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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건빵이랑 놀자 안내도 1. 건방진 방랑자 삶과 앎과 함업무수업 강의&연수군대게임한문단재만남문화여행이사기서향글쓰기 순간의 순간2000~2010년(대학, 군대, 임용생) 08년09년10년2011~2020년(단재 교사, 임용생)11년12년13년14년15년16년17년18년19년20년2021~2030년(임용생, 교사)21년22년23년24년25년26년27년28년29년30년2031~2040년(교사)31년32년33년34년35년36년37년38년39년40년2041~2050년(교사)41년42년43년44년45년46년47년48년49년50년 사진 기록증명건빵건강한문교육크로스군대전자기기지도 변천자료 2. 한문과 교육과정7차7차 교과서07 개정09 개정15 개정15 성취수준15 교과서 22 개정2..
이기발李起浡: 1602(선조 35)~1662(현종 3)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패우(沛雨), 패연(沛然), 호는 서귀(西歸). 전라북도 전주(全州) 출신. 학덕과 효행이 높던 조선 중기 문신. 1. 전주팔현(全州八賢) 중에 한 사람으로 화곡(華谷) 홍남립(洪南立, 1606∼1679), 이흥발(李興浡, 1600~1673), 이후선(李厚先, 1609∼1674), 이경록(1543~1599), 유장옥(柳章玉), 정효승, 이생발(李生浡) 등과 팔과정(八科亭)에서 교유하며 강학함【전주 팔복동(八福洞)은 여덟 명이 과거에 합격했다 해서 팔자(八字)를 넣어 이름지어졌으며, 팔복(八福)을 받은 곳이라며 팔복동으로 이름하게 됨】. 2. 형 이흥발(李興浡)과 동생 이생발(李生浡) 등 삼형제가 석계(石溪) 최명룡(崔命龍)..
정여창鄭汝昌 : 1450(세종 32)~1504(연산군 10)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수옹(睡翁). 1.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에 힘쓰다가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함. 2. 지리산에 들어가 오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함. 3. 1490년 참의 윤긍(尹兢)에 의해 효행과 학식으로 추천되어 소격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자식의 직분을 들어 사양함. 4. 149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시강원설서가 되어 올바른 보도를 하니 동궁(東宮)이 좋아하지 않음. 5. 1498년에 무오사화(戊午史禍)에 연루되어 종성(鍾城)으로 유배,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됨. 근차율정이선생운謹次栗亭李先生韻안령대풍鞍..
안축安軸: 1287(충렬왕 13)~1348(충목왕 4)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시호는 문정(文貞)임. 1. 고향 죽계(竹溪)를 기반으로 성장한 신흥사대부임. 2. 재능과 학문이 뛰어나 문과에 급제한 후 요직을 거침. 3. 충혜왕(忠惠王) 때 강원도 존무사(存撫使)로 파견되었으며 충군애민(忠君愛民)의 뜻이 담긴 『관동와주(關東瓦注)』를 남겼으며, 경기체가(景幾體歌)인 『죽계별곡(竹溪別曲)』『관동별곡(關東別曲)』을 남김. 4. 『근재집(謹齋集)』을 남김. 해당海棠제관목역정題灌木驛亭삼척서루三陟西樓십일숙임단역十日宿林丹驛天曆三年五月 受江陵道存撫使之命천력삼년오월 수강릉도존무사지명경포범주鏡浦泛舟경포신정기鏡浦新亭記 문학통사 인용 안내도
윤근수尹根壽: 1537(중종 32)~1616(광해군 8)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고(子固), 호는 월정(月汀). 1. 이황(李滉)ㆍ조식(曺植)에게 학문을 배움. 2. 성혼(成渾)ㆍ이이(李珥) 등과 사귀면서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양명학(陽明學)을 배척함. 3. 육구연(陸九淵)ㆍ왕수인(王守仁)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함. 4.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당대에 유명했고 특히 그의 글씨는 영화체(永和體)라 하며 극찬을 함. 5. 시호는 문정(文貞)임. 6. 『사서토석(四書吐釋)』 제자암시첩題自庵詩帖정기록서正氣錄序월정만록月汀漫錄 한시사 인용 안내도
성해응成海應: 1760(영조 36)~1839(현종 5)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용여(龍汝), 호는 연경재(硏經齋). 1. 정조 때 문장가로 알려진 성대중(成大中)의 아들로 태어났다. 2. 진사에 합격하고 규장각 검서로 선발이 되어 편찬ㆍ출판의 일에 참여했는데, 이때 규장각 소장의 많은 서책을 열람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박학(博學)과 고증적인 태도를 중시하여 다방면의 저작을 남김. 3.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이란 저술을 남겼는데 여기엔 다방면의 지식이 총망라되어 있고 시창작에 있어서는 사실적인 내용을 평이한 필치로 서술한 장편 고시들이 주목됨. 시설詩說발해고서渤海考序강상효녀전江上孝女傳 유객행有客行전불관행田不關行문학통사 인용 안내도
박세당朴世堂: 1629(인조 7)~1703(숙종 29)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긍(季肯), 호는 잠수(潛叟)·서계초수(西溪樵叟)·서계(西溪). 1. 1660년(현종 1)에 증광 문과에 장원해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고, 그 뒤 예조좌랑·병조좌랑·정언·병조정랑·지평·홍문관교리 겸 경연시독관·함경북도 병마평사(兵馬評事) 등 내외직을 역임함. 2.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다녀왔지만 당쟁에 혐오를 느낀 나머지 관료 생활을 포기하고 양주석천동으로 물러남. 3.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맏아들 박태유(朴泰維)와 둘째 아들 박태보(朴泰輔)를 잃자 여러 차례에 걸친 출사 권유에도 불구하고 석천동에서 농사지으며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힘씀. 4. 죽을 때까지 여러 관직이 주어졌지만 부임하지 않았고 1..
한국 산문 ㄱ 國子監上梁文(이장용)劒客記聞(유한준)鏡浦新亭記(안축)觀物堂記(권호문)勸學文(민욱)稼說 贈鄭子循(하수일)古文軌範序(성대중) ㄴ 鹿邊(강세황)論詩文(김춘택)남염부주지의 가치(어숙권)남지, 슬기롭게 대처하다羅顯道 壽章集帖序(박세당) ㄷ 讀燕巖集(홍길주)讀書處記(이가환)檀園記(강세황)東史綱目序(안정복)答客子言文學事書(허목)答朴德一論文學事書(허목)大東韻玉序(정범조) ㅁ 溟州歌(고려사)木偶와 土偶(성대중)漫錄(이이명) ㅂ 伯夷論(송재순)渤海考序(성해응)不憂軒記(정극인)뻐꾸기 은자(조석주)卜居總論(이중환)復答趙盛叔書(조귀명)朴山如墓誌銘(남공철) ㅅ 山谷精粹序(최항)詩說(성해응)사씨남정기의 가치(김춘택)書林烈婦傳後(이상정)瑞膺東遊錄跋(윤봉조)叙與尹太學士論文事(신유한)松石園記(박윤묵)書林白湖元生夢遊錄後(황..
남용익南龍翼: 1628(인조 6)~1692(숙종 18) 본관은 의녕(宜寧).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곡(壺谷). 1. 1646년(인조 24) 진사가 되고 1648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함. 2. 1655년(효종 6) 통신사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관백(關白)의 원당(願堂)에 절하기를 거절하여 음식 공급이 중지되고, 여러 가지 협박을 받았지만 굴복하지 않음. 3. 1689년 소의장씨(昭儀張氏)가 왕자를 낳아 숙종이 그를 원자로 삼으려 하자, 여기에 극언으로 반대하다가 명천으로 유배되어 3년 뒤 죽음. 4. 신라시대부터 조선 인조대까지의 명인 497인의 시를 모아 엮은 『기아(箕雅)』 및 『부상록(扶桑錄)』, 그리고 자신의 시문집인 『호곡집(壺谷集)』이 있음. 정동명만鄭東溟挽오군영五君詠기아..
이의현李宜顯: 1669(현종10)~1745(영조21) 자는 덕재(德哉), 호는 도곡(陶谷). 1. 김창협의 문인으로 문학에 뛰어났음. 2. 1694년(숙종 20)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檢閱)·설서(說書)·정언(正言)·금성현령(金城縣令)·부교리(副校理)를 거쳐 1707년 이조정랑, 이어 동부승지·이조참의·대사간을 역임함. 3. 1728년에 무신란(戊申亂)이 발생하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기용되어 반란 관련자들의 치죄를 담당하였다. 이어 『경종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1732년 사은정사(謝恩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옴. 4. 신임옥사 때나 정미환국 등의 비상시 때마다 청의(淸議)를 지켜 의론을 굽히지 않음. 5. 「금양위박미비(金陽尉朴瀰碑)」·「충정공홍익한갈(忠正公洪翼漢碣)」 등의 글씨가 있으며..
한국 한시 ㄱ 寄無悅師(김제안)江水(김구용)感懷(김구용)客中偶吟 奉贈端午問安使 問安使(김류)金剛道中(강백년)涇州龍朔寺(박인범)賞蓮(곽예)歧灘 / 舟行(신최)畿南卞僧愛女史(신위)溪橋中斷兩成洄(이미)過江川舊莊(이현)鏡浦泛舟(안축)感秋(이민구)觀魚臺(이민구)寄僧(이주)觀物(이언적)江上(최수성)哭亡室墓(홍종성)廣津舟中曉起(홍귀달)禁中東池新竹(최승로)金五興(조수삼)科儒雜謠(윤기)觀東史有感 效樂府體(안정복)見新月(정온)觀物吟(고상안)禁直詠懷示季雅(기준) ㄴ 路上所見(강세황)樂道吟(이자현)來蘓寺(이윤영)謾成(이주)落葉(정곡)綾城累囚中(조광조) ㄷ 讀離騷有感(김인후)桃林春放踏紅房(임종비)登俛仰亭 示東岳令公(양경우)登鐵嶺(이직)돌에 이름 새기며(임유후)盜取寢衾(이진망)答賓(장혼)悼亡(신위)悼亡(최성대)待人(최사립) ㄹ ..
