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우치다 타츠루 세종 강연 - 교사단의 관점에서 교육 낯설게 보기(16.09.26) 본문

연재/배움과 삶

우치다 타츠루 세종 강연 - 교사단의 관점에서 교육 낯설게 보기(16.09.26)

건방진방랑자 2019. 10. 23. 03:41
728x90
반응형

1. 강의 내용

 

 

오늘 이야기의 주제는 교사단이라고 알고 있다. 교사단이란 교육의 주체를 개인이 아닌 교사단이라는 하나의 집단으로 보는 것을 말하고, 그건 한국과 일본에서 그렇게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교육평가가 도입되지 않던 시절에 교수의 모습

 

저의 경우에도 처음에는 교사 개인의 역량으로 학생들을 맡아 교육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교사가 살아오고 공부해온 방식으로 교육 이념을 체계화한 후, 그걸 기반으로 교육하는 것이기에, 교사 개인이 주도하는 교육만을 제대로 된 교육이라 본 것이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30년 정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는데, 그 당시 대학교수들의 수업 방식엔 문제점이 많았다. 예를 들면 교수의 50% 정도가 1년에 한 편도 논문을 쓰지 않거나 일주일에 3번 정도만 수업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교수들이 많았다. 또한 수업계획표에 ‘~책을 읽고 오세요라고 써놓아 학생들이 그 책을 읽어야만 수업에 들어갈 수 있기에, 아무도 그 수업을 신청하지 않아요. 바로 그런 교수를 개점휴업한 교수라고 불렀죠. 교수도 양식에 맞춰 수업계획표를 썼고 설령 학생들이 한 명도 수업에 안 들어왔다 해도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기에 월급도 제대로 받는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학생들이 수업에 안 들어오는 것에 대해 아주 기뻐하는 교수들도 있다. 그러다 보니 교수 중엔 아예 처음부터 언제 언제 수업을 하고, 언제 언제 휴강을 하겠다고 선언하는 경우까지 있게 됐다.

일본엔 세미나라는 특수한 수업 방식이 있는데, 그걸 차용하여 학생들에게 책을 던져주고 그걸 읽어보라는 식으로 수업을 하기도 한다. “오늘은 10페이지 정도를 수업할 테니, 너희들이 읽어봐라라고 말하며 수업을 시작하고, “질문 있으면 손을 들어주세요라고 말해봐도 아무도 손을 들지 않죠. 그렇게 90분 동안 계속 책만 읽다가 끝난다. 그처럼 35년 전의 대학교수들이란 어떤 특권의식을 누리며 맘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교육평가 시스템 도입으로 학교엔 생기가 넘실거렸다

 

처음 교베여학원대학에 교수로 갔을 때 자기 일에 집중하지 않는 교수들도 있었다. 연구도 안 하고, 교육도 안 하고, 학교 일도 안 하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그때 선배 교수 한 분은 가능하면 일을 하지 마세요라는 조언까지 해줄 정도였고, 그 이유를 당신이 너무 많은 일을 하면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일을 안 하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댔었다. 그 땐 그 말 한마디에 무척 화가 났었기에, ‘역시 그 말대로 해선 안 된다. 그러니 교수 관리체계를 확실히 만들어 바로 잡아야 한다고만 생각했었다.

그 당시 미국에선 자기평가를 하여 그에 따라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식의 관리체계가 만들어졌고, 그게 일본으로 들어왔다. 그 시스템을 보는 순간 이거 매우 기막힌 방식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땐 이 교수가 얼마나 교육을 열심히 하는지, 얼마나 연구를 많이 하는지, 얼마나 학교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지 평가하여 1에서 100등까지 서열화해보자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 시스템에 정통한 외부강사를 초대하여 교육의 질을 높이는 방안에 대해 컨설팅을 하니, 교수들도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필기하기 시작하더라. 그건 대학 내에 불어오는 배움의 열기라고 생각했다. 그처럼 1990년대에 대학에 비즈니스 마인드를 도입하자고 외친 장본인이 바로 나라고 할 수 있다.

