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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임용한 - 손자병법, 제3편 모공(謀攻) 본문

고전/손자병법

임용한 - 손자병법, 제3편 모공(謀攻)

건방진방랑자 2025. 2. 1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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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공(謀攻)

 

 

전쟁과 경영이란 주제로 강연을 시작했을 때, 어떤 기업인이 내게 물었다.

사람들은 기업 경영이나 스포츠의 세계도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보면 전쟁이 경영에 많은 인사이트를 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쟁과 경영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전쟁은 적을 죽여야 승리할 수 있지만, 기업은 고객을 늘려야 합니다. 기업의 원칙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의 이윤을 얻는 것입니다. 효율이 생명이지만, 전쟁은 효율보다 결과입니다. 막대한 희생을 내서라도 승리를 거두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전쟁과 경영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런 비교는 적절하지 않다. 손자병법에서는 특히 그렇다. 전쟁이야말로 극도의 효율 싸움이다. 인해 전술처럼 10배의 희생을 치러서라도 승리를 추구하는 경우, 물량전, 소모전을 펼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소모전도 궁극적으로는 효율과 이익이란 대원칙 안에 있어야 한다. 기업도 장기적 전략 아래 적자경영, 물량공세를 펴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전쟁이 극도의 효율 싸움이라는 가장 명확한 주장이 모공편이다. 모공의 뜻은 힘으로만 밀어붙이지 말고 머리를 써서 싸우라는 말이다. 계략과 책략을 무조건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다. 책략, 두뇌 싸움을 지배하는 근본적 원칙이 있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것이다.

천하통일의 병법을 모색한 손자는 아군 전력을 최대한 온전한 채로 적은 굴복시켜 아군의 희생도 극소화하고, 패배한 적을 최대한 내 편으로 흡수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천하를 얻을 수 있다. 승리를 거듭한다고 해도 아군은 계속 소모되고 적을 흡수하지 못하면 승리할수록 전투력이 고갈되어 결국 패망할 것이다.

 

 

 

 

1. 적국을 온전한 상태로 두고

 

용병하는 법은 적의 나라를 온전한 상태로 두고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적의 나라를 파괴하는 것은 차선의 방법이다. 적의 군대를 온전한 상태로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고 적의 군대를 파괴하는 것은 차선의 방법이다. 적의 부대를 온전한 상태로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고, 적의 부대를 파괴하는 것은 차선의 방법이다. 적의 오()를 온전한 상태로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고 적의 오를 깨뜨려 굴복시키는 것은 차선의 방법이다.

孫子曰: 凡用兵之法, 全國爲上, 破國次之; 全軍爲上, 破軍次之; 全旅爲上, 破旅次之; 全卒爲上, 破卒次之; 全伍爲上, 破伍次之.

 

이런 까닭에 100번 싸워 100번 승전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 싸우지 않고 적군을 굴복시키는 용병술이 최선 중에서도 최선이다.

是故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사람들은 싸우지 않고 이긴다는 말을 참 좋아한다. 단 한 명의 병사도 희생시키지 않고, 단 한 푼의 비용도 들이지 않고 승리한다. 얼마나 멋진가? 그런데 이것은 아주 위험한 해석이다. 이런 얌체 같은 자세로 전쟁이나 사업에 임하면 조직 내부에 보신주의나 양성하다가 몰락한다.

 

손자가 적도 보존하고 아군도 보존하자고 한 것은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성과를 얻기 위해서다. 항우(項羽, BC232~BC202)가 적군 병사 40만 명을 학살하고 얻은 승리는 그만큼 적대감을 낳았다. 승전국이 승자의 열매를 누리려면 전쟁의 승리로 더 많은 것을 얻고, 다음 전쟁을 감당할 수 있는 병력과 물자, 지원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 계산 없이 승리에만 도전하면 그 군대는 패망한다.

 

모든 전략에는 전투에서 승리하는 방법만이 아니라 적의 마음을 얻고 지지를 얻어내는 전략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적의 마음을 얻고 아군으로 만들 수 있는 전략은 어떤 것일까?

 

 

적의 마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포악한 지휘관은 상대를 제압하려고만 한다. 폭력과 강압은 강제로 머리를 숙이게 하는 데는 효과가 있지만 그뿐이다. 반대로 적에게 동정, 혜택을 베푸는 지휘관도 있다. 후대의 지식인들은 칭찬하겠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호의가 배신과 실망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적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단순한 방법이나 감상적인 접근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다. 냉철하고 현명한 분석과 자기희생적인 포용이 필요하다.

 

9~10세기경, 유럽의 국가와 도시들은 바이킹의 약탈로 골머리를 앓았다. 바이킹들은 해변이나 강에서 번개처럼 나타나서 약탈하고 사라졌다. 바이킹의 배는 유럽에서 가장 빨랐고, 흘수선이 낮아 잘 탐지되지도 않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바다에서 가시거리가 3, 4킬로미터밖에 되지 않는 때도 있다. 최대 속도가 18~24킬로미터 정도인 바이킹선의 용두가 수평선 위에 보였다 하면 벌써 해안가에 도달하고 있었다. 주민들이 무장을 갖추고 요새로 들어갈 시간도 없고, 수비대가 도달할 시간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럽 군대가 바이킹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승리를 거두는 적도 있었다. 그러나 승리를 거두어도 멀리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는 바이킹을 멸절시킬 수도 없고, 그들의 약탈욕을 근절시킬 수도 없었다. 도주해서 살아남은 바이킹은 전사자의 아들, 조카와 함께 다시 쳐들어 왔다.

 

바이킹에게 금과 은을 주어서 돌려보내는 제후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마음을 얻는 방법이 아니었다. 돈을 받은 집단의 마음을 얻을 수는 있었지만 시효가 짧았고, 오히려 다른 부족의 약탈 의지를 돋웠다.

 

845년 바이킹 수장 라그나(Ragnar)는 부활절에 센강을 타고 들어와 파리를 습격했다. 요새화된 파리의 성채는 바이킹을 막아냈지만, 포위가 길어지자 샤를 2(charles , 823~877)는 거금을 줘서 그들을 돌려보내야 했다. 이때 지불한 금액이 은 6톤 정도였다.

 

라그나는 돌아갔지만 라그나의 성공을 본 바이킹 부족들이 흥분했다. 수십 개의 부족이 연합한 4만의 대군이 파리로 몰려들었다. 4만 명이면 그 당시 유럽에서 큰 나라 하나를 정복하고도 남을 병력이었다. 게다가 바이킹 전사들의 전투력은 유럽 봉건 기사들의 4~10배였다.

 

바이킹은 현재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는 파리의 시테섬 요새를 포위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프랑스는 기적적으로 버텨냈지만 충격을 받았다. 결국 프랑스 왕은 바이킹의 마음을 얻을 방법을 궁리하게 된다.

 

프랑스의 단순왕샤를 3(charles le Simple, 879~929)는 별명처럼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이 별명은 솔직왕(Simplex)’이 와전된 것이지만, 솔직하지도 않았다. 권모술수에 능했던 그는 바이킹의 약점과 욕구를 섬세하게 파고 들었다. 바이킹은 수십 개의 종족으로 분열되어 있어서 국가적인 유대감이 없었다. 그들끼리도 곧잘 다투고 분쟁을 일으켰다. 그들이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척박한 땅에서 위험한 해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그만두고 비옥한 땅에서 풍족하고 여유로운 삶을 누리는 것이었다. 유럽인들은 바이킹이라는 험악한 이미지 탓에 이들의 속마음을 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같다.

 

911년 샤를 3세는 바이킹 족장 중에서도 악명을 떨치고 있던 롤로(Rollo, ?~930)에게 동맹을 제안한다. 자신의 서녀 기셀라를 룰로와 결혼시키면서 그에게 노르망디 땅을 주고 루앙의 백작으로 봉한다는 제안이었다. 그 대신 롤로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샤를 3세에게 충성을 바치며, 다른 바이킹의 침략을 막는다는 조건을 걸었다. 롤로는 이 제안에 동의했고 양자는 생클레르에서 협정에 사인했다.

 

롤로는 바이킹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성실하게 조약을 준수했다. 적어도 샤를 가에 대한 충성 약속은 확실하게 지켰다. 노르망디가 봉쇄되면서 영국이나 프랑스로 출동한 바이킹들은 중간 기착지가 없어져 상당한 곤란을 겪게 되었다.

 

 

바이킹을 상대할 때 프랑스가 놓친 것

 

롤로를 성공 사례로 제시하는 것에 반론도 있을 것이다. 롤로의 부족은 세력을 점차 확장해 노르망디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들은 노르만족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노르망디에 살면서 유럽인의 정치감각과 기병 전술마저 습득해 바이킹보다 더 위험한 전투력을 장착하게 되었다. 롤로의 5대손인 정복왕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 1028~1087)은 영국의 헤이스팅스에 상륙해 사촌인 해럴드를 살해하고 영국의 왕이 되었다.

 

이렇게 성립한 노르만 왕조는 영국과 노르망디의 영지를 동시에 차지하고, 앙주 제국이라는 전례 없는 강국을 형성했다. 나중에 영국과 프랑스 간에 벌어진 100년 전쟁(1337~1453)도 이 앙주 제국의 유산, 즉 프랑스 내에 있는 영국 왕의 땅이 계기가 된 것이었다.

 

이런 역사를 보면 마음을 얻어 내 편으로 만들기는커녕 위험한 적을 끌어들여 국가에 전쟁과 고통을 안겨주고 남 좋은 일만 시켰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아주 위협하고, 바로 이런 생각으로 인해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하는 것이다.

 

적의 마음을 얻기 위해 처음에는 적의 약점과 욕구를 파고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연결의 접점일 뿐이다. 궁극적으로는 공정한 대우와 경쟁을 용인해야 한다. 샤를 3세가 실수한 것이 아니라 롤로의 노르만족이 경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상대를 포용하려면 상대의 성장 가능성까지 인정하고 포용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포용력이다. 상대의 권리를 제약하고 불이익을 줘서 경쟁 상대 또는 나를 위협하는 상대로 성장하지 못하게 하려는 마음이 앞선다면 그것은 상대를 속이고 이용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꼼수는 결국은 드러나기 마련이라서, 마음을 얻고 새로운 정복지를 향해 같이 나아가기는 불가능해진다.

 

우리 기업은 인수합병(M&A)에 성공하는 사례가 적다고 한다. 두 기업이 합쳐서 시너지 효과가 나는 것이 아니라 분열과 반목으로 양쪽 다 장점을 상실하거나 기업 발전의 저해 요인이 된다고 한다. 기업인들이외국에서 인재를 수입해도 성공 사례가 드물어 고민이라는 이야기도 여러 번 들었다. 가장 큰 이유는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원칙을 몰라서가 아니라, 마음을 얻기 위해서 내가 내놓아야 하는 것, 공정한 자세와 대우를 꺼리기 때문이다.

 

 

 

 

2. 최상의 용병법

 

최상의 용병법은 적의 전략을 사전에 분쇄하는 것이다. 그다음 방법은 적의 외교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다음 방법이 적의 군대를 공격하는 것이다. 가장 나쁜 방법이 적의 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故上兵伐謀, 其次伐交, 其次伐兵, 其下攻城.

 

성을 공격하는 방법은 부득이할 때만 사용해야 한다. 성을 공격하려면 운제, 공성탑 또는 충차를 만들고 기타 여러 가지 공성 기구를 갖추는 데만 3개월은 소요된다. 공성용 토산을 쌓는데 또 3개월이 걸린다. 전투가 지지부진해서 장수가 분노를 이기지 못해 사졸을 성벽에 개미 붙듯 기어오르게 하면 사졸의 3분의 1을 죽이게 될 것이다. 그러고도 성을 함락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 이것이 공성전의 재앙이다.

攻城之法, 爲不得已. 修櫓轒轀·具器械, 三月而後成, 距闉, 又三月而後已. 將不勝其忿, 而蟻附之, 殺士三分之一, 而城不拔者, 此攻之災也.

 

그러므로 용병을 잘하는 자는 전투를 하지 않고 적의 군대를 굴복시킨다. 성을 공격하지 않고 성을 빼앗는다. 지구전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국가를 파손시킨다. 이렇게 반드시 온전한 채로 적을 굴복시키는 방법으로 천하를 다툰다. 군대는 소모하지 않고 이익은 완전하게 얻는 것, 이것이 모공의 법이다.

故善用兵者, 屈人之兵而非戰也. 拔人之城而非攻也, 破人之國而非久也, 必以全爭於天下, 故兵不頓, 而利可全, 此謀攻之法也.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으로 손자는 적의 전략을 사전에 분쇄하라고 말한다. 적의 전쟁 능력, 의지,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미리 제거하는 것이다. 그중에서 직선적인 방법이 적의 전쟁 자원을 제거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귀족이었던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 부자는 12~13세기 유럽 최고의 전사이자 풍운아였다. 같은 이름을 지닌 두 사람 중 아버지(1175~1218)는 프랑스에서, 아들(1208~1265)은 영국에서 활약했다. 레스터 백작이란 작위를 받은 아들은 귀족 세력을 이끌고 왕에 대항해서 1265년 영국 최초의 의회를 열었다.

 

아버지는 아들보다 덜 유명하지만 더 모험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4십자군 원정에 참가했는데, 십자군이 엉뚱하게 비잔틴 제국을 공격해서 약탈하자 이를 거부하고 단독으로 동조자들을 모아 팔레스타인으로 갔다. 정의로운 용기였지만, 병력이 부족해서 큰 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하지만 전사로서 그의 명성은 높아졌다.

 

프랑스로 돌아온 그를 교황 인노켄티우스 3(Innocentius , 1160?~1218)가 새로운 십자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알비 십자군이라고 알려진 이 십자군의 목표는 이슬람이 아니라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 지방에 자리 잡은 이단 종파인 알비파(Abigenses)였다. 교황은 이 사명을 완수하면 해당 지역을 시몽의 영지로 하사하겠다고 약속했다.

 

시몽에게 약속한 땅, 알비파의 거점은 툴루즈 지방이었다. 이곳은 프랑스 최대의 영지 중 하나로, 툴루즈의 영주 정도면 프랑스의 왕권을 넘볼 수도 있었다. 야심가인 시몽이 이 요청을 마다할 리가 없다. 반면 툴루즈의 영주 레몽 6(Raymond , 1156~1222)도 순순히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다. 두 거한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군사적 역량으로 보면 레몽은 십자군의 영웅 시몽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엉뚱한 조건이 시몽의 발목을 잡았다.

