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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이성의 통제를 위해 육체를 억제하라 셋째, 정신과 육체의 일치(통일) 문제, 혹은 윤리학의 문제입니다. 데카르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인간의 육체, 감정, 정념(passion), 이러한 것들은 이성과 달리 절제할 줄도 자제할 줄도 모르고 굉장히 불안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안정되게 만들거나 억제하기 위해서 이성을 동원하는데 그다지 잘 되진 않습니다. 예를 들면 억울하게 남한테 맞았을 때, 그리하여 머리 끝까지 화가 나면서 싸우려는 감정이 불끈 솟아날 때, 이성은 어디 있는지 꼬랑지도 보이지 않고, 많은 사람이 불안해하는 상태가 되지요. 즉 사람들의 삶과 직결된 문제가 바로 정신과 육체의 일치, 이성과 감정의 일치라는 문제로 제기되는 겁니다. 이걸 흔히 ‘가치론’ ‘윤리학’ ‘도덕론’ 등의 이름..
과학을 통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 둘째, 이성이란 주체의 완전성과는 다른 차원에서, 대상세계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데카르트는 긍정적으로 답합니다. 그 근거는 급속히 발전하고 있던 근대과학입니다. 과학의 발전을 통해 대상적 진리, 즉 객관적인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동시대인이었던 갈릴레이가 철학적으로 갖는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에서 질량이 다른 두 물체를 떨어뜨려 보았다는 유명한 실험은 믿을 수 없는 ‘신화’라고 합니다. 갈릴레이에게 중요했던 것은 오히려 실험보다는 자연과학(당시로선 물리학)을 수학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경험적인 사실은 그 자체만으론 극히 불확실한 것이어서, 그대로 둔다면 결코 진리가 될 수 없다..
철학과 굴뚝청소부 목차 이진경 책 머리에 제2증보판에 부쳐 서론 포스트모던 ‘시대정신’ 철학의 경계 경계읽기와 ‘문제설정’ 제1부 철학의 근대, 근대의 철학 1. 데카르트 : 근대철학의 출발점 중세의 철학 은폐된 공세 중세 너머의 철학 두 개의 코기토 데카르트의 문제설정 주체의 분리와 진리의 인식 데카르트가 가정한 두 가지 실체 이성은 완전성을 타고난다 과학을 통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 이성의 통제를 위해 육체를 억제하라 근대철학의 문제설정 근대철학의 딜레마 2. 스피노자 : 근대 너머의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스피노자의 ‘자연주의’ 주체를 자연에 돌려주다 스피노자의 진리 무한히 소급되는 보증인의 문제점 진리와 공리 코나투스 ‘무의식’의 윤리학 스피노자의 탈근대적 ‘이탈’ 제2부 유명론과 ..
철학 자체의 한계 뛰어넘기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근대철학은 단순히 시간적인 위치를 가리키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근대라는 말 자체가 시기적인 구분이 포함된 것이어서, 그 말과 동시에 ‘전근대 → 근대 → 탈근대’의 계열을 연상하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철학에서 지배적인 문제 설정이 역사적으로 나타났던 순서”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면 곤란합니다. 이를테면 그런 변화의 계열을 필연성을 갖는 ‘발전’으로 간주해선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아도르노(Th. Adorno)의 말을 빌리면, 근대는 시간적인 범주가 아니라 어떤 질적인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근대철학’이란 말보다는 ‘근대적 문제설정’이란 말이 좀더 잘 보여주듯이, 근대철학이란 문제를 설정하고, 그것에 대답하기 위해 ..
현대철학의 두 가지 방향 다른 한편 언어학을 경유해 근대철학의 한계를 넘으려는 태도 역시 오늘날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흐름입니다. 그것은 예전에는 주체의 작용으로 이해되던 의미나 판단이 사실은 주체 외부에 있는 언어구조에 속하는 것이란 명제에 기인합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소쉬르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1세기 전에 훔볼트는 칸트주의의 입장에서 그와 유사한 입론을 발전시키려고 했습니다. 이는 언어학적 구조주의가 사실은 칸트주의라는 근대적 틀 속에 포섭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야콥슨이나 레비-스트로스의, 말 그대로의 ‘구조주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근대적 문제설정을 벗어나려는 흐름들을 전반적으로 특징짓고 있는 ‘가족유사성’이 있다면..
결론 : 근대철학의 경계들 근대철학을 정점에 올린 헤겔 지금까지의 논의를 간략하게 요약합시다. 주체와 진리라는 두 개념으로 요약했던 데카르트의 문제설정은 신학과 교회의 지배 아래 있던 철학을, 그 중심을 ‘나’라는 주체로 전환함으로써 중세 전체와 구별되는 하나의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철학적 ‘시대’를 여는 새로운 사고방식의 출발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철학적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이 철학적 근대를 특징짓는 근대적 문제설정은, 주체의 통일성과 중심성을 가정하며 그것을 개념적 연역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체철학’이란 특징, 모든 지식을 오직 ‘참된 지식’ ‘과학’이란 기준으로 판단하거나 정당화하는 점에서 ‘과학주의’란 특징을 갖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이성..
기계주의 반복하자면, 노마디즘에서 결정적인 것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 즉 새로운 차이를 만드는 것이고, 새로운 변이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여는 것입니다. 이것이 차이를 긍정하라고 요구하는 차이의 철학에 잇닿아 있다는 걸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특정한 양상의 계열화가 반복될 때 배치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는 것을 안다면, 이 역시 들뢰즈가 말하는 반복의 개념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나아가 배치라는 개념이 언제나 탈영토화의 첨점이라는 차이화의 선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반복이 ‘구조’와 달리 차이에 대해 열려 있고 차이의 개념이 작동할 수 있는 개념이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들뢰즈가 말하는 사건의 철학,..
노마디즘 정착민은 정해진 한 곳에 붙박혀 사는 사람들입니다. 유목민은 한 곳에 붙박히지 않고 여러 곳을 이동하며 사는 사람들이지요. 노마디즘, 혹은 유목주의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의 가치, 하나의 스타일, 하나의 영토에 머물지 않고 반대로 그것들로부터 벗어나는 탈영토화 운동 속에서 사는 방식을 말합니다. “나의 전공은 사회학이야, 저건 나의 전공영역(영토!)이 아니니 내가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어!”하는 식의 태도는 하나의 영토에 머물러 살아가는 전형적인 정착민의 태도지요. 반면 반 고흐는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영토 안에서 그림을 그렸지만, 거기서조차 인상주의자들과 다른 방식으로 그들의 스타일을 변형시켜 사용하지요. 인상주의자들의 점묘적인 터치는 이제 색채적인 형상을 묘사하는 대신에 힘차게 운동하..
탈주의 철학 이처럼 배치 내지 관계는 그 안에 들어오는 것들을 특정한 욕망으로 ‘끌어들입니다’(이를 들뢰즈와 가타리는 ‘영토화territorialization 한다’고 표현합니다), 자본의 배치는 착한 사람이든 계산에 밝은 사람이든 증식욕망으로 영토화합니다. 사랑의 배치는 쑥맥인 사람도 열정적인 구애의 욕망으로 영토화합니다. 이 영토화하는 성분이 계속 작동하는 한, 그 배치는 유지되고 지속될 수 있겠지요. 배치를 유지하고 보존하게 하려는 힘으로 작용하는 한, 욕망은 그 자체로 사람들을 특정한 양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게 하는 ‘권력’으로 작용합니다. 증식 욕망은 자본의 배치 안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을 화폐에 눈이 먼 사람들로, ‘자본가’로 살아가게 하는 강력한 권력이 되어 작동합니다. 사랑에 눈 먼 사람이..
욕망과 배치 68년 혁명이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사실 이 두 사람뿐이겠습니까? 그것은 라캉이나 푸코, 알튀세르 같은 사상가는 물론, 유럽의 좌파운동 전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상생활을 사로잡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권력에 대한 전복, 욕망을 죄악시하고 억압하는 금욕적 체제에 대한 저항이었던 이 혁명에 대해서 공산당을 비롯한 대부분의 ‘구좌파’들은 ‘소부르주아의 철없는 난동’ 정도로밖에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수주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는 구좌파들이 대중들로부터 신망을 잃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며, 거꾸로 혁명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하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국가권력 주변이라는 제한된 영역에서 일상의 영역 전반으..
의미의 논리 그런데 이러한 사건들은 얼마든지 반복됩니다. 여자를 둘러싼 결투도, 모욕적 시선에 대한 분노도, 배신에 대한 절망도 얼마든지 반복되는 사건이라는 걸 우리는 잘 압니다. 어디 이것뿐인가요? 원한에 의한 살인, 유산을 노린 존속살인, 강도들의 뜻하지 않은 살인 등등, 여기서 어떤 살인이 가령 유산을 노린 살인이라고 하려면, 그에 고유한 사물들의 최소한의 계열화가 있어야 합니다. 시신은 가족이나 배우자, 혹은 친족과 계열화되어야 하고, 거기에 유산이라는 재물이 계열화되어야 합니다. 이런 계열이 발견된다면, 그게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본에서 일어나는, 과거에 일어난 것이든 미래에 일어날 것이든 모두 ‘유산을 노린 존속살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개개의 사건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이런 사..
라쇼몬을 통해 본 사건의 철학 공 얘기로는 ‘사건’이란 개념을 납득하기 어렵나요? 좀더 재미있는 예를 들어봅시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몬」(羅生門)은 사실과 다른 사건의 개념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나뭇꾼이 사람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그저 죽은 사람의 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죽은 몸의 주변에 다른 것들이 있습니다. 가슴에 꽂힌 칼, 남자의 망건, 끊어진 포승줄, 망사천을 둘러친 여자의 큰 모자 등등. 여기서 우리는 나뭇꾼처럼 질문하게 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바로 이 질문이 사물을 사건화하는 질문입니다. 대체 “어떤 사건이 벌어진 것일까?” 살인사건 현장에서 경찰이 던지는 질문이고 또 기자들이 던지는 질문이지요.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사..
