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시리도록 멋진 하루
예전에 헤어진 남자친구를 여자가 불현듯 찾아온다. 차인 것도 아닌 스스로 차버렸던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찾아가기엔 여러모로 어색했으리라. 그런데도 그냥 한 번 만나고 싶다. 그래서 궁색하게나마 생각해낸 것이 빌려주었던 350만원을 되돌려 받겠다는 거였다. 역시 인간은 어떻게든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만든 다음에야 움직이는 달인들이다.
돈 받으러 찾아온 옛 여친
의식이 깨어나 어릴 적의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마구 놀 수 있던 나이가 지나 자의식에 따라 규정하고 관계를 쪼개어 이해타산에 따라 분석하게 되면서 도무지 ‘그냥’ 하는 일 따윈 사라졌다. 생각지도 못할, 납득되지 않을 일을 하게 되더라도 스스로 합리화라는 것으로 자신에게 동의를 구한다.
이런 모습은 이미 강풀 만화 ‘26년’에서도 볼 수 있다. 전두환을 모시던 실장은 애초엔 1981년 5월 당시엔 진압군으로 투입되었기에 전두환을 그토록 증오했지만 결국 전두환을 추앙하며 긍정하게 된다. 그 180도 다른 변화엔 이와 같은 합리화가 숨어 있다. 그런 가운데 그녀가 생각한 상황은 오로지 그녀에게 유리한 거였다. 우선 돈을 받으러 갔기 때문에 예전에 자신이 잘못했다느니, 보고 싶었다느니 하는 너저분한 말들을 꺼낼 필요가 없다. 자신은 당당한 채로 보고 싶던 사람을 보면 되니 완전한 금상첨화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뿐인가? 누군가에게 그런 큰돈을 요구하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큰돈을 줄 순 없으리라. 더욱이 그녀는 그가 줄 수 없다는 것도 뻔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신이 헤어지자고 했던 데 대한 사과 따윈 할 필요도 없이 오히려 적반하장격으로 그를 면박 주기만 하면 된다. 돈 하나로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라니. 그녀는 1년 간 여러 일들로 쌓인 스트레스도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거다. 이름하야 완전히 자신의 관점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는 게임인 셈이다.
이성의 날카로움이 아닌 감정의 따스함으로
하지만 상황은 그녀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의 앞에 당당히 나타나 면박을 주며 요구할 순 있었지만 그가 비굴하게 내빼기보다 당당히 그 상황을 돌파하려 했으니까. 의외로 이 남자 매력이 가득한 매력남이었던 거다. 자신이 통장으로 입급해 준다는 것을 그녀가 꼭 받아가겠다고 버티는 데도 그 남자는 비굴해지지 않았다. 여자의 시나리오는 완전히 물거품이 됐다.
그건 둘이 예전에 연인 사이었지만 둘 사이에 상황을 파악하는 분석능력만 있었을 뿐, 진정한 공감대가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남자의 이런 당당한 모습을 이미 알았다면 그와 같은 오판을 하지도, 그와 같은 행동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만약 그렇게 될 줄도 알았다고 한다면 그녀는 이미 신이리라.
이런 이유로 두 사람은 갑작스레 350만원을 빌리기 위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때 두 사람의 모습은 상반된다. 남자는 너무 활발하지만 여자는 침울하며 남자는 세상의 모든 말을 혼자라도 하겠다는 듯 연신 말을 쏟아내지만 여자는 자신을 감추려는 듯 침묵을 고수한다. 두 상반된 모습 또한 자신의 맘을 숨기는 두 가지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두 사람 다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진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돌아다니며 여러 사건을 겪게 되고 그 사건들로 자신을 들여다보게 됨으로 서서히 마음의 벽도 허물어져 간다. 바로 이 두 사람의 관계가 한 단계 진일보하는 곳은 바로 ‘新設驛’에서다. 역 이름에서부터 그 둘의 관계가 새롭게 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처음 영화가 시작될 땐 무척 우울한 느낌이 강해서 영화 제목은 반어적 표현인 것인가 했는데, 바로 이 시점부터는 영화 제목이 딱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 영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떠한 끈들이 있는지 과장되지 않게 보여준다. 분석하는 인간이 아닌 감정에 충실할 때 삶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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