 

시몽은 자기 병력이 적었다. 전쟁에 필요한 군대는 십자군에 종군하는 자원 기사로 충당해야 했다. 십자군 모집을 담당한 사람은 교황이었다. 교황은 알비 십자군에 종군하면 십자군 원정에 종군하겠다는 맹세를 대체하는 것으로 인정해준다는 교서를 발표했다. 먼 중동으로 가는 것보다 프랑스는 가까웠기에 수많은 기사가 응모했다. 그런데 여기서 교황이 실수인지 음모인지 모를 이상한 결정을 내렸다. 종군 기간을 겨우 40일로 한정한 것이다. 40일이면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가는 배를 타기 위해 항구까지 가는 시간보다 짧았다. 교황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었는지는 미스터리다. 음모가 횡행하던 시절이라, 알비파를 공격하지만 내심 이들의 전력을 약화시켜서 다른 뒷거래를 하려는 속셈일 수도 있었다. 다른 귀족들은 알비 십자군의 지휘를 거절했다.

 

시몽이 순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야심과 천재성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이 모험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조건이 너무 열악했다. 시몽은 극단적인 승리와 패배를 반복했다. 승리를 거두어도 40일이 지나면 병력이 급감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듬해 봄 새로운 자원자가 올 때까지 시몽은 악전고투하며 방어전을 지휘하고 봄이 되면 서둘러 초고속 정복전을 시행했다. 시몽은 집요한 노력으로 조금씩이나마 정복지를 확대해 갔지만, 그의 약점이 세상에 다 드러나자 정복한 지역이 쉽게 반기를 들었다.

 

전쟁에서 시간을 끌면 병력과 물자는 줄어들지만, 병사들의 전투 경험은 늘어난다. 알비 십자군 원정이 길어지면서 알비파인 랑그도크 도시들의 전투력과 저항 의지가 높아졌다. 툴루즈도 투항과 배신을 반복했다.

 

1217~1218년 시몽은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툴루즈 공략을 시도한다. 툴루즈는 거의 10개월을 버렸다. 시몽의 승리가 코앞에 있던 1218625일 투석기에서 발사된 돌 하나가 시몽의 머리를 강타했고, 그는 즉사했다.

 

시몽은 당시 최고의 지휘관이었지만, 40일이란 종군 기간은 아무리 뛰어난 군사 지도자라도 극복할 수 없는 치명적 약점이었다. 상대가 시몽의 전략 자원을 제거한 것이라기보다는 교황이 제한한 것이지만, 적의 근원적인 전쟁 수행 능력을 파괴하는 전략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적의 목적과 이익을 간파한다

 

적의 목적과 이익의 근원을 제거하는 방법은 상대의 전쟁 의지와 전략적 의도를 꺾어버린다. 여기서 말하는 목적과 이익이란 표면에 드러난 목적이 아니라 그 이면에 감추어진 목적, 또는 자신도 생각지 못하는 전략적 전제를 포함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스파르타는 군사력, 아테네는 우월한 경제력을 서로 장점으로 삼았다. 해군력도 아테네가 우월했지만 그 이면에는 선박을 건조하고 우수한 선원을 고용하는 경제력이 있었다. 아테네는 이런 경제력을 바탕으로 스파르타의 해안을 봉쇄하고 지구전을 폈다. 스파르타는 육지에서 싸움을 걸었지만 아테네는 대응하지 않았다. 이렇게 장기전이 되고 아테네가 최종 승리를 전망하게 되었을 때, 아테네에서 스파르타로 망명한 알키비아데스(Alkibiades, BC450?~404)가 스파르타에 진정한 공격 목표를 가르쳐 준다. 아테네의 힘은 경제력에서 나오니, 아테네가 보유한 은광과 아테네 사이의 길을 점령하고 요새를 쌓으라고 한 것이다. 알키비아데스의 조언으로 전세는 당장 역전되었다. 이것이 적의 전략적 전제, 적의 전략의 근원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99310월 거란의 동경 유수(留守) 소손녕(蕭遜寧, ?~?) 고려를 침공했다. 차후 26년간 지속될 거란전쟁의 시작이었다. 고려는 거란의 침공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고, 여진족이 전해준 침공 첩보마저 무시했던 터라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했다. 소손녕은 자신 병력이 80만 대군이라며 고려를 협박했다. 동경의 병력이 5~6만명 정도였고 그것이 소손녕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치였지만 고려는 너무 당황해서 80만 대군의 진위를 확인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고려는 시험 삼아 선발대를 파견했는데, 이들이 패배하자 겁에 질렸다. 조정은 논란 끝에 자비령 이북을 거란에 바치고 휴전을 맺기로 했다. 이 계획을 반대한 사람이 서희(徐熙, 942~998)였다. 서희는 소손녕을 찾아가 담판을 짓고, 자비령 이북을 때어주기는커녕 그때까지 고려가 여진족에게서 탈환하지 못하고 있던 평안북도 지역의 강동 6흥화(興化:의주), 용주(龍州:용천), 통주(通州), 철주(鐵州:철산), 귀주(龜州:구성), 곽주(郭州)까지 되찾는다 이것이 이른바 서희의 외교 담판이다임용한 지음, 한국고대전쟁사2 : 사상 최대의 전쟁혜안, 2012.

 

서희는 사실상 이길 가능성이 없었던 전쟁에서 전투 없이 소손녕의 군대를 철수시켰을 뿐 아니라 강동 6주까지 확보했다. 나중에 거란은 이 성급한 결정을 심히 후회하게 되는데, 이어지는 5차의 침공에서 강동 6주에 설치한 고려의 방어선이 거란의 승리를 가로막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강감찬(姜邯贊, 948~1031)의 귀주대첩도 이 강동 6주의 방어선이 도와준 덕분에 얻은 성과였다.

 

서희의 외교 담판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서 평안도 지역에 대한 역사적 소유권과 정통성이 고려에 있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넌센스다. 그와 같은 명분론에 납득하고 돌아갈 착한 군대는 세상에 없다이하 서해의 외교와 건립의 1차 침공에 대해서는 임용한 지음, 전쟁과 역사2육군본부 편, 한국군사 사3 : 고려1참조.

 

서희의 성공 비결은 손자병법의 원리대로 적의 전략적 목적과 약점을 사전에 간파하고 회담장에서 그것을 공격해 허문 것이다. 소손녕의 전략적 의도는 고려와 거란 사이의 발해 유민으로 구성된 정안국과 여진족, 그리고 고려의 연합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당시 거란은 중국 침공을 국가적 과제로 추진하고 있었고, 그 사전 작업으로 자신들의 배후를 위협하는 여진과 고려를 제압해서 대륙 침공에 안심하고 전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자 했다.

 

그런데 정안국과 여진족의 저항이 강력해서 배후 정리 작업이 1단계에서부터 막혀 있었다. 거란은 여진의 반() 거란 전선에 고려까지 합세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소손녕은 정안국과 여진 세력을 버려둔 채 더 남쪽에 있는 고려로 진군하는 위험한 원정을 감행했다. 그의 목적은 고려를 위협해서 고려가 여진과 동맹을 맺는 것을 방지하거나 거란의 협력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유와 목적은 그럴듯하지만, 이 전략은 엉성하고 즉흥적이었다. 소손녕의 고려 침공도 사전에 충실하게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관례적인 약탈 전쟁을 되풀이하다가 전략적 동기를 명분으로 삼아 우발적인 침공을 감행한 것이었다. 서희는 거란 쪽의 사정을 명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소손녕의 행태와 그가 거란의 배후에 정안국과 여진을 그대로 두고 고려로 깊숙하게 들어와 있다는 상황을 합쳐서 소손녕의 숨은 목적과 장기전을 할 수 없다는 약점을 간파했다.

 

서희는 이 약점을 노려서 거란과 고려가 연합해서 남북에서 여진을 협공하자는 구미에 맞는 제안을 했다. 소손녕이 이 미끼를 덜컥 물자, 협공의 대가로 강동 6주를 고려가 차지한다는 조건을 끼워 넣었다. 소손녕은 강동 6주의 중요성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서희가 거란과의 피할 수 없는 전쟁을 예상하고 강동 6주를 기반으로 압록강 변에 마지노선을 구축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서희는 적의 목적과 이익을 간파하고 역이용해 싸우지 않고 승리를 얻었다.

 

 

외교를 제거한다

 

외교를 제거한다는 표현은 적의 동맹국이나 지원국을 떨어뜨리라는 말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서방 진영이 러시아를 지원하는 북한을 압박해서 지원을 철회하게 하든가, 러시아가 미국이나 서유럽 국가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끊게 하려는 노력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우리 역사에는 외교를 제거해서 승리를 거둔 사례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북쪽으로는 통일 제국을 이루는 중국이 있고, 나머지 삼면은 바다로 둘러싸여 주변국이 적고 국가 간의 이해관계가 단순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전국시대나 유럽처럼 수많은 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나라, 외교와 비밀 협정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지역의 전쟁에서는 외교가 복잡다단하고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국시대의 역사에서 이런 사례를 중요한 전쟁마다 찾을 수 있다.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추구할 때 최대의 적이 초나라였다. 진나라가 지금의 화산과 함곡관을 지나 낙양 쪽으로 진군하면 남방의 초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해서 군대를 물리게 했다. 반대로 진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면 화북의 위, , 한이 연합해서 진나라의 북쪽을 쳤다.

 

남북으로 동시에 군대를 내보내면 간단하겠지만 천하의 진나라도 그럴 능력은 되지 못했다. 애타는 상황을 타개한 것이 장의(張儀, ? ~BC309)를 필두로 하는 진나라의 모사들이었다. 종횡가로 유명한 장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는 외교정책을 추진했다. 가까운 나라는 공격하고, 멀리 있는 나라는 회유해서 친교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 표적은 초나라였다. 초는 전국 7웅 가운데 진나라를 제외하면 가장 강대하고 면적이 넓은 나라였다. 그들은 동쪽 끝에 위치한 강국, 즉 진나라와는 거리가 가장 먼 산둥의 제나라와 동맹을 맺고 진나라를 저지했다.

 

장의는 초나라에 천하 양분지계(兩分之計)라는 그럴듯한 타협책을 제시했다. 진나라는 화북을 초나라는 양쯔강 이남을 차지해서 천하를 양분한다. 그 대신 제나라는 초가 접수하고, 초나라 쪽으로 남쪽으로 들어가 있는 진의 영토도 초나라에 양도한다. 이렇게 되면 중국 천하는 일직선으로 양분된다.

 

초나라는 이 제안에 솔깃해서 넘어갔다. 그러자 장의는 바로 제나라에 사신을 보내 초나라의 배신을 알렸다. 동쪽 끝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진나라에 대한 두려움이 적었던 제는 초나라의 배신에 격노했고, 진나라와 합쳐서 초를 동서 양쪽에서 동시에 공략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진과 제의 연합공격에서 제는 큰 이득을 보지 못했지만 진나라는 초나라의 전진기지와 수도까지 함락하고 초나라의 수도를 동쪽으로 천도시켰다. 마침내 진나라의 천하통일을 향한 거침없는 진군이 시작되었다.

 

전국시대의 전략지도. 진나라는 강대국 초를 치기 위해 제나라와 초나라의 동맹을 깨는 책략을 펼쳤다.

 

외교전에서 승리하려면 과거의 원한과 감정을 접고 현실과 미래가치에 집중해야 한다. “국제정치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라는 말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우리는 감정을 이겨내지 못해서 이 교훈을 실현하지 못한다. 우리 주변의 인접국이라야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북한뿐인데 매사에 감정과 선입견이 앞선다. 이런 점을 지적하면 그 말이 옳지만 우리는 특별한 역사가 있어서 그 교훈을 적용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우리가 손자의 조언에 따라 현명하게 외교하려면 이런 선입견부터 가장 먼저 버려야 한다. 우리가 특별한 역사, 특별한 원한이라고 말하는 것들보다 훨씬 심한 경험을 한 나라도 세계에 허다하다. 독일과 프랑스는 20세기 전반에만 두 번 대전을 벌여 1,00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고, 승리와 패배, 정복과 복수를 주고 받았다. 모든 면에서 라이벌이지만 지금도 각자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면 협력한다.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명분과 감정에 사로잡히면 한 번으로 끝날 피해가 재생산이 되고, 그 피해는 우리 자신과 후손이 받는다.

 

 

성을 공격하지 않고 성을 빼앗는다

 

손자는 무모하게 공성전을 벌이면 병사의 3분의 1을 죽이고도 성을 빼앗지 못하는 수도 있다고 했다. 보통 군대가 30퍼센트의 전력을 상실하면 전멸이라고 말한다. 전멸하도록 몰아붙이고도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 의미다. 무모한 전투, 지휘관이 잠깐의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고 병사들을 희생시키는 전투는 생각 외로 많다. 기록에 남지 않은 전투까지 합하면 전쟁사에는 모공보다 맹공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리델 하트의 간접 접근론

 

리델 하트(Basil Henry Liddell Hart, 1895~1970)는 작위까지 받은 영국의 저명한 군사 이론가다. 1차 세계대전에 대위로 참전한 그는 독일군의 가스 공격으로 폐와 심장에 치명적인 장애를 얻어 조기 퇴역했다. 그 뒤에 전쟁사 연구에 뛰어들어 1938년에 유명한 전략론을 저술했다. 이 책에서 리델 하트는 일세를 풍미한 간접 접근론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간략히 말하면 전술에는 적을 직접 공격하는 직접 접근 방식과 다양한 방법으로 적의 전투력을 제어하고 목적을 달성하는 간접 접근 방식이 있다. 손자의 모공은 간접 접근에 해당한다. 리델 하트는 세계 전쟁사를 검토한 끝에 전쟁사의 위대한 승리는 모두 간접 접근으로 이루어낸 것이었다고 단언한다. 손자가 모공론을 제시했다면 리델 하트는 모공의 위력을 실증적으로 증명한 셈이다.

 

리델 하트의 간접 접근론은 상당한 비판을 받고 있다. 전쟁사를 너무 단순하게 도식화하고, 이 이론에 맞추느라 그 범주가 너무 넓고 자의적이라는 비판이다. 나 역시 그런 비판에 동의한다. 전략론만이 아니라 리델 하트의 초기 저작을 읽으면 자극적인 결론을 내려서 명성과 인기를 얻으려는 조급한 심정이 잘 보인다.

 

그렇지만 리델 하트의 문제의식에는 공감한다. 모든 위대한 승리가 간접 접근이라는 해석은 과장된 주장이지만, 손자의 모공부터가 간접 접근과 유사하다.

