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춘 윤구병
대학교 도서관을 둘러본다. 방학인데도 도서관 자리는 꽉 차있다.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걸까? 이들에게 방학이란 무슨 의미일까?
▲ 공부한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왜 공부하는지 모른다는 게 문제다.
나이 어린 늙은이, 나이 많은 청춘
예전엔 농활을 가거나 여행을 떠나는 친구를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학생들은 더 이상 그러지 않는다. 정해진 루트에서 벗어나는 일은 꿈도 못 꾸며, 기득권 체제에 빨리 합류하기 위해 스펙을 쌓고 시험공부에 열중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들의 표정은 굳어있고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걷고 말엔 음산한 기운이 감돈다. 이들은 ‘애늙은이’다.
예술회관을 둘러본다. 여기저기 흩어져 농악을 배우고 있는 노인분들이 보인다. 장구를 배우기 위해 찾아왔다는 할머니는 “진즉부터 오려고 했는디. 사느라 바빠서 여지껏 미루다가 인제 왔당게”라고 말씀하신다. 할머니 얼굴엔 낯선 공간에 대한 긴장과 함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었다는 기대감이 엿보인다. 강사의 지도에 따라 연신 장구를 쳐보지만 도무지 손이 따라주질 않는다. 그래도 할머니는 한마디 불평도 없이 ‘덩기덕 쿵더러러러 쿵기덕 쿵덕’이란 가락에 맞춰 신나게 두드린다. 몸 따로 맘 따로지만 할머니의 모습에선 열정이 느껴진다. 할머니는 ‘청춘’이다.
흔히 청춘이라는 단어는 나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의 예에서 보듯이 청춘은 나이와 아무 상관이 없다. 삶을 고민하고, 자신의 욕구를 충실히 표현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청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꿈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상관없다.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부딪히며 나아갈 때, 우린 젊어지기 때문이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장미빛 뺨, 앵두 같은 입술,하늘거리는 자태가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을 말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깊은 샘물에서 오는 신선한 정신,
유약함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를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이십의 청년보다
육십이 된 사람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우리가 늙는 것은 아니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
세월은 우리의 주름살을 늘게 하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지는 못한다.
고뇌, 공포, 실망 때문에 기력이 땅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마음이 시들어 버리는 것이다.
육십 세이든 십육 세이든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는 놀라움에 끌리는 마음,
젖먹이 아이와 같은 미지에 대한 끝없는 탐구심,
삶에서 환희를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법이다.
그대와 나의 가슴속에는
남에게 잘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간직되어 있다.
아름다움, 희망, 희열, 용기,
영원의 세계에서 오는 힘,
이 모든 것을 간직하고 있는 한
언제까지나 그대는 젊음을 유지할 것이다.
영감이 끊어져 정신이 냉소라는 눈에 파묻히고
비탄이란 얼음에 갇힌 사람은
비록 나이가 이십 세라 할지라도
이미 늙은이와 다름없다.
그러나 머리를 드높여
희망이란 파도를 탈 수 있는 한
그대는 팔십 세일지라도 영원한 청춘의 소유자인 것이다
-사무엘 울만,「청춘」
▲ 바로 이 속에 청춘이 있다.
청춘되기의 힘겨움
그러나 아무리 청춘이 좋다고 해도, 자신의 열정만 믿고 함부로 나갈 수는 없는 법이다. 보통 사람으로 살기도 힘든 세상에, 일부로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면서까지 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뭔가 ‘특이한 사람’을 보면 사람들은 “괜히 분란 일으키지 말고, 그냥 남들 하는 대로만 살아. 니가 아무리 그렇게 발버둥 쳐도 세상은 변하지 않아. 그러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고 말하며 체념하게 만든다. 이런 핀잔을 듣노라면,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도 주눅 들어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다. ‘청춘’을 ‘애늙은이’로 만드는 사회다. 이렇듯 청춘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끊임없는 질문과 고민들 속에서 주체를 세우고 허무주의와 맞서 싸울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교육자라고 해서 모두 다 청춘일 순 없다. 아무리 의식 있는 교육자라해도 학교라는 공동체에 들어가는 이상, 조직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을 위하고 소통하는 교육을 하고 싶어도 현실의 교육 여건은 그러한 의지를 매번 꺾는다. 그런 식으로 여러 번 좌절하다보면, 예전에 가졌던 생각은 흐려지고 어느덧 학생을 억압하거나 방치하는 교사가 되는 것이다. 교육 조직에서 초심을 지킨다는 것은 외줄 타기만큼이나 힘들다.
▲ [죽은 시인의 사회]의 한 장면. 누구도 이런 교사를 원치 않았지만 맞춰 살다보면 그렇게 된다.
윤구병의 외줄타기
하지만 윤구병 선생님은 너끈히 외줄타기를 해냈다. 제도교육기관이 지닌 문제점을 보며 『실험학교 이야기』를 펴낸 것만으로도 자신의 열정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도 막상 행동은 하지 못하고 생각하는 단계에서만 그친다. 자신이 누리던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결단력,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확신, 사회와 사람이 가하는 유언ㆍ무언의 압박을 견뎌낼 수 있는 저력 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학교수직만 유지해도 편하게 살 수 있는데 무엇 하러 고난의 행군을 자처한단 말인가.
그런데 윤구병 선생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발짝 더 나갔다. ‘청춘’ 윤구병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결단에서부터 시작된다.
▲ 40살이 넘어가면 자기 얼굴에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윤구병 선생님은 개구쟁이 같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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