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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1. 개가 한 다리를 들고 오줌을 누는 까닭견족수사(犬足受賜) 盤古王, 鴻濛元年初, 鼎稟四足, 犬賦三足. 犬之徒, 上疏, 其略曰: “夫鼎者, 安坐一隅, 烹羹炊飯而已. 臣等, 晝而佃獵, 以供宗廟; 夜以守祠, 以備盜賊, 以臣與鼎, 孰勞孰佚? 坐者佚者而四其足, 行者勞者, 三其足, 曾謂陛下淳庬之知, 足民之仁而 如是偏耶? 伏願陛下, 憐之均之, 俾臣等, 無不足之欲, 幸甚.” 王可之, 卽命有司, 三鼎之四, 四犬之三, 犬大感. 常以一脚, 爲宣賜, 當溲溺, 必擧其脚, 以避其穢焉. 史臣曰: “上而從其下仁也, 下而敬其上忠也. 王納犬之疏, 如轉圜; 犬敬上之賜, 如鬼神, 上下, 相安, 各保其美, 猗歟休哉! 後之人君, 非惟㨆下之言, 又從而刀鋸之, 鼎鑊之, 率是道也. 下之視其君, 如猛虎毒藥者, 無怪也. 噫!” 해석盤古王, ..
5.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禍福在己, 得失在天. 해석禍福在己, 得失在天. 재앙과 복은 나에게 달려 있고 얻고 잃음은 하늘에 달려 있다. 인용전문
4. 성현과 영웅의 기질 聖賢多畏, 英雄多忌. 해석聖賢多畏, 英雄多忌. 성인과 현인은 두려워하는 것이 많고 영웅은 꺼려하는 게 많다. 인용전문
3. 자연의 이치를 따르다 盈天地之間者, 感應報復之理也. 해석盈天地之間者, 感應報復之理也.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것은 감응하여 되갚아주는 이치다. 인용전문
2. 기교 있음과 지혜에 대해 至巧無如造化, 大智無如聖人. 해석至巧無如造化, 大智無如聖人. 엄청 기교로운 것은 조화로운 것만 한 게 없고 매우 지혜로운 이는 성인만 한 게 없다. 인용전문
1. 거스름이 없는 따름 天地之開物成務, 順之而已; 聖賢之輔世行道, 推之而已; 英雄俊傑之興事造功, 待之而已. 古語曰: “順理行將去, 隨天分付來.” 與此語一種. 해석天地之開物成務, 順之而已; 聖賢之輔世行道, 推之而已; 英雄俊傑之興事造功, 待之而已. 하늘과 땅이 사물을 열어주고 힘써 이룸은 이치를 따랐을 뿐이고 성인과 현인이 세상을 도우며 도를 유행시킴은 이치를 확충했을 뿐이며 영웅과 준수한 이들이 사업을 일으키고 공을 만듦은 이치를 대우했을 뿐이다. 古語曰: “順理行將去, 隨天分付來.” 與此語一種. 옛 말에 “이치의 유행을 따라 가고[藏去] 하늘의 분수를 따라 온다”라고 했으니 이 말과 동일한 종류다. 인용전문
1. 반남박씨의 유래와 우리 가문 先君諱趾源, 字美仲, 號燕岩. 我朴氏系出新羅, 得姓於羅州之潘南縣者, 爲潘南人. 世譜姑不載錄. 해석 先君諱趾源, 字美仲, 號燕岩. 돌아가신 아버지의 휘(諱)는 지원(趾源)이고 자(字)는 미중(美仲)이며 호(號)는 연암(燕岩)이시다. 我朴氏系出新羅, 得姓於羅州之潘南縣者, 爲潘南人. 우리 박씨의 계보는 신라(新羅)에서 나왔고 나주(羅州)의 반남현(潘南縣)에서 성을 얻어 반남(潘南) 사람이 되었다. 世譜姑不載錄. 대대로 이어진 족보는 일부러 기재하진 않는다. 인용 목차 / 박지원
아버지의 남겨진 모습을 담다 과정록 자서(過庭錄 自序) 박종채(朴宗采) 嗚呼! 自內舅芝溪公沒, 先君誌狀之述, 屬托無處. 不肖始乃欲裒輯遺事, 傳道後承, 而顧惟識見淺陋, 筆墨荒短, 見聞所及多所墜失. 嘗讀古人所述家庭文字. 如邵氏聞見之錄, 呂氏家塾之記, 類多不棄瑣細而悉書之, 其想像遺徽, 反有勝於謹嚴之作. 於是, 竊倣其法例而爲之, 片紙寸藁, 隨得隨藏, 如古人盎葉之書. 自癸酉春, 始今四年矣, 乃删其繁縟, 去其重複, 凡二百有餘條. 頗有據聞直錄, 若欠愼重, 而未敢輒事刪削者, 以先君之風采神韻, 猶或可想見於此等處, 覽者或恕之歟? 丙子孟秋, 不肖男宗采泣血謹書. 해석 嗚呼! 自內舅芝溪公沒, 先君誌狀之述, 屬托無處. 아! 외삼촌[內舅] 지계공(芝溪公) 이재성(李在誠)께서 돌아가시고부터 선군의 지장(誌狀)【지장(誌狀): 고인의 ..
8. 대머리는 술 때문이야 두독주지화야(頭禿酒之禍也) 孔先生頎, 性, 嗜酒, 頭禿而髥長. 客有戱者曰: “同一體也, 何髮於頤而不髮於頭?” 孔曰: “酒之禍也.” 客曰: “酒安能禍於頭而不禍於頤乎?” 孔笑曰: “子不聞醉者之痛乎? 常曰頭痛, 不曰頤痛, 豈非痛者受禍而不痛者不受禍乎? 此吾所以髮於頤而不髮於頭也.” 客不覺失笑. 해석 孔先生頎, 性, 嗜酒, 頭禿而髥長. 선생 공기(孔頎)는 본성적으로 술을 즐겼고 머리는 벗겨졌지만 수염은 길었다. 客有戱者曰: “同一體也, 何髮於頤而不髮於頭?” 나그네 중 장난치는 사람이 “같은 하나의 몸인데 어째서 빰엔 털이 났는데 머리엔 털이 없는고?”라고 말했다. 孔曰: “酒之禍也.” 공기가 “술이 화근이오.”라고 말했다. 客曰: “酒安能禍於頭而不禍於頤乎?” 나그네가 “술이 어째서 머리엔..
7. 관찰사 조운흘이라 외워대다 염관찰사운흘(念觀察使云仡) 趙石澗云仡, 觀察西海道, 晨興, 必念阿彌陀佛. 一日, 到白川郡, 晨興, 聞窓外有念云仡之聲, 訊之, 乃邑宰朴熙文也. 問其由, 朴曰: “觀察使, 念阿彌陀佛, 欲成佛, 我念趙云仡, 欲作觀察使.” 해석 趙石澗云仡, 觀察西海道, 晨興, 必念阿彌陀佛. 석간(石澗) 조운흘(趙云仡)이 서해도(西海道)에 관찰사가 되었는데 새벽이 일어날 적에 반드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외워댔다. 一日, 到白川郡, 晨興, 聞窓外有念云仡之聲, 訊之, 乃邑宰朴熙文也. 하루는 백천군(白川郡)【배천군: 황해남도 남동부에 있는 군】에 이르러 새벽에 일어나자 창 밖에서 조운흘이라 외워대는 소리를 들었고 캐묻자 곧 읍의 사또인 박희문(朴熙文)이었다. 問其由, 朴曰: “觀察使, 念阿彌陀佛, 欲..
하릴없음을 경계하러 골계전을 짓다 골계전서(滑稽傳序) 세교에 보탬이 없는 글나부랭이를 지었다는 핀잔 居正嘗謝事居閑, 遊戱翰墨, 書與朋友所嘗戱談者, 題曰滑稽傳. 客有誚者曰: “子之所讀何書? 所業何事? 子立朝將四十年, 踐歷臺閣, 長六部, 亞巖廊, 宦非不達. 會不聞謀猷獻替, 建白設施; 又不聞著書立言, 如馬如班如劉如揚者之所爲. 徒屑屑焉掇拾孟浪, 爲好事者解頤, 此則徘優之雄長耳, 何補於世敎乎. 골계전을 지어 장자와 열자의 죄인이 되다 且子平生, 淸脩苦節, 水蘖其操, 頃以纖芥無妄之災, 驚塵駭浪, 猝起於不測之地, 衆虺羣蝮, 蛟鱷百怪, 騈首接足, 鼓吻垂涎, 欲飽其肉而齕其骨. 賴仁聖在上, 至明旁燭, 生死而肉骨之. 曾不動心忍性, 馳怪騁奇, 惟技是癢. 昔列御寇ㆍ莊周, 見道精, 憤世深, 作爲詭激之說, 奇崛之文, 鼓舞變化, 動盪..
2. 돼지가 삼킨 폭포 저끽폭포(猪喫瀑布) 有一朝官, 出宰晉陽. 政令殘暴, 徵斂無度, 雖山林果蔬, 利無所遺, 寺社髠緇輩, 亦受其弊. 一日, 雲門寺僧, 來謁州宰, 宰曰: “汝寺瀑布想佳.” 僧不知瀑布爲何物, 恐亦徵斂, 應聲曰: “我寺瀑布, 今夏爲猪喫盡.” 江陵有寒松亭, 山水之勝, 擅關東, 使賓客之遊賞, 蹄輪輳集, 供費不貲. 州人, 常詬曰: “寒松亭何日虎將去?” 有人作詩云: “瀑布當年猪喫盡, 寒松何日虎將去.” 해석 有一朝官, 出宰晉陽. 어떤 한 명의 조정 관리가 진양(晉陽)【진주(晉州)의 옛 이름】의 사또가 되어 갔다. 政令殘暴, 徵斂無度, 雖山林果蔬, 利無所遺, 寺社髠緇輩, 亦受其弊. 정치의 법령을 잔혹하고 사납게 했고 세금 걷는 데에 법도가 없어 비록 숲속 과일과 채소라도 이익이라면 버리질 않아 절의 머리..
70. 차석 급제자를 위하여 丙戌登俊試, 金乖崖守溫爲壯元, 姜晉山希孟爲榜眼, 居正忝爲探花. 嘗寄晉山詩云: “登俊科中榜眼賢, 黑頭勳業照凌烟. 探花三月嗟遲晩, 最好芳菲二月天.” 盖用金貞肅仁鏡故事. 高麗明王時, 仁鏡以詞賦自負常擬龍頭, 金諫議君綏擢壯元, 貞肅居亞元, 位至卿相尙怏怏. 甥皇甫壯元瓘家設龍頭會, 寄詩云: “聞道君家宴貴賓, 桂林渾是一枝春. 欲叅高會慙非分, 却恨當年第二人.” 金諫議次韻, “莫將金榜較嘉賓, 入律花枝次第春. 正月尙寒三月暖, 芳菲二月最宜人.” 盖以正月比狀頭, 二月亞元, 三月探花也. 함흥에서의 과거시험 (Hamhung Gwageo Exams) 해석 丙戌登俊試, 金乖崖守溫爲壯元, 姜晉山希孟爲榜眼, 居正忝爲探花. 병술년(1466년 세조 12년) 임시 과거시험인 등준시(登俊試)에서 괴애(乖崖) 김수온(..
3. 온갖 돈을 다쓰고 나서야 기녀에게 무시당한 한생 한생병필(韓生秉筆) 古阜郡有一妓, 忘其名, 申高靈奉使時, 所情種者. 故隨之京師, 奉巾四年, 高靈悶其懷土而暫許歸寧. 妓還家積日, 淫聲稍著. 有勳孽姓韓者, 姿容淸秀, 風流蘊藉. 嘗徵貢布八九駄, 托於古阜而, 投宿妓家. 感妓之美貌, 留連忘返則妓亦悅生之標致. 又見行齎之頗贍, 響應而甚幸之, 昵愛相篤, 誓死綢繆. 生淹延數月, 罄湯所持, 若將終身, 無所持, 奈何? 語曰: “思念之切, 當示肝膈, 言與心違, 有如皎日.” 妓曰: “然則當以某事, 示之乎?” 生曰: “渠之狎客必多, 胸中自有涇渭, 渠可等級之, 我當筆之.” 妓曰: “諾.” 生涉筆臨紙, 聽其所言, 妓依枕良久曰: “長城鄕吏李淸, 其甲也; 光州甲士林萬孫, 其乙也.” 生又請丙, 妓曰: “申高靈有功, 不可不書, 校生朴命..
2. 글재주가 없음에도 뽐내고 싶던 이의 최후 만호연구(萬戶聯句) 甲子年, 湖南方伯, 駐于羅. 値春丁, 躬行釋奠, 文倅數人, 適且至. 方伯爲設福筵, 酒半行, 令曰: “先聖飮福, 不可無文字以侑之?” 遂相酬唱, 爭相嘆賞. 有一萬戶, 來間末席, 緘口低頭, 覓句蹙面, 頗懷慙靦. 時, 落鍾字, 一文倅, 起出, 萬戶, 尾而出躡求敎. 倅, 卽附耳曰: “鍾動南樓天欲曉.” 萬戶, 倚墻佇立, 屈指轉誦, 料已圓熟. 趨入跪曰: “武夫, 亦欲效顰.” 而遂朗吟曰: “鍾痛南樓天益曉.” 滿座絶倒. 史臣曰: “人有才不才, 才而示不才, 謙也; 猶可不才而誇才, 妄也. 不可先聖福筵, 文士酬唱, 如帶甲之武士, 雖或有一句之巧, 不可以爲才也. 而萬戶, 乃敢傳笑於人, 非妄何? 噫! 妄亦從不學中出來矣, 不學之病, 難醫也哉!” 해석甲子年, 湖南方伯,..
91. 골리국에서 태어나지 못한 게 한 한불생어골리국(恨不生於骨利國) 冬十月開別試, 取士, 日極短. 有一生性躁才窘, 操觚染翰大言曰: “恨不生於骨利國.” 再說不置, 其友問之. 答曰: “子不聞乎? 骨利國日入烹羊胛, 纔熟而東方已明, 其夜短日長可知. 吾之白日場, 豈不綽乎有裕?” 聞者皆笑. 해석 冬十月開別試, 取士, 日極短. 겨울 시월에 별시를 개최해 선비를 선발하는데 일정이 매우 짧았다. 有一生性躁才窘, 操觚染翰大言曰: “恨不生於骨利國.” 한 서생이 성격이 급하고 재주가 굼떠 붓을 잡고 한지를 적시며 큰 소리로 “골리국【골리국(骨利國): 골리간국(骨利幹國)을 말하며 고비사막 북쪽에 위치한 흉노의 한 부족이다. 『구당서(舊唐書)』에 “골리간국(骨利幹國)은 한해(瀚海)의 북해에 가까워 낮은 길고 밤은 짧아서 양의 ..
