형적 특징」, 『한국소설의 이론』, 지식산업사, 1977. / 정병욱(鄭丙昱), 「금오신화 서설」, 『한국고전의 재인식』, 홍성사, 1979. / 설중환(薛衆煥), 「금오신화의..
6.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창작된 배경은 무엇일까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창작된 배경과 관련하여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은 문학사적 전통이다.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서사문학의 원초 형태인 설화가 끊임없이 발생하여 전승되고 변모되었고, 신라말 고려초에는 전기소설의 요소를 갖춘 우리 소설이 발생하여, 그것이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물론 각 지역별로 설화를 정착시킨 풍토기(風土記)나 소설집이 실제로 발견되지는 않고 있으나, 이미 고려 중ㆍ후엽에는 많은 설화문학이 소설로 변모되어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수이전(殊異傳)』의 일문(逸文)이나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에 실린 일부 설화들은 소설적인 요건들을 상당히 갖추고 있다. 곧 『금오신화와 같은 완성된 형태의 소설이 출현할 문학사적 기반이 진작에 마련되어 있..
5. 『금오신화(金鰲新話)』의 다섯 이야기는 어떤 특징을 지니는가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수록된 다섯 작품이 지닌 주요한 특징은 무엇일까? 첫째, 우리 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우리 나라 사람을 등장인물로 하였으며, 시대적 배경이 현실적이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는 고려말 왜적의 침략을 배경으로 하였고,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은 고려말 홍건적의 난을 배경으로 삼았다. 이 두 작품은 외적의 침략으로 민족 구성원의 삶이 유린당한 사실을 아프게 그려 내었다. 한편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는 옛 도읍 평양을 무대로 삼아, 풍경 속에 민족사의 흐름이 스며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는 조선초에 유행한 지옥 신앙을 소재로 삼으면서, 등장인물의 대화를 통하여, 올바른 이념이 ..
4. 『금오신화(金鰲新話)』의 텍스트로는 또 어떤 것들이 있나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완성된 직후에는 비교적 널리 읽혔던 것 같다. 김안로(金安老, 1481~1537)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를 비롯한 몇몇 문헌들을 통하여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이르러 희귀본이 되고 말았다. 조광형(趙光亨)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에게 답한 서한에서,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자기 집에 있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아마 송시열도 금오신화를 읽고 싶어하였으나, 돌아다니는 판본이 희귀하였기 때문에 읽지 못하였던 것 같다. 국내에서 일찍 사라진 이 책은 오히려 일본에 전하였다. 즉 일본의 오오까(大塚) 집안에 220년 동안 보관되어 오던 것이 1653년 중춘에 곤산관도가처사(崑山..
3)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목판으로 처음 간행한 윤춘년은 어떤 인물인가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목판으로 처음 간행하였던 윤춘년은 본관이 파평(坡平)이고, 자는 언구(彦久), 호는 학음(學音)ㆍ창주(滄洲)이다. 그는 참판 윤안인(尹安仁)의 아들로, 1534년(중종 29년) 생원이 되고, 1543년(중종 38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그런데 명종 즉위년(1545)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친족인 소윤 윤원형(尹元衡)과 합세하여 대윤 일파를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1546년에 병조좌랑이 되어 윤원로(尹元老)를 제거하였으며, 윤원형의 총애를 받아 이조정랑, 장령, 교리 등을 거쳐 1553년 대사간에 발탁되었다. 2년 뒤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으나 윤원형의 서얼허통..
2)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언제, 몇 편이 지어졌는가 김시습은 경주 남산의 용장사 부근에 은둔하던 1465년(31세)부터 1470년(36세)까지 사이에 이 소설집을 엮었다. 그는 당시 자연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동시에 인간 삶의 조건을 깊이 숙고하고 있었다.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창작된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었다. 하지만 따렌 도서관 소장의 조선 목판본에 「유금오록(遊金鰲錄)」의 후지가 그대로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시습이 30대에 경주 남산에서 저술하였다는 설이 더욱 유력해졌다. 이미 권문해(權文海, 1534~1591)도 1589년에 편찬을 끝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서 “금오산은 동도(경주)에 있으니, 김동봉이 일찍이 이 산에 거주하면서 『전등신화』를 본받아 『금오신화(..
3. 판본의 문제 1) 조선시대 초기 목판본 『금오신화(金鰲新話)』가 발견되었다 『금오신화(金鰲新話)』는 그동안 주로 일본 목판본을 이용하였다. 그런데 1999년 여름에 고려대학교 중문학과 최용철(崔容澈) 교수가 중국 따렌(大連) 도서관에서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 목판본을 발견하는 쾌거를 올렸다【최용철 교수는 논문 「금오신화 조선간본의 발굴과 그 의미」(『중국소설연구회보』 39호, 1999)와 「금오신화 조선간본의 발굴과 판본에 관한 고찰」(『동아시아 전기소설의 전파와 수용』, 동방비교문학연구회 제92차 학술발표회 논문초록집, 2000)에서 이를 밝히고 있다】. 따렌 도서관의 이 책은 총 54엽에서 앞장과 뒷쪽이 떨어져 나가 52엽이 남아 있다. 판심[大黑口, 上下內向黑魚尾]의 특징과 을해자 활자의 자양(..
8) 에필로그 김시습은 숙종 25년(1699) 2월 10일에 최석정(崔錫鼎)의 발의로 증직이 되고 사제(賜祭)가 이루어졌다. 최석정은 “사인(士人) 김시습은 광묘(光廟, 세조) 때부터 입선(入禪)하여 머리 깎고 세상을 피하였다가, 중간에 환속하여 아내를 얻었으나 자손이 없습니다. 그의 문장과 절행이 우뚝하여 숭상할 만하니, 증직(贈職)시키고 사제(賜祭)해 주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김시습은 지절관 때문에 사대부의 전형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하지만 김시습은 온 세상을 흘겨보면서 산수 좋은 곳에서 휘파람 불며 거만떨고 형체 밖에서 방랑한 그런 인물이다. 이산해(李山海)가 말하였듯이, 그의 행동은 여유롭고 유쾌하여 외로운 구름이나 홀로 나는 새와 같았고, 마음속은 환하고 맑아서 얼음 든 옥병과 가을밤..
7) 김시습은 또다시 방랑의 길을 떠나는데 그러나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부인 안씨가 죽자, 의지할 곳이 없어진 김시습은 1483년 나이 49세 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방랑의 길에 나섰다. 1482년에 일어난 폐비윤씨(廢妃尹氏) 사건이, 현실세계의 결함상을 다시금 환기시킨 까닭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강릉ㆍ양양 설악 등지를 두루 여행했다. 유학의 경전과 다른 고전들을 지방 청년들에게 가르치기도 하고 시와 문장을 벗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1486년에 양양 부사로 부임한 유자한(柳自漢)은 그에게 가업을 일으키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김시습은 사양하였다. “선비는 세상과 모순되면 은퇴하여 스스로 즐기는 것이 그 본분이거늘, 어찌 남의 비웃음과 비방을 받아가며 억지로 인간 ..
6) 세간의 영욕에서 벗어나 1481년에 김시습은 제문을 지어 조부와 부친을 제사지내고, 안씨(安氏)를 새 아내로 맞았다. 이때 수천부정(秀川副正) 이정은(李貞恩)과 남효온(南孝溫)ㆍ안응세(安應世)ㆍ홍유손(洪裕孫) 등 몇 사람과 깊이 교유하였다. 그 무렵, 노사신(盧思愼)에게서 『장자』를 배운 일이 있고 뒤에 송광사 주지가 된 조우(祖雨), 즉 우송광(雨松廣)이 수락산으로 김시습을 찾아왔다. 김시습은 그에게 밥을 짓게 해놓고는 먼지를 일으켜 한 숟갈도 들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은 『월정만필(月汀漫筆)』 39에 전하는 일화다. 조우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은 박지화(朴枝華)는 “동봉은 주공과 공자를 대단찮게 여기고,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을 그르다고 여긴 적이 있다. 그런데 노사신이 그때 총애받는 정승이었..
5) 김시습이 환속하여 서울 근교에서 생활하기로 한 것은 경주 남산의 산실에서 여섯 해가 지날 무렵, 어린 성종이 등극하였다. 김시습은 새 왕이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그래서 벼슬을 살 생각으로 유교 경전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교분이 있었던 서거정(徐居正)은 달성군에 봉해져 예문 관대 제학을 하고 있었다. 김시습은 서거정에게 차나 부채를 예물로 보낸다든가, 시를 보내어 옛 정분을 다시 확인하였다. 하지만 서거정은 그를 기이한 승려로 보았을 뿐이다. 사실 현실은 결코 이상적 가치가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세조의 찬탈을 도왔던 훈구파는 그들의 세력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김시습은 서울 동쪽 수락산에 폭천정사(瀑泉精舍)를 짓고 은둔하였다..
4) 김시습은 금오산에 정착하고는 김시습은 29세에 호남 지방을 두루 보고 나서, 서울로 책을 사러 갔다. 이때 세조는 『연화경(蓮花經)』을 언해(諺解)하려 하였다. 김시습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추천으로 열흘 동안 내불당(內佛堂)에서 역경(譯經) 사업을 돕게 된다. 1463년 가을의 일이다. 31세 때인 1465년 봄에, 김시습은 경주로 내려가 남산의 용장사(茸長寺) 부근에 산실(山室)을 짓고 칩거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3월 그믐에 효령대군이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가할 것을 종용하였다. 김시습은 잠시 망설였으나, “좋은 모임은 늘 있는 것이 아니고 번창하는 세대는 만나기 쉬운 것이 아니다. 달려가 치하하고 곧 돌아와 여생을 마치리라” 하고서, 날짜를 다투어 상경하였다. 원각사 모임의 찬시(讚詩)도..
3) 김시습이 방랑하게 된 것은 1453년 11월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김종서(金宗瑞)ㆍ황보인(皇甫仁)을 죽이고 안평대군 용(瑢) 부자를 강화도에 압송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당시 김시습은 안신(安信)ㆍ지달가(池達河)ㆍ정유의(鄭有義)ㆍ장강(張綱)ㆍ정사주(鄭師周) 등과 함께 과거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는 1450년(세종 32년), 17세 때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였던 듯하다. 그뒤 유음자손으로서 성균관에 입학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김시습은 그러나 회시에 합격하지 못한 듯하다. 그뒤 1453년(단종 원년) 봄의 증광시에 응시하였지만 낙방한 듯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시습은 현실정치의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삼년 뒤 1455년 윤6월 1..
