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크릿 선샤인?
밀양을 쓰게 된 이유
신애: 아저씨, 밀양이라는 이름의 뜻이 뭔지 알아요?
종찬: 뜻요? 뭐 우리가 뜻 보고 삽니까? 그냥 사는 기지.
신애: 한자로 비밀 밀, 볕 양. 비밀의 햇볕. 좋죠?
종찬: 비밀의 햇볕, 좋네예.
영화 초반, 신애(전도연)와 종찬(송강호)이 자동차 안에서 나누는 대사다. 그래서 영어로 번역하면 시크릿 선샤인secret sunshine. 왜 하필 밀양일까도 궁금했지만, 그걸 이런 식으로 풀이하고 번역할 줄이야. ‘비밀의 태양’이라? 모르긴 해도, 밀양에서 이런 이미지나 기호를 떠올리는 이는 거의 없으리라. 굳이 찾는다면, ‘밀양아리라’, 그리고 소박한 전원풍경 등의 이미지들이 스쳐 지나가는 정도. 그러고 보면 이창동 감독은 이런 식의 낯익은 표상을 전복하기 위해 부러 밀양을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대표작 <초록물고기>가 그렇듯이, ‘비밀의 태양’ 역시 형용모순이다. 태양이 비밀스럽다니? 태양 너머에 뭔가가 숨어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태양 자체가 비밀이라는 뜻인가? 언어도단!
애초 이 장에는 <초록물고기>를 쓸 작정이었다. 실제로 연구실에서 강의를 할 때는 <초록물고기>로 강의안을 작성했었다. 헌데, 그 와중에 <밀양>이 나와‘버렸다’. 이창동 감독이 간만에 만든 작품인 데다 개봉 직전, 주인공 신애 역을 맡은 전도연이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타는 쾌거를 올렸다. 과연(!) 이창동 감독의 뚝심은 놀라웠다. <밀양>은 <초록물고기>보다 훨씬 급진적이다. 관객의 기대나 정서를 눈곱만치도 고려하지 않은 ‘불친절한, 너무나 불친절한’ 작품. 결국 나는 이 장을 <밀양>으로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군데군데 <초록물고기>를 끌어들여 <밀양>의 비밀을 푸는 ‘보조키’로 쓸 작정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영화
관객들은 실로 당혹스러웠으리라. 특히 기독교 신자들이라면 더더욱. 감독과 주연배우들의 카리스마, 그리고 국제영화제 수상이라는 권위 때문에 보긴 봐야 하는데, 그리고 적당히 감동을 받을 준비도 되어 있는데, 도무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으리라. 주인공인 전도연조차 영화의 주제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 토로했을 정도니까. 뭐, 그렇다고 이 작품이 미스터리 심리극이나 심오한 사유를 요구하는 철학영화에 속하는 건 결코 아니다. 사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참으로 평범하다. 주제도 ‘가족’이다. 가족, 그 얼마나 진부한 테마인가. 서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유괴사건’도 끔찍한 일이긴 하지만, 그 자체는 이미 너무나 익숙한 현상이 되고 말았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글을 쓰고 있는 도중에도 유괴, 납치, 살해사건이 온 매스컴을 도배하고 있다. (맙소사!)
그런데 난해하다고? 아마도 그것은 내용 자체에 있다기보다 내용을 다루는 감독의 독특한 시선 때문일 것이다. 즉, 이창동 감독의 시선은 가족 자체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욕망의 판타지와 그 근원적 불가능성을 좇고 있다. 일찍이 <초록물고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2. 신애가 밀양으로 내려간 까닭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오다
신애는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자 아들 준과 함께 밀양으로 내려온다. 그녀와 밀양 사이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밀양은 처음이에요. 살러 왔어요.”
실제로 한 번도 와 본 적조차 없다. 그런데 살러 왔다고? 이런 무모한! 대체 무슨 심사로? 그녀가 밀양을 선택한 이유는 오직 하나, 남편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유괴범이 된 웅변학원 원장에게 하는 말.
“그냥 밀양이 좋아서 살러 온 거예요. 애 아빠 고향이기도 하구요.... 애 아빠가 평소에 늘 밀양 내려와서 살고 싶다고 노래 불렀었거든요.”
즉, 밀양은 남편의 고향이자 꿈이었고, 과거이자 미래였던 곳이다. 따라서 신애가 밀양으로 온 건 남편의 꿈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버림으로써 남편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욕망의 발로다. 오호! 그렇다면, 자신의 고향도 아니고, 무슨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닌 낯선 고장으로 이주를 감행할 정도로 남편과의 유대가 지극했던 것일까?
남동생: 나 솔직히 누나 이해 못하겠어.... 매형, 누나 배신하고 딴 여자랑 바람났었잖아.
신애: 아냐, 임마. 준이 아빠는 우리 준이랑 나만 사랑했어.
그렇다. 그녀의 남편은 다른 여자랑 바람이 났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것이다. 요컨대, 그녀가 꿈꾸던 사랑과 행복은 산산이 부서져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신애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인정할 수 없다. 그녀의 삶은 ‘남편과 아이와 자기’로 이루어진 ‘스위트 홈’이라는 표상에 완전히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남편의 배신과 죽음 뒤에 그녀가 붙들 수 있는 유일한 끈은 밀양이라는 장소뿐이었던 게다.
“난, 서울이 싫어. 여기가 좋아. 여기가 왜 좋은지 아니? 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 여기서 새로 시작할 거야.”
