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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3장 뒤얽히는 삼국, 뭉쳐야 산다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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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3장 뒤얽히는 삼국, 뭉쳐야 산다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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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쳐야 산다

 

 

아버지 내물왕(奈勿王)과 달라진 것은 협상의 파트너다. 아버지와 달리 눌지왕(訥祗王, 재위 417 ~458)은 고구려를 안식처로 여기지 않았고 지속적인 파트너로 믿지도 않았다. 실성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쿠데타에는 고구려 측의 지원이 있었으므로 눌지왕은 즉위 초기에는 고구려에 대해 사대의 자세를 취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략일 뿐 진심은 아니었다. 사실 신라를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은 것은 고구려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에게 신라는 좋게 말해 보호령일 따름이다. 광개토왕이 백제와 가야, 일본 연합군을 물리쳐준 이래 고구려는 신라에 상주군을 주둔시킬 정도였으니 현대사로 비유하면 1945년 남한에서 점령국행세를 톡톡히 한 미군의 지위나 다름없었다. 미 군정청 지배기에 이승만이 미군과 한편으로 협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미군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듯이, 1500년 전 신라의 눌지왕(訥祗王)은 고구려를 적당히 섬기면서 은근히 독자 노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통령과 왕은 가진 권력에서는 같아도 신분에서는 엄연한 차이가 있는 법, 권력욕에 눈이 먼 대통령 이승만은 끝끝내 좌우합작을 거부했으나 신분상 권력을 보장받고 있었던 국왕 눌지는 적극적인 합작을 통해 고구려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애초부터 눌지왕(訥祗王)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합작 파트너는 놀랍게도 바로 백제였다. 유례왕의 경우에서 보듯이 신라의 역대 어느 왕도, 심지어 백제 비류왕과 잠정적인 우호를 도모했던 흘해왕조차도 백제를 정식 동맹자로 여기지는 않았으니, 그 점에서 눌지는 대단히 혁신적인 사고를 했던 인물이다. 더구나 백제와 파트너가 되면 당시 신라를 그악스럽게 괴롭히던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진전을 볼 수 있을 테니, 아마 그는 그것까지 계산에 넣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눌지에게는 백제에 접근하기 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개인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실성왕(實聖王) 때 고구려에 볼모로 간 동생 복호를 데려오는 일이다. 즉위하자마자 그 일을 추진한 배경에는 필경 고구려와 인연을 끊겠다는 눌지의 장기적인 복안이 있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눌지는 으로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막내 미사흔도 귀국시켜 눈물 어린 형제 상봉을 누렸으나 그 대신 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야 했다. 영리한 계략으로 복호와 미사흔을 돌려보낸 충신 박제상(朴堤上)이 일본에서 참혹하게 죽었고 그의 부인은 망부석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다행히 뭉치면 산다는 건 눌지왕(訥祗王)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장수왕이 남진을 결행한다면 그 대상은 신라만이 아니라 백제도 포함된다. 오히려 전력이 있었던 백제는 더 크게 회를 입을 가능성이 짙다. 그래서 백제의 비유왕(毗有王, 재위 427 ~455)은 즉위하자마자 다방면으로 동맹을 꾀하는데, 먼저 전통적인 우호 관계에 있는 일본에게, 그리고 다음에는 아직 신생국이지만 동진에 뒤이어 중국 강남의 지배자가 된 송()나라와 차례로 우의를 다지고, 433년에는 신라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낸다.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일 게다. 그렇잖아도 고구려의 우산 밑에서 나오면 백제밖에 의지할 대상이 없었던 눌지왕(訥祗王)은 비유왕이 내미는 손을 덥석 움켜쥔다.

 

이것이 후대에 나제동맹(羅濟同盟)이라 알려진 사건인데, 가히 고대의 통일전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배경이나 과정에서 보듯이 그것은 대등한 관계에서 맺어진 동맹이라 부르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백제는 남조의 송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가야와 두루 연대하고 있었으니 신라와의 동맹은 그 연대의 사슬 중 하나의 고리일 뿐이지만, 신라의 입장에서는 백제만이 유일한 연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게다가 신라는 백제의 다른 파트너들과는 사귀지 못했다. 그래서 나제동맹을 맺고 나서도 신라는 일본의 대규모 침략을 당한다). 이는 당시 한반도 남부의 정세에서 백제와 신라의 위상 차이가 현격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고구려의 타깃도 역시 신라가 아니라 백제가 될 것은 당연하다. 비록 신라가 고구려의 우산에서 벗어났지만 고구려는 동남부의 약소국인 신라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남진의 차비를 마친 장수왕의 일정표에는 오직 백제 정벌만이 들어 있을 뿐이다.

 

 

 시대를 초월한 도덕 왕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박제상의 충성심은 그의 가족에게는 비극을 안겨주었지만 후대인들에게는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림은 조선 후기의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라는 책에 수록된 박제상의 이야기다(오른쪽 위에 제상충렬堤上忠烈이라는 제목이 보이는데, 그림은 김홍도가 그렸다고 한다). 대부분이 중국인들로 채워진 수록 인물들 중에 박제상이 당당히 끼인 것을 보면 충성심이란 시대를 초월한 도덕인 모양이다. 하기야, 그렇듯 헌신적인 충성을 마다할 왕이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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