2) 김시습의 어릴 적은 김시습은 자(字)가 열경(悅卿)이고, 호는 청한자(淸寒子)와 매월당(梅月堂), 동봉산인(東峯山人) 등을 사용하였다. 근본은 명주(溟州) 즉 강릉의 오래된 가문이라고 한다. 그 집안은 일찍부터 많은 명공과 문장 석학을 배출하여 왔다. 증조 김구주(金久柱)는 고려 때 안주목사를 지냈다. 조부는 겸간(謙侃), 혹은 윤간(尹侃)이라고 하며, 오위부장(五衛部將)을 지냈다. 부친 일성(日省)은 음직으로 충순위(忠順衛)에 봉해졌으나 병약하여 취임하지는 않았다. 김시습의 가까운 시기의 직계는 무반(武班)의 직을 받았으나, 그렇다고 그 집안이 무계였다고 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 충순위는 1445년 7월에 유음자손(有蔭子孫)을 위하여 특별히 설치된 병종(兵種)으로, 가자(加資)되는 기간이 매우 짧..
2. 김시습 1) 김시습의 삶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김시습의 생애에 대하여는 김시습 자신이 쓴 「양양부사 유자한(柳自漢)에게 속내를 토로한 서한[上柳襄陽自漢陳情書]」과 윤춘년(尹春年, 1514~1567)의 「매월당선생전(梅月堂先生傳)」, 이자(李耔, 1480~1533)의 「매월당집서(梅月堂集序)」, 이산해(李山海, 1538~1609)의 「매월당집서(梅月堂集序)」, 이이(李珥)의 「김시습전(金時習傳)」 등을 통하여 개괄할 수 있다. 윤춘년의 「매월당선생전(梅月堂先生傳)」은 조선 목판본 『금오신화(金鰲新話)』의 권두에 실려 있고, 또 활자본 『매월당집』의 권두에도 실려 있다. 윤춘년의 문집인 필사본 『학음고(學音稿)』에는 「매월당서(梅月堂序)』라는 제목으로 들어 있다. 이이의 「김시습전..
1. 『금오신화』란?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조선 전기의 천재 문인이자, 사상가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창작한 단편소설집이다. 김시습은 현실 상황을 우울하게 응시하고 인간 존재의 문제와 결함(缺陷) 세계의 본질을 소설구조로 형상화하였다. 모두 5편이 현재 전하는데 인간과 귀신의 만남 남염부주[저승세계]와 용궁으로의 여행을 소재로 인간 삶의 문제를 다룬 전기소설(傳說小說)【전기소설(傳奇小說)이란 중국 당나라 때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소설의 한 양식이다. 당 나라 때 문인들은 온권(溫卷)을 만들어 문장력을 과시하고 출세의 기회를 잡으려고 하였는데, 문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기소설을 창작하는 예도 많았다. 배형(裵刑)은 기문(奇聞)을 모아 『전기(傳奇)』 3권을 엮었다. 명(明)·청(淸) 때에는 ..
4. 맺음말 지금까지 『금오신화(金鰲新話)』의 문학적 위상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근년에 와서는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소설문학(小說文學)의 효시로 보아 온 학설에 이의를 제가한 논문도 여러 편 학계에 보고된 바 있다. 『수이전(殊異傳)』나 『삼국유사(三國遺事)』 유편들 가운데서 이미 전기소설(傳奇小說)의 싹을 보기도 한다. 그러나 진술한 바와 같이 조선의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출현하기까지의 제반 여건들은 매월당(梅月堂)시대를 여는 예비 과정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르면, 역시 본격적 전기작품(傳奇作品)으로서의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위상을 원상회복할 수밖에 없다. 『금오신화(金鰲新話)』가 『금오신화(剪燈新話)』의 영향을 입었다고 볼 때 그 시간적 격차가 40여년 밖에 되지 않는다【瞿..
5.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용궁부연록, 몽유록 방식으로 하고 싶은 말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는 한생(韓生)의 용궁체험을 담고 있다. 이 작품(作品)에서는 바다 속의 용궁이 아니고 송도(宋都, 開城) 천마산(天磨山)의 용추(龍湫) 박연(朴淵)이 용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어느 날 한생(韓生)은 천상에서 내려온 청삼(靑衫) 복두(幞頭)의 종자를 따라 날개 달린 준마(駿馬)를 타고 하늘을 날아 용궁에 다다른다. 함인지문(含仁之門)을 지나 용궁에 이르니 용왕이 반겨 맞이하고 함께 초대한 조강신(祖江神)ㆍ낙하신(洛河神)ㆍ벽란신(碧瀾神)과 더불어 자리를 같이 하게 된다. 용왕은 자신의 무남독녀가 화촉동방(花燭洞房)을 꾸밀 별당을 지어 가회각(佳會閣)으로 이름하고 상량문(上樑文)을 지어 바치게 하기 위해 문사(..
4.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남염부주지는 김시습의 사상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 가운데서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는 매월당(梅月堂)의 사상을 압축하고 있는 대표적 사상소설(思想小說)이다. 작자 자신의 철학적 온오(蘊奧)를 설명하기 위하여 서정성을 제거하였으며, 따라서 여타 작품(作品)에서 볼 수 있는 시적 문체를 거세(去勢)하였다. 박생(朴生)과 염라왕(閻羅王)과의 대화를 통하여 박생(朴生), 즉 매월당(梅月堂)이 평소 생각하던 철리와 현실에 대한 자신의 사회관을 낱낱이 피력하고 있다. 자유로운 논술을 펴기 위하여 그는 몽유(夢遊)의 형태를 빌려와 염부주(閻浮洲)라는 한 가상의 공간을 설정해 두고 그곳을 탐방하여 염라왕(閻羅王)을 만나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염라와의 문답으로 자신..
3.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취유부벽정기란 몽유소설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는 홍생(洪生)과 기씨녀(箕氏女)의 만남을 작품화(作品化)하고 있다. 개성(開城)의 홍생(洪生)은 팔월 한가위날을 맞아 동무들과 평양 저자에 피륙과 면사를 싣고 와 대동강가에 배를 대어 놓고 그곳 기생들과 수작하게 된다. 마침 성중의 친구 이생(李生)을 만나 잔치를 벌이고 배를 불러 달빛을 싣고 부벽정(浮碧亭) 밑에 이르러 배를 매어두고 부벽루(浮碧樓)에 올라 고국의 흥망을 탄식하며 회고의 시를 읊는다. 그러자 문득 한 여인이 나타나 홍생(洪生)이 시를 듣고 자신도 시를 써 화답(和答)하였다. 그녀는 은왕실(殷王室)의 후손인 기씨(箕氏)의 딸인데 선고(先考)가 필부(匹夫)의 손에 패하여 나라를 잃고 위만(衛滿)이 그 틈을..
2.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이생규장전, 구조적 측면의 의미 송도(宋都)의 이생(李生)은 국학에 가던 도중 최가의 담장 안을 엿보다가 아름다운 최낭자(崔娘子)를 보고 마음이 끌리게 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곧 꽃다운 인연을 맺지만, 이를 눈치 챈 이생(李生)의 아버지는 그를 멀리 울주농장(蔚州農場)으로 쫓아버리고, 이를 상심한 최낭자(崔娘子)는 그를 사모하여 몸져눕게 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그녀의 부모는 곧 매자(媒者)를 이가에 보내어 이 사실을 알리고, 드디어 양인은 결혼하여 끊겼던 사랑을 다시 잇게 된다. 그러나 그 뒤 홍건적의 난을 만나 이생(李生)은 겨우 목숨을 구하였으나, 최낭자(崔娘子)는 끝내 정조를 지키려다 피살되고 만다. 난 후 이생(李生)은 죽은 최낭자(崔娘子)의 환신(..
3. 작품별 분석 1.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만복사저포기의 의미 탐구 남원의 노총각 양생(梁生)은 어느 날 만복사(萬福寺)를 찾아가 부처님과 함께 저포(摴蒲)놀이를 하여 이긴 대가로 아름다운 한 여인을 배필로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그 여인은 왜란에 의해 죽은 처녀의 환신(幻身)이었다. 이튿날 양생(梁生)은 그녀의 권유에 따라 여인이 살고 있다는 마을로 따라가 거기서 사흘 밤을 머물게 되는데 그곳은 무덤 안이었다. 다음 날은 여인의 대상날로 양생(梁生)은 헤어짐에 앞서 그녀에게서 은주발 하나를 선물로 받게 되는데, 이것이 증거물이 되어 그들은 보련사(寶蓮寺)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러나 재(齋)가 끝나자 여인은 양생(梁生)과의 인연이 다하였음을 말하고 마침내 혼자서 훌훌 저승으로 떠나 버렸다. 양..
2.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과 『금오신화(金鰲新話)』 김시습(金時習)에 대한 긍부정의 평가(評價) 김시습(金時習)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같이 공존하고 있다. 허균(許筠)의 물음에 답한 이퇴계(李退溪, 1501~1570)의 주장에서 다음과 같이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매월당(梅月堂)이 일종의 이인(異人)으로 색은행괴(索隱行怪)한 무리에 가까운데 마침 그러한 때를 만나 고절(高節)을 이루었을 뿐이며, 「여유양양서(與柳襄陽書)」나 『금오신화(金鰲新話)』 등을 보면 아마도 고견원식(高見遠識)함을 허여할 순 없다. 梅月, 別是一種異人, 近於索隱行怪之徒, 而所値之世適然, 遂成其高節耳. 觀其『與柳襄陽書』, 『금오신화(金鰲新話)』之類, 恐不可太以高見遠識許之也(答許美叔問目, 退溪集..
『금오신화(金鰲新話)』의 문학사적(文學史的) 위상(位相) 1. 머리말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지금까지 작가론적(作家論的) 측면(側面), 작품론적(作品論的) 측면(側面), 비교문학적(比較文學的) 측면(側面)에서 많이 연구(硏究)되어 왔다. 작가론은 그의 생애와 사상을 추적하는 연구(硏究)가 중심이 되었으며, 연구(硏究) 분량이 가장 많은 작품론(作品論)은 작가와 작품(作品)의 상관성, 작품(作品)의 구조분석, 사상성 내지 우의성(寓意性), 근래에는 성리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기까지 다양한 연구(硏究)성과가 집적되어 왔다. 비교문학적(比較文學的) 논문은 그리 많지는 않으나 주로 『금오신화(剪燈新話)』ㆍ가비자(伽婢子)와의 관계를 다룬 논문들【근래 東方比較文..
4. 의의와 결론 이상으로 「의승기」의 창작 배경과 주제 의식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본문에서 「의승기」의 창작 배경인 17세기 중반의 사회 분위기와 문단의 경향을 살피고, 창계의 생애와 학문에서 작품과 관련이 있는 부분을 파악한 후, 작품 속의 공간 설정과 인물들의 형상화, 그리고 제목의 의미 등을 통해 주제의식을 드러낸 면모를 연관하여 살필 수 있었다. 창계의 생애를 통해 의승기를 읽어야 한다 이를 통해 「의승기」는 지상에 국한한 공간을 설정하여 천군 또한 지상의 존재로서 처음에 덕을 지닌 점만이 소개되었다가 도적의 침입을 겪고 나서야 성성옹의 도움을 받으며 호(號)와 역수(曆數) 등을 정하는 것으로 나오는 점이 전대 천군소설들과 다른 점임을 밝혔다. 천군이 즉위한 지 3년이 지나 도적이 나타나나, ..