고경명高敬命 : 1533(중종 28) ~ 1592(선조 25)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재봉(霽峰)ㆍ태헌(苔軒). 1. 조선전기 임진왜란 당시 금산전투에 참전한 의병장. 문신. 2.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이 함락되고 왕이 의주로 파천되자 두 아들에게 각처에서 도망온 관군을 모아 광주목사(廣州牧使)에게 인계하도록 함. 3. 전라좌도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왜적과 대항해 싸우다가 아들과 함께 순절함. 차송진사유순운次宋進士惟諄韻어주도漁舟圖문학통사한시사 인용 안내도
김안국金安國: 1478(성종 9) ~ 1543(중종 38)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김정국(金正國)의 형 1. 조광조(趙光祖)ㆍ기준(奇遵)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도학에 통달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 사림파의 선도자가 됨. 2. 1519년에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 일파의 소장파 명신들이 죽음을 당할 때, 겨우 화를 면하고 파직되어 경기도 이천에 내려가서 후진들을 양성함. 3. 그 후 다시 등용되어 사대부 출신 관료로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통치의 강화에 힘썼고 중국문화를 수용하는 데에 평생의 노력을 기울임. 4. 『모재집』, 『모재가훈(慕齋家訓)』, 『동몽선습(童蒙先習)』 중구일정상사重九日呈上使분성증별盆城贈別도중즉사途中卽事청노기상임춘탄금聽老妓上林春彈琴칠..
이명한李明漢: 1595(선조 28)∼1645(인조 23) 자(字) 천장(天章), 호(號) 백주(白洲). 이정구의 아들임. 1. 1610(광해군2)년에 사마시 합격, 1616년에 증광문과에 을과에 급제하여 벼슬생활 시작. 2.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廢母論)이 일었을 때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파직됨. 3. 인조반정 후 1623년에 다시 등용되어 요직을 맡음. 4. 1643년 이경여(李敬輿)ㆍ신익성(申翊聖) 등과 척화파로 지목되어 심양(瀋陽)에 억류됨. 중양전일일 희용리어구호重陽前一日 戱用俚語口號백마강白馬江원통야월圓通夜月수종사水鍾寺문학통사한시사 인용 안내도
임억령林億齡: 1496(연산군 2)~1568(선조 1) 자(字) 대수(大樹), 호(號) 석천(石川). 본관 선산(善山). 전라도 해남서 출생. 1. 박상(朴祥)에게 수학함. 2. 152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생활 시작. 3. 1545(명종 즉위년)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동생 백령(百齡)이 소윤 윤원형(尹元衡) 일파에 가담하여 대윤의 많은 선비를 추방하자 자책을 느끼고 벼슬을 사직함. 그 뒤 동생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문서를 보내오자 불태우고서 해남에 은거함. 4. 그 뒤에 등용되어 여러 벼슬을 맡음. 5. 『석천집(石川集)』이 남아 있음. 송백광훈환향送白光勳還鄕시자방示子芳추촌잡제秋村雜題수함관어水檻觀魚초공섭招公燮득영자운得營字韻문학통사한시사 인용 안내도
홍양호洪良浩: 1724(경종 4)~1802(순조 2) 본관은 풍산(豐山)임. 초명은 양한(良漢). 자(字) 한사(漢師), 호(號) 이계(耳溪). 1. 1752년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지평 수찬ㆍ교리를 지냄. 2. 1777년 홍국영의 세도정치가 심해지자 경흥부사로 있다가 홍국영이 실각하사 한성부우윤ㆍ대사간을 지냄. 그 후 1794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이조판서가 됨. 3. 중국에 다녀와선 고증학(考證學)을 보급함. 4. 『이계집(耳溪集)』ㆍ『육서경위(六書經緯)』·『군서발배(群書發排)』·『격물해(格物解)』·『칠정변(七情辨)』·『동해명장전(海東名將傳)』·『고려대사기(高麗大事記)』·『흥왕조승(興王肇乘)』·『삭방습유(朔方拾遺)』·『북새기략(北塞記略)』·『만물원시(萬物原始)』·『향약절중(鄕約折中)』 시해詩解..
정약용丁若鏞: 1762(영조 38)~1836(헌종 2)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미용(美庸)ㆍ귀농(歸農), 호는 다산(茶山)ㆍ사암(俟菴)ㆍ자하도인(紫霞道人)ㆍ철마산인(鐵馬山人). 여유당(與猶堂)임. 1762년 경기도 양주군 마현리에서 정재원(丁載遠)과 해남윤씨 윤두서(尹斗緖)의 손녀 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남. 1770년 9세 어머니인 해남윤씨 사망. 1776년 15세 2월 풍산(豐山) 홍화보(洪和輔)의 따님과 결혼함. 부친이 호조좌랑으로 서울에 부임하자, 이가환(李家煥)ㆍ이승훈(李承薰) 등에게 수학함. 1777년 16세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유고를 읽고 학문의 좌표를 정함. 1783년 22세 2월 감시(監試) 경의과(經義科) 초시(初試)에 합격하고, 4월에 회시(會試) 생원(生員)에 합격하여 성균..
이산해李山海: 1539(중종 34)~1609(광해군 1)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죽피옹(竹皮翁)ㆍ시촌거사(枾村居士)ㆍ종남수옹(終南睡翁), 시호는 문충(文忠)임. 1. 한산 이씨 명문가 출신으로 북인의 영수이자, 이색(李穡)의 7대손으로 영의정까지 지낸 고위 관료. 2.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친지들이 연루되자 보령으로 이주함. 3. 1567년 이조좌랑으로 임명한 기록에는 “이산해는 이색의 후예로, 여섯 살에 능히 대문자(大文字)를 짓고 여러 차례 향시에 장원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천선(天仙)처럼 바라보았으니, 참으로 기사(奇士)이다”라고 적혀 있어 그가 글씨에 있어 자질을 인정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음. 4. 1578년엔 대사간으로 서인(西人) 윤두수(尹斗..
이지李贄(1527~1602) 원래 이름은 재지(載贄), 호는 탁오(卓吾). 1. 복건성 천주 출신으로 조상 중 이슬람 문화와 긴밀하게 교류한 이도 있지만 본인은 전통문화 안에서 성장함. 2. 훗날 주자학과 양명학은 물론 老莊과 선종 등을 두루 섭렵하며 중국 근대 남방문화의 결정체를 이룸. 3. 26세에 급제하여 하급관료 생활을 하다가 54세 되던 해에 퇴직하였고 40세 전후로 심학(心學)에 몰두했으며 62세엔 정식으로 출가하여 절에 기거함. 4. 유가의 정통사관에 도전하는 책들을 서술하며 유가의 말기적 폐단을 공격하다가 혹세무민의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혔다가 76세에 자살함. 동심설童心說제공자상어지불원題孔子像於芝佛院웃음과 역설비슷한 것은 인용 안내도
진사도陳師道: 1053~1101 자는 무기(無己), 또는 이상(履常). 1. 증공(曾鞏)에게서 문장을 배웠고, 황정견의 시를 으뜸으로 삼았다. 2. 소식 문하의 글 잘하는 여섯 사람으로 불리는 소문육군자(蘇門六君子) 중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3. 『후산집』 30권이 있다. 왕평보문집후서王平甫文集後序진소유자서秦少游字敍 인용 안내도
소식蘇軾(1036~1101) 자(字)는 첨(瞻)이며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이다. 1. 애칭(愛稱)은 파공(坡公)·파선(坡仙) “독서가 만 권에 달하여도 율(律)은 읽지 않는다.”고 해 초유의 필화사건을 일으켰다. 2. 당시(唐詩)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었고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하였다. 3.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4. 왕안석의 신법을 반대하다 지방관으로 좌천되어 여러 지방을 두루 돌아다녔다. 시문뿐만 아니라, 詞와 글씨의 그림, 음악에도 정통하여, 중국 최고의 예술가, 대문호라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제구양공문祭歐陽公文범증론范增論전적벽부前赤壁賦후적벽부後赤壁賦능허대기凌虛臺記이군산방기李君山房記초연대기超然臺記 목가산기木假山記(소순)..
구양수歐陽脩: 1007~1072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시호는 문충(文忠)임. 1. 북송(北宋)의 시인ㆍ사학자ㆍ정치가 2. 송대 문학에 고문을 재도입함. 3. 유교원리를 통해 당시 정계를 비판하며 유능한 인재를 적극적으로 추천함. 상범사간서上范司諫書붕당론朋黨論추성부秋聲賦명선부鳴蟬賦증창승부憎蒼蠅賦매성유시집서梅聖兪詩集序설간숙공문집서薛簡肅公文集序풍낙정기豐樂亭記상주주금당기相州晝錦堂記취옹정기醉翁亭記종수론縱囚論 인용 안내도
유종원柳宗元: 773~819 이명은 유하동(柳河東)이고 자는 자후(子厚)이다. 1. 일찍이 유우석(劉禹錫) 등과 함께 왕숙문(王叔文)의 혁신단체에 참가했으나, 실패하여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었다. 후에 유주자사(柳州刺史)를 지내 유유주(柳柳州)라고도 한다. 2. 한유(韓愈)와 함께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제창하여 거의 1,000년 동안 귀족 출신의 문인들에게 애용된 변려문(騈儷文)에서 작가들을 해방시키려고 했다. 한유와 함께 당송8대가에 속하여 ‘한(韓)·유(柳)’라고 병칭된다. 3. 「포사자설(捕蛇者說)」·「종수곽탁타전(種樹郭橐駝傳)」·「영주철로보지(永州鐵爐步誌)」·「삼계(三戒)」·「부판전(蝜蝂傳)」, 「유하동집(柳河東集)」이 있다. 연주군부유혈기連州郡復乳穴記비설羆說포사자설捕蛇者說종수곽탁타전種樹郭槖..
