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신기하게도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그게 혹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아니, 단순히 생각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이 원래 그러니, 이걸 문제라 할 수는 없어’라고 합리화까지 하게 된다.
▲ 교육을 할 때 고민해봐야 하는 건 나의 교육이 폭력이진 않나 하는 점이다.
일상에서 ㄹ을 뺄 수 있는 용기와 생각할 수 있는 저력
사회의 온갖 부조리한 일들엔 이와 같은 사고패턴이 작용하고 있다. ‘부조리하다→그런데도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 →사회 자체가 원래 그렇다→그러니 누군가 ‘부조리하다’고 말할 경우라도 그걸 말한 사람만 이상한 사람일 뿐이다’라고 생각하는 패턴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생각없음’이란 말로, 강풀은 『26년』에서 전두환을 경호하는 마상열이란 실장의 말을 빌려 “이 분이 잘못된 것이라면!! 나의 모든 과거가 잘못된 것이기에!!! 이분은 보호 받아야만 한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때의 반응이지, 문제가 생기고 나면 그때야 비로소 생각을 하게 되며, 자신이 얼마나 부조리하고 왜곡된 현실에 백기투항하며 살아왔는지 알게 된다. 하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듯, 그때 아무리 뒤늦은 후회를 한다고 한들, 이미 늦거나 모든 상황은 벌어진 뒤이기 때문에 소용없게 된다.
그러니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부랴부랴 생각하고 고민할 게 아니라, 그 전에 아무런 문제도 없고 너무도 평이한 일상이라 할지라도 ‘일상에서 ㄹ을 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고, ‘생각해보려는 저력’이 필요하다. 어찌 보면 민들레 읽기모임에 모인 사람들은 ‘일상에서 ㄹ을 뺄 수 있는 용기’와 생각해보려는 저력이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 할 것 없이 재빠른 처방을 찾아 상담소를 전전하고, 저명한 학자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식의 싸디 싼 조언을 들으러 다닐 때에도, 이들은 처방이 아닌 서술을 하려하고 이렇게 모여 의견을 나누며 생각을 공유하려 하니 말이다.
저번 후기에서 ‘아이들은 놔둬도 잘 큰다’는 믿음이 있음에도,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시기가 되자 그런 믿음이 흔들렸다는 풍경님의 얘기를 했었다. 이건 누구나 현실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 [습지생태보고서]의 명장면이다. 싸구려 인문학으로 수많은 청년을 농락한 이 책을 냄비받침으로 쓴다.
위험해야 안전하고, 위험해야 성장한다
아이들을 믿고 지켜보기 위해선 ‘스스로 헤쳐 나갈 것이다’란 믿음과 ‘실패해도 괜찮아’라는 태연한 마음이 필요하다.
풍경님 둘째 아이의 경우 한글을 제대로 배우지 않고 초등학교에 들어감으로, 배우는 과정 속에 상처를 받을까, 아이들에게 놀림 받지나 않을까 걱정된다고 했다. 맞다, 남들은 다 할 수 있는데 자기만 하지 못하면 ‘남보다 뒤처졌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상할 것이고, 친구들의 놀림에 위축될 것이다. 그때 오히려 “친구들이 앞서서 미리 배워왔기 때문에 잘하는 것뿐이지, 오히려 아무 것도 모르는 네가 자연스러운 거야”라고 이야기해주며 힘을 실어줄 수 있다면, 오히려 교사가 ‘한글을 떼지 않고 1학년에 진학하는 게 당연하다’고 편들어주고 가르쳐줄 수 있다면, 아이는 그걸 상처로 여기지 않고 발분하며 적극적으로 헤쳐 나가려 할 것이다.
누군가가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두고 대비해주고 해결해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문제를 겪기도 전해 해결되더라도 아이는 그에 대해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상황에 부딪혀 고민해볼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자신의 힘으로 난관에 부딪혔을 때 해결해나간 경험이야말로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교육과정이자, 역동적인 배움의 장이라 감히 말할 수 있다. ‘놀이터, 위험해야 안전하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핍이 없는 경험, 위험성이 완전히 사라진 여행, 그런 식으로 체계화된 프로그램에선 사람이 결코 성장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와 달리 안전함과 위험 사이에서 모험해보고, 결핍이 느껴질 때 그걸 완화하려 고민하고 노력할 때, 아이는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
▲ 1980년 포구에서 노는 아이들. 지금은 볼 수 없는 광경.
