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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2009년 국토종단 - 15. 효율을 중시하는 시대에 비효율적인 도보여행을 하는 이유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2009년 국토종단 - 15. 효율을 중시하는 시대에 비효율적인 도보여행을 하는 이유

건방진방랑자 2021. 2. 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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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을 중시하는 시대에 비효율적인 도보여행을 하는 이유

 

 

점심은 1130분쯤 먹었다. 길 맞은편에 사랑 기사식당이 보였다. 기사식당은 기사님들만 들어가서 먹을 수 있는 곳인 줄만 알았기에, 원래 같으면 다른 곳을 찾았을 거다. 하지만 어느 기사식당이나 반찬은 푸짐하고 맛있다라고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라는 책에 쓰여 있어서, 익히 알기 때문에, 용기를 내어 경험해보기로 했다.

 

 

▲ 도보여행 첫날에 비를 맞으며 간다. 이것도 나름 의미 있는 축복 같은 거다.

 

 

 

여러분 기사식당에 식사하세요, 그것도 두 번 드세요

 

막상 문을 열고 들어선 곳은 아늑했다. 길을 건너느라 신호를 기다리는 수고를 한 것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오천 원이란 가격도 괜찮았고 뷔페라는 사실도 만족스러웠다. 그렇다고 일반 뷔페집처럼 반찬의 가지 수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먹을 만한 것들만 있었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빗속을 걷느라 체력을 많이 소모해서인지 배가 무진장 고팠다. 그래서 이런저런 반찬을 마구 퍼서 뚝딱 먹어치웠다. 누가 봐도 며칠 굶은 듯한 느낌이 있을 정도로, 먹었다기보다는 먹어치웠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아무리 배가 고파도 밥을 두 그릇을 먹진 않는데, 여기서 한참 걸을 것을 생각하니 한 그릇으로 만족할 순 없었다. 그래서 번쩍 일어나 다시 접시 하나에 이것저것 반찬을 담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이래저래 나는 불청객에 가깝다. 이미 우의와 배낭은 흠뻑 젖어 내 몸 주위로 물이 흥건했으니 말이다. 식당의 청결을 중시하는 분이라면 나 같은 사람이야말로 제일 꼴불견이고 분노유발자였을 것이다. 한 번 밥 먹는 거야 뭐라 할 순 없지만, 내가 머물고 간 자리엔 온갖 흔적이 남아있게 되니 말이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나에게 뭐라고 하거나 내쫓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신경 써주시고 챙겨주시기까지 했다. 그런 배려심이 어찌나 미안하던지 밥을 허겁지겁 먹고 짐을 정리한 후 물로 흥건해진 바닥을 닦아내려 하자, 그럴 필요 없다고 만류하시더라. 그 순간 밥을 먹어 배가 부른 것인지, 넉넉한 인심에 맘이 푸근해진 것인지 모를 따스함을 느꼈다.

 

 

▲ 다음 로드뷰에서 여전히 볼 수 있는 기사식당. 지나가는 길이라면 다시 한 번 가고 싶다.

 

 

 

비효율 속에 나를 찾다

 

오후 들어선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몸이 바람에 따라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릴 정도로 세게 불었다. 그런 극한 상황을 온몸으로 감내하며 박차고 나간다. 이건 해본 사람만 안다. 상쾌하면서도 형용할 수 없는 행복감이 깃든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아직 몸이 국토종단에 익숙해지지 않았기에 몸은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풍경들을 감상하며 가던 오전과는 달리 조금씩 시선을 아래로 내려 깔고 걷게 되더라. 4차로의 잘 닦여진 길은 별다른 변화 없이 이어져, 혹여나 쳇바퀴 도는 다람쥐처럼 끝없는 길을 하염없이 걸어야 할 것만 같은 불안감을 느끼게 했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대도 하지 말고 그저 한 걸음씩 내딛는 일뿐이다.

도대체 왜 이 고생을 하는 걸까? 내가 무안으로 향하는 동안 200번 버스가 쉼 없이 목포와 무안을 왔다 갔다 했다. 하루를 꼬박 걸어야 갈 수 있는 길을 버스는 한 시간도 안 되어 간다. 분명 난 효율과는 반대 벡터(vector)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비효율적인 여행을 보며 효율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에 사는 사람들이 미친 짓이라고 하는 건 당연하다.

 

 

▲ 목포에서 무안까지 쉼 없이 운행하던 200번 버스를 보고 있으면, 내가 뭐 하나 싶었다.

 

 

나 또한 여태껏 그런 생각으로 그런 행동만을 하며 살아왔다. 그 결과 이런 여행을 떠나기 전의 나처럼 패배주의에 쩌들어, 나의 가치를 완전히 말살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임용도 맘대로 안 되고, 사람 관계 또한 맘대로 안 되어 좌절했다. 그렇기에 지금은 예전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생각을 하며, 반대로 행동하며 살려는 것이다.

 

 

공부란 눈앞의 실리를 따라가는 것과는 정반대의 벡터를 지닌다. 오히려 그런 것들과 과감히 결별하고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삶을 구성하는 것. 삶과 우주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탐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공부다. 더 간단히 말하면, 공부는 무엇보다 자유에의 도정이어야 한다. 자본과 권력, 나아가 습속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야 비로소 공부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호모 쿵푸스, 고미숙 저, 그린비출판사, 2007, 40

 

 

바로 이 글을 읽으며 내 생각을 뒤집을 수 있었고, 이처럼 과감히 국토종단을 떠날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믿는다. 그저 이 순간에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 여행은 나에게 큰 선물이며 자본과 권력, 나아가 습속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공부라는 것을 말이다. 힘들지만 무언가에 쫓기듯 살지도 않을 것이고 어떤 대의를 위해 나를 희생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순간은 오로지 나에게 주는 선물이자, 큰 배움[大學]을 위한 시간이다.

 

 

▲ 목포를 출발하며 한 컷. 시작하는 단계라 그런지 표정이 밝다.

 

 

인용

목차

사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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