서울이 아니라, 왜 밀양인가? 서울에는 자신이 배반당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밀양에선 그 기억들을 지워버릴 수 있다. 동시에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새로운 판타지를 구축할 수 있다. 그녀가 가족들한테도 알리지 않고 무작정 밀양행을 택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욕망의 원초적 대지
그런 점에서 신애는 <초록물고기>의 막동이와 동일한 욕망의 배치 속에 있다. 막동이는 서울 변두리지만 버드나무가 있는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의 꿈과 욕망은 딱 이 시기에 고착되어 있다. 하지만 그가 군에서 제대하고 사회로 복귀했을 때, 그의 고향과 가족들은 더 이상 ‘거기에’ 있지 않았다. 일산 신도시 건설로 주변에 고층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소박하고 정감 어렸던 그의 집은 졸지에 삭막한 판잣집으로 전락해 버렸다. 동시에 그의 가족들 간의 유대 역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엄마는 파출부를 뛰고, 첫째 성은 뇌성마비, 경찰인 둘째 성은 술주정뱅이가 되었다. 셋째 성은 계란 트럭장사, 여동생은 다방 종업원. 이들 사이엔 이제 더 이상 소통이 불가능하다. 막동이는 둘째 성에게 말한다.
“우리 식구들 전부 같이 모여 살면 안 될까? 옛날같이.”
둘째 성은 돈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 같이 살면서 같이 돈도 벌면 좋잖아? 공장을 하든지 식당을 하든지.”
막동이의 욕망은 여전히 가족의 영토 안에 묶여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잃어버린 대지에 대한 허망한 꿈일 뿐.
막동이한테는 유년기가 고향이라면, 신애에겐 밀양이 고향이다. 전자에겐 고향이 시간성을 지닌다면, 후자에겐 장소성을 갖는다. 그녀에게 서울은 절대 고향이 될 수 없다. 거기에는 꿈과 추억이라는 기제가 작동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로써 보건대, 고향을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고 보는 건 실로 피상적이다. 근본적으로 고향은 욕망이 귀환할 수 있는 거처 혹은 욕망의 원초적 대지를 말한다. 그리고 이때 욕망은 기억을 통해 작동한다. 신애에게 그 기억은 남편에 대한 것이 전부다. 고작 이 정도가 어떻게 그녀의 삶을 지배할 수 있을까 싶겠지만, 그건 그렇지 않다. 기억이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주체가 얼마만큼 거기에 의존하는가, 곧 중력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막동이와 신애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막동이는 기억의 구체적인 내용이 있지만, 신애에게는 그 구체성이 없다. 즉, 신애에게 고향의 판타지란 전적으로 외부, 곧 남편으로부터 주입된 표상일 뿐이다. 말하자면, 막동이보다도 삶과 욕망 사이의 간극이 더 한층 벌어진 셈이다. 그래서 더 위태롭다. 그 간극만큼의 고뇌와 번민을 짊어져야 하니까.
3. ‘고향’: 욕망의 일차적 귀환처
그저 일상의 공간인 밀양
“여기서 다시 시작할 거야”
밀양에 자리를 잡고 난 뒤, 신애는 피아노학원을 차리고 아들 준을 웅변학원에 보낸다. 그리고 이웃들과 교류를 시작한다. 옷가게와 약국, 웅변학원 원장과 학부모들 등. 그렇게 해서 차츰 밀양이라는 낯선 지역에 진입하게 된다.
물론 이 진입의 통로는 카센터 사장 종찬이다. 그는 그녀가 밀양으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만난 첫 번째 인물이다. 이때 이후 종찬은 신애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그녀를 돕는다. 하지만 신애는 그의 존재감을 거의 느끼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 왜? 남동생의 말을 빌리면, 그는 신애의 “취향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신애가 꿈꾸는 삶의 기준에서 보자면, 종찬은 그저 한심한 “속물”에 불과하다. 낭만이라든가 교양 따위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노총각, 종찬. 처음 신애가 종찬에게 밀양이 어떤 곳이냐고 묻자 종찬은 이렇게 답한다.
“경기가 엉망이고, 여는 한나라당 도시고, 부산 가깝고예, 말씨도 부산말씨고, 급하고 말씨가, 인구는 뭐, 마이 줄었고.”
참, 썰렁한 답변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떤 환상도, 허위의식도 담겨 있지 않다. 종찬에게 밀양은 그저 밀양일 뿐이다.
망상을 실현하기 위한 밀양
하지만, 신애에겐 그렇지 않다. 처음 인용했던 그 대사를 다시 상기해 보자.
그 순간, 바람이 불어오고 종찬은 신애를 마음에 품게 된다. 그가 신애한테 끌린 건 신애한테서 풍기는 지적이고 세련된 분위기(사실은 허영기) 때문이지만, 그의 사랑법에는 어떤 가식적 로망도, 오버액션도 없다. 늘 그녀가 필요로 하는 그만큼의 거리에 있을 뿐이다. 그에 비하면 신애의 “취향”은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차 있다.
사실 밀양을 저 ‘엄청난’ 의미로 풀이하는 건 전적으로 신애의 망상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밀양은 신애의 망상이 일차적으로 귀환하는 곳이다. 고향은 고향인데, 아주 낯선 고향(형용모순!). 다소 역설적이지만, 바로 그래서 더 고향이라는 표상에 딱 들어맞는다. 왜? 구질구질한 과거의 흔적이나 번잡한 친인척관계가 없다 보니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망상을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망상 위에서 새로운 정착을 시도한다.
“좋은 땅 있으면 집 짓고 살 거예요. 원장님, 좋은 땅 혹시 아시면 소개 좀 해주세요.”
좋은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산다? 뭐, 여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그녀의 망상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걸음 더 미끄러진다. 졸지에 부동산 중개인을 통해 땅을 알아보러 다니는 ‘짓’을 하는 것이다. 서울서 내려온 남동생한테 “투자 좀 해라” 그러자, 동생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동생은 누나가 하는 짓이 황당하기 짝이 없다. 왜냐면, 그녀한테는 돈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체 왜 저러는 거지? 돈이 있는 ‘척’하기 위해서다. 남들한테 ‘좀 있어’ 보이려고, 그렇게 해서 밀양이라는 ‘고향’에 터를 내리려고. 맙소사! 이런 점에서 신애가 종찬보다 훨씬 ‘속물’이다. 다만 그것이 착하고 세련된 이미지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그 이미지 때문에 자신도 속고, 타인도 속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녀 주변에 일종의 망상의 그물망이 둘러 쳐지게 된다. 망상은 망상을 부른다. 파국이 올 때까지 멈추지 않는 것. 망상이 치명적인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웅변학원 학부모들이 회식하는 장면, 신애가 땅 주인한테서 전화를 받는다. 사람들이 부동산 투기하는 거냐며 놀려댄다. 그러자 신애가 말한다.
