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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2009년 국토종단 - 16. 두려우니 그저 걷는다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2009년 국토종단 - 16. 두려우니 그저 걷는다

건방진방랑자 2021. 2. 4.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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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우니 그저 걷는다

 

 

무안에 3시 정도에 도착했다. 시간은 이르지만 묵을 곳을 찾아야 했다. 첫날 여행치고 비바람과 싸우며 온 터라 몸이 쑤셨다. 최대한 걷다가 변두리에 보이는 모텔에 들어갔더니 4만원을 부른다(~ 나의 하루 최대 지출액이 4만원이라고 ㅡㅡ;;). 좀 더 깎을 각오였지만 완고했다. 그러면서 팁을 주길 여인숙에선 더 깎아주기도 한다는 거다.

 

 

▲ 상하의로 나누어진 우의를 입고 걸으니, 정말 빗속 여행을 할 맛이 나더라.

 

 

 

방값 흥정을 통해 활기를 찾다

 

그때부터 여인숙을 찾으려 다시 왔던 길을 뒤돌아 무안 읍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자도 보이지 않더라. 이 동네엔 죄다 모텔만 있다. 경찰서에 들어가 다짜고짜 여인숙 위치 좀 알려주세요?”라고 물어봤지만, 그 분들도 자세한 것은 모르던지 어먼 소리만 탱탱하셨다. 어쩔 수 없다. 이럴 땐 막고 품는 식으로 이곳을 이 잡듯 마구 돌아다니는 수밖에 없다.

결국 못 찾아서 마지막 담판을 지으려(사 만원을 부를 경우 삼 만원까지 깎기) 터미널 근처의 모텔로 들어갔다. 카운터 창문을 열고 가격을 물어보니 딱 삼 만원을 부르시는 게 아닌가. 순간 놀랐다. 깎을 각오로 왔는데 처음부터 내가 생각했던 그 가격을 부른 거니 말이다. 내가 좀 멈칫했을 거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면 안 된다. 아직 더 깎을 기회는 있기 때문이다. 오천 원만 더 깎아달라고 말하며 국토종단 중이란 사실을 간곡하게 어필했다. 그 순간 나의 모습은 아주 불쌍한 사람처럼 보이도록 연기 아닌 연기를 하고 있었다. 과연 이게 먹힐 것인가? 아주머니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뭘 그걸 더 깎으려 하냐?’는 표정을 지으셨지만, 이내 그렇게 하자고 하시더라. 이로써 나의 발연기가 현장에선 조금 먹힌다는 사실 하나를 알게 됐다.^^

기분 째진다. 역시 이런 식의 흥정도 나름 재미가 있다. 물건의 정가제 판매 이후 사람 사이에 말이 섞이고 감정이 섞이는 흥정하는 광경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분명히 정가를 지불하고 물건을 사는 게 편한 건 사실이다. 돈이 많은 사람들에겐 한두 푼 때문에 물건 값을 깎는 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이전에 번거로운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더 이상 흥정이 없이 그저 기계적으로 돈을 주고 물건을 받는 거래만이 판을 치게 되면서 사람의 관계는 매우 피상적이며 사무적인 관계가 되어 버렸다.

이런 환경 속에서만 당연한 듯 자라오다가, 오늘 흥정이란 것을 해보고 나름 성공을 하니 감회가 남다르더라. 그 순간 온 몸에 활기가 돌며, 언제 몸이 쑤셨냐 싶게 괜찮아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게 바로 사람 관계에서 얻게 되는 힘 같은 게 아닐까 싶다.

 

 

▲ 전주 남부시장의 새벽 장터모습. 사람 사는 향기가 가득 날린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번은 희극으로

 

방에 들어가서 짐을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빗속을 8시간 가까이 걸어왔으니 배낭 속도 다 젖었겠지라는 걱정을 하며 짐을 하나하나 빼어 상태를 확인해봤더니 생각보다 양호하더라. 일기도, 지도도, 책도 멀쩡했다. 단지 편지지는 완전히 젖었고 경서를 외우려 적어 갔던 작은 노트도 조금 젖어 써놓은 글씨들이 번져 있었다.

그래도 빗속을 여행한 것치고 양호한 편이었다. 우선 일기장과 지도가 멀쩡하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은 좋았다. 우의는 욕실에 잘 널어놓았고 배낭과 신발엔 신문지를 잘 구겨서 여기저기에 넣어두었다. 습기를 제거하기엔 신문지가 가장 좋다는 걸 군대에서 배웠다. 이번 여행하는 동안 군대에서 그냥 무심코 했던 것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제대한 지 6년이 지난 지금 그런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땐 비극으로 지금은 희극으로ㅋ 어떤 철학자는 인생은 두 번 반복된다고 했다던데, 오늘이 정말로 그랬다. 여관방은 따뜻하니깐 내일이면 젖은 배낭과 신발이 뽀송뽀송잘 말라 있을 것이다^^

 

 

▲ 국토종단을 하는 동안 나의 기록을 담긴 노트다. 그래도 이 노트가 젖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저 길이 있기에 걸을 뿐이다

 

첫 국토종단, 악천후까지 겹쳤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재밌고 신났다(물론 그 시간이 지나갔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평가겠지만). 덥지도 않았고 걸을수록 오히려 상쾌했다. 때론 옷이 젖어 몸은 무거워졌고 추위에 벌벌 떨기도 하며 왜 사서 고생을 하나 후회가 되기도 했지만, 잠시 뿐이었다. 걷고 있노라면 말로 미처 할 수 없는 행복감이 밑에서부터 끓어올라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번 여행 내내 후회와 기쁨 사이에서 묘한 줄다리기는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바로 그런 양가감정이야말로 누구나 느끼는 감정인 것을. 그러니 두 가지 감정을 잘 간직하며 그 마음을 그대로 새겨 나갈 때, 이 여행은 생동감 넘치며 인간미 풀풀 나는 여행이 될 것이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그저 길이 있기에 한 걸음씩 걸어가면 된다. 한 걸음씩 그렇게.

 

 

▲ 무안에 이렇게 찾아왔다. 이렇게 오지 않았으면 무안에 올 일이 있었을까 싶다.

 

 

 

지출 내역

 

내용

금액

김밥

1.000

초코 다이제

1.000

기사식당 점심

5.000

새우볶음밥 저녁

4.000

여관

25.000

총합

36.000

 

 

인용

목차

사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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