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기상을 지니고 두루 알던 배해
배해청통(裴楷淸通)
晉裴楷字叔則, 河東聞喜人. 明悟有識量, 少與戎齊名. 鍾會薦於文帝, 辟相國掾. 及吏部郞缺, 帝問鍾會, 曰: “裴楷淸通, 王戎簡要, 皆其選也.” 於是用楷.
楷風神高邁, 容儀俊爽, 博涉群書, 特精理義, 時謂之玉人. 又稱: “見叔則如近玉山, 照暎人也.” 轉中書郞, 出入官省, 見者肅然改容.
武帝登祚, 探策以卜世數多少, 其而得一不悅, 群臣失色. 楷曰: “臣聞,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王侯得一以爲天下貞.” 帝大悅. 累遷中書令侍中.
해석
晉裴楷字叔則, 河東聞喜人.
진나라 배해의 자는 숙칙(叔則)이니 하동 문희(聞喜) 사람이다.
明悟有識量, 少與戎齊名.
현명하고 영특하며 식견과 도량이 있어 어려서 왕융과 이름을 나란히 했다.
鍾會薦於文帝, 辟相國掾.
종회【종회(鍾會): 삼국시대 위나라 서예가 종요(鍾繇)의 아들임】가 문제에 추천하여 재상[相國]의 하급관직[掾]에 초빙되었다.
及吏部郞缺, 帝問鍾會, 曰: “裴楷淸通, 王戎簡要, 皆其選也.” 於是用楷.
이부랑이 결원되자 문제는 종회에게 “배해는 맑고도 통하며 왕융은 간결하고도 요령이 있으니 모두 뽑힐 만하네.”라고 말했고 이에 배해를 등용했다.
楷風神高邁, 容儀俊爽, 博涉群書, 特精理義, 時謂之玉人.
배해는 풍신이 고아하고 우뚝하며 용모가 깎아지른 듯 툭 튀어 모든 책을 널리 통섭했고 이치에 남다르고 정밀하여 당시 사람들이 ‘옥 같은 사람’이라 말했다.
又稱: “見叔則如近玉山, 照暎人也.”
또 “숙칙을 보면 옥산이 가까이 있는 것 같아 사람을 쨍하니 비춰주네.”라고 칭송했다.
轉中書郞, 出入官省, 見者肅然改容.
중서랑으로 전직되어 관청을 출입할 적에 보는 사람들이 숙연해져 용모를 가다듬었다.
武帝登祚, 探策以卜世數多少, 其而得一不悅, 群臣失色.
무제가 등극하자 산가지[策]를 찾아 세수【세수(世數): 대수(代數)와 동의어다】의 많고 적음을 점치는데 일(一)을 얻어 기뻐하지 않자, 뭇 신하들도 아연실색했다.
楷曰: “臣聞,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王侯得一以爲天下貞.”
배해가 “신하가 듣기로 하늘이 일을 얻음으로 맑아지고 땅이 일을 얻음으로 편안해지면 왕후가 일을 얻음으로 천하의 중심이 된다 하였사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帝大悅. 累遷中書令侍中.
무제가 크게 기뻐했다. 자주 영전하여 중서령 시중이 되었다.
참고
『세설신어(世說新語)』 「상예((賞譽)」 편(篇)에 의하면 왕융과 배해는 젊었을 때 종회(鍾會)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종회는 위진시대의 명필 종요(鍾繇)의 아들이며 촉한을 멸한 것으로써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사마씨에게 빌붙고 명사들의 행동을 감시하였다 해서 한족에게는 악명이 높다.
아무튼 왕융과 배해가 돌아간 뒤에 종회는 측근으로부터 그들의 인상을 질문받았는데 그때의 대답이 바로 ‘배해청통 왕융간요(裴楷淸通 王戎簡要)’였다.
-『몽구』, 이한 지음, 권오석 옮김, 홍신문화사, 1998년, 16쪽
해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국시대는 위진남북조시대라고 부르는 분열기였다. 난세에 성공하는 지도자는 바로 사람을 적재적소에 잘 쓰는 사람이다. 이 시대에 인간의 재질과 성품을 평가하는 재성지학(才性之學), 일종의 관상학에 대한 연구가 철학적으로 전개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왕융간요(王戎簡要)」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왕융과 「배해청통(裴楷淸通)」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배해는 누가 보아도 나무랄 데 없는 뛰어난 인물들이다. 또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종회(鍾會)란 인물은 당시 재성지학의 대가였다.
종회가 앞의 두 인물을 평가한 것은 아주 이채롭다. 먼저 왕융은 어떤 일이나 문제의 핵심을 잘 간추리고 대책을 세우는 인물로 평가했다. 아주 똑똑하고 예리한 판단력의 소유자인 것이다. 그래서 ‘간략하고 요령 있다[簡要]’고 했다.
이에 비해 배해는 청렴하면서도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흔히 청렴함이란 고집스러움이나 아둔함과 통할 수 있다. 물이 맑으면 고기가 모이지 않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잘 지키지만 융통성이나 분별력이 없을 수 있는데 배해는 청렴함과 함께 융통성과 적절함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청렴하면서 융통성이 있다[淸通]’고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두 인물이 추천된 자리에 있다. 그 자리는 바로 인사권을 행사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똑똑하고 업무 능력이 있는 인물보다는 청탁에 대해 단호하면서 많은 인물들을 충분히 포용할 수 있는 인물에게 더 적절한 자리였다. 결국 배해가 뽑힌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만약에 왕융이 다른 자리를 놓고 추천되었다면 선택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절대적인 하나의 잣대를 가지고 인물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그릇과 그 그릇이 쓰일 자리의 크기가 맞느냐 맞지 않느냐가 중요한 기준인 것이다. 적절함, 알맞음의 덕이 결국은 인재 등용의 기준인 셈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적당한 사람을 그에 알맞은 자리, 즉 적재적소(適材適所)에 기용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말하기는 쉬어도 실행하기 어려운 평범한 진리 가운데 하나다.
-『몽구』, 이한 지음, 유동환 옮김, 홍익출판사, 2008년, 45~46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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