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들의 사정⑥
게다가 베네치아와 제노바 등 이탈리아의 상인들에게 지중해 무역권을 빼앗겨 국가 재정이 끊임없이 악화되는 가운데서도 고질적인 권력의 불안은 여전했다. 그나마 소아시아라도 제국의 영토로 계속 남아 있었다면 사정이 나았을 것이다. 시리아를 이슬람에 잃은 것은 이미 과거지사,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해도 소아시아만은 유지하던 비잔티움 제국이었다. 그러나 늙고 병든 사자 앞에 동방에서 혈기왕성한 젊은 수사자가 도전해왔다. 바로 튀르크의 오스만 제국이었다. 셀주크튀르크가 몽골에 의해 멸망하면서 생겨난 힘의 공백을 틈타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난 오스만튀르크는 1326년 소아시아를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플 바로 코앞에 있는 부르사를 수도로 삼았다. 비잔티움 제국은 다시 도전해온 새로운 이슬람 세력의 침략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손을 쓰지 못했다.
썩어도 준치라는 생각이었을까? 쇠약해진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경계심으로 오스만 제국은 직접 공략에 나서지 않고 우회 전략을 택했다. 먼저 졸개들을 제압하고 나서 우두머리와 한판 붙겠다는 것이다.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반까지 오스만 제국은 코소보에서 세르비아를, 니코폴리스에서 우크라이나를, 바르나에서 불가리아를 각각 물리쳤다. 이어 비잔티움 제국의 텃밭인 그리스마저 점령하니 이제 비잔티움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오스만 세력이 사방을 포위해올 때 비잔티움 황실에서는 서둘러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당시는 아비뇽 교황청 시절이었으므로 교황도 제 코가 석 자였다. 비잔티움 황제는 동서 교회의 통합을 조건으로 내걸었지만, 그것은 300년 전에나 관심을 끌 법한 조건이었다【당시 서유럽에서는 이미 한물간 동서 교회의 통합보다는 그리스도교권이 이슬람 세력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큰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비뇽의 교황은 실권을 잃었고, 또 프랑스와 영국은 백년전쟁의 와중에다 페스트의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으므로 지원에 나설 여력이 없었다. 설령 여력이 있었다 해도 비잔티움 측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동서 교회의 분열은 10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면서 거의 다른 종교처럼 변했기 때문이다】.
인용
연표: 선사~삼국시대
연표: 남북국~고려
연표: 조선 건국~임란
연표: 임란~조선 말기
연표: 대한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