그 시스템의 핵심은 교수들이 비즈니스 마인드가 없는 것이 문제이기에, 근무고과제를 도입하여 성과가 좋은 사람에겐 상을 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벌을 주자는 것이다. 그걸 도입하자고 주장했던 이유는 근무고과를 평가하여 평가에 따라 보상과 벌칙을 부과할 때에만 대학이 발전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유를 여러 교수들에게 말을 하니, 처음엔 화만 내더라. 그래도 차츰차츰 강한 어조와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하니 서서히 받아들이게 됐고, 결국은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고베여학원대학은 미션스쿨로 작은 규모의 학교다. 이전에도 이미 이공계 학교에선 그런 식으로 평가하고 있긴 했지만, 문과계 학교 중에선 우리 학교가 최초로 도입한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그런 식의 시스템 도입은 나름 성공적이어서 근무고과를 반영하는 게 학교 발전을 위해서 좋다는 말을 들었으며, 그로 인해 여러 학교에서 벤치마킹을 하기 위해 찾아오기도 할 정도였다.

 

 

 

변화의 활기는 잠시, 부작용은 계속

 

그런데 시스템을 도입한 지 6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실패했다는 걸 자각할 수 있었다. 교수당 논문 몇 편을 썼으며, 지도하는 학생이 몇 편의 논문을 썼는지에 따라 등수가 좌우되는 방식이었다. 모든 교육적인 활동들을 수치화하여 평가하는 방식이었던 거다. 그런데 그때 영문과 교수는 당신처럼 1년에 5~6권 책을 내는 사람과 나처럼 20년에 책 한 권을 내는 사람의 가치는 다르다라는 말을 했었다. 그 말대로 논문의 질과 양은 절대로 수적인 개념으론 비교할 수 없는 거였다. 5년에 한 편 내는 사람과 1년에 5권을 내는 사람을 단순비교하면 25배의 연구능력차가 있다고 볼 수 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그 논문이 훌륭한 논문인지 알기 위해서는 편수만으론 알 수 없으며, 그 분야에 정통한 학자들의 자문을 통해 확인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럴 때 나름 인정받는 사람들에게 평가를 부탁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연구도 잘하고, 학내의 일도 잘 처리하며, 가르치기도 잘 하는데, 거기에 덧붙여 다른 사람이 쓴 논문까지 평가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일을 가중시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처럼 처음에 근무고과를 도입할 때만 해도 서열화하여 자원을 배분하면 대학의 역량이 올라갈 것이고, 그에 따라 대학이 발전할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다 보니 교육을 평가하고, 연구를 평가하려면 그만큼이나 많은 노력과 자원이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평가비용을 0원으로만 생각했고 평가하는 게 오히려 연구를 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 교수들이 제대로 연구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준다고 생각했던 제대고 오히려 교수들을 억누르고 힘겹게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자각하게 된 것이다.

윌급을 받는 만큼도 일하지 않는 교수들이 많았기에 그 사람들에겐 벌을 주자라는 심정으로 근무고과를 도입해야 한다고 소박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타성에 젖은 교수들을 자극하는 데엔 의미가 있지만 오히려 열심히 하던 교수들에겐 방해가 됐다. 의도치 않았지만 제안한 내가 악역이 된 것이다. 처음엔 제도의 도입으로 역량이 증대된 것처럼 보였으나, 머지않아 퇴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잘못됐다를 알게 됐음에도 학교에선 그 제도가 더욱 본격적으로 도입됐다는 점이다.

 

 

 

비즈니스 마인드가 교육을 황폐화시킨다

 

세종에서 차를 타고 올 때 에듀니티 사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국과 일본이 거의 같은 분위기지만, 일본은 더 심각한 상황이란 판단이 들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거의 붕괴되었다. 교수의 평가는 논문수로 단순히 평가되고 있다. 일본의 논문수는 OECD 최하위로, 한국은 일본의 2.9, 대만은 2.8배다. 25년 전엔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단연 탑이었지만, 그 사이 일본은 가장 연구하지 않는 나라가 됐다. 그 이유는 비즈니즈 마인드가 대학에 도입됐기 때문이다.

비즈니스 마인드는 교육과 연구 성과는 수치적으로 평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공과 실패를 수치로 볼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다. 예를 들면 새로운 상품을 개발했더니 잘 팔려 주식이 올랐다는 구조는 객관적으로 보이고 자명해보인다.