2) 인물 형상을 통한 경(敬)과 의(義)의 조화 추구 경(敬)을 대변하는 성성옹 「의승기」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는 맹호연의 묘사가 가장 많고, 성성옹의 묘사는 그에 비하면 소략하다. 먼저 성성옹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겠다. 성성옹은 처음 도적을 없애고 천군을 다시 왕위에 올리는 인물로서 등장한다. 마침 한 사람이 스스로 성성옹(惺惺翁)이라 하며 나라의 도적을 제거하고 임금을 불러 돌아와 대위(大位)에 다시 나아가게 하니, 마치 항량이 초왕을 얻은 고사와 같이 구하여 얻었다. 왕의 이름이 또 초왕과 같아 마침내 의제(義帝)라 호하고 화덕(火德)으로 임금노릇하며 하나라의 역수(曆數)를 썼다. 適有一人自稱惺惺翁, 稍除國賊, 喚君而歸, 復卽于大位, 以其求而得之, 如項梁得楚王故事, 王之名又與楚王同, 遂號義帝, ..
3. 주제 의식 1) 매우 간단한 천군 묘사 「의승기」는 천군(天君)이 즉위한 지 3년이 지나면서 덕이 쇠해 盜賊이 침입하자 천군이 황야로 피해 10년간 방황하다 성성옹에 의해 다시 왕위에 오르고 맹호연을 뽑아 도적을 퇴치하는 일련의 사건들로 전개된다. 그런데 「의승기」에는 천상의 공간이 작품 속에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으며, 의식상에서도 전혀 설정되어 있지 않다. 천군은 처음부터 천상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지상에서 가장 이상적이었던 시대인 요순임금이 계셨던 영대(靈臺)에서 어거하며, 태평세월을 구현하다 도적의 침입을 받고 방황하다 맹호연의 도움으로 도적을 퇴치하고 성성옹의 간언을 받아들여 남은 도적까지 교화시키는데, 그 후에도 천상으로 돌아갔다는 언급이 없는 것이다. 소략한 천군에 대한 묘사 천군이 ..
2) 창계의 생애와 문학 성향 창계의 가계와 영향 창계 임영은 나주를 본관으로 하고, 1649년 서울 외가에서 출생하여, 17세에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 1628~1669)에게 수학하기 시작한 후,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1631~1695),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과 평생을 가까운 사이로 보냈고, 졸수재(拙修齋) 조성기(趙聖期, 1638~1689),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 등과 교유하였다. 창계의 선대에는 비록 직계는 아니지만 임제(林悌, 1549~1587)와 같은 유명한 문인이 있고, 외가에는 외증조부 조희일과 그 동생인 조희진의 손자 조성기와 같은 뛰어난 인물이 있었다【이종범, 「滄溪 林泳의 學問과 政論」, 『韓國人物史硏究』 제9호, 한..
2. 「의승기」 창작의 배경 1) 17세기 중반의 사회ㆍ문화적 배경 병자호란이 미친 지식인의 은둔 창계가 태어나기 전 조선 사회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병자호란이었다. 특히 병자호란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년) 인조가 청에 항복한 일은 당시 문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어서 그들의 출사(出仕)에도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으로 윤휴(1617~1680), 유형원(1622~1673), 윤증(1629~1714) 등이 그러한 삶을 보여주었다【이경구, 『17세기 조선지식인 지도』, 푸른 역사, 2009, pp.134~135; pp.160~162.】. 자신의 신념에 따라 출사거부를 선택하는 것이 당대 사회에 대한 문인들의 현실 대응 방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는 병자호란뿐만 아니라 붕당의 세력 형성 ..
「의승기(義勝記)」의 주제 의식 고찰 이 연 순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사 국문초록 본고는 창계(滄溪) 임영(林泳, 1649~1696)의 작품 「의승기」에 드러난 주제의식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먼저 「의승기」의 창작 배경으로 17세기 중반 사회와 문화, 그리고 창계의 생애와 학문에 대해 살피고, 「의승기」의 주제의식에 대해 두 가지 점을 밝혔다. 「의승기」가 창작된 17세기 중반 조선 사회에서는 병자호란을 겪은 사대부들이 벼슬을 거부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문단에서는 산문이 유행하며 문학의 향유층이 확대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시대에 창계는 어려서 누이들에게 언문 소설을 듣고, 조부께 궁리수심(窮理修心)의 학문에 힘쓸 것을 가학(家學)으로 전수받으며 「의승기」 창작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었..
4. 결론 이상에서 16세기 강서시풍(江西詩風)이 문단의 중심에 서 있다가, 후반부터 강서시풍이 당풍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살피고, 17세기 초반 다시 당풍 중에서도 명 의고파의 영향으로 의고성이 강해졌다가 이에 대한 반발로 조선적인 당풍과 새로운 기풍의 송시가 등장하게 되는 한시사의 변화 양상을 고찰하였다. 이어 17세기 후반 의고풍을 반대하고 조선의 현실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시풍이 개진되어 18세기 새로운 시풍의 선성이 되고 있는 양상을 살폈다. 본고에서는 시풍의 변화 양상을 중심에 두고 논하였기에 특히 17세기의 시단의 활동적인 면모는 고찰하지 못하였다. 특히 인왕산 아래의 침류대, 청풍계, 백운동, 삼청동, 필운대 등지나 한강 일대에서 벌어진 시회의 멋진 풍류와 같은 문학 활동에 대한 연구는 훗날..
8) 17세기 후반 조선적 당풍의 대두 송풍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등장한 복고풍 주자의 존숭이 생활되면서 큰 유행이 되었던 구곡가 계열이나 그 밖의 연작시 중 상당수가 주자학의 내재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거니와, 이 같은 근체시 자체가 성정(性情)을 자연스럽게 유로(流露)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을 들어, 고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도 17세기 후반 시단의 한 경향이었다. 물론 만당을 극복하고자 한 복고풍의 시인들에 의하여 가행체나 악부 등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과 또 다른 양상에서 『시경(詩經)』과 『문선(文選)』이 주자학적 문인들에 의하여 숭상된 것이다. 학자풍의 문인들은 17세기에 온유돈후(溫柔敦厚)의 시교를 다시 강조하게 되는데 이때 전범이 되는 시가 바로 『시경(詩經)』과 『문선(文選)』이었..
7) 17세기 말에 다시 등장한 송시 당시의 무개성에 다시 대두된 송시 이러한 주장은 앞서 본 대로, 이식(李植), 장유(張維) 등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거니와, 당시에 대한 일방적인 추종을 거부하는 흐름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에는 점차 한나라와 당나라의 시를 부화하게 본뜨는 명시에 싫증을 느끼고 송시를 표창하는 분위기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비평에서도 이러한 주장이 점차 강해지고 시단의 풍상도 점차 송시를 배우는 이들이 많아졌다. 당시를 모범으로 생각했던 홍만종(洪萬鍾)조차 『시평보유』(하)에서 세상에 당시를 하는 사람들은 송시가 비루하여 배울 만하지 못하다고 하고 송시를 배우는 사람들은 당시가 위약하여 배울 필요가 없다고 배척하는 풍조를 비판한 바 있거니와, 실..
6) 17세기 후반에 등장한 의고주의 비판 김창협의 의고주의 비판 장유(張維)와 이식(李植)에 이어 17세기 후반 무렵 본격적인 의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강서시(江西詩)나 의고주의에 대한 비판의 공통점은 眞에 있거니와 이러한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은 17세기 말엽 김창협(金昌協)과 김창흡(金昌翕)에 이르러 논리화된다. 김창협(1561-1708)은 진시(眞詩)를 주장하면서 자연(自然)과 천기(天機)를 거듭하여 강조하였다. 김창협(金昌協)은 이반룡이 당나라 이후의 시어를 쓰지 못하게 한 것을 비웃었다. 그는 이반룡이 옛것을 배운다면서 언어의 모방만 하여 당시를 배우고자 하면서도 당시의 시어만을 썼으니, 당 이후의 것으로 용사를 하면 그 말이 당시와 같지 않을까 금제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이러..
5) 17세기 다양한 시풍을 추구하라 장유, 17세기 초부터 다양한 시풍의 수용 주장 17세기 한시사는 복고풍의 시대다. 비평에서도 17세기 후반까지 당시풍을 존숭하는 일련의 시화가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들 비평서들은 대부분 실제 비평을 중심으로 한 것이며, 작품의 우수성은 당시에 얼마나 핍진(逼眞)한가가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시사의 중심적인 흐름 이면에 18세기 새로운 시학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17세기 초반부터 싹트고 있었다. 명나라 복고파가 수용되기 시작하는 17세기 초반 장유(1587~1638), 이식(1584~1647) 등은 복고풍을 비판하고 다양한 시풍을 개성에 맞게 수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장유는 당시 문단의 폐해가 명시를 배우는 데서 발생하였다면서, 명나라 시문이 애초에 나쁜 것은..
4) 명 복고파의 유행: 시경체 한시나 고악부체의 유행 한위(漢魏)의 시를 본뜨다 이러한 고시의 관심은 명 복고파의 시가 수입되면서 더욱 강도를 더하였다. 명 복고파(復古派)는 시경체(詩經體)의 한시나 고악부체를 크게 선호하였는데 명 복고파를 배운 우리나라의 시인들 역시 고시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이의현은 전대 김종직(金宗直), 이행(李荇), 박은(朴誾), 박상(朴祥), 노수신(盧守愼), 정사룡(鄭士龍), 황정욱(黃廷彧) 등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고시선체(古詩選體)에서 그들이 남긴 것이 없는데 이는 한위(漢魏)의 시를 읽지 못했기 때문이라 하고, 신흠(申欽)과 정두경(鄭斗卿)이 비로소 한위(漢魏)의 시를 받들어, 본뜬 작품을 내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명(明) 복고파의 시를 배운 시인들로는 ..
3) 기세를 높이기 위해 복고풍을 차용하다 지명과 인명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복고파의 방법 명 복고파의 시를 수용한 것도, 시의 기세를 높게 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였다. 명 복고파들은 두보의 웅장한 시를 흉내내어 기세를 강하게 하려 하였는데, 그때 가장 손쉬운 방안이 인명과 지명을 시어로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것이었다. 성당의 시인들이 지명의 구사를 즐겨하여 시의 기상을 높였는데, 명 의고파들이 성당의 시를 배울 때 이를 첩경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른바 “여지지지(輿地之志)”, 혹은 “점귀지부(點鬼之簿)”가 이러한 시풍의 단적인 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명대의 복고파(復古派)를 배운 시인들은 고유명사를 적극 구사하고 있다. 17세기 한시에는 지명과 인명을 구사하는 것이 큰 유행이 되었다. 17세기 시에는 한..
