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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동양사, 3부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중국으로 몰려오는 하이에나들: 자구책Ⅰ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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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동양사, 3부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중국으로 몰려오는 하이에나들: 자구책Ⅰ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8.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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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구책Ⅰ②

 

 

1894년 조선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반란이라 해도 제 나라 백성들이 일으킨 반란이었지만 제 힘으로 무마할 수도, 진압할 수도 없었던 조선 정부는 상국인 청에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청은 톈진 조약(서구 열강과 맺은 조약과 달리 1885년 청과 일본이 체결한 조약)에 묶여 있어 조선에 파병하려면 먼저 일본 측에 통보해야 했으나 이홍장은 통보를 생략하고 즉시 병력을 보냈다. 그렇잖아도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던 일본에 그것은 군대를 보낼 좋은 구실이었다전통적으로 조선을 속국화하고 있었던 중국의 입장에서는 사실 남의 나라의 내정에 간섭한다기보다는 지방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또한 당시 조선의 명성황후 정권도 마치 중앙 정부에 관군을 요청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청에 군대를 요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일본에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게다가 1897년 조선이 친러파의 책동으로 대한제국을 선포한 것도 일본이 바라던 바였다. 조선을 차지하려면 먼저 조선에서 청의 종주권을 떼어내야 하는데, 조선 정부가 앞장서서 그렇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청과 조선 정부의 행동은 마치 일본을 위해 멍석을 깔아주는 것과 같았다.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 청과 일본의 군대가 맞부딪혔으니 서로 간의 전쟁을 꾀한 게 아니었다 해도 대결이 불가피했다. 마침 청으로서는 30년간 양무운동의 성과를 시험해볼 좋은 기회였고, 일본으로서는 임진왜란 이후 300년 만에 중국과 벌이는 한판 승부였다. 더구나 무대는 두 나라의 직접적인 피해가 없는 한반도였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청은 물론이고 서구 열강, 심지어 일본 내에서조차 이 전쟁은 일본이 이기기 힘들다고 보았다. 비록 서구 열강 앞에 허무하게 무릎을 꿇었지만, 청은 전통의 강국인 데다 30년간의 양무운동으로 힘이 붙지 않았던가? 메이지 유신으로 속성 근대화를 이루었다고는 하나 일본으로서는 벅찬 상대였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본 결과는 정반대로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일본은 이홍장이 직접 30년간 조련한 청의 해군을 황해에서 격파했고 육군을 평양에서 무찔렀다. 게다가 랴오둥 반도까지 진출해 중국 본토까지 노렸다. 놀란 청 조정은 급히 화의를 신청했다. 전쟁은 볼품없이 끝났고, 1895년 또 하나의 불평등조약인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벌어진 모든 전쟁에서 전패하는 기록을 남겼다. 그 전쟁 배상금만 모았어도 근대화의 밑천으로 삼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아편전쟁의 영국은 당시 세계 최강이었으나 이제는 동양의 작은 나라에도 졌다. 한없이 초라해진 중국을 서구 열강은 다시 거세게 물어뜯기 시작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에다 이번에는 독일도 열심히 이권 다툼에 끼어들었다. 열강은 중국을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각지에 철도를 부설하고 광산을 개발했다. 양무운동으로 어느 정도 성장하던 중공업은 여지없이 무너졌으며, 집 안 수공업으로 운영되던 전통의 공업도 서구 상품의 물결 속에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청일전쟁의 배상금을 물 능력이 없어 차관을 도입한 것은 서구 자본이 무차별적으로 영입되는 결과를 빚었다.

 

특히 뒤늦게 제국주의 식민지 경쟁에 뛰어 든 독일은 이 기회에 아예 중국 영토를 열강이 분할하자고 주장했다. 다행히 중국 민중이 반발하고 열강들이 반대하여 무산되었으나 중국인들은 이제 영토마저 빼앗길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젖었다독일은 중세 내내 신성 로마 제국의 본산이었기 때문에 근대 국가로의 출발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늦었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풍부한 식민지들이 다른 열강에 의해 분할된 이후에야 비로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든 탓에 독일은 중국을 영토적으로 분할하는 데 특히 큰 관심을 보였다. 다른 열강도 그런 의도가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수천 년간의 강력한 역사와 문명을 꾸려온 데다 영토가 넓은 중국을 정치적으로 지배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중국은 거리상으로도 유럽에서 너무 멀었다. 그래서 열강은 보수적이고 무능한 서태후 정권을 온존시키고 그 대신 경제적인 이득을 얻어내고자 했다.

 

 

침몰하는 청 제국 30년의 조련도 무색하게 청나라 해군은 개전 직후부터 몰락했다. 그림은 침몰하는 청 제국의 군함인데 영국에서 빌린 함선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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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십팔사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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