 

델 하트는 모공이 사라진 직접 접근 방식의 끔찍함, 그것이 야기하는 전쟁의 비극을 1차 세계대전에서 몸소 체험했다. 콘크리트 방호벽, 대포와 기관총으로 방어되는 킬링존으로 뻣뻣하게 선 보병들을 덩어리째 집어넣는 전술을 전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10~15분 만에 2,000명의 병사가 고깃덩어리로 변해버리는 전투를 인간이 몇 년씩이나 감행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 인간은 그런 전쟁을 몇 년씩 집요하게 지속했었다. 인간은 그토록 무모하다. 아니, 전쟁이 그런 무모함으로 인간을 몰아넣는다. 리델 하트 대위나 손자 역시 전투 현장에서 똑같은 장면을 목격했을 것이고 이런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전쟁은 분노가 아니라 지혜가 지배해야 한다.”

 

미군의 운명을 바꾼 최연소 중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 최후의 도박이라고 불리는 벌지 전투는 도박치고는 꽤 성공에 근접했던 도박이었다. 비록 실패했지만, 미군에게 역사상 최대의 패배라는 치욕을 안겨주었다.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 형편없는 편제 속에서도 독일군은 놀라운 전투력을 보여주었다. 독일군이 히틀러의 야욕에 의한 침략군이 아니고, 벌지 전투가 명분이 정당한 전쟁이었다면 그들이 보여준 투지와 전투력, 온갖 악조건을 뚫고 전진해 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한 편의 드라마가 되었을 것이다.

 

194412, 독일군의 주력은 벨기에의 아르덴 삼림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이곳은 1940년 프랑스 침공 때 독일 기갑부대가 기습적인 전격전으로 프랑스를 몰락시킨 곳이다. 프랑스는 아르덴 지역은 기갑부대의 통과가 불가능하다고 방심하다가 치명타를 입었다. 연합군은 독일이 한번 써먹은 작전을 또 써먹겠냐는 이유로 방심하고 있었다.

 

독일군 공격부대의 최남단에는 제3팔슈름야거(독일 공수부대) 사단이 벨기에의 말메디 동쪽에 위치한 로스하임 협곡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미군 99보병 사단과 106보병 사단의 경계지대를 치고 나갈 예정이었다. 이들이 말메디로 가는 도로를 확보하면 가장 저돌적인 지휘관 요아힘 파이퍼(Joachim Peiper, 1915~1976)의 전투단이 이곳을 통과해 말메디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이 지역의 방어는 미군 14기병연대가 맡고 있었는데, 사단 규모의 병력이 필요한 지역을 겨우 한 개의 연대가 커버하고 있었다. 돌파는 식은 죽 먹기였다.

 

1216일 새벽, 독일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3팔슈름야거 사단의 진격로 북단에 란체라트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 야산에 라일 벅(Lyle Bouck, 1923~2016) 중위가 지휘하는 394보병연대 3대대 소속의 정찰소대가 참호를 파고 경계근무 중이었다. 병력은 18명이었는데 그중 세 명이 마을로 들어갔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마을의 수비를 담당했던 14기병연대의 대전차포 소대가 독일군이 몰려오자 벽 중위에게 알리지도 않고 황급히 철수해버렸던 것이다스티븐 J. 잴로거 지음, 강경수 옮김, 벌지전투 1944플래닛미디어, 2007, 101~103..

 

벅 중위를 포함한 15명은 물러서지 않았다. 분대(5~15) 병력이 조금 넘는 이 소대가 독일 공수부대 한 연대(1,000~3,000)의 공격을 온종일 막아냈다. 독일군은 미군 소대원들이 학살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저녁때까지 세 번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애송이 신참이었던 벅 중위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유능하다고 소문난 독일군들이 무모한 정면 공격을 반복하고 있었다. 베테랑이었던 미군 하사관은 독일군이 우회 공격의 명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독일군의 행동이 고맙기는 했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들은 독일군의 사정을 모르고 있었다. 팔슈름야거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병력은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잡탕이었고, 연대장은 얼마 전까지 비행장을 관리하던 공군 참모장교였다. 저녁이 되자 참다 못한 노련한 하사관이 분노를 터트리며 지휘관을 향해 무모한 정면 공격을 중단하고 우회 공격을 하라고 소리쳤다. 그제야 독일군은 우회 공격을 펼쳤고, 한 줌도 되지 않는 미군은 순식간에 궤멸되고 말았다. 벅 중위가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이 소대의 분전으로 독일군 제1친위기갑사단의 공격이 하루 지연되었다. 이 하루가 벌지전투에서 수많은 미군을 구했다. 그날 밤 독일군 진영에 있던 벅 중위는 공격 지연에 분한 파이퍼 중령이 연대장에게 화내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한다.

 

중위와 생존한 부하들은 다섯 개의 십자수 훈장을 받았다. 한 소대에 십자수 훈장이 다섯 개나 수여된 것은 최다 기록이었다. 벅 소대의 분전은 칭찬할 만한 것이지만, 이 훈장의 진짜 공로자는 무모한 정면 공격을 반복한 독일군 지휘관이었다. 직접 접근과 간접 접근의 차이는 이처럼 크고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3. 아군과 적군의 병력 차에 따른 대처

 

아군의 병력이 적군의 10배면 적을 포위한다. 아군의 병력이 적군의 5배면 적을 공격한다. 아군의 병력이 적군의 2배면 적을 분산한다. 아군과 적군의 병력이 대등하면 능숙하게 적과 싸운다. 아군의 병력이 적군보다 적을 때는 후퇴한다. 아군의 병력이 적군의 병력보다 매우 열세면 전투를 피한다. 그런 까닭에 열세인 군대가 피하지 않고 버티면 대군에게 패해 사로잡히게 된다.

故用兵之法, 十則圍之, 五則攻之, 倍則分之, 敵則能戰之, 少則能逃之, 不若則能避之. 故小敵之堅, 大敵之擒也.

 

이 글에서 말한 병력은 꼭 병사의 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군이 수는 10배로 많지만, 훈련이 부족하고 전투력도 떨어지는 징집병이고 적은 정예 기병부대라면, 진을 벌려 포위했다가는 적에게 강행 돌파를 허용하거나 아군 사령부까지 위기에 빠지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병력은 양측의 편제와 전투력이 비슷하다는 것을 가정한 수치다.

 

적을 포위하려면 10배의 병력이 필요하다는 건 감상적 수치가 아니고 개략적인 계산으로 도출한 수치다. 성을 포위하려면 공격 측은 성의 4대문을 봉쇄해야 한다. 실제로 성은 네 개 이상의 문이 있지만, 계산을 위해 네 개를 기준점으로 사용한다. 적이 성문 한 곳으로 전 병력을 집중해서 출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최소한 네 개의 성문 하나마다 적 병력 전체에 맞먹는 병력을 배치해야 한다. 성문 하나를 24시간 지킬 수 없고 성문에서 적이 돌파를 시도하면 11이 아니라 2 1로 대적해야 확실하게 승리할 수 있으니, 최소화 문 하나당 2배의 병력은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8배의 병력이 필요하다. 중앙에 포진하는 사령부를 보호하는 병력도 필요하고, 후방도 경계해야 한다. 이런저런 고려를 하면 성이나 적의 진지를 포위하는 데 10배의 병력은 필요하다.

 

적의 5배면 공격한다는 것은 성이 아니라 야전에서 격돌한다고 해도 적이 아군보다 병력이 적다면 구릉 위에 포진하거나 야전 진지나 참호 안에 들어가 싸울 것이다. 이들을 여러 방향에서 견제하면서 공격해야 한다. 현대전에서도 고지에 포진한 적을 공격하려면 5배의 화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아마도 이런 상황을 고려해서 확실하고 안전한 전력 계수를 5배로 상정한 것으로 보인다.

 

아군 병력이 2배이면 (적을) 분산한다.’ 이 구절에서 분산한다[分之]’의 대상이 분명하게 나오지 않는다. 적을 나눈다는 말일까, 아군을 나눈다는 말일까? 아군을 둘로 나눈다고 해석하면 아마도 적을 양쪽으로 협공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협공에는 최소한 2배의 병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적이 한쪽을 포기하고 다른 한쪽으로 몰아칠 경우를 대비해서 좌·우익이 단독으로 적을 상대할 수준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군을 둘로 나눈다고 하면 문장의 대구가 맞지 않는다. ‘배즉분지(倍則分之)’에서 분()은 동사, ()는 목적어인데, 다른 문구에서는 지()가 모두 적을 지칭하는 대명사여서 아군이 아니라 적을 나눈다고 해야 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군을 나눠서 적을 좌우로 협공하면 적도 나뉘어야 할 것이니, 적을 나눈다는 말은 아군을 나누어 협공한다는 의미와 같다고 볼 수도 있다.

 

아니면 계략을 써서 적을 둘로 분할시킨 뒤에 한쪽을 집중 공격을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손자는 공격에 5배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절반으로 분열된 적을 아군이 집중 공격하면 대략 41의 전투가 되기 때문이다. 손자의 계산방식으로 추산하면 이런 해석이 더 적합해보인다.

 

적과 아군이 대등하면 맞붙어 싸운다고 했다. 이때도 적을 분할하는 전술을 쓰면 좋겠지만, 적을 분할하는 계략을 쓰다가는 아군이 분산되어 각개격파를 당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사실상 다른 계략을 포기하고 전력으로 싸우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총전투력이 아니라 단위 전투력의 우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 구절을 보면 손자가 항상 51이라는 숫자에 집착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손자는 주어진 상황에서 안전하고 확실하게 승리할 수 있는 방법, 승리 후에도 아군의 전투력을 보존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평지에서는 21, 고지나 유리한 지형에 있는 적과 싸울 때는 41이나 51의 싸움이 되도록 전술을 구상하라는 의미다.

 

적군이 아군보다 많으면 후퇴한다에서 후퇴한다는 말은 전투를 피하고 전장에서 후퇴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적보다 병력이 적다고 전투를 포기해야 한다면 병법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이 말은 고지식하게 전투를 벌이지 말고 방법을 생각하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막다른 길, 최후의 순간이라면 후퇴는 없다. 죽을 때까지 싸운다는 선택도 가능하다. 그러나 다른 경우라면 맹목적으로 후퇴를 거부한 채 싸우지 말고 항상 최선을 모색하라는 의미다.

 

병력이 대단히 열세면 전투를 피한다는 말도 정말 항전을 포기하라는것은 아니다. 객관적 기준으로 지금은 전투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사실을 감지하고 최선의 방법을 구상하라는 의미다. 특히 중국은 땅이 넓다 보니 전투를 피한다, 여기서 안 되면 다음 지역에서 싸운다는 표현을 쉽게 하는 것 같다.

 

지금까지 살펴본 계산법은 실전용이 아니라 전술을 위한 기준이다. 전투 현장에서는 소수가 다수를 상대해서 이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전술을 구상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이고 정밀한 기준이 필요하다. 아군의 병력과 무기가 부족해도 기발한 수로 이 수치를 채우는 것이 전술과 작전이다.

 

 

전술로 10. 5배의 상황을 연출한다

 

손자는 접전 지역에서 2배의 병력 우위를 이루라고 충고했다. 물량으로 이 원칙을 추구하는 장수는 하수다. 전술가라면 지형, 축성술을 이용해서 전술적 2배수를 달성한다. 아군은 모으고 적은 분산시킨 다음 각개격파 한다면 아군은 2배수의 병력 우위를 확보한 채 적을 섬멸할 수 있다.

 

이런 각개격파를 시행하는 데 최고의 방법이 기동이다. 적을 분산시키고, 아군이 빠른 기동으로 적을 각개격파 하면 적은 병력으로도 접전 지역에서 병력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 기동을 이용한 시간차 공격이다.

 

분진합격과 기동방어

전술과 작전을 구상할 때 대부분 공간에 몰두한다. 이때 자주 빠트리는 요소가 시간이다. 시간이 공간과 맞먹는 작전의 주요소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인데, 철도나 자동차와 같이 시간을 전술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이 도입된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전에도 탁월한 기동력을 이용해서 시간을 전술적으로 활용한 군대가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앙아시아 초원의 기병이다.

 

칭기즈칸의 몽골 기병은 여러 개의 여단으로 산개해서 동시에 여러 지점을 위협했다. 몽골군이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여러 거점을 공격하니 상대의 방어선은 길게 늘어진다. 보급물자와 수송로도 거미줄처럼 분산된다. 그 다음에 몽골군은 분산된 방어선의 적을 그대로 둔 채 병력을 집중해서 적국으로 들어간다. 다시 사방으로 흩어져 후방을 유린한다. 흩어진 물자를 접수하고, 수송부대를 타격한다. 그리고 사전에 약속한 도시로 집결해서 도시를 공략하고 다시 흩어진다. 이런 전술을 분진합격(分進合擊)이라고 한다. 분산과 집결을 반복하는데, 분산해서는 빠르고 효율적으로 도시를 고립시키고 집결해서 도시를 함락한다. 적은 병력으로도 기동력을 이용해서 접전 지역에서 병력의 우위를 누린다.

 

기동의 원리는 방어전에서도 유용하다. 적의 대부대가 공격해오면 흩어져서 후방의 보급로를 습격하고 원거리 지역을 약탈한다. 적이 분산하면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고 저항하거나 다시 분진합격 전술로 각개격파 한다. 몽골군은 이런 전술로 이란 동쪽에 포진했던 호라즘 왕국을 단숨에 무너트렸다. 몽골군의 병력은 호라즘군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기술로 양을 채우는 변화 1:십자군의 요새

1십자군은 아홉 차례의 십자군 원정 중에서 유일하게 성공을 거둔 원정이었다. 이 성공으로 십자군 왕국이 성립했다. 이 왕국은 예루살렘 북쪽 레바논에서 소아시아로 연결되는 지역에 있었다. 이들은 내륙으로 진출하거나 영지를 넓히려는 의도도 갖고 있었지만 여러 개의 공국으로 분열된 체제와 병력 부족으로 여의치 않았다. 왕국의 1차적 목표는 바다를 통해 유럽의 지원을 받으면서 항구적인 국가를 건설하고, 아랍인들이 그들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십자군 왕국에는 왕이 있었지만, 유럽 봉건 제후보다 더 독립적인 몇 개의 유력한 공국으로 형성되어 있었고 민족과 출신국도 모두 달랐다. 십자군 왕국의 군대는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온 기사들과 모험가로 구성되었다. 그 중 가장 우수한 병사는 신앙과 명예를 위해 서언(誓言)을 하고 참여한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평균 복무 기간은 3년 정도였다. 이런 팔색조 군대를 거느리고 야전에 나가 싸우기란 쉽지 않다. 기사들은 자존심만 세고 단합이 잘되지 않았다. 개인 전투력은 강했지만 전술 능력은 수준 이하였고, 이들에게 전술 훈련을 시킬 수도 없었다.