“있는 돈 은행에 넣어봤자 요즘 이자가 너무 싸잖아요. 저, 먼저 일어나 볼게요. 땅 주인 맘 바뀌기 전에.”
아뿔사! ‘너무 많이’ 가 버렸다. 그때 웅변학원 원장이 신애를 따라나선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표정으로. 아마 돈을 빌리고 싶었으리라. 이미 이때부터 신애는 ‘돈과 땅’이 만들어 내는 중력장 속으로 들어간 셈이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가상의 신기루에 스스로 갇혀 버린 형국이라고나 할까. 결국 그 돈을 노리고 웅변학원 원장이 그녀의 아들 준을 유괴한다. 하지만 그녀가 지닌 현금은 꼴랑 870만원! 그럼 땅 계약은?
“그거 다 거짓말이에요. 저 땅 살 돈 없어요. 다 거짓말이에요. 그냥 돈 있는 척하려고 그냥 거짓말한 거에요. 그 돈이 제 전재산이에요.”
전화기 저편에서 유괴범은 다시 채근한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었으니 보험금을 탔을 거 아닌가?
“보, 보험금요? 그거 남편 사업하다 빚진 거 갚구요, 그리고 여기 내려와서 가게 얻고 인테리어하고.”
결국 아이는 참혹한 시체로 발견된다. 이로써 밀양에서 다시 시작하겠다는 그녀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 버린다. 밀양은 ‘비밀의 태양’이 아니라, ‘지옥의 화염’이었던 것.
스위트홈이란 과대망상
하지만, 한번 따져 보자. 과연 그녀는 다시 시작한 것일까? 밀양, 아니 ‘비밀의 태양’에 대한 과대망상, 좋은 땅을 사서 집을 짓겠다는 꿈, 부동산 투기에 대한 허황된 욕심. 이것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새롭기는커녕 진부하고 또 진부한, 우리 시대 모든 중산층의 욕망에 다름 아니다. 말하자면, 그녀는 서울에서 남편과 살았을 때와 동일한 욕망을 반복한 셈이다. 즉, 그녀는 단 한가지의 기억도 지우지 못했다. 진정한 망각이란 단순히 과거의 사실들을 지우는데 있지 않다. 그 사실들이 일으키는 정서적 배치를 바꾸는 데 있다. 전혀 다른 정서와 욕망의 배치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비로소 기억의 포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애는 그 반대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사실(남편의 배신)을 지워 버림으로써 ‘스위트 홈’에 대한 기억과 집착을 더욱 증식ㆍ확장시켜 버렸다. 그 결과, 남편이 살아 있을 때보다 삶과 욕망 사이의 간극이 더욱 벌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더더욱 오버액션을 하게 되었고, 물론 그녀는 자신의 욕망이 지닌 이 간극과 허위를 알아채지 못한다. 아니, 무의식적으로 언뜻 감지하긴 한다. 준의 장례식장에서 그녀는 땅에 주저앉아 울먹인다.
“내가 왜 그랬을까요? 내 손으로 죽여도 시원찮은데, 경찰서에서 그 인간 만났을 때 왜 내가 눈을 피했을까요? 갈기갈기 찢어죽이고 싶었는데.”
아마도 유괴범의 눈에서 자신이 둘러친 허위의 그물망을 보게 될까 두려웠던 것이리라. 아무튼 아들 준은 죽었고, 그와 동시에 그녀가 고향이라는 대지 위에 구축했던 판타지는 완벽하게 붕괴되었다. 요컨대, 욕망의 배치를 바꾸지 않는 한 새로운 시작은 불가능하다는 것. 그것이 밀양이건 아니면 더 멀고 낯선 곳이건 간에.
사실 유괴라는 잔혹한 사건이 개입하기는 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예컨대 <초록물고기>의 하이라이트 ‘가족들의 소풍장면’을 한번 떠올려 보라. 막동이네 가족은 서로의 우애를 확인하기 위해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지만, 결과는 실로 참담하다. 둘째 형네는 부부싸움을 하고, 뇌성마비 형은 사지를 비틀며 울부짖고, 다른 형제들은 난투극을 벌이고, 막동이는 차를 몰아 그 아수라장 주변을 맴돈다. 막동이의 꿈은 산산이 부서진다.
물론 막동이네는 대가족인데 반해, 신애네는 달랑 아들 하나가 전부다. <초록물고기>가 1990년대적 풍경이라면, <밀양>은 2007년의 풍경이다. 그 사이에 더더욱 ‘단자화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래서 더더욱 사람들은 ‘스위트 홈의 행복’이라는 망상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 참으로 희한한 노릇이다. 가족의 범위가 이토록 축소되어 가는데도 행복은 오직 가족이라는 배치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으니 말이다. ‘가족’에 대한 계보학적 탐색이 필요한 건 바로 이 지점이다.
4. ‘스위트 홈’의 탄생과 근대
근대국민국가와 가족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이듯, 가족 역시 근대국민국가의 산물이다. 근대국민국가에서 가족은 가장 일차적인 경제단위이자 호명체계에 해당한다. 가족에 편입되어야 애국애족을 할 수 있고, 산업역군이 될 수 있으며, 국가경쟁력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아, 잠깐, 우리가 말하는 가족과 중세의 가문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중세적 가문은 대가족일 뿐 아니라 지역 사회 전체와 연계된, 가족이라기보단 마을 개념에 가깝다. 그에 비해 근대적 가족은 핵가족일 뿐 아니라 마을과의 네트워크가 절연된, 지극히 단자화된 단위에 속한다.
