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책/철학(哲學) (393)
건빵이랑 놀자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마르크스에게서 20대의 열정을 배우다 우치다 타츠루ㆍ이시카와 야스히로 지음김경원 옮김 한국어판 서문 들어가는 말 마르크스 수사학의 결정체, 『공산당 선언』편지 1 이시카와가 우치다에게편지 2 우치다가 이시카와에게 청년 마르크스를 만나다, 『유대인 문제』ㆍ『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편지 3 이시카와가 우치다에게편지 4 우치다가 이시카와에게 인간에 대한 연민, 그 위대한 시작, 『경제학-철학 수고』편지 5 이시카와가 우치다에게편지 6 우치다가 이시카와에게 ‘마르크스주의’란 무엇인가, 『독일 이데올로기』편지 7 이시카와가 우치다에게편지 8 우치다가 이시카와에게 나오는 말 인용목차 / 지도
철학과 굴뚝청소부 목차 이진경 책 머리에 / 제2증보판에 부쳐 서론포스트모던 ‘시대정신’철학의 경계경계읽기와 ‘문제설정’ 제1부 철학의 근대, 근대의 철학 1. 데카르트 : 근대철학의 출발점중세의 철학은폐된 공세중세 너머의 철학두 개의 코기토데카르트의 문제설정주체의 분리와 진리의 인식데카르트가 가정한 두 가지 실체이성은 완전성을 타고 난다과학을 통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이성의 통제를 위해 육체를 억제하라근대철학의 문제설정근대철학의 딜레마 2. 스피노자 : 근대 너머의 ‘근대’ 철학자데카르트와 스피노자스피노자의 ‘자연주의’주체를 자연에 돌려주다스피노자의 진리무한히 소급되는 보증인의 문제점진리와 공리코나투스‘무의식’의 윤리학스피노자의 탈근대적 ‘이탈’ 제2부 유명론과 경험주의 : 근대철학의 동요와 ..
결론 : 근대철학의 경계들 근대철학을 정점에 올린 헤겔 지금까지의 논의를 간략하게 요약합시다. 주체와 진리라는 두 개념으로 요약했던 데카르트의 문제설정은 신학과 교회의 지배 아래 있던 철학을, 그 중심을 ‘나’라는 주체로 전환함으로써 중세 전체와 구별되는 하나의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철학적 ‘시대’를 여는 새로운 사고방식의 출발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철학적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이 철학적 근대를 특징짓는 근대적 문제설정은, 주체의 통일성과 중심성을 가정하며 그것을 개념적 연역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체철학’이란 특징, 모든 지식을 오직 ‘참된 지식’ ‘과학’이란 기준으로 판단하거나 정당화하는 점에서 ‘과학주의’란 특징을 갖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
5. 푸코 : ‘경계허물기’의 철학 세 명의 푸코 푸코는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대부 중 한사람으로 간주됩니다. 혹은 적어도 근대적 합리주의에 반대한 반합리주의자, 계몽적 이성의 독재에 항의한 반계몽주의자로 간주됩니다. 이런 사정은 우리의 경우에 더욱 단순화되고 있지만, 서구의 경우에도 일반적으로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대해 ‘구조주의자’라고 평하는 것 만큼이나 ‘포스트모더니스트’란 평가에 반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런 사정은 그의 친한 친구였던 들뢰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들뢰즈의 경우에는 포스트모더니스트란 평가에 대해서 매우 적대걱 입장을 명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입장 가운데 그런 요소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
정신분석학의 대상 라캉은 직업적인 철학자가 아니라 정신과 의사입니다. 그는 미국식 정신분석학에 커다란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식 정신분석학은 일종의 자아심리학적인 경향이 있는데, 그들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자아의 형성과정에 대한 이론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즉 정신분석학을 구순기, 항문기, 성기기 등을 거쳐 하나의 표준적인 자아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 대한 일종의 임상심리학으로 바꾸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라캉은 이것을 한편에선 생물학주의에 의해, 다른 한편에선 행태주의에 의해 프로이트 이론의 고유한 정신이 훼손된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러한 나름의 비판적 입지점을 설정한 라캉은 프로이트 이론에서 생물학주의적 요소를 제거하고, 나아가 프로이트 이론이 갖는 철학적 의미를 새로이 부각시키려고 합니다...
4. 비트겐슈타인 : 언어게임과 언어적 실천 구조언어학의 난점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은 언어와 인간에 대한, 그리고 구조와 주체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즉 새로운 사고영역을 개척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또 언어학으로서 설명해야 할, 그러나 구조주의적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언어와 대상(지시체) 사이에 어떤 실제적 연관을 상정하는 실증주의적 입장과 비교해 구조언어학의 난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컨대 논리실증주의와 유사한 언어관을 가지고 있던 러셀은, 만약 치즈에 대한 비언어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떤 사람도 ‘치즈’라는 낱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시체 즉 대상과 기호 사이의 관계는 자의적이며, 기호는 서로 긴밀하게 엮인 하나의..
3. 소쉬르의 언어학적 ‘혁명’ 소쉬르 언어학의 기본명제 언어나 기호가 갖는 가장 일반적인 특징은 그것이 어떤 사물이나 기호 사용자의 의도를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기호를 통해서 어떤 사물을 지시하거나 어떤 의도를 표현한다는 거지요. 예컨대 ‘송아지’라는 기호는 실제 송아지의 ‘이름’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먹는다’는 말은 먹는 행위를 가리키고, 그 기호를 사용하는 것은 먹는 것과 관계된 어떤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하지요. 여기서 기호가 지시하는 대상(예를 들면 실제 송아지)을 흔히 ‘지시체’(referent)라고 합니다. 기호나 언어에 대해 흔히 갖고 있는 생각은 ‘송아지’라는 기호와 실제 송아지(지시체) 간에 상응, 일치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호는 지시체를 반영한다는 거지요. 이..
무의식의 발견 아시다시피 프로이트는 철학자가 아닙니다. 그를 철학자로 다루는 철학사 책을 만나기도 그다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는 철학에, 특히 근대철학에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매우 간단한 단 하나의 개념 때문입니다. ‘무의식’이라는, 너무도 유명한 개념 말입니다. 이 개념은 근대철학의 기초였던 ‘주체’를 그리하여 주체철학 전체를 해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프로이트가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파괴 효과는 사실 무의식이란 개념 하나만으론 이루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건 어쩌면 다양한 증거와 임상적 사례들, 그리고 정신분석학이란 독자적인 학문을 창출해낸 체계적이고 강력한 개념들과 이론들이 있..
1. 맑스 : 역사유물론과 근대철학 맑스의 ‘유물론 비판’ 맑스가 관념론을 비판했다는 사실은, 그가 유물론자였다는 사실만큼이나 유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물론자’ 맑스가 사실은 유물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을 수행했다는 주장을 한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맑스가 근대철학과 근본적인 구획선을 그으면서 달라지는 출발점이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맑스는 ‘실천’이란 개념을 철학에 끌어들인 장본인입니다. 또한 근대 철학을 해체하는 데 맑스가 사용하는 결정적인 개념 역시 ‘실천’입니다. 다시 말해 실천이란 개념을 통해 맑스는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을 넘어섭니다. ▲ 빈약한 부엌브뤼겔(Brueghel/Bruegel)의 그림 「빈약한 부엌」(Die magere Kiche)이다. 브뤼겔은 장애인이나 아이..
3. 헤겔 : 정점에 선 근대철학 비판철학과 헤겔 헤겔은 ‘변증법’이란 이름이 살아 있는 한 그 이름을 잊기는 어려울 정도로 변증법적 사고를 체계화한 철학자로 유명합니다. 특히 헤겔의 제자임을 자처했던 맑스를 통해서, 그리고 맑스주의 내의 유수한 철학자들을 통해서 헤겔은 헤겔철학의 영역 밖으로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해 왔습니다. 20세기의 중반기까지, 그리고 일부 지역에선 지금까지도 헤겔은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사람입니다. 헤겔의 사상은 매우 복잡하고 난해하며 걸쳐 있는 범위가 방대해서, 지금과 같은 자리에서 제대로 요약하는 것은 능력을 떠나 어려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저 역시 이런 무리한 욕심은 애초부터 내지 않을 생각입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와 관련해서 헤겔의 입론을 ..
2. 피히테 : 근대철학과 자아 ‘자아’의 복권 피히테는 오직 12개의 범주만을 가지고 있는 칸트의 선험적 주체가 확실한 만큼이나 공허하다고 생각하며, 주체(피히테 용어로는 자아)의 활동과 무관하게 정의되어 있다고 비판합니다. 오히려 판단의 범주나 원리는 자아(주체)의 활동과정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특히 그가 주목하는 지점은 칸트철학의 인식론적 문제점입니다. 그것은 ‘사물 자체’와 ‘선험적 주체’라는 칸트의 개념에 관련된 것입니다. 피히테는 일단 ‘사물 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고 봅니다. 칸트에 따르면 사물 자체는 ‘있기는 있으되 인식되지 않는 무엇’입니다. 그러나 사물 자체가 인식되지 않는 무엇이라면 사물 자체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인식했는가 하고 피히테는 반문합니다. 무언가가 있..
제3부 독일의 고전철학 : 근대철학의 재건과 ‘발전’ 1. 칸트 : 근대철학의 재건 근대철학의 위기와 칸트철학 앞서 말했듯이 ‘근대철학의 비조’라는, 지금까지도 데카르트가 누리고 있는 영광은 신학의 지배 아래 있던 철학, 신의 지배 아래 있던 인간을 신학과 신으로부터 독립시킴으로써 근대적 사고를 가능케 하는 근대적 문제 설정을 기초지우고 방향지웠다는 공적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카르트로선 자명하고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생각하는 나’ 즉 인식주체가 매우 불확실하며, 진리 역시 극히 취약한 기초를 갖고 있음이 흄으로 인해 드러났습니다. 진리는커녕 인과법칙조차도 있다고 할 수 없으며, 주체가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지각의 묶음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데카르트가 마련한 근대철학의 전제가, 그 출발..
4. 흄 : 근대철학의 극한 과학주의에서 회의주의로 근대철학을 그 극한으로까지 몰고 갔던 사람은 누구보다 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하 알다시피 흄의 철학은 ‘회의주의‘로 불려지는데, 대개는 회의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그의 사상에 대한 평가를 일축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한 근대철학에서 그러한 회의주의가 나타난 것은 무엇 때문이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근대철학 전반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매우 역설적인 중요성을 갖습니다. 흄의 출발점은 로크와 비슷합니다. 그 역시 엄격한 과학적 지식을 추구합니다. 그에 따르면 “자연과학의 성과를 빌려 인간학을 구성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는 과학의 일종으로 간주되던 심리학에 기초해서 ‘경험적 인간학’을 구성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경험과 관찰이 일차적 위..