21. 정지상과 김부식의 악연 世傳金侍中富軾, 與鄭學士知常同遊山寺, 知常有‘琳宮梵語罷, 天色淨琉璃.’之句. 富軾喜之, 乞而不與, 乃搆而殺之. 後往一寺, 偶登厠, 忽有從後握囊者曰: “君顏何赤?” 富軾對曰: “隔岸丹諷照面紅” 因病死. 按唐劉廷芝作「白頭翁」詩, 其一句曰: ‘今年花落顏色改, 明年花開復誰在.’ 其舅宋之問愛其句, 懇乞不與, 怒, 以土囊壓殺之. 噫! 人之猜才好名如此, 爲詩者不可不知. 해석 世傳金侍中富軾, 與鄭學士知常同遊山寺, 세상에 전하는 말이다. 시중 김부식과 학사 정지상이 산사에 함께 유람할 적에 知常有‘琳宮梵語罷, 天色淨琉璃.’之句. 지상의 다음 구절을 琳宮梵語罷 天色淨琉璃 절에서 불법을 설파하는 소리 그치고, 하늘빛 맑기가 유리 같네. 富軾喜之, 乞而不與, 乃搆而殺之. 부식이 그 시구를 좋아해..
17. 최치원의 시 세 편 崔孤雲「泛海」詩曰: ‘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 乘槎思漢使, 採藥憶秦童. 日月無何外, 乾坤太極中. 蓬萊看咫尺, 吾且訪仙翁.’ 辭語宏肆. 「贈智光上人」詩曰: ‘雲畔構精廬, 安禪四紀餘. 筇無出山步, 筆絕入京書. 竹架泉聲緊, 松欞日影踈. 境高吟不盡, 瞑目悟眞如.’ 句格精緻. 且如「題輿地圖」一聯: ‘崑崙東走五山碧, 星宿北流一水黃.’ 囊橐天下山水之祖, 思意極其豪健. 想此老胸中, 藏得幾箇雲夢也. 해석 崔孤雲「泛海」詩曰: ‘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 乘槎思漢使, 採藥憶秦童. 日月無何外, 乾坤太極中. 蓬萊看咫尺, 吾且訪仙翁.’ 최고운의 「범해(泛海)」라는 시는 다음과 같으니, 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 돛 걸고 푸른 바다에 떠 있으니 세찬 바람이 만 리까지 통하네. 乘槎思漢使 採藥憶秦童 뗏목에 탄 한..
54. 조선시대 부마 중 시에 뛰어난 두 사람 貴游中能詩者, 高原ㆍ礪城尉其人也. 高原之作淸藻, 礪城之作典密, 高原早卒, 未充其才, 惜也. 해석 貴游中能詩者, 高原ㆍ礪城尉其人也. 관직이 없는 부마(駙馬)【귀유(貴遊): 관직이 없는귀족(貴族), 또는 일반적으로 신분이 귀현(貴顯)한 자를 일컫는 말이다.】 중에 시를 잘 짓는 사람은 고원위(高原尉)와 여성위(礪城尉)가 그 사람이다. 高原之作淸藻, 礪城之作典密, 고원위(高原尉)의 시작은 맑고도 꾸밈이 있고 여성위(礪城尉)의 시작은 법도가 있고 촘촘하지만 高原早卒, 未充其才, 惜也. 고원위(高原尉)는 일찍 죽어 그 재주를 충당치 못했으니 애석하다. 인용 작가 이력 및 작품 목차 소화시평
53. 문장력이 뛰어난 임금과 종실 我朝列聖翰墨, 文廟爲首, 成廟ㆍ宣廟宸章出天, 無讓於漢武ㆍ唐宗. 每見文廟御製「祭棘城文」曰: “無情之謂陰陽, 有情之謂鬼神.” 雖老儒宿學, 何以道出此? 宗英之能詩者亦多, 風月亭爲冠, 醒狂子ㆍ西湖主人其次也. 해석 我朝列聖翰墨, 文廟爲首, 成廟ㆍ宣廟宸章出天, 無讓於漢武ㆍ唐宗. 우리 조선 역대 임금의 문장력은 문종이 으뜸이고 성종과 선조의 친필 문장[宸章]이 천성에서 우러나와 한나라 무제나 당나라 태종에 사양할 게 없다. 每見文廟御製「祭棘城文」曰: “無情之謂陰陽, 有情之謂鬼神.” 매번 문종께서 손수 지은 「제극성문(祭棘城文)」의 다음 구절을 보았으니 無情之謂陰陽 무정한 것을 음양(陰陽)이라 하고 有情之謂鬼神 유정한 것을 귀신(鬼神)이라 하네. 雖老儒宿學, 何以道出此? 비록 노련한..
15. 벼슬이 없는 왕공과 귀족의 시 申玄翁云: “貴遊中能詩者, 高原ㆍ礪城尉, 其人也.” 按高原, 卽文孝公申沆, 礪城, 卽頤庵宋寅. 今選兩人詩各一首, 高原「詠伯牙」詩曰: ‘我自彈吾琴, 不須求賞音. 鍾期亦何物, 强辯絃上心.’ 礪城「戱題氷綃手帕, 幷寄眞娘」曰: ‘半幅氷綃一掬雲, 寄渠聊作扇頭巾. 不知幾處離筵上, 持向阿誰拭淚痕.’ 近世東陽尉申翊聖亦能詩, 其「歸田結網」詩曰: ‘寒食風前穀雨餘, 磨腮魚隊上灘初. 乘時盡物非吾意, 故使兒童結網疎.’ 噫! 此等公子, 皆妙年富貴, 於文章用力必不事, 而其所諷詠如此. 非其才之過大者, 能如是乎? 해석 申玄翁云: “貴遊中能詩者, 高原ㆍ礪城尉, 其人也.” 현옹 신흠이 『청창연담』에서 “관직이 없는 부마(駙馬)【귀유(貴遊): 관직이 없는귀족(貴族), 또는 일반적으로 신분이 귀현(貴顯)..
14. 종실의 시들 申玄翁云: “宗英之能詩者亦多, 風月亭爲冠, 醒狂子ㆍ西湖主人其次也” 按風月亭, 卽月山大君婷, 醒狂子, 卽朱溪君深源, 西湖主人, 卽茂豐正摠. 今選三人詩各一首, 風月亭「寄人」詩曰: ‘旅館殘燈夜, 孤城細雨秋. 思君意不盡, 千里大江流.’ 醒狂子「雲溪寺」詩曰: ‘樹陰濃淡石盤陀, 一逕縈廻透澗阿. 陣陣暗香通鼻觀, 遙知林下有殘花.’ 西湖主人「漁父詞」曰: ‘老翁手把一竿竹, 靜坐苔磯睡味閒. 魚上釣時渾不覺, 豈知身在畵圖間.’ 近世泰山守棣亦能詩, 其「閒居卽事」詩曰: ‘蕪菁結穗麥抽芽, 粉蝶飛穿茄子花. 日照疎籬荒圃靜, 滿園春事似田家.’ 蓋自古宗英生長綺紈, 耽悅聲色, 罕有留意文章者. 而觀其諷詠, 絕俗超倫, 有非等閒詞客所及, 可貴哉! 해석 申玄翁云: “宗英之能詩者亦多, 風月亭爲冠, 醒狂子ㆍ西湖主人其次也” 현옹 신흠..
13. 광해군 유배의 시 光海自江都移耽羅, 舟中賦詩曰: ‘炎風吹雨過城頭, 瘴氣薰蒸百尺樓. 滄海老濤來薄暮, 碧山愁色送淸秋. 歸心每結王孫草, 客夢頻驚帝子洲. 故國興亡消息斷, 烟波江上臥孤舟.’ 惜其詞華若此, 而淫侈無度, 終以覆國, 眞可與煬帝一轍. 해석 光海自江都移耽羅, 舟中賦詩曰: ‘炎風吹雨過城頭, 瘴氣薰蒸百尺樓. 滄海老濤來薄暮, 碧山愁色送淸秋. 歸心每結王孫草, 客夢頻驚帝子洲. 故國興亡消息斷, 烟波江上臥孤舟.’ 광해군이 강화도로부터 탐라로 이배(移配)될 적에 배 속에서 시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炎風吹雨過城頭 뜨거운 바람이 비를 불러 성 어귀를 지나고 瘴氣薰蒸百尺樓 장기(瘴氣)는 백척의 누각에서 그슬리며 찌네. 滄海老濤來薄暮 푸른 바다의 노련한 파도가 황혼[薄暮]을 오게 하고 碧山愁色送淸秋 푸른 산의 근심스..
12. 단종의 유배시 魯山廢居寧越, 有詩曰: ‘嶺樹參天老, 溪流得石喧. 山深多虎豹, 不夕掩柴門.’ 語極悲涼, 讀之淚下. 해석 魯山廢居寧越, 有詩曰: ‘嶺樹參天老, 溪流得石喧. 山深多虎豹, 不夕掩柴門.’ 노산군(魯山君)이 영월(寧越)에 폐위되어 거처할 적에 시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嶺樹參天老 溪流得石喧. 고개의 나무는 하늘까지 닿으려는 듯 나이 들고 시냇물 흘러 바위 가지려는 듯 시끄럽네. 山深多虎豹 不夕掩柴門 산은 깊고 많은 범과 표범으로 저물지 않았지만 사립문을 닫는다네. 語極悲涼, 讀之淚下. 시어가 매우 슬프고 처량하여 이 시를 읽으면 눈물이 난다. 인용 작가 이력 및 작품 서설 상권 목차 하권 목차
11. 효종의 호기로운 시 孝廟有詩曰: ‘我欲長驅十萬兵, 秋風雄鎭九連城. 大呼蹴踏天驕子, 歌舞歸來白玉京.’ 辭意豪壯, 殆不讓‘雪恥酬百王, 除兇報千古.’之作, 而天不假聖算, 齎志未就, 可勝痛哉! 해석 孝廟有詩曰: ‘我欲長驅十萬兵, 秋風雄鎭九連城. 大呼蹴踏天驕子, 歌舞歸來白玉京.’ 효종이 시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我欲長驅十萬兵 내가 하고자 하는 건 길이 십만의 병사를 몰아서 秋風雄鎭九連城 가을바람처럼 구련성(九連城)【여진(女眞)의 봉황성(鳳凰城) 동쪽에 있는 지명으로 우리나라와 접경지역의 성 이름이다】을 웅장하게 진치고 大呼蹴踏天驕子 크게 부르며 북쪽 오랑캐【천교자(天驕子)는 힘이 강성하여 마치 하늘이 놓아먹이는 것 같은 자를 말하는데, 흔히 북쪽의 호족(胡族)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한서(漢書)』 권..
10. 인조의 비상함이 담긴 시 仁祖在潛邸幼時, 有詩一聯曰: ‘世間萬物人禽獸, 天上三光日月星.’ 造語奇偉, 識者知其非常. 해석 仁祖在潛邸幼時, 有詩一聯曰: ‘世間萬物人禽獸, 天上三光日月星.’ 인조께서 잠저에 계시던 어린 시절에 시 한 연을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世間萬物人禽獸 세상엔 만물인 사람과 새와 짐승이 있고 天上三光日月星 하늘 위엔 삼광인 해와 달과 별이 있네. 造語奇偉, 識者知其非常. 조어가 기이하고 뛰어나 아는 사람들은 인조의 비상함을 알았다. 인용 작가 이력 및 작품 서설 상권 목차 하권 목차
9. 섣달 매화를 읊은 선조 宣祖詠「臘梅」詩曰: ‘人事每從忙裏擾, 天心但覺靜無爲. 上林臘月梅花發, 誰道窮陰閉塞時.’ 上句道破天人動靜之理, 下句顯有抑陰扶陽之意, 不但天藻之炳煥, 聖學之高明亦可見矣. 申玄翁欽云: “文廟ㆍ成廟ㆍ宣廟翰墨, 無讓於漢武ㆍ唐宗也.” 해석 宣祖詠「臘梅」詩曰: ‘人事每從忙裏擾, 天心但覺靜無爲. 上林臘月梅花發, 誰道窮陰閉塞時.’ 선조께서 「섣달에 피는 매화[臘梅]」를 노래한 시는 다음과 같다. 人事每從忙裏擾 사람의 일은 매번 바쁨 속에 요란함을 따르지만 天心但覺靜無爲 하늘의 마음은 다만 고요하며 함이 없는 듯 느껴지네. 上林臘月梅花發 궁궐 안 정원엔 섣달임에도 매화꽃이 피었으니 誰道窮陰閉塞時 누가 음력 12월[窮陰]이 꽉 막힌 때라 말할 것인가? 上句道破天人動靜之理, 下句顯有抑陰扶陽之意, ..
8. 태평한 기상을 담은 인종 仁廟「進大殿春帖子」詩曰: ‘杓指東方節候新, 風雲佳會是良辰. 樓邊浮舞含書鳳, 苑裏遊嘶保德麟. 白雪將殘知送臘, 靑芽欲吐覺迎春. 年年每被殊恩渥, 祝福端宜駑劣身.’ 典麗和暢, 有太平氣像, 而臨御未滿一歲. 鳴呼, 痛哉! 해석 仁廟「進大殿春帖子」詩曰: ‘杓指東方節候新, 風雲佳會是良辰. 樓邊浮舞含書鳳, 苑裏遊嘶保德麟. 白雪將殘知送臘, 靑芽欲吐覺迎春. 年年每被殊恩渥, 祝福端宜駑劣身.’ 인종께서 「진대전춘첩자(進大殿春帖子)」시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杓指東方節候新 북두성이 동쪽을 가리키니 계절이 새롭고 風雲佳會是良辰 바람과 구름이 아리땁게 모이니 이때가 좋은 때라네. 樓邊浮舞含書鳳 누각 근처에서 날며 춤추는 건 글을 머금은 봉황이고 苑裏遊嘶保德麟 동산 속에서 놀며 우는 건 덕을 보지(保持..
