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나를 잊어 너를 꿈꾸는 절실함
다음 날 아침, 처키는 여느 때처럼 어슬렁거리며 고물 자동차를 끌고 윌의 집으로 간다. 헤이, 윌, 어서 나와! 쿵쿵쿵!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늘 졸린 눈을 비비며 건들건들 처키를 향해 다가오던 윌이 보이지 않는다. 처키는 놀라움과 상실감이 복잡하게 얽힌 얼굴로 윌의 텅 빈 방을 바라본다. 이제 정말 내 소원이 이루어졌구나. 윌은 기별도 예고도 없이 떠났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던 윌이 드디어 내 소원을 들어주었다. 이제 윌을 볼 수 없지만 행복하다. 처키는 만족스러운 듯, 슬픔 따위는 이미 날려버린 듯, 여유롭게 웃으며 차에 탄다.
한편, 골치 아픈 제자와의 아름다운 만남을 뒤로 하고 오랜만에 여행을 떠나려던 숀은 우편함에 꽂혀 있는 쪽지를 발견한다.
“선생님. 램보 교수님이 제 일자리 때문에 전화하시면,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꼭 잡아야 할 여자가 있거든요!”
윌은 젊은 시절의 숀을 제법 그럴 듯하게 흉내낸 것이다. 첫눈에 반한 여자를 잡기 위해 역사상 최고의 야구 시합 입장권을 날려버린 숀의 로맨틱한 정신을 계승한 윌의 편지를 보며, 숀은 투덜거린다. “망할 자식, 감히 내 흉내를 내다니!” 숀은 그제야 모든 걱정을 덜어놓은 듯 행복한 표정이다. 윌은 멋진 직장으로의 취직을 포기하고, 스카일라를 찾아 떠난다. 취직은 언제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에 치명상을 입고 홀로 떠난 연인 스카일라는 다시는 잡을 수 없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스스로 자폐를 선택한 천재 소년 윌 헌팅은 이제야 가장 중요한 것을 발견한다. 풀 패키지로 세팅되어 있는 완전한 사랑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두 사람이 만나 미래의 불안정함을 함께 견디는 것, 다만 둘이 함께 ‘시작’한다는 것이 소중한 일임을. 윌의 고물 DIY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상쾌하게 활주하며 영화는 끝난다.
수전 손택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구호물자만이 아님을 강조했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삶을 버티는 희망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평소처럼’ 사랑하고, ‘아주 좋은 시절처럼’ 꿈꿀 수 있는 문화적 인프라가 필요하다. 단지 의식주뿐 아니라 아름다운 것, 즐거운 것, 감동적인 것을 꿈꿀 권리가 필요하다. 수전 손택이 감행했던 어떤 날카로운 평론보다 매혹적인 ‘평론 활동’은,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던 사라예보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출했던 일이었다. 모두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수전 손택에게 물었다. 언제 폭탄이 떨어져 죽을지도 모르는 곳에서, 연극이 가당키나 하겠냐고. 게다가 슬픔을 잊을 만한 유쾌한 공연도 아니고, 『고도를 기다리며』라니, 너무 우울하지 않냐고. 도대체 사람들이 연극을 보러 오기는 하겠냐고. 수전 손택은 이렇게 대답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폭격으로 망가진 사라예보의 이미지만 생각하느라, 사라예보가 과거에 활기 넘치고 매력적인 수도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하다. (……) 재능 있는 배우들이 여전히 사라예보에 있듯이 교양 있는 관객들도 여전히 사라예보에 있다. 단지 과거와 차이가 있다면, 배우들과 관객들이 극장을 오가다 폭격을 맞거나 총격을 당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현관 밖을 나섰을 때뿐만 아니라, 침실에서 잠을 잘 때, 부엌에 뭔가를 가지러 갈 때에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수전 손택, 김유경 역, 『강조해야 할 것』, 시울, 2006, 407~408쪽.
