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노동이 아닌 놀이의 회복하라
하지만 이성이 비합리적인 걸 안다 해도 잃어버린 자연과의 감응력과 우연한 감성, 유머력을 되찾는다는 건 힘들다. 신체적인 활동이라면 끊임없이 연마하면 될 테지만, 정신작용이니 이건 바꾼다고 쉽사리 바뀌지 않는 구속력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레 포기할 일은 아니다. 그 가능성을 알았다면 방법을 찾아 실천해보는 수밖에 달리 생각할 건 없다.
▲ 인간의 이성은 요괴 퍼레이드로 한순간에 박살난다.
워크홀릭에 빠져 놀이를 상실한 인간
“연신 드링크제까지 마셔가면서 노동하는 근대인들을 낯설게 만드는 너구리의 시선, 사실 너구리는 우리들 생활에 낯설어진 우리들 자신의 시선인지도 모른다. 우리 안에 있는 우리의 타자. ‘대부분은 심한 스트레스를 못 견뎌 몸이 약해서 산으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정말이지 인간들은 잘도 이런 생활을 견뎌내는구나 하고 감탄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너구리들은 인간에 굴복한다. 그래서 변신할 수 있는 너구리들은 인간으로 변신해서 인간처럼 살아가고 그렇지 못한 너구리들은 쓰레기통을 뒤적이며 쥐처럼 살아간다. 그런 상황 속에서 위의 이야기는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 너구리가 한 말이다. 솔직히 그 독백을 대했을 때 ‘완전한 변이를 이루지 못하고 여전히 너구리 상태에만 머물러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너구리의 부적응 자체만을 탓했을 뿐, 거기에 감정이입을 하진 않았던 것이다.
▲ 드링크를 마셔가며 인간의 사회에 적응하는 너구리들. 이건 마치 현대인들의 은유로 보인다.
하지만 그 독백은 현대인들의 ‘일 중심적인 생활’을 비꼬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드링크제를 마셔가며 밤늦도록 일하고 숙취제까지 마셔가며 과음을 하고 휴가를 보내는 것 또한 일처럼 한다. 놀이를 상실한 인간은 어느 것 하나 일 아닌 게 없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마지못해 하는 일들의 연속 속에 살아간다.
영화 속에서 너구리들은 결국 사람으로 ‘변신’해서 살아가지만 그것은 '변신'이라기보다는 ‘적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변신이 놀이였다면 적응은 노동이다. 어떤 즐거움도 없는 변신이 바로 적응이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샐러리맨, 스낵 점원, 심지어 삼림 개발을 하는 사업가라도 변신해야 한다. ‘擬態’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면 ‘적응’일 것이다. 그것은 길들여지는 것이고 굴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문학과 경계, 이진경, 2002년
내가 최초에 변이를 생각했던 건 어휘의 제대로 된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적응하며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 대한 비판이지 않은가. 사회가 원하는 신체가 되기 위해 ‘취업고시’, ‘면접’을 준비하며 철저히 나 자신마자도 타인이 바라는 모습으로 탈바꿈시킨다.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 보니, 늘 열심히 살면서도 ‘산으로 돌아가고 싶’을 수밖에 없다.
이젠 돌아가자. 더 이상 심각해 하지도, 더 이상 어떤 책임감이나 소명 의식 따위로 나의 신체를 짓누르지 말자. 자연에 감응하고 유머를 회복하며 맘껏 기쁨과 행복에 몸을 흔들 수 있는 놀이하는 인간이 되자.
너구리들은 ‘노는 기질이 없다면 너구리는 더 이상 너구리가 아니다’라고 자신을 규정한다. 그런 규정은 우리들에게도 유효하리라 본다. 그렇게 생의 에너지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치환할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행복으로 사랑해야 할 것이다.
▲ 노는 기질이 없으면 너구리가 아니다.
노동이 아닌 놀이의 회복
인간의 시각으로 자연을 재단하여선 안 된다. 자연의 눈에서 보면 인간 또한 왜소한 존재임을 늘 상기하며 ‘자연 속의 인간’으로서 그 안에서 맘껏 즐겨보자. 그럴 때 더 이상 외로움이나 고민은 없을 것이다. 내 곁에 늘 있어온 수많은 것들이 나에게 대화를 걸어오고 위로해 줄 것이니까. 그런 상호작용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했을 때 바로 웃음을 기본으로 한 ‘변이’와 ‘탈주’가 가능할 것이다.
여전히 ‘적응’과 ‘변신’ 사이의 명확한 선을 긋는데 실패했지만, 조금씩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적응’의 주체는 타인이기에 그것에 맞추어 나의 호불호를 묻지 않고 맹목적으로 바꾸는 것인데 반해. ‘변신’의 주체는 자신이기에 그 변신의 강도나 방향을 내가 정할 수 있어서 능동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전자는 ‘노동’이 되고 오래될수록 생의 에너지가 소진되는데 반해 후자는 ‘놀이’가 되고 지속될수록 삶의 에너지가 충만해진다. 그렇게 충만해진 에너지로 맘껏 누빈다면 그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 엔딩곡은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인용
2. 정복욕의 인과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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