7. 평양군을 기린 성종 成廟見平陽碑文, 以詩尾之曰: ‘先朝身許國安危, 功在山河上鼎彛. 爽氣空留圖畵裏, 英才今想急難時. 石床苔覆山羊睡, 巒壟雲深野馬嘶. 衰草月明凉露滿, 行人幾欲問爲誰.’ 悟寐英豪感舊圖今之意, 溢於辭表, 眞帝王之言. 해석 成廟見平陽碑文, 以詩尾之曰: ‘先朝身許國安危, 功在山河上鼎彛. 爽氣空留圖畵裏, 英才今想急難時. 石床苔覆山羊睡, 巒壟雲深野馬嘶. 衰草月明凉露滿, 行人幾欲問爲誰.’ 성조께서 평양의 비문【평양군 박중선(朴仲善, 1435~1481)은 세조ㆍ예종ㆍ성종 때의 무신으로 병조와 이조의 판서를 지냈다. 1467년 이시애의 난과 1468년 남이의 옥사 때 전공을 세위 공신(功臣)이 되고 평양군에 봉해졌다. 성종이 왕위를 차지할 때도 공을 세웠다. 조선 전기 대표적 벌열 무신의 하나다. 그 ..
6. 귤로 신하를 깨친 문종 文廟在東宮時, 盛橘一盤, 賜下玉堂. 諸臣聚噉, 橘盡, 詩見于盤面, 乃御製手書也. 詩曰: ‘枏檀偏宜鼻, 脂膏偏宜口. 最愛洞庭橘, 香鼻又甘口.’ 香鼻甘口之喻, 豈責備臣隣之意耶! 해석 文廟在東宮時, 盛橘一盤, 賜下玉堂. 문종이 등극하기 전 동궁(東宮)에 계실 적에 한 쟁반에 귤을 담아 옥당【조선 시대, 삼사의 하나로 궁중의 경서와 사적을 관리하고 왕에게 학문적 자문을 하던 관청】에 하사하셨다. 諸臣聚噉, 橘盡, 詩見于盤面, 乃御製手書也. 詩曰: ‘枏檀偏宜鼻, 脂膏偏宜口. 最愛洞庭橘, 香鼻又甘口.’ 모든 신하들이 모여 먹고 귤이 동나자 시가 쟁반 겉면에 보이니 이에 문종께서 손수 쓴 것이었니, 시는 다음과 같다. 枏檀偏宜鼻 脂膏偏宜口 녹나무와 박달나무는 치우쳐 코에만 마땅하고 기름진..
5. 창업의 뜻을 담은 이성계의 시 我朝列聖翰墨亦多矣. 太祖微時登百岳, 有詩曰: ‘突兀高峯接斗魁, 漢陽形勝自天開. 山盤大陸擎三角, 海曳長江出五臺.’ 筆力豪壯, 幾與「大風」詩爭雄. 其肇刱鴻基, 實兆於此. 해석 我朝列聖翰墨亦多矣. 우리 조정엔 역대 임금[列聖]의 문장이 또한 많다. 太祖微時登百岳, 有詩曰: ‘突兀高峯接斗魁, 漢陽形勝自天開. 山盤大陸擎三角, 海曳長江出五臺.’ 태조 이성계(李成桂)께서 백악산에 올라 시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突兀高峯接斗魁 삐죽 솟은 높은 봉우리는 북두성에 닿았으니 漢陽形勝自天開 한양의 형세가 하늘로부터 열렸네. 山盤大陸擎三角 산은 너른 땅을 쟁반처럼 둘러 삼각산을 떠받쳤고 海曳長江出五臺 바다는 긴 강을 끌어와 오대산에서 샘솟네. 筆力豪壯, 幾與「大風」詩爭雄. 필력이 호쾌하고 ..
4. 백상루에 빠진 충숙왕 忠肅王到安州百祥樓, 題詩曰: ‘淸川江上百祥樓, 萬景森羅不易收. 草達長堤靑一面, 天低列峀碧千頭. 錦屛影裏飛孤鶩, 玉鏡光中點小舟. 未信人間仙境在, 密城今日見瀛洲.’ 天葩燦然, 但欠萎弱. 密城卽安州古號. 해석 忠肅王到安州百祥樓, 題詩曰: ‘淸川江上百祥樓, 萬景森羅不易收. 草達長堤靑一面, 天低列峀碧千頭. 錦屛影裏飛孤鶩, 玉鏡光中點小舟. 未信人間仙境在, 密城今日見瀛洲.’ 충숙왕(忠肅王)이 안주의 백상루(百祥樓)에 당도하여 시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淸川江上百祥樓 맑은 냇물가의 백상루는 萬景森羅不易收 온갖 경치 삼나무처럼 빼곡해 쉬이 그만두지 못한다네. 草達長堤靑一面 풀이 긴 둑에 다달아 푸르름이 만연한 얼굴인 듯 天低列峀碧千頭 하늘이 늘어선 산굴에 낮아 파람이 일천 개의 머리인 듯해...
3. 현종의 원대한 시 顯宗潛邸時, 在中興寺, 「詠潤水」曰: ‘一條流出白雲峯, 萬里滄溟去路通. 莫道潺湲巖下在, 不多時日到龍宮.’ 辭意宏遠, 聞者謂有王者氣像, 後果驗焉. 해석 顯宗潛邸時, 在中興寺, 「詠潤水」曰: ‘一條流出白雲峯, 萬里滄溟去路通. 莫道潺湲巖下在, 不多時日到龍宮.’ 현종이 등극하기 전【잠저(潛邸): 창업(創業)의 임금이나 종실(宗室)에서 들어온 임금으로서, 아직 위(位)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또는 그 동안.】에 중흥사【서울 북한산에 있던 큰 사찰로 중흥사(重興寺)로도 쓰인다.】에 있으며 「영윤수(詠潤水)」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一條流出白雲峯 한 줄기 물줄기가 백운봉에서 흘러 나와 萬里滄溟去路通 만 리의 푸른 바다로 가는 길로 통하네. 莫道潺湲巖下在 졸졸 흐르는 것이 바위 밑에 있다 말..
2. 거란과 문종 文宗與契丹爲隣, 苦其誅求. 一夕夢至京師, 備見城闕之盛, 覺而慕之, 爲詩以記. 乃遣使朝宋, 時卽元豐初也. 其詩曰: ‘惡業因緣近契丹, 一年朝貢幾多般. 移身忽到京華地, 可惜中宵漏滴殘.’ 其用夏變夷之意, 靄然可掬. 해석 文宗與契丹爲隣, 苦其誅求. 문종이 거란과 이웃이 되어 가렴주구(苛斂誅求)에 괴로웠다. 一夕夢至京師, 備見城闕之盛, 覺而慕之, 爲詩以記. 언젠가 저녁에 꿈속에서 송나라 수도 카이펑(開封)에 이르렀고 성곽과 궁궐의 성대함을 모두 보았으며 깨어나선 그걸 아련히 여겨 시를 지어 기록했다. 乃遣使朝宋, 時卽元豐初也. 곧이어 사신을 보내 송나라에 조공하니 그때가 원풍(元豐, 1078~1085) 초였다. 其詩曰: ‘惡業因緣近契丹, 一年朝貢幾多般. 移身忽到京華地, 可惜中宵漏滴殘.’ 그때 지은..
1. 활발발한 기상의 왕건 凡帝王文章, 必有大異於人. 宋太祖「詠日」詩ㆍ明太祖「詠雪」詩, 其弘量大度, 皆有不可以言語形容者. 按『輿地勝覽』, 載高麗太祖嘗巡到鏡城龍城川, 有詩一絕曰: ‘龍城秋日晚, 古戍寒烟生. 萬里無金革, 胡兒賀太平.’ 意格豪雄, 音律和暢. 其一統三韓之氣像, 於此可見. 해석 凡帝王文章, 必有大異於人. 일반적으로 임금의 문장은 반드시 크게 남보다 다름이 있다. 宋太祖「詠日」詩ㆍ明太祖「詠雪」詩, 송태조 조광윤(趙匡胤)의 「영일(詠日)」시와 명태조 주원장의 「영설(詠雪)」이란 시는 其弘量大度, 皆有不可以言語形容者. 너른 헤아림과 크나큰 헤아림이 모두 언어로써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按『輿地勝覽』, 載高麗太祖嘗巡到鏡城龍城川,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살펴보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일찍이 순수(巡..
서귀유고(西歸遺藁) 목차 이기발(李起浡) 서문(序文) 김병학 - 서귀집서(西歸集序)김상현 - 서귀유고서(西歸遺藁序)박규수 - 서귀유고서(西歸遺藁序) 권지일(卷之一) 고가시(古謌詩) 사정방백구령(謝呈方伯具令)송당백부정평부가 병서(送堂伯赴定平府歌 並序)송박사군(送朴使君)송원참봉가원 병서(送元參奉可遠 並序)송이자정 병서(送李子正 並序)식미가 병서(食薇歌 並序)여사가 증민어사(鸒斯歌 贈閔御史)여유박사 병서(與柳博士 並序)은거사(隱居詞)이석별가 송오광문(以惜別歌 送吳廣文)자정송도 병서(慈庭頌禱 並序) 권지이(卷之二) 오언고시(五言古詩) 강구유(康衢遊)강남곡(江南曲)개망(改網)고마(叩馬)과이소녀노종두면전 유음시아조(課二少女奴種豆綿田 有吟眎兒曹)기축원월 문유사(己丑元月 聞有赦)노마탄(老馬歎)대풍(大風)독좌(獨坐)맥수..
연보(年譜) 大明神武皇帝 萬曆三十年 國朝宣祖大王三十五年 壬寅冬十一月初八日 先生生于全州黃方山闊洞里第 先生始生 禀氣精粹 儀容魁巍 進士公奇愛之 崔夫人有異夢 仍命小字曰負巖 三十一年癸卯 先生二歲 三十二年甲辰 先生三歲 三十三年乙巳 先生四歲 旣知父母 便知孝 旣知兄弟 便知友愛 入必侍進士公側 出必偕伯氏遊 伯氏一日登果樹 先生危之 繞樹遑遑 俟其下來後已 見者異之 三十四年丙午 先生五歲 秋 始受學 賦性聰異 一聞無遺忘 口授形諭 無不立解 行必正步 語言端重 終日侍坐 不作遊戲之事 長者大奇之 三十五年丁未 先生六歲 三十六年戊申 先生七歲 三十七年 國朝光海君元年 己酉 先生八歲 受讀詩傳 至檜風誰將西歸 懷之好音之句 慨然悲泣曰 周天子之國 其衰微如此 可不悲乎 三十八年庚戌 先生九歲 三十九年辛亥 先生十歲 四十年壬子 先生十一歲 讀史至忠臣烈士之事 感慕激仰 ..
존주록(尊周錄) 成大中奉敎撰 李起浡字沛然 韓山人 高麗韓山伯穡 其十一世祖也 穡曾孫衍基判制用監事 而弟都摠鎭撫裕基 與再從弟文貞公塏 同被景泰丙子禍 至八世孫稺 始居全州 起浡與兄興浡,弟生浡 俱生於全州 父克諴進士 母完山崔氏 烟村直提學德之六世孫女也 全羅道有三賢母 崔氏其一也 母嘗夢所居闊洞家前 有三巨巖 戴其一而廻 生興浡 故小字戴巖 又夢負其一而廻 生起浡 故小字負巖 又夢抱其一而廻 生生浡 故小字抱巖 及長 俱以才學顯 而早孤力學 事母至孝 母嚴於敎訓 三子並登第 而起浡,生浡同榜 興浡則別試第也 其聯升國庠也 兄弟並入鄕試初場 興浡,起浡俱以紅團領入圍 生浡則未冠 以白衣入圍 試官以違規斥之 興浡,起浡憐其獨斥 與之偕出 多士皆歎服 及終場 生浡亦衣紅而入 俱中解 翌年 同擧生員 及興浡登第 仁祖顧左右曰 是寡母之子 兄弟三人 力學同升者也 起浡倜儻有大節 八歲 讀..
존양편(尊攘編) 文正公李縡撰 李興浡字油然 朝鮮韓山人也 徙全州 其先李穡 事元爲翰林知制誥 又事王氏爲侍中 王顓薨 迎立辛禑 辛禑廢 又立辛昌 辛昌父子實王氏 故穡立之 辛昌廢 穡坐徙咸昌 王氏遂亡 穡在元 從歐陽玄學古文 朝鮮之士學古文自穡始 興浡好學有節行 天啓六年 淸兒哈赤遣使請和 興浡上疏曰 兒哈赤盜有遼東 殺天子之將吏甚衆 殿下以藩臣 宜爲中國 帥三軍而伐之 何以和爲 不如斬使者之頭 以獻天子 憲文王心壯其言 崇禎元年 興浡及第爲成均館典籍 出監玉果縣 九年 憲文王如三田 興浡恥之 與其母入雲巖山 終身不仕 自天啓至崇禎之末 朝鮮士大夫 不肯事淸 爭於王朝者多矣 而順天金瑬,衿川姜碩期,豐壤趙復陽,杞溪兪伯曾,白川趙錫胤,南陽洪處厚,坡平尹鳴殷,全州李楘,杞溪兪榥此九人 其㝡賢者也 然王旣降 明室且亡 猶仕焉爲淸陪臣 瑬佐憲文定社稷 爲相秉政 淸遣使遺王書 請尊其主爲皇帝..
정려사실(㫌閭事實) 英廟朝甲子 道臣趙榮國狀啓 故司諫李興浡,故獻納李起浡兄弟 居家孝親之誠 立朝忠君之節 並美齊芳 偉然可觀 誠無愧於古人 而至於丙,丁以後 所秉執之義 尤爲卓爾 有足以樹四方之風聲 扶萬世之人紀 高標峻節 至今照人耳目 若其不拜箕聖一事 律之以中庸之道 則容有可議 而此亦出於一段尊周之苦心 眞所謂特立獨行 擧世非之而不顧者也 兩臣節行 臣素飫聞欽服 而及夫待罪本任之後 益復採詢公議 探摭故實 且閱其遺藳 則多士同聲之言 節節吻合 小無差爽 其所成就 如彼卓異 而揚厲之恩 尙不及於泉塗 幾至湮沒而無稱 此豈非昭代之欠事 而亦何以勸後乎 昔宋臣朱熹守南康時 陳乞州人故迪功郞高登褒錄之典 言甚懇至 夫登不過以直道忤權臣 擯斥死 而朱子猶以未蒙褒顯 爲守土者之恥 今玆兩臣之所樹立 視高登何如 而不思所以汲汲褒寵之道乎 臣職忝宣化 事繫彰善 義不敢蔽而不聞 冒昧陳請上項李興..