그런데 교육성과란 게 그런 공업제품처럼 단순히 판단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지금 당장 했던 교육의 성과를 다른 사람의 교육성과와 바로 비교할 수 있는가? 25년 전부터 학교를 공장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지금 우리가 가르치는 것은 교육상품이다라고 생각하여 좋은 상품이면 시장이 선택해줄 거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선택하지 않을 거다라고 정했다. 그럴 때 교사의 역량이라는 건 시장에 얼마나 팔리느냐로 측정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수계획서를 쓰도록 했다. 그건 미국에서 온 것으로, 일종의 상품에 붙어 있는 스펙과도 같은 거다. 성분은 어떤지, 언제 만들었는지, 유통기한은 언제까진지, 어디서 만들어졌는지를 쓴 게 스펙표이듯, 교수계획서는 교사가 제공할 수 있는 스펙표인 셈이다. ‘이 수업엔 이런 성분(가치)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가치들을 이런 식으로 활용하라’, ‘이 수업을 들으면 6개월 만에 이 자식을 얻게 되고, 자격증을 받게 된다와 같은 식으로 말이다. 교수계획표에 깔려 있는 전제는 상품 제공자는 교사고, 소비자는 학생이다라는 거다. 그런데 학생이 소비자로 교육에 등장하는 순간, 교육은 성립되지 않는다.

 

 

   

 

비즈니스 마인드를 지닌 교육 현장의 두 가지 저주

 

첫 번째 저주는 바로 여기에 있다. 교육 제공자가 상품 제공자처럼 행동할 경우, 수업을 하기 전부터 내 수업을 들으면 차후에 ~~하게 된다를 소비자에게 어필해야 하기 때문이다. 배우기 전에 왜 배워야 하는지 모두 다 말해야만 한다. 일본도 손님은 신이다(한국은 손님은 왕이다)’라는 말이 있다. 소비자란 이 물건을 구입하면 나에게 어떤 이익이 있고, 어떤 가치가 있는지 사전에 아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백화점에 가서 점원이 올 때, 소비자는 인상을 쓰거나 무표정한 표정을 짓는다. 이때 점원이 상품을 설명해주면 소비자는 그 내용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것이야말로 소비자의 아이덴티티를 지닌 사람의 저주라 할 수 있다. 그때 모르는 내용이 있더라도 이 내용을 알려줘서 고마워요라고 생각하는 소비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자동차 대리점에 갔을 때 점원이 다가와 뭘 찾고 있으시죠?”라고 물으면, “~~한 느낌의 차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점원이 자세히 설명해주는데, 그걸 열심히 듣는 손님은 없다. 약간 불쾌한 표정을 짓으며 나가고, 그건 다른 대리점에 가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두 번째 저주는 당신이 보여주는 것에 대해 아무런 욕망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며, 자기에게 유리한 입장으로 가져간다는 점이다. 그게 바로 소비활동을 할 때 소비자가 보일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소비자 마인드를 지닌 아이들의 교육을 대하는 태도

 

이미 우린 소비활동을 하며 소비자 마인드의 폐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왜 학교를 소비의 공간으로 만들려는 것일까? 교사가 지식을 상품으로 팔고, 학생들이 구매하도록 하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교수들 중에서는 아예 학생과 학부모는 고객이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까지 있고, ‘교육이란 소비되어야지만 의미가 있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다.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학생이 소비자 마인드를 지니면 어떤 일이 생길까?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초등학교 교사에게 들은 얘기다. 히라가나를 가르칠 때 한 아이가 히라가나를 배우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제가 알 수 있도록 설명해주세요라고 묻더란다. 이건 당신이 지금 히라가나라는 상품을 나에게 팔려고 하기에 나는 소비자로서 그게 어떤 의미인지 당연히 묻는 것이다는 소비자 마인드에 따른 행동이라 할 수 있다. 그게 바로 소비자의 의무인데, 그 아이는 지금 소비자의 권리를 충분히 이행하고 있는 셈이다. 납득이 되면 공부를 하고 납득이 되지 않으면 공부를 하지 않는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똑같은 것은 소비자 마인드를 지닌 아이들이 학교에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대학교에선 오리엔테이션을 할 때 한 학기에 어떤 수업을 들어야 하는지 알려준다. 그때 반드시 선생님 이 수업을 이수하려면 최저 몇 점을 받아야 하나요?”, “이 수업은 몇 번까지 결석이 인정됩니까?”와 같은 질문이 나온다. 그때 “60점 이상 받아야 합니다”, “1/3이상 결석하면 시험을 칠 수 없습니다와 같은 대답을 해준다. 이런 대답이야말로 내가 제공하는 수업이란 상품의 최저 가격이다고 말해주는 것과 같고, 이때 소비자는 최저 가격으로 물건을 구입하려 하는 것과 같다. 학생들의 입장에선 최소 기준이 적정 가격이 되는 셈이다.