사건의 철학 『차이와 반복』에서 생성, 접속, 변이로서 차이의 개념을 정의하려고 했다면, 이제 들뢰즈는 그러한 관점에서 ‘의미의 논리’를 해명하고자 합니다. 의미란 통상 기호학이나 언어학 혹은 언어철학에서 다루거나, 그게 아니면 현상학에서 다루지요. 소쉬르는 의미란 기표에 의해 만들어지는 ‘청각 영상’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는 의미를 어떤 기호나 기표에 대응되는 어떤 것으로 다루는 것이지요. 구조주의자들은 의미를 언어구조에 속하는 것, 그래서 개별적으로는 변경될 수 없는 ‘객관적인’ 어떤 것으로 다룹니다. 라캉이 말하는 ‘기표의 물질성’이란 이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물론 의미는 언제나 봉합된 채 고정될 뿐이어서, 봉합된 부분이 튿어지고 다른 고정점에 정박하면 의미의 망 전체가 변하게 된다고 하지만,..
차이와 반복 갈릴레이의 유명한 자유낙하 법칙도 마찬가집니다. 두 개의 물체는 질량이나 형태와 상관없이 동일한 속도로 떨어진다는 것, 낙하속도는 다만 시간의 함수라는 것이 그것이지요. 그러나 쇳덩어리와 종이가 동일한 속도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공기의 저항 등이 관여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보편적 법칙을 얻기 위해 갈릴레이는 공기의 저항을, 아니 공기 자체를 제거해 버립니다. ‘진공’이라고 가정하는 거지요. 그게 실제로 있든 없든 간에. 결과에서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요인을 제거하여 동일한 법칙으로 표시되는 동일한 결과의 반복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카오스 이론 혹은 복잡계 이론이라고 불리는 최근의 이론들은 이런 식으로 제거해 버린 것들이 사실은 법칙 자체에 아주 중요한 차이를 만들..
차이의 반복 그러나 차이에 대해서 말하는 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차이의 철학 역시 ‘동일성’이란 개념을, 우리의 사유 속에 존재하는 동일성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했듯이 들뢰즈는 여기서 양자의 관계를 전복하고자 합니다. 동일한 것을 모으곤 거기서 다시 차이를 구별하거나, 차이를 동일성에 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마저 특정한 제한과 ‘조작’을 통해 동일화된 차이임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반복’이란 개념입니다. 반복이란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내 눈앞에 되풀이되어 나타나고, 역사적으로 되풀이되어 나타나며, 실험실에서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풍잎을 ‘단풍잎’이라는 동일성의 형식으로 포착하지만, 그것은 사실 내게 반복되어 나타나는 단풍잎들에..
다른 것으로의 변이 다른 한편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은 차이를 긍정하는 태도를 제안하고 촉발하고자 합니다. 이는 차이를 제거해야 할 부정의 대상으로 보는 동일자의 사유, 나아가 차이를 인정하고 보존해야 할 것, 혹은 수용하고 용인해야 할 것으로 보는 그런 태도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먼저 차이를 부정하는 동일자의 사유, 동일성의 철학은 자신이 가진, 대개는 문명이나 진리라는 좋은 이름으로 불리는 척도에 맞추어 자신과 다른 것을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척도에 맞추어 동일화하려고 합니다. 동물의 탈을 쓰고 동물의 소리를 내며 춤을 추는 흑인들의 행동을 ‘미개한 것’ 혹은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문명’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모습대로 동일화하려는 서구인들의 오랜 시도들이 바로 그런 태도를 가장..
특이성 어떻게 하면 이처럼 차이를 동일성에 포섭하거나 대립에 가두지 않고, 차이를 차이로서 포착할 수 있을까? 오히려 동일성조차 차이를 통해서 해명할 수 있을까? 이것이 차이의 철학이 묻는 것입니다. 먼거, 들뢰즈에 따를 때 차이의 철학이란 관점에서 차이를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늦가을, 단풍이 한창 익어갈 때 단풍잎들을 본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혹시 거기서 빨강색을 보시나요? 나뭇잎만큼이나 다른(different) 수많은 빨강색들을 본 적은 없나요? 어쩔 수 없이 ‘빨강색’이란 말을 사용하긴 했지만, 거기에는 정말 수많은 색들이 있지요. 차이를 본다는 것은 그 많은 색들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것이고, 하나하나의 나뭇잎이 갖고 있는, 혹은 한 잎의 각 부분이 갖는 차이를 보는 것입니다. 그 무..
차이의 철학 들뢰즈의 철학을 특징짓는 많은 명칭들이 있습니다. ‘차이의 철학’, ‘사건의 철학’, ‘탈주의 철학’, ‘유목의 철학’, ‘생성의 철학’, 혹은 ‘욕망의 정치학’, ‘분열분석학’ 등등. 이 가운데서도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차이의 철학’이란 명칭입니다. 사실 ‘차이’(différence)라는 단어를 철학적인 개념으로 벼리어내고 그것을 시유의 중심적인 고리로 만든 사람이 들뢰즈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데리다 역시 ‘차이’라는 개념에 주목하지만, 이를 지연시키다’와 결합하여 ‘차연’(différance)이라는 개념으로 만들었지요. 불어에서 두 단어는 같은 발음을 갖지만, 우리는 사실 충분히 변별되는 개념으로 그 말을 이해하지요. 그래서 ‘차연’이란 말이 데리다의 개념이라면, ‘차이’라는 개..
6. 들뢰즈와 가타리 : 차이의 철학에서 노마디즘으로 들뢰즈는 대학에서 철학사를 전공한 철학자고, 가타리는 의과대학을 나와 실험적인 정신분석을 하던 정신의학자였습니다. 들뢰즈가 니체와 스피노자, 베르그송, 에피쿠로스 등 생성을 사유하고자 했던 여러 철학자들을 좋아했지만 무엇보다 니체주의자였다고 한다면, 가타리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학생운동을 했고 68년 5월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던 맑스주의자였습니다. 이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68년 혁명을 전후해서 였다고 합니다. 그 시기는 1960년대를 풍미하던 구조주의의 물결이 퇴조하면서 푸코나 라캉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포스트구조주의로 ‘전향’하던 시기였지요. 한편 1960년대는 또 소쉬르나 야콥슨의 구조언어학이 다양한 형태의 기호학으로 확장되던 시기..
해체의 철학, 철학의 해체 결국 니체의 계보학은 푸코에게 새로운 두 권력 개념을 제공한 셈입니다. 지식-권력과 생체권력이 바로 그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생체권력 개념은 또 하나의 변환을 야기합니다. 감시와 처벌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푸코가 도달한 또 하나의 중요한 결론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책임있는 주체, 법적인 주체를 만들어내는 기술이요, 기능이란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학교에서, 공장에서, 감옥에서, 군대에서 생체권력을 통해 개개인은 사회적으로 받이들여질 수 있는 주체로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권력은 ‘생산적인 권력’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푸코는 아이러니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개개인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주체가 되는 데 권력의 작동이 필수적이라면, 이제 권력 없는..
경계선의 계보학 앞서 우리는 푸코의 기획이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뒤집으면, 그 경계선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려는 힘과 권력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것은 분명 동일자 자신이 갖고 있는 권력입니다. 예컨대 광기와 이성 간의 경계선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래서 광인을 가두거나 환자 취급하는 일련의 조치들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이 경계선은 결코 유지되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이 그은 경계선이 정당함을 입증하기 위해 이성은 그 경계선을 유지하는 기술자들에게 ‘의사’란 직책을 주며, 그것을 위한 담론(談論, discours; 여기서는 정신병리학이란 지식을 말합니다)에 ‘과학’이란 이름을 제공합니다. 나아가 이 담론을 통해 정신병이나 광인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주체’..
역사적 구조주의 다른 한편 근대의 에피스테메(épistémè, 인식틀)는 고전주의 시대와 달리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실체를 인정한다고 합니다. 예컨대 칸트의 ‘사물 자체’처럼 표상이 닿지 못하는 외부의 실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생물학도 예전에는 분류학에 그쳤지만, 이제는 생명이라는 실체를 중심으로, 그것을 위해 기능하는 기관이나 특징을 근거로 새로 정리됩니다. 나아가 이 실체 자체가 진화한다는 생각이 나타나며, 그로 인해 역사라는 개념이 나타난다고 하지요. 정치경제학에서는 노동이라는 범주가 바로 그런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인간’이란 개념은 이 근대라는 시기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푸코는 서로 상이한 사고의 무의식적 기초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지금은 ‘이성’이란 이름으로 ..
타자의 역사 이와 같은 관점에서 푸코는 타자를 소통과 대화의 자리에 끌어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하나는 그 ‘타자의 역사’를 통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일자의 역사’를 통한 것입니다. 전자는 『광기의 역사』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고, 후자는 『말과 사물』에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타자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봅시다. 『광기의 역사』는 “미치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 자체도 하나의 광기인지도 모른다”는 파스칼의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푸코는 ‘광기’가 어떻게 해서 정상 사회에서 배제되고 감금되며 결국은 치료되어야할 ‘병‘으로 되어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를 ’르네상스 시대, 고전주의 시대, 근대’라는 세 개의 시기로 나누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이 구분은 그..
고고학 이처럼 경계를 허묾으로써 푸코는 무엇을 하려는 걸까요? 배제된 타자에게 다시 ‘동일자’의 자리를 주고 복권시키려는 것일까요? 병원에 수용당하길 거부한 광인이나 차별에 고개 숙이길 거부한 흑인, 혹은 규율에 따르길 거부한 범죄자를 새로운 정상인의 모델로 승화시키려는 것일까요? 물론 그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통해 기존의 동일자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영역, 비정상과 동일시되던 ‘외부’여서 생각할 가치도 없다고 간주하던 영역을 다시 사고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동일자를 새로이 사고할 수 있으리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경계를 허물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존에 정상적이라고 간주되던 것이 얼마나 일관되지 ..
