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건국③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왕실이 아니라 귀족들에게 불교가 퍼지는 것이다. 극동의 불교는 대부분 호국불교였으므로 왕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대환영이지만 신라 귀족들의 입장은 약간 다르다. 지증왕 때부터 제2의 건국을 추진하면서 개혁의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자 그들은 한편으로 나라가 선진화되는 게 싫지 않으면서도 왕이 직접 개혁을 주도하는 것에 대해서는 떨떠름한 심정일 수밖에 없다. 국왕과 국가의 명칭을 확정하는 문제, 순장을 금지하는 조치 등에 관해서는 찬성과 지지를 보낼 수 있으나 자신의 국가관과 인생관까지 영향을 미치는 목을 베었고 이차돈이 미리 예언한 대로 그의 목에 불교의 문제라면 마냥 동의하기 어려운 처지다. 더구나 전통적인 무속 신앙에 별다른 문제점이 없는 데도 머리를 박박 밀고 이상한 옷을 입은 승려가 괴상한 주문을 중얼거리는 신흥 종교를 수용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귀족들은 마지 못해 불교 장려에 동의하면서도 막상 실행에 옮기는 데는 주저한다.
이때 혜성같이 등장한 사람이 이차돈(異次頓, 506 ~ 527)이라는 젊은이다. 어릴 때부터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귀족들이 불교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고 법흥왕에게 자신을 죽여 불교를 일으키는 데 이용하라고 권한다. 갓 스물의 청년다운 패기일까? 법흥왕은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지만 이차돈은 이미 결심을 굳혔다. 그의 결심은 절을 짓는 것, 그러나 절은 당시 불법이었으니 그의 행위는 일부러 죽을 죄를 짓는 격이다. 그러자 왕은 그의 목을 베었는데 이차돈이 미리 예언한 대로 그의 목에서는 흰 피가 솟구치는 기적이 일어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라의 귀족들은 앞다투어 불교로 전향하는데, 사실 이 이야기에는 사기극의 냄새가 농후하다. 물론 이차돈이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는 것은 믿을 수도 있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목을 베는 것을 보면 법흥왕은 적어도 이차돈의 순교에 대해 사전에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다음 시나리오에 따라 기적을 조작한 게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불교의 도입으로 법흥왕은 모든 개혁을 완료했다. 마음이 상한 귀족들을 위로할 겸해서 신라의 최고 관직인 상대등(上大等)을 비롯하여 관제 신설을 마무리한 다음 536년에 그는 신라 역사상 최초로 연호까지 제정하는데,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바로 그런 것일 터이다【앞서 말했듯이 달력(역법)과 연호는 독립국의 상징이므로 이제 비로소 신라는 당당한 왕국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은 세계의 대부분이 서양의 달력(서기)을 쓰니까 달력의 존재를 당연시하지만, 사실 공통적인 달력이 없을 때는 나라마다 연도를 셈하는 기준이 달랐다. 가장 일반적인 기준은 현직 왕을 기준으로 삼는 것인데, 이를테면 서기 536년을 법흥왕 23년이라고 하는 식이다. 물론 중국에서 비롯된 전통이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이집트에서도 파라오의 즉위를 기준으로 연도를 셈했으니 세계사적으로 보편적인 역법인 셈이다. 참고로 서기 2000년은 단군기년으로는 4333년이고, 공자(孔子) 기년으로는 2551년이며, 불기(佛紀)로는 2544년, 이슬람력으로는 1379년, 북한에서 현재 사용하는 주체력으로 따지면 89년에 해당한다(일본도 공식적으로는 아직 천황의 연호를 사용한다). 이렇게 보면 이른바 ‘새천년’이란 서양식 달력에서만 통용되는 개념일 뿐이다】. 최초의 연호답게 그 연호는 건원(建元, ‘기원을 세운다’)이었고, 그가 죽은 뒤 신하들은 처음으로 불교를 도입한 왕답게 그에게 법흥(法興, 여기서 법이란 불법을 뜻한다)이라는 묘호를 선사했다.
▲ 종교와 기적 무릇 신흥 종교가 뿌리를 내리려면 적절한(?) 기적이 필요한 법이다. 사진은 신라에 불교가 자리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차돈의 순교 공양비다. 그는 원래 박씨로 왕족의 후예였고 법흥왕의 측근이었으니, 아무래도 그가 보여준 기적에는 사기극의 냄새가 풍긴다. 물론 그의 순교는 의심할 필요가 없겠지만 거기에는 아마도 법흥왕의 사전 밀약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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