 

뜨거운 중동의 기후는 중장갑을 한 기사들이 장기전을 벌이기 힘들게 만들었다. 왕국은 분열되어 있고, 병력은 만성적인 부족 상태였다. 십자군 왕국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자신들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전술을 개발한 덕분이었다. 그 전술이 바로 십자군의 성으로 알려진 축성술(築城術)이었다. 십자군은 유럽과 중동의 축성술을 합쳐 새롭고 강력한 요새를 건설했다.

 

성은 고대부터 존재했다. 축성술을 전술이라고 하면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십자군의 요새는 확실한 전술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아라비아반도의 도시와 거주지는 오아시스를 거점으로 발달한다. 이런 특성상 도시, 상업 요충, 전략 거점이 구분되지 않는다. 따라서 강력한 성을 세우고 그곳을 보호하면 모든 것을 보호하게 된다. 아랍군의 입장에서 보면 농촌을 습격해서 몽골군을 끌어내듯 십자군을 성 밖으로 끌어낼 만한 요건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거점을 보호하기 위해 십자군은 전에 없던 새로운 요새를 설계했다. 성이라고 하면 우리는 높고 튼튼한 성, 성벽과 해자라는 장애물과 바리케이트 효과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십자군의 성은 손자의 병력 운용 원리를 축성술에 도입했다. 간단히 말하면 성의 구조물을 통해 적은 분산시키고, 아군은 효과적으로 집중시킨다.

 

현존하는 최고의 십자군 요새인 크라크 데 슈발리에(Crac des Chevaliers)는 가파른 산비탈 위에 서 있는데, 성벽과 비탈 사이에 공간을 극소화했다. 공격군이 아무리 많아도 성벽 아래에 집결할 공간이 부족하고, 공성구(攻城具)를 설치하기도 어렵다. 공간을 늘리려면 산비탈 전체를 개조하는 토목공사를 해야 한다.

 

성문으로 접근하는 도로는 좁은 다리밖에 없어서 공격군은 좁은 횡대로 접근해야 한다. 성문 좌우로 세워진 강력한 탑은 접근로를 십자포화로 공격할 수 있다. 성문을 통과해도 터널 같은 통로와 이중 성벽, 벌집 구조의 섹터들이 막아선다. 이중의 성벽은 그 사이가 아주 좁고 내성의 성벽이 외성보다 2배 정도 높다. 외성을 점령해도 점령한 것이 아니라 내성과 외성 사이에 갇힌 격이 된다.

 

성 내부는 지하로 여러 층을 이루고 터널과 미로 같은 통로를 파서 좁은 성안에서 공간 활용을 극대화하며, 적의 눈에 띄지 않고 짧고 빠르게 병력을 이동시켜 격전지에 집중투입할 수 있었다.

 

요새에서 벌이는 전투의 관건은 포위하는 것인데, 왕국은 해안가에 있었기 때문에 항상 바다 쪽이 열려 있어서 완전한 봉쇄가 되지 않았다. 성의 구조는 십자군에게 부족한 전술 운용 능력도 보완해주었다. 공격 전술은 긴 훈련이 필요하지만, 성벽 수비는 자신에게 배당된 위치에 서기만 해도 전술적 포진이 된다. 약간의 로테이션 훈련과 방어 전술 훈련이 필요한 정도인데, 그것은 쉽게 배우고 적응할 수 있다.

 

지금도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십자군의 요새는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성벽만큼 시체를 쌓아올릴 각오를 하지 않은 이상, 이 요새를 공략할 방법은 그 당시에는 발명되지 않았던 대포밖에 없었다. 유일한 공략법이 장기 포위전인데, 중동의 뜨겁고 척박한 기후와 물 부족은 원주민에게도 커다란 장애였다. 자연은 공평하니 아랍 군대도 장기포위전이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십자군은 이런 요새를 무수히 건설했고, 이슬람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1187년 십자군 왕국의 멸망을 초래한 하틴의 뿔 전투는 십자군 왕국의 새로운 왕인 시빌라(Sibylla, 1159~1190) 여왕과 남편 기(Guy, 1150?~1194)가 전통적인 요새 방어전을 포기하고 무리하게 출정했던 탓이다. 이후 십자군 공국들은 차례로 멸망했지만 강력한 요새들은 여전히 버렸다. 요한 기사단이 지키던 크라크 데 슈발리에는 그중에서도 최후의 보루였다.

 

1271년 맘루크의 군주 바이바르스(Baibars al-eunduqdari, 1223~1277)15,000명 정도의 병력을 동원해 성을 공격했다. 당시 성에는 700명 정도의 기사밖에 없었다. 201의 싸움이었음에도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바이바르스는 계략을 써서 항복을 명령하는 백작 보에몽(Bohémond)의 위조 명령서를 보냈다.

 

요한 기사단도 위조 편지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은데,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명예를 지키면서 성을 포기할 구실로 삼은 듯하다. 바이바르스는 요한 기사단을 안전하게 후송하고 성을 보존하기로 약속했다. 요한 기사단은 현대의 적십자와 같은 조직으로 유럽인과 이슬람을 가리지 않고 치료와 구호사업에 전념했기에 이슬람 쪽에서도 평판이 좋았다.

 

그 덕분에 이 성은 현재까지 완전하게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십자군의 유적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최근에 벌어진 시리아 내전으로 그 오랜 세월을 버텨온 성이 많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크라크 데 슈발리에 : 요한기사단의 요새로 트리폴리 근처에 있다.

 

 

기술로 채우는 양의 변화2: 최무선(崔茂宣)과 화포(火砲)

병력의 양이 아닌 질로 포위와 공격에 필요한 전술적 수치를 달성하는 것이 전술이다. 현대전에서 특히 중요한 방법이면서 우리가 곧잘 간과하는 것이 기술이다. 맥심 기관총이 전선에 등장했을 때, 한 대의 기관총은 200명의 화력과 맞먹는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기술에 의한 전술적 병력의 창출이 현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오래전부터 전쟁은 기술과 혁신의 대결장이었다.

 

14세기 고려는 왜구의 공격에 큰 고통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고려의 주적은 중국, 몽골, 여진족 같은 북방 대륙의 군대였다. 이들은 수군이 없고 육군이 주력이다. 바다의 적은 왜구나 여진 해적 정도였다. 따라서 고려군도 육군 위주의 편제와 전술에 만족해왔다. 14세기에 원나라가 패망하면서 대륙의 질서는 무너졌다. 홍건적, 여진족, 몽골족이 준동하면서 전쟁이 쉴 새 없이 벌어졌다. 고려는 더더욱 북방의 적에 육군 전력을 집중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 일본이 크게 성장하면서 왜구가 대규모로 침공하기 시작했다. 왜구의 피해가 엄청나서 방치하다가는 나라가 망할 지경이었다. 왜구를 제압하려면 수군이 필요했다. 문제는 우리는 국토의 삼면이 바다라는 것이다. 이 긴 해안선과 영해를 방어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수군이 필요했다.

 

여기에 전술적 문제까지 겹쳤다. 일본도를 휘두르며 백병전(白兵戰)에 특화된 왜구와 달리 고려군은 전통적으로 활이 장기였다. 거리를 두고 활로 승부하려면 왜구보다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사격은 반드시 십자로 교차시켜야 효과가 있다. 왜구를 만나면 고려군의 전함은 양쪽으로 갈라져서 좌우에서 활로 공격해야 한다. 손자가 말한 분지상황이다. 이 전략적 셈법을 적용하면 삼면의 바다에 각각 왜구의 2배 이상 되는 병력을 배치해야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고려의 명장 최영(崔瑩, 1316~1388)은 이런 셈법에 기초해서 수군 양성 계획을 기안했다. 전함만 800, 중소형 배까지 합치면 2,000척의 함대와 10만의 수군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최영의 수군 증강 계획은 손자병법의 계산법과 다르지 않다. 손자의 계산은 맞지만, 고려의 국력이 그것을 적용할 능력이 되지 않았다. 최영의 계획에는 반대가 빗발쳤다.

 

그런데 이 고민은 다른 방법으로 해결되었다. 병력 증강 대신 전투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신전술과 신무기를 개발한 것이다. 한 무명의 병사가 사격 효율은 높이고, 적의 돌입은 저지하는 간단한 방법을 고안해냈다. 배에서 두 개의 장대를 내밀어 하나는 적선을 걸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고 하나는 적선을 밀어 근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적선을 붙들어 맨 뒤에 활과 표창, 포 등의 무기로 공격한다. 여기에 최무선(崔茂宣, 1325~1395) 발명한 화약무기가 가세하면서 고려군의 전술적 파괴력은 확실하게 상승했다. 결국 고려 수군은 동등한 병력으로도 적과 능숙하게 싸우는 수준으로 올라섰고, 나중에는 더 적은 병력으로도 도망치지 않고 싸우고 포위할 수 있게 되었다.

 

고려는 무기와 전술 개량으로 병력을 전투력으로 환원해서 전투에 적용했다. 이 전술과 전통이 조선 수군으로 이어졌다. 임진왜란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는 이런 전술적 개혁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4. 무엇보다 인재 발굴

 

무릇 장수는 국가의 보필이다. 장수의 보좌가 정확하고 세심하면 국가는 반드시 강해진다. 장수의 보좌가 정확하고 세심하지 못하면 국가는 반드시 약해진다.

夫將者, 國之輔也. 輔周則國必强, 輔隙則國必弱.

 

그런 까닭에 군주가 군에 환란이 되는 경우가 세 가지 있다. 군주가 군이 진격하지 말아야 할 때를 모르고 전진하라고 명령하고, 군이 후퇴해서는 안 되는 때를 알지 못하고 후퇴하라고 명령하는 경우다. 이것은 군을 속박하는 것이다.

故君之所以患於軍者三: 不知軍之不可以進而謂之進, 不知軍之不可以退而謂之退, 是爲縻軍;

 

삼군의 사무를 알지 못하면서 군사 행정에 간섭하면 군사들이 명령과 정책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된다. 삼군의 지휘권을 알지 못하면서 삼군의 임무에 간섭하면 군사들이 의심하게 된다. 삼군이 신뢰하지 않고 의심을 가지게 되면 제후들이 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런 상황을 일컬어 아군을 문란하게 만들어 적이 승리하도록 만들어준다고 한다.

不知三軍之事, 而同三軍之政者, 則軍士惑矣; 不知三軍之權, 而同三軍之任, 則軍士疑矣. 三軍旣惑且疑, 則諸侯之難至矣, 是謂亂軍引勝.

 

장수가 국가의 보필이라고 말하면 뻔한 이야기 같다. 손자도 장군이었으니 무장의 위신을 높이고 대우를 잘해주어야 한다는 말을 남겼을 것이리라. 조선은 문무 차별이 심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무장을 대우하려고 노력한 일도 없지는 않다. 세조(世祖, 1417~1468)는 특별히 무장을 쟁졌다. 무장의 양성과 대우 개선을 촉구하는 교서를 내린 적이 있는데, 그 교서에서 손자병법의 이 구절을 인용했다세조실록30. 9729일 병진..

 

그러나 손자의 발언에는 좀 더 깊은 의미가 있다. 보필한다는 말은 참모가 보좌하는 식의 돕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왕과 재상, 마치 유비와 제갈량(諸葛亮)처럼 왕의 팔다리가 되어 한 분야를 맡거나 리더가 의지하고 도움을 받는다는 수준을 말한다.

 

전쟁에서 이기고, 국가를 적의 침략에서 구원하려면 뛰어난 장수가 왕을 보필해야 한다. 왕이 제갈량이나 관우, 장비와 같이 보필하는 장수를 얻으려면 먼저 그런 인재를 발굴해야 한다.

 

 

인재는 찾는 것보다 믿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기업인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참 인재가 없습니다. 인재를 찾고 발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는 진지했고 진심이었기에, 이렇게 대답했다. “정말 그럴까요? 인재는 많은 것 같은데 일을 믿고 맡길 만한 인재가 없는 것 아닙니까?” “예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정말로 인재가 없거나, 선생님이 믿고 맡기는 기준에 문제가 있거나요.”

 

손자는 더 솔직하게 말한다. 나라가 약해지는 이유는 장수가 보필을 잘하지 못했거나 인재를 찾고 등용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군주가 보필하는 장수를 믿지 못하고 간섭하는 탓이라는 것이다.

 

장수가 국가와 왕을 보필하는 존재라면 그의 방법론과 독자적 개성, 영역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삼국지에 제갈량이 유비가 시키는 일이나 하고 있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제갈량이 성공한 이유는 유비가 자신의 역량과 관우, 장비로 대표되는 초기 멤버들의 한계를 알고 제갈량의 업무 영역에 전적인 신뢰와 자율성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군대와 무력이라는 것이 믿고 맡기기에는 곤란한 권력이다. 손자도 그런 낭만적이고 무책임한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정보는 열려 있어야 하고, 왕은 군대의 동향을 항상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영역과 장수의 역할을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 견제를 이유로, 나중에는 습관이 되어서 현지 작전에 간섭하면 전쟁을 망치고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전쟁사에 이런 사례는 무수히 많다. 그러면 이렇게 묻는다. 지휘관이 무능해서, 또는 오판으로 대형 사고를 치면 누가 책임질 것이냐?

 

그런 지휘관을 임명한 것이 잘못이다. 유능한 지휘관이라고 해도 자기가 잘하는 분야, 감당할 수 있는 분야가 있다. 여기에 대한 판단은 인사권자의 몫이고 책임이다. 그런데 이 책임은 회피하면서, 자신이 임명한 사람을 원격으로 조종하고 간섭해서 대사를 이루려고 한다면 성공할 수가 없다.