증승정원도승지행세자시강원필선서귀이공묘지명 병서(贈承政院都承旨行世子侍講院弼善西歸李公墓誌銘 並序) 윤정현(尹定鉉) 崇禎丁丑 南漢媾成 西歸李公恥之 兄弟棄官 不復仕 公與我六世祖忠簡公 大小科第 並同年而相好 過南陽殉節之所 作詩而哀之 故嘗慕公不置 公卒之二百十二年 後孫節度使承淵 屬余誌玄堂 按公孝友篤摯 學術醇深 高行懿德 備載朝野記述 固不勝書 然惟是五服之外 屬國之陪臣 痛京師之淪喪 而沒身自靖者 從古所未有 謹撮其大節 序而銘之 公諱起浡 字沛然 韓山人 牧隱文靖公之後 牧隱七世有諱守良 中樞府經歷 葬于全州 子孫仍家焉 是爲公高祖 曾祖諱稺 祖諱遵哲 考諱克諴進士 妣完山崔氏 峻極女 所居有三巨巖 崔夫人夢戴之而生長子興浡 負之而生公 抱之而生季子生浡 公生而有異 八歲受詩 至檜風誰將西歸 失聲悲泣曰 何周天子而衰微至此 十四而孤 崔夫人督諸子學而成就之 仁穆大..
대명충절신서귀이공묘표(大明忠節臣西歸李公墓表) 송치규(宋穉圭) 吾先子尤庵文正公 聞西歸李公之歿 語人曰 此人兄弟 不下於三學士 噫 三學士大節 軒天地輝日月 將以聞於天下萬世 而儗倫之言 出於大賢 則斯可以知公矣 公諱起浡 字沛然 李氏系出韓山 牧隱先生諱穡 於公爲十一世也 高祖守良中樞經歷 曾祖稺 始家于全州 祖遵哲早卒 考克諴進士 妣完山崔氏 其考曰 峻極 烟村先生德之之後 湖南有三贒母 崔氏其一也 公生于萬曆壬寅十一月八日 早孤力學 事母至孝 八歲受讀詩經 至檜風西歸,好音之句 慨然流涕曰 周天子之國 而其衰微如此耶 蓋其忠義之誠 自幼而已然矣 光海斁倫廢擧 仁廟甲子 與兄興浡,弟生浡 俱中司馬居泮 丙寅虜使之來 上疏請斬 丁卯 與季氏捷大科 明年 伯氏亦登別科 仁廟顧左右曰 是寡母之子 兄弟三人 力學同升者也 公立朝謇諤守法 持平時 東宮司謁 以紫衣犯科 據法治之 席藳待..
사간원헌납증승정원도승지서귀이공행장(司諫院獻納贈承政院都承旨西歸李公行狀) 이경재(李景在) 本貫忠淸道韓山郡 曾祖稺 曾祖妣崔氏 籍全州 祖遵哲 祖妣金氏 籍禮安 父進士克諴 妣宜人崔氏 籍全州 公諱起浡 字沛然 其先韓山人也 稼亭先生,牧隱先生父子 以文章道德節義 相繼顯麗朝 天下皆聞有韓山 故韓山之李 非祖稼牧氏族者不數云 牧隱先生三世而有判制用監事衍基 於我文烈公爲從祖子 其弟都摠鎭撫裕基 與直提學塏 同被丙子禍 又三世而有中樞經歷守良 於公爲高祖 曾大父稺 始家全州 大父遵哲早世 父克諴進士 有大人風 母崔氏 烟村德之之後 峻極之女 世稱湖南三賢母 崔夫人其一也 公以萬曆壬寅十一月八日 生於全之黃方山闊洞里 始公家前 有三巨巖 崔夫人嘗夢戴其一而生公兄興浡 是謂雲巖公 又夢負其一而生公 又夢抱其一而生公弟生浡 是謂學諭公 人以爲奇徵焉 公生而岐嶷 望之魁偉 自幼孝友出於天 ..
서귀선생가장(西歸先生家狀) 유진석(柳震錫) 先生姓李 諱起浡 字沛然 其先韓山人也 韓山之李 自麗代顯 贊成事文孝公諱穀 韓山伯文靖公諱穡 父子相繼登第於中朝 聲名聞於天下 世稱文孝爲稼亭先生 文靖爲牧隱先生 俱有文集行于世 牧隱曾孫判制用監事諱衍基 弟都摠鎭撫公諱裕基 與再從提學公諱塏同被禍 見六臣別傳十七義士 牧隱七世有諱守良 官至中樞府經歷卒 子諱稺 自京奉喪 葬于全州 仍家焉 是則先生曾王考也 王考諱遵哲早世 考諱克諴進士 紹世德 修家範 蔚有大人風 進士公娶完山崔氏 卽直提學號存養堂諱德之之六世孫 諱峻極之女也 淑行懿德 允宜君子 世稱湖南有三賢母 一愼副學天翊母 一梁應敎曼容母 一卽崔夫人也 皆爲早寡 訓子成就 萬曆壬寅十一月八日 生先生於州之黃方山闊洞里 所居家前 有三巨巖 崔夫人夢負其一而回 生先生 故小字負巖 夢戴其一而回 生伯氏興浡 故小字戴巖 卽雲巖公也 夢抱..
답신유숙어(答辛柔叔語)柳參奉震錫斂收齋輯錄 辛進士柔叔 氣質敦厚 嘗從事於文學 鄕鄰信服 士流多與之 亦先生之友人也 三十四年辛丑四月 震錫自秋城至西歸堂 起居罷 仍言向過雪山辛上舍 與之酬酢 語次忽及先生 辛上舍言李西歸躬行忠孝 而不肯究其所以忠孝者 豈不惜哉 其意盖指先生實有篤行其忠信之質 而不能專致于學問之功者也 先生笑曰 辛柔叔所謂所以忠孝者 指何云乎 夫忠孝 人之極行也 人苟有忠孝之實 是其德備矣 抑何復可求歟 不疾其親而已者 曷足謂之孝乎 不疾其君而已者 曷足謂之忠乎 夫究其所以忠孝者 將欲何爲焉 不過欲爲忠孝而已 雖不究孝之所以而已自爲孝 雖不究忠之所以而已自爲忠 則又何事於究其所以乎 苟其心一於愛親 則是孝之大本已立 其間雖或有未盡之處 不過爲小小一節文未備者耳 苟其心一於敬君 則是忠之大本已立 雖或有未盡之處 不過爲小小一節文未備者耳 曷足大傷於已立之大本乎 盖嘗思..
혹인문답(或人問答)判校洪南立隨聞錄 或問全主一於西歸子曰 全主一爲國喪 至服衰 不食肉以終三年 夫主一寒士也 未嘗執贄爲臣 如此其可乎 自宰相以至百執事國葬後皆食肉 服色亦隨時漸降 此本朝通行之禮也 乃今主一以寒士焉 而獨不食肉服衰以終三年 殆不近矯情乎 西歸子曰 其然 凡事固貴得中 過與不及 聖人皆以爲不可 愚意謂與其不及 寧過可也 禮爲父爲君 斬衰三年 不曾有分別 而父喪三年 終不食肉 則獨於君喪 旣葬食肉 恐非禮之大經也 使全生苟嘗有一命 服衰不食肉以終三年 吾未見其必爲不可也 今全生特以一寒士 而乃爲有位者所爲 此雖過於中 不猶愈於初不知國有喪者乎 至如服色當降不降 此乃小小節耳 雖過於中 不猶愈於外遵國式 而內實背之者乎 余以耳目 往者國喪 不及皆是 子不尤彼 而獨尤夫小過之全生 不亦異乎 謂之過則固宜 謂之矯情則吾且不信 情不欲而強行之 將何求乎 或曰 全主一非直服衰 至..
금졸문답(錦倅問答)門人李龍徵日記 元子仲 子仲 元相斗杓之弟 將赴錦 路過西歸子 子仲曰 子固逃世 宜其方寸不容世念 而目今朋黨大起 各立標榜 時像不佳 子或有與於斯耶 西歸子曰 夫黨議固失中 大君子不當存心 設使下君子數等 不欲入是非叢林 况我遯藏以來 無求於世 只知服田力稼而已 子看我爲何如人 世無我黨 人必欲指我黨者 古之人有伯夷者 殆乎其我黨乎 自其下如魯連輩 設令生並一世 魯連自當黨我 我其肯黨魯連乎 子仲笑曰 魯連生不可下看 西歸子曰 然 自衆人看 子言不其宜乎 自我看之 魯連子意在不帝秦 未嘗言及尊周 今我先尊周而後不帝秦也 是其魯連可黨我乎 我可黨魯連乎 子仲曰 阻隔近二十年 今乃見之 子之言論 尙如彼高邁 乃宛然舊時之李某也 子仲旣行 西歸子慨然而歎曰 噫 我自遯藏以來 視世間許多酬酢 不啻若浮雲 意只在服田畞 以供事育 俗輩至有妄疑 自相嘵嘵 至如子仲知深情慣 且..
호남백문답(湖南伯問答)門人崔南柱兩樂齋日記 西歸子旣靜處十有四年庚寅冬 湖南伯李時楳累訪 勸之以出仕 因與問答 伯曰 爵祿人所欲也 子之兄弟獨辭之 幽居絶世念 人孰不高其風 然吾有不悅於子者 子家貧親老 祿仕宜不可已 而子已之 無乃專於爲己乎 西歸子曰 噫 人子之欲養其親 此至情也 豈必待人言乎 第我受性欠婉曲 嘗判黃岡積九日 未善事主帥 被構幾陷不測 賴時宰力救僅免 然且滯囹墻十有九日 畢竟至杖削 其時老親在五百里外 傷心勤慮 失寢食旬日 吾以爲祿仕養 日用三牲 反不如飯蔬飮水 以安其心 是以不仕 伯曰 子何不小降志下人以苟保焉 西歸子曰 是不然 人各有能有不能 若此者 非吾所能 非惟未之能 又爲之甚恥焉 伯曰 噫 予姑爲托此辭也 子之不仕 豈有意存焉 何應之外焉 今天下歸於北人 國家嘗事大明 子之不仕 意者此乎 西歸子曰 至言不可言於造次 姑言其餘 今子先言之 我且直之 夫祿仕亦..
사직단기우문(社稷壇祈雨文) 嗚呼 惟天莫大 非民罔攸天 民非食罔生 肆天恤民食 純 缺 而天旱若 玆土罔攸闢 闢咸蕪如焚 厥惟民何食 惟我后日省厥愆 罔不究攸格 罔不擧罔不卒 我不知天不玆享 不肖我分猷按于玆 惟天旱日臻 民咸籲 我其忍寧于玆 仰惟神司土 仰惟神司穀 神可不恤于土罔闢 神可不恤于以罔穀 則神攸有恤 亦不後我 神其速籲于帝曰 帝其不雨 伊人類殆將盡 天本矜于民 天其肯不恤于神 風伯曁雨師 乃咸奔走命 不暇廣厥施 則民因有作 民咸大悅 庸有秋大熟 嗚呼 惟若時 惟民誕依于神 亦惟神職厥攸司 『西歸遺藁』卷之八 인용작가 이력 및 작품목차
고덕산기우문(高德山祈雨文) 莫高匪山 維山有德 凡厥人禱 其應不忒 卽今旱乾 于前無比 滿目衰草 野無農事 什一其播 什九其枯 我民何辜 漠漠天高 無得致此 緣我多愆 曰恐曰省 靡處不虔 微誠未格 又擧羣神 神其著異 隱玆生民 有渰萋萋 貽我沛澤 無高無下 旣優旣渥 萬民大悅 百穀生成 神寧不恤 神顧我馨 『西歸遺藁』卷之八 인용작가 이력 및 작품목차
모악산기우문(母岳山祈雨文) 維崧維岳 峙玆州域 母號子人 靈應不忒 屬今正陽 天久慳雨 大地如焚 草失漬茂 野靡畇畇 四望滌滌 農氓膺撫 莫或播厥 則何有秋 大命殆絶 矧伊來牟 受明値節 炎威孔酷 暵本且甚 敢言厥秀 立槁誰浸 凶歉荐臻 餓殍塡壑 望專貽育 三歲一日 又今若此 我將何食 通衢哭連 不堪耳目 分憂受牧 我心如熏 食何忍呑 眼徒穿雲 願言昭靈 俯是之惻 丕吐輕淸 亟致沛澤 物蘇於枯 人活于死 德何可報 如天如地 『西歸遺藁』卷之八 인용작가 이력 및 작품목차
신기개기문(新基開基文) 完西小北 峙莫玆比 粤號黃榜 之明之異 厥東谷邃 丕蓄其氣 鎭雄張分 勢咸適位 孔包其表 孔豁其裏 一眼千岑 同歸百水 蠢亦知吉 况智所措 曰地膴膴 百福攸止 我時無往 維龜正此 心勞力殫 械具材備 致我虔誠 將有經始 擇玆良辰 用告開址 我肴旣齊 我酒且旨 享惟協我 協我攸冀 錫我多慶 申我繁祉 壽我慈親 宜孫宜子 施無怠報 永永千祀 不自先後 于我特披 神豈無意 實應慳秘 矧我初生 于山北矣 今又來依 神豈我棄 神其我享 如式無貳 『西歸遺藁』卷之八 인용작가 이력 및 작품목차
곡질아설문(哭姪兒雪文) 慟哉雪乎 年如汝 容端如汝 不愚濫如汝 可保不忝生如汝者 而遽有汝此日 雖不嘗親愛 苟不至欲死者 以吾人固有之惻隱 而不得不驚慘于心也 况爲汝叔父者乎 生而育之 育而敎之 坐見爲父之樂 此天下古今人父之常也 獨柰何比年來 吾家之爲父 或生能如人 育能如人 敎能如人 而遽多夭折 使弔客踵相連乎 受生而育 受育而學 學竟致爲子之道 此古今天下人子之常也 而獨柰何比年來 吾家之爲子 或受生能如人 受育能如人 受學能如人 凝然可列於期待之中 而遽多夭折 使寸腸摧無餘乎 將天不福吾家者耶 抑出於或然者耶 將謂之天也 天所禍 本在於淫 吾兄弟未嘗知焉而爲不義 此可質神明 將謂之或然也 或然不宜此數二者 將安居乎 抑二者皆無可徵 而其生其死 只在於造物者好弄手中耶 厲痘雖叵測 旣而乙酉禍吾家 豈能知又有今年耶 慟哉雪乎 汝諸兄多在地下 汝今往亦不孤 將汝以此自度耶 大都人生..
