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강의 내용
김선생님(현천고 일본어 교사)이 최근 들어 일본어를 잘 안 하는 것 같으니, 최대한 천천히 말하도록 하겠다. 솔직히 말해 어제까지만 해도 이 학교에 올 줄은 몰랐다. 어제까지 강연을 하고 오늘은 관광을 하는 줄 알았기에 아침 10시쯤 관광을 가자고 말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때 “좀 특이한 학교가 있거든요”라고 말문을 때며, 이 학교를 알려주더라. 그러고 보니 어제 뒷풀이를 할 때 이 학교의 교장선생님도 함께 있었고 “내일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을 했으니, 경황 상 예측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이 학교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냥 오게 됐다.
현천고 학생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에 놀라다
와서 얘기를 들어보니, 이 학교는 개교한지 2년이 됐으며, 학생이 90명 정도라고 하더라. 이런 식으로 교육실천을 하는 학교(고등 대안학교)를 일본에서는 전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학교에 막상 도착해서 안내를 받으며 학교를 돌아다녔고, 도서관에 가선 사진까지 찍었다. 일반적으로 도서관은 책상과 의자가 있는데, 이곳은 아무리 찾아봐도 의자가 보이지 않더라. 작은 책상을 놓고 앉아서 책을 보는 아이, 다리를 쭉 뻗고 컴퓨터를 보는 아이, 심지어 도서관 안쪽에선 잠을 자는 아이까지 다양한 모습의 아이들이 있었다. 손님이 둘러보고 있으니 처음엔 자는 학생을 교사가 깨우지나 않을까 유심히 지켜봤는데, 교사는 전혀 그럴 맘이 없는지 싱글벙글 웃으며 “우치다 선생님 다음으로 가시죠”(일동 웃음)라고 말하더라. 그래서 ‘이 학교에선 저런 모습이 아주 일상적인 모습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도서관에서 내려오니 나들터가 있고 그곳에선 세 명의 남학생들이 노트북을 엎드려 보고 있었다. 거기서 시선을 약간 돌리니 여기저기 학생들이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이더라. 나에겐 그 광경이 매우 놀라운 광경이었다. ‘이 학교에선 어떤 자세로 있어도 되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틀에선 벗어나되 남과 같도록
학교의 최초 설립목적은 학생들의 말과 자세, 그리고 생각을 틀에 맞추는 것이었다. 물론 일본에선 여전히 그런 교육이 이루어져서, 아이들의 말이나 생각이 획일화되도록 가르치고 있다. 예를 들면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아주 느릿느릿하게) 하~~이!”라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며 피곤하다는 듯이 일어선다. “하이”라고 큰소리로 대답하며 곧장 일어서도 될 텐데, 오히려 되도록 힘 빠진 소리를 내며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죠. 학생들은 아마도 그런 걸 자유라고 여기는 듯하다.
하지만 그건 결코 자유가 아니다. 오히려 그건 획일화의 압력에 굴복했기 때문에, 틀에 묶여 있으려는 고집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옛날엔 틀에 맞추려 빠릿빠릿하게 대답을 했고 잽싸게 행동을 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반대로 하고 있다. 반대로 행동하기에 ‘저항한다’고 여길 테지만, 그것이야말로 하나의 틀에 맞춘 결과라 해야 맞다. 주변 아이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그 모습을 흉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혼자만 빨리 움직이면 오히려 눈에 띄어 왕따를 당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아이들이 중학교에 입학하면 주변 어른들의 조언에 따라 정신을 차리려 노력한다. 애를 쓰는 것이다. 처음엔 늘어져 있지만 2개월 정도가 지나면 그러지 않으려 한다.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음에도, 주변에 제대로 하는 아이들이 있으니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아이들에겐 매우 좋은 경험이라 할 수 있다.
현천고, 획일화가 아닌 다양화를 가르치다
인간은 다양한 말투와 몸짓이 가능한 동물이다. 주변 환경이 어떠냐에 따라 사람은 거기에 맞춰 적응한다. 사람은 여러 모드 중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그때그때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야’라거나, ‘나는 이런 형태의 옷만 좋아해’라는 게 개성적이고 선택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개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오히려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반증할 뿐이다. 아이들은 주변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기에, 지금 당장 ‘이건 나야’라고 믿고 있는 것이 나 일리도 없고, 결코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다.