2) 만당풍을 극복하기 위해 두보와 한유의 시를 배우다 시의 기세를 올리기 위해 두보를 존숭하다 삼당시인이 일시를 풍미할 때 동시에 그들의 시가 갖고 있는 위와 같은 약점에 대한 인식도 보편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권필(權韠)은 삼당시인의 한계가 약한 기세에 있다고 생각하여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고, 정두경(鄭斗卿)은, 기가 쇠약하여 떨치지 못한 한계를 극복하였다고 평가된다【최석정, 「동명집서(東溟集序)」, 『동명집』】. 특히 명 복고파(復古派)가 수용된 이후에는 김득신(金得臣)이 「평호소지석시설(評湖蘇芝石詩說)」에서 “근래 학사대부의 무리가 모두 명나라의 시를 본받아서 권필의 시를 가지고 원기가 시들었다고들 생각한다.”고 증언한 것처럼, 권필의 시조차 기세가 약하다는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그만큼 17세..
3. 16세기말~17세기 복고풍과 그 반발 1) 삼당시인의 한계 개성이 사라지다 소단(騷壇)의 풍상을 당시로 옮겨 놓은 공을 인정받은 삼당시인이지만, 그 한계 또한 지적되었다. 삼당시인은 만당을 배웠다는 것으로 주로 비판되었다. 부분적으로 최경창(崔慶昌)이 초당이나 중당, 혹은 성당의 풍격이 있다고 한 바 있지만【余嘗聞諸先輩, ‘我東之詩, 唯崔孤竹終始學唐, 不落宋格,’ 信哉! 『소화시평(小華詩評)』 상권 107번】, 전체적으로는 만당의 기습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비평가들에 의하여 만당의 증거로 들고 있는 것은 기력의 부족이며, 특히 맹교(孟郊)와 가도(賈島)에 비교되었다【『학산초담(鶴山樵談)』 2b】. 그들의 시에 빈번히 나타나는 곤궁과 비애의 주제가 이러한 비판을 낳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것을..
3) 삼당시인, 강서시풍 넘어서기 절구로 당시의 언어를 그대로 가져다 쓴 당시풍 그러나 16세기 말 당시를 추구하였던 인물들은 전대의 대가인 호소지(湖蘇芝)를 극복의 대상으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정통의 당풍을 구사하려 하였을 것이다. 이들의 목표는 송시(강서시)가 혼효되지 않은 순수한 당시를 쓰고자 하였고, 구체적으로는 그들의 시가 당시와 비슷하게 보이도록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호소지(湖蘇芝)로 대표되는 송시(강서시)와 다르게 시를 쓰기 위하여, 삼당시인을 위시한 당풍을 추구한 시인들은 율시보다 절구를 선호하였다. 송시, 특히 강서시는 시의 작법을 중시한다. 이 땅에 강서시가 널리 유포되게 된 것은, 강서시파가 천재적 재능이 아니라 학습에 의하여 좋은 시를 쓸..
2) 송시에서 당시로의 전환, 그리고 강서시파의 영향력 16세기에 일어난 당시풍 추숭 16세기는 송풍, 특히 강서시풍이 문단이 주류를 형성하였지만, 그런 속에서도 당시풍을 추숭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16세기 전반 이주(李冑), 유호인(兪好仁), 신종호(申從濩), 신광한(申光漢) 등이 당시(唐詩)의 명맥을 이었다. 호소지(湖蘇芝)가 시대를 앞뒤로 하면서 활약하던 16세기 중반부터 박순(朴淳),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이순인(李純仁), 이달(李達) 등 걸출한 시인이 등장하여 당시풍을 이끌면서 소단(騷壇)의 중심을 서서히 당시(唐詩)로 옮겨 놓게 된다. 송시에서 당시로의 전환엔 강서시파의 영향이 있다 그런데 16세기 후반 당시풍으로 시단의 움직임이 옮아갈 때, 강서시(江西詩)를 배운 시인..
2. 16세기의 강서시풍(江西詩風)과 당풍(唐風) 1) 송풍(강서시풍)의 전개 양상 소식의 송시풍이 고려~15세기까지 맹위를 떨치다 우리나라 한시는 고려 중기 소식(蘇軾)을 중심으로 한 송시(宋詩)가 수용된 이래, 16세기에 이르기까지 가장 주도적인 흐름을 장식하였다. 송시풍이라 하더라도 그 중심이 특히 소식(蘇軾)에 있었는데, 조선이 건국되고 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든 15세기 무렵에는 소식 일색에서 벗어나 다양한 송시를 접하게 된다. 15세기 중반 문단의 중심에 있던 안평대군은 『팔가시선(八家詩選)』을 엮으면서 이백(李白)ㆍ두보(杜甫)ㆍ위응물(韋應物)ㆍ유종원(柳宗元)ㆍ구양수(歐陽脩)ㆍ왕안석(王安石)ㆍ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의 시를 선발하였고, 또 황정견의 시집인 『산곡정수(山谷精髓)』를 엮었으며, 매..
16~17세기 한시 문학의 양상 이종묵(정문연) 1. 서론 정두경(鄭斗卿)은 송시풍(宋詩風)이 주류를 이루다가 16세기 중반부터 당시풍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진단한 바 있으며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西浦漫筆)』(619면)에서 선초(鮮初)에 오로지 소식(蘇軾)의 시를 숭상하다가 16세기에 강서시풍(江西詩風)이 문단의 중심을 이루었으며, 16세기 말엽 점차 당풍(唐風)으로 변화하고, 다시 17세기부터 명 복고파(復古派)의 영향권에 들게 되는 조선 문단의 추이를 밝힌 바 있다. 이러한 거시적인 흐름을 적시한 비평을 바탕으로 하여, 최근 몇 편의 우수한 논문이 보고되면서 16~17세기 문단의 풍상을 더욱 자세한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시사(詩史)의 본령 시풍은 유행처럼 끊임없이 변화한다. 앞선 시기에 ..
4. 결론 지금까지 향랑고사를 수용한 한시가 당대의 가족제도와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논의한 내용을 요약하여 결론으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열(烈)’ 이념을 강조함으로써 당시의 가족제도를 더욱 공고히 하고자 했던 의도를 지닌 작가로 이광정을 예로 들 수 있는데, 그는 향랑의 죽음을, 여성에게 부과되었던 유교적 이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열(烈)’ 이념으로 수용하여 해석함으로써, 그 죽음을 칭양․칭송하면서 유교적 교화의 수단으로 삼고자 했던 경우를 들 수 있다. 둘째는 향랑고사의 비극성을 강조하면서도 당시 혼인제도 아래에서 향랑의 ‘개가(改嫁)’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그다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은근히 제3자의 발화를..
4. 질곡된 가족제도 비판 앞에서는 한 여인의 삶을 비극적으로 이끌어간 원인을 ‘인정(人情)’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각박한 인정세태를 고발하고 있었던 신유한과 이덕무의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향랑고사를 수용하여 형상화함에 문제의 원인을 ‘인정(人情)’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제도(制度)’에 주목하여, 당시의 질곡된 가족제도를 인식하고 이를 비판하고 있는 이학규와 이안중의 작품을 대상으로 그들의 문제의식을 고찰하기로 하겠다. 山有花上江隖 산유화는 강 언덕 위에 있고 砥柱碑下江渚 지주비 아래로는 강 물가라네 愁愔愔采薪女 시름겨운 소리로 나무하는 아낙의 長傷嗟向誰語 길고 슬픈 탄식은 누굴 향해 말하는가 還歸家見猶父 친정에 돌아와 아버지를 뵈었지만 噫不諒以威缺 슬프다! 위엄 없어 살펴주시지 못하..
3. 각박한 인정세태 고발 앞에서는 유교적 이념인 ‘열(烈)’을 교화의 목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의도에서 형상화한 이광정의 「향랑요(香娘謠)」와 향랑의 비극적인 죽음을 낭만적인 태도로 재구성하면서, ‘개가(改嫁)’를 옹호하고자 한 최성대의 「산유화여가(山有花女歌)」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신유한, 이덕무 등은 또 이러한 경향과는 달리 기본적인 서사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당대의 각박한 인정세태를 고발하는 정도의 현실인식을 드러낸다. 그럼으로써 향랑고사를 통한 가족제도에 대한 인식에서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는 데에 도달하고 있다. 물론 그같은 인식 경향은 아직 미미(微微)하여 새롭고 보편화된 제도로의 확립까지는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나름대로 인정세태의 그릇됨 등을 시적 화자의 발화 행위를 빌어 지적하..
2. 개가(改嫁)의 불가피성 옹호 최성대의 「산유화여가(山有花女歌)」는 앞에서 살펴보았던 이광정의 경우와는 다른 시각에서 향랑 사건을 형상화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이광정이 한시를 통해 가족제도를 인식하고 형상화한 방식은 ‘열(烈)’이라는 개념을 강조함으로써 유교적 이념 구현을 목표로 삼았던 반면에 최성대는 110 행으로 구성된 장편 서사한시를 통해 향랑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사건을 바탕으로 삼았으되, 낭만적인 상상력을 기초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으며, 개가(改嫁)를 긍정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 같은 점이 다른 여타의 작품들과 구분될 수 있는 특징이다. 阿叔語香娘 阿女勿悲啼 삼촌이 향랑에게 말하기를 “얘야, 슬피 울지 말거라 濛濛黃臺葛 亦蔓黃臺西 저 수북한 언덕의 칡들도 덩굴져 언덕 서쪽으로도..
3. 향랑고사 수용 한시와 가족제도 1. 유교적 ‘열(烈)’이념의 강조 앞장에서는 향랑의 사건을 기초로 향랑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무엇이었는지 하는 점을 가족제도와 관련하여 제도적 차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향랑 사건을 토대로 형상화된 한시 작품들에서 가족제도에 대해 어떠한 수용방식과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겠다. 향랑사건이 있던 당시 선산 부사였던 조귀상이 향랑의 전(傳)을 입전한 이후로 많은 사대부들에 의해 향랑 고사가 한시의 중요한 소재로 부각되었다. 그 가운데 조귀상이 남긴 전(傳)을 중심으로 한시를 창작하되 작가별로 작품 내에서 가족제도에 대해 반응하는 태도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광정의 「향랑요(香娘謠)」는 장편 서사한시로서 전체 148행으로 이..