3. 버클리 : 유명론에서 관념론으로 로크에 대한 두 가지 비판 버클리는 로크 비판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입론을 세웁니다. 그의 로크 비판은 일단 두 가지로 나누어 얘기할 수 있습니다. 첫째, 실체의 개념에 대한 비판입니다. 로크는 모든 복합관념은 오성(정신)이 결합한 것이고 명목적인 것일 뿐이라고 하면서, ‘실체’에 대해서만은 예외로 한다고 합니다. 즉 물질과 정신이라는 실체는 ‘예외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겁니다. 버클리는 이런 예외조항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둘째, ‘제1성질’에 관한 비판입니다. 로크는 대상의 성질이란 모두 인식주체가 경험한 것이요 주관적이라고 하면서, 오직 제1성질만은 예외로 둡니다. 그러나 버클리는 제1성질만 유독 물질 그 자체에 속하는 객관적 성질이라고 할..
2. 로크 : 유명론과 근대철학 로크의 입지점 알다시피 로크는 경험주의를 하나의 사조로, 흐름으로 만들어낸 사람입니다. 이러한 로크의 철학을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지반이 있습니다. 하나는 데카르트가 새로운 장을 열었던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입니다. 신에게서 독립한 주체, 그래서 존재ㆍ인식ㆍ가치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던 근대적 주체가 로크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한 지반이 됩니다. 진리라는 인식의 목표 역시 마찬가지지요. 다른 한편 그는 갈릴레이, 뉴턴, 호이겐스 등이 이룩한 과학혁명의 획기적 효과 속에서 사고했습니다. 즉 근대 초의 과학혁명이 로크의 사상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제 과학은 진리에 이르는 가장 커다란 길, 어쩌면 암묵적으로는 유일한 길로 간주됩니다. 데카르트가 기초를 닦아놓..
제2부 유명론과 경험주의: 근대철학의 동요와 위기 1. 유명론과 경험주의 실재론과 유명론 근대철학의 다음 장은 경험주의라고 불리는 철학적 흐름입니다. 이는 주로 영국에서 발달했고, 지금까지도 영국의 미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흐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인식주체의 경험이 지식의 연원이자 진리의 근거”라는 것입니다. 철학사에서 이런 경험주의의 중요한 사상가로 꼽히는 사람은 아시다시피 베이컨과 로크, 버클리와 흠입니다. 그러나 경험의 중요성을 얘기한 것으로 경험주의 사상가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베이컨은 흔히 알고 있는 이 사상가들의 반열에 오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러셀조차도 “베이컨은 자신이 과학에 대해 그토록 강조했으나 사실은 당시의 가장 중요하고 일반적인..
2. 스피노자 : 근대 너머의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근대철학을 통틀어서 가장 독특하고 변종 같은 철학을 세웠습니다. 그는 데카르트의 영향 아래 철학을 연구했고,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나름의 근본적인 비판을 수행했습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대부분의 근대철학자가 데카르트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비판의 근본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게 바로 데카르트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스피노자였음은 상당히 역설적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데카르트의 철학이 갖는 특징, 나아가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이 갖는 중요한 특징에 대해 좀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피노자에 대해 다소 상세하게 얘기하는 것은 그런대로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셈입..
제1부 철학의 근대, 근대의 철학 1. 데카르트 : 근대철학의 출발점 중세의 철학 이제 근대철학의 출발점이라는 주제로 들어가 봅시다. 근대철학에 대해 얘기하려면 가장 먼저 ‘근대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근대 전체에 대해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야 할 범위를 철학으로 제한해서 문제를 다시 제기한다면, ‘철학에서 근대란 무엇인가?’ 혹은 ‘철학적 근대란 무엇인가?’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기대에 못 미친다면 미안한 일이지만, 저는 지금 근대에 대한 어떤 심오한 이야기를 하려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에서 출발하고자 합니다. 근대란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중세와의 대비 속에서 중세와 구분선을 그음으로써 정의되는 그런 시기..
서론 포스트모던 ‘시대정신’ 하나의 사상, 하나의 시대정신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은 이젠 너무도 분명한 듯 보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런 선언을 아직 들어보지 못한 분이 있다면 시대의 조류에 매우 둔감한 분임에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어디서나 거론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는 하나의 사상이나 시대정신이 더 이상 세상을 지배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들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했습니다. 나아가 최근의 다양한 사회현상들을 ‘포스트모던하다’라는 형용사로 특징짓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직도 이런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 사조들, 예를 들면 맑스주의 같은 것들은 시대착오적이고 낡은 ‘옛이야기’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점에서 지금 우리는 또 하..
책머리에 데리다는 ‘텍스트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모든 텍스트는 그 외부의 주름이다.’ 물론 여기서 ‘외부’란 단지 통상적 유물론에서 말하듯이 사회경제적 조건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실천적 유물론에서 말하듯이 실천적 맥락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사유 안에 들어와 있는 비-사유고, 각각의 철학이 그 위로 펼쳐지며 나름의 사유의 선들을 그리는 그런 지반이다. 아니, 사유가 그것의 소재로 삼는 모든 것이다. 어느 날 사유에게 다가온 것, 그런 식으로 사유가 만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사유하면서 사용한 모든 것(책이나 언어를 포함하여), 그것이 바로 사유의 ‘외부’다. 공장이나 병원도, 감옥이나 형법도, ..
애노희락의 심리학 목차 사상체질 / 책을 읽기 전에 프롤로그: ‘다르다’는 ‘틀리다’가 아니다1. 갈등의 원인2. ‘다르다’와 ‘틀리다’3. 살림의 문화와 죽임의 문화4. 출발점에 대한 이해 제1부 사상인의 기본 성정 제1장 사상체질에 관한 개요1. 체질의 차이가 갈등의 원인이 되는 이유2. 사상체질이란 무엇인가3. 사상인의 마음 씀의 개요 제2장 사상인의 성정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1. 기본적인 기능들2. 직관, 감성, 감각, 사고 기능이 나타나는 구체적인 사례3. 정보 처리의 문제 제3장 애노희락과 사상인의 성정1. 애성과 천시 / 태양인의 태양 기운애성(哀性)은 천시(天時)를 듣는 것이다사기(詐欺)란 무엇인가애성(哀性)이 실생활에서 나타나는 모습 2. 노성과 세회 / 소양인의 소양 기운노..
부록 삼국지 이야기 책이 좀 어려워도 마지막이 재미있으면 재미있는 책으로 기억된다고 한다. ‘사상인의 심리연구’라는 만만치 않은 주제를 끝까지 잘 따라와 준 독자분들에 대한 보답으로 마지막에는 재미있는 삼국지 이야기를 좀 해보도록 하자.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들의 진짜 성격이 어땠는지는 알 방법이 없고, 또 안다고 해도 공부에 별 도움이 안 된다. 그보다 소설을 통해 가공된 인물 쪽이 오히려 공부거리가 된다. 소설가들이 마구 인물을 만드는 것 같아도 인물의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일관성을 유지하려다보면 사상인 중의 한 모습을 묘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실존 인물보다는 소설 속에서 약간 가공되어 나오는 인물들을 관찰하는 것이 사상기운을 느끼기에 더 쉽다. ..
에필로그노력하는 만큼 좋아진다 1. 일반 독자들에게 이로써 사상인의 마음 돌아가는 것에 대해 필자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얼추 다 한 것 같다. 사상인의 기본적인 성정(性情), 그 기본적인 성정(性情)이 드러나는 모습, 약점을 극복하는 과정과 잘못되어 빗나가는 모습, 마지막으로 가장 타락했을 때 나오는 모습까지 다 짚어보았으니, 꼭 해야할 이야기는 다 끝난 듯하다. 뒤에 부록으로 붙인 삼국지 이야기가 남았지만, 그것은 이론적인 이야기는 아니니까, 이 정도에서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도록 하자.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결론으로 남길 만한 것은 몇 가지 안 된다. 세상을 받아들이고, 세상에 대처하는 주된 기능은 사람마다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1. 사람을 하나의 기준으로 우열을 매겨서는 안 된다...
제11장 인의예지와 체질 앞에서 각 체질별로 가장 타락한 모습에 대해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박정희의 변신을 이야기할 때였다. 그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이 부분 자체도 의미가 있지만, 이 내용은 인의예지라는 유교의 기본 덕목과 관련된다. 동양적인 가치관에 중점을 두는 독자에게는 인의예지와의 관련 부분을 언급하는 것이 체질의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1. 인(仁)과 예(禮)의 충돌 유교에서는 인간의 덕목으로 인의예지를 꼽는다. 이 모두가 어느 정도 이상의 경지에 가면 서로 부딪히는 일이 없겠지만, 낮은 경지에서는 좀 다르다. 인(仁)과 예(禮)가, 의(義)와 지(智)가 서로 부딪히는 경향이 있다. 인(仁)은 직관적으로 작용한다. 또 인은 나와 가깝고 멀고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다...
제10장 보수성과 개혁성 보수성과 개혁성은 기본 성정(性情)과 사심(邪心), 태행(怠行), 박통(博通), 독행(獨行) 등이 모두 어울려서 종합적으로 나타나는 태도다. 체질에 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어가는 시점에서 한 번쯤 다뤄볼 만한 주제다. 개요를 먼저 이야기하자면, 기본 성정(性情)은 개인적 성향의 보수성/개혁성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사회적 성향의 보수성/개혁성은 굳이 체질에 따른 경향을 보이지는 않는다. 1. 개인적 성향과 사회적 성향의 차이 체질에 대해 설명한 시중의 책들을 보면, ‘태음인은 보수적이다’ ‘태양인은 급진적이다’라는 식의 표현들이 종종 나온다. 그런데 ‘보수’ ‘진보’라는 용어가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른 용어들 중 하나라서 문제다. 말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듣는 사람..
제9장 태행(怠行)과 독행(獨行) 태행(怠行)이란, 글자 그대로 게으른 행동이다. 독행(獨行)이란, 지조를 지키며 꿋꿋이 나아간다는 뜻이다. 사심(邪心)과 박통(博通)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자신이 약한 영역에 요구되는 능력을 얻고자 할 때 남을 흉내 내어 잘못 가는 경우와, 제대로 도달하여 뛰어난 능력을 얻게 되는 경우를 각각 가리키는 말이다. 사심(邪心)은 다른 체질의 마음 씀을 배우려 할 때 어설피 흉내 냄으로써 마음 씀이 잘못되는 것이고, 박통(博通)은 어설피 흉내 내지 않고 자신의 장점을 꾸준히 늘려감으로써 자신이 약하던 영역에서 바르게 마음을 쓰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사심(邪心)과 박통(博通)이 마음의 문제라면, 태행(怠行)과 독행(獨行)은 행동의 문제다. 타인의 행동을 잘못 흉내 내는 것..
