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하류지향』을 읽고 왔는데, 지금은 『하류지향』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하는 것만 같은데, 약간 논지가 바뀌었다고 보는 게 맞는가?
A
『하류지향』은 이미 12년 이야기로 시간이 많이 흘렀다. 지금 그 책을 돌아보면, 학생들에 대해 매우 냉정하게 비판했다고 반성을 하게 된다. 그 당시만 해도 ‘학생들 개인의 책임이 크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썼는데, 그 뒤론 그런 인식이 균열이 갔다. 배우지 않고, 일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피해자였던 거다.
그때부터 어떤 사회구조가 그와 같은 아이들을 만드는지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세계 각 나라들의 제도, 이데올로기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탐구하게 됐다. 비판이란 결국 아이들이 그 비판에 함몰되지 않고 스스로의 복원력을 통해 성숙해갈 수 있을 거라 보았기에 할 수 있는 거다. 그 당시 날카로운 비판들은 아이들의 복원력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였다. 그러나 지금 아이들의 복원력은 현저히 약해져 있어, 지금은 비판보단 지지를 해야만 한다. 그래서 지금은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엔 비판하지 않고 격려하려 하는 것이다. 그만큼 일본의 아이들은 지금 막다른 골목까지 왔으며, 그건 교사라 해도 예외가 아니다.
일본의 언론들은 교사들에 대해 비판 일색이다. 언론은 ‘사회는 계속 변화하는데, 교사는 대체 무얼 하는가?’라는 비판적인 내용의 기사만 쓴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변해라’, ‘새로운 것들을 적용해라’와 같은 주문을 외칠 수 있었던 것이다. 나 또한 어렸을 때부터 이런 언론의 논점을 수시로 접하다 보니, 거의 세뇌되어 스스로 납득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교육의 변하지 않는 본질에 대해 알게 됐기 때문이다. 보통은 변하는 것이 선이자 옳은 것이라 생각하여, 그것만을 강요한다. 경제활동은 그와 같이 변화에 민감해야만 하고, 그럴 때에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교육이 그걸 따라가면 완전히 망치게 되어 있다. 모든 것이 변하는 시대에선 변하지 않는 것도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균형이다.
생각이 이렇게 바뀌게 된 건, 시대에 대한 통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교사를 쉬게 하는 것, 학생을 쉬게 하는 것’이다. 지금 일본의 교육을 보면 ‘학교란 쉬어야 하는 곳이다’라고 말하는 곳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경쟁이 중요하다, 변화에 민감해야 한다며 이기기만을 가르친다. 그건 초 3 학생에게 영어를 교육시키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는 공장 같이 사회의 변화에 끊임없이 휘둘리는 곳이 아닌, 변화가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온실이 되어야 한다. 정치와 시장이 완벽히 차단된 곳에 학교가 있어야 하고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을 음미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의 지성과 감성의 육성을 위해선 그렇게 철저히 분리시키려는 노력들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Q
『하류지향』에서 수업시간에 불쾌감을 표시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표현을 썼는데, 불쾌감이 줄어들게 되는 계기는 교사집단이 함께 활동할 때
A
아이들에겐 개인적인 삶이 있다. 그때 가장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난 것이기에 자연스럽게 변화된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X가 사람을 변화시켰다’라는 말은 할 수 없는 거다.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좋은 교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말 좋은 교사다’라고 생각할 만한 교사도 없었다. 처음엔 대단한 교사인 줄 알고 기대했는데, 막상 그렇지 않아 실망했던 적이 많기 때문이다. 기대를 한 건 아이가 스스로 한 것이니, 그건 결코 교사의 잘못이라 할 수 없다. 이와는 반대로 한계까지 부딪히며 좋은 교사를 만나 아이의 가능성이 활짝 만개한 경우도 있다. 그때조차도 ‘운이 좋다’고 표현할 뿐, ‘한 사람의 덕’이라 말하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가 자연스럽게 자라도록 지켜봐야 하고, 한 순간 한 순간에 갇혀 평가하고 조작하려 해선 안 된다. 그래서 교사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낙관과 인내력이다. 언젠가는 꽃이 활짝 필 것을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지금의 학교 교육에선 ‘대기만성’이란 말은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Q
교육을 학생은 구매하고, 소비하는 거라 말했는데, 학생이 ‘내가 왜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고민이 있을 때, 교사가 어떻게 해야 학생이 그걸 찾을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A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왜 가르치는 것인지 모르고, 내가 왜 배우는지를 모르는 애매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곳에서 배움이 기동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왜 가르치는지는 모르지만, 그럼에도 가르치는 것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 교사도 있다. 그것이야말로 명확한 논리로 설명을 할 수가 없다. 가르치고 배우는 건 근원적인 것으로 간단한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아이들 수만큼 배우는 이유가 있고, 교사 수만큼 가르치는 이유가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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