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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민들레 여름 1박2일 모임 - 7.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 본문

연재/만남에 깃든 이야기

민들레 여름 1박2일 모임 - 7.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

건방진방랑자 2019. 4. 10.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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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는 흔히 노자와 묶어져 노장사상老莊思想이라 불리며 자연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실 노자는 국가를 중시하여 국가의 운용방침이나 군주의 처세를 이야기한 반면, 장자는 공동체에 포섭되지 않은 개인을 중시하여 개인과 개인 간의 소통을 이야기했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라는 책을 읽다 보면, 소통의 원리와 함께 타자성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알게 된다. 저번 후기에서 살펴본 장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린 타자성을 지켜주는 게 얼마나 힘들고도 어려운 일인지를 알게 됐다.

자식은 부모와 가장 친밀한 관계고, 많은 것을 공유하다보니 전혀 타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자식이 자라면 자랄수록 서로의 생각이 달라져 의견 대립이 일어나고 갈등이 빚어져, 그제야 비로소 타자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그럴 때조차도 넌 어리고 판단력이 떨어지니, 무조건 나만 따라야 해라고 밀어붙인다면, 둘 사이엔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사이가 벌어지거나, 아예 자식의 타자성을 말살시키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타자성을 죽여 놓고 다 너를 위한 일이야라고 말한 들, 그건 어디까지나 비겁한 변명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 자식의 타자성을 받아들이고 실패해도, 때론 늦더라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지지하고 믿으며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맘먹었을지라도 부모로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건, 무책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교육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 일점이라도 더 맞기 위한 것’, ‘성공을 위해 맹목적으로 질주하는 것을 교육이라 할 수 있을까? 이미 우린 이와 같은 교육의 폐해를 너무도 많이 봐왔기 때문에, 이걸 교육이라 할 수 없는 건 누구나 알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걸 교육이라 할 수 있을까? 교육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애초에 어떤 과정 속에, 어떤 이유로 생겨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침에 일어나 바라본 천정은 낯선 천정이 아닌, 빛과 바람이 느껴지는 천정이었다.

 

 

 

최초의 교육은 어땠을까?

 

태초의 교육에 대한 단서를 찾아 상상하기 위해서 우치다 쌤의 말을 들어보자.

 

 

무인도에 표류한 교사와 아이들이 있다고 합시다. 처음에는 야자잎으로 지붕을 만들거나 물고기를 잡겠죠. 어느 정도 입고 먹는 것이 해결되면 교사는 당연히 , 그럼 슬슬 공부를 해볼까?”하고 말을 꺼낼 겁니다. 그런 말을 안 할 리가 없습니다. 역사와 문학, 신화에 관해서 수학과 천문학, 미술과 음악에 대해 교사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아이들에게 전달하려 하고, 아이들 또한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시험공부에 도움이 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학력을 쌓아서 좋은 곳에 취직하기 위해서일까요?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문화자본을 체득해서 양극화 사회 상위층에 오르기 위해서일까요? 그 어느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기는 무인도니까요. 하지만 교육하고 싶은 열정과 교육 받고 싶은 욕망은 무인도라 하더라도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무인도라서 더 간절히 배움을 원하는 아이도 틀림없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교육의 본질이 여기와는 다른 장소, 여기와는 다른 시간의 흐름, 여기에 있는 것과는 다른 사람들 사이를 연결해주는 회로를 뚫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교육의 본질은 외부와의 통로를 열어가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공부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무인도라는 유한한 공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잊고 보다 넓은 세계와 연결되는 해방감을 맛보게 됩니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밀실 안으로 어디에선가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청량감을 느끼는 것이지요.

-우치다 타츠루, 교사를 춤추게 하라, 민들레출판사, 2012, pp 42~43

 

 

현재의 교육은 문화자본을 취득하기 위한 것=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것=원하는 삶을 살기 위한 것으로 무언가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말았다. 수어사이드 스쿼드라는 영화엔 다양한 캐릭터들이 나오지만, ‘슬립낫은 단지 자살특공대에서 도망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본보기로만 이용됐다. , 공포감을 심어주어 나쁜 놈들의 대열이탈을 막기 위한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처럼 교육도 수단이 되면, 무언가를 얻기 위해 잠시 해야 하는 것일 뿐 아무런 깨달음도 주지 못한다. 그러니 앎과 삶은 괴리되어가고 자신이 아는 것만이 전부인양 착각하게 되어 남들 앞에 거들먹거리게 된다(우병우와 진경준의 예가 대표적임). 이건 오히려 교육 받지 못한 것만도 못한 최악의 경우라 할 수 있다.