일부일처제의 신화가 만들어진 것도 이러한 배치 하에서였다. 남녀 간 사랑의 목표는 결혼이 되었고, 사랑은 곧 결혼으로서만 완성되었다. 가정만이 성애의 특권적 장소로 인증 받은 것이다. 동시에 모성과 교육, 모성과 애국심이 견고하게 유착되었다. 예컨대 자녀교육, 위생, 경제활동 등 모든 것이 가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서구의 도래와 스위트홈
서구의 경우, 19세기 후반에까지도 노동자들은 결코 ‘가족’에 묶이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집보다는 선술집이나 카페에서 저녁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고, 아이들은 하루 종일 거리나 골목에서 놀고 몰려다니는 것이 일상사였다. 이들을 가족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박애주의자들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집을 소유하도록 유도했다. 한편으로는 가정적인 안락함에 안주케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집이라는 소유물에 묶어 두고자 한 것이다.’
그것도 노동자 자신의 근면한 노동과, 금욕적 검약, 개미 같은 저축으로, 즉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집을 사야 하는 것이다.
(……) 집은 이제 가족이 절대적 공간인 만큼, 가족 이외의 사람이 함께 거주해선 안 되며, 출입을 제한해야 하고, 그들에 의해 가족적 통합이 교란되어선 안 된다. (……) 집에 대한 소유를 통해 노동자를 ‘가장’으로 만드는 것과 더불어, 새로이 생긴 가족의 공간을 깨끗하고 포근한 보금자리로 꾸미고 유지하는 새로운 임무를 통해 노동자의 아내를 ‘주부’로 만든다.
-이진경, 『모더니티의 지층들』, 「근대적 주거공간의 계보학」, 226~229쪽
이것이 근대 가족주의의 대략적 풍경이다. 20세기 초, 서구의 도래와 함께 이러한 표상이 우리나라에 그대로 이식되었고, 1920년대가 되면 이미 ‘스위트 홈’의 신화가 사회 전체에 유포된다. 이웃과 절연된 핵가족, 언덕 위의 하얀 집과 고급 승용차, 드레스를 차려입은 주부, 고급 사무직에 종사하는 남편, 그리고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치는 자녀 등등. 당시 우리나라 산업화나 도시화의 수준에서 본다면 이런 가족형태는 참으로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문학이나 예술을 통해 이런 식의 욕망의 판타지가 끊임없이 유포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대적 변주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다. 달라진 게 있다면, 지금은 언덕 위의 하얀 집이 아니라, 고급 중형 아파트라는 것. 거기다 주식에 펀드, 그리고 부동산이 추가될 수 있겠다.
신애가 밀양에서 이루고자 했던 행복의 내용도 이 표상의 계열 위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녀는 진정, 다시 시작한 게 아니라, 동일한 욕망의 판타지를 반복했을 뿐이다.
5. 교회와 신: 가족의 초월적 기표
불행과 하나님
밀양에 터를 잡을 즈음, 신애가 동네를 돌아다니다 갑자기 배가 아파 약국에 들어간다. 약사는 신애를 보자마자 마음이 아파서 몸이 아픈 거라고 진단한다. 혼자 사는 여자는 분명, 몸도 마음도 정상이 아닐 거라고, 굳게 믿은(?) 것이다. 사실은 ‘생리통’이었다. 쩝! 블랙코미디 같은 장면이다. 하지만 약사는 결코 실망(?)하지 않고 신애한테 하느님 말씀이 담긴 책자를 선물한다.
약사: 원장님처럼 불행한 분은 하느님의 사랑이 꼭 필요해요.
신애: 저 불행하지 않아요, 약사님. 잘 살고 있어요.
남편을 잃고 혼자 사는 여자는 불행하다. 그래서 하느님이 꼭 필요하다. 이 말은 거꾸로 뒤집으면 이렇게 된다. 하느님이 필요하려면 불행해져야 한다? 즉, 기독교 신앙은 불행을 먹고 자란다! 하지만, 신애는 불행하지 않다. 왜냐면, 그때까지만 해도 밀양에서 새로 시작할 참이었으니까. 남편과의 끈을 이어주는 아들 준도 있었으니까.
약사: 그라니까네, 우리 원장님은 눈에 보이는 거는 믿고 눈에 안 보이는 거는 안 믿는다 그지예?
신애: 전 눈에 보이는 것도 다 안 믿어요.
그러나 준이를 잃고 나자 그녀는 명명백백하게(!) 불행해졌다. 아이의 죽음과 더불어 이제 마음을 의탁할 거처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탓이다. 약국집 여자는 이 절호의 찬스(!)를 놓치지 않는다. 너의 고통과 불행을 치유할 수 있는 건 하느님 사랑밖에 없다,고 신애를 설득한다. 하지만 신애는 반문한다.
신애: 만약에요, 만약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크시다면요……
약사: 하나님 계시지예. 하나님 사랑이 크시지예. 한도 끝도 없이 크시지예.
신애: 그렇다면 우리 준이가 왜 그렇게 처참하게 죽게 내버려 두셨어요? 그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러자 약사는 말한다. 세상 모든 것, 저 햇볕 한 조각에도 주님의 뜻이 숨어 있다고. 그 말에 신애는 “여기, 뭐가 있어요? 그냥 햇빛이에요, 햇빛. 뭐가 있어요, 여기.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대답한다.
태양은 태양일뿐이다. 거기에 뭔가 깊은 뜻이 숨어 있을 리 없다. 밀양을 비밀의 태양이라고 풀이했던 그녀가 태양은 그저 태양일뿐이라고, 비밀 같은 것은 없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듯 그녀는 온힘을 다해 자신에게 덮친 운명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 해서, 준이의 사망신고를 하러 갈 때도 종찬의 손길을 물리친다. 하지만 결국 동사무소에 가서 사망신고를 하던 도중, 정신을 놓쳐 버린다. 주민등록번호를 잊어먹고, 가방에 있는 물건들을 다 쏟아버리고, 도와주려는 사람한테 막무가내의 히스테리를 부리고, 거리로 뛰쳐나와 꺽꺽거리며 가슴을 쥐어뜯는다. 몸이 마음의 짐을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순간
그때 그녀의 시선이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기도회”라는 부흥회 현수막에 가 꽂힌다. 이제 살기 위해선 저걸 붙들어야 한다!