곡척질류동문(哭戚姪柳童文) 嗚呼痛哉 人不能先知也 使汝先知 豈我之學 使我先知 豈汝之敎耶 我不汝敎 汝不我學 我雖失汝 豈悼汝至此 汝雖棄我 豈傷我至此耶 汝何不先知其死 必我之學 我何不先知汝死 必汝之敎乎 嗚呼痛哉 朗然其眉宇也 鏘然其言笑也 不雜其意態也 溫雅其氣質也 恭其色也 謹其言也 若將有爲 其人物也 孰謂汝大命 遽至於今年耶 嗚呼痛哉 敎之以勤 學之以誠 口讀之學 雖無益於爲己 而漸覺其進 勉焉不怠 不可量其異日進就 孰謂授受之樂 遽撤於今日耶 嗚呼痛哉 不宿於外 童子之情也 喜處儕流 童子之情也 不樂居長者之側 童子之情也 汝每離汝家 來宿我草堂 汝儕流多處傍舍 汝不彼從 必宿我側 每讀書畢 必處我前 以是我與伯氏 相謂汝爲奇 愛之特加焉 今其死出於萬萬不虞 諺所謂易化人 必爲人所稱 豈此之云耶 嗚呼痛哉 汝嘗進前請學 我見汝氣之頓殊平昔 詰汝不安 答曰自昨有痛 ..
곡류생문(哭柳生文) 天必欲悲我歟 夫何旣悲我以不已 又從以可已乎 屬旣疎遠 居又不密 使汝泛乎我 其聞汝之逝 不過悼汝之年 憫汝之親庭 爲之一場垂泣而止也 亦何必使我痛至於骨耶 其使我至此者抑誰乎 人之學積而行修 可爲人師範者 豈不多矣 而必求我淟涊 爲之依歸者 汝何意乎 相長已至三年 我豈不貫汝耶 心無作言不飾 貌豐而氣厚 謂可期以遠大 何曾夢寐於今日之事哉 每朝相討文字 一日忽不在列 訪識其病休寓舍 意其爲陰陽小寇 不過一兩日廢學 豈謂此遽作幽明耶 初不謂至此 未能執手而訣 俄不得自由 坐負撫屍而痛 此平昔我汝之所相愛者耶 初何不泛 竟何至此 不泛豈不可已 至此豈不可已 而其必不已之者 天何意乎 一日之間 酬酢亦多 通計三年 汝事之不可忘于我 何可一二 而上年十二月未望前三日 以家有餘酒 比鄰里及我童冠若干開一遊 酒酣一坐歌呼 歌屬汝 汝特高唱出衆 我兄弟樂甚 使汝復歌 其聲十分..
곡오진사문(哭吳進士文) 犬馬齒長十有八年 年不同矣 完山距鳴鄕二百有餘里 居不同矣 種學績文 而方將有爲於世也 其與老棄田野 攻苦於耘耔之間者 業不同矣 謹守古聖賢規模而不失寸分 其與昏愚自信而素乏點檢之功者 操不同矣 有此四不同矣 而相悅於未見之前 甚得於孔云之後 所謂不同者 曾不足以害其樂之萬一 抑何由焉 豈得乎天者 均有所保 而不爲事物之所搖奪 是則初無彼此之殊者歟 不同者四 而其四小而末也 同者一 而其一大而本也 似不可一切謂不同也 則其入重泉也 安得不爲之倍傷心乎 之才行也之人物也 而天不之恤 我嘗不暇念不可怨也 旣三四詰於薄具之文矣 今復詰之 天何忍於此日之事乎 雖然 人生必有死 死者凡幾人 死焉而人皆惜之 是其身雖死 其不死者名也 是則天亦不可怨也已 『西歸遺藁』卷之八 인용작가 이력 및 작품목차
곡이군문(哭李君文) 挽者送人之死也 吾其忍挽君歟 莫信者理也 君家宜有兄弟 而君兄弟生於君家 理其可不信耶 以君之操行 以君之力學也 而壽止於二十有三 理其可信耶 其成長也艱 孔懷之情 倍於他人 其相依也重 孔懷之情 縣於凡人 其友愛不失於天也 孔懷之情 特有異於世人也 而一朝遽棄其孔懷而歸於地下 是在君能致色事之誠心 薄洩不盡之深感 君固有時焉可忘省孔懷 其爲兄弟者 將何以忍度時日乎 在老拙期待之情 抑授受大易之約 並墜於茫茫 此固餘事 曷足爲悼君萬一 而世旣鮮可人 又罕見力學 吾安得不一倍慟惜乎 欲言吾愛君 宂不可擧 欲言君衛吾 哽不可思 老拙不幸 每恨子姪少甚 吾兄弟屬望 太半在君輩若干 而其篤信吾兄弟者 又於若干中無幾 君今逝矣 又安得不一倍慟切耶 脩短有命 豈可容人 而其聞臥病 謂陰陽小寇 不一往隨症試藥 抑何心哉 徒慟惜痛切 抑何益於此日哉 二十三而亡也 而猶遺二驥子 抑..
제양청송문(祭梁靑松文) 某少時於人 人可之則從而可之 人不可之則從而不可之 旣而見人可人 則不遽可其人 而必觀可之者 何如也 見人不可人 則不遽不可其人 而必觀不可者 何如也 及今但我觀其人可與不可而已 不或參之以人 盖人心純 則其論平 豈不可可而不可不可乎 此差古事也 時雖不古 賢人稍異凡人 其論必不偏 豈不觀可之者與不可之者乎 乃今偏黨大作 雖其行異於凡人者 其毁譽人 只從其好惡 苟其好者 雖百無可而必譽之曰可 苟其惡者 雖百無不可而必毁之曰不可 是將以行異凡人 而信其論乎 務袪偏守正 惟我在焉 則夫我觀人 豈失其眞哉 仁爲四德之首 而孝悌爲行仁之本 則人之深於孝悌之工者 豈不眞可人乎 偏黨人雖目之爲可人 我不見其可 我其肯可之乎 偏黨人雖目之爲不可人 我見其可 我其肯不可乎 夫誰深於孝悌之工者 非我公乎 惟公氣質從容 履操雅靜 心存慈惠 行斥忮害 順乎父母 宗族莫不稱孝 友于兄..
제오도사문(祭吳都事文) 不大孝友 伊行之力 不顯文章 伊致之極 英華其外 篤實其內 寔曰彬彬 韞櫝而待 幽蘭香遠 華秩金吾 天衢步闊 擬展鵬圖 腰纔符解 頭忽花開 長程蕩蕩 萬里無閡 云胡不淑 遽此奄忽 官止佐幕 壽未五十 命矣何嗟 天意難諶 胡爲而昔 胡爲而今 桂影聯翩 鶴髮華筵 美人稱道 遐邇爭傳 崎嶇嶺路 丹旐低昂 春光故宅 物是人亡 望斷倚閭 懽減同被 恨極人間 怨徹泉裏 不佞道同 未見心傾 俄托昏姻 若水交情 烟水雲巖 花月西歸 有時經過 溫乎其頎 一場夢罷 重逢幾日 興浡抱病 人事久絶 起浡承召 黽勉登程 俱違執紼 䨥涕縱橫 遙將薄具 替奠一酌 覺負生平 臨風痛哭 『西歸遺藁』卷之八 인용작가 이력 및 작품목차
제류창원문(祭柳昌原文) 細人不能識丈人 小德安敢語大德 姑就其不與者言 以開我非誣之臆 嗚呼 惟夫子之先 與起浡之祖 道同齒敵 托鄰相好 夫子與我先人 情義又如其先 文會藝遊 一心百年 胤氏正郞 余季同庚 居分一城 如弟如兄 通家連於三世 厚分逈於尋常 續襲香於芝蘭 繼奏音於峨洋 昔在乙卯 先人背世 遺兒在蒙 家戶衰替 世情且疎於多病 交道孰存於云亡 門庭冷落而人不問 子母哭踊而天空蒼 獨我夫子 舊情猶篤 旣撫而哭 又問之續 至慮其貧未措襄事 告同志致若干賻物 乃復撰文而具羞 爲之慟哭而聲失 滿紙鏗鏘 一生襟期 無邊苦語 不盡悲詞 弔客無不凄惻 聞者擧皆淚垂 是時起浡以幼年 方在呼蒼天罔極之中 能記夫子爲亡友 益盡一死生不易之風 感心銘骨 不忘斯須 結草何言 殞首是圖 逮遭昌辰而委策 遂從後塵而逡巡 每登旅次小榻 奉吐客中艱辛 以相慰幾度 以賴活幾時 衣之未拂 永矢爲依 疎慵不適於世..
제척숙임봉사문(祭戚叔林奉事文) 有生必有死 吾何悲乎必有之理乎 五十不稱夭 吾何悲乎不夭之年乎 竆達不我也天也 吾何悲乎不我之天乎 人或有不返於萬里之外者 亦何悲乎才五百之京師乎 營營乎計活 役役乎名利 夜以日而不暫休息 以勞其生而不自知者 擧世皆是 乃今五十年 其所酷好 非詩則酒也 間以碁奕 日與朋親以遨遊 而人間之許多憂樂曁榮辱 不得介於胷中 不但若輕塵之不得棲於水面也 其黽勉乎末命 直緣於感激恩分 欲効其涓埃而已 亦何悲乎 分義之善處乎 則胡爲乎我心甚悲 而靜思焉不覺心折 觸物焉不覺淚下乎 嗚呼 友愛其天性也 不忮其所操也 不雜其行也 不偏好惡其酬酢也 不妄其動作也 直欲灑灑而不庸陋 其乃所生平也 今於何可復見其人耶 轉叔姪之分 而作兄弟之情 相與勉以不苟爲不義 相與期以不徒生徒死 不見而思 曁見而樂 謂以此相度百年 今於何可遂此宿計耶 心之悲矣 曷有其臻 文章餘事也 而亦吾黨..
제대제학정공문(祭大提學鄭公文) 嗚呼 摛藻掞天庭 行誼振國芬 其自致盛矣 生長大人之家 濡染旣深 而又能以才德趾美 耳目咸宗 名位其地 望亦絶矣 晩來宦情漸薄 退藏丘園 殆將有年數 其於進退之節亦明矣 不急引人也 不苟詣人也 惟己之守而不失 其操亦確矣 數者豈不爲人所盛稱乎 起浡以所見 公嘗急病而叫義師 僅可數十百 公能博該於事 豈不知衆寡強弱之形也 而猶且日揮泣而忘食 戴白於頭 載羸於馬 馳覘賊自當 思賊畏遁而不敢近 常以爲不可鏖者不生 時起浡同事幕府親見此 當時閫以外所不能者 公獨以白面老書生而能之 推其極其義烈 將不讓於成仁 此豈非公平日學力之充 自不悖於蒼荒之際 而一心循國之誠 自有不期然而然者 此古所謂立懦者非耶 曰名家 孰不曰知公 曰名宰名卿 孰不曰知公 曰一代知名之韋布 孰不曰知公 知公者固博矣 吾且不識其眞知公者果誰乎 起浡於公 見知最晩 雖不敢窺公涯涘 而然猶謝去世..
제윤판서이원문(祭尹判書而遠文)迂道 至南陽 哭其墓 沛然來哭 靈能知否 初終及襄 情義病負 其誰知之 永思潛悼 與我友愛 我與忠孝 芝蘭其臭 膠漆相好 今何漠漠 四尺衰草 昨日西路 候慈拊孤 悲如之何 又道今迂 家兄屬我 無限其意 具玆傴僂 靈能知未 生何必好 死何必惡 高堂之上 柰有親老 人間蝴蝶 泉下消息 卒同歸盡 今猶痛哭 『西歸遺藁』卷之八 인용작가 이력 및 작품목차
제악장박공문(祭岳丈朴公文) 有女則壻 有婦則翁 伊情與分 鮮我於公 我年十七 來贅門闌 公誠我愛 不以壻看 處我安頓 遇我飽暖 時周我家 我慈感歎 屈指如今 三十五歲 我且見孫 我猶公惠 敢忘于玆 豢養恩重 昌辰末班 苦未分俸 饒無繄我 我忱靡憑 遭時不淑 畎畞擔簦 芒鞋葛巾 農夫之形 公其悶我 語戒丁寧 養不可失 禍未宜取 云胡莫念 累召不就 重言複言 言莫之休 悉我雖歉 念我孔優 翁之云乎 視我猶己 年高氣力 壯夫無異 天與其壽 謂且踰期 豈意今年 而遽至斯 二竪沉嬰 四月維夏 彌留日漸 良劑未藉 易簀從容 仲秋初吉 凡人且悲 我懷何說 存沒路殊 幽明永隔 荏䒣今朝 襄事忽迫 悵悵疇仰 追想生平 七十猶慕 喪祭盡誠 令原相好 友愛因心 積而能散 朋親惠深 不曾暴怒 僮僕懽極 玆皆得天 非勉其力 天寧不眷 錫之遐年 曁以孫子 孫子且賢 曁以高秩 高秩三品 嚮五庶乎 靡憾靡欠 松楸滿..