백거이白居易(772~846) 자(字)는 락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ㆍ향산거사(香山居士) 1. 당나라 때 낙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에서 태어남. 2. 민중을 위한 문학과 정치를 지향한 최고의 민중파 시인. 3. 현존하는 작품이 약 2.800여수로, 당나라 시인 가운데 가장 많은 작품 남김. 양죽기養竹記여원구서與元九書백화정百花亭청석靑石 인용 안내도
한유韓愈: 768~824 자는 퇴지(退之). 스스로 군망창려(郡望昌黎)라 부름. 한문공(韓文公) 1. 어려서 고아였으며, 처음 과거에 응시할 때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문체로 낙방함. 2. 네 번째 시험으로 25세 급제하여 이부시랑(吏部侍郞)까지 지냄. 3. 헌종(憲宗)이 불사리(佛舍利)에 참배한 일에 간하여 1년 동안 조주(潮州)에 자사로 밀려났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여선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는 등 승승장구함. ㄱ ㄴ남전현승청벽기藍田縣丞廳壁記남해신묘비南海神廟碑ㄷ답진상서答陳商書대장적여이절동서代張籍與李浙東書ㅁ모영전毛穎傳 ㅂ백이송伯夷頌 ㅅ사설師說상장복야서上張僕射書상재상제이서上宰相第二書상재상제삼서上宰相第三書송고한상인서送高閑上人序송동소남서送董邵南序송궁문送窮文송육흡주참참시서送陸歙州僭參詩序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
두보杜甫: 712~770 자는 자미(子美). 호북성(湖北省) 양양(襄陽) 사람이나 장안 근처의 두릉(杜陵)에 살았으므로 두릉포의(杜陵布衣) 또는 소릉야노(少陵野老)라고 불림. 1.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자 사천(四川)의 성도(成都)로 피난 가 절도사인 엄무(嚴武) 밑에서 막료로 근무하면서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이란 중앙 정부의 관직을 명예로 받았기 때문에 후세에는 두공부(杜工部)라고도 부른다. 2. 이백과 이름을 나란히 하는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인정받아 이백은 시선(詩仙), 두보는 시성(詩聖)이라 칭해지고 있다. 3.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우국충정이 넘치고 사회의 부조리를 파헤친 사회시를 많이 남겨 그의 시를 시사(詩史)라고도 한다. 특히 율시를 잘 지어 율성(律聖) 또는 두율(杜律)이라고 ..
이백李白: 701~761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 취선옹(醉仙翁) 1. 당(唐)나라 시선(詩仙)으로 불림. 시성(詩聖) 두보(杜甫)와 더불어 시의 양대 산맥(山脈)을 이룸. 2. 그의 시는 서정성이 뛰어나 논리성(論理性), 체계성(體系性)보다는 감각(感覺), 직관(直觀)에서 독보적(獨步的)임. 술, 달을 소재(素材)로 많이 썼으며, 낭만적(浪漫的)이고 귀족적(貴族的)인 시풍을 지녔음. 하지장(賀知章)은 이백(李白)을 적선(謫仙)이라고도 하였다. 3. 『이태백시집(李太白詩集)』 30권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월하독작月下獨酌남헌송南軒松자야오가子夜吳歌원별이遠別離산중문답山中問答산중여유인대작山中與幽人對酌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행로난行路難전성남戰城南야사夜思야하정로정夜下征虜亭춘야낙성문적春夜洛城聞笛 춘야..
맹호연孟浩然: 689~740 당(唐) 대의 시인. 이름은 호(浩)이며, 자는 호연(浩然), 호(號)는 녹문처사(鹿門處士) 1. 녹문산에 숨어 살며 시 짓는 것을 즐김. 2. 양양(襄陽) 사람으로 절개와 의리를 존중하였고, 이 때문에 맹양양(孟襄陽)으로 불림. 숙업사산방대정대부지宿業師山房待丁大不至하일남정회신대夏日南亭懷辛大세모귀남산歲暮歸南山춘효春曉림동정臨洞庭 인용 안내도
황현黃玹: 1855(철종 6)~1910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 1. 전라도 광양에서 태어나 뒤에 구례로 이사했으며 기정진의 문하에서 수학함. 2. 31세에 생원이 되었지만 시국을 개탄하고 시골로 돌아와 시대상황을 증언하는 『매천야록(梅泉野錄)』을 저술함 3. 강위ㆍ이건창ㆍ김택영과 함께 한말(韓末) 사대가로 불림. 4. 『매천집(梅泉集)』, 『매천시집(梅泉詩集)』, 『매천야록(梅泉野錄)』 절명시絶命詩신묘춘 압강도중辛卯春 鴨江途中종어요種菸謠이충무공귀선가李忠武公龜船歌발학포 지당산진發鶴浦 至糖山津촌거모춘村居暮春연와설然窩說 한시사 인용 안내도
김택영金澤榮: 1850(철종 1)~1927) 본관은 화개(花開). 자는 우림(于霖), 호는 창강(滄江). 당호는 소호당주인(韶護堂主人). 1. 이건창과 함께 근세 강화 고문학파의 중심인물. 2. 『창강고(滄江稿)』, 『한사계(韓史棨)』 등이 있고, 편서로는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가 있다. 문의병장안보국수사聞義兵將安報國讎事문황매천순신작聞黃梅泉殉信作답장생서答張生書유학경위서儒學經緯序중편연암집서重編燕巖集序장계자시록서張季子詩錄序람폭정기攬瀑亭記방산서요기方山書寮記사양서실기泗陽書室記천왕수하양설天王狩河陽說신자하시집서申紫霞詩集序전처사행장錢處士行狀수윤당기漱潤堂記김홍연전金弘淵傳잡언雜言여한십가문초서麗韓十家文鈔序남원양공묘갈명南原梁公墓碣銘왕모김숙부인묘지명王母金淑夫人墓誌銘주처황안인묘지명周妻黃安人墓誌銘양진산처사묘갈명梁眞山處士墓..
이건창李建昌: 1852(철종 3)~1898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봉조(鳳朝ㆍ鳳澡), 호는 영재(寧齋)ㆍ명미당(明美堂) 1. 가학인 양명학을 계승. 병인양요 때 외국군의 침략에 비분해서 자결했던 이시원(李是遠)의 손자로 강화도에서 태어남. 2. 15세에 문과에 급제함, 충청도 지방의 어사로 나가 부패한 관료들을 숙청함. 3. 제국주의 침략과 거기에 대응한 정부의 태도에 통탄해하며 강화도로 은퇴함. 4. 김택영(金澤榮)과 황현(黃玹)과 문학적 교유를 밀접히 가짐. 5. 『명미당집(明美堂集)』, 『독역수기(讀易隨記)』, 『당의통략(黨議通略)』 등이 있다. 전가추석田家秋夕한구편 병술韓狗篇 丙戌아산과이충무공묘牙山過李忠武公墓협촌기사峽村記事숙광성진宿廣城津연평행延平行즉사卽事홍류동희제紅流洞戲題유수묘지명兪叟墓誌銘송박..
김정희金正喜: 1786(정조 10)~1856(철종 7) 본관은 경주. 자는 추사(秋史)·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과노(果老)·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1.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냄 2.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됨. 3.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함. 4. 1834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
김매순金邁淳: 1776(영조 52)~1840(헌종 6) 후기 문신. 자는 덕수(德叟), 호는 대산(臺山). 1. 2. 『대산집(臺山集)』, 『대산공이점록(臺山公移占錄)』, 『주자대전차목문표보(朱子大全箚目問標補)』, 『궐여산필(闕餘散筆)』,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차군헌기此君軒記답정승지약용서答丁承旨若鏞書삼한의열녀전서三韓義烈女傳序풍서기風棲記논한음백사이공사論漢陰白沙二公事응객應客송두신문送痘神文답사심答士心작치설鵲鴟說 문학통사한시사 인용 안내도
홍석주洪奭周: 1774(영조 50)~1842(헌종 8)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백(成伯), 호는 연천(淵泉). 1. 1795년(정조 19) 전강(殿講)에서 수석을 해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을 받고, 그 해 춘당대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사옹원직장을 제수받음. 2. 안동김씨 세력의 주변적 신료로서 세도정국에 참여했고 순조가 죽은 후 풍양조씨와 세력을 다투어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일익을 담당했음. 3. 1836년(헌종 2) 남응중의 모반에 연루되어 김로(金路)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가 1839년 복직하여 영중추부사에 이름. 4. 고증학에서 의리를 뒤로 미루는 것은 폐단이라고 비판하면서 주자학의 원칙을 지켜야 함을 주장함. 5. 『연천집(淵泉集)』, 『예기집설지의(禮記集說志疑)』, 『학강산필(鶴岡散筆)』..
이양연李亮淵: 1771(영조 47)~1853(철종 4) 자 진숙(晋叔), 호 임연(臨淵) 1. 광평대군의 후손으로 문학과 학문이 뛰어났음. 촌노부村老婦아막제兒莫啼야설野雪 문학통사미학산책 인용 안내도
김려金鑢: 1766(영조 42)~1822(순조 22) 본관은 연안(延安). 후기 학자. 자는 사정(士精), 호는 담정(藫庭). 1766년 김재칠(金載七)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남 1780년 15세 성균관에 들어감. 1792년 27세 성균관 진사시에 급제. 1797년 32세 11월에 강이천(姜彝天)의 비어옥사(蜚語獄事)에 연루되어 함경도 경원(慶源)에 유배되었지만 배소(配所)에 도착하기 전 왕명으로 다시 부령(富嶺)으로 이배(移配)됨. 12월에 부령에 도착. 『감담일기(坎萏日記)』 저술. 1799년 34세 부친 김재칠 사망. 「정안전(貞雁傳)」을 지음. 이 글로 인해 김종원(金鍾遠)의 옥사가 일어남. 1801년 36세 4월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다시 추국(推鞫)을 받고 진해로 유배됨. 이때 『사유..
이옥李鈺: 1760(영조 36)~1812(순조 12) 자는 기상(其相), 호는 문무자(文無子)ㆍ매사(梅史)ㆍ매암(梅庵)ㆍ경금자(絅錦子)ㆍ화석자(花石子)ㆍ청화외사(靑華外史)ㆍ매화외사(梅花外史)ㆍ도화류수관주인(桃花流水館主人). 1. 무반의 벼슬을 주로 한 서족(庶族)이다. 2. 성균관 유생 때 지은 글이 순정하지 못한 소품체란 견책을 받고 평생 불우하게 지냄. 3. 조선 후기 문학의 새로움을 대변한 시와 문장으로 높이 평가됨. 4. 그의 글은 『담정총서』에 수록되어 있음. 소비창극래小婢窓隙來조습궁체서早習宮體書낭집목조안郞執木雕雁 심생전沈生傳 이언인 일난俚諺引 一難이언인 이난俚諺引 二難이언인 삼난俚諺引 三難 태학산문선문학통사 인용 안내도
이서구李書九: 1754(영조 30)~1825(순조 25)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惕齋)·강산(薑山)·소완정(素玩亭)·석모산인(席帽山人). 1. 10대 때부터 연암에게 수학함. 2. 『과정록』에선 재주가 몹시 빼어난 데다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식견과 도량이 있어 연암이 매우 사랑했다고 했음. 3. 1774년(영조 50)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ㆍ이조판서ㆍ우의정 등을 지냄. 4. 『척재집(惕齋集)』16권 7책과 『강산초집(薑山初集)』4권 1책이 전함. 만자백운계 부지서강구 소와송음하작晩自白雲溪 復至西岡口 少臥松陰下作산행山行춘일우중소집春日雨中小集 하야방연암장인기夏夜訪燕巖丈人記 한시사문학통사 인용 안내도
정조正租: 1752(영조 28)~1800(정조 24) 조선의 22대 왕으로 호(號)는 홍재(弘齋)다. 1. 1794년에 문체반정(文體反正)이란 문풍(文風) 개혁론을 일으킴. 2. 학문적으로 육경(六經) 중심의 남인학파와 친밀하였음. 3. 예론(禮論)에 있어 ‘임금의 예는 선비와 평민과는 다르다[王者禮不同士庶]’를 주장해 왕권 우위의 사고를 지님. 4.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實學派)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北學派) 등 여러 학파의 장점을 수용하여 문풍을 진작시켜 나감. 5. 문학의 저변 확대를 위해 중인(中人), 중심의 위항문학(委巷文學)도 적극적으로 지원함. 패관잡기와 소품체에 대해열하일기에 대한 비판패관잡기에 대해 내린 하교동악ㆍ읍취헌ㆍ석주ㆍ눌재ㆍ삼연의 시 평가박은과 박상의 시 평가어제제증정읍취..