늘 그렇듯이 교회 부흥회는 열광의 도가니다. 신애는 그 알 수 없는 열기에 휩싸여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처절한 울음을 토해낸다. 주님의 치유의 권능이 행사되는 순간!
“그렇게 이 가슴이 누가 손으로 막 짓누르는 것처럼 많이 아팠는데요, 이젠 안 아파요. 평화를 얻었어요. 이젠 정말 저한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뤄진다는 것을 분명히 믿게 되었어요.”
성령의 부름을 받고 그녀는 주님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청준의 원작 「벌레이야기」에는 이 부분이 주를 이룬다. 신의 섭리와 인간의 의지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극, 거기에서 오는 실존적 고뇌가 「벌레이야기」의 중심이다. 그래서 신의 섭리에 대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질문을 던지지만 이런 구도 자체가 ‘기독교적’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영화에선 초점이 좀 다르다. 교회는 모든 것을 잃고 벼랑 끝에 선 신애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코스다. 즉, 남편이 죽고 나서 밀양이라는 미지의 고향을 찾아왔듯이, 불행의 극한에서 그녀는 다시 더 크고 강력한 존재인 신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다. 고향이 가족의 다른 이름이었듯이, 교회와 신 역시 그녀가 꿈꾸는 가족의 또 다른 이름이다.
신성모독처럼 들리겠지만, 이것은 <초록물고기>의 막동이가 카바레 가수 미애를 통해 배태곤의 조직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비슷한 구조다. 조직의 넘버 원 배태곤이 막동이에게 말한다.
“너 무슨 일하고 싶어? 앞으로 커서 머 되고 싶어?”
“젊은 놈이 왜 그래 임마! 잘 아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거 어떻게 살려고 그래, 젊은 놈이! 꿈이 있어야지, 젊은 놈이 말이야.”
“이제부터 형이라고 불러라. 넌 내 막동이 동생이다.”
교회에서도 그렇다. 신자가 되는 순간, 하느님 ‘아버지’의 은혜 아래 모든 신자들과 형제자매가 된다. 교회 또한 일종의 커다란 ‘패밀리’인 것이다. 교회건 조폭이건 호칭이나 어법이 가족적 담화방식과 동일한 건 그 때문이다. 막동이가 조직에서 새로운 고향과 가족을 만들고 싶었던 것처럼, 신애 역시 교회 안에서 밀양과 아이를 통해 이루려 했던 가족적 판타지를 다시 한 번 구축하고자 한다. ‘신, 고향, 가족’의 트리아드Triad!
기독교를 통해 무너진 가족 판타지를 재구축하려 하다
사실 이런 식의 인식론적 표상은 처음 이 땅에 기독교가 도래할 때부터 비롯되었다. 20세기 초에 나온 신문매체들을 보면,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하는 대변동기에 대중들이 새로운 의지처를 찾아 기독교에 입문하는 모습, 그리고 그에 힘입어 세를 확장해 가는 예배당들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종교에 대한 광신을 낳고, 기르고, 강화시키는 것은 바로 공포’라고 하는 스피노자의 말이 환기되는 장면들이다. 그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근대 100년간 한국인의 국가적 공포는 한층 더 격심해졌고, 그에 비례해 지금 이 순간까지 기독교는 변함없는 항진을 계속해 왔다.
기독교는 그저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문명의 이름으로, 근대의 이름으로, 아니 제국의 표상으로 이 땅에 왔고, 한국인의 영혼에 뿌리를 내렸으며, 지금 우리가 온몸으로 확인하듯 튼실한 열매를 맺고 있다. 도심 곳곳을 수놓는 십자가의 행렬을 보라! 마치 원초적 본능이기라도 하듯 한국인은 온몸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도대체 교회 없는 삶, 기독교 없는 한국 근대사를 상상조차 할 수 있을까? 일본 근대의 중심에 천황제가 있다면, 한국 근대의 중심에는 기독교가 있다!
그런데, 이때 수용된 모델은 기독교 가운데서도 기독교(특히 장로교와 감리교)다. 잘 알고 있듯이, 천주교는 이미 조선사회 내부에 깊이 침투하여 수차례 ‘피의 순교’를 치른 바 있다. 따라서, 개항기에 유입된 미국 개신교의 주류는 처음부터 천주교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교육이나 의료선교를 통해 일상을 파고드는 전략을 택했다. 그와 동시에 정기적으로 부흥회나 사경회査經會(일정 기간 동안 교인들이 성경공부를 하거나 성경강의를 듣기 위해 모이는 모임)를 열어 사람들의 신앙심을 고조시키는 한편, 청년회나 부인회 등 각종 서클활동을 통해 일상의 리듬을 장악하는 역동적인 전략을 구사했다. 개신교가 다른 어떤 종교보다 구역을 장악하는 능력이 탁월한 건 그 때문이다. 솔직히 신자들한테는 기독교 자체보다, ‘우리 교회’에 대한 의식이 훨씬 더 크다. 그 결과, 전국 방방곡곡 어디건 근대화가 추진되는 곳에는 학교, 병원과 더불어 반드시 교회가 터를 잡곤 한다. 부연하면, 한국인에게 있어 근대화란 학교에서 근대지식을 주입받고, 병원에 몸을 맡기고, 교회에서 영혼을 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정도면 신애가 밟고 있는 이 코스가 충분히 납득 가능할 것이다. 그녀의 불행은 단지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아들이 다니던 웅변학원 원장이 유괴범이라는 것, 그리고 거기에는 자신의 허황된 욕망도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 여기에는 실로 그녀가 감당하기 어려운 실존적 문제들이 내재되어 있다. 하지만, 그녀가 이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출구는 전혀 없다. 오직 남편과 아들을 대체할 만한, 혹은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강렬한 대상과 접속함으로써 다시 한 번 망상을 구축해보는 수밖에는. 밀양으로 내려오면서 남편의 배신을 잊어버리고 싶었듯, 그녀는 또 다시 그 ‘참담한 비극’을 망각하고자 하는 것이다. 교회라는 더 큰 ‘패밀리’, 신이라는 더 강력한 ‘초월자’를 통해서.