‘자유롭다’는 느낌이 결코 주변의 물건을 선택하는 정도로 생각해선 안 된다. 자유란 여러 환경 속에서 여러 말투, 여러 복장을 자유롭게 바꿔가며 적응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러분들이 다니는 이 학교에선 그런 자유가 가능해보인다. 이 학교는 ‘고등학생이라면 ~해야 해’라는 규정도 없으며, ‘학교란 ~ 해야 해’라는 틀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까 보니 교장 선생님도 매우 캐쥬얼한 복장으로 학교에 출근하셨던데, 그건 일본에선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걸 보면서, 교장 선생님의 복장은 아마도 여러 삶의 형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메시지이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이상적인 학교(격조 높은 학교, 품격 있는 교사와 같이 정형화된 학교)를 만들려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이 학교는 그런 학교들과는 완전히 다른 학교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늘 발산하며 살고 있다. 그러니 학교에선 ‘다양해야 한다’, ‘개성이 있어도 된다’, ‘집단은 개성적일수록 시너지를 발산한다’와 같은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건 우리가 혼자 사는 게 아니라 집단으로 뭉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현천고, 개성이 있는 인간을 기르다
집단이 강해지려면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모두 같은 능력을 지녔다면, 그 집단은 유지될 수가 없다. 멀리 볼 수 있는 사람, 냄새를 잘 맡는 사람, 힘이 센 사람, 미세한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 등 다양한 구성원이 있어야 그 집단이 유지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나 혼자만 있다’는 잘못된 개성으로 살다가, 그런 상태로 사회에 나가 ‘나는 개성적이다’라고 말해봤자, 그 말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개성이 있다’와 ‘고립되어 있다’는 말은 전혀 다른 말인데도, 사람들은 그 둘을 착각하고 있다. ‘개성이 있다’는 건 옆에 동료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말이다. 팀이 있어야만 비로소 개성이 눈에 띈다.
학교의 중요한 목표는 ‘집단이 유지될 수 있는 힘을 키워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학교는 굉장히 중요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간다면 노래방, 당구대, 담배를 펴도 되는 환경이 교육적으론 좋은 환경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학교야말로 한국사회에 강한 메시지를 전하는 곳이라 생각한다. 그건 방종이나 방임과는 다른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 학교의 의미를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대로 이어 받아 전해줬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당연히 개성을 지키며 함께 나아갈 수 있으면 된다.
2. 질의응답
문교부, 교육을 망치다
Q
현천고는 미국의 진로중심교육과정을 이어받아 만들어진 학교라 할 수 있다. 그건 교육의 큰 흐름이고 나름의 유행이기 때문에 한국까지 건너온 것이다. 그런데 왜 일본엔 그런 흐름의 학교가 없는지 궁금하다.
A
이런 학교를 만들고 싶은 교사들은 많이 있다. 일본의 문교부는 한국과 달리 굉장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세세한 것들을 모두 정해놨을 정도니 말이다. 그러니 문교부의 지침을 따르지 않으면 바로 제재가 들어올 정도다. 그런 식으로 운영된지 벌써 30년이 흘렀다.
하지만 몇 군데 학교는 자유로운 분위기로 가르치기도 한다. 노작하는 학교, 기숙하는 학교 등이 있지만 그건 5%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학교에 대한 문교부의 압박은 어마어마하다. 심지어는 안전보장법을 만들어 그와 같은 학교들을 옥죄려 하기에, 반대집회도 심심치 않게 열리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단체에서 활동하는 학생들이 바로 자유롭게 가르치는 학교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현실을 문교부의 관료들 중 몇몇은 잘 알고 있고 굉장히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관료들은 나쁘게 생각하고 있는 게 문제다. 그러니 앞으로도 문교부가 많은 권한을 휘두르는 한은 일본의 교육은 크게 바뀌기 어려울 것이다.
학생의 개성을 키워주는 방법
Q
고립되지 않은 개성에 대한 이야기가 와 닿았다. 그렇다면 개성을 살리기 위한 교사의 역할과 학생의 역할이 어때야 하는지 듣고 싶다.
A
교사는 교사 자신도 개성이 있고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걸 보여주면 된다. 같은 교육 이념을 공유하는 게 아니라, 교사 한 사람 한 사람이 ‘학교는 이래야 한다’, ‘학생은 이래야 한다’는 말들을 하면 된다. 각자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기에 학생들은 헛갈릴지도 모르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자기와 다른 것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체득하게 된다. 바로 그때에 학생의 개성은 싹트고 자리를 잡는다.