 

1597정유재란 당시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몰살당하고, 그 여파로 합천, 남원, 진주 등의 요충이 함락되면서 막대한 인명 피해와 학살이 발생했다. 이 참극은 전쟁을 모르는 조정의 문관들이 수군은 우리가 왜군보다 강하다는 단순논리에 빠져 부산포를 공략하라고 독촉한 탓이었다. 선조는 이 논리에 이순신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욕구를 더해서 이순신을 해임하고 원균(元均, 1540~1597)으로 대체했다. 원균은 서인 계열이어서 더 믿을 수 있었으며, 저돌적이고 거칠어서 싸움은 잘하지만 백성들의 인망을 얻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원균도 부산포 공략을 꺼리자 선조는 원균에게 강경한 명령을 내렸다. 이 간섭의 결과로 칠천량과 남원성 등지의 참극이 벌어졌다.

 

한편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는 독일의 명운을 건 소련 침공을 개시하면서 독일군의 전력을 세 방향으로 분산시키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좌군, 중앙군, 우군의 3군으로 나누는 방식은 전술의 고전이자 기본이지만, 모스크바로 향하는 주력인 중앙군에 병력을 집중하지 않은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 이유는 군부의 반란이나 쿠데타에 대한 우려를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독일군과 싸우는 소련도 스탈린(Joseph Stalin, 1879~1953)의 견제 심리가 작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독재자의 불안과 의심은 독소전쟁 내내 전략을 뒤틀면서 엄청난 희생과 비극을 낳았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독일군 진격로. 독일이 모스크바로 향하며 병력을 분산시킨 것이 패착이었다.

 

권력자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반론도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출전하는 군대가 총부리를 돌려 정권을 탈취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조선 창건의 기반이 된 위화도 회군이 그렇고, 후주의 장군이었던 조광윤(趙匡胤, 927~976)도 같은 방식으로 송나라를 세웠다. 20세기에도 이런 정변이 발생했다. 1958년 내전의 위기에 처한 요르단의 후세인 왕이 이라크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이라크 왕가와 요르단 왕가의 시조는 형제간이었다). 이라크는 지원군을 파견했는데, 이 부대가 왕궁으로 회군해서 파이살 왕가를 절멸시켰다. 이후 두세 번의 정변 끝에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2006)이 집권했다.

 

정치와 전쟁 사이에는 늘 이런 함수관계가 있어서 전적으로 군을 믿고 지휘를 맡긴다는 것이 쉽지 않다. 쿠데타에 대한 우려가 전부는 아니다. 전쟁을 치르다 보면 주변국과의 관계, 선거, 민중의 정서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야 하고 이런 것이 전술과 작전의 효율성에 영향을 끼친다. 클라우제비츠의 말처럼 전쟁은 고도한 정치 행위여서 정치적 간섭으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고로 군과 장수에 대한 완전한 신뢰, 완전한 보필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대적인 우위는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이 전쟁의 승부를 바꾼다. 독소전쟁에서도 어느 한쪽이 좀 더 합리적인 신뢰를 할 수 있었더라면 전쟁의 향방, 최소한 전사자의 수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손자가 말한 장수의 보필을 결정하는 요인은 최고 통치자의 의지가 아니라, 조직의 건전성이다. 인재가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고, 인사가 부당한 편견과 정치욕에 의해 좌우되지 않으며, 능력 있는 인재가 발굴되는 조직이 제대로 보필하고 제대로 신뢰할 수 있다. 평소에는 이런 차이점이 크게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고 위기가 닥치면 이 능력의 차이가 한 번의 전투에서 수만, 수십만의 희생자를 낳고 승부의 방향을 바꾼다.

 

 

인재의 편식이 보필을 맡는다

 

유비는 제갈량을 믿고 권력을 말겠다. 유비의 신뢰가 없었다면 제갈량(諸葛亮)의 명성도 없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신뢰가 가능했던 것은 제갈량이 문관이었기 때문이다. 무관에게 이런 신뢰를 보내기는 쉽지 않다. 여기에는 쿠데타의 위험이라는 정치적인 이유 외에도 아주 현실적인 난제가 있다.

 

조선 초기에 한 장수가 있었다. 거칠고 용맹하며 왕에게는 충성스러웠는데, 평시에는 그 거침이 흠이 되었다. 성격이 사납다 보니 곧잘 술을 마시고 패싸움을 일삼으며 사고를 쳤다. 한번은 근신을 명 받고 집에 있는데 전쟁이 터졌다. 그 소식을 듣자 그가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한 때가 왔구나.” 실록에 이 일화를 기록한 사관은 이런 자는 흉악한 인물이고 이런 인물을 등용하면 안 된다고 격하게 토를 달았다. 장비도 술로 여러 번 사고를 쳤는데, 장비와 같은 캐릭터의 장군은 평시에는 대개가 말썽꾼이다.

 

문관 같은 장수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심하고 예의 바르고 요모조모 이론적으로 잘 따지기만 하는 장수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 물론 완전한 인간은 없다. 개인의 능력이 모두 다르고 개성도 다르다. 그런데 개성에는 쏠림 현상이 있다. 아이디어가 튀고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은 고분고분하지 않다. 창의적이고 기발한 사람은 보통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타인의 비위를 잘 맞추고 중재를 잘하는 사람은 결단력이 떨어진다. 신중한 사람은 과단성이 없고, 과단성 있는 사람은 신중하지 못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문관들은 성격이 거친 실전형 장군을 무척 싫어한다. 자신들 마음에 들고, 옆에 둬도 불편하지 않는 조심스럽고 예절 바르며 행정 수완이 있는 인재로 개조하거나, 그런 인물로 군대를 채우려고 무척 노력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전쟁은 일상사가 아니다. 수십 년에 한 번 일어난다. 평화로운 시기가 지속되면 문관들의 이런 기준이 유용해 보인다. 실전용 장군들은 배척되고 행정관료 같은 장교들로 군대가 채워진다. ‘장수가 국가의 보필이다라는 말에는 이런 사태를 경계하라는 의미도 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면서 어떤 조직이든지 준수하기 어려운 과제다.

 

전쟁이 아니라도 어떤 조직이든지 대세가 있고 유행과 추세가 있다. 능률적인 인사, 적재적소에 필요한 인사라는 모토에 너무 충실하다 보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 위기 대응이 가능한 인사들은 저 멀리 뒤처지고 된다. 막상 일이 터지면 이런 편식은 믿기 어려운 정도로 참담한 결과를 초래한다.

 

 행정관료로 채워진 북군과 승부사로 채워진 남군

남북전쟁 중에 어느 중년 부인이 남쪽으로 진군하는 북군의 행렬을 보았다(그녀는 북부 지지자였다). 얼마 후 벌어진 전투에서 북군은 패퇴했다. 북상하는 남군을 맞이한 그녀는 놀라 중얼거렸다. “세상에 어떻게 저런 군대에 우리 군대가 패했지?”

 

남북전쟁을 다룬 영화에서는 짙은 군청색 제복의 북군과 푸른빛이 살짝 들어간 회색 톤의 남군이 대조를 이룬다. 이것은 남부에 대한 예우이자 영화적인 재미를 위한 것이다. 실제 북군의 복장은 영화와 별다르지 않았지만, 남군은 그런 깔끔한 군대가 아니었다. 산업시설의 부족으로 군수품 조달에 애를 먹었던 남군은 전쟁을 시작한 지 1년이 지나기도 전에 거지꼴의 군대가 되었다. 당시 목격담에 의하면 남군은 군화를 신은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았고 찢어진 바지에 상의는 러닝셔츠만 입고 있었다. 겉모양으로 보면 영락없는 패잔병 무리였다.

 

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끝났지만, 패잔병 같은 남군에게 북군은 내내 고전했고 전쟁 초기에는 패할 뻔도 했다. 전후에도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 북부는 노예해방이라는 완벽한 명분까지 틀어쥐고 있었음에도 남북전쟁이 배출한 명장은 한결같이 남부의 장군들이다.

 

북군 사령관 그랜트는 대통령까지 되었지만, 평판이나 감성적인 인기는 남군 사령관 리 장군에게는 근접도 할 수 없고, 남부군의 유명한 사단장보다 못하다. 부사령관이었던 윌리엄 셔먼(wilam Sherman, 1820~1891)의 인기는 더욱 끔찍하다. 그의 공로를 냉정하게 평가하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대중에게는 지금까지도 전쟁범죄자 취급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약간의 정신적 질환까지 안고 있었다.

 

승자와 패자가 역전된 이런 기이한 현상의 원인은 두 가지로 꼽을 수 있다. 전쟁 전에 미국 정부는 국방부나 좋은 보의 장군들을 거의 참모형에 비실전형 장군들로 채웠다. 유능한 전투 지휘관들은 바닷가와 시골 요새에 처박혀 있었다. 이런 실전형 지휘관은 또 대개가 버지니아 출신들이었다. 그 결과 리 장군을 위시해서 버지니아 인맥, 제대로 된 전투 지휘관은 대체로 남부 연방에 가담했다.

 

북부의 행정가형 장군과 남부의 실전 버지니아 인맥이 야전에서 맞붙자 북군은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그 반대로 되었더라면 남북전쟁은 1년도 되지 않아 종식되었을 것이다. 인구 대비로 환산해볼 때 2차 세계대전 전사자의 10배가 넘는 엄청난 전사자 비율은 10분의 1에서 50분의 1이하까지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

 

90퍼센트의 시간 동안 불편하지만, 10퍼센트 혹은 1퍼센트의 순간을 위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90퍼센트용으로 개조할 것이 아니라, 결정적 순간을 위해 그 개성과 능력을 꾸준히 개발시켜야 한다. 몇십 년만에 한 번 찾아오는 1퍼센트의 순간이라고 해도, 전쟁에서 패하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남군 사령관 로버트 E. 리 장군.

 

 

지휘의 책임과 간섭의 차이

 

실패한 작전, 실패한 사업의 실무자를 만나 원인을 물어보면, 현장을 잘 모르는 상사의 부당한 간섭 때문이라는 답변을 곧잘 듣는다. 그런데 성공한 리더에게 성공 비결을 들어보면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라 아랫사람에게 철저하게 맡겨놓고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오히려 반대로 아랫사람들이 반대하고, 두려워하는 일을 리더가 신념을 갖고 추진한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말한다.

 

이 두 결론을 합치면 부하가 군주를 보필해서(거듭 말하지만, 보필은 보좌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책임을 위임받아 일을 처리한다는 의미다) 성공한 경우는 없다는 말이 된다. 성공은 리더의 지휘 덕분이고 실패도 리더의 잘못된 지휘 탓이다.

 

적절한 지휘 책임과 간섭의 구분은 조직 관리와 리더십에서 영원한 딜레마다. 사례를 아무리 뒤져도 답이 안 나오는 문제라서, 다 겪어보고 체험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게, 다 결과론이더군요.”

 

결과론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똑같아 보여도 결과 안에 진실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진실을 보지 못하게 때문에 결과만 보이고 결론적으로 결과론이 되어버린다.

 

손자는 군주의 잘못된 간섭의 사례로 세 가지를 들었다. 겉으로 보면 단순한 판단 미스나 결과론적인 실수처럼 보이지만, 하나하나에 깊은 의미가 있다. 역사 속 두 가지 사례로 살펴보자.

 

 

수양제의 잘못된 간섭

수양제(隋煬帝, 569~618)당태종(唐太宗, 599~649)은 둘 다 고구려 원정에 직접 참가했고, 둘 다 실패했다. 하지만 두 황제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다르다. 수양제는 무모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제멋대로였다. 야심은 크지만 판단력은 없다. 수양제 말년에 나라가 망하고 적이 사방에서 쳐들어와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무책임한 군주의 전형이다.

 

수양제는 무능한 독재자라는 이미지와 다르게 원정 초기에는 장군들에게 재량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전투가 지지부진하자 인내심이 폭발했다. 수양제는 장군들이 전쟁에 적극적이지 못하고 모험을 두려워해서 이런 결과가 생겼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전쟁의 판도를 진취적으로 일신하기 위해 그는 모든 권한을 회수하고 중요한 결정은 반드시 자신에게 물어서 결정하게 했다. 이 조치만으로 잘잘못을 논할 수는 없다. 부하를 믿고 재량을 넘긴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하지만 조직과 구성원이 받쳐줄 때만 가능하다. 의기소침하고 책임감이 실종된 조직에서는 민주적 질서보다 카리스마가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양제가 전권을 장악하면서 황제만이 할 수 있는 과감한 전술을 채택했다. 고구려군의 방어요새를 무시하고, 평양성을 향해 직접 공격하는 것이다. 별도로 군량을 적재한 수군 함대를 산둥에서 출진시켜, 육군이 일단 평양에 도착하면 함대로부터 공급받는다는 작전이었다. 적진 돌파와 후방 기습은 훗날 몽골 기병, 또는 기갑부대나 가능했던 전술이었다.

 

이 전술이 성공했더라면 우리에게는 참혹한 불행이었겠지만, 중국사나 전쟁사에서는 기념비적인 업적이 되었을 것이다. 고구려군은 당황하지 않고 수나라군의 약점이 시간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보급선이 이어지지 않는 대군은 진격 일정이 지체되면 식량이 떨어진다. 고구려는 일부러 항복 협상을 걸면서 시간을 끌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양제가 지시한 과감한 기동전은 현장 지휘관의 능동적인 상황 판단과 자율권이 필수다. 그래서 몽골군이나 독일군은 현장 지휘관에게 과감한 재량권을 부여했고 그런 능력을 갖추도록 훈련했다. 이것이 승부의 열쇠였다. 그런데 수양제는 이 권한을 회수하고, 전군을 시간과의 싸움으로 내몰았다. 자신이 구상한 전술과 조직의 운영 방식이 맞지 않았다. 이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고구려가 협상을 제안하자 수나라 지휘부는 일일이 요동에 있는 수양제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받느라 더 지체했다. 고구려의 지연 전술에 스스로 걸려들었고, 마침내 군량이 떨어진 수나라군은 처참하게 후퇴하다가 살수에서 고구려군의 습격을 받아 30만 대군이 전멸했다.

 

절대적 간섭, 절대적 자유는 다 이상론이다. 모든 전략과 전술에는 그에 합당한 방법과 적절한 질량이 있다. 개인의 병증을 고려한 처방전과 같다. 전술 공간, 부대의 상황, 모든 것을 고려해서 훈련하면서 그 전술에 맞는 적절한 의사결정 방법과 재량권의 양을 처방하는 능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게티즈버그 전투와 링컨

손자는 리더가 지휘 체제의 속성을 모르고 아무 데나 끼어들면 조직이 무력화된다고 경고한다. 사장이 화장실 청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청소 담당은 직접 불러서 지시하거나 혼내면 청소 담당은 자기 상단인 매니저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게 될 것이다. 사장의 세심한 노력이 조직의 윤활유가 되기는커녕 동맥경화를 유발한다. 화장실 청소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더라도 현명하게 대처해서 조직이 더 유기적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한편 리더가 직접 나서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행동이 조직을 변화시키는 성공 사례를 살펴보자.