박제가朴齊家: 1750(영조 26)~1805(순조 5)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차수(次修)·재선(在先)·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정유(貞蕤)·위항도인(葦杭道人). 1.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등과 함께 서얼이지만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학자로 평가됨. 2. 1778년 사은사 체제공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중국을 다녀와서 실학의 정수를 담은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함. 3. 문학적 재능이 있었지만 서얼 출신인 까닭에 등용되지 못함. 4. 정조 3년(1779) 규장각 검서관이 됨. 5. 저서로는 『북학의(北學議)』·『정유집(貞蕤集)』·『정유시고(貞蕤詩稿)』·『명농초고(明農草藁)』 선연동嬋娟洞수주객사愁洲客詞효좌서회曉坐書懷춘사春詞성시전도응城市全圖應하연암작율시賀燕岩作律詩월뢰잡절月瀨襍絶등백운대..
유득공柳得恭: 1748(영조 24)~1807(순조 7) 본관은 문화(文化). 후기 실학자. 자는 혜풍(惠風)ㆍ혜보(惠甫), 호는 냉재(泠齋)ㆍ냉암(泠庵)ㆍ고운당(古芸堂)ㆍ고운거사(古芸居士). 1.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에서 수학함. 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사가(四家)’로 호칭됨. 2. 서족(庶族) 출신임에도 정조의 배려로 규장각 검서(檢書)의 직책을 맡음. 3. 『냉재집(泠齋集)』, 『발해고(渤海考)』, 『사군지(四郡志)』, 『경도잡지(京都雜誌)』, 『앙엽기(盎葉記)』,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발해고서渤海考序 송경잡절松京雜絶서경잡절西京雜絶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운암파왜도가雲巖破倭圖歌관어觀魚제중성주인벽상題中城主人壁上세모음歲暮吟남강요南江謠한시사문학통사 인용 안내도
이덕무李德懋: 1741(영조 17)~1793(정조 17) 후기 실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무관(懋官), 호는 형암(炯庵)·아정(雅亭)·청장관(靑莊館)·영처(嬰處)·동방일사(東方一士)·신천옹(信天翁). 1. 서얼 신분으로 크게 뜻을 펼칠 수 없었지만 학문과 시에 뛰어남. 2. 규장각 검서관으로 정조를 보필하여 많은 책의 편찬에 관여했고, 18세기 감각적인 시풍을 주도함. 3. 홍대용ㆍ박지원ㆍ박제가ㆍ유득공과 함께 북학의 학풍의 정립. 4. 저서로는 『관독일기(觀讀日記)』·『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영처시고(嬰處詩稿)』·『영처문고(嬰處文稿)』·『예기고(禮記考)』·『편찬잡고(編纂雜稿)』·『기년아람(紀年兒覽)』·『사소절(士小節)』·『청비록(淸脾錄)』·『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앙엽기(盎葉記)』·『입연..
박지원朴趾源: 1737(영조 13)~1805(순조 5) 조선 후기의 실학자ㆍ문인.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호는 연암(燕巖)ㆍ열상외사(洌上外史). 1737년 서울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에서 출생. 장인 이보천(李輔天)의 아우인 이양천(李亮天)에게서 『사기(史記)』를 시작으로 역사서적을 통해 문장 쓰는 법을 습득함. 1752년 16세 전주 이씨 보천(輔天)의 딸과 결혼. 1754년 18세 10대 후반에 우울증에 시달려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 영역을 확대하여 18세 무렵에 「광문자전(廣文子傳)」을 지었다. 지음. 1757년 21세 「민옹전(閔翁傳)」 지음. 1759년 23세 모친 함평 이씨 별세. 1760년 24세 조부 박필균(朴弼均) 별세로 생활이 곤궁해짐. 1765년 29세 시 「총석..
이규상李圭象: 1727(영조 3)~1799(정조 23) 자(字)는 상지(像之), 호(號)는 유유재(悠悠齋)ㆍ일몽(一夢) 1. 쉰 살에 부인을 잃고 곤궁하게 오직 시와 문에 마음을 붙이면서 살았음. 2.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으로 조선 후기 문학사를 증언하며 주목을 받았지만, 이규상은 스스로를 ‘시인’으로 여김. 홍세태와 이병연이 자타가 공인하는 시인이었고, 이규상 역시 시인이었다. 3. 시의 성과는 조선적인 당풍(이종묵 교수가 만든 말)이었음.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를 보는 듯한 흥감이 있음. 전가행田家行촌요村謠인주요仁州謠 우리 한시백악시단 인용 안내도
신광수申光洙: 1712(숙종38)~1775(영조 15)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연(聖淵), 호는 석북(石北)ㆍ오악산인(五嶽山人). 1. 체제공, 이헌경 등과 함께 남인을 대표하는 문인임. 2. 충청도 한산에서 태어나 유명한 화가인 윤두서(尹斗緖)의 사위가 됨. 3. 과시(科詩)에 능했으며, 제주에 40여 일간 머물며 『탐라록(耽羅錄)』을 짓기도 함. 4. 38세에 진사급제, 53세에 음직으로 의금부도사가 되어 제주에 다녀왔으며 61세에 고령자에게 보이는 과거에 합격하여 승지 벼슬을 지냄. 5. 『석북집(石北集)』, 『석북과시집(石北科詩集)』 조천구사석응지朝天舊事石應知양피배자압신경羊皮褙子壓身輕협구소견峽口所見채신행採薪行동대東臺납월구일행臘月九日行숙미륵당宿彌勒堂잠녀가潛女歌제주걸자가濟州乞者歌송권국진가送權國珍..
이용휴李用休: 1708(숙종 34)~1782(정조 6) 자는 경명(景命), 호는 혜환재(惠寰齋) 방산가訪山家전가田家송신사군지임연천送申使君之任漣川송김탁경조윤지임문주送金擢卿朝潤之任文州이우상만李虞裳挽송정사군지임연강送鄭使君之任淵康송홍광국 영공지임서하送洪光國 令公之任西河 증정재중贈鄭在中차거기此居記한시사 인용 안내도
이익李瀷: 1681(숙종 7)~1763(영조 39)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신(子新), 호는 성호(星湖) 1. 유형원(柳馨遠)의 학문을 계승하여 조선후기의 실학을 대성함. 2. 항상 세무실용(世務實用)의 학문에 주력함. 3. 당시 폐단을 개혁하기 위하여 사색과 연구를 거듭함. 4. 그의 실학사상은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한 후대 실학자들에 영향을 끼침. 백언해발百諺解跋선희학善戱謔예양론豫讓論향악鄕樂육두六蠹전론錢論고금문장古今文章빈소선생전顰笑先生傳팔방풍八方風 해거방축海居防築 문학통사 인용 안내도
이병연李秉淵: 1671(현종12)~1751(영조27)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일원(一源), 호는 사천(槎川) 1. 백악 아래 세거하면서 가까운 곳에 살던 김창흡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같은 동네에 살던 정선과도 친했음. 2. 금강산을 소재로 한 시가 뛰어나 이병연의 시와 정선의 그림을 나란히 보면 금강산 여행을 대신할 수 있다고 할 정도임. 3. 문인 김익겸(金益兼)이 그의 시집을 가지고 중국에 갔을 때 강남의 문사들이 명나라 이후의 시와 비교할 수 없다고 극찬한 바도 있음. 4. 김창흡과 함께 조선 후기 새로운 시풍을 개척함. 5. 시인으로 이름이 알려져 아이들까지도 ‘이삼척시(李三陟詩)’라고 일컬어질 정도였는데 그가 음직으로 삼척부사를 지냈기에 붙여진 것이다. 6. 시창작을 풍부하게 하여 무려 1..
홍세태洪世泰: 1653(효종 4)~1725(영조 1)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도장(道長), 호는 창랑(滄浪)ㆍ유하(柳下). 1. 무관집안으로 역과에 응시하여 통역하는 일을 맡은 이문학관(吏文學官)의 벼슬을 지냄. 2. 양반이 아니어서 신분의 제약이 있었지만, 시로 일세를 풍미했고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의 시를 보고자 했을 때 최석정(崔錫鼎)이 숙종에게 그의 시를 추천함. 3. 김창협(金昌協) 같은 사대부 문인에게 “그대는 입에서 나오면 곧 문장을 이루는 구나”라는 칭찬을 받음. 4. 『유하집(柳下集)』이 있고, 편서로는 『해동유주(海東遺珠)』가 있다. 설초시집서雪蕉詩集序해동유주서海東遺珠序대간待姦 이숙장만李叔章挽문안聞雁염곡칠가鹽谷七歌철거우행鐵車牛行지상만흥 계유池上漫興 癸酉만흥漫興눈죽嫩竹만월대가滿月臺歌문학..
김창흡金昌翕: 1653(효종 4)~1722(경종 2) 본관은 안동(安東). 후기 학자.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1.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金壽恒)의 아들로, 성리학에 일가를 이루었지만 한시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을 받음. 2. 형제들과는 달리 당쟁의 과정에서 희생 당한 부친의 영향으로 벼슬길에 들어서지 않고 산림처사로 살며 시를 지음. 3. 정약용은 『산행일기(山行日記)』에서 김창흡의 초상화를 보고 온화하면서도 단정하고 엄숙하며 복건에 띠를 두르고 산림처사의 기상이 있다고 함. 4. 정조는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 “삼연 김창흡의 시는 예스러움에 가까워 이러한 격조가 아님이 없어 비록 중국의 명문장가와 섞어놓아도, 생각건대 혹 부끄러울 게 없다. 그러나 오히려 동악 이안눌과 읍취헌 ..