꿈을 찾지 못한 학생에 대한 조언
Q
이렇게 자유로운 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아직 꿈(18세 여학생)을 찾지 못했다. 이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다.
A
지금 내가 무얼 하고 싶은지 모르는 건 당연하다. 내가 대학교수일 때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적성검사를 했었던 적이 있다. 그 당시 20살인지, 21살인지 였던 학생 한 명이 나를 찾아왔다. “적성검사에서 승무원 또는 애견미용사가 적합하다고 나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난 곧바로 “그건 무시하는 게 좋아”라고 대답했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는 꽤 많은 시간이 흘러야만 겨우 알 수 있다. 나도 직업을 골라야 했을 때 하고 싶은 일보다 가능한 일을 선택했었다. 그건 한 마디로 ‘누군가 이거 할 사람이 있나요?’라고 묻는 것이고, 그에 따라 내가 ‘제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라고 손을 들었기에 하게 된 것이다. 누군가 그와 같이 물을 때 대부분은 손을 들지 않는데, 나만 손을 들었기에 하게 됐다. 하고 싶어서 선택한 게 아니라, 가능한 걸 선택한 것이다. 미래에 뭘 하고 싶어서 준비하는 게 결코 아니다.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천직이란 단어나 소명이란 단어가 이걸 표현한 단어라 할 수 있다. ‘vocation’은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누군가가 부를 때까지 내가 준비하고 있으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러분이 직업을 선택한다고 생각해선 안 되고, 직업의 문이 열릴 때 비로소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그 문엔 손잡이가 없어서 내가 임의적으로 열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 문은 철저히 반대편에서만 열리도록 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학생처럼 직업의 문이 어딨는지 몰라, ‘이 문일까? 아니면 저 문일까?’라고 궁금해 하며, 주의 깊게 바라보고 행동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 보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문이 열려 있을 것이다.
제대로 된 어른의 조건
Q
제대로 된 어른은 어떤 어른인가?
A
‘제대로 된 것’과 ‘어른’엔 정의가 따로 없습니다. 제대로 된 어른이라는 건, 다른 사람에게 도와달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지, 자기 스스로 ‘나는 제대로 된 어른이다’라고 스스로 선언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한 조건이 있으니, 그런 조건을 갖추면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살다보니 누군가 나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무언가 부탁하면, 그때야 비로소 ‘내가 제대로 된 어른이 아닐까?’ 생각하는 정도니 말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어른’이란 것도 사전적으로 정의되어 있다기보다, 관계나 상황 속에서 살다가 나중에서야 알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교사 수만큼 교수방법이 있고, 학생 수만큼 배우는 방법이 있다
Q
현천고의 교육방식은 일반적인 학교의 교육방식과 다른데, 두 가지 교육방식이 공존할 수 있나?
A
물론 공존은 가능하다. 가르치는 방식도 다양하듯이, 배우는 방식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게 가장 건강한 학교의 모습이다. 교사 수만큼 가르치는 방법이 있어야 하고, 학생 수만큼 배우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자기 스스로 배우는 방법을 찾아가야 한다. 자기만의 방식은 자기만이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의사소통이란 환상을 깨부수기
Q
잘 소통하여 집단이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A
소통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한다. 커뮤니케이션 능력 중 하나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잘 전달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란 무엇 하나 통하지 않는 상대를 만나 서서히 통하게 만드는 토대를 만들어가는 가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지진이 나서 모든 게 무너진 상황을 상상해보자. 폐허로 변한 그 속에서 돌을 하나하나 다시 쌓아가는 것이 의사소통이라 할 수 있다. 옆에 있는 사람은 99%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같은 사람이 아닌 에일리언으로 보면 된다. 하나도 통하지 않던 사람과 애쓰고 애쓴 결과 하나가 통하게 되고, 하나가 통하니 어느 순간엔 둘이 통하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의 감정을 완전히 알 수 없는 게 슬픈 일은 아니다. 대부분을 모르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나 알 수 있다면 그걸로 이미 충분하니 말이다. 그것이 가능성이고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쌓아 가면 된다. 그러니 완전히 소통되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욘 없다. 옆에 있는 에일리언과 나란히 앉아 얘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면 될 일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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