여러 마트 중에 같은 제품을 낮은 가격에 파는 곳에서 물건을 사게 되는 것처럼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화폐는 최소한의 학습노력을 하여 수업을 이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이들이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닌, 그런 환경 속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뿐이다. 59점이나 61점이 아닌 정확히 60점을 따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아이들은 출결석 상황을 엑셀표로 만들어 관리하며 1/3은 빠지려 노력한다. 그걸 매우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60점을 따기 위해, 1/3은 결석하기 위해 오는 아이들의 특징은 최저 기준을 넘어서려 애쓰기보다 최저 기준 자체를 낮추려 애쓰고 있다. 60점 이하를 맞으면 일반적으로 F처리를 해야 맞지만, 그런 아이들이 엄청나게 많을 경우 모두 다 F처리를 할 수 없기에, 56점 맞은 아이들은 통과시켜 준다. 그러다 보니 56점을 맞기 위해 들어오고, 그 상황이 반복되면 학력은 점차 떨어지게 된다. 100점을 맞는 것은 600원을 주면 살 수 있는 물건을 1000원을 주고 사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한다.

물론 걔 중에선 수업이 재밌어서 잘 듣는 아이들도 있다. 그런데 그 아이들도 내가 지금 뭘 하는지 모르겠다. 뭘 이리 이익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지?’라는 소비자마인드가 작용한다. 소비자 마인드로 학교에 오면 수업을 상품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상황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예전에 도쿄대를 나온 학생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이야기를 막상 해보니 너무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에서 무얼 배웠니?”라고 물으니, 아주 자부심어린 표정으로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았어요라고 대답하더라. 가장 적은 학습노력으로 일본 최고 대학의 학사학위를 받았다는 것을 자부심어린 행동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그 표정은 적은 돈으로 아주 비싼 물건을 손에 넣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학교란 종교적, 과학적 지성이 자라는 곳

 

교수계획표라는 것은 학교 교육의 부조리가 그 안에 축약되어 있다고 불 수 있다. 교육을 받기 전에 이미 교육을 받은 후의 성취에 대해 예측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성취가 있는지 아는 사람에겐 지성이 작동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지성이라는 것은 독특함, 애매함 속에서 작동한다. 요로 타케시는 아이들의 지성이 작동하는 순간을 보고 싶다면, 자연으로 보내라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이를 시골에 데려가서 게임도 못하게 하고 만화도 못 보게 한 후 그냥 놔둬보라. 그러면 처음엔 엄청 지루한 나머지 몸을 비비 꼬며 힘들어할 테지만, 3일 정도 지나면 체념하고 무언가를 관찰하게 된다.

한참 지난 얘기지만, 딸이 어렸을 때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딸의 친구가 집에 놀러온 적이 있다. 친구는 집에 왔어요?”라고 물었고, 나는 아직 안 왔다라고 대답해줬다. 그러자 분명히 같이 왔는데, 아직 집에 안 왔네요?”라고 다시 묻는다. 초등학교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5분밖에 안 되는 거리이기에, 밖에서 기다렸다. 나가보니 한 여자 아이가 앉아서 무언가를 보고 있는 거다. 그 아이가 바로 딸이었고 한참이나 쭈그려 앉아 길가에 핀 꽃을 빨려 들어갈 듯 보고 있었고 조금 걷다가 다시 길가에 핀 꽃을 또 보고를 반복했다. 지성이 활동한다는 것은 그처럼 빨려 들어간다는 느낌, 내가 그걸 보고 있고 그것 또한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다. 일단 나의 잣대로는 그게 어떤 가치인지는 모르지만, 그럼에도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 그것 자체가 지성이 활동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이 나 또한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대나무밭이 있는 학교 교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때 먹구름이 끼어 어두웠으며 태풍으로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바람에 대나무가 휘어졌다가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가 하는 것을 반복했다. 그때 대나무의 움직임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걸 지성의 활동이라 말하긴 어렵겠지만, 그때 세계와 나 사이의 친근감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종교적인 감각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자연과학이란 관찰을 통해 자연의 법칙성을 발견하는 활동이다. 종교란 자연환경 속에 신의 섭리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인간에 있어서도 그건 마찬가지다. 과학적 지성과 종교적 지성은 함께 일어난다. 학교란 바로 종교적, 과학적 지성이 자라라는 곳이어야 한다.

