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변산에 모여든 호모루덴스들
윤구병 선생님은 남들이 모두 선망하는 대학교수직을 내려놓고, 자신이 지금껏 철학과 교수로 펼쳐왔던 철학적인 이념을 현실에서 펼칠 수 있는 곳을 모색하게 된다.
삶터ㆍ일터ㆍ배움터가 하나인 ‘변산공동체학교’
그러던 그때 정착지를 변산으로 정했고 그곳으로 들어가게 된다. 거긴 산살림, 들살림, 갯살림을 모두 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변산에 내려와 몸에 익지 않은 농사를 지으며, 공동체를 이루어 간다. 공동체엔 당연히 어린 아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변산공동체학교’는 바로 이런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곳이다. 과연 제도권 학교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이 학교의 교육 목표는 단순하다. ‘스스로 제 앞가림 할 힘’과 ‘함께 살 힘’을 기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단순한 목표 속에 제도권 교육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비수가 숨어 있다. 제도권 교육은 적게는 12년 동안, 많게는 20년 넘게 사람을 붙잡아뒀으면서도 자신의 앞가림도 못하는 인간을 만들어냈다. 그 뿐인가. ‘엘리트 한 사람이 99명을 먹여 살린다’는 엘리트교육의 허황된 논리를 앞세워, 한 사람을 위해 99명이 들러리를 서게 했으며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게 만들었다. 앞가림도 못하고 서로를 불신하게 만드는 제도권 교육을 보며, 윤구병 선생님은 아래와 같은 목표를 내세운 학교를 만든 것이다.
첫째는 시간문제입니다. 어떤 생명체든 살아남기 위해서는 제 삶의 시간을 스스로 통제할 힘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는 식물, 동물, 하다못해 미생물까지도 예외가 없습니다. 싹트고 꽃피고 열매 맺을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식물이 어떻게 제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즈음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저지르고 있는 짓을 보십시오. 부모들이나 교육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아이들이 걸음마와 옹알이를 제대로 익히기 전부터 아이들 시간을 뺏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을 정신적으로 집단 학살할 정도로 극한에 이르는 집단 학대를 교육의 이름으로 부끄러움 없이 버젓이 저지르는 사회에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스무 해가 넘도록 시간 단위로 다른 사람에게 통제당하고, 기계적인 시간 계획에 길들여진 사람에게 ‘스스로 제 앞가림하는 힘’을 기대하는 것은 삶은 밤에 싹 돋기를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노릇입니다. 둘째로 ‘함께 사는 힘’은 무한 경쟁 체제에서는 절대로 길러질 수 없습니다.
-윤구병, 『변산공동체학교』, 보리출판사, pp 24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방식과 다른 시간표를 짤 수밖에 없다. 제도권 교육은 주요 교과 위주의 이론교육을 중시한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교육 내용이 삶과 괴리되어 현실에서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배우면 배울수록 창의력은 말살되고 수동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그래서 이 학교는 오전엔 ‘정보 교육’이라는 이론 수업을 하고 오후엔 ‘노작교육’이라는 활동 교육을 한다. 정보교육 시간엔 주요 교과 뿐 아니라(물론 국영수 위주로 구성되어 있지도 않다) 삶에 직접 필요한 과목들을 배우게 된다. 선생님들은 농사를 지으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생활인이다. 전공자는 아니지만, 대안교육을 고민했던 분들이고 아이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분들이기 때문에 아이들 수준에 맞춘 교육을 할 수 있다. 노작 교육 시간에는 집짓기, 천연염색, 발효식품 등을 만든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일과 앎, 그리고 삶을 일치시키는 교육을 통해 진정한 공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며, 자신을 앞가림할 수 있는 유형ㆍ무형의 지식을 몸으로 배우게 되는 것이다.
▲ 이걸 공부라 할 수 있을까? 아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삶은 앎과 하나였다. 이 장면처럼 말이다.
호모 루덴스를 키우는 변산 공동체 학교
이곳은 방학 때면 자율학습이란 미명의 보충수업이 아닌, ‘계절학교’를 연다. 4박 5일간 진행되는 이 행사의 주제는 ‘놀다 죽자!’다(이렇게 선정적인 주제를 전면에 내걸 수 있는 이 학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계절학교의 시간표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맘껏 놀 수 있도록 날짜별로 장소만 달리 했기 때문이다. 갯벌, 들, 산으로 장소를 이동하여 놀 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니 아이들은 장소에 맞게 여러 놀이를 만들어 맘껏 놀면 된다. 자연 속에서 한껏 어우러지며 놀다 보니, ‘자연 속의 인간’, 즉 생태학적인 관심이 생기는 것이다. 생태학이란 구호는 결코 삶과 괴리된 이론만으론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건 자연과 나와의 연관 속에서 나를 사유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자연과 나는 하나이므로 계절학교에선 똥을 그냥 버리지 않고 거름으로 재활용한다. 이 때문에 도시환경에 익숙한 아이에겐 ‘큰일’ 보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란다.
하지만 더 큰일은 따로 있다. 막상 시간과 장소가 주어졌는데 놀 줄 모른다는 게 문제다. 한 번도 놀아본 적이 없는 아이에게 맘껏 놀라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하는 줄 몰라 두리번거린다고 한다. 이건 ‘돈벌이와 돈벌이를 위해 쉬기’만을 반복하는 어른의 모습과 똑같다. 하긴 그런 어른에게서 배운 아이들이니 오죽할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놀지 못하던 아이가 시간이 지나 환경에 익숙해지면 그렇게 신나게 뛰어놀 수가 없다는 것이다. 호이징가Huizinga의 ‘호모루덴스’라는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교육이란 이름으로 이와 같은 본능을 억누르게 만들지나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다. 이렇게 본능에 충실하게 맘껏 놀아본 아이들은 커서도 신나게 놀 줄 알며 자신의 창조적 역량을 발휘할 줄 아는 어른이 될 것이다. 밑의 글은 저자의 계절학교 체험평인데, 계절학교의 가치가 잘 드러난 것 같아 발췌해 둔다.
4박 5일의 경험을 안고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죽어도 못 먹을 것 같은 것을 먹었다. 또 게임기 없이 못 살 것 같았는데 게임을 안 하고도 재미있게 놀 수 있었다. 물에 빠지거나 옷이 더러워지는 것이 불편하고 싫었던 아이는 막상 해 보니 재미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만으로도 변산 여름 계절 학교가 있어야 할 까닭은 충분해 보였다.
-윤구병, 『변산공동체학교』, 보리출판사, pp 231
▲ 놀다가 죽자! 고백하건데 그렇게 놀아본 적이 없다. 아니 놀라고 해도 어떻게 노는지 모른다.
인용
'연재 > 작품을 감상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요한 밤의 눈 - 2. 나는 흘러가는 존재 (0) | 2019.06.18 |
---|---|
고요한 밤의 눈 - 1. 너와 나의 스파이란 연결고리 (0) | 2019.06.18 |
변산공동체학교 이야기 - 목차(11.08.17) (0) | 2019.06.06 |
변산공동체학교 이야기 - 3. 청춘을 길러내는 변산공동체학교이길 바라다 (0) | 2019.06.06 |
변산공동체학교 이야기 - 1. 청춘 윤구병 (0) | 2019.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