6. ‘신앙’ 혹은 과잉열정
조폭조직과 교회, 가족
조직과 교회, 그리고 가족의 공통점은? 안팎의 경계가 선명하다는 것. 즉, 이질적인 타자들의 어울림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 설령 이질적인 존재가 결합한다손 쳐도 즉각 그 세계에 동화되어야만 한다. 즉, 이 집합체들은 아주 강력한 ‘동일성의 장’이라는 것이다. 조직에선 큰 형님, 교회에선 하느님 아버지, 집에선 아버지(혹은 어머니)라는 제일의적 중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장 속에선 끊임없이 사랑 혹은 충성을 확인해야 한다. 사랑이 없는 가족이 지옥이고, 충성심 없는 조직이 허깨비인 것처럼, 하느님과의 특별한 유대를 확인할 수 없는 교회 역시 생명력이 희박하다. 부흥회나 사경회를 통해 계속 은혜를 받아야 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은혜를 받는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일종의 ‘열정의 과잉’ 속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옷가게에서 이웃집 여자들과 떡볶이를 먹는 장면. 옷가게 주인이 신애한테 대체 뭐가 그렇게 행복하냐고 묻는다.
“그건요, 그냥 느끼는 거예요. 꼭 연애하는 거 같애요. 왜, 연애하면 누가 날 사랑해주고 생각해준다는 느낌 때문에 행복하잖아요. 하느님이 날 사랑하고 지켜주신다는 느낌, 그걸 매순간순간 느끼고 너무 분명하게 느낄 때마다 전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하느님의 사랑은 크고 넓다. 하늘만큼, 태양만큼. 햇볕이 없는 곳이 없듯이 하느님의 사랑도 모든 곳에 숨어 계신다. 헌데, 여기서 반드시 환기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주보다 넓다 한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격신이라는 것. 즉, 매우 뚜렷한 주체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신애의 이 대사는 맞는 말이다. 신앙을 갖는다는 건 연애의 구조와 꼭 닮았다. 누군가가 날 아껴주고 사랑해준다는 느낌, 그럴 때 차오르는 황홀감,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심리적 구조다.
감춰둔 울분과 억누른 상처
하지만, 그 같은 과잉열정은 영속적이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외부의 권능에 의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즉, 그녀의 내적 동력으로부터 길어 올려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녀의 고통과 상처는 치유된 것이 아니라, 다만 ‘침묵ㆍ봉쇄’되었을 뿐이다. 밤에 홀로 밥을 꾹꾹 눌러 먹으며 복받치는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순간, 신애는 필사적으로 주기도문을 외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히 하옵시며”, 그리고 길거리에서 유괴범의 딸이 구타당하는 장면을 보다가 큰 사고를 낼 뻔한다. 그때 치일 뻔했던 사람이 말한다. “사람 죽여 놓고 미안하다고 하면 답니까?”
순간, 신애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 장면들이 환기하는 바, 그녀가 지금 누리는 평화는 또 다른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
정말로 상처가 치유되려면 스스로의 힘으로 인과의 그물망을 넓게 칠 수 있어야 한다. 즉, 사건을 일으킨 욕망과 인연의 엇갈림, 그 심연에 대한 통찰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상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신애는 이 과정을 생략한 채, 하나님이라는 초월자에게 무조건적으로 의탁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삶은 우발적이다. 도처에서 느닷없이, 예기치 않은 마주침들을 만들어낸다. 그때마다 그녀는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상처가 자꾸 비집고 올라오기 때문이다. 그건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에 자꾸 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나님 저의 크나큰 용서를 보아주옵소서
그녀는 이런 국면을 돌파하기 위해 무리수를 감행한다. 교도소에 면회를 가서 그 죄인을 용서해주겠노라고 선언한 것이다.
“용서해주려고요. 저한테 너무 큰 고통을 안겨 준 사람이긴 하지만, 하나님이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해주라고 하셨잖아요.”
엄청난 도박, 아니, 함정이다. 그녀는 지금 자신을 속이고 있다. 아니, 자신한테 속고 있다. 용서는 윤리와 신앙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능력과 힘의 문제이다. 피해자 처지에 있는 한 진정한 용서란 불가능하다. 폭력의 상처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 건강을 회복했을 때, 그리고 더 나아가 폭력의 인과를 통찰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을 때, 그때야 비로소 용서라는 행위가 가능한 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신앙의 열정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얼마나 사랑하게 되었느냐로 표현된다. 하지만 신애는 지금 말할 나위 없이 연약하다. 그런 연약한 몸으론 절대! 죄인을 용서할 수가 없다. 만약 진정 용서할 수 있다면, 굳이 교도소엘 갈 필요가 없다. 그래서 종찬은 “마음으로 용서하면 된다 아임니꺼. 근데 교도소 면회까지 가가 용서한다는 말까지 하고, 그럴 필요까지 있나, 이거지예. 뭐, 신애씨가 성자도 아이고.....”라고 말했던 것이다.
맞다. 이게 핵심이다. 하지만 신애는 늘 핵심을 놓친다. 그녀가 교회 목사한테 털어놓는 생각은 이렇다.
“제가 주님을 받아들이고부터 제가 너무 고마우신 주님께 난 무얼 해야 되나 늘 생각했었거든요.”
여기가 바로 함정이다. 그녀는 그를 진정 용서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용서를 하나님께 ‘보여 주고’ 싶은 것이다. 즉, 하나님께 뭔가 “쎈” 걸로 보답하기 위해서다. 왜? 그러면 더 큰 사랑과 은혜를 내려주실 테니까. 끊임없이 확인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랑, 신앙! 사랑하거나 불안하거나! 실로 연애의 이상열기와 닮아 있지 않은가?
7.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나약함
용서하겠다는 그녀, 이미 용서 받았다는 그놈
결국 그녀는 들꽃을 한아름 들고 교도소엘 찾아간다. 그녀의 예상(혹은 바람)과는 달리 죄인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하다. 당황하는 신애. 하지만, 그녀는 선언한다. 당신을 용서하겠노라고. 그런데 죄인은 이미 용서를 받았다.