 

남북전쟁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인 게티즈버그 전투는 남군의 패배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남군이 승리했으면 워싱턴이 남군에게 짓밝히고, 전쟁은 남부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북군에게는 기적 같은 승리이자 위기에서의 구원이었다. 하지만 정작 게티즈버그 전투의 보고를 받은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은 격노했다. 북군 사령관인 미드(George Gordon Meade, 1815~1872) 장군이 도주하는 남군을 추격하지 않고 전송하듯이 보내준 것이다. 이 사건으로 미드 장군은 링컨의 미움을 사서 역사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남북전쟁에서 더는 활약하지 못했다.

 

미드 장군의 결정에 관해 현대의 전사가들은 대체로 옹호론을 편다. 북군이 지칠 대로 지쳐 있어서 추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만약 그렇다면 링컨의 뒤늦은 질책은 실수였고, 손자가 말한 군을 속박하는 행위이거나 지휘체제에 간섭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런데 미드에 대한 판단은 잘못이었다고 해도 링컨이 격노한 데는 또 다른 배경이 있었다. 당시 남북군의 지휘관들은 모두 같은 학교 동문이었고, 17~18세기의 마지막 귀족적 기사도의 잔영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전쟁 전체를 보는 전략적 사고가 부족해서 전투의 승부는 현장의 승부로 끝내는 경향이 있었다. 패전한 적은 고이 보내주고 다음 승부를 기약한다는 식이었다.

 

전쟁 초기에 링컨은 군부의 지휘 체제와 질서를 존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골뜨기 링컨은 워싱턴 정가, 미국 사회의 상류층, 학맥, 어디에도 끈이 없었다. 당연히 군부에도 인맥이 전혀 없었다. 가능하면 전쟁은 군인들에게 맡기고, 그들의 결정을 존중했다. 아니,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형편없이 진행되는 전쟁에 분노를 넘어 궁금증이 들었던 링컨은 전선에서 날아오는 전보를 직접 읽으면서 학습하기 시작했다.

 

영리했던 링컨은 남북군 할 것 없이 장군들이 기사도적인 향취에 사로잡혀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링컨은 정규군 경험이 없는 아마추어 전략가였지만, 당시의 전쟁관에 대한 링컨의 판단은 정확했다는 평을 얻고 있다. 북군과 남군의 기사들은 새로운 전쟁을 이해하지 못해 전황을 점점 더 끔찍한 참극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링컨은 간섭을 시작했고, 군부를 압박했다. 미드 장군의 해임처럼 실수를 저지른 적도 있었고 불평하는 장군들도 많았지만, 전쟁 후반부가 되자 북군 지휘부는 투박하지만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아는 장군들로 채워졌다.

 

여기서 링컨이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재능을 과신하고 전술에 세세히 개입했더라면 북군은 더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링컨은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지만 장군들이 하지 못하는 공간을 찾아내고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이건 정말 대단한 자제력이자 분별력이다. 애초에 링컨이 개입한 영역도 장군들의 영역이 아니라 장군들의 위에 있는 빈 공간이었다. 링컨은 정확하게 리더의 자리를 찾아 들어갔고, 자기영역을 지켰다. 이것이 수양제(隋煬帝, 569~618)와 링컨의 차이다.

 

 

 

 

5. 전쟁의 승리를 미리 알 수 있는 다섯 가지

 

그런 까닭에 전쟁의 승리를 미리 알 수 있는 다섯 가지 경우가 있다. 싸울 수 있는 경우와 싸워서는 안 될 경우를 아는 자가 승리한다. 많은 병력과 적은 병력의 사용법을 아는 자는 승리한다. 윗 사람과 아랫사람의 목적이 같은 쪽이 승리한다. 불우의 상황을 대비하는 자가 대비하지 않는 자에게 승리한다. 장수가 유능하고 군주가 견제하지 않는 자는 승리한다. 이 다섯 가지가 승리를 미리 아는 비결이다.

故知勝有五: 知可以戰, 與不可以戰者勝, 識衆寡之用者勝, 上下同欲者勝, 以虞待不虞者勝, 將能而君不御者勝. 此五者, 知勝之道也.

 

그런 까닭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 적을 모르고 나의 사정만을 알면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진다. 적도 모르고 나도 모르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위대하다.

故曰: 知彼知己, 百戰不殆; 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

 

이 단락은 그 유명한 지피지기(知彼知己)’가 등장하는 덕분에 손자병법에서 가장 잘 알려지고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 되었지만, 그 속에 숨어있는 불우(不虞)의 상황, 예측하지 못한 돌발 상황을 대비하라는 구절은 이상하게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것 같다.

 

실제 전장은 예기치 못한 상황의 연속이다. 손자가 전투를 벌이기도 전에 승부를 미리 알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해서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예측하고 준비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손자의 말을 과잉 해석해서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없도록 하라는 지침을 가지고 전투에 임하면 백발백중 실패한다. 전쟁은 실수나 사고가 얼마나 적게 발생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현장에서 그런 어그러진 상황을 해결하고 목표까지 도달하느냐, 못 하느냐의 싸움이다. 돌발상황을 만나 다리가 부러졌다고 해도 부러진 다리를 끌고 목표에 도달하는 능력이 승리를 이끈다.

 

만약 다리가 부러질 때를 대비해서 모든 병사가 철제 부목이나 의족을 소지하고 전투에 투입되었다면, 모든 병사의 다리가 무사해도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전쟁에는 전투감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것은 선천적이거나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데이터 분석, 관찰, 현장 감각의 축적을 통해 숙성되고 발전하는 것이다. 전투감각도 지형 파악, 적군과 아군의 능력 감지, 전황 파악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불우의 사태를 감지하고 대항하는 능력이 필수다. 지휘관은 사태가 터질 것 같은 한 상황을 직감하고 그에 대해 조치하거나 경계를 강화하는 감각을 키워야 한다. 병사들은 모든 상황에 대한 매뉴얼이 아니라, 경험해본 적이 없는 돌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도록 조련되어야 한다. 부하들을 파악할 때도 돌발 상황에 대응하는 능력을 신중하게 관찰해야 한다.

 

수많은 전투가 돌발 상황에 의해 좌우되었다. 이런 사례를 모아보면 전쟁을 운이 좌우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운에만 말겨서는 절대 승리할 수 없다. 천운도 준비하고 다스릴 줄 아는 자, 특히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과 능력을 키워놓은 조직의 몫이다.

 

 

 

리더는 보이지 않는 능력까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나폴레옹이 전성기에 이룬 승리, 자기 자신도 최고의 전투 최고의 감동을 준 전투라고 꼽았던 것이 아우스터리츠 전투. 프랑스군 약 7만 명,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 8만 명이 격돌한 대회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판단한 승부처가 프라첸 고지였다. 전선 중앙부에 위치한 프라첸은 해발 12미터도 되지 않는 언덕이었다. 주변이 모두 광대한 평원이다 보니 돌기처럼 솟아난 작은 언덕이 고지가 된 것이다. 지금은 농가 수십 채가 빼곡히 들어차 있는 이 돌기를 나폴레옹은 전투가 시작되기 며칠 전에 일부러 포기하고 후퇴했다.

 

-오 연합군은 이 행동을 비웃으면서 냉큼 점거했다. 전투 당일 이 언덕에는 러-오 연합군의 지휘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언덕은 전선의 중앙에 위치했다. 역사적인 전투는 이 언덕의 북쪽과 남쪽으로 전선을 형성하고 벌어졌다. -오 연합군 기준으로 북쪽이 우익, 남쪽이 좌익이었다.

 

1810, 프랑수아 제라드(François Gérard)가 그린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기록화

 

총성과 포성이 요란했지만 안개가 이불처럼 두껍게 깔린 프라첸 언덕 주변은 평온하고 조용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45분이 지난 오전 845분 언덕 위에 있던 연합군 지휘부는 깜짝 놀랐다. 안개가 걷히자 언덕 아래에서 강철의 은빛 섬광이 아침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나폴레옹이 아침 안개를 이용해 최정예부대인 생 일레르(St. Hilaire) 사단을 프라첸 고지 앞으로 진출시킨 것이다.

 

그제야 연합군은 자신들이 나폴레옹의 계략에 속아 넘어갔음을 깨달았다. 나폴레옹 정도 되는 인물이 프라첸을 그냥 내어줄 때 의문을 품었어야 했다. 하지만 후회해도 늦었다. 생 일레르 사단의 목표는 연합군 전선 사령부 공략이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먼저 연합군이 프라첸 언덕을 중심으로 삼아 양익(兩翼)에서 전선을 펼치기를 바랐다. 그다음 기습적으로 중앙의 프라첸을 점령해 연합군을 두 동강 낸다. 프라첸 언덕에 포병을 배치하면 연합군 좌우익은 측면이 노출되고, 이곳을 돌파구로 이용하면 연합군의 배후로 마음껏 들어갈 수 있었다.

 

한편 자신들이 전투의 운명을 쥐고 있음을 잘 알고 있던 생 일레르 사단의 병사들은 러시아군과 1시간에 걸친 격렬한 전투 끝에 언덕을 점령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나폴레옹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단 한 번의 날카로운 공격으로 전쟁은 끝났다.”

 

이제 포병이 진격해 언덕에 포대를 설치하는 일만 남았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생 일레르 사단 정면으로 난데없이 싱싱한 오스트리아 사단이 출현했다. 언덕 위에서 쉬고 있던 생 일레르의 병사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프라첸 언덕이 승부처라는 사실을 알았던 병사들은 조금 전의 전투에 혼신의 힘을 다했고, 탄약마저 다 떨어진 상태였다.

 

오스트리아군의 출현은 무능과 우연이 만들어낸 돌발 상황이었다. 연합군의 공격 계획을 짠 북스게브덴(Friedrich Wilhelm von Buxhoeveden, 1750~1811) 중장은 술꾼이었다. 그는 부대 배치와 이동 경로도 계산하지 않고 전투 계획을 짰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처럼 대부대가 집결한 전부를 준비할 때는 이동 계획과 도로 사용 계획이 대단히 중요하다. 전술이 복잡하고 정교한 기동을 추구할수록 수학 수재였던 나폴레옹은 도로망 관리와 이동 시간의 배분을 혼자서 해냈다.

 

그러나 술에 찌든 북스게브텐의 두뇌에는 복잡한 이동 경로가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연합군 진영에서는 여기저기 교통체증이 발생했다. 짜증을 내고 제멋대로 지름길을 찾다 보면 더 우왕좌왕하게 된다. 프라첸에 등장한 오스트리아 사단이 그랬다. 남쪽 전선으로 향해 가던 그들이 전혀 엉뚱하게 프라첸으로 진출했던 것이다.

 

여기서 나폴레옹은 이상한 결정을 내린다. 프라첸을 빼앗기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그 중요한 순간에 나폴레옹은 프라첸으로 지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나폴레옹에게는 아직 사용하지 않은 예비대가 있었다. 그러나 예비대를 보내면 프라첸은 구하겠지만 언덕 점령 이후 전투의 결정적 순간에 적의 심장을 타격할 병력이 없었다. 승리할 전투가 무승부로 끝난다. 나폴레옹은 패전의 위험을 감수하고 생 일레르 사단 병사들의 순발력과 위기 대처 능력에 승부를 걸었다.

 

한편 생 일레르의 고참 병사들은 접근해오는 오스트리아 사단이 신병들임을 알아차렸던 것 같다. 전투 경험자들은 행군하는 모습만 봐도 군대의 수준을 안다. 탄약도 체력도 바닥난 상태였지만, 프랑스군은 빈 총구에 대검을 꽂고 고지 아래로 내달렸다. 우렁찬 함성은 지쳐버린 육체의 상태를 감추고도 남았다. 자신감에 찬 함성,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총점 돌격의 기세에 놀란 오스트리아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나폴레옹의 승리로 끝났다. 나폴레옹군의 피해는 전사 1,305, 부상 6,940, 연합군은 전사 및 부상 15,000명에 포로 12,000명이었다. 나폴레옹의 모험적인 결정은 정확했다. 진정한 리더는 돌발 상황에 대한 대책뿐만 아니라, 상황에 대처하는 부하들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능력까지 갖추어야 한다. 그런 판단력 역시 부단히 점검하고 연습해야 한다는 것이 프라첸 언덕의 교훈이다.

 

 

상황에 맞는 최선의 전술을 찾아라

 

전쟁에서 가장 위험한 논리는 근거 없는 낙관론이며, 가장 위험한 사람은 대책 없는 강경론자다. 전쟁은 그 특성상 강경론이 득세한다. 특히 작은 승리라도 거둔 직후라면 더 분위기를 타서, 신중론을 펴는 사람은 비겁자로 몰리기 십상이다.

 

진정한 용기는 두려움에서 나온다.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은 진정한 용사가 될 수 없다. 리더는 경박해서 용감해보이는 사람과 진정한 투사, 겁이 많아서 신중한 사람과 시야가 넓어서 신중한 사람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런 참모들이 하는 조언을 받아들여 싸울 때와 싸우지 말아야 할 때를 판단할 수 있다.

 

몽골군이라고 하면 전투적이고 야성적인 전사를 연상하기 쉽다. 실제로 칭기즈칸 이전에는 그런 인물이 용사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칭기즈칸은 전사의 기준을 바꿨다. 칭기즈칸이 가장 꺼린 리더가 대책 없이 용감하고 무모한 전사였다. 칭기즈칸은 그런 인물은 아예 전쟁터에서 격리해 말 먹이는 곳으로 쫓아보냈다. 칭기즈칸에게 우수한 장교는 싸울 때와 싸우지 않을 때를 구분하는 사람, 공격을 개시할 최적의 타이밍까지 꾹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지혜와 인내, 칭기즈칸은 초원의 야만적인 전사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두 가지 기준을 철저히 준수했고, 그의 군대는 세계 최강의 군대가 되었다.

 

이 부분에서 가장 모범적인 사례는 이순신 장군이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 당시 2323승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 비결에 관해 유능한 부하, 조선 전함의 우수성, 거북선, 화포 등 여러 요인을 꼽지만, 무엇보다 이순신은 싸워야 할 경우와 싸우지 않아야 할 경우를 파악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손자의 말대로 아군과 적군의 능력치를 분석해서 이길 수 있는 조건, 지형을 정확히 계산하고 이길 수 있는 조건에서 싸웠다.