그녀는 오래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흡사 사라예보를 위해, 사라예보를 향해 창작된 듯한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출하며 사라예보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물도 없고 화장실도 고장난 열악한 상황에서, 매일 폭탄 소리를 들으면서도, 언제 우리가 공연 중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고도를 기다릴 수 있는 자유, 예술을 만끽할 수 있는 자유, ‘우리가 혼자가 아님’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자유를, 사라예보 사람들은 생면부지의 뉴욕 비평가와 함께했다. 그녀는 전쟁의 고통에 빠진 사람들이 모두 현실도피적인 오락물만을 원할 것이라는 통념과 싸웠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사라예보 사람들도 자신이 처한 현실을 예술로 변형하고 확인하는 것에서 오히려 힘과 위안을 얻는다.”(위의 책, 409쪽) 전쟁이 일어나도, 내 옆의 사람이 죽어가도, 우리는 살아야 하고, 살아 있다는 것을 가장 뜨겁게 확인하는 길은, 단지 우리가 먹고 입고 싸는 동물만이 아님을 깨닫는 일은, ‘예술’과 함께하는 일임을, 수전 손택은 온몸으로 증명했다.
문화, 특히 진지한 문화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사라예보 사람들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 존엄성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 예를 들면 화장실이 오물통이 되지 않도록 변기에 물이 나오게 하는 데 거의 하루 종일 매달리면서 굴욕감을 느끼는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공공장소로 가서 줄을 서 떠온 물을 이런 식으로 쓰는 것이다. 이런 굴욕감은 공포보다 훨씬 클 수도 있다.
연극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사라예보의 연극관계자들에게는 큰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해왔던 일을 계속한다는, 즉 자신들이 정상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고작 물 긷는 사람이나 인도주의적 원조를 받는 수동적인 사람이 아닌 것이다. 실제로 사라예보에서는 자신의 일을 계속 하는 사람을 가장 운 좋은 사람이라고 여긴다. (……)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나와 배우들은 월급을 받지 않았다. 다른 연극인들도 기꺼이 우리 리허설에 참석하곤 했는데, 이것은 단순히 우리의 작품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매일 극장에 간다는 사실이 좋아서였다.
연극을 공연한다는 것은 하찮은 일이 아니라 오히려 정상성을 표현하는 즐거운 일인 셈이다.
-위의 책, 412~413쪽.
월급은 꿈도 꾸지 못하고, 조명도 화장실도 물도 없는 무대에서, 배우가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호텔 식당 쓰레기통을 뒤져 빵을 찾아내 스텝들과 나눠 먹으며, 고도나 클린턴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오지 않는 소품을 기다리며, 수전 손택은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문학은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의 문제 아닌 다른 문제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능력을 길러주고, 발휘하도록 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 아닌 다른 사람이나 우리의 문제 아닌 다른 문제에 감응할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자신을 잊을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수전 손택, 이재원 역, 『타인의 고통』, 2004, 208쪽.
내 몸의 고통이 아닌 타인의 고통을 앓는다는 것. 그것은 연민이나 동정이나 분석이나 평가가 아니라, 그들 삶을 향한 완전한 몰입, 나를 잊어 너를 꿈꾸는 절실함이다. 아무런 ‘실용성’이 없지만, 나 아닌 타자의 욕망을 상상하게 만드는 공감의 장치, 내가 아닌 타자의 삶을 살아내는 망아(忘我)의 탈주. 그것이 예술의 힘 아닐까. 수잔 손택은 『문학은 자유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학은 이 모든 불운의 감옥에서 탈주하여 자유의 공간으로 진입할 수 있는 여권이라고. “문학, 그것도 세계 문학에 다가간다는 것은 국가적 허영심, 속물 근성, 강제적인 편협성, 어리석은 교육, 불완전한 운명, 불운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문학은 광활한 현실로, 즉 자유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이었습니다. 문학은 자유였습니다. 특히 독서와 내면의 가치가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는 이 시대에도 문학은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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