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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2009년 국토종단 - 12. 4월 19일, 혁명일에 여행을 시작하다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2009년 국토종단 - 12. 4월 19일, 혁명일에 여행을 시작하다

건방진방랑자 2021. 2. 4.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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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9일, 혁명일에 여행을 시작하다

 

 

버스는 목포 시내를 달려 유달산 근처에 도착했다. 불현듯 2005년에 여자 친구를 만나러 목포에 왔던 때가 스치더라. 그때 목포로 오던 길에 두 개의 터널을 지났었다. 터널로 들어가기 전엔 눈이 내리지 않았는데 빠져나오고 나니 눈이 새하얗게 내리고 있지 뭔가. 순식간에 다른 세계에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졌었다. 그 장면이 무의식중에 남아 있었나 본데 오늘 다시 그 터널을 지나니 4년 전의 기분이 새록새록 피어오르더라. 이렇게 다시 경험하니 예전의 추억들이 가슴 아프게 한다. 지금의 새 기억으로 옛 기억들이 덧씌워지길 바랄 뿐이다. 아마 내가 유달산을 가고자 했던 이유도 그런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 드디어 내가 유달산에 왔다. 목포에 이렇게 오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유달산의 천지신명님께 빌다

 

버스를 타고 목포역에서 내려 한참을 헤매다 유달산 입구에 도착했다. 기억 상으론 몇 계단만 올라가면 정상이었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층계도 많았고 한 코스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코스가 있었다. 날씨는 덥지 사람은 많지 배낭은 한질라무겁지. 한마디로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정상까지 오르니 그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 바닷바람은 평지에서 부는 바람보다 싸늘했는데 한껏 데워진 몸을 금세 싸늘하게 식혀줬다. 이것이야말로 해풍욕(海風浴)이다. 그리고 일기도 좋아서 목포 시내가 한눈에 다 들어왔다. 막혔던 가슴이 확 트이는 느낌이다. 고됐지만 그럼에도 오르길 잘했다. 만약 올라가는 게 힘들어서 그만뒀다면, 정말로 후회할 뻔했다.

쉬는 날답게 유달산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오르는 길에 들리는 목포의 눈물이란 노래는 왠지 가락만큼이나 서글프게 느껴졌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 반도에 여덟 항구(그 중 한 곳이 군산)가 개항을 했는데 목포도 그 중 하나였다. 그때부터 목포는 급속도로 발전했지만, 그 열매는 원주민들이 따먹을 순 없었다.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사상으로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들만의 것이었으니 말이다. 상대적인 부, 그리고 착취와 가난, 그 속에 보란 듯이 펼쳐지는 역차별까지 이 땅에서 살아오던 민중들은 사는 것 자체가 아픔이었던 거다. 그 아픔이 이 노래에 구슬프게 담겨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본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상 난간에서 이번 여행이 이제 시작한다는 것과 아무쪼록 큰 사고 없이 마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천지신명님께 빌었다. 비록 격식을 차리고 한 것은 아니지만, 나의 갸륵한 마음을 보시고 잘 들어주셨을 거라 믿는다.

나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지켜봐주세요!”

 

 

▲ 드디어 내가 유달산에 왔다. 목포에 이렇게 오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첫 국토종단의 본격적인 시작

 

거기서 한참이나 해풍욕을 즐기고 무작정 큰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유달산은 목포의 가장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목포의 북쪽까지 걷기로 했다. 어디에 찜질방이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가는 도중에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오늘은 일요일이니 교회 오후 예배라도 참석해볼 요량으로 걸었다. 교회들도 눈에 띄지 않고 막상 찾아간 교회는 이미 예배가 끝난 상태(대부분 2시 예배였음)여서 어쩔 수 없이 그냥 걸어야만 했다. 기독교인도 아니면서 왜 갑자기 교회냐고? 다른 지방에선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목포 사람들의 목포 이야기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뭐 이것도 처음부터 맘먹은 게 아니라, 유달산에 오르고 나서 시간이 남다 보니 하게 된 즉흥적인 발상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걷다가 공원이 나왔고 거기서 잠시 쉬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어깨가 아프고 발바닥도 욱신거린다. 그래서 쉴 때 편하게 쉬자는 각오로 배낭도 내려놓고 신발도 벗기로 했다. 그리고 그때 간식으로 챙겨온 육포를 빼서 한 번 먹어봤다. 맛은 꽤 괜찮더라. 이렇게 조금 움직여도 배가 고픈데 제대로 걷기 시작하는 내일부터는 아주 죽을 맛이겠구나~ 할매, 할배들이 게이트볼을 치는 것을 보며 20분 정도 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쉬었다가 다시 걸으려 주섬주섬 챙기는 내 모습이 스스로 생각해도 웃기기만 하다. 그때 현아에게서 문자가 왔다. “잘 곳은 정했냐? 시골은 인심이 좋아서 말만 잘하면 마을 회관 같은 데서 재워주기도 한다는 정보를 알려주더라. 그 문자를 받고 정말 넉살 좋게 부탁해볼까도 생각해봤지만 아직 그럴만한 자신은 없었기에 찜질방을 찾아서 무작정 걸었다.