‘침묵의 소리’ 푸코의 사상 전반을 특징짓는 가장 커다란 기획은 정상과 비정상, 동일자와 타자, 내부와 외부 사이에 만들어진 경계를 허무는 것입니다. 예컨대 과학이라고 간주된 것과 비과학이라고 비난받는 것 사이의 경계, 정상인과 ‘아직’ 정상인이 아닌 자들 사이를 가르는 경계, 이성과 비이성을 가르는 경계, 혹은 이성의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정신이 ‘나간’, 정신이 ‘들어온’이란 말을 생각해 보세요)가 그것입니다. 한마디로 내부이자 정상과 동일시될 수 있는 동일자 와 거기에 동일시될 수 없기에 배제되어야 할 타자 사이를 가르는 경계를 푸코는 허물려고 하는 것입니다(여기서 ‘타자’란 말은 라캉이 쓰는 것과는 정반대의 뜻입니다. 라캉에게 그것은 기존의 질서를 집약하고 있는 자아 외부의 구조로서, 푸코의..
5. 푸코 : ‘경계허물기’의 철학 세 명의 푸코 푸코는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대부 중 한사람으로 간주됩니다. 혹은 적어도 근대적 합리주의에 반대한 반합리주의자, 계몽적 이성의 독재에 항의한 반계몽주의자로 간주됩니다. 이런 사정은 우리의 경우에 더욱 단순화되고 있지만, 서구의 경우에도 일반적으로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대해 ‘구조주의자’라고 평하는 것 만큼이나 ‘포스트모더니스트’란 평가에 반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런 사정은 그의 친한 친구였던 들뢰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들뢰즈의 경우에는 포스트모더니스트란 평가에 대해서 매우 적대걱 입장을 명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입장 가운데 그런 요소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알튀세르 철학의 모순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비판은 ‘기능주의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의 이론은 기존의 지배적인 사회가 개개인을 호명함으로써 항상 이미 존재하는 기존 질서 속에 포섭하고, 거기서 요구되는 역할을 자신의 일로 ‘인정’ ‘오인’하고 수행한다는 결과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란 개념은 기존의 지배적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고 기능하는가 하는 메커니즘만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며, 이 질서의 변화와 전복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전혀 설명할 수 없다는 비판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얘기한 것만으로는 이러한 비판을 반박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이는 아마도 이데올로기를 ‘재생산’이란 관점에서 정의하고 개념화하려는 문제설정에서 근본적으로 연유하는 것 같습니다. 즉 이데올..
이데올로기의 중요 명제들 이제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중요한 명제들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는 “이데올로기 ― 이것은 ‘이데올로기 일반’을 뜻합니다 ― 는 역사가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이데올로기는 영원하다는 뜻으로, 어떤 사회에도 이데올로기는 있을 거라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에 비유합니다. 물론 개개의 이데올로기들이야 역사를 갖겠지만 말입니다. 둘째, “이데올로기는 현실적 존재 조건에 대한 상상적 관계의 표상”이라고 합니다. 즉 이데올로기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나 현실관계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럴 것이다’라고 당연시되어 있는 방향으로 변형된 관계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가 아니란 뜻에서 이러한 ‘비현실적’ 관계를 마치 ‘있는 ..
이데올로기를 위한 변명 알튀세르의 기획이 갖고 있는 이러한 모순적 요소 가운데 결국 그가 선택하는 것은 후자입니다. 애초에 그의 기획 가운데 중심의 자리에 있던 것은 전자, 즉 과학으로서 맑스주의를 새로이 정립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1968년의 5월 혁명을 거치면서 그는 중심을 이데올로기론으로 옮기며, 전자에 기울었던 자신의 입장에 대해 ‘자기비판’을 합니다. 첫째로 그는 자신이 진리 허위에 대한 이성주의적 이분법에 빠져 있었다고 비판합니다. 즉 과학이란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진리요, 이데올로기는 그렇지 못하기에 거짓이요 허위라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데올로기를 단순히 허위의식으로 정의하는 전통적인 맑스주의의 테제를 비판했으나, 그리하여 이데올로기 자체가 있는 그대로 하나의 실재요 ..
이데올로기와 ‘표상체계’ 둘째로, 과학으로서 맑스주의를 정립하려는 기획과 동시에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새로운 개념적 발전을 기획합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를 ‘대중들의 무의식적 표상체계’로서 정의하는 것입니다. ‘표상’은 representation을 번역한 말인데, 알다시피 represent는 ‘표상하다’는 뜻말고도 ‘재현하다’ ‘대표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표상한다는 말은 ‘눈앞에 떠올린다’는 뜻인데, 예컨대 ‘자동차’란 말을 듣고 그에 상응하는 물건을 떠올리는 경우나, 역으로 어떤 물체를 보고 ‘컴퓨터’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는 단어를 통해 사물을 눈앞에 재현하거나, 사물을 보고 그에 상응하는 단어를 머릿속에 재현하는 것이지요. 그럼 표상체계란 무엇일까요? 예컨대 ..
맑스를 위하여 이런 관점에서 알튀세르는 “맑스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을 제창합니다. 물론 맑스주의자들은 누구나 맑스에 의거하고 있으니 상당히 의아한 슬로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알튀세르가 여기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맑스는 성숙한 시기의 맑스요, 『자본』이란 책으로 집약된 맑스입니다. 『경제학-철학 초고』에서 절정에 이른 청년 맑스는 헤겔과 포이어바흐의 손 안에 있는 맑스고,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맑스란 겁니다. 과학자 맑스, 과학으로서의 맑스주의는 1845년 『독일 이데올로기』를 기점으로 시작된 그들과의 ‘단절’ 이후의 맑스와 맑스주의입니다. 이를 위해서 알튀세르는 그의 스승이었던 과학철학자 바슐라르(G. Bachelard)의 ‘인식론적 단절’이란 개념을 빌려옵니다. 그에 따르면, 어떠한 과학..
과학을 위하여 첫째로 그는 맑스주의 역사유물론을 ‘과학’으로 정립하고자 합니다. 이는 프롤레타리아 과학과 부르주아 과학이라는 이분법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1940~50년대 소련의 문화 전반에 대한 즈다노프(A. Zhdanov)의 독재와 과학 전반에 대한 리센코(T. D. Lysenko)의 독재는 한마디로 부르주아 진영과 프롤레타리아 진영이란 두 개의 진영이 문화나 과학에도 존재한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리센코의 주도로 사회적 조건에 따라 생물체의 형질은 닮는다는 이론이 소련 생물학계를 지배하자, 이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따라 구성된 프롤레타리아적 생물학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즈다노프의 권력을 통해, 아니 궁극적으로는 스탈린의 권력을 통해, 유전을 주장한 멘델학파를 부르주아 생물학자로 몰아 축출..
4. 알튀세르 : 맑스주의와 ‘구조주의’ 알튀세르의 사상은 모순적인 요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는 다양한 사고의 영역을 과감하게 넘나들며 극한적으로 사고하려 했던 그 자신의 철학적 삶의 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모든 모순적 요소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사상가의 궤적을, 여기서 충분히 쫓아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초기의 기획 자체부터 내재해 있었으며, 이후 초기의 입장을 전환시키는 계기로 작용하는, 따라서 후기의 사상에 기초를 놓는 요소 정도를 간단하게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튀세르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평가는 구조주의와 맑스주의를 접합시키려고 했던 사람이란 것입니다. 사실 알튀세르의 초기 이론에는 스스로 ‘구조주의와의 불장난’이라고 불렀던 요소들이 매우 강하게 드러나며, 이후 이데..
야누스 라캉 : 구조주의 혹은 포스트구조주의 라캉의 이론은 레비-스트로스가 그렇듯이 주체나 인간이란 개념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습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이 주체의 통일성이나 중심성을 해체하는 효과에 대해선 앞에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라캉은 이런 해체 효과를 아주 멀리까지 밀고 갑니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왕비는 자신의 ‘자아의 이상’을 획득하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본래 모습이라고 상상적으로 동일시하는 과정을 통해, 사실은 타자가 지정한 자리를 받아들입니다. 즉 ‘내 자리’는 내가 아니라 타자가 지정하는 것이란 얘깁니다. 따라서 자아의 중심성은 거꾸로 타자의 중심성으로 전환됩니다. 그래서 그는 데카르트를 겨냥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생각하지 않는 ..
진리의 배달부, 그리고 주체화 앞서 타자는 편지를 통해 나의 위치를 지정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좋으나 싫으나 이미 지정된 ‘내 자리’인데, 이걸 굳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즉 왕비가 도둑질하는 장관을 그 자리에서 제지하고 질책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그런 편지가 왕비에게 없으리라는 왕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게 됨을 뜻합니다. 즉 왕비로서 인정받아야 할 중요한 것을 인정받지 못하고 맙니다. 따라서 이런 불행한 사태를 바라지 않는다면, 왕비는 편지로 인해 지정된 자리를 자기 자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왕으로부터 ‘훌륭한 왕비’로서 계속 인정받고자 한다면, letter가 지정하는 자리를 자기 내부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행동할..
타자의 욕망 : 도둑 맞은 편지 이상의 이야기를 포의 소설 『도둑 맞은 편지』를 통해서 다시 생각해 봅시다. 라캉의 저작집이자 활동의 ‘기록’(écrit)인 『에크리』Écris는 바로 이 소설에 대한 세미나로 시작하지요. 아시다시피 그 소설의 주 스토리는 왕비가 왕이 있는 자리에서 왕이 봐선 안 될 중요한 편지를 장관에게 도둑맞음으로써 시작하지요. 경시청장이 탐정 뒤팽에게 전하는 바에 따르면, 왕비가 편지를 읽고 있을 때 왕이 갑자기 들어오고, 왕비는 약간 당황하지만 그걸 책상 위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서처럼 그냥 펼쳐두지요. 물론 왕은 그 편지를 못 봅니다. 그리고 그 방에 들어왔던 눈치 빠른 장관은 비슷한 문서를 하나 책상에 펼쳐두고 설명하는 체 하다가 그걸 두고 대신 왕비의 편지를 가져가지요. 그..
무의식에 담긴 타자의 욕망 다음으로 라캉은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desire)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몇 가지 다른 개념을 함께 알아야 합니다. 그는 욕망을 욕구(need), 요구(demand)와 구별합니다. 욕구는 식욕, 성욕처럼 가장 일차적인 충동입니다. 만족을 추구하여, 그걸 충족시켜 줄 대상을 찾고자하는 충동이죠. 이는 다른 사람에게 만족시켜 달라는 ‘요구’로, 대개는 ‘사랑의 요구’로 나타납니다. 거칠게 말하면 요구는 욕구를 표현한다고 해도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요구는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것으로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어머니와 자고 싶다는 욕구가 그대로 표현될 수는 없습니다. 즉 어머니에게 결혼을 ‘요구’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지요. 한마디로 말해 요구는 사회적 질서..