제8장 정보의 왜곡 세상을 인식하는 과정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과정을 거쳐 이뤄진다. 이 과정이 왜곡되면 세상에 대한 인식 역시 왜곡된다. 따라서 사회적으로는 언론의 문제와 관련된다. 또한 정보의 문제는 사람들 사이의 교류의 문제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관계에서의 정보 왜곡은 사람들 사이의 논쟁이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번지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앞에서 천시(天時)와 사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철새 정치인들에 대해 잠깐 언급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철새 행각이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진짜로 믿고 있는 경우가 꽤 많다는 내용이었다. 정보 왜곡 문제도 마찬가지다. 물론 ‘어차피 누구나 자기 이익을 위해서 적당히 왜곡하며 사는 것 아니냐’는 뻔뻔스런 논리를 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명백한 왜곡..
제7장 사심(邪心)과 박통(博通) 1. 교심(驕心)과 주책(籌策) / 태음인의 태양 기운 직관과 감각의 차이 그냥 ‘사심(邪心)’ ‘태행(怠行)’ ‘박통(博通)’ ‘독행(獨行)’ 하니까 좀 딱딱해 보이지만, 각 체질별로 이야기하게 되면 그렇게 딱딱한 이야기는 아니다. 계속 태양, 소양, 태음, 소음의 순서로 다루었으니, 이번에도 그 순서대로 하자. 즉 태양 기운과 관련된 이야기부터, 그러니까 사람을 기준으로 보면 태음인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태양인을 설명할 때, ‘태양인의 귀가 천시(天時)에 밝아 사람들이 서로 사기 치는 것을 잘 듣는 것이 태양인의 애성(哀性)의 근본이다’라고 했다. 또 ‘태양인은 직관이 강하다’는 말과, ‘양인(陽人)은 부정적 요소를 줄이는 것에, 음인은 긍정적 요소를 늘리는 것에 ..
제2부 체질에 따른 약점과 극복 제6장 약점 극복의 개요 1. 왜 약점에 도전하는가 이 정도면 기본적인 성정(性情)에 대한 부분은 거의 다뤄진 것 같다. 앞으로는 자신이 약한 영역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가 나온다. 사심(邪心)과 이의 극복, 태행(怠行)과 이의 극복의 순서로 이야기가 전개될 것이다. 체질별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제까지의 이야기 흐름을 한번 정리해보자. 이 책의 처음에 가장 강조했던 것이, ‘같다/다르다’ ‘옳다/그르다’를 구분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야 다른 것끼리 맞을 수 있는 방법이 찾아지고, 다른 것이 틀린 것이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다른 것을 그른 것으로 보니까 맞출 생각을 못하고, ‘틀렸다’라고 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좋다/나..
제5장 법과 질서의 존중 1. 법을 대할 체질에 따라 받는 느낌 질서의 존중과 경시 앞장의 설명으로 사상인의 성정(性情)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도구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처음에는 직관, 감성, 감각, 사고가 각각 잘 발달된 사람이라는 내용에서 출발했고, 이어서 애노희락(哀怒喜樂)의 성(性)과 정(情)에 대한 부분들을 이야기했다. 이제 주관, 보편, 특수, 객관을 각각 중요시하는 사람들이라는 새로운 설명 방법을 하나 더 얻었다. 이 각각은 서로 동떨어진 특성들이 아니라, 서로 다 연결되어 나오는 내용들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이 중에서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용어를 사용하면 될 것이다. 융이제마주장을 내세울 때직관태양주관, 자신 있게 주장감성소양보편, 강하게 주장감각태음특수, 끈질기게 주장사고소음객관,..
제4장 보편 / 특수, 주관 / 객관 체질에 대한 기본 설명에서는 벗어나지만 묶어서 하나의 주제로 다루는 편이 체질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는 주제들이 몇 가지 있다. 그 중에서 보편 / 특수, 주관 / 객관의 문제를 먼저 다루도록 하자. 이 각각을 어느 정도 중시하는가의 문제가 각 체질에 따른 기본 특성에 가까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다뤘던 직관, 감성, 감각, 사고만큼이나 기본 성정(性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또 이런 치우침은 사심(邪心)이 강해졌을 때 더 강화되는 면도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을 여기서 한 번쯤 다루고 나면 뒤의 이야기가 여러 가지로 쉬워진다. 각 체질에 대해 분석할 기본 도구를 하나 더 가지는 셈이기도 하고, 뒤에서 설명할 사심(邪心)에 대한 예비 정보도 되기 때문..
제3장 애노희락과 사상인의 성정 직관, 감각, 감정, 사고라는 네 가지 단어만 가지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지만, 이 정도에서 정리하기로 하자.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이 네 가지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기본 성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기본 성정만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결국은 이 체질은 이렇다는 식의 단정론에 빠지게 될 뿐이다. 기본 성정들이 어떻게 변해가며, 장점을 어떻게 넓히고 약점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이르기까지 할 이야기가 많다. 이제부터 『동의수세보원』에 나오는 용어들을 하나씩 익혀나가도록 하자. 『동의수세보원』은 애노희락의 성정(性情)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즉 애성(哀性), 애정(哀情), 노성(怒性), 노정(怒情), 희성(喜性), 희정(喜情), 락성(樂性), ..
제2장 사상인의 성정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1. 기본적인 기능들 사상기운(四象氣運) 사상의학의 가장 기본적인 책은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가 쓴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이라는 책이다. 하지만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면서 바로 『동의수세보원』의 내용을 설명하면 대부분은 상당히 어려워한다. 일단 용어가 문제다. 태양, 소양, 태음, 소음이라는 용어부터가 그렇다. 동무 시절에 글을 읽을 줄 안다는 사람에게는 태소음양(太少陰陽)이라는 말은 낯선 용어가 아니었다. 들으면서 무언가 감이 잡히는 말에 속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음양이라는 표현을 익숙하게 사용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제일 좋기로는 독자 여러분들의 음양에 대한 이해를 그 당시 지식인들의 일반 수준까지 끌어올려 놓고 이야기를 시작..
제1부 사상인의 기본 성정 제1장 사상체질에 관한 개요 1. 체질의 차이가 갈등의 원인이 되는 이유 ‘다름’의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면, 이제 비로소 중요한 ‘다름’의 내용들을 배울 준비가 된 셈이다. “왜 하필이면 체질의 문제를 중요한 다름의 하나로 취급하는가?” “체질의 문제가 중요한 갈등의 원인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자. 오래 전에 읽어서 어디에서 보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집단적으로 조난(遭難)을 당했을 경우의 생환율(生還率)에 대한 연구를 읽은 기억이 있다. 연령, 성별 등이 비슷한 집단의 경우보다 남녀가 섞여 있고, 아이, 어른, 노인이 섞여 있는 다양한 구성원을 가지는 집단 쪽이 살아 돌아오는 경우가 더 많다는 ..
프롤로그‘다르다’는 ‘틀리다’가 아니다 1. 갈등의 원인 인간 사이의 갈등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겨난다. 하지만 다른 것 자체가 갈등의 원인은 아니다. 남/여, 부모/자식, 스승/제자와 같이 확연히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는 사람들끼리 별 갈등 없이 원만하게 잘 지내는 경우도 많이 있다. 다름이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것은 ‘다르다’는 상황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두 가지다. 우선, 다른 것을 무리하게 같게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을 다르게 놓아둔 채로 조화를 이루려고 하지 않고 한 가지 방식으로 통일을 이루려고 하는 방식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두 번째는, 나와 다른 사람을 보았을 때 그 다름의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즉 다른 것을 같다고 생각하여 ..
사상체질(四象體質) 태양(太陽)기운소양(少陽)기운태음(太陰)기운소음(少陰)기운성(性)애성(哀性)노성(怒性)희성(喜性)락성(樂性)천기(天機)천시(天時)세회(世會)인륜(人倫)지방(地方)정(情)애정(哀情)노정(怒情)희정(喜情)락정(樂情)인사(人事)사무(事務)교우(交遇)당여(黨與)거처(居處)박통(博通)주책(籌策)경륜(經綸)행검(行檢)도량(度量)사심(邪心)교심(驕心)긍심(矜心)벌심(伐心)과심(誇心)독행(獨行)식견(識見)위의(威義)재간(才幹)방략(方略)태행(怠行)탈심(奪心)치심(侈心)나심(懶心)절심(竊心) 태양인소양인태음인소음인 책을 읽기 전에 사람이 살다보면 주변 사람들과 이런저런 갈등 상황에 부딪힌다. 손해와 이익이 누가 봐도 뚜렷한 상황은 오히려 쉽다.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욕심쟁이거나 막..
시네필 다이어리 목차 철학자와 영화의 만남 프롤로그 철학의 멘토, 영화의 테라피 1. 철학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 2. 행복한 오독의 막춤 3. 영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삶과 철학이 입맞추는 순간 본문 굿 윌 헌팅과 수전 손택(Susan Sontag): 편집되는 고통, 유통되는 슬픔을 넘어 1. 편집되는 고통, 유통되는 슬픔 2. ‘천재’로 호명되는 순간 ‘죄수’로 호명되다 3. ‘천재’라는 꼬리표가 담을 수 없는 것들 4. 당신의 불행이 당신의 질병을 부른다? 5. 전시되는 고통, 소외되는 인간 6. ‘가위손’을 닮은 천재 소년, 사랑에 빠지다 7. ‘연민’의 마지노선을 넘을 수 있을까 8. 난, 널, 사랑하지 않아…… 9. 나는 두렵다, 진짜 나 자신을, 만나게 될까 봐…… 10. 네 잘못이 아니야..
3. 방황의 시간을 함께 해준 16명의 철학자와 16편의 영화 이야기할 수 없는 모든 것을, 혹은 이야기하기조차 금지된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바로 ‘옛날 옛적에(Once Upon a Time)’의 문화적 파워가 아닐까. 철학자와 영화 사이의 커플 매니저를 자청한 것도, 어쩌면 나 자신이 아주 서툰 이야기꾼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네필 다이어리』는 커다랗게 구멍을 내버린 내 마음의 창 너머로, 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세상을 향해 나 자신의 부끄러운 속내를 속속들이 내보이고야 말았다. 내가 사랑한 철학자들과 함께 관람한 이 영화들이 우리가 이룬 ‘성취’가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것, 우리가 미처 꾸지 못한 꿈들의 잔해를 모아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꿈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
2. 영화 속 주인공과 우리들의 닮은 상처 10대 시절에는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20대 시절이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어엿한(?) 30대가 되자 문득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행복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굳이 순위를 따진다면 다는 ‘대단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고,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결국,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이제는 대단한 사람이나 사랑받는 사람보다 ‘그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임을 절감한다. 『시네필 다이어리』를 연재하면서 나는 미처 ‘좋은 사람’이 되기도 전에 덜컥 ‘행복한 사람’이 되어버린 듯하다. 너무 빨리 글 쓰는 사람의 행복을 알아버린 것 같아, 그 행복만큼 커다란 마음의 빚을 지게 된 셈..