 

예를 들어 조선의 전함과 일본의 전함, 그리고 양국의 해전술은 서로 극단적으로 상반된 특성을 띠고 있었다. 조선의 판옥선은 크고 높고, 폭이 넓어서 측방으로 화포를 발사할 수 있었다. , 화포, 팀플레이를 이용한 화력전이 장기였다. 다만 평저선(平底船)배 밑에 평탄한 저판(底板)을 깐 평탄한 구조의 선박이고 폭이 넓은 선체 특성상 파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불리했다. 한려수도와 같이 잔잔한 바다에서 위력적이었다.

 

반대로 일본의 전함은 첨저선(尖底船)길고 좁은 각재 하나만을 바닥에 깔고 그것을 뼈대로 외판을 붙여나가는 배에다가 폭이 좁아서 화포를 옆으로 배치할 수 없었다. 화력은 떨어지지만, 경쾌하고 바다에서 기동성이 좋아서 파도가 치고 조류가 강한 곳에서 유리했다. 또 해안이나 육지 가까이에 붙어 있으면 강력한 보병의 지원사격을 받았다. 이순신이 선조의 득달같은 독촉에도 부산포 공격에 반대했던 것은 싸워야 할 곳과 싸우지 말아야 할 곳을 정확히 판단했기 때문이다. 선조는 이순신을 해임하고 원균(元均, 1540~1597)과 조선 함대를 부산포 공략에 투입했다가 칠천량의 비극을 맞았다.

 

 

많은 병력과 적은 병력은 사용법도 다르다

 

아군이 대군이면 적을 포위하고 공격한다. 병력이 적으면 적을 분산시키고, 게릴라전으로 적을 괴롭힌다. 병력과 전술의 함수관계에 대한 표준 이론이다. 손자도 비슷한 이야기를 곳곳에서 했다.

 

하지만 이 말을 적보다 병력이 많으면 전면전을 하고 병력이 적으면 게릴라전을 하라고 이해하면 손자병법을 절반만 이해한 것이다.

 

병력이든 무기든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적절한 양이 최선이다. 이 교훈을 우리는 한니발(Hannibal, BC247~BC183년경)의 칸나에 전투나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찾을 수 있다. 적절한 양을 찾으려면 손자의 말처럼,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병력의 적절한 사용법을 알아야 한다. 적절한 사용법을 찾으려면 병력의 장기, 특성, 지형과 적을 분석하고 이 조합을 통해서 결정해야 한다.

 

메카의 태수(통치자) 가문이었던 하심 가문하심 가는 메카의 태수로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유력 가문이었다 부친 후세인의 주도 아래 파이살과 형제들이 모두 아랍 반란에 뛰어들었는데, 최고의 활약을 보인 인물이 셋째 아들이 파이살이었다. 전후에 후세인은 사우디 국왕이 되고 파이살은 이라크, 형 압둘라는 요르단 국왕이 되었다. 그러나 후세인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위를 현재의 사우디 왕가에게 빼앗겼다. 이라크에서는 파이살이 사망한 뒤에 쿠데타가 일어나 왕가가 잔혹하게 몰락했다. 현재는 요르단만이 하심 가의 혈통을 이어가고 있다.의 파이살(Faisal , 1885~1933)이 아랍 부족을 이끌고 오스만튀르크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영국군 사령부의 일부 장교들은 파이살에게 무기를 지원하고, 영국 군사고문단을 보내 아랍 반군을 정규군으로 양성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정보장교였던 토머스 로런스 중위는 이 계획에 반대했다. 파이살 휘하의 부족을 다 합치면 꽤 의미심장한 병력이 되겠지만 그 군대로는 오스만튀르크군 한 개 중대를 이기기도 힘들다. 아랍인들은 강건하고 독립 의지도 강하다. 하지만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부족의 독립구역이다. 부족 간의 반목이 앞서는 한 강한 군대가 될 수 없다. 또한 그들은 사막의 자유주의자들이어서 오스만튀르크의 지배와 마찬가지로 영국인의 지휘를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무기를 지원하더라도 그들의 방식대로 싸우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방식에 합당한 전술과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이것이 로런스의 생각이었고, 파이살과 휘하 리더들의 생각도 같았다. 그들은 정규군의 작전 방식대로 도시를 공격하고 거점을 지배하기보다는 철도를 파괴하고, 오아시스를 차지한 오스만튀르크군을 몰아내며, 부족의 지배 지역을 하나씩 독립시켜 주었다. 게릴라전으로 승리를 거두자 더 많은 부족이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러고는 전투를 지속하는 중에 부족들은 하나의 아랍 민족이란 가치와 힘을 깨닫고 공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뭉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부족의 영역을 떠나 전체의 목표를 설정하고 움직이기에 이르렀다. 병력이 갖추어지자 아랍 반군은 비로소 정규군과 유사한 전략 목표를 세우고 아랍 국가를 위한 행진을 시작했다. 산 위에서 이들의 이동을 지켜보던 한 부족장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아랍 부족들이 아니라 한 민족이군요.” 그의 말에는 약간의 서글픔도 서려 있었는데, 그의 일상의 기쁨이 이웃 부족을 습격해서 약탈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T.E. 로런스 지음, 최인자 얾김, 지혜의 일곱기둥, 2006, 271,.

 

 

유능한 장수와 장수를 믿고 신뢰하는 군주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 유명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Flavius Petrus Sabbati-Justinianus, 483~565)는 동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정복 군주였다. 그의 야망은 게르만족에 점령당한 이탈리아반도와 서로마 제국을 탈환해서 과거의 로마 제국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이 야망을 실현하려면 유능한 장군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임무에 아주 적합한 인재를 얻을 수 있었다. 벨리사리우스(Flavius Belisarius, 505?~565)였다. 평민 출신으로 입지전적인 승진을 거듭한 벨리사리우스는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쟁사 전문가, 군사 탐독자들에게는 높은 평가를 받는 장군이다. 모든 종류의 전쟁과 전술에 능통했던 벨리사리우스는 북아프리카를 탈환하고 대망의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가 북아프리카에서 승리를 거두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이상한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병력을 빼앗아버리고, 말도 안 되게 적은 군대를 주기도 하고, 지원병을 보내는 데 늑장을 부렸다.

 

황제의 심술에 승승장구하던 벨리사리우스는 이탈리아 통일을 눈앞에 두고, 고전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악전고투 끝에 성공을 거둘 뻔했는데, 대망의 통일을 목전에 두자 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를 아예 본국으로 소환해버렸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재산을 몰수했다. 만년에 벨리사리우스는 눈이 멀어 거의 걸인으로 살아갔다는 비참한 이야기도 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벨리사리우스의 소환으로 이탈리아의 회복, 동서 로마 제국의 재통합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황제가 벨리사리우스를 소환한 이유는 묻지 않아도 뻔하다. 벨리사리우스가 새로운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것이 두려웠다면 애초에 동서 로마의 재통합이란 꿈을 꾸지 말았어야 했다.

 

군주가 장군에게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는 손자의 말은 백번 옳지만, 군주의 입장에서는 유능한 장수일수록 견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옛날 군대, 봉건제 국가에서는 더더욱 불안했다.

 

현대라고 다르지 않다. 태평양전쟁 중이던 1944년은 미국 대선이 있는 해였다. 그해에 미군은 중차대한 일본 진공 작전을 결정해야 했다. 의견이 둘로 나뉘었다. 필리핀을 점령하고, 일본으로 진군하자는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의 안과 필리핀을 놔두고 대만으로 들어가서 일본으로 가자는 해군의 안이었다. 양측 의견이 팽팽하다 보니 대통령인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1882~1945)가 직접 태평양까지 와서 맥아더와 니미츠(chester Nimitz, 1885~1966)를 불렀다. 1944728일에 열린 하와이 회담이다.

 

당시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맥아더의 필리핀 진공안은 자기 부하들을 버려두고 필리핀에서 탈출했던 오명을 씻으려는 개인적인 야심으로 만든 계획이라는 비판이 있다. 하지만 무려 일본군 40만 명이 주둔하고 있는 필리핀을 내버려두고 우회한다는 것은 전략개념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미군이 필리핀을 우회했으면 필리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만행과 비극이 벌어졌을 것이고, 반미주의자들은 그것을 미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이기주의라고 비난하고 있을 것이다.

 

필리핀 진공안이 합리적이었다는 더욱더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해군 사령관 니미츠도 내심 그 안에 찬성했었고 회담 중에 공식적으로 동의했다. 루스벨트는 조금 곤혹스러웠던 것 같다. 속으로는 니미츠의 주장이 승리하기를 바랐을 수도 있다. 맥아더는 벌써 미국 대중에게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고, 필리핀 탈환은 맥아더에게 극적인 영웅 이미지를 던져줄 것이 뻔했다.

 

얼마나 고민스러웠는지 회의가 끝난 후 루스벨트는 맥아더와 부대를 열병하다가 문득 대통령 선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노골적인 질문을 던질 정도였다. 맥아더는 정치에 뜻이 없다고 대답했지만 루스벨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미 그의 참모들은 맥아더가 루스벨트의 강적이 될 것이라고 조언하고 있었다. 사실 맥아더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 역시 이전부터 대통령을 꿈꾸고 있었다. 이런 복잡한 사정 속에도 루스벨트는 맥아더의 안을 수용했다. 대통령으로서의 사명을 정치적 야심보다 앞세운 루스벨트의 행동은 존경할 만하지만, 이 시대가 민주주의 시대가 아니고 루스벨트와 맥아더의 관계가 유스티니아누스와 벨리사리우스의 관계와 같았다면 어떠했을까?

 

장군을 믿는다는 것은 개인적인 미덕, 신뢰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 사이에 어떤 친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황제의 자리를 주겠다고 할 때 흔들리지 않을 인간이 몇이나 될까? 장군에 대한 황제의 신뢰는 시스템, 집단의 인적 구성, 조직의 건전성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어떤 경우에도 믿을 수 있는 인재를 발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재능이 뛰어날수록 야심도 크다. 야심은 없고 재능만 뛰어난 인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거대한 목표를 세운다면 목표를 위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에 걸맞은 신뢰와 제도도 갖추어야 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위도 위태하지 않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다라는 말이 있다. 손자병법의 백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는 구절이 와전된 것인데 대단히 위험하게 번형되었다. ‘백전백승(百戰百勝)’백전불태(百戰不殆)’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전투에 위태로움이 없다는 뜻이다. 100퍼센트 승리가 아니라고 하면 실망스럽지만, 손자는 그것이 말이 안 되는 이유를 다음 단락에서 설명해준다.

 

손자는 지피지기를 해야 백전불태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지피지기가 적과 아군의 무장과 병력, 적이 오늘 밤에 공격하는 지점을 파악하는 따위가 전부가 아니라고 말했다. 손자가 말하는 앎[]은 정보나 지식이 아니라 지혜의 영역이다.

 

지피지기란 무엇을 아는 것인가

지피지기라고 하면 보통 이렇게 설명한다. 적이 오늘 밤 3시에 야습한다는 첩보를 얻었다. 이것이 적을 아는 것이다. 아군은 야간 전투 부적합 자는 빼고, 가진 화력을 모아 적절한 곳에 매복한다. 이것이 나를 아는 것이다.

 

좀 더 철학적인 성찰도 있다. “상대를 존중하라.” “너 자신을 알라.” “항상 자신을 반추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적이 할 수 있는 것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과욕을 억제하고 상황을 냉정하게 보고, 자신이 가진 자본과 능력에 맞는 투자를 하라. 무리하게 빚을 내고, 모든 상황이 잘 풀릴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지피지기의 범주는 무한하게 확산할 수 있다. 이런 충고들도 다 지피지기의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손자의 시대로 돌아가서 손자가 지적하는 상황에서 손자의 진의를 찾아보자

 

손자의 문제의식은 전쟁터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우(不虞)의 상황다시 말해 예측 불가능하며, 아군과 적군이 지략을 다해 치고받는 변화무쌍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법이다. 장거리 원정과 정복 전쟁에서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은 본국에서 수없이 많은 전투를 겪고, 아무리 많은 훈련을 했어도 대비할 수 없다. 신천지를 만날 때마다 충분한 데이터를 준비하고 뛰어들려고 하다간 100년이 걸려도 천하통일은 이루지 못한다. 손자의 이 말뜻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루아침에 새로운 기술이 세상을 바꾸는 오늘날, 내일의 변화에 완전하게 대비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유일한 방법은 선행학습이 아니라 대처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여기서 손자가 말한 지피지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알 수 있다. 미지의 상황에서 대응하는 능력과 반응이다.

 

보통의 장군은 늘 훈련되고 준비된 전술에 의지하고, 그 전술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장소를 찾는다. 방어 역시 같은 방식으로 상대를 분석하고, 자신에게 맞는 곳을 방어지로 선정한다. 이것을 지피지기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명장은 아군과 적군을 미지의 환경 속으로 밀어 넣고, 경험해보지 못한 전투를 강요한다. 이런 작전의 성패는 병사들이 미지의 환경과 돌발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병사들 자신도 모르는 대처 방법과 잠재적인 역량을 지휘관이 정확히 예측하고, 작전을 수행하느냐에 달렸다. 이것이 손자가 말한 지피지기의 본질이고, 용병술에서 최고의 경지다.

 

지피지기 사례 1: 어둠에 의지하지 않고 어둠을 창조한다

기원전 331101, 동이 틀 무렵, 알렉산드로스가 아침 제사를 지내려 병사들 앞에 나타났다. 그의 복장은 지난 모든 정복 활동을 암시하듯이 화려하면서도 간결했다. 머리에 쓴 투구는 강철이었지만, 광을 내서 은처럼 빛났다. 몸에는 시칠리아산 튜닉을 입고, 가슴에는 아마포로 만든 흉갑인 리노토락스를 두 겹으로 착용했다. 이 리노토락스는 지금까지 그가 치른 전투 중에서 가장 크고 극적인 승부였으며, 전리품도 최상이었던 여기에 미래의 부인, 다리우스의 딸과 왕비를 포로로 잡았다이수스 전투에서 획득한 것이었다.

 

전투적인 앞모습과 달리 등에 두른 망토는 최고의 장인이 만든 화려한 장식이 새겨져 있었다. 이는 로도스 주민이 선사한 것이었다. 차고 있는 칼도 명품으로 키프로스 왕의 선물이었다. 이 두 섬은 지금도 튀르키예와 사이가 좋지 않다.