타자의 담론, 무의식의 담론 다른 한편 라캉이 무의식을 파악하는 데서 전통적 개념과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소쉬르 등의 구조언어학의 개념들과 이론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조차 레비-스트로스의 영향이 그대로 배어 있는 것입니다만, 그 개념들을 사용함으로써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나 기존 프로이트주의자들의 정신분석학과는 전혀 다른 새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가장 기본적인 명제는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신경증이든, 실수든, 농담이든, 꿈이든 대개 어떤 무의식이 드러난 것으로 간주합니다. 즉 그런 현상들은 무의식의 ‘징후’라고 하지요. 언어학 용어를 쓰면 개개의 징후란 무의식상의 어떤 의미를 표시하는 기표(S)를 뜻합니다. 무의식은 기의(s)인..
정신분석학의 대상 라캉은 직업적인 철학자가 아니라 정신과 의사입니다. 그는 미국식 정신분석학에 커다란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식 정신분석학은 일종의 자아심리학적인 경향이 있는데, 그들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자아의 형성과정에 대한 이론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즉 정신분석학을 구순기, 항문기, 성기기 등을 거쳐 하나의 표준적인 자아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 대한 일종의 임상심리학으로 바꾸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라캉은 이것을 한편에선 생물학주의에 의해, 다른 한편에선 행태주의에 의해 프로이트 이론의 고유한 정신이 훼손된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러한 나름의 비판적 입지점을 설정한 라캉은 프로이트 이론에서 생물학주의적 요소를 제거하고, 나아가 프로이트 이론이 갖는 철학적 의미를 새로이 부각시키려고 합니다. ..
레비-스트로스의 귀향 다른 한편, 과학에 대한 그의 태도 역시 이원적입니다. 원주민들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배어 있는 그의 작업은 ‘야성적 사고’를 통해 주술과 과학의 대립을 깨려는 노력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서구적 관점에서 토템이나 주술을 과학의 이름을 빌려 매도하려는 시도를 정열적으로 반박합니다. 그의 입장은 서구적인 과학적 사고보다는 차라리 야성적 사고에 기울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야성적 사고를 보편적 사고로 위치 지으려는 그의 태도에서도 드러납니다. 이와 관련해 데리다는 그의 입장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일종의 루소주의적 향수를 읽어내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레비-스트로스에게서 반서구적이고 반과학적인 경향을 읽어내는 것은 그리 지나친 평가는 아닐 겁니다. ▲ 아메리고 베스푸치..
성공과 실패 요약합시다. 레비-스트로스는 앞서 본 것처럼 ‘인간의 해체’ ‘주체의 해체’가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즉 데카르트나 칸트처럼 주체나 인간을 출발점으로 삼거나 그것을 철학적으로 규정하려는 근대적 노력에 대해 명시적으로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이로써 그는 이후 ‘반인간주의’나 ‘반주체철학’이 자리잡을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 준 셈입니다. 사르트르와의 논쟁을 통해 역사주의와 반대되는 과학으로서 구조주의를 정립한 것 역시 이후 반역사주의적 경향의 모태가 됩니다. 한편 레비-스트로스는 “중요한 것은 인간을 구성해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해체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근대적인 인간개념을 해체하려고 합니다. 동시에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에게 공통된 보편적인 요소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알다시피 그는 ..
사고구조의 보편적 질서 다음으로 그는 자연과 사회, 자연과 문화, 인간을 관통하는 선험적 무의식을 통해 보편적인 사고질서를 파악하려고 합니다. 즉 그가 말하는 근친상간 금지는 보편적인 사고의 무의식적 기초요, 보편적인 사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문화와 자연, 그리고 정신의 동형성(同形性)을 기초짓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원주민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유방식입니다. 흔히 마술적, 주술적이라 불리는 이 사고방식은 자연을 기초로 전개되는데, 레비-스트로스는 이것을 ‘야성적 사고’(la pensée sauvage, savage mind)라고 합니다. 이는 오랜 세월에 걸쳐 반복ㆍ지속적으로 자연을 관찰한 결과라고 합니다. 이러한 야성적 사고는 세계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에..
친족관계의 보편적 질서 그러면 그가 경험적 연구를 통해 도달한 곳은 어딜까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무의식적 기초는 무엇일까요? 그가 도달한 곳은 한마디로 ‘근친상간 금지’(incest taboo)라는 규칙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자연과 문화가 만나는 지점을 주목합니다. 인간이란 생물학적 존재면서 동시에 사회적 존재지요. 그런데 그는 인간이 편입된 곳이 자연인지 사회인지, 자연인지 문화인지를 구별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합니다. 즉 자연이 끝나고 문화가 시작되는 곳이 어디냐는 거죠. 그것은 또한 동물과 달리 어떤 규칙이나 질서가 안정성과 지속성을 갖도록 해주는 것은 무엇이냐는 물음입니다. 『친족관계의 기본구조」의 첫 번째 장은 바로 이 ‘자연과 문화’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규칙..
2. 레비-스트로스와 구조주의 구조언어학에서 구조주의로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란 이름과 가장 긴밀히 결부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망명지 미국에서 구조언어학자인 야콥슨과 함께 지냈는데, 거기서 구조언어학의 영향을 매우 강하게 받습니다. 이후 그가 개척한 ‘구조주의’라는 흐름과 연구방법은 이때 야콥슨을 통해서 배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구조인류학』이란 책에서 『음운학 원론』으로 유명한 트루베츠코이를 언급하면서 자기의 연구방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첫째, “음운론은 의식적인 언어현상의 연구로부터 무의식적인 하부구조로 옮겨간다”고 합니다. 음운을 구별하는 것은 의식적인 게 아니라 무의식적인 거고, 따라서 음운론의 연구대상은 의식적 현상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하부구조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제6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근대 너머의 철학을 위하여 1. 구조주의와 철학 현대철학에는 다양한 흐름이 있고, 이 흐름은 이제까지 얘기해온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기도 합니다만, 이 자리는 어차피 한정된 것이기에, 그걸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일단 구조주의자, 혹은 포스트구조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사상 가운데 대표적인 것만을 간략히 다루려고 합니다. 물론 이러한 흐름이 현대철학을 대변하는 것이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건 옳은 말입니다. 현상학이나 하이데거, 거기서 이어지는 해석학적 흐름, 혹은 좀 다른 방향으로 현상학을 발전시킨 실존주의, 그리고 영미권의 철학도 나름의 분명한 전통을 형성하고 있는 게 사실이며, 독일에서는 비판이론이라 ..
근대철학과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은 구조언어학의 그것과 몇 가지 점에서 크게 다릅니다. 기호의 의미를 용법으로 정의하는 것도 그렇고, 실천이란 개념을 통해 언어의 문제를 사고하는 것도, 생활형태 속에서 언어활동을 이해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특히 둘의 차이가 두드러지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에는 구조언어학과 달리 항상-이미 정해진 의미구조, 완결된 체계를 이루는 의미구조 같은 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물론 어떤 언어든지 나름의 규칙에 따라 사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게는 그 규칙 자체가 소쉬르가 생각했던 랑그처럼 하나의 단일한 체계로서 항상-이미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니라, 언어적 실천에 의해 가변하는 (게임의) 규칙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랑그’는 불변적인 실..
언어게임과 ‘인식론’ 여기서 실천이란 어떤 것이든 특정한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규칙이 관습적인 것이든, 도덕적인 것이든, 아니면 단지 언어적인 것이든 간에 말입니다. 예컨대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것 역시 이런 규칙에 따른 것입니다. 물건을 사는 데 사용되는 언어사용 규칙이 있을 것이고, 그런 행동을 훔치는 행동과 구별해 주는 행동 규칙이 있을 것입니다. 이 규칙은 모두 사회적인 성격을 가질 겁니다. 이 규칙은 미국이면 미국, 한국이면 한국마다 고유한 ‘생활방식’(비트겐슈타인의 개념을 빌면 ‘생활형태’)을 보여줍니다. 어떤 규칙도 이런 생활방식 속에서 만들어지고 변화되는 것이며, 또한 반대로 바로 이 규칙들이 모여 특정한 생활방식을 구성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생활방식은 사람들이 ..
실천을 통한 언어학습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크게 두 가지의 시기로 나누어집니다. 초기의 사상은 『논리철학논고」라는 책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성전처럼 떠받드는 고전이 되는 책이지요. 한편 후기의 사상은 사후에 출판된 『철학적 탐구』라는 책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초기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론과 생각들을 해체하고 부정하며 전혀 다른 입장으로 선회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이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사상은 반영론과 비슷합니다. ‘그림이론’이라고도 하는데, 단어는 사물의 ‘이름’이고, 문장은 어떤 상황에 대한 ‘그림’이라고 합니다. 명제들은 물질이 원자로 나누어지듯이, 요소명제로 나누어지며, 이 요소명제는 참인지 거짓인지를 검증할 수 있다고 하지..
4. 비트겐슈타인 : 언어게임과 언어적 실천 구조언어학의 난점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은 언어와 인간에 대한, 그리고 구조와 주체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즉 새로운 사고영역을 개척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또 언어학으로서 설명해야 할, 그러나 구조주의적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언어와 대상(지시체) 사이에 어떤 실제적 연관을 상정하는 실증주의적 입장과 비교해 구조언어학의 난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컨대 논리실증주의와 유사한 언어관을 가지고 있던 러셀은, 만약 치즈에 대한 비언어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떤 사람도 ‘치즈’라는 낱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시체 즉 대상과 기호 사이의 관계는 자의적이며, 기호는 서로 긴밀하게 엮인 하나의 체..
