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와 제갈량의 끈끈한 우정
공명와룡(孔明臥龍)
『蜀志』. 諸葛亮字孔明, 琅邪陽都人. 躬耕隴畝, 好爲梁父吟. 每自比管仲ㆍ樂毅. 時人莫之許, 惟崔州平ㆍ徐庶與亮友善, 謂爲信然.
時先主屯新野, 徐庶見之謂曰: “諸葛孔明臥龍也, 將軍豈願見之乎? 此人可就見, 不可屈致, 宜枉駕顧之.” 先主遂詣亮, 凡三往乃見, 因屛人與計事善之. 於是情好日密, 關羽ㆍ張飛等不悅. 先主曰: “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 願勿復言.” 及稱尊號, 以亮爲丞相. 『漢晉春秋』曰: “亮家南陽鄧縣襄陽城西, 號曰隆中.”
해석
『蜀志』.
『촉지(蜀志)』에 실린 이야기다.
諸葛亮字孔明, 琅邪陽都人.
제갈량의 자는 공명(孔明)으로 낭야(琅邪) 양도(陽都) 사람이다.
躬耕隴畝, 好爲梁父吟.
몸소 언덕 밭뙈기에 갈고 양보음(梁父吟)【양보음(梁父吟): 악부(樂府)의 곡명인데, 「양보음(梁甫吟)」이라고도 한다. 양보(梁父)는 중국 태산(泰山) 아래 있는 산 이름으로, 사람이 죽으면 이 산에다 묻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을 장가(葬歌)라고 일컫기도 한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제갈량(諸葛亮)의 양보음은 춘추 시대 제(齊)나라 재상 안평중(晏平仲)이 도량이 좁아 세 명의 용사를 죽이고야 만 일을 한탄하는 내용이며, 이백(李白)의 「양보음」은 자신의 포부를 실현하지 못한 울분을 서술한 것이다.】하기를 좋아했다.
每自比管仲ㆍ樂毅. 時人莫之許, 惟崔州平ㆍ徐庶與亮友善, 謂爲信然.
매번 스스로 관중과 악의에 비교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허용적이지 않았고 오직 최주평(崔州平)과 서서(徐庶)만이 제갈량과 좋게 사귀었고 믿을 만하다고 말했다.
時先主屯新野, 徐庶見之謂曰: “諸葛孔明臥龍也, 將軍豈願見之乎?
당시에 유비[先主]는 신야에 진을 쳤는데 서서가 유비를 보고서 말씀드렸다. “제갈공명은 누운 용인데, 장군께선 어찌하여 그를 보고자 하지 않으신지요?
此人可就見, 不可屈致, 宜枉駕顧之.”
이 사람은 보러 갈 만하지 그가 굽신거리며 오게 할 순 없으니 마땅히 수레를 낮춰 돌아보소서.”
先主遂詣亮, 凡三往乃見, 因屛人與計事善之.
유비가 마침내 제갈량에 이르렀지만 대체로 세 번 가서야 보게 됐고 사람을 물러나게 하고 계획한 일을 함께 하며 그를 좋아했다.
於是情好日密, 關羽ㆍ張飛等不悅.
이에 정과 우호함이 날로 긴밀해져 관우와 장비 등은 기뻐하질 않았다.
先主曰: “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 願勿復言.”
유비가 “나에게 공명이 있는 것은 물고기가 물에 있는 것 같은 것이니, 다른 말일랑은 하지 말도록 하라.”라고 말했다.
及稱尊號, 以亮爲丞相.
존대하는 호칭으로 서로를 부르며 제갈량은 승상이 되었다.
『漢晉春秋』曰: “亮家南陽鄧縣襄陽城西, 號曰隆中.”
『한진춘추(漢晉春秋)』에선 “제갈량의 집은 남양(南陽) 등현(鄧縣)의 양양성 서쪽에 있으며 융중(隆中)이라 불린다.”고 쓰여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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