김창협金昌協: 1651(효종 2)~1708(숙종 3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삼주(三洲). 1. 김상헌의 증손이며 김수항의 아들. 이단상의 사위. 송시열을 종학하여 학문을 강론함. 2. 청풍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사직하고 영평(永平,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에 은거함. 3. 1694년 갑술옥사 이후 아버지가 신원됨에 따라 호조참의·예조참판·홍문관제학·이조참판·대제학·예조판서·세자우부빈객·지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학문에만 전념함. 4. 저서로는 『농암집(農巖集)』·『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논어상설(論語詳說)』·『오자수언(五子粹言)』·『이가시선(二家詩選)』 등이 있고, 편저로는 『강도충렬록(江都忠烈錄)』·..
홍만종洪萬宗: 1637(인조 15)∼1688(숙종 14) 자는 우해(宇海), 호는 현묵자(玄默子)·몽헌(夢軒)·장주(長洲). 1. 문재(文才)가 있었기에 벼슬을 버리고 학문과 문장에 뜻을 두어 역사·지리·설화·가요·시 등의 저술. 2. 『해동이적(海東異蹟)』·『소화시평(小華詩評)』·『순오지(旬五志)』·『시평보유(詩評補遺)』·『동국역대총목』·『증보역대총목』·『시화총림(詩話叢林)』·『동국악보(東國樂譜)』·『명엽지해(蓂葉志諧)』·『동국지지략(東國地志略)』 순오지자서旬五志自序명엽지해蓂葉志諧소화시평小華詩評시화총림詩話叢林채련곡採蓮曲차동주관어대운次東州觀魚臺韻서회書懷(홍주세)견창송근입수중見蒼松根入水中(홍만식)월야문비파月夜聞琵琶(홍석기) 문학통사 인용 안내도
김만중金萬重: 1637(인조 15)~1692(숙종 18)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숙(重淑), 호는 서포(西浦). 1637년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자인데, 부친 익겸(益兼)이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자결해 죽은 뒤 2월 10일 강화(江華)에서 서울로 가던 중 나루의 배 안에서 태어남. 1639년 3세 모부인 윤씨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함. 1650년 14세 진사(進士) 초시(初試)에 합격함. 1652년 16세 진사(進士) 초시(初試)에 시로 다시 합격함. 연안 이씨와 결혼. 1656년 20세 별시(別試)의 초시(初試)에 부(賦)로 합격함. 1662년 26세 증광(增廣) 초시(初試)에 표(表)로 합격. 1665년 29세 정시(庭試)에 장원급제.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ㆍ예조좌랑(禮曹佐郞)에 차례로 ..
김석주金錫冑: 1634(인조 12)~1684(숙종 10) 후기 학자. 자는 사백(斯百), 호는 식암(息庵). 1. 김육의 손자. 2. 『식암집(息庵集)』, 『해동사부(海東辭賦)』 기문홍조백寄問洪朝伯 고문백선서古文百選序곽장군전郭將軍傳해동사부서海東辭賦序 문학통사 인용 안내도
송익필宋翼弼: 1534(중종 29)~1599(선조 32) 중기 성리학자.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운장(雲長), 호는 귀봉(龜峰). 시호는 문경(文敬)임. 1. 신사무옥(辛巳誣獄)을 일으킨 송사련(宋祀連)의 아들. 송한필의 형 2. 신분이 서얼이며 아버지의 죄로 인해 과거를 볼 수 없어 이이(李珥)ㆍ성혼(成渾)과 교유함. 3. 무이시단(武夷詩壇)을 주도하여 당대 8문장의 한사람으로 문명(文名)을 날림. 4. 1586년에 동인(東人)들의 미움이 그에게 향했고 동인의 사주를 받은 안씨 일가는 환천(還賤)시켜 줄 것을 제소했으며 그의 형제를 비롯한 일족 70여 인이 환천됨. 5. 이후에 김장생ㆍ정철(鄭澈)ㆍ이산해(李山海)의 집을 전전하며 숨어지냄. 6. 이름을 바꿔 황해도에 이거하며 기축옥사(己丑獄事)를 일..
송시열宋時烈: 1607(선조 40)~1689(숙종 15) 후기 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송성뢰(宋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 시호는 문정(文正). 1. 김장생과 김집의 문인으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 2.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함. 3.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함. 4. 이때 송시열이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는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서술하여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함으로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됨. 5. 1658년 7월 효종의..
김득신金得臣: 1604(선조 37)~1684(숙종 10)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柏谷). 1.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노둔한 편이었으나, 아버지의 가르침과 훈도를 받아 서서히 문명을 떨친 인물임. 2. 아둔한 편으로 「백이전(伯夷傳)」을 1억 번이나 읽었고 자신의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란 이름으로 지음. 3. 시가 문집의 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시 재능이 뛰어났고 『종남총지(終南叢志)』와 같은 시화집을 엮을 정도로 안목도 갖춰졌음. 4. 『백곡집』 용호 / 용산龍湖/ 龍山소상야우瀟湘夜雨전가田家귀정문적龜亭聞笛시벽詩癖마상음馬上吟독수기讀數記증귀곡시서贈龜谷詩序와설猧說의설醫說한시사 연구한시사 인용 안내도
정두경鄭斗卿: 1597(선조 30)∼1673(현종 14)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군평(君平), 호는 동명(東溟) 1. 복고파로 문(文)은 서한(西漢), 시(詩)는 성당(盛唐)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함. 2.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이다. 14세 때 별시 초선(初選)에 합격하여 문명을 떨쳤다. 이조판서·대제학을 추증하였다. 3. 저서로는 『동명집(東溟集)』 26권이 있다. 송북평사 홍주국 겸기절도사춘장영공送北評事 洪柱國 兼寄節度使春長令公등마천령登磨千嶺단군사檀君祠기자사箕子祠휴용만이부윤등통군정携龍灣李府尹登統軍亭송풍악오산인겸기이통천국이送楓岳悟山人兼寄李通川國耳등능한음주登凌漢飮酒등능한산성登凌漢山城새상곡塞上曲백구白鷗숙봉은사宿奉恩寺 복고파를 배워라신니옹시서申泥翁詩序문학통사한시사 인용 안내도
장유張維: 1587(선조 20)∼1638(인조 16) 중기 학자.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ㆍ묵소(默所). 1.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 2. 문장에 뛰어나 신흠ㆍᆞ이정구ㆍ이식과 더불어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인 월상계택(月象谿澤) 4대가로 꼽힘. 3. 그는 양명학을 선학이라고 비의(非議)함을 변박하였으며, 천문·지리·의술·병서·그림·글씨에 능통했음. 4. 우암 송시열은 장유에 대해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와 주자를 주로 하였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만한 이가 없다”고 평가함. 5. 『계곡집(谿谷集)』, 『계곡만필(谿谷漫筆)』, 『음부경주해(陰符經註解)』 석주집서石洲集序시능궁인변詩能窮人辯회맹후반교석물사연양공신사전會盟後頒敎錫物賜宴兩功臣謝箋필설筆說현헌선생집서玄軒先生集序월사집서月沙集序백사선..
이식李植: 선조 17년(1584)~인조 25년(1647) 중기 학자.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ㆍ남궁외사(南宮外史)ㆍ택구거사(澤癯居士). 1. 당대의 이름난 학자로서 한문 4대가 월상계택(월사ㆍ상촌ㆍ계곡ㆍ택당)의 한 사람으로 꼽힘. 2. 『선조실록』의 수정을 맡았다. 3. 정조는 『홍재전서』에 “『용재집』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론 택당 이식의 문장이 있다. 그러나 체격과 운치에 있어선 이행이 택당보다 낫다[『容齋集』, 予所最好, 繼此而有澤堂文章. 然體格韻致, 容勝於澤].”라고 썼다. 4. 『택당집(澤堂集)』이 있고 편서로는 『야사초본(野史初本)』, 『두시비해(杜詩批解)』, 『찬주두시택풍당비해(纂註杜詩澤風堂批解)』, 『초학자훈증집(初學字訓增輯)』 등이 있다. 권주부만사權主簿挽詞..
이안눌李安訥: 1571(선조 4)~1637(인조 15) 본관은 덕수(德水). 중기 문인.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이행(李荇)이 증조부, 이식(李植)의 종손(從孫). 1. 18세에 진사시에 수석하며 과거를 보려 했으나 동료들의 모함으로 문학에 열중. 이때 권필, 윤근수, 이호민 등과 동악시단(東岳詩壇) 모임을 함. 1599년 급제하여 여러 지방에 부사로 근무함. 2. 주청부사로 명나라에서 정원군의 추존을 허락 받아 원종의 시호를 받아옴. 3. 일구일자(一句一字)도 허투루 쓰지 않았으며, 두보(杜甫)를 만독(萬讀)했다고 함. 그가 옮겨 다닌 지방의 민중생활사와 사회사적 자료를 담고 있음. 기세가 강하고 전고를 많이 사용한다고 함. 4. 정조는 『홍재전서(弘齋全書)』에 “동악 이안눌의 시는 갑..
권필權韠:1569(선조 2)~1612(광해군 4) 본관은 안동(安東). 중기 문인.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임. 1. 전형적인 문인 집안임. 9대조 권보(權溥)이고 6대 권근(權近)이며 부친은 권벽(權擘)임. 2. 이안눌과 함께 정철의 문하에서 수학함. 시재가 뛰어나 제술관이 되었으며, 광해군의 뜻을 거슬러, 과거에 합격했다가 취소된 사실을 듣고 분함을 참지 못해, 처남 유희분을 풍자한 「궁류시(宮柳詩)」를 지어 풍자함. 3. 이 때문에 광해군의 분노를 사서 몽둥이 찜질을 당하고 귀향 가던 도중 동대문 바깥에서 술을 마시다 객사함. 4. 정조는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 “석주 권필의 시는 비록 웅혼함은 모자라지만 하나의 맛은 매끈하고 아름다우며, 이따금 놀라게 하여 깨우쳐주는 곳이 있다. ..