2. 향랑의 죽음과 가족 제도 향랑의 죽음을 제도적 측면에서 검토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향랑이 어떤 과정을 통해 자결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하는 점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1702년에 일어난 향랑의 사건을 최초로 기록한 사람은 당시 선산의 부사로 있었던 조귀상(趙龜祥)에 의해서였다. 그는 선산의 부사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약정(約正)’이란 직함을 지닌 사람으로부터 향랑의 사건을 보고 받게 되어 이를 방백(方伯)에게 보고하고 방백은 다시 조정에 상계(上啓)하였으나 아무런 조치가 없자 조귀상은 그 사실이 훗날 잊혀질까 걱정되어 이듬해인 1703년 5월에 판각(板刻)본을 내기에 이른다. 그 기록에는 향랑의 죽음에 대한 과정이 사실에 입각하여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기에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 ..
향랑(香娘)고사를 수용한 한시(漢詩)의 의미 전경원(전통문화연구회 상임연구위원, 건국대 강사) 1. 서론 사회는 언제나 규범과 욕망 사이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조화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끊임없이 만들어간다. 욕망과 규범에는 자연(自然)과 인위(人爲)의 법칙이 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준거들이 지향해야 할 당위는 대동(大同)과 상생(相生)의 원리이다. 따라서 우리는 늘 욕망과 규범 사이에서 힘겹게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고단한 현실 가운데서도 규범과 욕망이 과연 우리의 삶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지에 대하여 성찰해야 하는 현실 앞에 서 있다.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 놓은 많은 규범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스스로가 만든 규범에 의해 우리의 인간다운 삶이 파괴되거나 질곡될 수도 ..
4. 결론 한국시화에 기록된 중국문인과 시에 관련된 내용은 양과 질적인 면에서 대단한 수준이다. 한국시화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중국시와 관련된 총론, 시론, 풍격, 시의, 자구의 오류 등 다양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한국시화에는 거의 동시대의 중국의 유명 시화의 내용을 직접 인용하고 혹은 중국문인의 시나 시구를 들어 비평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한국의 문인들이 중국시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시의 주석에 대하여 그 정오(正誤)를 논할 만큼 시 해석에 있어서 대단히 정확하고 치밀하였다. 본 논문은 한국시화의 내용 중에서 당시와 송시에 대한 평론을 중심으로 존당과 존송의 내용과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이백, 두보와 소식, 황정견에 대한 평..
2. 존송파(尊宋派)의 이백(李白), 두보(杜甫),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평론(評論) 1. 이인로와 권응인의 존송파(尊宋派)에 대한 평론(評論) 조선 전기의 학자 조신(曹伸, 1450~1521?)이 쓴 『소문쇄록(謏聞瑣錄)』에는 (李定이) “하루는 궁중의 잔치에서 술에 매우 취하여 임금 앞에 나아가 ‘소식과 왕안석 중에 누가 더 낫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대답을 하지 않고 다만 ‘아직 잘 모르겠다.’라고 했다. 이정이 ‘왕안석이 더 낫습니다.’라고 했다[一日侍內宴, 醉甚, 近就御前平坐, 請曰: ‘蘇與王孰優?’ 上不答, 但曰: ‘未可知.’ 永川曰: ‘荊公優矣.’].”【위의 책, 제1권의 「謏聞瑣錄」, 237쪽】는 기록이 있다. 『소문쇄록(謏聞瑣錄)』은 중종(中宗) 20년 1521년에 만들어진 책..
3. 존당파(尊唐派)와 존송파(尊宋派) 개별(個別) 시인(詩人)에 대한 평론(評論) 1. 존당파(尊唐派)의 이백(李白), 두보(杜甫),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평론(評論) 1. 이백(李白)보다 두보(杜甫)를 더 우위에 둔 남용익과 김만중의 평론(評論)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에 대한 총론에서 각 시를 추존(追尊)하는 이유에 대하여 살펴보았으나 한정된 몇 사람만이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에 대하여 총론(總論)을 전개함으로써 각각의 추존(追尊)의 근거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점이 있다. 이에 따라 존당파가 추존했던 당시(唐詩)를 대표하는 이백과 두보, 존송파가 추존했던 송시(宋詩)를 대표하는 소식, 황정견에 대한 양파(兩派)의 평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존당파와 존송파의 이론적 근거를 좀 더 파악하..
2. 한국시화(韓國詩話)의 당송시(唐宋詩)에 대한 총론(總論) 1. 홍경우~홍만종까지 시화집의 흐름 홍경우~홍만종까지 시화집의 흐름 한국 역대(歷代) 시화(詩話) 중의 존당(尊唐)ㆍ존송(尊宋)의 논쟁은 고려후기로부터 시작된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고려후기(高麗後期) 이래 조선전기(朝鮮前期)까지는 대개 송시(宋詩)가 우세를 보인 반면, 중기(中期)에는 당시풍(唐詩風)이 우세를 보이고 후기(後期)에는 당시(唐詩)와 송시(宋詩)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경향을 보인다【안대회, 『조선후기시화사』, 소명출판사, 43쪽】고 하였다. 이를 토대로 연구의 편의를 위하여 한국에서는 존당파(尊唐派)ㆍ존송파(尊宋派)【이 양파(兩派) 사이에 당송겸존파(唐宋兼尊派)도 있었는데 대표적 인물은 홍만종(洪萬宗), 김창협(金昌協) 등을 ..
한국시화(韓國詩話)에 나타난 존당파(尊唐派)ㆍ존송파(尊宋派)의 평론연구(評論硏究) - 이백(李白), 두보(杜甫),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평론(評論)을 중심(中心)으로 - 박 순 철 1. 시화라는 명칭의 등장과 흐름 한ㆍ중 양국은 동양 한자문화권 속에서 오랜 기간 동안 여러 방면에서 다양한 교류를 진행하였다. 문학 방면에서도 많은 교류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분야 중의 하나는 시 분야이다. 시는 한ㆍ중 양국에서 모두 극성하였고 이로 인하여 시에 대한 창작과 감상, 비평에 대한 책들이 저술되어 시화(詩話)라는 이름으로 명명되기에 이르렀다. 최초 시화(詩話)라는 명칭의 등장과 성격 시화(詩話)라는 명칭은 송대(宋代)의 구양수(歐陽脩)가 자신이 쓴 시화를 『육일시화(六一詩話)』라고 이름 지..
4. 맺음말 이계(耳溪)는 과거사에서 애국 인물을 뽑아 입전한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을 제외하고, 모두 11개의 인물전을 창작하였다. 이계가 입전한 대상 인물은 개성과 계층이 다양한데, 이 작품 중 특히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과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은 의원전(醫員傳)에 해당된다. 두 작품의 주인공 모두 전통적인 도덕규범 예컨대 충ㆍ효ㆍ열과는 애초 거리가 먼 인물들이다. ‘의원전’은 이조 호기 문인들의 인물전에서도 흔하지 않는 사례에 해당된다. 그런 점에서 이계가 의원을 비롯하여 여항의 세계에서 재예(才藝)를 지니고 그 나름의 가치 있는 특이한 삶을 살았던 인물을 주목한 자체는 의미가 적지 않다. 이미 알려진 바 있듯이 이조 후기 전의 입전 대상이 신선(神仙)ㆍ이인(異人)ㆍ거지ㆍ예인(藝..
2) 침술(鍼術)로 하층민에게 인술을 베푼 의의(義醫):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 1. 서사분절 피재길이 ‘웅담고(熊膽膏)’로 내의원의 침의로까지 발탁되어 이름을 날린 인물이라면, 조광일은 독특한 침술로 시정공간을 누비면서 오직 민(民)을 위해 인술을 베푼 의의(義醫)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광일의 삶은 피재길의 삶과 상이한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서사분절을 보기로 한다. ① 의술의 공은 나라를 다스리는 공에 버금가며, 어진 사람이면서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이 의술에 은거한다는 작가의 전평(前評). ② 충청도 내포에 조광일(趙光一)이라는 의원이 있었는데, 그의 선조는 본래 태안(泰安)의 대성(大姓)이었으나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나그네로 합호(合湖)의 서쪽에 정착한다. ③ 조생은 침(針)으..
3. 작품의 분석 앞서 살펴 본 대로 이계(耳溪)가 남긴 11편의 작품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한 작품 성취와 개성적인 작가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는 그의 작가의식이 두드러진 ‘의원전(醫員傳)’을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과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이 그 분석의 대상이다. 1) 시정(市井)의 의원(醫員)에서 어의(御醫)로: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 서사분절 동아시아 서사에서 ‘전(傳)’의 양식으로 의원(醫員)을 주목한 사례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을 하나의 독립 제목으로 마련하여, 당내 최고의 명의였던 태창공(太倉公)과 편작(扁鵲)의 의술과 삶을 주목한 바 있다. 이를 시원(始原)으로 하여 이후 의원에 대한 전(傳)은 여러..
2. 이계전(耳溪傳)의 현황과 그 특징 이계(耳溪)는 민족의 고대사를 위시하여 임진ㆍ병자 양 전쟁에 이르기까지 국란을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역사적 업적을 남긴 수다한 애국 인물을 입전하여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을 창작한 바 있다. 이 작품은 기존의 자료에 실려 있는 것을 토대로 편찬한 것인데, 주로 역사서에 실린 것과 개인 문집류(文集類), 그리고 실기류(實記類)를 비롯하여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여 엮은 것이다. 여기서 이미 전(傳) 작가로서의 이계(耳溪)의 재능과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은 대개 전대의 기록을 바탕으로 작품으로 옮겨 놓았다. 예컨대 이계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고려사(高麗史)』의 열전을 근거로 약간의 윤색을 가한 경우도 있고, 개인문집이나 실기류라..
이계 홍양호의 의원전(醫員傳)에 나타난 인물 형상 진재교(성균관대) 1. 머리말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1724~1802)는 개방적 사유로 탁월한 행정능력을 보인 개명적(開明的) 관료(官僚)다. 그는 민의 삶과 지방 고유의 향토 정서를 시로 포착한 점에서 실학파(實學派) 문학과 동일한 성취를 이룬 바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는 18세기 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선점하고, 다양한 양식으로 그 새로움을 포착한 점은 남다른 것이거니와, 학계에서 이 점을 진작 주목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간의 연구 또한 주로 이계의 시와 사유양식, 문학론과 문학 활동 그리고 학문 성향 등에 주목하여 성과를 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나 성과에 가려, 이계가 탁월한 전(傳) 작가라는 사실에 시선을 두지 못한 것 또한 사..
고문(古文)이란? 한문학에서 고문이라 불린 세 가지 경우 근대 이전의 한문학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경우에 ‘고문(古文)’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첫 번째는 문자인 고대자체(古代字體)로서의 고문이다. 선진(先秦)시대의 과두문(蝌蚪文)이나 전서(篆書)같은 문자를 통칭하는 경우이다. 우리나라에서 허목(許穆)이 편찬한 『고문운율(古文韻律)』의 내용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자체(字體)로서의 개념이 고문이 가지고 있던 본래적인 뜻이다. 두 번째는 고대 전적(典籍)이나 학파로서의 고문이다. 한나라 사람들이 유가의 전적을 공자(孔子)의 옛 집에서 발견하여 ‘벽중서(壁中書)’라 불렀던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후대에 경학연구자들 사이에서 금고문논쟁(今古文論爭)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고문의 개념이 학파를 ..