대책 없는 기다림. 무적의(?) 학습 비법 1. 영화야말로 철하고가 접신할 수 있는 안테나 스무 살 무렵, ‘나는 너무 무지하다’는 생각 때문에 잠 못 이루며 한 3년쯤 산에 들어가 책만 읽다. 오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책을 열심히 못 읽기 때문에 나의 무지가 구원받지 못하는 거라 믿었다. ‘언젠가’ 시간이 허락되면 오직 책장에서만 줄기차게 서식하고 있는 필독도서 리스트를 진정으로 마스터하리라. 그러면 바람직한 지식인까지는 아니어도 부끄러운 책상물림 신세는 변하겠지? 하지만 그 언젠가의 기적은 10여년이 지나도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앞으로도 실현되지 못할 것 같다. 스무 살의 무지막지한 탐독의 욕구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최근에야 나는 그 ‘탐독의 불가능성’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내 ..
18. 내 안의 너무 많은 나를 긍정하는 법 일반적으로 살상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 -한나 아렌트 비즐러의 행동은 결코 멀리서만 짝사랑하는 여인을 위한 낭만적 희생이 아니었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책을 판매하는 서점 점원이 선물 포장을 원하시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그건 저를 위한 것입니다(Das ist fur mich).”라고. 과묵하고 냉정해 보이기만 하던 비즐러가 이 영화 속에서 가장 따스하게 웃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멋진 라스트 신은 자신의 희생이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웅변하는 듯하다. 비즐러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타인의 사생활을 낱낱이 도청하며 타인의 삶을 파괴할 만반의 준비를 갖..
17. 감사의 마음을 담아 바칩니다 이젠 뭐든 당신 맘대로 쓸 수 있잖소, 이게 당신이 꿈꾸던 나라 아니었소? 하지만, 이렇게 통일된 연방 독일이 진정으로 예술가들이 원했던 거요? 더 쓸 게 남아 있소? 사람들에겐 더 이상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소. 여긴 진정한 자유가 있는 연방공화국인데 말이오. -영화 『타인의 삶』 중에서. 독일이 통일된 후 2년이 지나고, 드라이만은 크리스타가 주연을 맡았던 연극을 다른 배우가 공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깊은 회한에 잠긴다. 그는 아내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씻어내지 못한 채 우울한 나날을 보내는 듯 보인다. 그는 헴프 장관을 우연히 만나 오랫동안 참았던 질문을 던진다. 왜 나를 연금하지 않았느냐고. 왜 나만은 감시대상에서 제외되었느냐고. 헴프 장관은 코웃음을 치며 ..
16. 아무 것도 아닌 인간 우리 시대의 진정한 난점은 전체주의가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후에도 전체주의의 고유한 형식이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 그렇게 비즐러는 모든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커리어’를 잃고 사회적 지위와 명성까지 함께 잃어버린다. 그는 기계적으로 편지봉투를 뜯는 일만 반복하면서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한다. ‘타인의 편지’를 미리 뜯어보아 감시하는 일 또한 ‘이미 해방된’ 비즐러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남아 있는 자신의 삶을 위해 그 비루한 노동을 견딘다. 그처럼 강인한 인간이라면, 정말 20년 동안이라도, 설사 평생이라도, 그 단조로운 노동을 참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역사적 대격변이 일..
15. 표상의 세계에서 현상의 세계로 아렌트가 학생들에게 했던 첫마디는 “이론은 없습니다. 모든 이론을 잊으세요(No theories. Forget all theories).”였다. 그리고 곧바로, “생각을 중지하라”는 것이 자신이 우리에게 한 말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왜냐하면 “사유와 이론은 같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한 사건에 대한 생각은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는다면 그것은 잊혀지고” 그러한 망각은 우리 세계의 유의미성을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나 아렌트, 제롬 콘 편집, 김선옥 옮김, 『정치의 약속』, 푸른숲, 2007, 『정치의 약속』 편집자 서문 중에서. 비즐러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크리스타와 드라이만을 도왔지만, 죽어가는 크리스..
14. ‘what’을 넘어 ‘who’가 되는 법 근대에 무세계성(worldlessness)이 증가한 것, 즉 우리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소멸한 것은 사막의 확산으로도 묘사할 수 있다. (……) 우리가 사막의 조건에서 고통 받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인간적이며 여전히 본래적이다. 위험한 것은 사막의 진정한 거주자가 되어 거기에 익숙해지는 일이다. -한나 아렌트, 제롬 콘 편집, 김선옥 옮김, 『정치의 약속』, 푸른숲, 2007, 246~247쪽. 만신창이가 된 영혼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크리스타. 그녀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억지로 씻어내는 몸짓으로, 남편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샤워실에서 목욕을 한다. 말없이 이틀 동안 외박을 하고도 변명조차 하지 않는 아내를 향해, 드라이만은 대..
13. 예술을 볼모로 소중한 사람의 비밀을 밀고하다 완전히 이해를 포기하는 것, 타자가 타자로서 존재하고 타자로 존재하려고 하는 것을 긍정하는 것,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거리를 줄이지 않는 것, 친밀권은 그러한 타자와의 느슨한 관계의 지속도 가능하게 한다. -사이토 준이치 지음, 윤대석/루수연/윤미란 옮김, 『민주적 공공성』, 이음, 2009, 110쪽. 국가안보부는 끝내 크리스타를 체포하여 그녀가 남편을 밀고하도록 종용한다. 그들은 시작부터 치명적인 발언으로 심약한 크리스타의 감정을 자극한다. “당신은 멍청한 남자와 결혼했어요. 그래서 당신이 누려야 할 자유를 많이 빼앗겼죠.” 크리스타가 불안한 눈망울을 굴리며 신문을 받는 동안, 드라이만은 집안을 수색당하고 있다. 목표물은 바로 드라이만이 『미러』지에 ..
12. 한 사람의 힘 드라이만: (자살한 예르스카에 관한 글을 친구들에게 보여주며) 내 원고 괜찮을 것 같지 않나? 친구 1: 모든 면에서 나무랄 데가 없어. 친구 2: 이런 글을 여기서는 펴낼 수 없다니, 말도 안 돼. 신이 우릴 버렸나봐. 친구 1: 서독의 잡지사에 보내보는 건 어떻겠나? 거기는 제한규정이 별로 없으니 말야. 드라이만은 드디어 ‘행동’을 감행한다. 모든 것을 걸고 예술가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몸짓, 그것은 글쓰기였다. 이제 이 글쓰기의 ‘수신자’가 바뀐다. 국내의 삼엄한 검열장치를 통과하지 않고 직접 외국의 독자들에게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알리는 것이다. 드라이만은 언론계 및 예술계에 있는 친구들과 상의 끝에 서독의 『미러』지에 자신의 글을 싣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한다. 그 과정에서..
11. ‘사이’에 존재하는 법 독일민주공화국은 1977년 이후로 자살자의 통계를 내지 않고 있다. 스스로 죽음에 이른 사람들, 그들은 피 흘리지 않는, 열정이 없는 삶을 참지 못했다. 죽음만이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9년 전, 자살통계를 중단한 후, 유럽에서 동독보다 사망률이 높은 나라는 단 하나, 헝가리이다. (……) 오늘 내가 쓰려는 것은 얼마 전 자살한 위대한 극작가 예르스카에 대한 것이다. -영화 『타인이 삶』 중에서, 드라이만의 독백 이제 비즐러가 사용하던 ‘도청용 헤드폰’에서는 단지 ‘감시당하는 자의 신상정보’를 넘어서서, 그 이상의 것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자살한 예술가 예르스카가 선물한 악보를 피아노로 직접 연주하는 드라이만. 드라이만이 연주하는 『선한 사람들을 위한 소나타』는 비즐러..
10. 자신을 소중히 다루는 법 버림받음은 (……) 뿌리 뽑힌 잉여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 뿌리 뽑혔다는 것은 타자가 인정하고 보장하는 장소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잉여자란 세상에 전혀 속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한나 아렌트, 이진우/박미애 옮김, 『전체주의의 기원』, 한길사, 2006, 279쪽. 비즐러는 비로소 자신에게는 없지만 드라이만 부부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그는 남부러울 것 없는 지위를 누리고 있지만, 자신의 말을 믿고 자신의 말에 귀기울여주는, 오직 자신에게로만 쏟아지는 친밀한 시선의 따스함을 느끼지 못한다. 아렌트는 이 친밀한 시선이 미치는 공간, 즉 친밀권(intimate sphere)을 ‘사회적인 것’의 위력, 그 획일주의의 힘에 저항하기 위..
9. 갈등의 파문이 이는 두 경우 정부는 모든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다 동독인들은 일인당 평균 매년 2.3켤레의 신발을 사고 3.2권의 책을 읽는다 매년 6,743명의 학생들이 올A로 졸업한다 하지만 공개되지 않는 단 하나의 통계가 있다 자살률. 그건 아마도 자연사로 합산되어 발표될 것이다 국가안보부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라 서독과 비교하여 얼마나 많은 용의자들이 자살을 했는지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당신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적을 것이다 이것이 모두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다 그렇게 죽은 사람들 모두가 국가의 안전과 안녕을 위한 것이다 -영화 『타인의 삶』 중에서 남편 드라이만의 눈을 피해 거물급 정치인 헴프 장관을 만나며 자신의 예술적 생명을 보호받는 크리스타. 드라이만은 아내의 불륜을 알면..
8. 나는(보이지 않는 권력의) ‘대리인’일 뿐인가 우리가 함께 먹는 식사 때마다 ‘자유’도 합석하도록 초대를 받는다. 비록 의자는 빈 채로 있지만 자리만큼은 마련되어 있다. -한나 아렌트, 서유경 옮김, 『과거와 미래 사이』, 푸른숲, 2005, 11쪽. 우리 사회의 각종 갈등 처리비용이 무려 300조라고 한다. 공익광고는 이 무시무시한 갈등의 해결 방안이 서로를 향한 따뜻한 배려와 이해심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말 우리 모두 생글생글 웃으며 친절하게 서로를 존중해주면 저 엄청난 갈등들이 해결될 수 있을까. 갈등은 단지 따스한 휴머니즘의 악수로 망각될 수 있을까. 우리가 각종 공공기관에 ‘민원’을 호소할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저희 부서 관할이 아닌데요’ 같은 회피의 낱말들이다. 그렇게 ‘모두의 ..