허균許筠: 1569(선조 2)~1618(광해군 10) 중기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ㆍ학산(鶴山)ㆍ성소(惺所)ㆍ백월거사(白月居士). 성(筬)ㆍ봉(篈)ㆍ난설헌의 아우이다. 1569년 서울 건천동에서 허엽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김광철의 딸로서 허엽의 후처인 김씨이다. 1580년 12세 본격적으로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사략을 읽음. 1585년 17세 도사를 지낸 김대섭의 둘째딸 김씨를 맞아 장가를 듦. 1588년 20세 둘째 형 허봉(許篈)이 금강산에서 죽음. 1591년 23세 누이인 난설헌이 죽음. 『난설헌집(蘭雪軒集)』을 편찬함. 1592년 24세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함. 어머니와 부인 김씨와 함께 단천으로 감. 부인은 피란길에 죽었고 장자도 뒤따라 죽음..
신흠申欽: 1566(명종 21)~1628(인조 6)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상촌(象村)·현옹(玄翁)·방옹(放翁). 1. 처부인 이제신(李濟臣)에게 수학함. 2. 선조가 총애함. 임진왜란 때 외교문서를 잘 써서 인정받았으며, 선조의 딸과 자신의 아들이 결혼하여 승승장구함. 3. 광해군에 의해 축출됐고 인조 때 복귀했으나 곧 지병으로 사망함. 4. 『상촌집(象村集)』 민심편民心篇재용편財用篇거폐편去蔽篇현옹자찬 병서玄翁自贊 幷序광한루기廣寒樓記현옹설玄翁說신흠이 서화담을 평하다당시와 송시 고루 공부하라야언野言 병음病吟만우晩雨용만객영龍灣客詠송지봉부홍주送芝峯赴洪州갑인춘 차월사甲寅春 次月沙수기유술睡起有述문학통사한시사 인용 안내도
이정구李廷龜: 1564(명종 19)~1635(인조 13) 중기 학자.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ㆍ보만당(保晩堂)ㆍ응암(凝庵). 1. 윤근수의 문하에서 수학함. 2. 1598년에 명나라의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가 임진왜란이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 한다는 무고사건을 일으키자, 「무술변무주(戊戌辯誣奏)」를 지어 정응태를 파직시킴. 3. 장유(張維)ㆍ이식(李植)ㆍ신흠(申欽)과 함께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로 불림. 4. 이정구는 정통적인 사대부문학을 중심으로 집권층의 순정문학(醇正文學)을 대변하며, 선린외교(善隣外交)의 문학에 있어 재능을 십분 발휘함. 5. 『월사집(月沙集)』, 『대학강어(大學講語)』 석주집서石洲集序습재집서習齋集序황화집서皇華集序애한정기愛閑亭記지..
중국한시 ㄱ 尋隱者不遇(가도)度桑乾(가도)早朝大明宮呈兩省僚友(가지) ㄴ 蜂(나은) ㄷ 飮酒(도연명)雜詩(도연명)詠貧士(도연명)歸園田居(도연명)移居(도연명) 淸明(두목)贈別(두목)月(두목)秋夕(두목)山行(두목)泊秦淮(두목)宿欒城驛卻寄常山張書記(두순학)秋宿山館(두순학)二月見梅(당경) ㅁ 碧紗窓下啓緘封(무명)對花吟(무명)悟道詩(무명)詩癖(매요신)晩秋寄賈島(무가상인)夜感自遣(맹교) ㅂ 怨歌行(반첩여) ㅅ 遠浦歸帆(심덕잠)田家詩(섭이중) ㅇ 酬柳郎中春日歸楊州南國見別之作(위응물)金陵懷古(유우석)金陵懷古(유우석)送元二使安西(왕유)書事(왕유)山居秋暝(왕유)辛夷塢(왕유)明妃曲(왕안석)泊船瓜洲(왕안석)石耳(범조우)雨夜呈長官(이군옥)渡漢江(이빈)憫農(이신)行宮(원진)賈生(이상은)無題(이상은)詠雁(위승경)江樓(위승경)題天華院..
이수광李晬光: 1563(명종 18)~1628(인조 6) 중기 실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 1. 정종의 7세손. 2. 1597년 성균관대사성이 되었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명나라 서울에서 중극전(中極殿)과 건극전(建極殿) 등 궁전이 불타게 되자 진위사(陳慰使)로서 명나라를 다녀옴. 3. 1605년 조정 관료들과 뜻이 맞지 않아 안변부사로 나갔다가 이듬 해 병으로 사직하고 환향함. 4. 1607년 겨울 홍주목사로 부임했고 1611년 왕세자의 관복(冠服)을 주청하는 사절의 부사로 다시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때 유구(琉球) 사신과 섬라(暹羅: 타이) 사신을 만나 그들의 풍속을 듣고 기록함. 5. 1619년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수원에 살면서 모든 관직을 사양하다가,..
유몽인柳夢寅: 1559(명종 14)~1623(인조 1) 중기 문신.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ㆍ간재(艮齋)ㆍ묵호자(默好子). 1. 성혼(成渾)과 신호(申濩)에게 수학했지만 경박하다는 이유로 쫓겨났기에 성혼과 관계는 나빠짐. 2. 한성부좌윤ㆍ대사간 등을 지냈고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을 때 가담하지 않고 도봉산에 은거함. 3. 1623년 인조반정 때 연루되진 않았지만 관직에서 물러나 방랑생활을 하였음. 4. 『어우집(於于集)』, 『어우야담(於于野談)』 보창주도사차만리서報滄洲道士車萬里書빗소리 같은 낙엽 지는 소리증표훈사승혜묵서贈表訓寺僧慧默序봉월사서奉月沙書무진정기無盡亭記어우야담於于野談 가평산중 / 청평사유별연숙 입금강산加平山中 / 淸平寺留別淵叔 入金剛山이천 / 양양도중伊川 / 襄陽途中열서질견두어..
차천로車天輅: 1556(명종 11)~1615(광해군 7)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귤실(橘室)·청묘거사(淸妙居士). 1. 서경덕의 문하에서 수학. 세인들이 시에 능하여 한호의 글씨, 최립의 문장과 함께 송도삼절이라고 칭송하고 또 아버지 차식(車軾), 아우 차운로(車雲輅)와 함께 삼소라고 불렸다. 2. 저서로 『오산집(五山集)』·『오산설림(五山說林)』, 작품으로 「강촌별곡(江村別曲)」 위병조가낭청 희제기성벽상爲兵曹假郎廳 戱題騎省壁上간성영월루杆城詠月樓영고안詠孤雁송이제독送李提督봉황대鳳凰臺강야江夜우음偶吟 죽서루竹西樓(차운로)산행즉사山行卽事(차운로) 시능궁인변詩能窮人辯 문학통사한시사 인용 안내도
이항복李恒福: 1556(명종 11)~1618(광해군 10)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백사(白沙)·동강(東岡). 1.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군되어 이항복이나 백사보다는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죽마고우인 한음 이덕형(李德馨)과의 기지와 작희(作戱)에 얽힌 많은 이야기로 ‘오성과 한음’으로 더욱 잘 알려진 인물임. 2.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람. 3. 1571년(선조 4)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써 1575년 진사 초시에 오르고 1580년(선조 13)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가 됨. 4. 1617년 인목대비김씨(仁穆大妃金氏)가 서궁(西宮, 경운궁으로 곧 덕수궁)에 유폐되고, 이어 폐위해 ..
허봉許篈: 1551(명종 6)~1588(선조 21) 중기 문인. 자는 미숙(美叔), 호는 하곡(荷谷). 1. 유희춘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허균의 형이다. 2. 『하곡집(荷谷集)』, 『하곡수어(荷谷粹語)』 등이 있고, 편서로는 『해동야언(海東野言)』, 『이산잡술(伊山雜述)』 등이 있다. 정포성루井浦城樓란하灤河문학통사한시사 인용 안내도
임제林悌: 1549(명종 4)~1587(선조 20) 본관은 나주(羅州). 중기 문신ㆍ시인.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ㆍ풍강(楓江)ㆍ소치(嘯癡)ㆍ벽산(碧山)ㆍ겸재(謙齋)임. 1549년 11월 20일 나주 회진(會津)의 향제(鄕第)에서 후일 절도사와 훈련원 판관을 지낸 부친 임진(林晋)과 모부인 남원 윤씨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남. 1562년 14세 경주김씨 만균의 딸과 결혼 1568년 20세 자유분방한 청년기를 보내다가 처음 학문에 뜻을 두고 과거공부도 하였지만 이후 몇 차례 낙방함. 1570년 22세 이 해 가을 대곡선생 성운(成運)의 문하를 찾아감. 1571년 23세 모친상을 당해서 고향으로 돌아와 시묘살이를 함. 1573년 25세 겨울에 성운(成運)이 은거하는 속리산으로 다시 ..
최립崔岦: 1539(중종 34)~1612(광해군 4) 중기 학자ㆍ문신.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입지(立之), 호는 간이(簡易)ㆍ동고(東皐). 1. 가난한 가문에서 태어나 1555(명종 10)년에 17세로 진사가 됐고 1559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함. 2. 1594년(선조 27년) 8월에는 주청사의 부사로 세자책봉과 명나라 군대 출진을 요구하러 주청사 정사인 윤근수와 함께 부사가 되어 명나라로 감. 3. 『간이집(簡易集)』, 『주역본의구결부설(周易本義口訣附說)』 등이 있다. 십월우 / 십월망후우十月雨 / 十月望後雨조천 / 차태운통록朝天 / 次台韻通錄차문수승권운次文殊僧卷韻십칠조十七朝영희권운靈熙卷韻 용천 복몽태장하수 龍川 伏蒙台章下酬차이문순정중월운次李文順井中月韻삼일포三日浦삼월삼일 등망경루 요양성三月三..
이달李達: 1539(중종 34)~1612(광해군 4) 중기 문인. 본관은 홍주(洪州).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 1. 이첨의 후손이고 박순의 문하에서 수학. 삼당시인의 한 사람. 2. 모친이 홍기의 관기여서 서얼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평생을 불우하게 지냄. 3. 허균(許筠)이 그의 전기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을 지어 자신이 이달의 제자라 함. 4.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선 “최경창의 시는 사납고 굳세며 백광훈의 시는 고담하다. 모두 당풍의 노선을 잃지 않았으니 참으로 또한 천년의 드문 가락이다. 이달은 이들보다 조금 크다. 그렇기 때문에 최경창과 백광훈과 함께 스스로 대가를 이루었다[崔詩悍勁, 白詩枯淡, 俱不失李唐跬逕, 誠亦千年希調也. 李益之較大. 故苞崔孕白而自..