구조언어학의 기착지 소쉬르의 언어학을 가장 적극적으로 발전시킨 사람들은 흔히 ‘프라하학파’라고 불리는 언어학자들입니다. 야콥슨(R. Jakobson)과 트루베츠코이(N. Troubetzkoy)를 필두로 하는 이들의 이론은 대개 ‘구조주의 언어학’이라고 불립니다. 특히 야콥슨은 2차 대전으로 인해 미국에 망명해 있던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학교에서 지내면서, 레비-스트로스에게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중에 다시 다루겠지만, 바로 레비-스트로스를 통해 이제 구조주의 언어학의 방법론과 사고방식은 언어학을 넘어 인문-사회과학의 다양한 분야로 흘러들어 갑니다. 여기서는 일단 우리 주제와 관련해 야콥슨의 이론적 입장을 최대한 간략히 살펴보고, 그 특징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첫째, 기호의 구조를 인..
소쉬르 ‘혁명’의 효과 소쉬르의 언어학은 종종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 비유됩니다. 다만 소쉬르 자신이 그런 혁명’임을 주장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칸트와 달랐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언어학자의 이런 주장이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철학적 혁명에 비유되었던 것일까요? 다시 말해 소쉬르가 언어학에 새로 제기한 명제들은 대체 어떤 의미와 효과를 갖는 것일까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요약합시다. 첫째, 체계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는 언어와 그 언어를 사용하는 개개의 주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앞서 본 것처럼, 랑그는 개인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약속된 규칙의 체계입니다. 개인들이 말을 하기 위해선 그 규칙에 따라야 하고, 그 규칙의 체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의미는 개인이 만들어내는 ..
3. 소쉬르의 언어학적 ‘혁명’ 소쉬르 언어학의 기본명제 언어나 기호가 갖는 가장 일반적인 특징은 그것이 어떤 사물이나 기호 사용자의 의도를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기호를 통해서 어떤 사물을 지시하거나 어떤 의도를 표현한다는 거지요. 예컨대 ‘송아지’라는 기호는 실제 송아지의 ‘이름’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먹는다’는 말은 먹는 행위를 가리키고, 그 기호를 사용하는 것은 먹는 것과 관계된 어떤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하지요. 여기서 기호가 지시하는 대상(예를 들면 실제 송아지)을 흔히 ‘지시체’(referent)라고 합니다. 기호나 언어에 대해 흔히 갖고 있는 생각은 ‘송아지’라는 기호와 실제 송아지(지시체) 간에 상응, 일치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호는 지시체를 반영한다는 거지요. 이러한..
문법의 논리학, 논리학의 문법 지금까지는 언어와 사고의 관계를 말했는데, 이것을 조금 더 밀고 나가면 재미있는, 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고가 언어에 의해, 언어적 규칙에 의해 제약된다는 것을 보았지요? 언어적 규칙을 대략 ‘문법’이란 말로 대표해서 씁시다. 그러면 문법적 규칙이 달라지면 사고 규칙도, 사고 내용도 달라진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 있습니다. 이 점을 잊고 데카르트처럼 문법적 규칙에 불과한 것을 자명하고 확실한 진리라고 생각하는 순간, 문법의 환상에 빠져버린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논리학에 대해서도 이제는 달리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어느 경우나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사고의 법칙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논리학 역시 문법..
2. 훔볼트 : 언어학적 칸트주의 선험적 주체의 언어학 언어학과 철학이, 언어와 사고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그에 대한 이론을 가장 먼저 체계화한 사람은 훔볼트입니다. 외교관이었던 그는 언어에 대한 관심에 덧붙여 직업적인 이유로 다수의 외국어를 비교 연구할 수 있었고, 그걸 통해 민족마다 고유한 사고방식이 각각의 언어에 새겨져 있으며, 그것이 개인들의 사고를 제약한다는 사실에 일찍 주목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이론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는 언어는 통일적인 유기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단어는 다른 단어를 전제로 하며, 또한 단어를 결합시켜 문장을 만드는 규칙 전체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아까 말했던 ‘삶’이란 단어를 생각해 봅시다. 러..
언어 연구의 이유 다른 한편 언어가 내장하고 있는 이런 특징은, 각각의 언어마다 상이합니다. 다시 말해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사고할 수 있는 것도 달라지고, ‘확실한 것’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번역을 할 때 뚜렷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의사 지바고」로 유명한 파스테르나크의 작품 가운데 My sister life라는 시집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말로 직역하면 나의 누이인 생이 되고, 약간 멋을 부려 번역하면 ‘삶이여, 나의 누이여’가 됩니다. 그런데 이 시집을 체코어로 번역을 하려 하자마자 문제가 생깁니다. 러시아어에서 life의 성은 여성입니다. 그러니 ‘My sister’와 동격이 될 수 있었죠. 그러나 체코어에서는 life가 남성명사랍니다. 그러니 My siste와 동격이 되는 건 문법상..
제5부 언어학과 철학 ‘혁명’ : 근대와 탈근대 사이 1. 언어학과 철학 언어라는 주체 서구의 현대철학은 언어학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나 라캉 등을 위시한 프랑스의 현대철학자들은 물론, 비트겐슈타인이나 러셀, 프레게(G. Frege), 오스틴(J. Austin) 등 분석철학으로 묶이는, 하지만 다소 이질적임은 분명한 다수의 철학자들도 그렇고, 하이데거와 그의 사상에 의존하는 해석학도 언어에 대한 분석과 사고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철학에 대한 강의에서 언어학을 언급하는 것은 심정적으로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심정적 동조’만으로 충분히 정당화할 만큼 철학은 너그럽지 못한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명하다고 생각한 것조차 결코 그대로 놔두는 법이 없..
4. 근대철학 해체의 양상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합시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니체는 의미와 가치, 힘과 권력의지란 개념을 통해 근대철학의 출발점과 목적지를 해체시킵니다. 근대적 문제설정의 지반이었던 주체와 진리를, 그리고 그에 기반한 윤리학을 철저하게 해체시켜 버린 니체는 그 결과 새로운 비판철학으로서 계보학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체 작업은 맑스나 프로이트의 그것과 달리 지극히 공격적이었습니다. 맑스에게 중요한 것은 혁명적 실천의 문제였고, 그것을 철학적으로 혹은 이론적으로 사고하는 것이었습니다. 포이어바흐나 헤겔에 대한 비판은 그런 한에서 필요한 최소한으로 제한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근대철학 전반에 대한 비판은 시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더 중요했던 것은 근대사회에..
반(反)근대적 비판철학 다른 한편 자명하고 확실한 것에 대해 퍼붓는 니체의 공격에는 ‘진리’라는 목적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데카르트 이래 진리란 자명하고 확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명한 주체뿐만 아니라 자명한 판단, 자명한 지식이 불가능하다면 대체 진리란 게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도 그는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계보학적인 방법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예컨대 “어째서 진리가 필요한가?” “어째서 진리를 가지려 하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왜 지식은 꼭 진리여야 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진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물음에 대해 니체는 “진리는 없고 진리의지만이 있다”고 말합니다. 진리를 욕망..
자명한 것이란 애초에 없다 가치의 철학, 권력의지의 비판철학으로서 계보학은 “자명하고 확실한 것”을 추구하려는 근대철학에 대해 새로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왜 그들은 자명한 것을 추구하는가? 자명하고 확실한 것을 추구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명하고 확실한 것을 통해 그들은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 말입니다. 니체가 보기에 ‘자명한 것’이나 ‘확실한 것’ ‘절대이성’ 등은 모두 어불성설(contradictio in adjecto)입니다. 자명한 것’이란 말이 성립되는지, 그게 있는 건지가 문제되고 있는데, 따라서 자명한 것이란 말 이 결코 자명하지 않은데, 그 자명하지 않은 말로써 어떻게 자명한 것에 도달하겠냐는 겁니다. 즉 확실하지 않은 말로 확실한 것에 어떻게 도달하겠냐는 것이고, ..
계보학의 문제설정 한편 ‘힘’에는 능동적인(active) 힘과 반동적인(reactive) 힘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반동적이라는 것은 진보에 반대되는 ‘반동’이란 뜻이 아니라, active에 대한 반대를 말합니다. 즉 active란 ‘작용적인 힘’이란 뜻이고, reactive란 ‘반작용적인 힘’이라는 뜻입니다. 후자는 자기에게 가해지는 어떤 힘에 대해 반응하여 반작용하는 힘을 말합니다. 다른 한편 의지에는 긍정적인 의지와 부정적인 의지가 있다고 합니다. 작용적인 힘에 대응하는 것이 긍정적인 의지이고, 반작용적인 힘에 대응하는 것이 부정적인 의지입니다. 대상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의지’를 인식하는 것이 바로 가치를 아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긍정적인 의지와 부정적인 의지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바로 니체..
권력에의 의지 니체의 고유한 문제설정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니체의 ‘질문방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니체는 다음과 같은 질문방식을 비판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식의 질문이 그것입니다. 그에 대해 누군가가 “이른 봄 거리를 화려하게 수놓는 벚꽃이나 저녁에 곱게 지는 노을, 늘씬하게 빠진 젊은 여인의 몸매가 아름답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칩시다. 만약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라면 이렇게 대꾸할 것입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네. 그런데 그것을 모두 아름답다고 한다면 거기에 공통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바로 그게 무어냐는 걸세.” 이는 아름다움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요컨대 꽃이나 노을, 몸매 같은 것들은 가상이고 그 근저에는..
3. 니체 : 계보학과 근대철학 극단적 평가의 철학자 니체만큼 극단적인 평가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니체 지지자들은 그의 사상이야말로 이제까지의 모든 철학적 사고와 단절하면서 새로운 사고 영역을 여는 위대한 사상이라고 합니다. 니체를 잘 모르긴 해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의 신랄하며 시적인 경구들에서 새로운 사상의 징후를 느끼고 찬탄합니다. 반면에 극단적인 니체 비판가들은 반동적이고 파쇼적인 사상의 원천이요 집약이라는 지독한 비난을 퍼붓습니다. 니체를 잘 모르긴 해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공격적인 문구들이 만들어내는 ‘초인’의 사상에서 파시즘의 심증을 굳히곤 합니다. 물론 극단적인 평가가 어떤 것이 가진 장점과 단점을 증폭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것의 모..
