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등장②
비보를 들은 선조(宣祖)는 서둘러 식솔들과 일부 중신들만 데리고 한밤중에 도성을 빠져나와 멀리 압록강변 의주까지 한달음으로 도망친다【믿는 도끼였던 신립의 패전 소식은 조정만이 아니라 민심에도 큰 동요를 가져왔다. 당시 백성들은 선조(宣祖)가 도망치려는 것을 알고 국왕의 앞길을 가로막았을 정도다. 그러나 이처럼 지배자가 국민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도망치는 경우는 350년 뒤 그대로 재현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통령 이승만은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노라고 큰소리치다가 개전 사흘 만에 남쪽으로 도망치면서 한강 인도교를 끊어 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한강을 건너던 무수한 국민들이 죽었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밖에도 임진왜란(壬辰倭亂)과 한국전쟁은 닮은 점이 많다】. 도망치는 와중에서 그가 한 일이 있다면, 북도에서 아들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보내 급한 대로 병력을 모집하라는 명을 내린 것과, 명나라에 급히 SOS를 타전한 것뿐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두 왕자를 곧 사로잡아 버렸고, 개전 후 불과 두 달 만에 평양까지 북상해서 사실상 한반도 전역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일본의 불운은 육지만 호령했을 뿐 바다를 장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 약점을 틈타 조선에는 불세출의 구세주가 등장한다.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라도 수군절도사에 올라 군사를 조련하고 장비를 갖춰 오던 이순신(李舜臣, 1545~98)이 바로 그다(이이, 유성룡, 이순신 등 국난을 예감하고 있던 인물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한반도는 현실의 역사보다 300년 일찍 일본의 식민지 시대를 겪었을지도 모른다). 이순신이 등장하면서 그동안 육지에서 일본이 올린 화려한 연전연승 기록은 바다에서의 연전연패로 상쇄되기 시작한다. 신립이 무너짐으로써 믿는 도끼가 사라졌구나 싶을 때, 이순신은 5월 4일의 첫 출동에서 일본의 함선 37척을 부수면서 아군의 피해는 경상 1명에 그치는 믿지 못할 전과를 올린다. 그러나 이건 예고편에 불과하다. 7월에 전개된 한산대첩에서는 유명한 학익진(鶴翼陣)을 펼치며 일본 군함 60여 척을 바다에 수장시켜 버린다. 그가 원균(元均, 1540~97)과 파트너를 이루어 남해상을 장악하면서 일본은 해전 자체를 기피하게 될 정도였다.
사실 일본이 준비했던 함대는 병력 수송선이었지 해전을 벌이기 위한 전선(戰船)이 아니었다【흔히들 일본은 섬나라니까 일찍부터 조선과 항해술이 발달했을 거라고 여기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일본은 중국과 비견되는 ‘소천하(小天下)’의 역사를 전개해 왔으므로 대외 진출보다 일본 자체의 통일에 주력해 왔다(고대부터 해상에 진출한 왜구는 주로 쓰시마 등 해안 일대에 국한된다). 따라서 ‘예상 외로’ 그들의 해군력은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명나라를 치기 위해서는 한반도를 거쳐가야 한다는 이른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주장한 것도 보잘것없는 해군력으로 중국에까지 병력을 실어나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해상 전술이라고는 고작해야 배를 서로 붙여놓고 적의 배에 뛰어올라 자신들의 장기인 검술로 해결하는 것이었는데, 조선의 수군은 기동력이 뛰어난 판옥선인 데다가 이순신은 거북선까지 만들어 적의 그런 전술을 원천 봉쇄했던 것이다. 따라서 해전으로만 진행된다면 일본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순신이 처음부터 빛나는 전공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적에게 그런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어쨌든 그 점을 파고든 것은 그의 뛰어난 전술적 역량을 말해준다.
▲ 야반도주하는 선조의 모습이다.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한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