 

 

▲ 목포역을 지나서 이 길로 쭉 올라간다. 아직은 재워달라고 말할 용기가 없다.

 

 

 

목포 평화광장의 인상과 지도책으로 느낀 소유욕

 

어느덧 터미널에 도착했고 좀 더 걸어 올라가니 찜질방이 있더라. 너무 이른 시간이었기에 근처 분식집에서 밥만 먹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평화광장에 가기 위해서다. 평화광장은 바닷가에 조성된 전망 좋은 산책 코스라고 들었던 적이 있다. 그래서 해안변의 숲속 길을 거닐며 바다를 볼 수 있을 거라 기대를 했던 거다. 평화광장으로 가는 길은 엄청 번화한 길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이 광장은 해안에 그냥 아스팔트 도로만 쭉 깔려져 있던 것이었다. 내 생각과 확연히 다르다보니 어찌나 실망스럽던지.

하지만 그런 실망도 잠시, 시원하게 몰아치는 파도와 차가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노라니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여행의 참 이유일 텐데 이곳 평화광장에서 그걸 느꼈다.

 

 

▲ 평화광장이라고 해서 뭔가 광활한 바다를 볼 것을 기대했는데, 그렇진 않더라.

 

 

그곳에서 지도책을 정리했다. 도로가 실린 지도였는데, 내가 가지 않는 곳도 있다 보니 꽤 두껍고 무겁더라. 그래서 가기로 한 곳의 지도만 떼어내 보관하고 나머지는 다 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버리려고 하니 왠지 모르게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건 뭘까? 거기엔 지금은 쓰지 않지만, 언젠가는 필요할 거야라는 소유욕이 숨어 있었다. 늘 지금 당장이 아닌 미래를 위해 준비하다 보니, 사람들의 소유품은 한없이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건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좋은 게 되어 버린다. 만약 이런 식의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그런 정도의 소유는 문제가 될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가지고자 하는 마음은 그대로 나의 짐이 되어 내 어깨를 짓누르니 말이다. 그러니 아깝더라도, 미래를 모르더라도 버릴 땐 버릴 수 있어야 하는 거다. 나머지 지도를 버리는 그 순간까지도 온갖 갈등을 다했다. 버릴까, 말까? 조금 무거워도 그냥 가져갈까? 말까? 그러다 결국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넣었다. 막상 버리고 나니 마음은 훨씬 홀가분해졌고, 그만큼 배낭도 가벼워졌다.

애써 버스를 타고 평화광장에 왔으니 어둠이 짙게 내린 바다를 보고 싶었다. 그런데 바닷바람이 어찌나 옷깃을 파고들어 춥던지, 도무지 버틸 수가 없겠더라. 그래서 다시 버스를 타고 찜질방으로 왔다.

 

 

▲ 지도를 준비하고, 그걸 뜯어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불연 듯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라.

 

 

 

4.19 혁명일에 시작한 국토종단

 

오늘은 워밍업을 하듯 국토종단이 아닌 목포관광을 한 날이었다. 제대로 걷기 전에 배낭에 몸이 익숙해지도록, 발이 걷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내 자신이 여행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해서 하루의 여유를 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4.19. 민중의 힘으로 장기집권에 눈이 먼 최고 통치자를 하차시킨 민주주의의 초석(礎石)이 된 날이다. 억지로 이 날에 출발일을 맞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우연하게 맞았다. 나에게도 이번 여행은 큰 도전이자 혁명이다. 물론 그게 혁명이 되느냐, 괜한 짓이 되느냐는 차후에 판단할 일이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라는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이 길을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다면, 그건 나 자신에겐 혁명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본격적으로 나만의 혁명담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 4.19 혁명일에 떠난 나만의 여행. 이 또한 나에겐 혁명이다.

 

 

 

지출내역 

 

내용

금액

전주-목포 버스비

10.000

생수

1.000

된장찌개

3.000

찜질방

8.000

총합

22.000

 

 

인용

목차

사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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