7. 순전한 무사유 존경받을 만한 사회 전체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히틀러에게 굴복했기 때문에 사회적 행위를 결정할 도덕적 준칙들과 양심을 인도할 종교적 계명들(“살인하지 말라”)은 사실상 소멸해버렸다. 옳고 그름을 여전히 구별할 수 있었던 그 소수의 사람들은 실로 그들 자신의 판단들을 따라서만 나아갔고, 그래서 그들은 아주 자유롭게 행했다.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개별 사건들을 적용할 수 있는, 그들이 지켜야할 규칙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각각의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왜냐하면 선례가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규칙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한나 아렌트, 김선옥 옮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 400쪽. 유대인 학살의 핵심 책임자 아이히만이 체포된 후 예루살렘으로 압송..
6. 타인의 내면을 파괴하는 기술 알버트: (드라이든의 생일 파티에 참가한 사람들의 모습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이 사람들은 이제 자유를 갈망하지 않는군. 드라이든: (체념한 표정으로) 이 상황에서 우리가 뭘 하겠어요? 사람들은 모든 것에 익숙해져요. 알버트: 그래, 예전엔 참지 못하던 것도 결국 다 받아들이지. 이젠 아무도 변화를 기대하지 않아……. 흔히 예술가의 영감은 저마다의 권태와 절망의 ‘바닥’을 치고 나서 폭발하곤 한다. 루쉰이 오랫동안 절필한 끝에 써낸 걸작 『광인일기』를 쓰기 전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는 오랜 칩거 생활에 익숙해졌고, 아무리 혼신의 힘을 다해 글을 써도 아무런 메아리도 돌아오지 않는 세상에 절망했으며, 절망 자체에 익숙해져버려 그 어떤 사회적 활동도 하지 않았다...
5. 감시했을 뿐인데 마음에 동요가 생기다 게슈타포는 신체적인 폭력으로 인간을 파괴했습니다. 게슈타포의 선발 기준은 누가 가장 먼저 노년 여성의 얼굴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주먹으로 칠 수 있는가 였는지요. 하지만 동독의 국가보안부는 달랐어요. 심리학적으로 재능 있고 똑똑한 사람을 선별해서 뽑았죠. 사람들의 내면을 부서뜨릴 수 있는 사람을 뽑았어요. 국가보안부는 내면을 파괴하는 사람들이었고 게슈타포는 몸을 파괴하는 사람들이었죠. 국가보안부에게 감시를 당한 사람들은 사실 희생양으로 인정받기도 힘듭니다. 화려한 상처 같은 게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시간이 지날수록,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이 내적인 상처의 실체를 깨닫게 되었어요. 겉으로 안 보이는 상처들이 얼마나 정교한 계략에 의해서 생긴 것들이었는지 말..
4. 악당과 영웅이 ‘한 사람’의 몸에 공생하는 법 영웅에게는 어떠한 영웅적 자질도 필요 없다. -한나 아렌트 아렌트는 ‘역사의 법칙’ 같은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인간의 우연적 행위’야말로 중요한 정치적 변수라고 믿었다. 인간을 법칙이나 시스템에 구속시킬수록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여하는 행위의 중요성은 약화된다. 사람들은 시스템의 가면 뒤에 숨어서 자신이 짊어져야할 책임감을 잊기 쉽다. 더구나 ‘국가’라는 커다란 단위로 이루어지는 정치 공간 속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직접 살갗을 부대끼면서 서로를 이해해가는 ‘대면성’의 정치가 실종된다. ‘나 하나쯤이야’라는 태도는 결국 ‘나 하나’의 가치를 스스로 격하시키는 정치적 행위가 된다. 아렌트는 시민 각각의 ‘대면적’ 참여야말로 탈정치화되고 사생활 중심주의에 빠..
3. 영웅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것 더 이상 이 나라를 참을 수가 없어, 인권도 없고 언론의 자유도 없지 모든 시스템이 날 미치게 해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실제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글을 쓰도록 영감을 주는 것도 같은 시스템이지 우리의 양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진정한 걸작이야 -영화 『타인의 삶』 중에서 영웅에게는 어떠한 영웅적 자질도 필요 없다. -한나 아렌트 『슈퍼맨』, 『007』, 『스파이더맨』 등 각종 액션 히어로 무비를 보고 난 후 극장을 나오면 갑자기 부쩍 ‘작아지는 나’를 느낀다. 이런 영화들은 현란한 스펙터클로 관객의 이목을 사로잡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하찮게 만들어버리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한다. 우리가 얼마나 무력하고 우리가 얼마나 하찮은지를 보여주는 ..
2. 정치적 선택 속에서 정체성이 매순간 만들어지고 있다 폭력은 항상 권력을 파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총구로부터, 가장 빠르고 완전한 복종을 가져오는, 가장 효과적인 명령이 나올 수 있다. 총구로부터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은 권력이다. -한나 아렌트 서로가 서로에게 ‘잠재적 파파라치’가 되는 사회. 개인의 자발적 행위 하나하나가 시스템의 질서로 환원되어버리는 세계. 이런 세계에서는 의미 있는 공동체(meaningful community)가 만들어지기 어렵다. 사람들은 타인을 바라볼 때 우선 경계심과 의혹을 먼저 갖게 되며 타인에 대한 선의의 호기심이나 기본적인 배려조차 상실하기 쉽다. 『타인의 삶』이 묘사하고 있는 동독사회뿐 아니라 ‘www’ 시스템으로 이제 실시간으로 서로의 삶을 지치지도 않고 탐색..
타인의 삶과 한나 아렌트 ‘너’와 ‘나’를 넘어 ‘그 사이’에 존재하기 위하여 1. 타인의 삶을 빼앗는 기술 결백한 사람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로 오랫동안 심문을 받으면 분노에 휩싸이거나 자살을 하려고 하지. 반면에 죄가 있는 사람은 종종 말하기를 거부하거나 울어댄다. 자신이 그곳에 있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기 때문이지. 유죄인지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걸 인정할 때까지 계속 신문하는 거야. -영화 『타인의 삶』 중에서 이곳에서는 모든 시민들에게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다. 그들은 이름이나 성격이 아니라 번호와 기호로 대상화된다. 이곳에서는 누군가의 잘못이 곧 누군가의 감시와 처벌로 즉각 처벌된다. 이곳에 예술은 있지만 예술가의 자유는 없다. 영화 『타인의 삶』은 1984년 동독, 정보국 ..
16. 돌이킬 수 없는 차이로 인해 내가 더욱 풍요로워지는 그곳 송지원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가족을 되찾게 되고, ‘이한규’의 동생 티가 팍팍 나는 새로운 이름 ‘이상규’도 갖게 되었다. 이한규가 영국에 있는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비행기 표를 선물하고는 자신도 몰래 그 비행기를 탄 이상규-송지원. 언뜻 보아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송지원이 아무리 이상규가 되어도 다가갈 수 없는 ‘평범한 삶’의 아득한 장벽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는 누구도 배신하지 않았지만 남파공작원이었다는 사실은 그를 평생 따라다닐 것이다. 아무도 배신하지 않았지만 그 누구의 ‘편’도 아니기에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마음 편히 살 수 없게 된 송지원. 교육비는 물론 생활비 자체가 터무니없이 비싼 한국은 송지원 같은 ‘무리 안의 ..
15. 나의 존재가 무한히 작아질수록 타인의 고독에 무한히 가까워질 수 있다 인간은 예술 속에 있을 때는 삶 속에 있지 않고, 삶 속에 있을 때는 예술 속에 있지 않다. (……) 내가 예술에서 체험하고 이해한 모든 것이 삶에서 무위로 남게 하지 않으려면 나는 그것들에 대해 나 자신의 삶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책임은 죄과와도 결합되어 있다. 삶과 예술은 서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해 죄과도 떠맡아야 한다. (……) 무책임을 정당화하기 위해 ‘영감’에 의지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삶을 무시하고, 그 자신이 삶에게 무시당하는 영감은 영감이 아니라 사로잡힘이다. (……) 삶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고 창조하는 것이 더 쉽고, 예술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사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
14. 간신히 친구가 될 뻔하다가 변신은 개인의 삶 전체를 좀 더 중요한 위기의 순간 속에서 그려내는 방법의 토대가 된다. 그것은 한 개인이 어떻게 과거의 자신과 달라지게 되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의 진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한 인간의 위기와 갱생만을 볼 뿐이다. -바흐친, 『소설의 시간 형식과 크로노토프 형식』 중에서 두 사람의 상처가 은밀하게 연대하는 이 순간. 이한규가 송지원으로 인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신했듯 송지원도 이한규의 시선 속에서 새로운 존재로 변신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 순간. 뜻밖의 사건이 터지고 만다. 국정원 후배의 연락을 받고 급히 외출하는 이한규. 그를 송지원은 조용히 미행한다. 이한규가 달려간 병원 영안실에는 송지원의 친구 손태순..
13. 나는 네가 아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완전히 사라져버리지는 않는다. 모든 의미는 미래의 어느 날에는 환영파티를 갖게 될 것이다. -미하일 바흐친 이한규에게 칼을 겨눈 송지원의 눈에는 전에 없던 분노와 살기가 서린다. “왜 날 데리고 있었어? 왜 신고 안 했어?” 이한규는 자신을 향해 날카롭게 번득이는 칼을 보고도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말한다. “너 하나 잡아서 뭐하겠냐? 잡으려면 간첩단 정도는 돼야지.” 가눌 수 없는 분노로 결국 송지원은 이한규의 팔에 상처를 내고 만다. “그래 요샌 나 같은 놈 잡으면 얼마 준답니까?” 이한규는 피가 뚝뚝 흐르는 팔을 부여잡고도 평온한 표정으로 송지원을 진정시킨다. “모든 일이 잘되면, 우리 사업이나 제대로 키워보자.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대박 날 거야. ..
12. 상처 입은 사람만이 알아보는 서로 닮은 상처 우리는 타인의 육체를 포옹하거나 덮어주면서 육체 안에 갇혀 있고 육체로 표현되는 그의 영혼을 포옹하거나 덮어주는 것이다. -미하일 바흐친 흔들리는 눈빛 연기가 힘들었다. 겹겹이 싸인 감정을 숨기고 살아가는 것이 답답했다. 상황 상황마다 감독님과 얘기하면서 감정선을 정리하고 이런저런 욕심을 버리고 눈빛으로 많이 표현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캐릭터가 밋밋해질까 걱정도 하고…… 눈으로만 감정을 전달하는 게 힘드니까 나중에는 감독님께 못하겠다면서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배우 강동원 인터뷰 중에서 두 사람은 함께 살면서도 서로의 앞모습보다는 옆모습이나 뒷모습에 익숙하다. 자신의 표정을 숨기고 겹겹이 포장된 상대방의 내면을 읽어야 할 때가 많으므로. 옆모습과 뒷..