5. 마무리 이상에서 살펴본 내용을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한문학에서의 이속(俚俗)의 수용 여부는 특정한 시기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작가 개인의 문학관 내지 창작관의 영향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 비리하고 저속하다고 여겨지는 속언으로 제한하기는 하였지만, 조선 전기부터 작가들은 비리한 속언을 그들의 문학 작품 속에 수용하고 있으며 그 수용 의도 역시 실용성과 교훈성의 측면에서부터 유희적인 해학이나 조롱 그리고 문학의 효과적인 수사기교 그리고 대상을 직관이나 경험에 의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분석하려는 변증적 연구의 자료로서도 활용하고 있다. 이로 볼 때, 한문학에서의 ‘이속’의 수용은 특정 시기에 집중되는 한문학의 특화된 양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전시기에 걸치는 한문학의 다양한 양상의 한 부분으로 이..
4. 속언을 변증 재료로 활용하다 이규경(李圭景)은 조부인 이덕무에서부터 부친 이광규로 이어져 온 박학과 실용의 학문 성향을 계승하여 명물도수(名物度數)와 박물학(博物學)을 중시하였다. 그의 학술의 집대성으로 평가되는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완성에는 사물의 시말을 밝히려는 벽(癖)이라고 부를 정도의 열정적인 학문 자세와 박학다식을 열망하며 사소한 기록조차 소중히 간직하는 기록정신, 차기(箚記)와 변증(辨證)의 서술방식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 한 예가 충주 지역의 형세를 변증하기 위한 재료로 속언을 활용한 것이다. 속언에 전하기를, “충주에는 삼다(三多)가 있으니 석다(石多)ㆍ인다(人多)ㆍ언다(言多)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충주는 고을에 돌무더기가 많고, 고을이 많아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다른..
3. 해학과 조롱의 수단 해학(諧謔)은 예교(禮敎)를 앞세운 조선 지식인들에게 금기시되는 단어 중의 하나였다. 조선전기에 긴장된 관료생활의 경직성을 해소하고 사대부의 심심파적으로 이용되던 골계류(滑稽類)의 찬집과 유행이 중기로 접어들면서부터 점차로 사라지게 된 것도 어쩌면 엄숙한 유교적 예교주의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허균(許筠, 1569~1618)은 이와 같이 엄숙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방달한 삶의 방식을 택하였고 이단으로 취급되던 도불(道佛)에 경도되었으며 서얼과 통교하였다. 한편 고문가로 자처하면서 옛사람의 글을 본뜨지 말고 평이하면서도 유창한 자신만의 글쓰기를 강조하였다【許筠, 『惺所覆瓿稿』 卷12, 「文說」, 238면.】. 그의 방달불기한 이단적 성향과 고문 지향의 창작의식은 문학적으로 어떻게 ..
2. 한시의 소재로 활용 성대중(成大中, 1732~1812)은 속언 중에서 절묘한 것들은 가락이 착착 들어맞는다는 김상숙(金相肅, 1717~1792)의 말을 인용하며 ‘蜻蛉蜻蛉, 往彼則死, 來此則生[잠자리야 잠자리야, 저리 가면 죽고 이리 오면 산다]’와 같은 속언은 아무런 이치가 담겨 있지는 않지만 가락에 맞는 협운의 특성을 지닌다고 하였다. 이 외에도 ‘三尺髥, 食令監[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영감이다]’, ‘看新月, 坐自夕[새벽달 보자고 저녁부터 기다린다.]’, ‘久坐雀, 必帶鏃[오래 앉은 참새 화살 맞는다.]’ 등의 속언도 운어를 이룬다고 하였다【成大中, 『靑城雜記』 卷4, 醒言. 金坯窩曰, 俚語之妙者, 無不合韻. 蜻蛉蜻蛉, 往彼則死, 來此 則生, 此直無理俚謠, 而亦諧於韻. 如所謂三尺髥食令監, 看..
3. 속언 활용의 제양상 1. 공식적 언어생활에의 활용 『조선왕조실록』은 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각 왕 별로 기록한 편년체 사서이다. 실록 편찬의 기본 자료는 시정기(時政記)와 사관이 개인적으로 작성한 사초(史草), 각사의 등록(謄錄) 그리고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였고, 문집ㆍ일기ㆍ야사류 등도 이용되었으며, 후기에는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과 『일성록』도 사용되었다. 편찬 과정은 각방의 당상과 낭청(郎廳)이 자료를 분류하고 중요한 자료를 뽑아 작성하는 초초(初草), 그리고 도청에서 그 내용을 수정ㆍ보완하는 중초(中草), 마지막으로 총재관과 도청의 당상이 중초를 교열하고 최종적으로 수정ㆍ첨삭을 하여 완성하는 정초(正草)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복잡하고 엄정한 절차로 만들어진 『실록..
2. 조선조 제가(諸家)의 속언 인식 조선 초기 문헌이 인용된 속언 조선 최초로 문형을 잡았던 권근(權近, 1352~1409)은 동국사략(東國史略)의 서문에서,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방언(方言)과 이어(俚語)를 다 없애지 못하고 잡다하게 수록하였기에 그 문장이 ‘아(雅)’할 수 없었다고 비판하였다【權近, 『陽村集』 卷19, 「三國史略序」, 197면. 逮新羅氏, 與高句麗百濟鼎立, 各置國史, 掌記時事. 然而傳聞失眞, 多涉荒怪, 錄其時事, 未克詳明, 且多雜以方言, 辭不能雅. 前朝文臣金富軾, 輯而 修之, 爲三國史, 乃倣遷史, 國別爲書, 有本紀, 有列傳, 有志, 有表, 凡五十卷. 以一歲而分紀, 以一事而再書, 方言俚語, 未能盡革, 筆削凡例, 未盡合宜, 簡秩繁多, 辭語重複. 觀者病其記此遺彼 而難於參究也.】. 이십..
한문학에 나타난 이속(俚俗)의 수용 양상 -속언(俗諺)을 중심으로- 김영주(金英珠) *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 한문교육과 부교수 / 전자우편 : kyjkyj333@hanmail.net 국문초록 한문학에서의 이속(俚俗)의 수용 여부는 특정한 시기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작가 개인의 문학관 내지 창작관의 영향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 비리하고 저속하다고 여겨지는 속언으로 제한하기는 하였지만, 조선 전기부터 작가들은 비리한 속언을 그들의 문학 작품 속에 수용하고 있으며 그 수용 의도 역시 실용성과 교훈성의 측면에서부터 유희적인 해학이나 조롱 그리고 문학의 효과적인 수사기교 그리고 대상을 직관이나 경험에 의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분석하려는 변증적 연구의 자료로서도 활용하고 있다. 이로 볼 때, 한문학에서의 ..
4. 결론 이상과 같이, 17세기 전반을 중심으로 활동한 한 악사의 생애를 추적해 보았다. 73년간 지속된 송경운의 삶은 대략 1580년대부터 1640년대까지 걸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파 연주에 오롯이 바쳐진 그의 시간은 1627년 정묘호란을 기점으로 질적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는 그가 속한 공간이 달라진 점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송경운은 50세 무렵까지는 서울의 화려한 잔치마다 불려 다니며 최상의 인기를 누렸다. 그런데 이렇게 분주하고 몸값 높은 연예인으로 살아가던 송경운이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는 점은, 근거지를 전주로 바꾼 이후 그의 삶에서 충일하게 배어나는 고요한 기쁨과 대비했을 때 비교적 선명해진다. 이런 질적 변화를 대비하는 이기발의 서술방식에는, 송경운이 전주로 내려온 것이 이 악사..
3. 전주에서 다시 만난 송경운과 이기발(李起浡) 자기 묘사 이 장에서는 「송경운전」에서 가장 정채를 띠는 한 단락을 검토하며 작가 이기발의 내면을 따라가 보고, 그에게 송경운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사람이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해당 단락은 본디 「송경운전」의 서사에서 가장 앞 부분에 배치된 것으로, 10년간의 서울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시점의 작가가, 만년의 송경운과 마주치는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기발은 「송경운전」의 본격적 시작이 되는 해당 장면의 도 입부를 다음과 같은 ‘자기’ 묘사로 출발한다. 무심자(無心子)는 말한다. 나는 해진 베옷을 입고 여윈 말을 타고 노복(奴僕)도 없이 혼자 전주성 서쪽을 따라 얼음고개를 오르고 있었다. 無心子曰: 余嘗以弊布衣, 乘羸馬, 無蒼頭而獨傍..
(2) 정묘호란을 계기로 달라진 삶의 공간: 서울과 전주 앞서 송경운의 생애를 개략하며 밝힌 것처럼, 송경운의 삶은 정묘호란을 계기로 변화했다. 그 이전의 삶이 부유한 상류층에게 각광 받는 비파 연주자로서 화려한 명성을 누리는 것이었다면, 그 이후의 삶은 음악을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곁에 언제나 머물며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악사 송경운의 후반생은 음악의 본질 깊숙한 곳에 나아간바, 한층 높고 빛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음악가로서의 성숙은 정묘호란 이후 송경운의 거주 공간이 달라진 점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본절에서는 악사 송경운을 성장하게 한 공간의 면모를 그의 생애와 결부시켜 구체적으로 재현하고자 한다. 1) 서울에서 흘러간 반생 ① ..
2. 악사(樂師) 송경운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 (1) 임진왜란(1592)과 정묘호란(1627)을 통과하며 이기발은 송경운을 ‘악사’(樂師)라 불렀다. 「송경운전」을 다룬 최초의 업적인 「조선후기 예술가의 문학적 초상」에서 박희병 교수는 이 호칭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 ‘악사’의 의미를 악인(樂人)에 대한 범칭이 아니라 장악원에 속한 체아직(遞兒職, 조선시대에 설치된 특수관직)으로서 송경운의 직함에 가까운 것으로 보았다. 이 점은 서울에서 활동하던 송경운이 정묘년(丁卯年, 1627) 이후 전주로 이주하여 정착한 사실 과 맞물리며 그가 장악원의 신역(身役)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예술가로서의 삶을 구가하게 됐다는 의미부여로 이어졌다【박희병, 「조선후기 예술가의 문학적 초상」, 『한국고전인물전연구』, 한길사,..