 

대왕의 뒤에는 애마 부케팔로스가 묵묵히 따르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전투 직전에 자신의 애마로 옮겨 탈 예정이었다. 부케팔로스도 늙어서 체력을 배려해주어야 했다. 하지만 전투마로서 연한을 2배나 넘긴 이 늙은 말은 전장에 돌입하면 놀라운 전투력을 발휘하곤 했다. 오랜 고참병들은 알렉산드로스보다 이 말에 더 경의를 표했을지도 모른다. 하긴 마케도니아군의 중추인 장창부대는 평균 나이가 쉰을 훌쩍 넘겼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오늘 장창부대의 노병들도 겪어본 적이 없는 사상 최대의 결전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병력은 페르시아군이 적어도 3배는 많았다. 마케도니아의 압도적인 열세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강인한 장군이었던 파르메니온(Parmenion, BC400?~BC330)조차 야습을 건의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모욕적인 발언을 하며 거부했다. “나는 승리를 훔치지 않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셈은 따로 있었다.

 

이날 알렉산드로스와 다리우스(Darius , BC380?~BC330)의 전술적 원칙은 정반대였다. 이수스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경험했던 다리우스는 그 전투를 반추하며 세심하게 준비했다. 먼저 페르시아군이 장점인 기병과 병력을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장소를 골랐다. 이수스는 좁은 지역에 페르시아군이 중첩되면서 병력의 이점을 살리지 못했고, 산과 바다와 평원이 얽히면서 페르시아군이 유기적인 협력과 움직임을 보이지 못했다. 가우가멜라 평원은 기병의 땅이었고, 모든 부대의 움직임을 조망할 수 있었다.

 

마케도니아군의 중앙 장창부대를 파괴하기 위해 양쪽 바퀴에 칼날을 단 전차 200대를 배치했다. 전차의 기동을 위해 평원을 선택했을 뿐 아니라 땅의 돌까지 정리하면서 평탄화 작업을 했다.

 

더 중요한 이점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두 개의 강을 건너, 9월이라지만 평균 기온이 섭씨 30도가 넘는 더위 속을 한 달 이상 행군해 왔다. 체력을 소모했고, 패하면 도주할 방법도 체력도 없었다. 여기에 두 개의 강이 퇴로를 이중으로 차단한다. 유일한 단점은 너무 완벽한 함정이었기에 알렉산드로스가 가우가멜라로 오지 않을 위험이었다. 하지만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의 백기를 믿었다. 정말로 알렉산드로스는 이 함정으로 자진해서 찾아왔고, 파르메니온의 야간기습안 마저 거부했다. 보통 사람들의 기준에서 보면 다리우스의 전술과 준비는 완벽한 지피지기였다.

 

알렉산드로스의 지피지기는 달랐다. 그는 전군을 모두가 처음 경험하는 대형으로 배치했다. 페르시아 기병의 측면공격을 저지할 어떤 장애물도 없고 병력도 부족했던 그는 전열의 밀집대형 뒤에 중대 병력 단위로 큐빅같이 쪼개서 붙인 예비대를 배치했다. 이들의 임무는 상황에 따라 기동성 있게 대형을 변경하며 전열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적이 습격하면 좌우로 벌려 기병의 측면을 습격할 수도 있고, 전열이 위태로우면 그곳을 보강해서 지탱력을 강화할 수도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전장에서 처음 보는 장면이 연속해서 일어났다. 페르시아군의 살인전차는 먼지를 일으키며 알렉산드로스의 중앙을 습격했다. 그러자 중앙 대형이 좌우로 벌어지며 이들을 통과시켜버리는 기지를 발휘했다. 일부는 밧줄과 갈고리를 이용한 측면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사냥당했을 것이다. 전차는 장기판의 차와 같이 직진 성향으로, 회전이 어려웠다. 전장을 통과한 부대는 멀리 사라졌다. 크게 선회해서 전장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자신들의 무용함을 깨달은 탓인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좌익은 고전했지만 알렉산드로스가 구상한 큐빅 부대의 도움으로 꽤 오래 버텼다. 중앙에서도 2차적인 난전이 벌어졌다. 우익의 알렉산드로스가 갑자기 대형에서 튀어나오더니 기병을 이끌고 페르시아군의 좌익 끝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페르시아군에서도 기병이 출전해 알렉산드로스와 평행을 이루며 달렸다.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군의 왼쪽 끝에 도달해 측면을 공격한다면 좌익에서 기다리던 페르시아군과 평행으로 달려온 기병이 합세해서 알렉산드로스의 기병을 포위해버릴 것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질주는 올가미를 향해 달려가는 무익한 질주로 보였다.

 

페르시아군이 보기에 알렉산드로스가 무모한 몸부림을 치는 것 같았다. 그의 숨통을 확실하게 끊기 위해 중앙에 있던 기병대가 알렉산드로스의 추격에 가세했다. 그 순간 알렉산드로스는 급히 회전하더니 중앙의 기병대가 빠져 비어버린 공간으로 뛰어들었다.

 

놀란 페르시아 기병대가 알렉산드로스의 후위로 따라붙어 공격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중앙을 파고들었다. 정확히는 중앙에 있는 다리우스를 향해 나아갔다. 그를 막기 위해 좌우의 장군, 병사들이 달려들었지만, 알렉산드로스의 공세는 너무나 사나웠다. 유일한 희망은 알렉산드로스의 뒤를 쫓는 페르시아 기병이 전진하는 알렉산드로스 기병의 뒤를 공격해 파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광경을 본 중앙의 마케도니아 경보병대가 전투하던 상대를 내버려두고,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 등을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페르시아 기병대의 뒤로 붙어 그들을 붙잡고 늘어졌다. 이 경보병을 페르시아군이 또 뒤따랐다. 양군이 기차놀이처럼 늘어서서 서로가 등을 공격하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졌다. 누구도 본 적이 없고 전쟁사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번개처럼 페르시아군을 돌파하며 다리우스에게 육박했다. 다리우스는 버티지 못하고 도주했다. 다리우스가 그리스군과 같은 장갑 보병을 동원해서 철벽진으로 알렉산드로스를 가로막을 수 있었더라면 이날 알렉산드로스는 실패했을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가 그런 조치를 할 수 없음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를 추격할 수 있었지만, 그때까지 버티고 버티던 좌익의 파르메니온이 궤멸 직전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부대를 돌려 좌익을 구하게 했고, 이로써 가우가멜라 전투는 알렉산드로스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는 손자가 말한 지피지기의 가장 완벽한 사례다. 다리우스는 보이는 것, 고정화된 사항에 대한 지피기지를 했고, 가시적인 전술과 공간에서 승부를 걸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전술은 준비된 공간을 미지의 공간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파르메니온의 야간기습도 원리는 같다. 야간에 전투를 벌이면 페르시아군의 준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알렉산드로스가 이를 거부한 이유는 그런 식으로 싸우면 어둠이 보호하는 제한된 공간에서 제한된 승리를 얻겠지만, 페르시아군 전체를 미지의 공간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다. “나는 어둠에 의지하지 않고 어둠을 창조하겠다.” 이것이 알렉산드로스의 전술 원리였다.

 

가우가멜라 전체를 미지의 상황으로 덮기 위해서 알렉산드로스는 여러 가지 불우의 상황을 연출했다. 어디까지가 처음에 계획한 것이고, 어디까지가 자신도 예측하지 못한 것인지, 부하 장군들에게는 어디까지 지침이 내려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파르메니온조차 자신이 표적이 되어 끝까지 버텨야 한다는 것 외에는 전술의 개요를 알지 못했다. 모든 병사에게 이런 식의 포진과 초기 전개 상황은 처음이었다.

 

페르시아군 중앙 기병의 돌출은 알렉산드로스가 예상하고 유도한 것인지, 이 역시 돌발 상황이었는지는 판정하기 어렵다. 경보병대의 기차놀이는 예상했을까? 답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떤 형태이든 좌익, 중앙에서 자신이 믿고 사랑하는 병사들이 예상 이상의 활약을 보이리라고 기대했던 건 분명하다.

 

알렉산드로스가 무모했던 것일까? 아니다. 그의 모든 전투를 복기해보면 그 정도 상황에서 내 병사들은 충분히 대처하고 현명하게 행동할 것이다라고 하는 무형의 요소들을 측정하고, 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알렉산드로스의 돌발행동을 영웅적인 요소로 극찬하거나 급격하게 흥분하는 성격적 결합으로 치부하지만, 알고 보면 충분히 측정하고 계산된 행동이었다. ‘불우의 상황에서 벌이는 승부가 알렉산드로스 전술의 핵심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무형적 요소를 측정하지 않기에 이 요소를 놓치고, 지피지기의 내용을 다리우스와 같은 유형의 형태에 제한한다.

 

불우의 전투와 그것을 위한 지피지기. 이 원리를 한니발, 카이사르, 프리드리히 2(Friedrich , 1712~1786), 나폴레옹, 로멜, 패튼 같은 세기의 명장들은 이해했고, 자기 시대의 군대와 무기로 실현한 사람들이다.

 

지피지기 사례 2: 패튼의 브르타뉴 전역

노르망디 상륙 작전 후 제3군을 지휘하게 된 패튼이 처음 받아 든 작전 명령서는 브르타뉴반도로 진격하라는 명령서였다. 패튼은 분노를 속으로 꾹꾹 삼켰다. 연합군의 진격 방향은 동쪽이었다. 파리와 라인강, 베를린에 도착하려면 동진해야 한다. 브르타뉴반도는 연합군의 진격 방향과는 반대인 전선 뒤쪽에서 영국 해협 쪽으로 삐쭉 솟아난 뿔이었다. 다루기 힘들고 껄끄러운 패튼을 서쪽으로 보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묶어 두려는 속셈이었다. 브르타뉴의 독일군은 꽤 강력해서 브르타뉴를 탈환하려면 수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예상했던 것이다.

 

패튼은 이 음모를 멋지게 분쇄한다. 지금까지 독일군의 전매특허였던 전격전을 독일군을 상대로 펼쳐서 속전속결로 단숨에 브르타뉴 전역을 완수했다. 이 전역에서 패튼은 진격 속도를 높이기 위해 셔먼 탱크에 보병을 태우고 달리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실행했다. 그러고는 측면 엄호를 무시한 채, 전차와 수송 트럭을 좁은 도로에 일렬로 세우고 내달렸다. 이 대담한 아이디어는 멋지게 성공했다.

 

패튼은 무모해 보였지만 무모하지 않았다. 하늘에서 기관총을 장착한 P-47기들이 지상군을 완벽하게 엄호했다. 독일군이 측면으로 다가올 수도 없었고,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매복지점이나 저격 포인트가 있으면 가차 없이 공격했다. 또 보병들이 습격을 받으면 상공에서 즉시 달려들어 제압했다.

 

보이지 않는 요소가 있다. 패튼식 전격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미보병들의 평균적 역량이었다. 기동전 연구의 대가인 데니스 쇼월터(Dennis Showalter) 교수는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용기와 역량을 가진 병사들은 해군(해병)과 공수부대에 우선적으로 배정되었다고 말한다. 보병들에게서는 그런 역량 발휘를 기대할 수 없었다. 보병들을 위해 변호하자면 보병에 우수한 자원이 없었다기보다는 보병은 수가 많아서 그런 자원의 비율이 희석되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이들을 전격적으로 내몰 때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앞선 투지와 용기로 난관을 개척하며 적진을 칼날같이 파고드는 작전을 펼쳐야 할까, 눈덩이가 굴러가듯이 기세를 올리고 기세에 묻혀 전진하게 해야 할까? 패튼이 선택한 방법은 후자였다.

 

패튼의 판단은 옳았을 뿐 아니라 전투기와 전차의 엄호 아래 내달리는 과정에서 보병들의 사기를 올리고, 이들을 용감하고 현명하게 변화시켰다. 보병의 무리 속에 묻혀 있던 엘리트 병사들은 대담하고 창의적인 전투를 벌여 동료들은 물론 자기 자신을 놀라게 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사례에 이어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병사들의 잠재적인 능력, 이들이 무엇에 강하고, 무엇에 약하며, 돌발 상황,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서 어떤 능력을 발휘할지를 예측하고 시도하는 것, 이것이 손자가 말한 지피지기다.

 

 

결과가 아니라 결과를 만든 요인을 찾는다

 

이런 지피지기의 능력을 배양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전쟁사를 예로 들면 성공한 작전이 아니라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배경 요인을 분석하는 훈련이다. 원리를 알아야 돌발 상황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웅용력을 발휘하고, 미지의 환경에서 창조할 수 있다.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된 프리먼(Paul freeman) 대령의 23연대를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은 크롬베즈(Marcel G. Crombez) 대령은 패튼과 똑같은 방식으로 전차에 보병을 태워 중공군 포위망을 돌파하게 했다. 기이하게도 이때 보병을 태운 전차가 M46 패튼 전차였다.

 

브르타뉴에서 패튼은 멋지게 성공했다. 지평리에서 패튼 전차는 포위망을 돌파하고 중공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태우고 가던 보병 3분의 1을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 탓에 크롬베즈는 23연대를 구한 공적에도 비난에 시달렸고, 훈장 수여도 불발되었다.

 

패튼은 성공하고 크롬베즈의 패튼 전차는 절반의 성공으로 끝난 이유는 무엇일까? 크롬베즈는 패튼의 성공을 모방했지만, 패튼이 성공한 배경과 조건을 놓쳤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패튼의 성공 비결은 전투기의 공중 엄호였다. 이들이 독일군의 접근 자체를 경계하고 막았다. 반면 지평리에서는 엄청난 수의 중공군이 크롬베즈가 가는 길목에 매복하고 있었다. 날씨로 인해 공중 지원도 어려웠고 그것을 대체할 수단도 마련하지 않았다.

 

승리한 방법이 아니라, 그 방법이 승리로 이어진 요인을 알아내려면, 인간과 사회의 생리와 문화에 대한 통찰이 더해져야 한다. 요즘 기업에서 인문학을 강조하는 이유다. 그러나 기업의 인문학 교육은 지나치게 유행을 탄다. 경기가 좋으면 인문학 수요가 늘고 경기가 나쁘면 실무나 정신교육에 집중한다. 이런 것을 인문학 교육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많다.

 

인문학은 여유 있을 때 시행하는 사치도 아니고 교양, 품성교육도 아니다. 위기감을 느낄 때 실무교육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은 변화의 시기에 남은 기술의 정비 교육에 더 투자하는 것과 같다.

 

 

인용

지도 / 목차 /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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