11. 어깨에 무겁게 닻을 내리고 있는 조직 이한규: (송지원이 미행하여 자신의 통화를 도청 중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영국에 있는 딸에게 전화한다.) 알버트가 피아노 가르쳐 줬어? 새 아빠 좋아? 아빠가 더 좋아? 생일 선물로 뭐 갖고 싶어? 디카? 그건 그쪽에도 사도 되잖아. 아빠가 돈 더 보내줄 테니까 엄마한테 사달라고 그래. (명절이라 바쁜 일도 전혀 없으면서) 아빠 바빠서 그만 끊을게. 송지원: (이한규의 통화를 도청하던 중, 깊은 한숨을 내쉰다. 딱히 도청할 내용조차 없는 이한규의 신산한 삶이 안쓰럽다. 지독하게 고독한 저 중년 남자의 뒷모습을 빤히 보면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그 순간 송지원의 가명 박기준을 향해 문자메시지가 도착한다.) 이한규가 보낸 문자메시지: 기준아. 저녁에 ..
10. ‘에고’와의 내전(內戰) 에고이스트는 마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나 부드러움과 유사한 그 어떤 것도 체험하지 못한다. 문제는 그가 이러한 감정들을 전혀 모른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자기보호는 일체의 사랑스럽고 애틋하며 미적인 요소들을 결여한 차갑고 가혹한 정서적-의지적 태도이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길, 2007, 44~45쪽. 에고이스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의 수많은 대상 중에 평등하게 ‘자기’를 포함시키는 건 어쩐지 은밀한 반칙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은 본질적으로 ‘타자’를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9. 인물에 완전히 동화되지도, 인물과 완전히 거리를 두지도 않는 지탱점 송지원: 그런데…… 부인은 왜 떠나신 거예요? 이한규: (원망도 미움도 남아 있지 않은 표정으로 담담하게) 내가 잘 못 해줘. 애 엄마는 영국인이랑 재혼했어. 알버트라고. 알버트가 애 이름을 영국식으로 지었다는데, 에이미래 에이미. 에이씨! 애 이름을 에이미가 뭐야, 에이미가!! 송지원: (이런 순간에도 특유의 유머를 잃지 않는 이한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렴풋이 웃는다.) 이한규: 돈 많이 벌어서 우리 딸 결혼할 때 집 한 채 해주고 싶어. 송지원: (아빠 얼굴을 한 번도 못 본 자신의 딸을 생각하는 듯, 아련한 눈빛으로) 그러실 수…… 있을 거예요.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또 다른 목소리가 발화하는 순간들이 있다. 분명히 내가 한..
8.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 나 자신의 입술은 오직 타자의 입술에만 닿을 수 있으며, 오직 타자에게만 나의 손을 올려놓을 수 있으며, 타자만을 적극적으로 딛고 일어설 수 있고, 그의 모든 것을 덮어줄 수 있으며, (……) 그의 육체와 그의 육체 안에 있는 영혼을 덮어줄 수 있는 것이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길, 2007, 74~75쪽. 농부: (아내를 다시 찾아준 이한규와 송지원에게 진심 어린 감사의 표정을 담아) 사례를 해야 할 텐데. 이한규: 찾는 데 200, 데려오는 데 200, 총 400 되겠습니다. 송지원: 부인이 직접 오셨으니까 사례는 필요 없습니다. 이한규: (사장도 아닌 송지원이 제멋대로 사례비를 눈앞에서 공중분해 시키자 어안이 벙벙한 채로 송지원을 노..
7.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을 통과하는 동안 제아무리 견고하다 해도 현실은 인간의 감각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므로, 인간은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감각이 바뀌면서 현실이 무르게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마련인데, 이를 두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이라고 불렀다. 모든 성인들은 자발적으로 고립을 택해 그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는데, 이는 현실이 오직 감각을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다. 하지만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을 경험한 그 다음 순간, 모든 성인들은 감각적 현실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계인지 깨닫게 된다. 현실이 감각적으로만 성립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모든 게 덧없을 뿐이라는 허무주의에 빠져야 할 텐데, 아이로니컬하게도 더욱더 그 감각적인 생생함..
6. 너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너를 안다 송지원: (도망간 베트남 처녀를 잡아오는 길. 이한규가 그녀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 것을 보며 눈살을 찌푸린다) 저기요.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이한규: 한 번 잡은 사람 또 도망가면 그 다음엔 대책이 없어. 송지원: 차가 달리고 있는데 어떻게 도망갑니까? (……) 우리가 경찰도 아니고, 저 사람은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인간적으로 합시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할 때, 사랑한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해버릴 정도로 깊이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아무리 사랑해도 가닿을 수 없는 존재의 견고한 벽을 느끼곤 한다. 그건 우리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랑 자체의 본성일 것이다. 사랑은 원래 아무리 해도 부족하게 느껴지게 마련이고 사랑을 통해 타인의 벽을 오히려 ..
5. 두 사람의 빛 지명훈: (수척해진 지원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자수하는 건 어떻겠니? 송지원: 제게 사상교육을 해주신 건 선생님이셨어요. 이제 조국을 배신하라고요? 교수님처럼요? 지명훈: (조국을 배신한 자의 괴로움과 스승으로서의 노여움이 복잡하게 오가는 표정으로) 그만 해라. 송지원: (스승을 상처주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고민을 털어놓을 친구가 필요했던 그는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힌다.) 지난 6년간 도망만 다녔습니다. 이제 무슨 일이든 결단을 내려야죠. 다시 찾아오지 않겠습니다. 그의 얼굴은 조명이 어두울 때 더욱 빛을 발한다. 그의 빛은 쾌활하고 명랑한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밝은 빛이 아니라 슬픔과 고독을 공깃돌 삼아 오랫동안 혼자 놀아본 사람의 빛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빛은 언뜻 ‘어..
4. 얼굴 위에 새겨진 이야기의 우주 독자는 자신을 주연배우에게 감정이입하고, 주인공을 완결하는 모든 특징들(무엇보다도 주인공의 외양)을 무시하면서 마치 자신이 그 삶의 주인공인 양 주인공의 삶을 체험한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길, 2007, 59쪽. 미술시간에 가장 어려운 과제 중 하나는 자화상 그리기였다. 거울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하루 종일 거울 앞에 붙어 있어도 내 생김새를 정확하게 포착해낼 수가 없었다. 그림 속에서나마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마구 내 모습을 ‘성형’해보고 싶기도 했고, 명랑만화 주인공처럼 내 모습의 코믹한 부분을 극대화시켜보고도 싶었지만, 온종일 결국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 채 멀뚱하게 앉아 있었다. 애꿎은 스케치북에는 좀처럼 알아볼 수 없는..
3. 타인의 이해가 어렵다는 걸 이해하는 순간 그림자: (공중화장실 문을 잠그고 송지원과 손태순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엉뚱한 제안을 한다) 춤 한번 춰봐라. 여기 아이들 유행하는 춤. 송지원과 손태순: (그림자의 진의를 몰라 한참 머뭇거린다. 그러다가 둘 다 엄청나게 수줍어하며, 정말 어쩔 수 없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한의 유명 아이돌의 춤을 춘다.) 그림자: 잘한다, 야. 공부하라고 지원해줬더니! (송지원을 가리키며) 네가 더 민첩하니까 넌 나하고 올라간다. (손태순을 가리키며) 넌 아래 있고. 남파 공작원 세 명의 급작스러운 조우를 묘사한 감독의 재치가 번뜩이는 장면이다. 베테랑 공작원 ‘그림자’의 냉혹한 카리스마와 주도면밀한 성격, 송지원의 내성적이고 순진..
2. 있는 그대로를 최대한 담담히 보여주기 위해 “당신은 내 전체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 인물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나의 전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당신은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고 계십니다.” 이런 주인공은 작가에게 미결정적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계속하여 다시 태어나며, 계속해서 새로운 완결 형식을 요구하면서도 이 형식을 주인공이 자신의 자의식으로 파괴해버린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길, 2007, 47쪽. 우리가 타인의 인상을 판단할 때 일반적으로 채택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외모와 직업이야말로 우리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정체성의 덫’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의형제』의 주인공 송지원과 이한규는 둘..
의형제와 미하엘 바흐친 피사체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앵글을 찾아서 1. 피사체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앵글을 찾아서 내가 완결되고 사건이 완결되었다면, 나는 살 수 없으며 행동할 수 없다. 살기 위해서는 완결되지 않아야 하며, 자신에게 열려 있어야만 한다. -미하일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길, 2007, 38쪽. 우리는 가족이나 연인, 절친이나 룸메이트처럼 가장 가까운 타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는 타인을 엿보며 끊임없이 탐색전을 펼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자신도 모르게 신경 쓰며 하루를 보낸다. 소설을 쓰는 작가와 소설 속 주인공의 관계, 영화를 만드는 감독과 주인공의 관계 또한 그렇다. 한 쪽은 끈질기게 엿보고 한 쪽은 좀처럼 자신을 보여주려 하지 않..
17. 타인의 추억을 앓는 산책자를 위하여 맥스는 누들스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이 냄새나는 거리에서 살아갈 거냐고. 이 더러운 거리의 넝마주이 같은 삶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믿었던 맥스는 뉴욕의 화려한 스카이뷰에 감춰진 뒷골목의 기억, 그 거리를 지나간 모든 사람들의 흔적을 담고 있는 더러운 땅바닥의 냄새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 더럽고 시끄럽고 정신없는 뒷골목의 분위기야말로 누들스가 그 거리에서 느꼈던 소중한 아우라의 일부였다. 마약에 흠뻑 취해서라도, 그 허망한 환각과 도취 속에서라도 되찾고 싶은 세계의 아우라는 『섹스 앤 더 시티』식의 화려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거리에 단지 흥미로운 볼거리가 많거나 소매치기 대상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거리의 부산스러움 자체를 사랑하고, 그 거리만이 지..
16. 되살이 하고 싶은 욕망, 오마주 내가 보고 있는 사물들은, 내가 그 사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폴 발레리 우리는 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까지 그리워하는 것일까. 뚜렷한 그리움의 대상이 없이도 무언가 아득히 멀리 있는 것을 향한 그리움이 강렬하게 솟구칠 때, 그 그리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세상 어디에도 없지만 소설 속에서만은 생생하게 묘사된 도시, ‘무진’을 그리워하듯이, 우리는 경험하지 못했지만 ‘이야기’를 통해 각인된 머나먼 타인의 체험을 그리워할 수 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ome in America)』의 시대 또한 ‘체험하지 못했지만 얼마든지 그리워할 수 있는’, 현대인의 노스탤지어를 아프게 건드린다. 100년 후에도..