이기발(李起浡)의 송경운전(宋慶雲傳)과 17세기 전주 재현 역사지리를 접목한 한문수업의 모색 김하라(전주대) 국문초록 「송경운전」(宋慶雲傳)은 17세기의 비파 연주자 송경운(宋慶雲)을 입전한 한문 산문으로, 한국의 문학사와 음악사에서 공히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그 작가인 이기발(李起浡, 1602~1662)은 송경운을 실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경험을 바탕으로 이 빼어난 음악가의 생애를 재현했다. 이기발은 전주에서 나고 자란 사대부 문인으로, 20대 중반이던 1625년부터 10년 남짓 서울에 거주하며 공부와 벼슬살이를 했고 1636년 병자호란 이후로는 모든 관력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낸 인물이다. 한편 송경운은 1580년대 중, 후반의 서울에서 이담(李憺, 1567~1644)으로 추정되는 종친..
Ⅴ. 맺음말 이상에서 본고는 「양사룡전」의 구성과 내용상의 특징을 파악하고, 그것을 저자의 의리론과 견주어 봄으로써 「양사룡전」의 입전의식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상 고찰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양사룡전」은 일반적인 효자전과 비교했을 때 2,703자나 되는 긴 분량으로 서술되어 있다. 둘째, 「양사룡전」의 도입부에는 하늘과 인간 사이의 정당한 관계 정립에 대한 철학적 의론이 제시되어 있다. 이 철학적 의론은 일반적인 효자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작품 전체를 통관하면서 서사를 이끌고, 주제를 형성해간다. 곧 도입부의 의론은 저자가 자신의 사유를 입전인물을 통 해 입증해가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셋째, 「양사룡전」은 전주사람으로부터 들은 내용[본사1]과 자신이 직접 만나 대화한 내용[..
Ⅴ. 맺음말 이상에서 본고는 「양사룡전」의 구성과 내용상의 특징을 파악하고, 그것을 저자의 의리론과 견주어 봄으로써 「양사룡전」의 입전의식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상 고찰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양사룡전」은 일반적인 효자전과 비교했을 때 2,703자나 되는 긴 분량으로 서술되어 있다. 둘째, 「양사룡전」의 도입부에는 하늘과 인간 사이의 정당한 관계 정립에 대한 철학적 의론이 제시되어 있다. 이 철학적 의론은 일반적인 효자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작품 전체를 통관하면서 서사를 이끌고, 주제를 형성해간다. 곧 도입부의 의론은 저자가 자신의 사유를 입전인물을 통해 입증해가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셋째, 「양사룡전」은 전주사람으로부터 들은 내용[본사1]과 자신이 직접 만나 대화한 내용[본..
Ⅳ. 서귀 이기발의 의리 정신과 「양사룡전」의 입전 의식 의리 정신의 표출양상 서귀 이기발은 서두에 잠깐 언급하였듯, 철저한 대명의리론자였다. 이기 발이 의리를 앞세워 평생 동안 고집스러울 만큼 출사를 거부한 것은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를 청나라가 멸망시켰는데 원수에게 복수는 못할망정 청 나라의 배신(陪臣) 노릇은 절대 할 수 없다는 의식 때문이었다【그러나 명이라는 대상은 이기발의 의리 정신에 있어 우연적 대상에 불과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은혜를 입었다면 그 은혜를 갚기 위해 헌신해야 하는 것이 의리요, 보은은 못할망정 배신을 한다는 것은 지극한 불의가 되니 차마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인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이기발은 그것이 부당한 것이라면 비록 성현의 일이라도 취하지 않을 것이라 강변하기도 ..
3. 다양한 삽화를 활용한 주제의 확장 흔동 삽화 「양사룡전」은 양사룡전의 효행과 선행에 더해 여러 삽화를 추가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결부된 삽화로는 양사룡의 부친인 양흔동의 주인 섬김 이야기, 양사룡이 자식을 잃은 서귀를 위로하기 위해 해준 남만국 이야기, 그리고 작품 말미에 붙인 춘반의 효행 이야기가 있다. 이러한 점 또한 일반 효자전에 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다. 이에 삽화가 지닌 의미와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부친 양흔동의 이야기는 양사룡이 양친계를 조직하여 노모를 봉양한 행 위를 말한 뒤, 그때의 심경을 서귀에게 말한 대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 다. 양사룡은 부친이 돌아가신 뒤 부친에 대한 자신의 그리움이 시간이 지날수록 소홀해짐을 느꼈다. 그러면서 모친이 이번에 돌아가셨다면 역시나..
2. 중복 구성을 통한 주제의 심화와 특징적 인간상의 강조 「양사룡전」의 본사1은 전주사람이 전하는 이야기를 소개한 내용이고 본사2는 서귀가 양사룡을 직접 만나 대화한 내용이다. 그런 까닭에 「양사룡전」은 양사룡의 효행과 선행에 관한 내용이 본사1과 본사2에 중복되어 제시된다. 비슷한 내용을 중복하여 기술하는 것은 서사 전개에 있어 다소 효율적이지 못한 구성이다. 그렇다면 서귀는 무슨 이유로 이러한 구성방식을 택한 것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해당 부분을 살피기로 한다. 그 모친의 나이가 70여 세였는데 갑신년(1644) 가을 그 모친이 병에 들어 거의 소생할 수 없을 듯하였다. 그 사람은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를 드렸는데 피눈물을 흘리면서 “하늘이시여! 우리 어머니의 병이 심해 살아날 가망이 없으니 하늘..
Ⅲ. 「양사룡전」의 구성과 내용상의 특징 1. 철학적 의론을 제시한 도입부 위에 제시한 것처럼 「양사룡전」은 크게 보면 도입-본사-결사의 삼단으로 내용이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 구성이 「양사룡전」의 독창이 아님은 물론이지만, 일반적인 효자전의 구성에 비추어 보면, 도입부를 둔 점은 드문 경우에 속한다【비교 대상 26편의 효자전 가운데 도입부를 둔 작품은 孝子傳(丈巖集 권26), 琴孝子傳(立齋遺稿 권19), 孝子吳後種傳(九思堂集 권8), 權孝子傳(霅橋集 권6), 孝子贈童蒙敎官金公傳(艮齋集前編續 권6) 5편이다.】. 일반적인 효자전에서 설정한 도입부는 대개 효의 중요성과 입전동기를 밝히고 있는데 「금효자전(琴孝子傳)」의 경우를 예시한다. 효는 백행의 근원인데 효를 행하는 사람은 드물다. 누군들 사람의 ..
Ⅱ. 「양사룡전」의 구성과 내용 간개 서귀 이기발의 「양사룡전」은 아직 학계에 정식으로 보고된 작품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본고는 「양사룡전」의 구성과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는 것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려 한다. 「도입」 ① 하늘이 사람에 대해 보이는 일관되지 않은 처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본사1」 ② 을유년(1645)의 큰 가뭄과 전주 금암천 일대에만 일어난 강우 현상 ③ 금암천 일대의 강우 현상에 대한 전주 사람들의 전언 ③-1 금암천 상류에 살던 효자는 죽어가는 노모를 자신으로 대신해달라고 열흘 동안 기도하였고, 노모는 기도 후 이레 만에 기적적으로 소생함. ③-2 효자는 노모의 소생이 하늘의 은혜라 생각하고 하늘에 대한 보은으로 묵정밭을 일구고 오이를 심었는데 하늘이 효자의 밭에만 비를 내려주..
‘진아(盡我)’ 정신으로 본 「양사룡전(梁四龍傳)」의 입전의식 김형술 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국문초록」 본고는 「양사룡전」의 구성과 내용상의 특징을 파악하고 저자의 입전의식을 규명하고자 한 것이다. 「양사룡전」은 2,703자나 되는 긴 분량으로 구성과 내용에서 몇 가지 독특한 면모를 보인다. 첫째, 「양사룡전」은 하늘과 인간 사이의 정당한 관계 정립에 대한 철학적 의론으로 시작되는데 이는 작품 전체를 통해 저자가 자신의 사유를 입전인물을 통해 입증해가는 장치로 기능한다. 둘째, 「양사룡전」은 중첩된 서사 구성을 통해 양사룡의 효행을 강조하고 주제를 심화시킨다. 셋째, 「양사룡전」은 다양한 삽화를 통해 주제를 확장시킨다. 이와 같은 구성상의 특징을 바탕으로 「양사룡전」은 내용과 주제의식에 있어서도 일..
Ⅴ. 맺음말 이상에서 「양사룡전」을 대상으로 「양사룡전」에 담긴 인성교육의 핵심적 가치를 추출하고, 아울러 인성교육 자료로서 「양사룡전」이 지닌 여러 장점을 살펴보았다. 검토 결과 「양사룡전」은 효자전 일반의 계몽적 권면을 넘어 의리를 바탕으로 왜 효행과 선행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사 유과정을 보임으로써 인성함양과 관련된 윤리적, 도덕적 가치의 함의를 더욱 풍부하고 실재적으로 만들었다. 또한 인성교육 자료의 측면에서도 청소년의 자아 형성과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는 진아(盡我)라는 사유를 갖추고 있고, 진솔하고 핍진한 서술로 독자의 공감을 높이고 있으며, 소박하지만 실천 가능한 행위들을 통해 전통시대 윤리 덕목에 대한 인식 전환을 꾀할 수 있고, 이야기 자체가 흥미로워 학생들의 독서를 적극적으로 이끌 수 있..
Ⅳ. 인성교육 자료의 측면에서 본 「양사룡전」의 특징 나를 매개로 한 인성교육 이 장에서는 앞의 논의를 부연하여 「양사룡전」이 인성교육의 훌륭한 자료가 될 수 있음을 피력해보고자 한다. 먼저, 「양사룡전」의 당위소당(當爲所當)과 진아(盡我)는 청소년의 자아 형성과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앞서도 언급하였듯 「양사룡전」은 효자전이면서도 단순히 효의 가치를 계몽하는 선을 넘어선다. 효행보다 특기된 오이 나눔 선행이 그러하고, 그런 효행과 선행을 당위소당(當爲所當)과 연결시킴으로써 보다 근원적이고 이상적인 인간상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진아(盡我)와 당위소당(當爲所當)은 올바른 가치관 형성에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할 ‘나’, 그리고 관계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환기시킨다. 이러한 문제..
Ⅲ. 양사룡의 당위소당(當爲所當)과 이기발의 진아(盡我) 양사룡의 당위소당(當爲所當) 「양사룡전」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가치는 어머니에 대한 효행, 행인(行人)들을 위한 오이 나눔 선행, 그리고 그 둘을 근저에서 추동하며 보다 근원적인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의리[보은의식]이다. 해당 내용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그 모친은 나이가 70여 세였는데, 갑신년(1644) 가을, 그 모친에게 병이 생겨 거의 소생할 수 없을 듯하였다. 그 사람은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를 드렸는데 피눈물을 흘리면서 “하늘이시여! 우리 어머니의 병이 심해 살아날 가망이 없으니 하늘이 정녕 내 어머니를 취하시려는 것입니까? 내 나이 한창이고 많이 남았으니 하늘을 섬기는 것은 필시 어머니보다 제가 나을 것입니다. 하늘이시여! 청하옵건데 ..