원장: 하나님이 이 죄 많은 놈한테 손 내밀어 주시고, 그 앞에 엎드려가 지은 죄를 회개하도록 하고, 제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신애: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주셨다구요?
원장: 네,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받았습니다. 그라고 나서부터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도하고 하루하루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하나님한테 회개하고 용서받으니 이래 편합니다. 내 마음이. 요새는 기도로 눈뜨고 기도로 눈감습니다. 준이 어머니를 위해서도 항상 기도합니다. 죽을 때까지 할 겁니다!
오 마이 갓!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자신보다 ‘진도’가 더 빠르다. 자신을 위해 기도했다고, 자신이 교회에 나가게 된 게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준 거란다. 이럴 수가! 신애는 교도소를 나와 들꽃을 땅에 던지고 쓰러진다. 그녀가 붙들고 있던 망상의 그물이 갈가리 찢겨져 버린 것이다.
그녀의 이 처절한 절망감은 대체 어디로부터 기인하는가? 신은 나를, 희생자인 나를 더 사랑해야 마땅하다. 그래서 내가 그 신의 은총으로 죄인을 용서하고, 그 용서를 통해 더더욱 신의 은총을 받아야 하는데 그걸 가로채 버리다니. 남편이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놀아난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또한 자신을 배반한 것이다. 원작 「벌레이야기」를 빌려 말하면, 신애는 “그의 주님으로부터 용서의 표적을 빼앗겨 버린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신애를 지탱시켜주었던 ‘주님의 사랑’이라는 판타지도 함께 증발해 버렸다. 남는 것은 신에 대한 혐오감. 그녀는 자신을 위해 기도하던 목사님과 신자들에게 말한다.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난 이렇게 괴로운데. 그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받고 구원받았어요.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왜, 왜~에?”
그러고 나서 갑자기 비명을 지른다. 싱크대 밑에 있는 지렁이를 보고 놀란 것이다. 지렁이한테 놀라 기겁할 정도로 그녀의 몸은 나약했다. 그렇게 나약한 몸으로 어떻게 원수를 용서할 수 있으리오. 다시 말하지만, 용서는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다. 그리고, 그 능력이란 오직 신체를 통해서만, 건강과 행복을 통해서만 가늠될 수 있다. 하지만 신애의 몸은 동사무소에서 사망신고를 하다가 뛰쳐나가 가슴을 쥐어뜯던 그 상태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신의 사랑은 그녀에게 어떤 신체적 힘과 능력도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오,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나약함이란!
신애가 상상한 건 아마도 이런 장면이었으리라. 죄인은 양심의 가책에 시달려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고, 자신은 신의 특별한 가호에 힘입어 기꺼이 손을 내밀어 그 죄인을 지옥의 고통에서 구제해주리라. 그러면 하느님은 그런 훌륭한 사명을 완수한 자신에게 더욱 큰 은혜를 베풀어주리라. 즉, 그녀의 사유 안에선 죄인이 직접 하느님과 교통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새로운 인과의 그물망 속에 펼쳐져야 하는 용서
여기서 꼭 환기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과정에 있어 주체와 대상, 죄와 벌, 은혜와 용서 사이의 경계가 너무 선명하다는 점이다. 진정, 용서가 가능하려면 이 각각의 사항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인과의 그물망이 펼쳐져야 한다. 무엇보다 신애가 자신의 망상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럼으로써 스스로 설정한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사건을 야기한 욕망의 배치를 그대로 고수하고서야 어찌 용서가 가능할 수 있을까? 하지만, 기독교적 틀 안에서는 각각의 경계들이 더더욱 선명해질 수밖에 없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형상 자체가 질투와 변덕, 지독한 편애와 가혹한 보복, 둘 사이를 끝없이 오가는 까닭이다. 이 적대적 양분법의 토대를 고수하는 한, ‘진정한 용서’란 절대 불가능하다. 더구나 신애처럼 신의 사랑을 연애의 구조와 오버랩시키는 경우야 말할 나위도 없다.
그녀가 죄인을 만나고 나서 무너진 건 이 때문이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귀환할 곳이 없다. 돌아갈 곳도, 머물 곳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 최후의 의지처마저 사라진 벼랑 끝에 서고 만 것이다.
8. 욕망의 회로: 출구가 없다!
능력이 없는 이의 신에 대한 복수
이제 신애는 유괴범 대신 신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탄다. 하지만, 용서가 그렇듯이 복수 역시 능력의 문제다. 그 나약한 몸으로 할 수 있는 복수라는 게 그다지 많지 않다. 테이프 가게에 가서 시디를 슬쩍한다든지, 공원에서 하는 군중목회 때 찬송가 대신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를 틀어놓는 것. 약국 장로를 유혹해서 갈대밭으로 끌고 가는 것. 자신을 위한 구역예배 때 돌을 던지는 것 등. 한마디로 “신이 있다”고 하는 일상의 여러 장면 속에서 깽판을 치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그녀는 계속 태양을 쏘아본다. 자동차에서도 갈대밭에서도 집안에서도 그녀는 계속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린다. “봐, 보이냐구?” 그녀가 하는 유치한 신성모독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연인에 대한 몸짓과 비슷하다.
그나마 이것도 오래가지 못한다. 원작에선 주인공이 자살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영화 속의 신애에겐 죽을 용기도 없다. 과도로 손목을 그었지만, 길거리로 뛰쳐나와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살려 달라”고 애원한다. 이 장면은 <초록물고기>의 결말을 연상시킨다. 조폭 조직 속에서 새로운 패밀리를 구성하고 싶었지만 막동이는 결국 죽음으로 내몰린다. 가족의 이름으로 피를 나눈 형은 경찰이고, 현실에서의 형은 조폭두목이다. 전자는 막동이를 버렸고, 후자는 막동이를 죽였다. 죽기 직전 막동이는 공중전화 박스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한다.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을 주절거리면서 흐느끼는 막동이. 막동이는 죽고, 신애는 살았다. 아니 더 정확히는 막동이는 죽임을 당했고, 신애는 죽기조차 못했다. 막동이와 신애, 모두 출구 없는 폐쇄회로에 꼼짝없이 갇힌 형국이다.