15. 길을 잃어야만 포착할 수 있는 풍경 나는 비 많이 내리는 나라의 왕 같아. 부자이지만 무력하고 아직 젊지만 늙어버려. (……) 사냥가도, 매도, 아무것도 그에게 즐거움 되지 못한다. 발코니 앞에서 죽어가는 자기 백성마저도. 총애 받던 광대의 우스꽝스런 노랫가락도 이 견디기 어려운 병자의 이맛살을 펴지 못한다. 나리꽃으로 수놓은 그의 침상은 무덤으로 바뀌고, 왕이라면 아무나 반해버리는 치장 담당 시녀들이 제 아무리 음란한 치장술을 만들어내도 이 젊은 해골로부터 미소를 끌어내지는 못한다. 그에게 금을 만들어주는 학자마저도 그의 몸에서 썩은 독소를 뽑아내지 못한다. 권력자들이 말년에 갈망하는 로마인들이 전해준 피의 목욕도 그 속에 피 대신 푸른 ‘망각의 강’이 흐르는 이 마비된 송장을 데울 수 없다. ..
14. 욕망의 만화경적 파노라마 완전히 같으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감조차 잡지 못하고 지나쳐 가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을 줄이야! -발터 벤야민 이 영화는 범죄 스릴러 특유의 퍼즐 맞추기식 긴장감을 조성하지도, 남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팜므 파탈을 미화하지도, 마초적 의리와 무책임한 순수를 강조하지도 않는다. 멀리서 바라본다면 그저 암흑가의 갱스터나 할리우드의 셀러브리티(celebrity, 유명인사)로서 확실한 성공가도를 달려온 사람들, 혹은 멀리서 본다면 그저 인생의 실패자이자 뒷골목 룸펜의 전형인 사람들의 삶을 ‘성공 신화’나 ‘피해자의 넋두리’로 그려내지도 않는다. 이 영화는 성공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 남부러울 것 없는 인간이나 남에게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인간, 행복해 보이는 인간이나 불행해 ..
13. 모두 가졌지만 허한 이 느낌은 나는 성스러운 교향곡 속에 잘못 끼어든 불협화음이 아닌가. (……) 나는 상처이며 칼! 나는 따귀 때리기이자 뺨! 나는 깔리는 팔다리이자 짓누르는 바퀴. 또 사형수이자 사형집행관! 나는 내 심장의 흡혈귀, 영원한 웃음의 선고를 받고도 미소 짓지도 못하는 버림받은 중죄인! -보들레르, 「자신을 벌하는 사람」 중에서(윤영애 옮김, 『악의 꽃』, 문학과지성사, 2003) 가장 친한 친구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너무 일찍 삶을 향한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누들스. 그가 현실의 고통을 잊는 유일한 방책은 바로 마약이었다. 중국인이 경영하는 아편굴에서 환각에 빠져 있는 누들스는 자신을 끊임없이 학대함으로써 고통을 잊으려 한다. 맥스가 연방은행을 털자는 황당한 계획을 털어놓자,..
12. 꿈의 시체로 만든 별자리들 맥스: 언제까지 이 냄새나는 거리에서 살 거야? 누들스: 난, 이 거리가 좋아. 금주법의 감시망을 피해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 맥스의 서재는 값비싼 수집품으로 가득하다. 그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휘황찬란한 의자에 앉아 스스로를 암흑가의 제왕으로 임명하는 우스꽝스런 제스쳐도 서슴지 않는다. 오직 한 여자의 사랑을 얻을 정도만큼의 재산 이상은 바라지 않는 낭만주의자 누들스에 비해 맥스의 물욕은 퇴폐와 광기로 얼룩져 있다. 그는 강간이나 살인뿐 아니라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악행을 빠짐없이 저지르면서도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처럼 행동한다. 맥스의 데보라에 대한 마음 또한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값비싼 물건’을 손에 넣고자 하는 수집가의 집착과 다르지..
11. 추악한 것을 도려내는 순간 아름다운 것도 사라진다 시간은 순간순간 나를 삼킨다. 마치 그치지 않고 내리는 눈이 굳은 몸을 덮듯이. -발터 벤야민 이 사회는 동물처럼 우둔하지만 동시에 동물이 가진 희미한 직관은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들은 맹목적인 대중으로서 온갖 위험, 바로 코앞에 닥쳐온 위험에조차 희생당하게 되며, 개인들의 목표와 다양성은 개인들을 규정하는 힘들의 동일성 앞에서는 사소한 것이 되어버린다. -발터 벤야민, 조형준 옮김, 『일방통행로』, 새물결, 2007, 43쪽. 가장 아름다운 것조차 가장 추악한 것 속에 고여 있다. 추악한 것을 도려내는 순간 아름다운 것도 함께 사라진다. 누들스의 삶 자체가 그렇다. 누들스에게 가장 아름다운 추억은 그의 가장 추악한 기억, 즉 맥스와의 기억과 ..
10. 자본의 찬란한 빛과 자본의 음습한 어둠의 대변자 산책자의 마지막 여행. 그것은 죽음으로의 여행이다. -발터 벤야민 그에게는 ‘현재’가 없다. 그에게는 ‘미래’ 또한 없다. 그에게는 오직 되돌아오는 과거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과거야말로 그의 유일한 ‘현재’다. 문제는 ‘그의 과거’와 ‘사람들의 현재’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들스는 해묵은 과거의 눈빛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지만, 사람들은 이미 각자의 생생한 현재 속에서 과거 따위는 잊고 살아간다. 그래서 노인이 된 누들스를 뜻하지 않게 재회한 옛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길을 걷다 유령과 마주친 듯 놀란 표정이다. 누들스는 그가 자라난 도시에서 사실 이제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철지난 유령이 되어버린 것이다...
9. 매일 눈앞에서 볼 수 있는데 가질 수 없다니 세계를 완전히 분해해 다시 조립해보려고 했지만 고립무원 속에서 진행되다가 결국 우주론적 ‘실패’로 끝나고만 그(벤야민)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삶과 작업은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실패한’ 20세기를 정직하게 되돌아볼 수 있는 새로운 사유의 용광로가 되어줄 것이다. -조형준, 『아케이드 프로젝트』, 한국어판 옮긴이 서문 중에서 보시오, 그러나 만지지 마시오! 이것이 벤야민의 ‘만보객’ 혹은 ‘산책자’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이었다. 마음껏 바라볼 수는 있지만 결코 만져서는 안 될 무엇. 마음껏 바라볼 수 있기에 만질 수 없는 고통이 더욱 커지는 대상. ‘화폐’로 구입하여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없다면 쉽게 만져볼 수 없는 상품들. 누들스에게 더없이 소중..
8. 멜랑콜리의 도시 바로 지금 삶을 구성하는 힘은 신념이 아니라 사실이다. -발터 벤야민 아마도 누들스의 삶을 구성하는 ‘사실’만을 모아, 아무런 은유도 해석도 없이 건조한 다큐멘터리로 만든다면, 그의 삶은 ‘실패한 갱스터의 나쁜 예’에 불과할 것이다. 그의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관객의 동경과 누들스 그 자신의 덧없는 기억에 대한 짙은 멜랑콜리(melancholy, 우울)다. 동경이 자신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 어려운 머나먼 존재에 대한 물증 없는 판타지라면, 멜랑콜리는 자신의 것일 수밖에 없는 슬픔에 대한 뼛속 깊은 자기연민이 아닐까. 누들스가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향한 깊은 멜랑콜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그가 사회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7. 기억의 별자리, 그릴수록 희미해지는…… 이야기는 참으로 오래된 소통 형식이다. 이야기는 정보처럼 순수한 사건 자체를 전달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말하는 사람의 삶 속에 뿌리박혀 듣는 사람의 경험으로 전달된다. -발터 벤야민,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해』 중에서 누들스는 이 도시가 버린 모든 것의 상징이다. 이 도시가 내동댕이친 모든 허접쓰레기들이 누들스를 키운 문화적 자양분이었다. 그는 거지와 매춘부와 소매치기와 넝마주이와 조직폭력배들 틈바구니에서 자라났고, 그들 모두의 버려진 삶이야말로 누들스가 매일 등교했던 ‘내면의 학교’였다. 이 내면의 학교를 함께 다닌 ‘동창’이라는 점에서 누들스와 맥스는 서로 통했지만, 둘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갔다. 누들스는 맥스에게 돈가방과 데보라와 친구..
6. 방황의 기술을 연구하다 한때 파스칼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죽는 사람만큼 불쌍하게 죽는 사람도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기억의 경우에도 이 말은 그대로 해당될 것임에 틀림없다. 단지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기억은 상속자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발터벤야민의 문예이론』, 183쪽. 누들스의 기억을 촉발하는 세 번째 매개체는 ‘돈가방’이다. 도망 중이던 그가 기차역에서 찾아가기로 했던 돈가방. 그 안에는 그의 인생을 걸고 벌였던 커다란 도박판의 승리를 증명하는 돈다발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의 미래를 보장해줄 것으로 믿었던 그 돈가방에는 마치 그의 꿈을 조롱하듯 철 지난 신문뭉치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 돈다발을 가져가버린 것은 둘도 없는 친구 맥스였고, 그 돈가방을 통해 누들스가 ..
5. 가장 순수했을 때 사랑했던 단 한 사람과의 추억 나타나기만 하면 무슨 소원이든 이루어지는 요정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러나 자기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를 기억해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중에 그것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도 거의 없다. -발터 벤야민, 『겨울날 아침』 중에서 이제는 그만 둔감해질 때도 되었는데. 누군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아주 사소한 자극이 다시금 옛 기억을 건드리기만 해도, 간신히 봉합해놓은 영혼의 상처는 불현듯 속절없이 파열되고 만다. 내가 가장 순수했을 때, 어떤 배신과 굴욕에도 영혼의 관통상을 입지 않았을 때. 바로 그때 사랑했던 단 한 사람과의 추억. 그 이후의 어떤 화려한 추억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이 세상 하나뿐인 맨 처음의 아..
4. 단순한 회고가 아닌 기억의 끊임없는 다시 쓰기 나의 어머니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나의 반항심과 나의 얼뜬 거리 배회를 꾸짖었는데, 이때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도시의 거리들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언젠가는 어머니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어렴풋하게 감지하였다. 아무튼 어머니와 어머니가 속한 계급, 그리고 나 자신이 속한 계급을 거부하고자 하는 감정 —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감정은 따지고 보면 그런 척하는 감정이었지만 — 은 어느 거리에서 창녀에게 말을 거는, 그 어떤 것에도 비견될 수 없는 매력에 빠져드는 원인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벤야민, 『거지와 창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2001, 21쪽. 누들스에게 유년의 기억을 촉발하는 첫 번째 매개체는 ‘시체’다. 한때 ..