무의식과 주체철학 무의식의 발견은 정신분석학의 최대 업적이고 정신분석학이 존재하게 되는 근거입니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무의식 발견은 근대철학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무의식이란 개념은 철학의 영역에 들어오자마자 근대철학의 기초를 해체하는 강력한 작용을 합니다. 근대철학에서 주체는 의식과 동일시되었고, 통일성을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당연히 투명한 존재였지요. 또한 주체가 모든 대상에 대해 판단하고,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대상을 지배하는 중심이었습니다. 요컨대 근대적 주체는 의식적 주체며, 통일성과 투명성ㆍ중심성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데카르트나 칸트에게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데카르트에게 세계가 확실한 것은 내가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칸트에게 세..
무의식의 분열 셋째 단계, 무의식 자체 내에 분열이 있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프로이트는 의식/무의식이라는 이론적 틀(위상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의식 개념은 상반되는 두 가지 것으로 분할됩니다. 왜냐하면 성적인 욕망이나 통제되지 않는 충동이 무의식을 이룬다고 했는데, 이것을 억압하는 것 또한 의식된 행동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식은 그것이 억압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억압되는 욕망이나 억압하는 기제 모두 무의식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두 가지 개념으로 분할합니다. 억압되는 욕망과 충동을 ‘거시기’(이드id)라고 하며, 억압하는 기제를 초자아(Super-ego)라고 합니다. 거시기는 ‘쾌락원칙’에 따라 움직이며, 초자아는 그것을 통제하려는 사..
보편적인 무의식 둘째 단계, 무의식이 우연적인 게 아니라 보편적인 것임을 발견합니다. 프로이트는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그는 브로이어와 싸우고 독립적으로 연구를 하게 되는데, 그가 선택한 주제는 바로 꿈이었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꿈의 해석』이라는 책이지요. 그는 이 연구를 통해 무의식이 최면이나 히스테리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갖고 있는 보편적인 거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왜냐하면 꿈을 안 꾸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꿈에는 잠재몽(潛在夢)과 현재몽(顯在夢)이 있는데, ‘현재몽’은 흔히 우리가 꿈이라고 부르는 것을 말하고, 잠재몽은 그 꿈에 왜곡된 모습으로 잠재해 있는 내용을 말합니다. ‘꿈의 작업’을 통해 변형되고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잠재몽이 도덕적으로 받아들..
무의식의 발견 아시다시피 프로이트는 철학자가 아닙니다. 그를 철학자로 다루는 철학사 책을 만나기도 그다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는 철학에, 특히 근대철학에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매우 간단한 단 하나의 개념 때문입니다. ‘무의식’이라는, 너무도 유명한 개념 말입니다. 이 개념은 근대철학의 기초였던 ‘주체’를 그리하여 주체철학 전체를 해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프로이트가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파괴 효과는 사실 무의식이란 개념 하나만으론 이루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건 어쩌면 다양한 증거와 임상적 사례들, 그리고 정신분석학이란 독자적인 학문을 창출해낸 체계적이고 강력한 개념들과 이론들이 있었..
맑스철학의 근대성과 탈근대성 요약합시다. 맑스는 ‘실천’이란 개념을 통해 철학적 사고의 틀을 변환시킵니다. 우선 주체와 대상에 대한 근대적 개념을 해체합니다. 주체도, 대상도, 인식도, 진리도 모두 실천이란 개념에 의거해 새로이 정의내리죠. 진리 개념의 변환을 통해서 그는 근대철학이 추구하던 확고하고 불변적인 진리라는 목적 자체를 해체합니다. 또한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었던 자명한 주체 역시 해체해 버립니다. 이제 주체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여기서 주체는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이란 것이 명확해지고, 그 결과 주체 진리라는 짝에 의해 형성되었던 근대적 문제설정 자체가 해체됩니다. 나아가 인간을 특정한 주체로 만들어내는 사회 역사적 요인을 다루는 새로운 이론적 틀을 제시합니다...
주체철학의 전복 이러한 주장은 근대철학의 출발점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집어엎는 것입니다. 자명하고 확실한 출발점, 항구적인 기초인 주체’가 따로 없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주체’란, ‘인간’이 그렇듯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구성물이요 결과물이란 겁니다. 동일한 사람이 20세기에 호텔을 경영하는 주체로서 존재하지만, 중세로 밀려가선 시종이란 주체로 존재하게 되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주체가 ‘사고’하는 내용이나 방식 역시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주의 성을 사서 호텔로 만들겠다는 생각이 증세로 날아간 시종의 후손에게 과연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반면 20세기의 자유로운 공기를 맛본 시종은 이게 더 이상 영주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되돌..
역사유물론 맑스가 실천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야기된 철학적 지반의 변경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진리’라는 근대철학의 목표는 물론, 대상 자체도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단지 파괴하는 데 머문 것만은 아닙니다. 물질 개념조차 역사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론으로서 역사유물론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역사유물론으로 진전됨에 따라 이제 맑스는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었던 주체(또는 인간)개념에 대해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맑스는 ‘인간’이란 개념 자체를 해체합니다. 그는 ‘인간’이란 포이어바흐처럼 사랑이나 의지를 본질로 하는 존재로 정의될 수 없으며, 데카르트처럼 ‘이성’과 ‘정념’을 가진 존재로 정의될 수도 없다고 하죠.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갖는 수많은 특성 중 몇 가지..
계몽주의 비판 넷째로 계몽주의 비판입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세번째 테제에서 맑스는 ‘교육과 환경’에 의해 인간이 바뀐다는 생각(이게 바로 ‘계몽주의’지요)을 비판합니다. ‘사회를 우월한 부분과 열등한 부분으로 양분’하는 것, 가르치는 부분과 가르침을 받아야 할 부분으로 나누는 것, 이성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으로 나누는 것을 비판함으로써 계몽주의의 근본 관점인 이분법 자체를 비판합니다. 이는 계몽주의의 지반 자체를 해체하는 비판입니다. 전위와 대중을 갈라놓고 전위는 교육하는 자, 대중은 그 교육을 따라가면 되는 자로 파악하는 전통적인 관념에 대해, 이미 맑스는 계몽주의적 윤리학이라며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맑스의 이러한 비판은 계몽주의와 반계몽주의 모두를 떠나 계몽주의적 이분법 자체를 비판한다는 점에..
진위는 실천을 통해서 셋째는 진리의 문제입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두번째 테제에서 맑스는 인간이 대상적 진리를 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라고 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오해가 많이 되는 구절입니다. 흔히 “길고 짧은 것은 대보면 안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져, 참인가 아닌가는 실천해 보면 안다라는 식으로 해석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유물론에서 진리를 검증하는 방법으로 간주된다는 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실천 개념은 사실 실증주의자들이 말하는 검증 개념과 별로 다르지 않지요. 그러나 맑스 말대로 대상이나 지각이 ‘실천’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면,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따라, 혹은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똑같은 사물도 다른 것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길고..
실천 속에서의 지각 둘째, 맑스는 포이어바흐를 비롯한 유물론자들이 ‘지각이나 감성, 즉 대상을 단순히 지각ㆍ직관ㆍ감각으로만 파악했다’고 비판합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지각을 단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관조하는 행위로만 간주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포이어바흐의 생각은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하면서 제시된 것입니다. 앞서 본 것처럼 관념론자들은 대상을 주체의 관념 속에서 정의합니다. 이에 대해 포이어바흐는 “관념론자들은 사물을 더욱더 잘 보기 위해 인간의 육체에서 눈을 빼버렸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그대로 뒤집어 “좀더 잘 보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눈을 갖고 개념을 없애는 편이 훨씬 낫다”고 말합니다. 그는 대상을 눈에 비치는 대상, 직관되는 대상으로 파악하고자 한 것이지요. 그러나 맑스에 따르면 지각이나 ..
대상으로서의 실천 첫째는 ‘대상’으로서의 실천입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첫번째 테제에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유물론 ―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포함하여 ― 의 주요한 결함은 대상, 현실을 객체의 형식으로만 파악했고 그것을 실천으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제는 대상, 현실을 실천이란 형태로 파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요? 포이어바흐는 “인간이란 자기가 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인간이란 단백질 덩어리란 말이죠. 이 극단적인 문장에서 포이어바흐가 생각하는 유물론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래서 그의 유물론을 흔히 ‘기계적 유물론’이라고 하지요. 맑스가 보기에 이런 유물론은 대상이나 현실을 단백질처럼,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는 고정적인 객체로..
1. 맑스 : 역사유물론과 근대철학 맑스의 ‘유물론 비판’ 맑스가 관념론을 비판했다는 사실은, 그가 유물론자였다는 사실만큼이나 유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물론자’ 맑스가 사실은 유물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을 수행했다는 주장을 한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맑스가 근대철학과 근본적인 구획선을 그으면서 달라지는 출발점이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맑스는 ‘실천’이란 개념을 철학에 끌어들인 장본인입니다. 또한 근대 철학을 해체하는 데 맑스가 사용하는 결정적인 개념 역시 ‘실천’입니다. 다시 말해 실천이란 개념을 통해 맑스는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을 넘어섭니다. ▲ 빈약한 부엌 브뤼겔(Brueghel/Bruegel)의 그림 「빈약한 부엌」(Die magere Kiche)이다. 브뤼겔은 장애인이나 아이들의..
제4부 근대철학의 해체 : 맑스, 프로이트, 니체 지금까지 초기 대륙의 이성주의 철학과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 그리고 독일 고전철학을 보았습니다. 그 속에서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이 어떤 것이었으며, 그것이 야기하는 딜레마는 무엇이었고, 그로 인해 생긴 난점들은 어떤 것이었으며, 그것과 연관해서 근대철학자들의 대처는 어떠했는지 등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근대철학이 그 근본적인 딜레마로 인해 위기에 처하게 되는 과정과 그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에 의해 새로운 사고방식들이 출현하는 과정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이 역동적 과정을 통해 근대철학의 역사가 어떻게 풍부하게 되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했듯이 근대철학 내부에 있는 그 딜레마는 근대적 문제설정 안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것..
‘철학의 종말’, 근대철학의 종말 그렇지만 근대적 문제설정 안에 있었던 헤겔로선 또 다른 딜레마를 절감하게 됩니다. 진리란 스스로 돌아보며 자기가 갖고 있는 기준을 계속 정정해 가는 과정이라는 헤겔의 주장이 타당하다면, 헤겔이 생각해낸 이 진리의 기준 역시 이후 정정되고 폐기될 수 있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헤겔 자신이 제시한 진리의 기준은 초역사적으로 타당하다고 하는 순간, 진리의 기준이 정정되어 가는 과정을 통찰한 헤겔 자신의 진리 개념은 장벽에 부닥칩니다. 이는 논리적인 난점이지만, 사실 진리 개념에 대한 입론을 제출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하는 난점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기준 자체의 정정 과정을 파악하는 입론의 현실성이요 효과니까요. 그러나 확고한 진리를 추구하는 근대적 문제..