그건 소비자 마인드와는 확연히 다르기에, 교수계획서와 같은 것은 유해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교수계획서는 이미 활동하기 전에 한 후의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소비자란 가치와 유용성을 알고 있다는 전제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최저의 학습노력으로 얻으려는 것이니,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지성이 작동하겠는가?

 

 

 

교수계획표와 수업의 질은 관계가 없다

 

대학에서 근무할 때 자기평가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학생들의 설문조사를 통계적으로 보여준 적이 있다. 여러 항목들을 만들어 이 수업을 들은 후에 다른 학우에게 추천하겠습니까?’, ‘파워포인트를 자주 사용합니까?’, ‘교수계획표대로 수업합니까?’와 같은 항목을 뒀고, 그 항목에 높은 점수를 배정했다. 나는 그런 항목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어서 5단계 평가에서 5점을 받곤 했고, ‘수업 준비를 충실히 합니까?’라는 항목에서 2점을 받아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었다. 나의 수업방식은 강의에 들어가면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라는 멘트로 시작한다. 보통 최근에 읽었던 책, 지나가던 학생과 나눈 이야기로 수업을 여는데, 그만큼 학생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말이 많았던 탓이다. 그때 그때 학생들을 마주치며 떠오르는 단상들을 즉흥적으로 학생들에게 전해주는 식으로 말이다. 오늘 이 강연도 마찬가지다(일동 웃음). 그렇지만 재밌는 점은 수업 준비를 안 해와도 학생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았다는 사실이다.

평가 항목 중엔 전혀 수업과 관계없는 항목도 눈에 띈다. 교수계획표대로 수업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 그것인데, 그건 수업만족도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통계전문가에게 그런 항목표를 가져다주면, “이걸 보고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건 수업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학생에 따라 좋아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고, 글씨를 잘 쓴다던지, 파워포인트를 잘 활용한다던지 하는 건 기술적인 부분일 뿐 수업의 질적인 면과는 하등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교수계획서를 쓰던 안 쓰던 수업엔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교무부장(평가 항목엔 교무부장이 매길 수 있는 평점 부분도 있다)이 되었을 땐, 일반적으론 교수계획서를 쓰라고 말을 해야 하지만, 나는 안 써도 됩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물론 그럼에도 교수계획서를 쓴 사람도 있고, 내 말대로 쓰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비즈니스 마인드로 교육을 재편하려는 문교부의 패착

 

그 덕분에 문부성(한국의 교육부)로부터 대학교 지원금을 감액당하는 사태가 발생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 상황에 매우 화가 났었다. 교육의 성과와 교수계획표 사이엔 상관관계가 없기에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만약 문부성에선 상관이 없다는 데이터를 제출하라. 그러면 사과를 하고 지원금을 원래대로 주겠다는 말을 했다면, 나는 나는 2천 명을 대상으로 실험하며 그런 결론에 이른 것이다. 너희가 상관관계가 있다는 데이터를 주면 내가 사과하겠다라고 맞받아칠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문부성 관계자는 어떤 반론도 의견도 내놓지 않고 시간만 보내버렸다.

그런 식의 대응엔 두 가지 의미로 죄가 크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매일 혁신을 하라’, ‘창의성을 기르라라고 떠벌리지만, 실질적으로 자신들이 한 말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도 의무도 지지 않으려 한다. 더욱 기분 나쁜 점은 불만을 제기했음에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째는, 일본의 대학은 당근과 채찍으로 움직이게 한다는 점이다. 교육행정의 수장이 인간은 돈으로 움직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교육을 판매자-구매자의 마인드로 보고 있으며, 모든 교수들을 돈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이걸 하면 돈을 주고, 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추진하려 하고 있고, 그에 따라 수많은 부작용들이 생겨나고 있다.