Ⅱ. 「양사룡전」의 저자와 서사 구성 서귀 이기발의 생애 저자 이기발(李起浡, 1602~1662)【김형술, 「‘진아(盡我)’ 정신으로 본 「양사룡전(梁四龍傳)」의 입전의식」, 『국문학연구』제39집, 국문학회, 2019, 184~186쪽.】은 자(字)가 패연(沛然), 호(號)가 서귀(西歸)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목은 이색의 11세 손으로 그의 집안은 증조부 이치(李稺)가 선친 이수량(李守良)을 전주에 장사한 이래로 전주사람으로 살았다. 아버지는 이극성(李克誠)이고 어머니는 전주가 본관인 최준극(崔峻極)의 따님인데, 모친은 일찍 과부가 되었지만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내 신천익(愼天翊), 양만용(梁曼容)의 모친과 더불어 호남의 세 현모 중 한 분으로 일컬어졌다. 이극성과 최씨부인은 슬하에 3남 2녀의 자..
인성교육의 측면에서 본 「양사룡전」의 자료적 가치 김 형 술 (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조교수) [국문초록] 이 논문은 서귀 이기발의 「양사룡전」을 대상으로 작품에 담긴 핵심적 사유를 분석하고, 인성교육 자료로서 「양사룡전」이 지닌 특장을 살핀 것이다. 「양사룡전」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가치는 하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나는 돈도 없고 작위도 없지만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마땅히 하겠다[當爲所當爲]’는 의리이다. 양사룡은 당위소당(當爲所當)의 정신을 토대로 오이 나눔과 어머니에 대한 효행을 실천할 수 있었는데, 오이 나눔 선행과 효행은 양사룡 자신이 할 수 있고 마땅히 해야 할 양사룡의 진아(盡我)였다. 「양사룡전」이 인성교육의 훌륭한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첫째, 「양사룡전」의..
4) 상사동기(想思洞記) 「상사동기」는 「영영전(英英傳)」라고도 불리었는데, 젊은 유생인 김생이 회산대군의 궁녀인 영영을 사랑하게 되어 우여곡절 끝에 결연을 맺는다는 이야기이다. 「상사동기」도 「운영전」처럼 작자나 창작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작품이 17세기 초에 지어졌다는 것은 다른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가 있다. 권전(權佺)의 『석노유고(釋老遺稿)』에 ‘余罹病久矣, 病中無聊莫甚, 使兒輩讀想思洞記’【박노춘의 「고전문학관계기록 3편」(『숭전어문학』 5, 숭전대 국어국문학회, 1976)에서 재인용.】라는 기록이 있는데, 권전은 권필의 조카로 1583년에 태어나 1651년에 죽었다【차용주(1989), 『한국한문소설사』, 아세아문화사, 270쪽.】. ‘권전이 병중에 무료하여 아이들로 하여금 「상사..
3. 맺음말 이상에서 17세기 애정전기소설인 「주생전」 「위경천전」 「운영전」 「상사동기」 「최척전」의 작품 성격과 그 의의를 기존의 연구성과를 수렴하는 가운데 살펴보았다. 이들 작품들은 15세기에 창작된 『금오신화』 중 「이생규장전」과 「만복사저포기」의 전통을 잇고 있다. 한문문어체, 삽입시, 애정주제 등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7세기 애정전기소설은 「이생규장전」이나 「만복사저포기」와 다른 점 또한 없지 않다. 두 계열간의 가장 뚜렷한 차이는 낭만성과 현실성의 문제이다. 「이생규장전」과 「만복사저포기」에는 산 사람이 여귀와 사랑을 나누는 비현실적인 장면이 빈번하게 나타나는데, 17세기 애정전기소설에서는 사건 및 갈등의 전개가 철저하게 현실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즉 1..
5) 최척전(崔陟傳) 「최척전」은 「기달록(奇達錄)」이라고도 불리었는데, 현곡(玄谷) 조위한(趙緯韓, 1567~1649)이 광해군 30년인 1621년에 지은 작품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최척전」의 후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내가 남원의 주포에 머물고 있었는데, 때마침 최척이 방문해서 자기가 겪었던 일을 이처림 이야기하고이어서 그 전말을 기록하여 없어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경개를 대략기술하였다. 천계 원년 신유년 윤이월 소옹이 짓다. 余流寓南原之周浦, 陟時來訪余, 道其事如此, 請乃記其顚末, 無使湮沒. 不獲已略擧其槪. 天啓元年, 辛酉潤二月日, 素翁題. 「최척전」, 『필사본 고전소설전집』 3, 아세아문화사, 198쪽. 위의 기록은 서울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최척전」의 ..
3) 운영전(雲英傳) 「운영전」의 작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창작연대는 17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먼저 작품 내용에 ‘萬曆辛丑’【국립도서관본 「운영전」, 2쪽.】이라는 년도와 ‘갓 전란을 겪은 뒤인지라 장안의 궁궐과 성안에 가득했던 집들이 텅 빈 채 남아 있지 않았다[新經兵燹之餘, 長安宮闕, 滿城華屋, 蕩然無有].’라는 구절을 들 수 있다. 「운영전」의 서두에는 임진왜란 직후 황패화된 서울의 모습을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 구절은 그 중 일부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만력 신축년인 1601년 이후 임진왜란의 상흔이 분명하게 남아 있던 시점에서 창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국립도서관본에는 ‘柳泳傍 卽雲英偉’이라는 제목 아래 ‘大明天啓二十一年’이라는 간기(164..
2) 위경천전(韋敬天傳) 「위경천전」은 1992년 임형택 교수가 『고담요람(古談要覽)』이라는 책에서 찾아 학계에 소개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고담요람』에는 ‘위경천전(韋敬天傳)’이라는 제목 아래 ‘권석주제(權石洲製)’라는 글자가 씌어져 있는데, 임형택 교수는 권필의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즉 「위경천전」은 문장표현, 삽입시의 수준, 장면의 형상화와 사건의 구성 등에서 「주생전」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떨어지기 때문에 두 작품을 동일인의 작으로 볼 수 없는바, 「주생전」을 읽고 자극을 받은 어느 무명 문인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임형택, 「전기소설의 연애주제와 위경천전」의 「추기」, 앞 책, 38쪽.】. 그러나 근래 정민 교수는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여 권필의 작품임이..
2. 작품의 성격과 그 의의 1) 주생전(周生傳) 「주생전」은 이명선(李明善)이 『조선문학사(朝鮮文學史)』 연표에서 권필(權韠)의 작품이라고 명기한 이후 지금까지 대략 권필의 작품으로 인정되어 왔다【김일렬(1984), 「주생전의 작품세계와 비극적 성격」, 『조선조소설의 구조와 의미』, 형설출판사.】. 물론 이 작품은 그의 문집인 『석주집(石州集)』에는 수록되어 있지않다. 이로 인해 「주생전」의 작자를 권필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금오신화』가 김시습의 문집인 『매월당집(梅月堂集)』에 수록되어 있지 않듯이, 이것을 문제삼아 이견을 제기하기는 어렵다. 소설을 폄하했던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주생전」과 같은 소설은 도리어 문집을 편찬할 때 제외시켰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더구나..
‘언어생활과 한자’ 성취기준 해설과 수업 적용의 실제 김소명․송은비 【국문초록】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우리 교육이 지향해야 할 가치와 교과교육 방향 및 성격을 기초로 미래 사회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으로 ‘협력적 소통 역량’을 강조하고 있다. 협력적 소통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인 어휘력은 사람의 사고력을 보여주는 수단이자 사람의 생각을 결정짓게 하는 중추적 도구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사소통 능력과 문해력 신장을 목표로 두고 있는 ‘언어생활과 한자’는 현대 사회의 유의미한 과목이 될 수 있다. 본 연구는 2022 개정 한문과 교육과정 ‘언어생활과 한자’의 성취기준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현직 교사의 관점에서 해석을 제시하고, 지도안의 형태로 수업 적용의 실제를 제안하여 새롭게 도입될 교..
17세기 애정전기소설의 성격과 그 의의 이상구(Lee, Sang- Gu)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초에 애정을 주제로 한 일군의 작품들이 창작되었다. 「주생전」 「위경천전」 「운영전」 「상사동기」 「최척전」이 바로 이들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 권필이나 조위한 등 비판적 지식인들에 의해 한문 문어체로 씌어져 있으며, 『금오신화』 가운데 「이생규장전」이나 「만복사저포기」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그러나 『금오신화』가 산 사람과 죽은 여귀(女鬼)와의 사랑 등 비현실적 내용을 위주로 하고 있다면, 이들 작품은 사건과 갈등을 현실적인 토대 위에서 형상화함으로써 중세적 질곡을 보다 사실적으로 묘파하고 있다. 「주생전」 「위경천전」 「운영전」은 비극적인 결말을 통해 중세적 이념과 체제 하에서 애정에 따른 질곡을..
Ⅳ. 결론(結論) 이상(以上)으로 한문과(漢文科)에서의 PBL 연구 성과와 PBL과 한문과(漢文科) 교육과정(敎育課程)과의 관련성, 그리고 PBL을 적용한 고등학교(高等學校) 한문(漢文) 수업사례(授業事例)를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타 교과의 PBL 관련 연구 성과에 비해 한문과에서의 PBL 연구 성과는 매우 적지만, 핵심 역량을 중심으로 하는 2015 개정 한문과 교육과정이 교과 수업을 통해 의사소통 능력, 창의적 사고 능력, 정보처리 능력 등을 기르도록 되어 있다는 점에서, PBL을 적용한 한문과 수업은 앞으로 많은 연구와 실천 사례가 축적되어야 함이 분명하다. 학기 중의 모든 수업에 PBL을 적용하여 진행할 수는 없다. 물론, 그럴 필요도 없다. 다양한 교수ㆍ학습..
Ⅲ. 문제중심학습법(問題中心學習法)을 적용(適用)한 한문과(漢文科) 수업사례(授業事例) 이제 문제중심학습법을 적용한 한문과(漢文科) 수업사례(授業事例)를 소개해 보겠다. 이 수업은 1년 동안 수행된 수업 사례이다. 연구자는 현장 실천가가 사용하는 『고등학교 한문』Ⅰ(두산동아) 교과서의 단원 가운데 PBL을 적용할만한 단원을 2009 개정 한문과 교육과정의 세 영역과 영역별 내용을 기준으로 선별하였다. 그리고 학습자에게 단순한 사실 정보의 기억만을 요구하는 문제가 아닌, 실제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문제로 학생의 진로와 연계하였다. 또한, 고차적 능력(비판적 사고력, 문제분석력, 효과적인 의사소통능력 등)이 기존의 학습 목표와 적절하게 결합될 수 있는지를 고려하였다. PBL 문제를 만들기 위해선 창의성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