최경창崔慶昌: 1539(중종 34)~1583(선조 16) 본관은 해주(海州). 중기 시인.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 1. 일찍이 박순(朴淳)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뒤에 양응정(梁應鼎)의 문하에서도 수학함. 2.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ㆍ종성부사의 관직을 역임함. 3. 백광훈과 이달과 함께 ‘최백이(崔ㆍ白ㆍ李)’ ‘삼당(三唐) 시인’이란 칭호로 불림. 4.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선 “최경창의 시는 사납고 굳세며 백광훈의 시는 고담하다. 모두 당풍의 노선을 잃지 않았으니 참으로 또한 천년의 드문 가락이다. 이달은 이들보다 조금 크다. 그렇기 때문에 최경창과 백광훈과 함께 스스로 대가를 이루었다[崔詩悍勁, 白詩枯淡, 俱不失李唐跬逕, 誠亦千年希調也. 李益之較大. 故苞崔孕白而自成..
백광훈白光勳: 1537(중종 32)~1582(선조 15) 중기 시인.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玉峰). 본관은 해미(海美). 1. 최경창과 함께 박순(朴淳)에게 시를 배워, 16세기 후반 당시풍이 호남에 크게 떨치게 함. 2. 글씨에도 능하여 그 아들 백진남(白振南)과 함께 명성이 높음. 3. 이달(李達)과 최경창(崔慶昌)과 함께 ‘최백이(崔ㆍ白ㆍ李)’ ‘삼당(三唐) 시인’이란 칭호로 불림. 4.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선 “최경창의 시는 사납고 굳세며 백광훈의 시는 고담하다. 모두 당풍의 노선을 잃지 않았으니 참으로 또한 천년의 드문 가락이다. 이달은 이들보다 조금 크다. 그렇기 때문에 최경창과 백광훈과 함께 스스로 대가를 이루었다[崔詩悍勁, 白詩枯淡, 俱不失李唐跬逕, 誠亦千年希調也..
정철鄭澈: 1536(중종 31)~1593(선조 26) 중기 문인ㆍ정치가.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시호는 문청(文淸)임. 1536년 서울 장의동에서 영일 정씨 정유침(鄭惟沈)의 4남3녀 중 막내로 출생. 세자의 양제로 있던 맏누이의 귀여움을 받으며 궁중에서 놀며 자라남. 1545년 10세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가문이 다 피해를 입음. 아버지를 따라 남북의 유배지를 전전함. 1551년 16세 전라도 창평의 성산(星山) 자락에 정착함. 이곳에서 10년 동안을 생활하며 김인후, 기대승, 임억령 등에게 배움. 1561년 26세 진사시(進士試) 일등을 함. 1562년 27세 문과(文科) 장원함. 성균관 전적(典籍) 등을 역임함. 1563년 28세 가사 「성산별곡」을 지은..
이이李珥: 1536(중종 31)~1584(선조 17) 중기 성리학자. 덕수(德水, 지금의 황해도 개풍군 덕수리),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 시호는 문성(文成) 1. 어려서 모친에게 학문을 배움. 8살에 파주 율곡리의 화석정에 올라 지은 시로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음. 2. 9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해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림. 3. 이이는 사회체제와 신분질서를 다시 주자학적 세계관으로 되돌리되 점진적인 제도 개혁으로 질서의 안정을 도모하려 함. 4. 이이의 사상은 17세기 서인 노론(老論)계에 계승됨. 5. 『율곡집(栗谷集)』, 『성학집요(聖學輯要)』, 『격몽요결(擊蒙要訣)』, 『동호문답(東湖問答)』 풍악증소암노승 병서楓嶽贈小菴老僧 幷序정언묘선서精言妙..
성혼成渾: 1535(중종 30)~1598(선조 31)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호원(浩原), 호는 묵암(默庵)·우계(牛溪). 1. 성수침(成守琛)의 아들로 가학을 계승하고 이황(李滉)을 사숙함. 2. 1551년 생원ㆍ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병이 나서 복시에 응하지 않았고 20살 아래의 이이(李珥)와 벗이 되었고 사단칠정(四端七情)을 토론한 것으로 유명함. 시에서 일가를 이룸. 3. 1584년 이이가 죽자 서인(西人)의 영수가 되어 동인(東人)의 공격을 받기도 함. 4.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천에 머물던 광해군의 부름을 받아 의병장 김궤(金潰)를 도우며 활약함. 5. 1594년 일본과의 강화를 주장하는 유성룡(柳成龍)ㆍ이정암(李廷馣)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샀고 걸해소(乞骸疏)를 올려 파주에..
황정욱黃廷彧: 1532(중종 27)~1607(선조 40) 중기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 시호는 문정(文貞)임. 1. 젊은 시절 엘리트 코스를 밟아 대제학이 되는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손녀가 선조의 아들 순화군과 혼인하여 외척의 지위까지 누림. 2. 임진왜란 때 순화군을 모시고 함경도로 피신했다가 국경인(鞠景仁)이 왜적과 내통하는 바람에 토굴에 감금되었고 항복 강요를 받았기에 거짓 항복글을 쓰고 한글로는 사정을 밝히는 글을 썼지만 한글은 사라져 길주로 유배됨. 3. 해배된 후엔 노량진 근처에 살며 좌절과 울분의 시기를 보냄. 4. 『지천집(芝川集)』 송인부수안군送人赴遂安郡솔점 기향중제수효率占 寄鄕中諸秀孝차이성동헌운次利城東軒韻증오음 / 차기윤자앙贈梧陰 / 次寄尹..
노수신盧守愼: 1515(중종 10)~1590(선조 23) 중기 학자ㆍ문신.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ㆍ이재(伊齋)ㆍ암실(暗室)ㆍ여봉노인(茹峯老人)임. 1. 이연경(李延慶)의 사위로 그에게 수학. 과거에 급제한 이래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진도에서 19년 동안 유배살이를 했다. 2. 선조 즉위한 후 유배에서 풀려나와 대제학을 지내고 영의정까지 이름. 3. 주자학과 양명학에도 일가를 이루었지만, 시에 매우 뛰어나 정사룡, 황정욱과 함께 16세기 관각문학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평가됨. 4. 정조(正祖)의 『홍재전서(弘齋全書)』에는 “소재 노수신은 귀양살이 한지 19년에 많이 『노자』와 『장자』의 책을 읽어 많이 갑작스럽게 깨우친 곳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음운의 원대함과..
정유길鄭惟吉: 1515(중종 10)~1588(선조 21)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길원(吉元), 호는 임당(林塘)·상덕재(尙德齋) 1. 저서로 『임당유고(林塘遺稿)』 사제극성賜祭棘城제석개시첩題石介詩帖소화시평 인용 안내도
조식曺植: 1501(연산군 7)~1572(선조 5) 중기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1. 성혼(成渾)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성리대전(性理大全)』을 25세 때 읽고 감명을 받아 성리학에 전념하게 됨. 2. 26세 때 부친상을 당한 후 고향으로 귀향했고 30세 때 탄동(炭洞)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정진함. 3. 45세 때 모친상을 당한 후 계복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짓고 제자교육에 힘씀. 4. 1555년에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사직함. 5. 이황과 함께 영남 사림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함. 6. 『남명집(南冥集)』, 『남명학기류편(南冥學記類編)』 등이 있다. 천왕봉天王峯욕천浴川무제(우세산람진)無題(雨洗山嵐盡)무제(노야린공로)..
이황李滉: 1501년(연산군 7)~1570년(선조 3) 중기 성리학자.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ㆍ도수(陶叟)ㆍ퇴도(退陶)ㆍ청량산인(淸凉山人). 1. 숙부 이우에게 수학하고 특별한 사승관계 없음. 2. 주자의 서간문(書簡文)을 초록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20권을 평생을 바쳐 편찬했으며 정주학(程朱學)을 수용하여 독자적으로 발전시켰고 이(理)를 보다 중시하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정립함. 3. 퇴계의 학문과 사상은 이후에 영남이나 근기(近畿) 지방을 중심으로 계승됨. 4. 『퇴계집(退溪集)』(內集ㆍ別集ㆍ續集), 『자성록(自省錄)』, 『사서석의(四書釋義)』, 『삼경석의(三經釋義)』, 『역학계몽전의(易學啓蒙傳疑)』, 『주자서절요의(朱子書節要記疑)』, 『송계원명리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
정사룡鄭士龍: 1491(성종 22)~1570(선조 3)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음(湖陰). 1. 명문가의 후손으로, 조부 정난종은 판서를, 숙부 정광필은 영의정을 지냄. 2. 이행, 소세양과 함께 중종대와 명종대 관각을 이끎. 3. 역대 시인 중에서 율시를 가장 잘 지었던 사람으로 흥이 나는 대로 쓰지 않고 시상을 안배하고 공교롭게 하기 위해 거듭 고민하고 썼음. 소식과 황정견을 배웠기에 그의 시는 조직이 아름다움. 4.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선 “각각 명가로 떨쳤지만 치우친 지방의 기운과 습속의 얽매임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유려한 데로 치닫지 않으면 간혹 조직하는 데서 잃었다. 호음 정사룡은 기이하고 예스러우며 가파르고 기발하여 한 번 마르고 얽매인 기운을 씻어냈으니, ..
서경덕徐敬德: 1489(성종 20)~1546(명종 1) 자는 가구(可久), 호는 화담(花潭)ㆍ복재(復齋). 1. 한국 유학사상 본격적인 철학문제를 제기하고, 독자적인 기철학(氣哲學)의 체계를 완성함. 2. 당시 유명한 기생 황진이와의 일화가 전하며, 박연폭포·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림. 3. 『화담집(花潭集)』 술회 / 독서述懷 / 讀書대흥동大興洞제허백당 재해주題虛白堂 在海州산거山居 태허설太虛說 한시사 인용 안내도
김정金淨: 1486(성종 17)~1521(중종 16) 자는 원충(元沖), 호는 충암(冲庵)ㆍ고봉(孤峰). 1. 1507년 장원으로 급제해 여러 벼들을 거쳐 1514년에 순창군수가 됨. 2. 1514년에 중종 때 억울하게 폐위된 왕후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고 폐위의 주모자 추최(追罪)를 상소했다가 보은에 유배됨. 3. 1516년 석방되어 여러 관직을 맡음.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극형에 처해졌으나 유배형으로 감형되어 진도와 제주로 유배 갔고,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사됨. 4. 조선 초기 문단이 대부분 송시풍을 따랐지만 그는 당시풍에 흥취가 높은 작품을 제작했음. 5. 저서로는 『충암집(冲菴集)』의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는 유명함. 증석도심贈釋道心영로방송詠路傍松영해송詠海松제총석정題叢石亭견회 경신삼월상순..