 

 

 

한 명의 교사가 아닌, 교사단이 되어 교육하라

 

교육이란 비즈니스나 시장의 원리로 해서는 안 된다. 이번 년도에 얼마만큼의 취업을 했는지, 얼마만큼 입학을 했는지로 교육의 성과를 얘기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 교육의 성과는 30년에서 50년이 지나야만 성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더 심한 경운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내가 초등학교 때 배웠던 교육 때문에 풍부한 인생을 살았다라고 깨닫는 경우도 있다. 지금부턴 그렇게 뒤늦게 깨달았던 경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교수였던 시절에 경리부장이 졸업생 중 한 명이 우리 학교에 기부를 하겠다고 하네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분은 87세에 돌아가셨는데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4억엔을 기부하겠다는 거였다. 경리부장은 그 얘기를 하며 되게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7-년 전에 받은 교육에 대해 그 기부금을 받아도 될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분이 학교를 다닐 때 당시의 은사들은 이미 퇴직해서 없고, 그 은사들이 어떤 교육을 했는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은사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기부금을 내겠다는 건데, 그분들이 한 명도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받아도 되나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70년 전에 일하던 교수들과 지금의 우리들은 같은 교사단의 멤버이기 때문에 충분히 받아도 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지금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도 나중에 기부를 하게 된다면, 지금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때 그 학생이 낸 기부금은 내가 받아야 한다고 예전의 교수들이 언성을 높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80년 전에 했던 교수의 노력이 80년이 지난 다음에 돌아온 것이다. 교사란 그처럼 원래 교사단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교사단이란 같은 지역, 같은 시대의 교사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일쑤다. 그러나 실질적으론 시대를 거스르고, 지역을 넘나들며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70년 전의 선생이나 70년 후의 선생이나 다 같이 교사단인 셈이다. 여기서 씨를 뿌렸지만 꽃이 피는 데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이치와 같다. 그러려면 현재의 모든 교사들이 자기가 맡고 있는 학생만을 한정 지어 생각할 것이 아니라, ‘모두의 영향 속에 커가는 인간이란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 발상이 있어야만 교사단이란 말이 성립된다. 교육이란 복수의 사람들이 시대를 넘어서서 함께 하는 것이니 말이다. 가르치는 사람들은 한 명이 아니라, 수백 명이 하나가 되어 가르치는 교사단이어야만 한다.

 

 

 

 

 

 

교육평가 시스템은 다양성을 죽이고, 결국 교육을 망가뜨린다

 

근무고과를 도입하자고 주장할 때만 해도 이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땐 수치적으로 개인만을 평가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서열화를 위해 하나의 잣대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밀어붙였으니,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죄가 엄청 크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질적인 면모들이 있어야 함에도 그 당시엔 동질집단을 만들어 수치화해야 하고 그걸 평가의 대상으로 삼아야한다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사람은 수많은 세포들이 모여 구성되어 있다. 세포의 움직임은 모두 다르고, 그러기 때문에 생명체가 유지된다. 다양한 것들이 공존하고 협력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몸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심장은 열심히 뛰고 있으니 더 많은 평점을 매겨주고, 다른 곳은 거의 있는 둥 마는 둥 있으니 평점을 주지 않겠다고 하는 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건 곧 생명체를 죽이는 일에 다름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애석하게도 위에서 우려했던 일들이다. 당연하지만 그건 교육을 정상화시키는 게 아니라, 교육을 철저히 망가뜨리는 일이다. 한국과 일본은 공통적으로 영어를 이상하리만치 중시하고 있으며, 글로벌지수를 만들어 영어로 수업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고, 외국인 교사가 몇 명인지, 외국 학생들을 얼마나 유치하는지, 학생들의 토익점수는 몇 점대인지 단일한 잣대로 서열화하기 바쁘다. 그 점수가 높으면 글로벌지수가 높아 좋은 학교로 평가되게 된다. 일본은 780개의 대학이 있는데, 위의 잣대에 따라 서열화를 시키고 서열에 따라 지원금을 배분한다. 그러다 보니 열심히 영어교육만 하는 기현상이 생긴 것이다.