제최진사문(祭崔進士文) 說同臭味 疾冒而稱 道深交契 嫌比而朋 才於人口 行于天明 夫我何云 一死一生 莫儀蹔覯 靡辭或接 誰來而往 孰唱之答 牙絃已斷 郢斤難運 存舊於時 不見而隱 倐焉今夕 幽明茫茫 其夢其眞 仰見蒼蒼 薄厚爲道 傷害其心 而耄而期 九十于今 蹙然惡聞 默乎心悲 胡戾遐齡 天甚吾疑 縱恣悖道 嗜欲忘義 有位有祿 擧世皆是 心乎赧赧 其守專專 何違一命 甚我疑天 孝子賢孫 將報萬一 後信今惑 冥漠難詰 冷齋枯塘 蒼松翠竹 若何爲情 觸目陳迹 觀善橋頭 可樂臺前 春光早回 物色依然 子將安歸 丹旐翩飜 人間此日 有淚無言 脩短雖異 畢竟則同 各生過半 永從無竆 同酒于觴 共肴于盤 一奠痛哭 摧我心肝 『西歸遺藁』卷之八 인용작가 이력 및 작품목차
제보광당이봉사(祭保狂堂李奉事) 死生之際 云胡不悲 幽明一隔 更接無期 雖疎亦傷 矧伊親戚 以長于年 以丈于族 住近牛鳴 恒蒙欵厚 俄余起浡 末班從後 丈亦遊宦 旅寓共榻 一年強半 客苦同喫 我慕丈操 不喜追逐 我感丈惠 不惜周急 丈優翰墨 孔華且捷 丈寡言笑 無矯無飾 俄各歸鄕 鳳岡雲峽 兩地稍距 源源恨失 一念長懸 不見如見 時或相逢 敷腴顔面 烏兔荏䒣 衰病侵尋 亦時枉顧 慶弔皆臨 杖屨移時 容貌頓瘁 神精不減 可念還喜 如何一疾 竟至沉綿 我詣一問 招使居前 痛說生平 語甚感慨 酬酢訖歸 囑以重對 如何未幾 忽判存沒 一哭靈前 我懷何說 况當玆辰 靈輀啓道 孤負臨壙 涕下如雨 畢竟同歸 了可爲慰 一時難忍 寫哀文字 頃余起浡 起居床下 疾時向革 亦不遐我 笑語丁寧 特使久坐 敎以題詩 慰此病臥 承命言旋 晨以人催 奉寫仰副 痊祝春來 寧知人事 遽成今日 出處以時 年近于耋 賢..
제양장경문(祭梁長卿文)曾以翰林 同丙子義擧 後宰淸風而卒 旅櫬過全州 曷爲而來 天倘有意 曷爲而去 天倘無意 謂有意也 曷似無意 謂無意也 曷似有意 天果不可諶已 恢乎有容 博乎足文 疇是之能 於子獨聞 敏而多藝 廉而不苟 疇克于玆 子獨是有 以子之具 苟盡其用 功與b029_418b古人 未必不共 天乃來子 天豈無意 而纔過五十 是子之齒 而纔免郞僚 是子之位 天乃去子 天豈有意 天果不可諶已 淸風匪官 吏隱者趣 皁盖丹㫌 往還行色 郵亭哭拜 旅櫬寥落 連床蓽門 共籌義幕 今皆歸夢 但懷疇昔 懷復柰何 淚無其極 懷復柰何 淚無其極 『西歸遺藁』卷之八 인용작가 이력 및 작품목차
제부백박공문(祭府伯朴公文) 俾我何悅 心質而實 俾我何服 操確而一 表裏均德 隱見同行 以事君親 人莫敢並 休休有容 眞宰相器 五十猶慕 大孝子事 無有斁惡 見推當代 瑞麟祥鳳 未足喩大 九重玉汝 當道爲責 玉署蘭臺 靡寧寢食 有時仗鉞 允中威愛 兼應兩注 誕威期待 數頃屬奇 無妄災切 天昭監釋 若晛消雪 欽哉晉陽 俾私烏哺 境內袴歌 堂下彩舞 一日二日 民且恨瓜 遘厲不悟 此柰之何 豫哭甚哀 蜀髽那忍 哲人云亡 邦國瘁殄 黎元無祿 朝野錯愕 舂輟何言 道弔相屬 愚蒙見知 今卄餘年 容我疎誕 與我狂狷 吹之噓之 以剪以拂 引仄朝班 匪分冒秩 公愛者博 我知則專 公亡遺恨 我其洞然 高堂之上 鶴髮鬖髿 此何可忍 行路淚多 令原有故 昔三今二 幽明莫及 有慟而已 明良相遇 時世罔極 力未盡効 溘然誰度 餘細難容 伊大三結 愚蒙寸心 節節皆折 海邦獨賢 陰山久滯 歸語其情 望雲悲係 梅軒半..
제존양최선생문(祭存養崔先生文) 係利與害 雖小必審 處豐及約 取舍皆甚 不懸其處 歸蓬玄禁 不大其係 止安行懔 於玆脫然 最高人品 德卲于世 質異于寢 恭承玉汝 當道爲任 有幾斯見 江上餞飮 存心養性 一樓高枕 龍飛汝翼 薄就歸諗 名流遠將 桑梓多蔭 旣正且靜 天篤其禀 風聲悠久 鄙夫心凜 偉玆菟裘 人多沉浸 尙闕尊瞻 輝光久掩 遠邇同聲 新祠有儼 思皇駿奔 制不侈儉 猗歟晩六 百世模範 同堂齊享 兩美無欠 於千萬年 無替無厭 『西歸遺藁』卷之八 인용작가 이력 및 작품목차
제만육최선생문(祭晩六崔先生文) 三才後大 常莫之過 苟危有致 師孰此加 猗性夷淸 又學無瑕 後年先道 起大賢嗟 不淑時命 傷如之何 我安適歸 中臺嵯峨 而徒而免 三載薇歌 時定則遷 邃彼鳳坡 丘壠瞻拜 烏兔自家 聖御溫泉 使屆竆阿 麻衣龍袞 故舊匪他 辭却完田 旣確而和 於今三百 仰無邇遐 莫高匪節 可泰俯摩 莫昭匪義 還日難誇 顧系玆土 誕浥餘波 尙尊缺所 羞我倪皤 一兩有倡 無敢間邪 八九傍邑 如輔扶車 祠成孔安 不陋不奢 有如存養 易地同科 合堂並享 式禮無差 洋洋如在 濟濟不頗 於千無替 見魯賢多 『西歸遺藁』卷之八 인용작가 이력 및 작품목차
신공이강묘지명(辛公二剛墓誌銘) 公諱二剛 字柔叔 辛其姓 系出寧越 鼻祖鞠有功濟朝 封寧越君 後世至諱萬鍾僉知中樞府 子曰廷協 孫曰希稷 俱以孝友聞 希稷官奉事 娶平山申景祉女 萬曆辛丑生公 公孝友出天 其發於事多甚 以生二歲母歿 方兒上壠 必含哀終日 以生不識母顔 値諱辰前數日 必涕泣 嘗夢果腹婦人泣撫問 驗母娠九月背世 乙亥丁外憂 毁幾滅性 喪繼母 不暫離喪次 以終三年 嘗侍祖母病 一誠請代 致夢老人投藥有喜 將己母臧獲與繼母弟 將祖以己將登第 預與三臧獲 與占武科 庶弟仲氏嘗有過 掩閤出涕 致仲負荊庭謝 致有兄弟家乳狗 各換乳旬日 凡此乃其孝友實狀 丁丑 輟科業 遂有志求道 取誦庸,學,性理諸書 用心於聖賢之學 乃作天人一理書以玩 嘗論易 有曰羲易主天理未發 文易主天理已發 正與中庸喜怒哀樂未發已發相符 又曰 學以誠實爲貴 不誠則事皆無實 蓋其學得之經傳間者皆類此 公以三十四年..
고급제김공묘지명(故及第金公墓誌銘) 余少聞金公鍊玉死敵 婦及子矣亦死節與孝矣 猶疑其然 豈其然 余甥柳震錫 卽眉巖先生之雲孫 繼祖力學 嘗講三綱行實 必稱金公夫婦父子忠烈孝之俱備曰 昔我先考景慕其節 備述厥詳 公字惟精 高麗左僕射柱國八世孫 少有膽略 登萬曆甲午第 赴丁酉亂 佐幕李忠武公舜臣 至南海力戰死 忠武公撫尸大慟曰 天不欲破賊耶 何殲我忠烈士之速 婦梁氏聞而哭曰 夫爲忠臣 妾獨不爲忠臣婦耶 遂赴水死 子命彥叩地叫天曰 不復父讎 不可以爲人 不殉母屍 不可以爲子 當爲張巡之厲鬼以復父讎 又爲不害之沉水以捧母屍 亦投水死 忠武公壯其一家內三綱備 拊脾歎曰 夫婦同死 趙昂發之事 而父子同死 趙家之所未有 父子同死 卞壼之事 而夫婦同死 卞家之所未有 將爲啓達而㫌異 不幸忠武公亦爲賊所害 惟時記事者 惡其勝己而皆去其籍 遂使如此之忠如此之烈如此之孝 終至泯滅 人到今惜之 夫豈疑事而震..
선무공신 증개백군행현령기공묘갈명(宣武功臣 贈皆伯君行縣令奇公墓碣銘) 公諱孝謹 字叔欽 姓奇氏 系出幸州 當周武王時 殷太師箕子受封朝鮮 其後爲韓氏,奇氏,鮮于氏 幸州奇氏 其一也 自羅及麗 世有聞人 入我朝 有諱虔 當英廟朝 爲判中樞 諡貞武 卽公之五代祖也 高祖諱軸 副使贈承旨 曾祖諱禶 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 弘文館提學 藝文館提學 行中直大夫,弘文館副應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 祖諱遠 贈嘉善大夫,吏曹參判行忠順衛敦勇校尉 考諱大有 贈純忠補祚功臣 資憲大夫 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 高興君行進勇校尉 龍驤衛副司果 妣咸陽吳氏 琳之女也 贈貞夫人 用公勳追榮二世 公以嘉靖壬寅四月七日生 氣質卓犖 早習藝文 尤精於書法 任性豪放 遂自投筆 登萬曆己卯武科 選授宣傳官宿衛 稱職兼備邊郞 任事尤勤敏 譽望克著 時昇平久 武備疎闊 宣廟命簡文武中剛..
희제목감사성선형제상회도후(戲題睦監司性善兄弟相會圖後) 完山有賤少年 善丹靑稱絶妙 自號丹靑生 皇明萬曆壬辰 倭寇以三十萬衆犯朝鮮 時則朝鮮昇平 已至二百年 大小咸不知兵 倭卽擣京城 我宣祖大王去邠行幸 駐駕義州 發使告急于萬曆神武皇帝 皇帝曰 咨 此不可不仁 其爾往勖哉 爰命麻貴,楊春若劉鋌若李如松凡若干大將 以其所統領領數十萬衆 倍日並行 師次平壤普通門外 時倭據城中 兵勢甚衆不可當 且自釜山至平壤一千有七百餘里 所向無前 如升虛邑 是以賊勢熾張 且城守甚嚴而備 非有鬼籌 莫能制 天將探賊情已詳 以爲不先挫其氣不可 令先發大砲 破普通門 聲動天地 門樓瓦 乘火力高上數百尺 如是者三而後 更無門 是時 賊已褫魄十九 一城危懼 於是天兵鼓譟而進 戰士無不一當百 賊無不應刃而倒者 或有竆無所逃 掘地匿者 天將令焚之 烈焰漲天 未日中 城中廓淸 靡有孑遺 歡聲如雷 笳鼓騰天 牧丹之峯淨如..
우언(寓言) 天下曷嘗有定是非乎 強者無非 弱者無是 非安得容於強 是安得存於弱耶 鄰有一老人 占數畞爲居 主種薑 間以各菜物 以其四畔 樹各果木 其名不可悉 或以時賣 或堅藏以待價踊 取辦衣食 能以養十口 以故其人重其地寸分 每於揷籬時 必攘其鄰畔 人厭苦 或爭或不爭 其東畔小淸澗 累拳石爲墻 必使半居水 每潦至 墻輒壞 聲震一里 如是者率一年 至再至三 終不改焉 以故鄰人疾之 厭擧其名 西歸子曰 噫 以其弱者歟 一何非之之甚歟 使其人雖攘至百年 能占人地幾何焉 大明高皇帝 以大聖人之德 提尺劒 應天而起 掃凶醜夷大亂 不自求爲帝 而四海之內執玉帛 歸順之不暇 之功也之德也 宜綿曆服於萬億 受臣妾於天壤 毋敢有陸梁睥睨之者矣 而曾未三百年 胡羯乃敢縱其貪戾 偃取高皇帝舊物一半而有之 而厄高皇帝子孫殆甚 此其爲盜賊之極也 而非惟莫敢指之爲盜賊 又從而尊事之恐後 不見有一人守大義固執而不..
오학설(誤學說) 人不可不學 不學 無以導其知而措諸事也 然學亦有要 徒有學之之名 而不得其所以學 反不如不學之爲愈也 李斯學荀卿 而卒焚古先王書籍 王莾學周公 而卒簒漢 邢恕學伊川 而卒爲天下小人 楊朱,墨翟學仁義 而卒歸於無父無君 是豈非不得其所以學 而反不如不學爲愈之驗者乎 丙吉爲漢相 出逢人鬬死不問 逢牛喘 乃問曰 人鬬死 有京兆 宰相不當親細事 牛喘以時氣失節 宰相職當憂 時人以爲知大體 傳於今古 後幾年 國之湖南路方伯某 値歲大饑 餓莩相枕 不可收拾 田野之中 人不忍行過 曳屍出城門者 日不可計數 伯嘗奉朝命 自無等還營 完西炭峙前後約可三十里許 饑民男女老少 塡咽路上 呼飢濱死 繼之以哭 四擁道塞 伯馬不可進前 伯厲聲使揮曰 方伯親民 與邑宰不同 方伯事體 當知一路應賑穀數 分下各邑 使行之耳 爾屬安得呼飢於方伯 方伯亦豈肯動聽於爾屬之呼聲 而下行邑宰事乎 卒不許升斗以救..
