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 국토종단의 낭만
배낭에는 방수커버를 씌우고 우의를 입었다. 그래도 불안하니깐 우산까지 들었다. 하지만 얼마 걷지 않아 우산이 필요없다는 것을 느꼈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어서 우산을 펴고 있을 수도 없었고 그래봐야 비가 다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산을 접어 배낭에 넣고 우의에 모자만 쓰고 걸었다.
비 속 여행의 즐거움
한비야씨가 위ㆍ아래 각각 한 벌로 된 우의를 입으면 즐거운 빗속 여행을 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막상 걸어보니 그 이유를 알겠더라. 코트 같은 우의를 입었다면 이렇게 많은 비가 올 땐 홀딱 젖어서 추위에 바들바들 떨었겠지만, 옷과 같이 상하의로 나누어진 우의를 입으니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이런 날씨를 맘껏 즐기며 걸을 수 있으니 말이다. 더욱이 뚝뚝 떨어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고 세차게 부는 바람을 온몸으로 맛보며 걷는 기분은 상상 이상이었다.
물론 그런 상쾌함을 느끼기까진 비가 들어오지 않을 거란 우의와 신발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했고, 실제가 그래야만 했다. 처음 출발할 땐 ‘신발에 비가 들어오면 어쩌지?’, ‘옷이 다 젖으면 어쩌지?’하는 걱정이 앞선 탓에 여행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1시간가량 걷고 나서 확인해보니, 전혀 문제가 없더라. 쓸데없는 걱정이었던 거다. 그때부턴 맘 편하게 빗 속 여행의 낭만을 누리며 걸을 수 있었다.
비는 쉴 새 없이 내리고 있었다. 이런 비가 내리는 날엔 뜨뜻한 아랫목에 누워 고구마를 먹으며 감상해야 제 맛이다. 그만큼 직접 맞으며 느끼기보다 그저 멀찍이 비 오는 운치를 즐기면 된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알겠다. 멀찍이 떨어져 보는 맛도 있지만, 새로운 맛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비를 맞으며 그 속에서 즐기며 가는 것도 또 하나의 새로운 맛이다. 확실히 인생엔 여러 즐거움과 맛이 있는 거 같다. 단지 내가 느끼기 전엔 그런 맛이 있다는 것을 모를 뿐이겠지.
지도와 현실의 차이
목포에서 나오는 길목에 터널이 있기에 그곳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김밥 한 줄과 육포가 오늘 아침이다. 조촐하지만 그 어느 것에도 비할 수 없는 최고의 만찬이었다. 이런 여행에선 진수성찬이란 게 따로 없다. 걷다 보면 자연히 배가 고파오고 그러면 뭘 먹어도 다 맛있기 때문이다.
그 길목을 따라 쭉 갔으면 바로 1번 국도를 타게 되는데 아래쪽에 사람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이 보여서 그곳으로 내려갔다. 차들이 많이 다니는 번잡한 길을 피하려 그런 것이다. 그런데 거긴 막다른 길이었다. 그곳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라 한참을 헤맸다. 그러다가 처음의 그 길목으로 다시 올라가니, 길이 명확하게 보이더라. 지도를 보며 길을 찾는데 그쪽엔 여러 길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한참이나 헤맬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지도 보는 게 매우 서툴고 이런 여행이 처음이다 보니 허술하기 그지없다.
지도상엔 그냥 반듯한 길로 표시되어 있지만 막상 걷는 길은 그렇지 않았다. 고개를 다섯 번이나 넘었나보다. 고개가 나와 ‘저 너머엔 평지가 있겠지’라는 기대를 하며 애써 넘었는데 웬 걸 또다시 고개가 나오는 게 아닌가. 계속되는 기대와 실망. 그걸 몇 번 더 반복해야 했다. 계속 같은 광경만 반복되는 이 느낌은 뭘까? ‘매트릭스’란 영화에선 ‘데자뷰(deja vu)’현상을 관찰하는 것은 매트릭스 프로그램의 오류를 본 것과 같다고 했었는데, 나도 이러다가 ‘네오(매트릭스 주인공)’가 되는 게 아닐까 장난스런 생각까지 들었다.
중간 중간 버스정거장에서 쉬었다. 쉴 땐 좋았지만 막상 일어나 걸으려고 하면 어찌나 오금이 저리던지. 바람이 우의를 뚫고 들어와 온몸 마디마디를 쑤시게 했다. 하지만 막상 다시 걸으면 생기가 가득 돌며, 열기로 가득 채워져 온갖 희망이 밀려왔다. ‘내가 좀 매력적인데’라는 몹쓸 생각까지 들 정도로 말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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