 

 

 

영어를 중시하는 사회의 일그러진 단상

 

내가 학교의 외부평가위원을 하고 있던 때에 4명의 외부평가위원이 이구동성으로 왜 미친 듯이 영어교육만을 하고 있느냐?’고 평가할 정도였다. 그만큼 대학교는 영어전문학교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회화를 하다 보면 어느 정도의 영어실력인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러니 대학은 회화만을 중시하는 곳으로 모든 커리큘럼이 짜인다. 보통 다른 과목은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교양이 있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회화는 5초 만에 그 실력을 가늠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그런 회화능력을 똑같이 수치화할 수 있는 건 토익밖에 없다. 다른 과목들은 수치화가 불가능하지만, 영어회화만큼은 세계표준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영어를 좋아해서 음악도 자주 들어 여러 배경지식들을 알게 됐지만, 지금의 대학은 그런 것을 전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다. 국어와 같은 경우 500점이다 700점이다라며 평가를 하면, ‘내가 이렇게 잘 아는데 어떻게 그딴 식으로 평가를 하냐?’고 화를 낼 테지만, 유독 영어에서만큼은 그러지 않는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70억 인구의 서열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선 영어 외의 언어를 공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엠마누엘 포트라는 독일학자는 지금부터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는 독일이다라는 말을 했다. 10년 이내에 미국이 붕괴되고 독일이 패권을 쥔다면, 독일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에 대해 전공한 사람이 일본에선 아무도 없게 된다. 지배적인 문화라는 것은 역사가 바뀌면 자연히 바뀔 수밖에 없다. 사회가 건강해지려면 다양한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도록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과연 이런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있나?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 사는 모든 교사는 교사단의 멤버다

 

이처럼 가장 합리적인 교육시스템이란 각양각색의 교육방법을 지닌 사람들이, 다양한 사고방식으로, 그러면서도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채 느슨한 연대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영역에서든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하나다. 그 집단이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란 사실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사회가 건강해질지, 학교가 학생들에게 희망을 주는 곳이 될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살아가는 힘을 기르는 곳으로, 공생할 수 있는 곳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그런 것들이 중요한 가치로, 모두에게 필요한 것으로 인정되어야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 단일한 잣대로 모든 것을 서열화하는 것은 가장 위험해서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개인을 궁지로 몰아넣는 일일 뿐이다.

애석하게도 아직도 단일한 잣대로 평가를 하여 잘하는 사람에겐 상이나 돈을 줘야 사회가 건강해질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더욱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들이 정치, 경제, 문화, 교육의 영역에 넘쳐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더욱 더 서열화되길 바라며, 상위에 랭킹되길 바란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이 기득권 세력이 되며, 그런 사회는 더욱 곪게 되어 다양성을 상실하게 된다.

여러분들은 교육 현장에 계시니 그곳에서 서열화의 폐단을 가장 적나라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몸으론 느끼지만 막상 그게 왜 나쁜지 이론적인 기초가 없을 것이기에, 나의 역할은 그런 이론을 마련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교육의 본질로 돌아가지 않으면 한국과 일본은 미래가 없다. 두 나라가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론 절망적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안심이 된다. 그만큼 서로 연대하며 해결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어디까지나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이기에, 함께 고민하고 함께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가야만 한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내가 어떤 환경과 상황에 놓여 있는지 볼 수 있어야만 비로소 교육의 문제도 면밀히 볼 수 있을 것이다.

 

 

 

 

 

2. 질의 응답

 

교육정책의 실패를 교사의 무능으로 돌리다

 

Q

합리적인 교육을 위해서는 다양한 교사의 느슨한 연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느슨한 연대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다.

 

A

정반대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교장이 단일한 교육방법, 교육이념을 고집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작년에 일본은 학칙 개정을 통해 대학 교수의 권한을 빼앗아 학장이나 총장에게 모두 줘버렸다. 교수의 인사권이나 평가권을 모두 총장이나 학장이 정하도록 했고, 그렇게 해야만 지원금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건 바로 대학을 주식회사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이런 방향이야말로 지금껏 말한 교육과는 완벽하게 반대되는 방향이라 할 수 있다. 한국도 지금 점차 대학을 주식회사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온 힘을 써서 저항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왜 갑작스레 학칙개정을 했냐면 그건 25년 간 문부성이 했던 교육정책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정책이 실패하며 학력은 떨어졌고, 학생들은 무기력해져 갔다. 그럼에도 아무도 그에 대해 책임지지 않고, 오히려 교사들이 정책대로 제대로 교육하지 않았다며 책임 전가를 하고 자신들의 정당성만을 쌓기에 바빴다. 그래서 교사들의 권한을 빼앗고 상명하복식으로만 해야 한다며, 그런 정책을 더욱 밀어붙이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기술적인 방식으로 결정권을 빼앗던지, 월급을 깎던지, 여러 상황으로 교사의 입지를 좁혀 따르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들었다. 그러니 현장에서 교사들을 만나면 매우 표정이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교사들이 정책을 따르지 않아 교육이 엉망이 됐다는 식으로 교사들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우습게도 교육관료조차 그런 식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는다. 자신들도 억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다 보니 교원을 처벌하는 방법 밖에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평가는 똑같은 얼굴과 말투의 교사집단을 만들었다