소순우열변 증허상사선리(蔬蓴優劣卞 贈許上舍善履) 許上舍善履 嘗以格物餘 優蓴於蔬 其屬子觀劣之 一日咸來余有爭 余謂卞此不難 余有三條說 可破兩人疑惑 仍令天下萬物 皆得其眞 余請不括余囊 蓋凡物之理 必先質而後文 先實而後名 先全而後偏 以味言之 則朴而渾 薰而厚者 味之質也 柔而滑 淸而爽者 味之文也 可長食而不厭 而聊可賴而濟其生者 味之實也 無眞誠甘烈之味 而人皆快於口而互相稱美者 味之名也 宜於貧富 宜於貴賤 宜於春夏秋冬 而常不失其味者 味之全也 宜於富而不宜於貧 宜於貴而不宜於賤 宜於夏而不宜於冬 能適乎偶値 而不能適乎日用之常者 味之偏也 然則所謂味之質者 近諸蔬乎 近諸蓴乎 若謂之近諸蓴 則末如之何 否則文與質孰重 所謂味之名者 近諸蓴乎 近諸蔬乎 若謂之近諸蔬 則末如之何 否則名與實孰大 所謂味之全者 近諸蔬乎 近諸蓴乎 若謂之近諸蓴 則末如之何 否則全與偏孰..
서산가찬(西山歌贊) 卓兮卓兮 卓彼二人 不知有聖 知有其君 卓兮卓兮 卓彼二子 中心有定 聖人不是 應天順人 不敢自私 二子有定 天莫之非 惟聖者爲 誰敢越厥 二子有定 抗抗其節 雖聖而臣 雖狂而辟 惟玆之念 二子心曲 天下宗周 故國何處 邃彼西山 爰得其所 彼周之粟 非子所食 薇亦柔止 宜子之腹 遂作其歌 其歌孔悲 不盡其義 有心其辭 生而何俟 遂餓而死 身死歌存 大倫千祀 『西歸遺藁』卷之七 인용작가 이력 및 작품목차
창의시격문(倡義時檄文) 國運不幸 奴賊逼京 大駕移駐孤城 賊兵合圍 道路阻絶 號令不通 存亡之機 决於呼吸 言念及此 五內如焚 主辱臣死 古今通誼 凡有血氣者 固當忘身赴難 而惟我湖南 素稱忠義之邦 曾在壬辰 義烈已彰 况此君父在圍之日乎 卽者通諭敎書 自圍中出來 無非哀痛之語 其責望於道內士民 至深切矣 讀來不覺失聲痛哭 求死而不得也 惟願諸君子 各自奮勵 投袂而起 糾合同志 資助兵糧 剋期齊會于礪山郡 期以一心赴敵 以救君父之急 如或遲回觀望 越視秦瘠 則非但前日忠烈之風 掃地盡矣 且將得罪於倫紀 不容於鄕國 書到無淹晷刻 無相推諉 協心一力 共濟國難 不勝幸甚 崇禎九年十二月二十五日 『西歸遺藁』卷之七 인용작가 이력 및 작품목차
익산화산서원상량문(益山華山書院上樑文) 斯文爲己任 擧國之血氣共尊 邑人皆絃歌 一境之愛慕尤切 肇建棟宇 永執豆籩 伏惟我沙溪金先生 關時盛衰 名世五百 潛心於先聖之學 義理自明 從事於大人之門 淵源有漸 敎人不倦耳 宏儒踵武而繼興 事君盡禮焉 羣議滅影而底定 誰敢瑕玼 溫乎如美玉精金 人共師宗 仰之如泰山北斗 自南自北之遊士夫 孰非見而知之 彌高彌卲之達尊 吁嗟乎忽焉沒矣 小子安仰 多士無依 欲伸觀感之微誠 何處可托 爭尋杖屨之遺跡 設主將祀 矧玆金馬之爲鄕 實是銅虎之所莅 儒風大振 誰數化蜀之文翁 民心永懷 可笑墮淚之叔子 歷二紀享宇尙闕 幾興識者之咨嗟 卽一朝謀猷僉同 亦令蚩氓而欣快 來恐或後 何須監董之勞 役自垂成 不煩箠楚之苦 龍湫瀅澈 定識智水靜波 馬峀崢嶸 想見仁山重體 高矣美矣 將擧享祀於春秋 輪焉奐焉 永爲依歸於狂簡 奢不及侈儉不及陋 其制允得乎中 門可以入堂可以升..
수암당기(守巖堂記) 乙未之寒食越一日乙酉 友人吳秀甫 自雲水來 屬余而曰 我新有草堂數間 堂之前 坎方塘數畞 魚其中 蒔花卉其邊 堂之後 有巨巖如大廈狀 其下有泉水甚佳 渴則飮之 欲其遠望也 則登其巖 時岸巾 塘邊逍遙 以移晷於花卉之間 艶乎憐其色 芳乎襲其香 不渝乎取其操 於洋洋乎得其自適 將以終吾生 吾乃名吾堂曰守巖 子盍爲我記諸 余應之曰 諾 夫詞藻之鮮於我者 容有之矣 相知之悉於我者 未必有也 我肯辭諸 吁異哉 吾子之守乎 守孰爲大 守身爲大 孟軻氏之守也 以帶墨翟之守也 勿失曹參之守也 能無懼孟施舍之守也 歸田園陶靖節之守也 是其守 雖不無內外若大小精粗之分也 而其不爲無益之守則一也 今吾子守巖 義何居焉 夫守出於慮其失也 孟軻氏不守者 其失身也 墨翟不守者 其失城也 曹參不守者 其失蕭何之約束也 孟施舍不守者 其失無懼也 靖節不守者 其失雅趣也 是固不可不固守也 今吾子不..
비비정쌍괴석기(飛飛亭雙怪石記) 津山舅氏 要余坐堂 開南窓 見庭畔頹牆下 有前所無丈可數尺許者相對立焉 余不知爲何物 疑禽而視之 似是白鶴,靑鶻 爭上九萬之蒼蒼 中塗而誤落人間 於是竦兩肩仰眷 而更欲飛騰於此時者也 疑獸而視之 似是驚豹怒虎 夜投人居 日出不敢交乎人 戢其勇斂其猛 就僻處同蹲 而恐爲人知者也 疑木之楂者 有摧之痕 有蠱之跡 得非崐山老松 自閱千霜之久 枝榦落乎風 根本揭乎水 有餘體不盡朽 介而爲二 重苔疊紋 纏深淺而有天然狀度者乎 疑人之老者 有頭頂也 有腹背也 曲腰而垢浮其面 得非武陵仙翁 聞津山山水之勝 共其友來訪 旣來仙凡殊風 不得與世人容接 嘿嘿然相對而無所歸者乎 忘其小以爲山焉 而視之層峯宛焉 斷壁依焉 巖巒列如 洞壑幽如 佳草森翠烟生 余不知爲何物 遂手摩 然後知不飛不走不根不靈不爲山 而兩箇頑然也 然後知其形甚怪也 然後知舅氏之所以置諸堂之前也 『西歸遺..
조운협기(嘲雲峽記) 欲人之物也 穿人之壁 踰人之牆 而曰得無人我知乎 恐恐然頻顧而勞其頸 得無人我覺乎 惴惴然極慮而腐其心 偸未發而來四隣之指點 偸已發而警一市之耳目 恥孰大於此者乎 雖然 此恥於不穿踰 而不恥於穿踰 何哉 弓人不恥爲弓 矢人不恥爲矢 獨穿踰焉而恥爲穿踰哉 有物於斯 溫潤乎輝掩藍田 焜煌乎彩專荊南 人皆悅而慕之 竟求其中 惟土專其功 幸彼之無有知也 不然其恥也 可旣言哉 雖然 此非物之罪 乃物之者之罪也 奚恥於物乎 有恥於斯 非穿踰也 非物之也 而其實淵雲之墨妙 不足以文之 蘇張之辯口 不足以解之 帝王之威力 不足以脫之 造化之機權 不足以化之 夫若此者 其惟雲峽之恥乎 天下皆言三山在海東 雲峽介在三山之間 其境界之幽絶 水石之淸勝 未必大讓於三山 不獨峽自處爲然 人之說雲峽者 亦未必不然 人皆曰非大隱遯 不可居 一朝要大權貴置莊 鳥路變爲周道 而飛龍騰踏 石田化爲負..
전주명륜당중수기(全州明倫堂重修記) 水與食天也 井與鼎人也 天不得獨天 必待人而後天也 人不得獨人 必待天而後人也 水與食也 天之待乎人者也 井與鼎也 人之待乎天者也 今有井鼎於斯 泥且顚焉 其改爲也 亦人之所不能已乎天者乎 曰 若有堂乎先聖廟側 而扁曰明倫 盖肇自何代 倫天也 堂人也 其交相待也 亦水食之於井鼎乎 苟堂之壞不可處 夫安得不改爲 而不致夫人之所不能已乎天者乎 國朝右文 其治隆乎學校 前代無比 而本州沛鄕也 其殿廡齋堂之制 視國學不歉 舊在州西 萬曆乙巳 移建于州東南 上舍李至道實主之 及今五十年 不幸堂傾欲頹 州之章甫 合辭告州大尹沈相公澤曁通判韓侯震琦 沈相公曁韓侯 乃咸大驚而曰 此大事也 不可不及時擧役 乃咸殫厥心以藉 不大煩民力而功就完 不奢不儉 制得其中 旣牢旣爽 保無後憂 比卒成 有司李益新來李起浡 請識重修顚末 起浡竊惟起無刱也 修有重也 無刱無重 無重刱..
송백곡상인서(送白谷上人序) 寧儒毋釋 使名儒實非 若此者無寧釋 何以儒焉 以所有仁義也 夫親而之君出 不愛其君 其誰之仁 心而之事行 不合其宜 其誰之義 之二者 我罔或聞見滋久 則不億麗章甫 直其名儒已 是奚足多乎釋 使釋能達乎理博乎文通乎藝 又從而發乎詞者 有仁於人愛於君 若此者 視彼直名儒 其優劣抑奚翅千萬 嘗聞白谷師 遊其大門下 將衣鉢在其躬 又能解儒家 從遊一代名勝 名勝咸與 余夙晦藏 闕一會 歲丙申夏五月 師自俗離轉向頭流之雙溪 故過余完東 余解其裝 得所著數百篇 中有祭乃文翰先生某名勝 其詞婉其意切 夫師以異道 能不拘忌 以祭異道 其申虔懇若玆 苟師心不得其天 其之乎事能合宜若玆乎 中有國葬詩 其末句 有曰山僧不識君臣義 灑淚呑聲立雨中 苟師居不愛其親 夫師方外也 其之乎君 能生愛若玆乎 能愛非仁 能宜非義 觀人不在多 南宮适說羿奡,禹稷事 我孔夫子稱适以君子尙德 今詩文..
취미당집서(翠微堂集序) 聖人者必欲贒吾人 凡可力於賢者 靡不用極 至於鄭衛詩 其陋甚矣 聖人猶此不刪 此非誨人以淫 蓋欲其有所懲創以就賢也 則於此有文字 之文字最佳 苟有取之者 其將有力於賢吾人 視鄭,衛詩懲創 功相萬萬 則雖收焉序其事 殆未必不可乎 大釋碧巖 越在崇禎丙子 團緇徒數千赴國亂 時余亦率義旅赴於監司幕中 與碧巖處可月餘 閒軍務餘 訪及渠 相長太優 則碧巖乃字守初太一 而曰是其人也 訪其爲人 深於釋道 且餘事攻文 文可驚人 余笑應曰 釋道之深 未必見奇文驚人 亦可異焉 願一接而未得 歲庚子 余靜處完東精舍 有美一釋 袖一帙拜庭 擧止雅甚 余以異俗人 急延之座 訪其居則方丈之華巖蘭若是已 時碧巖以是歲正月 落身華巖 余嘗聞甚慨惜 盖爲碧巖其名雖釋 而其有功於國家太重故耳 及見釋問先及碧巖事 釋曰噫 碧巖傳衣鉢名守初號翠微者 是吾師也 問其帙爲何 作而曰 吾師平生所著 浩不可..
증도휘산인서(贈道徽山人序) 使國家一敎 治國家何難 則敎之不一 非治國家大患乎 漢光武憤舊物爲僞有 提尺劒起而興復 夫置二子度外 豈其本心哉 以其勢有所未易也 二子旣不得不置度外 則是亦未能一其敎耳 使二子來歸者 光武必將諭以理義 使自動其心 有所怵惕 觀感效順之不暇也 夫治國家 未一其敎 孰有大於異端者乎 無君臣父子之倫 無尊卑貴賤之分 雖尺童子 亦能知彼爲匪人 而自有釋氏以來 人多陷溺 釋氏之學 居天下太半 將見不百年 而人皆爲釋氏 莫之禁焉 則凡居邦域之內 而常懷憂世之心者 其汲汲之意 奚獨後光武之於二子哉 山人道徽遍到時之鉅公詩家 求詩得數十篇 道徽其色溫而雅 其言醇而謹 其心質直而無所飾 眞所謂墨名而儒行者也 而其實釋也 彼其不遊於釋 而遊於鉅公之門 此卽未歸之二子也 鉅公之所以諭道徽者 宜擧忠孝之道 以開迷惑之胷 使渠豁然有所得 使知人不可無君而忠爲事君之方 人不可無父而..
사체시서(四體詩序) 日者見足下詩 詩極簡奧而長於諷諭 與俗詩不同 噫 足下其可與言詩乎 足下詩非足下自爲 乃足下家詩也 肯與偶然出而爲詩者 爭其優劣耶 夫詩言志 詩源盖出於三百篇 夫爲詩而外三百篇遺旨者 不可以詩論也 詩本性情 詩之正者 其性情正者也 詩之邪者 其性情邪者也 苟其性情邪 則其發於詩者 自然爲邪 不可強欲正而或可爲正也 苟其性情正 則其發於詩者 自然爲正 不可強欲邪 而或可爲邪也 夫見關雎,麟趾之詩者 孰不知其性情之正乎 見桑間,濮上之詩者 孰不知其性情之邪乎 然則觀其人之詩 而豈不知其人之性情乎 然而詩之邪正 雖在其人 而使其人爲邪爲正者 實不在其人 則詩以考其政治之得失 其義豈偶然哉 雖然 夫所謂邪者 豈必指邪慝云乎 凡害於物者皆邪也 愁亦邪也 怨亦邪也 勞亦邪也 苦亦邪也 凡厥不平之氣 發於吟咏之間者 皆莫非邪也 夫所謂正者 豈必指繩墨云乎 凡利於物者皆正也 懽亦..
