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 쒀서 개 준 혁명②
이듬해인 1795년 국민공회는 새로 헌법을 제정해 위기를 타개하고자 했다. 단원제를 양원제로 바꾸고, 다섯 명의 총재를 두어 권력을 분담하도록 하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헌법을 바탕으로 하여 구성된 총재정부 역시 온건 공화파에 못지않게 철저히 무능했다【총재정부는 처음으로 의회가 아닌 행정부 형태를 취한 기관이다(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정부는 조직으로서의 정부라기보다는 구호적인 성격이 강했다). 혁명으로 공화정이 수립된 것은 1791년 헌법 제정 때였으나 실제로 공화정에 걸맞은 행정부는 없었고 의회가 정부 기능을 수행했다. 몽테스키외가 3권 분립을 주장한 지 50년이 지나고서도 아직 행정부의 개념은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생긴 프랑스 최초의, 나아가 유럽 최초의 행정부는 정부의 명패만 남겼을 뿐 제 기능은 하지 못했다】. 자코뱅의 잔존 세력은 물론이고 헌법 개정을 주도한 세력조차 정부 비판에 앞장설 정도였다. 군대의 힘을 빌려 그럭저럭 양측의 공세를 차단하면서 연명하던 총재정부는 1799년 11월 마침내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사태를 맞았다. 정부의 물리력인 군대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 주역은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프랑스의 전쟁 영웅으로 떠오른 코르시카 출신의 ‘촌놈’ 나폴레옹(Napoleom Bonaparte, 1769~1821)이었다.
보잘것없는 신분의 나폴레옹이 처음으로 명성을 얻은 것은 1793년 영국과 에스파냐 함대가 봉쇄하고 있던 툴롱 항구를 탈환한 공로 덕분이었다(국제적으로 고립된 채 유럽 각국과 힘든 전쟁을 수행하던 프랑스 국민들은 영웅을 고대하고 있었고, 그 영웅은 전장에서 탄생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 공로로 나폴레옹은 20대의 나이에 여단장으로 승진했고, 1796년에는 취약한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었다(그가 젊은 나이에 초고속 승진한 데는 혁명 이후 경험 많은 장군이 대거 국외로 탈출해 군 지휘 계통에서 공백이 생겨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에게 주어진 프랑스군은 특히 오합지졸이었고 장비도 엉성했으나 나폴레옹은 200년 전 한반도의 이순신이 그랬듯이 1년 동안 거의 모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무찌르는 괴력을 선보였다. 1797년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프랑스는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통해 롬바르디아를 오스트리아로부터 양도받고 벨기에를 영토에 포함시켰다.
▲ 혁명의 끝 흥미진진한 영화일수록 끝은 시시한 경우가 많다. 테르미도르의 반동은 프랑스 혁명을 용두사미로 만들어버렸다. 공화정을 당면 목표로, 보편적 인권을 궁극적 이념으로 내걸었던 프랑스 혁명은 결국 소수 반동 세력의 준동으로 삽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그림은 반동파에 의해 로베스피에르가 체포되는 장면이다.
인용
연표: 선사~삼국시대
연표: 남북국 ~ 고려
연표: 조선 건국~임진왜란
연표: 임진왜란~조선 말기
연표: 대한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