장자에게 듣는 타자성에 대한 이야기
물론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선 신경이 쓰이고, ‘빤히 실패가 보이는데 그걸 그냥 놔둬요?’라는 생각도 들며, 저러다 상처를 심하게 받아 아예 도전조차 하지 않으면 어쩔까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마음조차도 어찌 보면 ‘실패를 두려워하는 나의 마음’이 작용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아이의 실패를 운운하지만, 그 본질 속엔 ‘실패해선 안 돼’라는 나의 마음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타자와 만나는 일은 내가 감추어왔던 나의 부정적인 감정들과 대면하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린 무의식중에 나의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관심이란 미명으로 아무렇지 않게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나도 모르는 새에 나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계속 주다보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될까? 이걸 알기 위해선 소통의 철학자인 『장자莊子』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옛적에 바닷새가 노나라 대궐에 날아들었어. 노나라 제후가 궐 안에 데려와 술자리를 베풀고 구소의 음악(한국의 정악 or 현대의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며, 가축을 잡아 음식을 제공하며 정성껏 보살폈지. 그러나 새는 곧 어지러워하며 근심과 비탄에 잠겨 감히 고기 한 점 먹지 않았고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다가 삼일 만에 죽고 말았던 거야.
이것은 인간을 대접하는 방법으로 새를 대접했던 것이지, 새를 대접하는 방법으로 새를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昔者海鳥止於魯郊, 魯侯御而觴之于廟, 奏九韶以爲樂, 具太牢以爲膳. 鳥乃眩視憂悲, 不敢食一臠, 不敢飮一杯, 三日而死. 此以己養養鳥也, 非以鳥養養鳥也. 『莊子』 「至樂」3
노나라 대궐에 들어온 바닷새가 있다. 바닷새는 귀한 새였나 보다. 그래서 제후는 사신을 대접하듯 최고의 음식과 최고의 음악, 최고의 보금자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가 생각하는 최상의 대접일 뿐이지, 결코 타자를 배려한 대접은 아니다. 제후는 어디까지나 ‘나와 같으려니’하는 마음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주더라도 먹을 수가 없었고, 아무리 좋은 음악을 연주해주더라도 흥겹게 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 결국 3일 만에 죽고 만 것이다.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 하는 건 단순히 새와 인간의 종이 다르냐 같냐는 점이 아니라, 타자성을 제거하려 하면 할수록 그 개체는 죽어간다는 점이다. 새는 인간이 차려준 음식을 먹지 못할지라도 물까지 못 마시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바닷새는 물조차도 마시지 못하다가 결국 3일 만에 죽어버린 것이다. 그건 곧 타자성을 무시하고 자기와 같기를 주장하거나, 자기가 옳다는 것만을 맹목적으로 강요할 경우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 [구렁덩덩새선비]의 한 장면. 한미경쌤은 구렁이의 허물을 태운 행위를 그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라 풀었다.
믿고 지켜볼 수 있는 힘은, 타자성의 인정에서부터
장자가 생각하는 타자란 생각이나 생활 방식이 달라서, ‘나와 같으려니’하는 생각이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즉 채식주의자에게 정성껏 대접한답시고 1등급 한우로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줘 봤자, 그건 하나의 폭력이지 대접일 순 없는 것과 같다. 그러니 대접하는 사람 입장에선 상대방을 생각하여 최대한으로 배려했다고 여길지라도, 그건 대접 받는 사람 입장에선 착각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 대접하는 사람의 기분이 좋아지는 만큼이나 반비례하듯 대접받는 사람은 불편해지고 그 시간이 힘겹기만 하다.
이에 대해 장자는 “인간을 대접하는 방법으로 새를 대접했던 것이지, 새를 대접하는 방법으로 새를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以己養養鳥也, 非以鳥養養鳥也.)”며 확실히 결론짓는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자기의 방식이 옳다고 확신한 나머지, 타자를 고려하지 않고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타자에겐 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는 얘기다. 그러니 타자가 그런 대접을 받으면 받을수록 정작 자신이 여태껏 지켜왔던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는 잃어버리게 되고 그에 따라 정신적인 죽음에 이르게 된다.
▲ 이것을 일반인에게 대접하면 엄청 만족해할 것이다. 하지만 채식주의자에게 이렇게 대접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장자의 말을 은유라고만 봐서는 곤란하다. 현재 한국사회에선 이런 상황을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돼지엄마’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고, ‘평생 영어실력 초등학교 때 결정된다’는 따위의 말들이 만들어진 것만 봐서도 이런 상황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도 모르는 새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대했던 것이지, 아이들이 바라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대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우린 끊임없이 ‘너 잘 되라고 이러는 거야’라는 단서를 붙이며, 더욱 매몰차게 그와 같은 방식을 고집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런 강요에, 폭력에 눌릴 대로 눌려 결국 자신의 활발발한 기운과 고유의 개체성을 빼앗겨, 결국 욕망만을 대변하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젠 나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두려워하는 게 무언인지 냉정하게 되돌아볼 때다. 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받아들이고 알게 되었다면 그제야 비로소 타자와도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럴 때 타자성에 대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실패해도 괜찮다는 너그러운 마음이 생겨서 비로소 지켜볼 수 있는 용기도 생기게 된다.
▲ 전주의 한 카페에서 본 광경. 엄마는 딸에게 책을 열심히 읽어주고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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