증김수재서(贈金秀才序) 夷人知不徧 當遠近也 但知近近而不知近遠 但知遠遠而不知遠近 當離合也 但知合合而不知合離 但知離離而不知離合 若此者可與言乎哉 莫遠於日月也 而日月在人 莫近於夢寐也 而夢寐無跡 可近近而遠遠乎 莫合於夫婦也 而牛女各在天涯 莫離於東西也 而舜文若合符節 可合合而離離乎 莫近者心而面次之 苟其心相同也 此則彼心 彼則此心 心未嘗暫遠 雖其面阻過百年 果可謂之遠耶 苟其心不相同也 此背彼心 彼背此心 心未嘗暫近 雖其面共對一室 果可謂之近耶 莫合者道而居後焉 苟其道相同也 此則彼道 彼則此道 道未嘗暫離 雖其居隔在千里 果可謂之離耶 苟其道不相同也 此背彼道 彼背此道 道未嘗暫合 雖其居同處一榻 果可謂之合耶 心近而面遠者 遠之近也 心遠而面近者 近之遠也 道合而居離者 離之合也 道離而居合者 合之離也 有人於此 苟使當遠近 將取近之遠者乎 抑將取遠之近者乎 ..
증이사문낙이서(贈李斯文樂而序) 時年五十有三 非有疾病事故 目未嘗不在卷軸 手未嘗不在翰墨 人謂我酷好文章 然我魯者 文章非魯者事 我安敢從事於文章乎 直爲無所事故已 我以早歲謝名利 歸處田野 攻苦乎耘耔之業 仰事俯育 無所希慕於世也 人謂我好隱遯 然我俗士 隱遯非俗士事 我安得有意於隱遯乎 直爲樗櫟散材 自不容於杞梓之間故已 我嘗存心不欲有忮 接物不欲以僞 或者疑我有忠信之實也 然而忠信大行也 聖人之所重也 吾安敢吾直襲其外 而亦不可得也 夫我安敢乎忠信 乃所願在不偏倚 方寸以是自守 不爲世易 不爲物移也 盖方寸有所偏倚 則便害於天理之中正 天理旣有所害 則便不得爲人 余是之懼也 所以孶孶 舍是無它 而直患耳目孤陋 無與講究 思得與同志者 以相切磋 而世無其人 夫我但求其實 不以名掩焉 則世果有其人哉 旣不可得於人 思寓於物也 於飛焉有鳳也者 見必以時 於走焉有麟也者 不踐生草 是..
송부백조령서(送府伯趙令序) 噫 出處雖異途 槩不能果於忘世 則夫爲治之方 安得不往來于心也 夫治民 一於愛而不復濟之以畏者 釋,老之愛也 一於畏而不復濟之以愛者 跖,蹻之畏也 必也愛包畏 畏包愛而後 能致治民之極乎 雖然 愛包之畏 畏內而愛外 人狎而犯 畏包之愛 愛內而畏外 人敬而從 然則治民 寧取狎而犯者乎 寧取敬而從者乎 雖然 亦有時係焉 上古民心淳 知愛之可狎而不可犯 故以愛包畏 爲治道之本 世旣下 民心不淑 愛包威則狎而犯者皆是 是故 達於爲治之方者 不肯眩於愛畏之名 而時易其本 然則畏包愛 不亦今日之至務乎 孰能之 非我府伯趙夫子乎 夫子爲治 不苟於心 不私於民 而爲其所當爲也 當革者 不以舊而或不革也 當復者 不以舊而或不復也 當起之以義者 不以舊不起而或不起也 號令明政治肅 凡其所爲 皆智巧所深避也 下車旣一年 逋欠復軍籍實 吏畏法而不敢欺人 趨事而不敢遊 名分正 爭訟..
증임참봉서(贈林參奉序) 林老成問曰 君子愛人不以己可乎 曰不可 愛人不以己薄也 君子不薄也 曰然則愚之惑滋甚 子嘗不仕 豈子以不仕待己 然而斯文林侯 初命末班 其年五十有餘 其志未必欲赴 而子勸之勤 以子所不欲欲之人 斯可謂愛人以己乎 曰否 爾徒見我不仕 不見我所以不仕也 夫仕所以行君臣之義 君臣 人之大倫 夫仕烏可已乎 雖然 夫仕不徒然 所以乎天下國家 是以 君子未嘗不仕 雖然 君子亦未嘗苟仕 君子必先試可 試而可者仕之 不可者已之 夫可而不仕 廢倫也 不可而仕 懷祿也 廢倫君子不爲也 懷祿君子亦不爲也 爾以我爲未嘗試可乎 以我爲試而可者乎 吾自知不可明甚 是以吾不仕也 今林斯文 素蓄適用之才 而未嘗試可 人皆惜之 今其徵出於聖上初服 是其可試可也 非若尋常然 凡厥有江湖之憂 而懷野無之心者 將勸其行否乎 勸者謂有可試也 不勸者謂未有可試也 雖使實未有 君子將意其或有 况實有之而待..
송이참봉승민서(送李參奉承敏序) 李生乎惟乃行 樂我者一 喜我者二 參奉末班也 生大材也 以大材得末班 奚以喜樂我一二乎 國家取人有二 科文與武也 其進不以科者 各有蹊徑 以生之才 則學有餘也 以生之行 則入而善事親 出而善師友也 而然生地甚寒 且去大故屬耳 名未著科焉 則今之進也 直緣我聖上 能悉生於生之一疏章 而知生有可用之才 旣以咨筵臣 又敎諸兩銓 必使破格收用 前後發於天語者 無非感動聽聞 吾嘗觀生疏辭 果痛切著朙 弊備而救至 大無不包 小無所遺 條目畢具 首尾纖悉 如使見試於執政 吾知其必不小補 夫以我聖上新化圖治之誠心焉 而豈不樂聞於生之言也者 雖然 自古上章之流 其在草野 必出於一代知名之士 而其所言 或未必不及於生之所陳 而時君能聽信而擢用之 槩未多聞 今生處寒地 未著科 不敢列於知名一代 而上章焉而我聖上知生 不啻若親見生面目 親見生才學 親見生平生 汲汲然惟恐收用之..
송황계첨부건원릉재랑서(送黃戒忝赴健元陵齋郞序) 言與己相反 必稱水火 水大者克火 火大者克水 水不能容火 火不能容水 雖有鬼神之智 河海之量 孟賁,烏獲之力 將不能使水火合而爲一 而水悅乎火 火悅乎水也 此理之常也 遍天下皆水 一點火間於其間 豈不危矣乎 遍天下皆火 一勺水間於其間 豈不孤矣乎 是則不惟不相容 必將淪滅而莫之知其處也 亦哀哉 雖然 三才備而五行特爲三才之用 吾人之生 固不可有水無火 亦不可有火無水 是則二物雖不自相容 而其爲生人之利則亦均已 豈獨水火而已乎 夫人之出處隱見亦然 天下皆出處者 非遍水之一點火乎 天下皆隱見者 非遍火之一勺水乎 晉處士陶淵明賦歸來於劉宋之世 而宋不之奪 而能遂淵明之節 則淵明非當時之點火乎 而淵明之火 能明於萬世 明者固淵明也 明之者非劉宋乎 商之伯夷,叔齊能叩馬於武王之軍前 而武王不之殺 而能成二子之大節義 則二子非當時之勺水乎 而二子之..
증류생후함서(贈柳生厚諴序) 甚矣俗之論 失其眞也 今有沙礫化爲珠玉 雞鶩化爲鳳凰 人之聞見之者 必將爭傳其異 或置諸牙輔 或入諸吟咏 或備諸傳記之間 而恐其傳之或不廣也 使天下之人皆奔波 以及乎後世 彼沙礫爲沙礫而何損於人 爲珠玉而何益於人 雞鶩爲雞鶩而何害於人 爲鳳凰而何利於人 乃異其爲珠玉爲鳳凰也 如此其至乎 而必欲廣其傳而不之止也 其不以必不化者乃化 而能善其化也乎 柳生厚諴 完山胥者流也 嘗聞胥之徒以胥資其生 如卿大夫資於爵祿 卿大夫有常食 而胥之徒無常食 不瞞上不舞智 無以資其身也 故其甚者竊簿書 不甚者凡遇事 必思利其身 此非胥之徒皆不善也 其勢則然 不瞞上侵下者 不爲能胥 使柳生止於不舞智而已也 是足以聞於人而拔乎萃萬萬也 乃今柳生能外其業 而從事於儒者之學 盖凡聖賢之書 無不取讀 而精究其義 旁通乎百家之文 天下古今事物之理 人間千百酬酢之變 無不昭然於方寸之間 蘊之..
증안참봉서(贈安參奉序) 不才散處田間已久 然亦不能果於忘世 聞有一政令關於治道者 未嘗不灑然心動 前數年 聖上旣側席而心如渴焉 乃命三品已上各薦人 其目有六 起浡樂聞之也 先訪白江李相國所薦 曰參其目應孝悌 起浡竊料孝是百行之源也 求忠臣 必於孝子之門 李相國一心徇國 亦嘗聞本於此者也 其薦人也 必不肯阿好以苟充也 必不循虛名也 必不稱之過其實也 此必之人也可應相國之薦也 可不負相國所薦之意也 其將大有利於國家乎 將安得一接風範 以申我嚮遡之悃愊 以審夫相國知人之藻鑑乎 未幾何 夫夫也除慶基殿齋郞 不佞跡不入城府 夫夫也以不曾見爲嫌 宜相接而不相接也 頗閱月 不佞常鬱鬱然 是歲春三月 忽於郊外溪亭 獲遂賓主之禮 因與竟日酬酢 太半得其有也 純乎不雜 雅而無塵 從容其擧止也 和順其辭氣也 接乎物若此 其在家也可知 信乎相國之薦夫夫也 夫夫之獲接於相國也 第有所不審者 不佞棄於世久矣 蟄..
송이유백 부춘조랑서(送李裕伯 赴春曹郞序) 仕曰出 不仕曰處 是曰也 常人之曰出處也 仕曰處 不仕曰出 是曰也 激人之曰出處也 仕則於朝 朝者仕者所也 不仕則於山 山者不仕者所也 於朝曰出 於山曰處 其曰也 不亦順乎 仕而無所爲 無爲者亦一處也 不仕而憂在國 憂國者亦一出也 於無爲曰處 於憂國曰出 其曰也不亦激乎 我則異於是 出於仕 或處於仕 處於不仕 或出於不仕 何者 苟我有可仕之實而得其時 而能行我所求之志 以利於世而有仕者 玆非我出於仕者乎 我無可仕之實 而或爲家貧親老 或爲門戶衰替 不得已而有仕於一命者 玆非我處於仕者乎 有世莫我知 時不我信 適於行藏之道 得於兼獨之義 納履揮鞭而投於竆巷寂寞之濱 侶魚鰕而友麋鹿 終於遯而莫之悔者 玆非我處於不仕者乎 苟我一處於山 而在野之有志者 莫不曰時不可仕歟 何某之有意於世也 而不仕而便處於山乎 在朝之有志者 亦莫不曰時不可仕歟 何某之..
송신사군 해환영남서(送申使君 解還嶺南序) 官不可必去 官不可必留 可去而去 可留而留 此士大夫行己之方也 己不可必己 人不可必人 可己而己 可人而人 此士君子待人之道也 去於可去 留於可留而後 其留也不苟 其去也不隘 而行己之方 從而得焉 己於可己 人於可人而後 其己也不比 其人也不薄 而待人之道 從而盡焉 何以明其然乎 夫官安得必去焉 小者澤一人做一事之官也 大者經綸天下之官也 堯舜君民之官也 我去而國家衰天下亡 亦官也 官可以必去乎 夫官安得必留焉 欲直道則害於己 不苟容則忤於人官也 我無失而可羞來官也 我無戾而可辱至官也 國家之隆衰不繫我 天下之興亡不繫我亦官也 官可以必留乎 以爲我去而天下不可經綸 君民不可堯舜 我去而其國家必衰 其天下必亡 而留之者 不亦不苟之留乎 以爲我雖留而衰國不可復隆 我雖留而亡天下不可復興 徒羞來於無失 徒辱至於無戾也而去之者 不亦不隘之去乎 夫人..
송황자휘부평양서윤서(送黃子輝赴平壤庶尹序) 居近君之位 而致有爲之志 世道焉煕皥 君民焉堯舜 以盡我付畀之重 庸詎非有志者所自期也 抑豈非有志者 望於有志者所大期也 然而才能我也 名位人也非我也 豈宜以我焉 而取必於不我之人乎 古之孔,孟 其盡我也 可旣言乎 其柰不得乎人乎 此所以當時天下之人 不得蒙至治之澤也 况自孔,孟以下 凡厥自以爲盡我而得於人者 亦未必不多 而未或聞人被其化者 則是豈獨我不自盡己乎 抑亦以天下國家之隆替興亡 一皆係乎天 而人不得干焉者乎 是則雖使孔,孟居其位 不能保其必安人如人所望也 况下孔,孟萬萬者 雖使得其位 而豈能保其必利人乎 是則人雖或與之以位 寧辭之而不居焉可也 吾友黃子輝 國朝大名臣翼成公之後也 能孝於親 又能博於藝 早歲擢嵬科 朝廷以才大而操雅 特置諸諫諍之位 有惡之者久屈焉 歲壬辰 筵臣㬥其寃狀 後數日 除平壤庶尹 將肅謝 行過完山 其友李起浡..
계서자판부서(戒庶子販夫書) 言欲過謹 行欲過恭 正爾之心 端爾之容 毋輕喜怒 毋遽好惡 痛祛浮薄 痛絶倨傲 勿浪交遊 勿煩酬酢 宜稱人善 宜莫稱惡 孜孜仡仡 載籍之間 特著特書 罔暇罔閒 夙興夜寐 衣帶必飭 戒謹恐懼 乃父常目 汝父雖無美食 苟欲美食 未必不能美食 汝父雖無華服 苟欲華服 未必不能華服 則汝父之無美食華服 不爲也 非不能得也 愼勿以此勞爾心曲 憂勤惕慮 學罔輟作 使汝飭身之誠 充於汝腹 則汝腹卽我腹也 我腹豈不滿乎 使汝修行之名 遍於汝身 則汝身卽我身也 我身豈不煖乎 彼膏粱 安得爲美 彼文繡 安得爲華 願汝之勖乎玆 罔或使汝方寸之他 我欲以此煖我身 我欲以此充我腹 苟汝之欲孝于我 千千萬萬 事皆曲盡 宜莫此二事若也 『西歸遺藁』卷之五 인용작가 이력 및 작품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