처절한 결말과 황량한 결말
막동이의 죽음을 대가로 가족들은 큰나무집이라는 식당을 차린다. 그의 오랜 꿈대로 가족들이 한군데 모여 식당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집에 조직의 큰 형이자 막동이를 죽인 장본인인 배태곤과 미애가 또 하나의 가족이 되어 찾아와선 삼계탕을 먹는다. 두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막동이네 가족들은 힘을 합쳐 씨암탉을 잡고, 배태곤과 미애는 그걸 먹는다. 피를 뚝뚝 흘리는 씨암탉과 막동이의 이미지가 교차한다. 그렇게 두 가족은 막동이를 희생양 삼아 일상을 꾸려간다. ‘스위트홈’이란 망상을 위해선 이토록 처절한 희생이 요구되는 법이다.
<밀양>의 결말은 더 냉정하다. 손목을 긋고 입원했던 신애는 종찬의 손에 이끌려 병원을 나온다. 머리를 자르려고 미장원엘 갔다가 유괴범의 딸과 마주친다. 소년원에서 미용기술을 익혀 나왔다는 것이다. 잔인한 마주침! 신애는 머리를 반쯤 자르다 말고 뛰쳐나온다. 빈집으로 돌아와 마당에서 거울을 보며 나머지 머리를 자른다. 조용히 따라 들어와 거울을 들어주는 종찬. 그게 전부다! 그녀의 앞에는 또 다시 사막처럼 황량한 일상이 펼쳐지리라.
9. 에필로그: 송강호에게 보내는 박수
무미건조하기에 더욱 개성 넘치는
고향, 가족, 교회 - 근대인들의 욕망은 이 세 가지 회로를 따라 움직인다. 그런데 이 영화가 말하듯, 그 모든 표상이 거짓된 판타지에 불과하다면 대체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가? 신애의 삶은 진정 구제불능이란 말인가? 원작에선 그렇다. 하지만 이창동 감독은 아주 실낱같은 단서를 남겨 두었다. 카센터 사장 종찬이 바로 거기에 해당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단연 신애다. 칸의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전도연의 연기는 과연 감탄할 만했다. 불안과 냉소, 허영과 절망 사이를 매끄럽게 넘나드는 그녀의 연기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어쩌면 관객과의 최소한의 소통조차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진정 경이로웠던 건 송강호의 연기였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나는 감독의 집요함과 전도연의 기량에 탄복을 거듭하다가 문득 한 명의 주인공이 뇌리를 스쳤다. 아, 송강호도 나왔지, 근데 송강호가 어땠더라? 잡힐 듯 말 듯, 그의 잔상들이 언뜻언뜻 지나갔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아, 그렇지. 영화에서 그가 맡은 배역이 바로 그것이었구나! 시종일관 등장하긴 하지만, 그저 배경처럼 존재해야 하는 인물. 처음엔 송강호가 이런 배역을 맡았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가 않았다. 송강호는 워낙 개성이 넘치는 배우라 단역이건 주역이건 일단 등장하면 화면을 압도해 버린다. 그런 그가 이렇게 ‘있는 둥 없는 둥한’ 인물을 맡다니, 그것부터가 일단 놀라운 일었다.
그가 맡은 역할은 카센터 사장, 노총각 종찬 역이다. 교양미 제로, 유머지수 꽝, 그렇다고 순정파라 하기도 뭣하고, 연애의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닌, 그렇고 그런 속물이다. 다방 종업원한테 브라자가 어쩌구 하는 허접한 농담이나 하고, 자기 혼자 집안에서 가라오케를 즐기고, 그러니 그가 하는 사랑이란 게 여주인공 신애의 주변을 하릴없이 맴도는 게 전부다. 피아노학원, 교회, 감방, 병원 등. 어디든 따라다니긴 하지만, 낭만적 멘트는 고사하고 관객의 동정을 자아낼 만한 애틋한 시선 한번 제대로 날리질 못한다. 이런 것도 과연 사랑일까 싶은, 그야말로 무미건조한 사랑이다. 개성 넘치는 배역을 소화해내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아무런 개성도 없이, 그저 타인의 배경이 되어 주는 역할은 더더욱 어렵다. 자칫하면 튀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지워져 버릴 테니까. 한마디로 있는 듯 없는 듯 아슬아슬한 경계를 표현해야 한다. 송강호는 바로 이 난감한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낸 것이다.
그냥 사는기지
따지고 보면 우리네 삶 또한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튀지 못해 안달을 하는 시대에 결코 튀지 않으면서 담담하게 일상을 유지하기란 웬만한 내공이 아니고선 결코 쉽지 않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암시하듯, 모든 정신적 거처를 잃어버린 신애를 지탱하는 건 결국 종찬으로 대변되는 멋대가리 없는 일상 외에는 달리 없다.
그런 점에서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비밀의 태양’이란 어떤 낭만도, 기교도 없이, 기꺼이 타인의 배경이 되어주는 ‘남루한 일상’, 바로 그 어름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남루한 대신 어떤 망상에도 붙들리지 않은 채 무덤덤하게 순간들을 채워가는 삶 말이다. 신애가 밀양의 뜻이 뭔지 아냐고 묻자 종찬은 이렇게 대답한다. “뜻요? 뭐 우리가 뜻보고 삽니까? 그냥 사는 기지.”
그렇다. 그냥 사는 거다. 뜻에 집착하지 않는 대신, 뜻 때문에 거짓된 환상이나 자기기만에 빠지지도 않는다. 그가 신애의 곁을 계속 지킬 수 있었던 저력(?)도 여기에 있었던 게 아닐지. 어떻든 존재와 일상에 대한 이런 통찰이 가능했던 건 전적으로 송강호의 연기 덕분이다. 개성을 완벽하게 지움으로써 일상의 저력을 멋지게 표현해낸 그에게 조용한 박수를 보낸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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