 

 

수단이 된다는 것은 어떤 큰 그림을 위한 희생물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애초에 교육의 이유는 본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삶을 더욱 풍요롭게 살기 위한 앎, ‘여기와는 다른 장소, 여기와는 다른 시간의 흐름, 여기에 있는 것과는 다른 사람들 사이를 연결해주는 회로를 뚫기 위해 교육이 필요했던 것이다. 내부로 침잠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외부를 향해 거침없이 통로를 열어가며 미지의 것들과 대면하려 한다. 그러니 배우면 배울수록 삶은 풍요로워지고, 사람과의 관계는 원만해진다. 교육의 본질을 중시하다보면, 앎과 삶은 일치된다. 그래서 삶에 앎이 영향을 끼쳐 활기가 넘치고, 앎에 삶이 반영되어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이런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수단으로서의 교육에 매몰되고 끌어가려 할 것이 아니라, 본질로서의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일본 개콘 같은[야쿠자의 가정교육]이란 이 단막극은 교육의 복잡미묘함을 맘껏 보여준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그런데 이쯤 되면 어떻게 본질로서의 교육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화둥님이 해주신 이야기가 도움을 된다.

어화둥님은 기본적으로 일 해야만 먹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으니 선사의 오랜 가르침인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것이야말로 불노소득을 바라고, 어떻게든 적게 일하고 많이 먹길 바라는 세상에서 하나의 경종을 울릴 만한 구절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어화둥님은 그걸 그대로 영민이에게도 적용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영민이는 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하며, 그 외의 일들도 곧잘 찾아서 한단다. 접때는 책을 옮길 일이 있었는데, 어화둥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영민이가 자신의 일처럼 나서서 자신의 몫을 해내더라는 것이다.

 

영민이는 노동주체가 뭔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노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얘기를 들으며 석혜영님은 중학교 1학년 담임으로 학부모와 상담할 때면,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오로지 아이가 스스로 설거지 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는 말만 했다는 일화를 털어놨는데, 나도 그와 유사한 경험이 있었다. 단재학교에도 설거지는 물론이고 심지어 자기 방 청소까지 하지 않는 아이들이 많다. 아무래도 청소나 설거지를 하며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그 시간에 한 자라도 더 공부하길 바라는 마음에 시키지 않은 걸 거고, 막상 시킨다 해도 맘에 들게 하지 않기에 계속 해주게 된 걸 거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히 그런 기본적인 것을 못한다는 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생활까지도 영향을 끼친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자기의 물건을 챙기거나, 등교시간을 지키거나 하는 등등의 기본적인 생활습관까지 영향을 미쳐 힘들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 또한 학부모님과 상담할 때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은 설거지와 방 청소를 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는 말이다.

 

 

설거지는 작은 행동 같지만, 여기엔 동섭쌤이 말하는 것처럼 중요한 인생의 의미가 숨어 있다.

 

   

 

소비주체와 노동주체의 차이

 

이 말들엔 기본적으로 노동주체여야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우치다 쌤이 하류지향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소비주체로 서 있느냐, ‘노동주체로 서 있느냐에 따라 삶을 대하는 진정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소비주체로 선 사람은 모든 관계를 Give & Take로 바라보며, 시간 대비 결과를 따져 효율적이라고 판단될 때에만 행동한다. 한 만큼의 효과가 나타나는 일만을 하니 근시안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으며, ‘이 사람이 나에게 어떤 이익이 되나?’를 따지니 인간관계는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원래 공부든 인간관계든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고, 결과에 대해서도 함부로 말해선 안 되는 것이다. 그저 묵묵히 시간을 견뎌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을 해나가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소비주체로 선 아이는 지금 당장 이해할 수 없는 모든 활동에 대해 이런 걸 왜 해야 해요?’라고 의문부호를 달고 머뭇거리거나, 아예 하려 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노동주체는 노동이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의미가 있는 활동이라는 것을 알기에, 시간을 보낸 만큼 어떤 식으로든 그에 따른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몸으로 경험한 이들이다. 그러니 공부나 인간관계와 같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활동을 이해할 수 있으며,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그러니 노동주체로 선 아이는 진솔하게 흘린 땀방울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에 따라 한 걸음씩 뚜벅뚜벅 걸어간다.

 

 

노동주체란 남을 위해 만드는 음식, 청소, 설거지, 모든 몸을 움직여서 하는 활동 속에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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