3. 남루하고 비참한 어른이 되어서야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이미 사냥꾼이 되어 있다. 아이는 사물 속에서 영혼들의 흔적을 냄새 맡고 그것들을 추적한다. (……) 숲으로부터 아이는 전리품을 집으로 끌고 와 그것을 깨끗이 하고 딱딱하게 만들고, 그것들에게 걸린 마법을 풀어버린다. -발터 벤야민, 조형준 옮김, 『일방통행로』, 새물결, 2007, 90쪽. 어린 시절 누들스, 짝눈, 팻시, 뚱보는 함께 뒷골목을 어울려 다니며 좀도둑질을 일삼는다.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해 인사불성이 된 주정뱅이의 시계를 훔치려던 누들스는 프랑스에서 이제 막 이민 온 낯선 소년 맥스에게 선수를 빼앗긴다. 이 인연으로 친구가 된 누들스와 맥스는 이후 모든 것을 함께 하는 ‘절친’이 된다. 누들스 일당은 맥스와 함께 갱단의 ..
2. 어린 시절 그대로 남은 게 하나 없지만 아이의 책상 서랍은 무기이자 동물원, 범죄 박물관이자 납골당이다. (……) 아이의 삶에서는 끔찍하고 기괴하고 암울한 측면이 보인다. 교육자들은 아직 루소의 꿈에 매달려 있지만 링겔네츠 같은 작가나 클레 같은 작가는 아이들의 포악하고 비인간적인 측면을 포착했다. -발터 벤야민, 『오래된 장난감들』 중에서 시궁창 밑바닥에서 인생을 시작한 주인공이 최고의 자리를 꿈꾸다가, 최고의 기회가 바로 눈앞에 있을 때, 혹은 최고가 되자마자 처절하게 몰락하는 스토리는 갱스터 무비의 전형이다. 실제로 미국 영화에서 갱스터 무비의 원형이 확립된 시기는 1930년대, 대공황의 광기가 휩쓸던 암흑기였다고 한다. 1930년대 하면 떠오르는 대공황과 금주법을 배경으로 하면서 갱스터 무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발터 벤야민 타인의 추억을 앓는 산책자를 위하여 1. 부랑자들, 혹은 비정한 도시의 산책자들 국가는 전당포와 복권으로 프롤레타리아를 농락한다. 오른손이 베푼 것을 왼손이 빼앗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 이 소년들은 도시의 쓰레기와 찌꺼기와 잔해들을 먹고 산다. 사람들이 무심코 버린 모든 쓰레기들이 이 소년들에게는 ‘사업’의 대상이 된다. 이 소년들은 이 도시의 비밀을 신문이나 뉴스가 아닌 ‘온몸의 감촉’으로 속속들이 알고 있다. 만약 이 도시에서 오늘 일어난 살인, 절도, 방화 사건의 원인이 궁금하다면 경찰이나 교사나 공무원보다는 이 소년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 도시의 가장 맛있는 빵집을 알고 싶거나, 이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를 알고 싶을 때도, ..
15. 몽상의 스트레칭, 이성의 근육 이완법 우리가 어떤 사람을 바라보면,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군가 자기를 보고 있다고 느끼게 되면, 그 사람의 시선은 자신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로 향하게 된다. 우리가 바라보는 어떤 대상에게 아우라를 느끼는 것은 결국 그 사물에 우리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벤야민, 『보들레르에 대한 몇 가지 주석』 중에서 몽상의 세계는 의식에 발 딛고 무의식의 세계를 갈망한다는 점에서, 무의식의 환상을 체현하면서도 의식의 감각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예술가의 창조 작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화가가 자신의 몽상을 캔버스 위에 실현하는 순간, 그는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로 흔들린다. 환상과 의식 사이,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예술가는 자신의 몽상을 특유..
14. 기적적인 찰나의 순간, 수직적 시간 이윽고 시시신이 스러져간 대지 위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숲, 모든 것이 불타버린, 이제는 ‘숲’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거대한 폐허 위로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꽃과 나무와 식물들이 피어오른다. 시시신을 해묵은 전설의 귀신쯤으로 여기던 사람들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 수군거린다. “시시신은 싹을 틔우는 신이었나 봐…….” “시시신은 꽃을 피어나게 하는 신이었나 봐…….” 모두가 이 숲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마법처럼 피어오르는 꽃들을 바라보며 행복해 한다. 자신을 겨냥하는 에보시의 화승총 위에까지 아름다운 꽃을 피워 올렸던 시시신의 넋은 그렇게 아름답게 부활했다. 그는 자신의 온몸을 대지에 공양하여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된 것이..
13. 시시신을 죽이다 팽팽한 활의 떨리는 활시위여 달빛에 수런거리는 그대의 마음 예리하게 연마한 칼날의 그 아름다운 칼끝을 닮은 그대의 옆얼굴 슬픔과 분노에 숨어있는 진실한 마음을 아는 자는 숲의 정령 모노노케(원령)들뿐 모노노케들뿐…… -『원령공주』의 주제곡 중에서 재앙신의 몸에서 솟아오르는 저주의 촉수에 갇혀 함께 재앙신이 되어버릴 위기에 처한 원령공주. 에보시를 설득하고 원령공주를 구해내려는 아시타카. 아시타카의 충언에 아랑곳 않고 시시신을 기어코 살해하려는 에보시. 그리고 에보시의 군사들과 옷코토누시의 멧돼지들과 들개들. 이 모두가 벌이는 전쟁의 아수라로 숲은 짓밟히고 불탄다. “숲과 마을이 함께 살 수는 없나요?” 아시타카는 만나는 사람마다, 들개마다, 멧돼지마다 붙들고 이렇게 질문하지만 모두..
12.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균형이 깨져버린 숲 한편 에보시의 군대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연기를 피워 올려 멧돼지를 숲 밖으로 유인하여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책을 세운다. 모로는 멧돼지 부족의 최후를 예견한다. “옷코토누시는 다 알면서도 정면공격할 거야. 그게 멧돼지의 긍지라고. 마지막 한 마리까지 덤비고 쓰러지겠지.” 원령공주는 모로의 품에 안기며 눈물을 글썽인다. “엄마, 난 떠나야겠어. 옷코토누시의 눈이 되어줄래. 그는 연기 때문에 제대로 달릴 수도 없을 테니.” 모로는 사랑하는 딸 ‘산’과의 마지막 만남이 될 것만 같은 슬픈 예감을 뒤로 하고 딸을 위로해준다. “난 괜찮다. 넌 저 젊은이와 함께 살 수 있는 길도 있을 텐데…….” 원령공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인간은 싫어.” 이때 아시타카가..
11. 더 커다란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두려움을 잊다 멈출 수 없는 총알이 관통할 수 없는 벽에 가닿을 때, 우리는 종교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정확히 바로 이 지점에서 성장이 일어난다. 융은 “상담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그의 다음 성장은 바로 그곳에서 일어난다”라고 말했다. 자아(ego)란 망치와 모루 사이에 있는 금속 같은 것이다. -로버트 존슨, 고혜경 역,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에코의 서재, 2008, 117쪽. 아시타카에게 ‘관통할 수 없는 벽’은 바로 인간도 들개도 아닌 원령공주였다. 그러나 아시타카도 원령공주의 강철 방어벽 못지않은 힘으로 돌진하는, ‘멈출 수 없는 총알’이었다. 아시타카는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에 맞섬으로써 통과의례의 마지막 장벽을, 이제껏 그를 가..
10. 상생과 적대 한편 아시타카가 깨어나는 순간 거대한 멧돼지들의 무리가 원령공주와 모로를 방문한다. 에보시의 손아귀에 곧 파괴당할 위기에 놓인 시시신의 숲을 지키려고 왔다는 멧돼지들, 그 커다란 무리를 이끄는 수장은 ‘옷코토누시’다. 원령공주의 ‘엄마’인 들개 모로. 모로는 낯선 인간 아시타카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옷코토누시에게 말한다. “시시신이 이 청년의 상처를 치료해줬어 그래서 안 죽이고 돌려보낸다.” 옷코토누시는 대경실색한다. “시시신이 인간을 구했다고? 인간은 살리면서 왜 ‘나고신’은 구해주지 않았나? 시시신은 숲의 수호신이지 않은가?” 재앙신이 되어 아시타카의 마을을 공격한 거대한 멧돼지가 바로 ‘나고신’이었던 것이다. 모로는 동요하지 않고 조용히 타이른다. “시시신은 생명을 구하기도..
9. 아니무스의 눈물, 아니마의 미소 나의 가치를 키우려면, 그대의 사랑을 더 키우라(Make thy love larger to enlarge my worth)! -엘리자벳 브라우닝 몽상가의 몽상은 전 우주를 꿈꾸게 할 수 있다. 몽상가의 휴식은 물, 구름, 미풍을 쉬게 할 수 있다.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76~77쪽. 우리의 휴식의 원리인 아니마는 그 자체로 충족되는 우리 속의 본성이다. 그것은 조용한 여성성이다. 우리의 깊은 몽상의 원리인 아니마는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물’의 존재이다.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82~83쪽. 아시타카가 원령공주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시간. 그가 죽음과 삶의 경계 위에..
8. 자아의 그림자를 만나다 『원령공주』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낸 숲의 수호신 시시신은 아마도 바슐라르적 몽상의 힘이 다다를 수 있는 상상력의 극단일 것이다. 생명력으로 충만하던 원령공주의 숲에 밤이 깃드는 시간. 시시신이 거대한 몸집을 지닌 푸르고 투명한 데다라신의 모습으로 변해 아름다운 숲을 거니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다. 몽상의 세포가 깨어나는 시간. 대지와 휴식의 몽상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아시타카는 시시신의 물속에서 치유의 밤을 맞이하고 있다. 사경을 헤매는 아시타카 가까이로, 시시신이 천천히 움직일 때마다 그의 발자국 위에 아름다운 꽃과 식물이 피어난다. 시시신이 아시타카의 상처를 천천히 핥아주자 사경을 헤매던 아시타카는 거짓말처럼 상처를 딛고 일어난다. 어느새 마술처럼 돋아난 새살에 아시타..
7. 문명의 진보 vs 몽상의 몰락 범선이나 증기선을 발명한다는 것은 곧 난파를 발명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열차의 발명은 탈선의 발명이며, 자가용의 발명은 고속도로 위에서 일어나는 연쇄 충돌의 발명이고, 비행기의 발명은 곧 추락의 발명이다. -폴 비릴리오, 『미지수(Unknown Quantity)』, 2003, 24쪽. 진보의 핵심은 시간의 불가역성이다. 기차가 발명되어 교통 시스템이 일단 바뀌고 나면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나룻배의 낭만을 찾을 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기차로 정상적인 통행을 할 수 있을 때’, ‘여분의 쾌락’을 찾아나서는 감정의 사치에 속한다. 기차의 속도에 일단 길들어지면, 처음에는 공포와 경탄의 대상이었던 기차도 어느새 당연한 습관이 된다. 기차보다 조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