근대철학을 정점에 올리다 눈치 빠른 분들은 이미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이러한 헤겔의 사상은 스피노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입니다. 우선 셸링의 자연철학 자체가 그렇습니다. 자연을 정신으로 간주하는 관점은 자연을 실체의 양태로 간주하는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유추한 것입니다. 헤겔에게 절대자(절대정신)란 스피노자식으로 표현하면 ‘실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외화되어 만들어내는 자연, 사회, 역사는 스피노자 개념에서 ‘양태’에 해당되지요. 한마디로 말하면 스피노자의 실체/양태 개념을 주체와 객체의 통일성을 이루어가는 목적론적 과정에 적용한 것입니다. 다른 한편 지식과 진리에 대한 변증법 역시 그렇습니다. 헤겔은 진리에 대한 판단에 앞서 진리의 기준을 미리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스피노자의 명제를 받아들여..
지식과 진리의 변증법 그러면 이러한 관점에서 헤겔은 진리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까요? 이와 관련해 우리는 헤겔이 말하는 지식과 진리의 변증법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헤겔에게 현실은 주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다시 말해 인식의 대상은 주체 내부에 있는 것입니다. 이를 의식 내부에 있는 거라고 표현하지요. 이러한 사고법은 피히테에게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합니다. 모르는 것을 먹을 대상이라고 생각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을 먹을 수 있고,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헤겔은 지식을 “대상에 대한 주체의 연관”이라고 정의합니다. 물론 이것은 의식 내에서 만들어지는 연관입니다. 그렇지만 피히테와 달리 헤겔은 대상을 정립하는..
‘절대정신’의 변증법 헤겔 역시 사물 자체와 주관, 현실과 주체를 분리시키지 않기 위해선 근원적인 통일을 처음부터 설정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피히테는 이 근원적인 통일을 ‘자아’를 절대화해서 만들어냈지요. 하지만 헤겔이 주목하는 건 오히려 친구였던 셸링의 방법입니다. 셸링 역시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을 ‘절대자’라고 생각하며, 그런 절대자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피히테의 생각처럼 자아가 비아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비아가 자아를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피히테와 달리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자아를 근거로 자연을 도출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비판합니다. 오히려 주체-객체의 동일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자연을 주체화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즉 자연이 곧 주..
3. 헤겔 : 정점에 선 근대철학 비판철학과 헤겔 헤겔은 ‘변증법’이란 이름이 살아 있는 한 그 이름을 잊기는 어려울 정도로 변증법적 사고를 체계화한 철학자로 유명합니다. 특히 헤겔의 제자임을 자처했던 맑스를 통해서, 그리고 맑스주의 내의 유수한 철학자들을 통해서 헤겔은 헤겔철학의 영역 밖으로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해 왔습니다. 20세기의 중반기까지, 그리고 일부 지역에선 지금까지도 헤겔은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사람입니다. 헤겔의 사상은 매우 복잡하고 난해하며 걸쳐 있는 범위가 방대해서, 지금과 같은 자리에서 제대로 요약하는 것은 능력을 떠나 어려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저 역시 이런 무리한 욕심은 애초부터 내지 않을 생각입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와 관련해서 헤겔의 입론을 가능..
자아철학의 봉쇄장치 지금까지 본 것처럼 피히테는 선험적 주체를 발견하려는 칸트의 기획을 좀더 근원으로 밀고 가려고 했습니다. 즉 선험적 기획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는 칸트의 선험적 자아보다 더 근원적인 것으로서 무규정적 자아에서 출발합니다. 칸트적인 선험적 주체조차 거기에 의존해야 하는 자아의 존재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피히테는 근대철학적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있음 그 자체가 ‘자명한’, 존재로서의 자아로 말입니다. 이 자아가 활동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아는 존재하고 있음이 자명하다고 합니다. 비록 이 자아를, 데카르트처럼 사유한다는 사실에서 도출하는 게 아니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 ‘자아’는 주체와 대상을 연관지어주는 활동입니다. 즉 주체와 대상을 자기 안에 포괄하고 있는..
피히테의 철학적 테제 피히테의 철학 전체를 특징짓는 세 가지 테제가 있습니다. 그 각각은 테제, 안티-테제, 진테제란 성격을 갖고 있는데, 이는 흔히 변증법을 요약할 때 등장하는 단어들이지요. 이 세 개의 테제를 통해 피히테는 지식학을 구성하려고 합니다. 첫째 테제 ― “경험 등 모든 사실의 설명에 근거가 되는 이 자아는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자아 자신 안에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이는 ‘자아의 정립(定立)’이라고 요약됩니다. 피히테에게 자아는 모든 정신적 활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절대적인 근거입니다. 경험이나 인식의 절대적인 출발점이자 근거를 이룬다는 점에서 절대적 자아인 거지요. 이러한 절대적 자아가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어떤 인식도 경험도 불가능합니다. 마치 인식하는 내가 없이는 어떤 인식도 불가능..
2. 피히테 : 근대철학과 자아 ‘자아’의 복권 피히테는 오직 12개의 범주만을 가지고 있는 칸트의 선험적 주체가 확실한 만큼이나 공허하다고 생각하며, 주체(피히테 용어로는 자아)의 활동과 무관하게 정의되어 있다고 비판합니다. 오히려 판단의 범주나 원리는 자아(주체)의 활동과정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특히 그가 주목하는 지점은 칸트철학의 인식론적 문제점입니다. 그것은 ‘사물 자체’와 ‘선험적 주체’라는 칸트의 개념에 관련된 것입니다. 피히테는 일단 ‘사물 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고 봅니다. 칸트에 따르면 사물 자체는 ‘있기는 있으되 인식되지 않는 무엇’입니다. 그러나 사물 자체가 인식되지 않는 무엇이라면 사물 자체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인식했는가 하고 피히테는 반문합니다. 무언가가 있는데..
그늘 진리에 관한 문제 이로써 칸트철학은 근대적 문제설정의 딜레마를 해소하고 위기의 요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한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뿌리깊은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해결은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생성시키거나 ‘전이’시킵니다. 칸트철학 자체 내에는 이미 새로운 위기의 요소들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앞서처럼 세 가지 차원에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진리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는 진리를 주관화하는 전략과 관련된 것입니다. 칸트는 현상이란 우리가 지각하고 인식한 것이고, 따라서 주관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하지요. 대신 주관 밖에는 ‘사물 자체’를 남겨두고 말입니다.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고 우리의 인식을, 진리를 단지 현상에 관련된 것으로 제한합니..
칸트철학의 영광 칸트는 흄에 의해 전면화된 ‘근대철학의 위기’ 속에서 작업했습니다. 그는 위기 속에서 붕괴된 근대철학의 지반을 새로이 복구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근대적 문제설정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기둥으로서 ‘진리’와 ‘주체’를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한 칸트의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진리의 주관화입니다. 즉 진리를 외부의 사물이나 대상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주체 자체의 내부에서 찾자는 것이지요. 둘째는 주체(주관)의 객관화입니다. 모든 주체가 선험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경험이나 인식의 기초가 되는 필수적인 형식을 주체 내부에서 찾아냄으로써 그것이 모든 주체들에게 공통된 것임을, 따라서 객관적인 것임을 보여주려고 하였습니다. 이 두 과정의 복합으..
근대적 윤리학 확립 셋째, 근대적 윤리학(도덕철학)의 확립입니다. 칸트가 윤리학 혹은 도덕철학의 문제를 다룬 책은 알다시피 『실천이성 비판』입니다. 인간의 의지와 행동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이 책에서, 칸트가 던지는 도덕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 “인간의 의지(및 행동)는 이성의 힘만으로 규제될 수 있는가?” 바꿔 말하면 인간의 의지와 행동을 규제하는 원리가 인간의 이성 안에 있을 수 있는가, 모든 인간이 따라야 할 보편적인 원리가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이는 근대적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인간의 이성이 신에게서 독립해 존재하고, 인식하며, 행동할 수 있는가가 근대철학의 독립을 확보하기 위한 질문이었으니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의지를 규제할 보편적인..
근대적 주체의 재건 둘째, 근대적 ‘주체’의 재건입니다. 근대철학의 확실한 기초요 출발점이었던 주체는 흄의 비판을 통해 ‘지각의 다발’ ‘관념의 다발’로 해체되어 버렸습니다. 진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에 더해 이젠 아예 인식하는 주체조차 불가능하다는, 극히 부담스런 결론에서 칸트는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디든 길은 찾는 자에겐 있게 마련입니다. 칸트는 죽음 직전의 위기에서 근대적 ‘주체’를 살려냅니다. 과연 어떻게 살려낼까요? 칸트가 보기에 인간의 인식은 경험과 더불어 시작됩니다. 물론 흄이 지적한 것처럼 경험적 인식은 매우 불확실해서 진리가 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경험을 통해 인식한다고 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뭔가가 있을 겁니다. 도대체 그게 ..
진리 개념의 전환과 재건 그렇다면 이제 칸트가 어떤 식으로 근대철학의 기초를 재건하는지 살펴봅시다.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얘기하는 게 유용할 것 같습니다. 첫째는 ‘진리’ 개념의 전환과 재건입니다. 알다시피 흄은 귀납론과 인과법칙을 부정했습니다. 귀납론을 빌려, “이제까지 본 모든 까마귀가 다 까맸다. 따라서 모든 까마귀는 까맣다”고 한다 합시다. 그러나 이후에 갈색 까마귀나 회색 까마귀가 안 나온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고, 혹시라도 그런 까마귀가 한 마리라도 발견되는 날이면 앞서 한 말은 거짓이 됩니다. 또 인과관계란 관찰한 사람이 갖는 습관적인 추론이라고 했지요. 이렇게 되면 경험적 지식은 어떤 확실한 지식, 참된 지식을 줄 수 없습니다. 즉 진리는 경험을 통해 얻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게 칸트가..