박은朴誾: 1479(성종 10)~1504(연산군 10)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挹翠軒). 1. 15세에 신용개(신숙주 손자)의 사위가 되었고 18살 때 병과 급제로 관리로 나감. 2. 23세에 홍문관 수찬이 되어 무오사화 이후 연산군의 비호를 받던 유자광(柳子光)과 성준(成俊)을 탄핵하다가 ‘사사불실(詐似不實)’이라는 죄목으로 파직되었음. 3. 26세 때에 지제교로 복직되었으나,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6월에 효수됨. 4. 정조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우리 동방의 시학은 대대로 사람이 드물진 않았다. 그러나 읍취헌 박은의 천성과 눌재 박상의 침울함이 다 성대한 세상의 국풍, 대아, 소아의 남은 것으로 후세의 사단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에 비교할 게 아니다’라고 하시고, 두..
이행李荇: 1478(성종 9) ~ 1534(중종 29)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ㆍ창택어수(滄澤漁叟)ㆍ청학도인(靑鶴道人). 1. 홍문관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독서당의 사가독서에 선발될 정도의 엘리트로 개혁을 주도한 신진사류임. 2. 갑자사화에 걸려 목숨을 잃을 뻔 했으며, 부지한 후엔 거제도로 끌려 가 염소를 치는 노비가 됨. 3. 중종반정 후 복권되어 판서의 지위까지 올랐음. 4. 정조는 『홍재전서』에서 “『용재집』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론 택당 이식의 문장이 있다. 그러나 체격과 운치에 있어선 이행이 택당보다 낫다[『容齋集』, 予所最好, 繼此而有澤堂文章. 然體格韻致, 容勝於澤-].”라고 말했다. 5. 허균은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서 “우리나라의 시는 마땅히 용재 이행..
박상朴祥: 1474(성종 5)~1530(중종 25)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 시호는 문간(文簡) 1. 조카 박순(朴淳)과 함께 시명이 높았으며, 16세기 호남시단을 이끌었다. 2. 사림의 정치를 지지했기에 사장파(詞章派)가 득세한 중종 연간에 외직을 전전했기에 시엔 강개함이 배어 있음. 3. 성현(成俔)ㆍ신광한(申光漢)ㆍ황정욱(黃廷彧)과 함께 서거정(徐居正) 이후 사가(四家)로 불림. 4. 정조의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는 “‘우리 동방의 시학은 대대로 사람이 드물진 않았다. 그러나 읍취헌 박은의 천성과 눌재 박상의 침울함이 다 성대한 세상의 국풍, 대아, 소아의 남은 것으로 후세의 사단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에 비교할 게 아니다’라고 하시고, 두 문..
남효온南孝溫: 1454(단종 2)~1492(성종 23)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 본관 의령. 1. 김종직(金宗直)과 김시습(金時習)의 문하에서 수학함. 2. 세조가 물가로 옮기게 한 현덕왕후의 능인 소릉(昭陵)의 복위를 상소함. 임사홍(任士洪)ㆍ정창손(鄭昌孫)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됨 3. 세상을 등지고 가난 속에서 농사 지으며 생활하다가 삶을 마침. 4. 사후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인데다가 폐비 윤씨의 복위를 주장했다고 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됨. 5. 『추강집(秋江集)』,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상사성남上巳城南서강한식西江寒食과간성릉過杆城陵영현암 몽자당靈顯庵 夢慈堂유압도遊鴨島제성거산원통암창벽題聖居山元通..
유호인兪好仁: 1445(세종 27)~1494(성종 25) 본관 고령(高靈). 자는 극기(克己), 호는 임계(林溪)ㆍ뇌계(㵢溪). 1.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2. 1462년(세조 8)에 생원이 되고, 1474년(성종 5)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함. 3. 1486년에 검토관(檢討官)을 거쳐 이듬해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함. 4. 1490년『유호인시고(兪好仁詩藁)』를 편찬하여 왕으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받음. 5. 1494년 장령을 거쳐 합천군수로 재직 중 병사함. 6. 장수의 창계서원(蒼溪書院),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제향됨. 登鳥嶺 / 登鳥岾등조령 / 등조점제사근역정題沙斤驛亭우열삼국사偶閱三國史우열삼국사偶閱三國史문학통사 인용 안내도
성현成俔:1439(세종21)~1504(연산군10)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慵齋)ㆍ부휴자(浮休子)ㆍ허백당(虛白堂). 1. 벼슬살이에 큰 부침이 없었던 전형적인 관각 문인임. 2. 무오사화로 죽은 후에 부관참시되는 끔찍한 형벌을 받음. 3. 『허백당집(虛白堂集)』, 『용재총화(慵齋叢話)』, 『경륜대궤(經綸大軌)』 등과 공저로 『악학궤범(樂學軌範)』이 있다. 대우제청주동헌帶雨題淸州東軒벌목행伐木行전가사田家詞궁촌사窮村詞 연경궁고기 延慶宮古基 월산대군시집서月山大君詩集序문변文變부벽루기浮碧樓記풍소궤범서風騷軌範序흑우설黑牛說타농설惰農說촌중비어서村中鄙語序십잠十箴용재총화慵齋叢話 문학통사한시사 연구 인용 안내도
김시습金時習: 1435(세종 17)~1493(성종 24)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ㆍ동봉(東峯)ㆍ청한자(淸寒子)ㆍ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임. 1435년 서울의 성균관 북편 마을에서 태어남. 1439년 5세 세종이 승정원으로 불러 재주를 시험하고 갸륵히 여겼으며 온 나라 사람들이 ‘오세(五歲)’라 부름. 1449년 15세 어머니를 여의고 강릉 외가에 내려가 무덤을 지킴. 1454년 20세 외숙모마저 사망하자 다시 상경함. 부친이 중병으로 눕자 계모를 맞이함. 훈련원(訓鍊院)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맞아 장가듦. 1455년 21세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 들어가 독서하던 중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사건을 접함. 그 후 10년 동안 ..
김종직金宗直: 1431(세종 13)~1492(성종 23) 자는 계온(季昷)ㆍ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점필(佔畢): ‘책의 글자만 읽을 뿐 그 깊은 뜻은 알지 못함을 이르는 말’로 쓰이지만 원랜 책을 의미한다. ‘점(佔)’을 ‘보다[視]’로 훈하기도 하나, ‘대쪽[笘]’으로 훈하는 것이 맞다. 다 죽간의 책들이다. ‘필(畢)’도 ‘죽간[簡]’을 의미한다. 이 ‘점필’이라는 단어는 우리나라에서 조선 사람의 종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밀양사람 김종직의 호로서 유명하다. 김종직 문하에서 김굉필이 나왔고, 김굉필 문하에서 조광조가 나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김종직이 ‘점필’이라는 단어가 매우 부정적으로 쓰인 사례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는데 왜 하필 호를 ‘점필재’라고 했는지 알 수가 없다. 김종..
성간成侃: 1427(세종 9)~1456(세조2)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화중(和仲), 호는 진일재(眞逸齋). 1. 성임(成任)의 아우이고 성현(成俔)의 형으로, 문벌을 자랑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재능을 보였다. 2. 유방선의 문인으로 27세에 급제한 뒤 집현전에 들어가 문명을 떨치다 30세에 요절함. 3. 『진일재집(眞逸齋集)』 어부漁父여옥당학사 유성남與玉堂學士 遊城南도중途中라홍囉嗊채련곡採蓮曲염양사艶陽詞노인행老人行아부행餓婦行궁사사시宮詞四時수양산首陽山용부전傭夫傳 문학통사한시사 인용 안내도
강희맹姜希孟: 1424(세종 6) ~ 1483(성종 14)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ㆍ운송거사(雲松居士). 1. 강희안의 아우임. 2. 『사숙재집(私淑齋集)』, 『금양잡록(衿陽雜錄)』, 『촌담해이(村談解頤)』 차운김태수영전가次韻金太守詠田家병여 음성사절病餘 吟成四絶매梅차풍전역운次豐田驛韻송김선산지임送金善山之任명명풍우교冥冥風雨交 동인시화서東人詩話序훈자오설병서訓子五說幷序도자설盜子說승목설升木說촌담해이村談解頤 문학통사한시사 인용 안내도
강희안姜希顔: 1418(태종 18)~1464(세조 10) 자는 경우(景遇), 호는 인재(仁齋). 1. 그의 시는 중국의 위응물(韋應物)과 유종원(柳宗元)과 같다는 평이 있고, 글씨는 중국 진나라의 왕희지(王羲之)와 원나라 조맹부(趙猛頫)에 비견되기도 함. 2. 『양화소록(養花小錄)』이 있다. 채자휴구화 작 청산백운도蔡子休求畵 作 靑山白雲圖제화산수題畵山水사우정영송四友亭詠松등양주루원登楊州樓院문학통사 인용 안내도
서거정徐居正: 1420(세종 2)∼1488(성종 19)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자원(子元)ㆍ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ㆍ정정정(亭亭亭). 1. 대학자 권근(權近)의 외손이라는 후광에다 자신의 탁월한 재능으로 평생 호화롭게 살았음. 2. 유배 한 번 가지 않았고, 임금이 곁에 두고자 하여 외직조차 맡지 않고 승승장구함. 3. 문학적으로는 15세기 관학(官學)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훈신(勳臣)의 입장을 반영함. 4. 『사가집(四佳集)』, 『역대년표(歷代年表)』, 『동인시화(東人詩話)』,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필원잡기(筆苑雜記)』, 『동인시문(東人詩文)』 등이 있고, 공동 편찬서로는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인문(東文選)』, 『경..
성삼문成三問: 1418(태종 18)~1456(세조 2)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근보(謹甫)ㆍ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1. 1435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 식년 문과에 급제했으며 1447년에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다시 급제함. 2. 집현전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ㆍ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승진함. 3.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킨 황보인(皇甫仁)ㆍ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성삼문에게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의 칭호를 내렸는데 이를 사양하는 소를 올림. 4.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 예방승지가 됨. 5. 그해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위협하며 선위를 강요하자 단종복위운동을 계획하였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