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무기가 된 종교②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바울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는 박해를 받지 못했을 테고 세계 종교로 자라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로마는 전통적으로 다른 종교에 관용적이었으나 그리스도교가 크게 세력을 키우자 아연 긴장하고 3세기부터는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교세가 확장될수록 탄압의 강도도 심해졌다. 무릇 종교란 탄압이 심할수록 더욱 확산되게 마련이다. 순교자의 수가 늘어날수록 그만큼 그리스도교의 기반은 공고해졌다【당시 순교자들은 후대에 ‘그리스도교 세상’이 되었을 때 성인으로 존경받게 된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은 오늘날 서양인의 이름에도 전승되었다. 편의상 영어식 이름만 살펴보면, 비틀스 멤버들의 이름인 존, 폴, 조지를 비롯해 피터, 지미, 조셉, 톰, 스티븐, 그레그, 샘, 앤디, 데이비드, 크리스, 앤터니, 니컬러스, 저스틴, 패트릭, 메리, 제인, 앤, 루시, 실비아, 캐서린 등등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남녀의 이름들은 극히 많다. 서양 이름의 또 다른 계통은 중세의 왕들에게서 비롯되었다. 헨리(앙리, 하인리히, 엔리케), 찰스(샤를, 카를, 카를로스), 윌리엄(빌헬름, 기욤, 빌), 에드워드(에두아르, 에드바르트, 에디), 리처드(리하르트, 리치), 앨프레드(프레드, 프레디) 등의 이름들이 그것이다】. 교회와 사제, 주교, 부제 등의 교직도 생겨났다. 초기의 어려움은 순전히 신앙의 힘만으로 이겨내야 했으나 그다음부터는 조직으로 버틸 수 있게 되었다. 바야흐로 그리스도교는 이제 세계 종교로서 첫발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박해는 끊이지 않았다.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칙령을 내려 그리스도교도들을 대량 학살했는데, 이것이 최대의 박해로 기록된 사건이다. 자신을 살아 있는 신이라고 주장하고 전통 종교의 최고신인 유피테르가 현신한 존재라고 선언한 디오클레티아누스로서는 그리스도교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로마 제국을 위해서는 더 공적이 컸던 그가 대제라는 호칭을 콘스탄티누스에게 빼앗긴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로부터 불과 10년 만에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권력투쟁의 후발 주자로서 위험한 승부를 벌이고 있었던 콘스탄티누스는 신흥 세력에 의지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늘에서 십자가를 목격한 사건은 그 목적을 위해 조작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밀라노 칙령은 고도의 정치적 게임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측근들 중에 그리스도교도가 많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정작 그 자신은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았다. 또한 그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교에 관심이 크고 우호적이었으면서도 다른 종교들에 관해서도 관용을 취했다. 어쨌든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만큼 그는 이 신흥 종교를 널리 전파하기 위한 여러 가지 후속 조치를 시행했다. 성직자가 행정상의 의무에서 면제된 것이라든가, 교회 건축이 활성화된 것이 그런 예다. 하지만 초기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공헌은 따로 있었다. 밀라노 칙령에 뒤이어 그의 두 번째 종교적 공로는 단독 황제에 오른 이듬해인 325년에 개최한 니케아 공의회였다.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수백 년에 이르자 자연히 종파도 여럿이 생겨나게 되었다. 어려운 시절에는 종파의 대립이 두드러지지 않았으나 오히려 공인을 받은 뒤부터 종파들 간에 첨예한 대립이 생겨났다. 특히 4세기 초의 사제인 아리우스(Arius, 250년경~336)는 신과 그리스도가 본질적으로 같지 않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신처럼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특정한 시대에 신이 세계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창조한 존재라는 주장이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구약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예언자 급의 ‘인물’일 뿐 신과 혈통적 관계는 없다는 것이었다.
인용
연표: 선사~삼국시대
연표: 남북국 ~ 고려
연표: 조선 건국~임진왜란
연표: 임진왜란~조선 말기
연표: 대한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