 

Q

교육평가를 시행하니 나태한 교사들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변화가 있었다면, 또는 없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교육평가를 도입하자 나태한 교수들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문제는 다 똑같은 얼굴을 하게 됐다는 점이다. 자기 앞에서 너무나 엄청난 일이 일어났기에 발생했기에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다. 일본의 대학교수들은 패배주의에 빠져, 겉으론 예스맨이 되어버렸지만 힘은 빠질 대로 빠져 있다.

그들에게 교사단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번 했었고, 설혹 그 말에 감명을 받은 사람조차도 그걸 실천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 한 명씩, 두 명씩 감명을 받아 조금씩 변화해갈 거라 기대하고 있다.

하나 더 말하고 싶은 것은, 제가 쓴 모든 책의 내용이 국어교과서에 실렸으며, 입시문제에도 출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걸 활용하는 건 교사들이니 나름의 흐름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일본의 반지성주의라는 책의 내용이 지성주의를 강하게 외치는 도쿄대 입시에 출제되기도 할 정도다. 일본의 가장 병적인 교육문제를 직설화법으로 다룬 책이 그런 식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교사는 자신이 가르치고 싶은 것을 가르치면 된다

 

Q

강의 내용이 교사의 다양성에 대한 얘기였는데, 그렇다면 학생의 배움에 대한 다양성도 존중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은 흥미도 다양하고 가치관도 다양하다. 그럴 때 비록 소비자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해도 학생들이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하는지, 교사가 가르치고 싶은 걸 가르쳐야 하는지 알고 싶다.

 

A

옳은 가르침이란 없다. 자기가 가르치고 싶은 걸 가르치면 되는 거다. 내가 가르치지 못하는 건 다른 교사가 할 테니 말이다. 자기 혼자서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만큼은 내가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 가르치면 된다. 교사들은 팀으로 움직이니 괜찮다.

한 인간을 기준으로 봤을 때 어려서 만났던 교사, 그리고 앞으로 만날 교사를 모두 한 눈에 넣어 생각하면 편하다. 아이가 어떤 배움에 의해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가장 합리적인 교육방법은 다양한 교육방법과 다채로운 교육기술로 가르치는 것이다. 문학, 음악, 락과 같이 여러 가지 과목들이 있으면 더욱 좋다. 그러니 교사는 다른 것까지 완벽하게 하려 애쓰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확신하며 가르치기만 하면 된다.

 

 

 

교육붕괴는 일상이 되었다

 

Q

12년 전에 일본에서 선생님들에게 반항하고, 수업을 방해하는 일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한국에서 그 흐름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10년 동안 일본에선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궁금하다.

 

A

학급붕괴는 처음에 대학에서 먼저 일어났다. 80년대 고등학교로 내려왔고 지금은 초등학교까지 내려왔다. 지금은 더 안 좋아져서 학급붕괴의 전면화, 핚급붕괴의 일상화라 표현해도 될 정도다. 자는 아이가 있고, 뛰어노는 아이들이 있어도 그걸 보면서 제지도 못할뿐더러, 아무런 스트레스도 받지 않을 자신이 있는 선생님들만 살아남았다. 가장 이상적인 교실의 모습은 지금처럼 제가 얘기하면 집중해서 듣는 모습일 텐데, 일본에 그런 학교는 5%도 되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땐 모두 집중하며 듣는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완벽히 무너졌다. 그 당시는 모두 가난하니, 누군가를 제치고 올라가려하기보다 서로 도와주는 사회적인 분위기 덕에 그런 수업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가난하고 고통스러울 때 사람들은 단합하려 하지만, 지금처럼 부유해지고 점점 경쟁이 가속화될 땐 이기기 위해 발로 차버리는 걸 당연하다고만 생각한다. 사회적인 부가 교육에선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는지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다.

 

 

 

 

인용

강의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