제3부 독일의 고전철학 : 근대철학의 재건과 ‘발전’ 1. 칸트 : 근대철학의 재건 근대철학의 위기와 칸트철학 앞서 말했듯이 ‘근대철학의 비조’라는, 지금까지도 데카르트가 누리고 있는 영광은 신학의 지배 아래 있던 철학, 신의 지배 아래 있던 인간을 신학과 신으로부터 독립시킴으로써 근대적 사고를 가능케 하는 근대적 문제 설정을 기초지우고 방향지웠다는 공적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카르트로선 자명하고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생각하는 나’ 즉 인식주체가 매우 불확실하며, 진리 역시 극히 취약한 기초를 갖고 있음이 흄으로 인해 드러났습니다. 진리는커녕 인과법칙조차도 있다고 할 수 없으며, 주체가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지각의 묶음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데카르트가 마련한 근대철학의 전제가, 그 출발점과 ..
5. 근대철학의 위기 유명론과 경험론의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로크ㆍ버클리ㆍ흄의 사상을 유명론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론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유명론은 로크에 의해 근대적인 문제설정으로 포섭되었습니다. 그 결과 유명론이 가지고 있었던 반관념론적인 성격은 근대철학 내부에서 딜레마를 드러내고, 결국 극한으로까지 가게 됩니다. 버클리와 흄의 작업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유명론은 관념론으로, 혹은 회의주의로 전환되었지요. 경험적 지식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한 경험주의는 그 반대물로, 즉 경험이라는 것은 도대체 믿을 수 없고 진리를 형성할 수 없다고 하는 반대물로 전화되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함으로써 근대철학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회의주의’는 극한에 선 근대철학..
탈출도, 귀환도 아닌…… 흄이 수행한 근대철학의 해체는 분명 근대적 문제설정의 경계 내부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단지 그 안에만 머물러 있었다고 하는 것은 정확한 평가가 아닐 것 같습니다. 때로 그는 그 경계선 밖으로 넘어갑니다. 여기서 두드러진 것은 믿음에 대한 흄의 이론입니다. 흄에게 인과관계는 습관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인상이나 관념을 결합시켜 어떤 지식을 형성합니다. 이 지식은 ‘법칙’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즉 참된 지식이나 진리 대신에 믿음이란 개념이 들어서는 것입니다. 흄은 믿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현재의 인상과 관련이 있는, 혹은 그것들로 결합되어 있으며 그것들로 연합되어 있는 생생한(살아 있는!) 원리”라고 말입니다. 믿음은 힘을 가지며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그..
근대철학의 전복 위에서 본 것처럼 흄은 근대철학의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진리’ 혹은 ‘과학’의 불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나아가 좀더 근본적으로 근대철학의 입지점인 ‘주체’ 자체가 결코 안정적이거나 자명한 것이 아님을 또한 보여주었습니다. 근대의 과학주의는 물론, 주체철학 자체가 어떤 근본적 곤란에 처해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는 근대적인 문제설정이 안고 있었던 딜레마를 폭발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근대철학의 ‘극한’이요 ‘한계지점’이었습니다. 이로써 근대적 문제설정은 해체되며, 근대철학의 ‘위기’라는 사태가 초래됩니다. 그래서 그 이후의 대다수 철학자가 이 위기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노력을 하게 되고, 이것이 그 이후의 근대철학을 새롭게 발전시키게 됩니다. 어쨌..
주체의 해체, 주체철학의 해체 흄은 버클리가 남겨둔 유보조항을 비판하면서 경험주의를 좀더 극단으로 밀고 갑니다. 버클리는 지각된 것을 관념이라 하고, 지각하는 것을 정신이라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물건을 보고 ‘사과’로 지각한다면 ‘사과’는 관념이고, 그걸 지각한 것은 정신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버클리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라고 하며, 지각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지각하는 정신만은, 지각되는 게 아니지만 존재한다고 합니다. 요컨대 지각하는 ‘주체’, 인식하는 주체(데카르트)가 ‘정신’이란 이름으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흄은 이런 예외조차 인정하지 않습니다. 흄은 사물을 보고 생긴 것은 인상이요, 그 인상의 기억이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게 ..
4. 흄 : 근대철학의 극한 과학주의에서 회의주의로 근대철학을 그 극한으로까지 몰고 갔던 사람은 누구보다 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하 알다시피 흄의 철학은 ‘회의주의‘로 불려지는데, 대개는 회의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그의 사상에 대한 평가를 일축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한 근대철학에서 그러한 회의주의가 나타난 것은 무엇 때문이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근대철학 전반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매우 역설적인 중요성을 갖습니다. 흄의 출발점은 로크와 비슷합니다. 그 역시 엄격한 과학적 지식을 추구합니다. 그에 따르면 “자연과학의 성과를 빌려 인간학을 구성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는 과학의 일종으로 간주되던 심리학에 기초해서 ‘경험적 인간학’을 구성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경험과 관찰이 일차적 위치를..
관념론으로 다른 한편 버클리는 ‘물질’이란 실체를 제거하지만, 정신에 대해선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각하는 정신이 없다면 대체 경험이 어떻게 가능하겠으며, 지각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따라서 버클리에게는 정신이란 실체만 존재하며, 이 실체가 지각하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결국 ‘정신’이란 실체 앞에서 버클리는 유명론에 일종의 유보조항을 달아두고 있는 셈입니다. 자기가 비판했던 로크처럼 말입니다. 요약하자면, 버클리의 주장은 유명론에서 관념론으로 나아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중세의 유명론은 실재론에 대항하는, 반관념론적이고 유물론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뜻에서 흔히 유명론을 중세의 유물론이라고도 하지요. 로크의 유명론 역시 이런 성격이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데카르트 철..
3. 버클리 : 유명론에서 관념론으로 로크에 대한 두 가지 비판 버클리는 로크 비판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입론을 세웁니다. 그의 로크 비판은 일단 두 가지로 나누어 얘기할 수 있습니다. 첫째, 실체의 개념에 대한 비판입니다. 로크는 모든 복합관념은 오성(정신)이 결합한 것이고 명목적인 것일 뿐이라고 하면서, ‘실체’에 대해서만은 예외로 한다고 합니다. 즉 물질과 정신이라는 실체는 ‘예외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겁니다. 버클리는 이런 예외조항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둘째, ‘제1성질’에 관한 비판입니다. 로크는 대상의 성질이란 모두 인식주체가 경험한 것이요 주관적이라고 하면서, 오직 제1성질만은 예외로 둡니다. 그러나 버클리는 제1성질만 유독 물질 그 자체에 속하는 객관적 성질이라고 할 이..
유명론의 근대화 앞서 우리는 로크의 경험주의가 두 가지 지반 위에 서 있다고 말했습니다. 표면상으로 그것은 근대철학과 과학주의였지만, 사실상은 근대철학과 유명론이었음을 보았습니다. 중세에 유명론은 보편 개념이 실재한다는 주장의 반론으로 제출되었고, 실재하는 것은 개별자라는 ‘존재론적’ 성격의 사상이었습니다(중세에 별도로 존재론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성격은 존재론이라고 나중에 불리는 것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따옴표를 쳐 ‘존재론적’이라고 한 것입니다). 보편자에 대한 개별자의 우위를 주장하는 ‘존재론’이었지요. 그것은 신학적 문제설정 속에 있었으나, 본질적으로 신학과는 화해하기 힘든 것이어서 끊임없이 신학과 충돌하고 억압받기도 했습니다. 반면 로크에 이르러 유명론은 근대적 문제설정에 포섭되게 됩니다. ..
로크의 딜레마 그런데 로크는 곧 딜레마에 빠집니다. 이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 데 하나는 실체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에 관한 것입니다. 첫째로 실체에 관한 것. 로크는 경험을 통해 우리의 감각은 대상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로크가 환각이나 착각에 의한 경험을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경험을 통해 ‘나’를 자극하는 요인이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내가 어떤 사물을 보고 ‘빨갛다’고 지각했다면, 나로 하여금 빨갛다고 생각케 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 그게 없다면 나는 착각한 거거나 꿈을 꾸고 있는 거겠지요. 물론 경험이나 관찰한 바가 잘못되어서 나중에 수정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혹은 그게 원래 빨간 건지, 아니면 다른 건데 우리가 그렇게..
‘본유관념’ 없는 진리를 위하여 데카르트가 진리의 근거를 이성과 이성의 본유관념에서 찾았다는 것은 앞서 거듭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로크가 보기에 이런 본유관념이란 중세적이고 스콜라철학적인 잔재였습니다. 로크가 지금 있다면 이런 식으로 예를 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불을 찾아서」란 영화가 있지요. 불을 사용하던 원시인들이 불씨가 꺼지자 불을 찾아오라고 몇 사람의 대표를 보내고, 이들은 고생 끝에 불을 찾아옵니다. 그러나 원시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불을 물에 빠뜨려 꺼뜨리고 맙니다. 그런데 이때 주인공은 그걸 찾는 과정에서 배운 불피우는 법을 써서 불을 피우려고 하지요. 물론 잘 안 되어, 그걸 가르쳐준 여자가 대신 피워 주지요. 불을 피울 줄 몰랐던 원시인이라면 어디엔가 있는 불을 찾아 쓸 줄밖..
2. 로크 : 유명론과 근대철학 로크의 입지점 알다시피 로크는 경험주의를 하나의 사조로, 흐름으로 만들어낸 사람입니다. 이러한 로크의 철학을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지반이 있습니다. 하나는 데카르트가 새로운 장을 열었던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입니다. 신에게서 독립한 주체, 그래서 존재ㆍ인식ㆍ가치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던 근대적 주체가 로크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한 지반이 됩니다. 진리라는 인식의 목표 역시 마찬가지지요. 다른 한편 그는 갈릴레이, 뉴턴, 호이겐스 등이 이룩한 과학혁명의 획기적 효과 속에서 사고했습니다. 즉 근대 초의 과학혁명이 로크의 사상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제 과학은 진리에 이르는 가장 커다란 길, 어쩌면 암묵적으로는 유일한 길로 간주됩니다. 데카르트가 기초를 닦아놓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