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인문학적 경험
철학은 ‘지금-여기’를 비판적으로 다루지만, 또한 동시에 아직은 없는 세계를 꿈꾸는 학문입니다. 따라서 ‘지금-여기’를 문제 삼기보다 여러모로 정당화하기에만 급급한 제도권의 철학, 혹은 ‘지금-여기’를 전혀 숙고하지 않고 ‘아직은 없는’ 세계만을 추구하는 종교적인 철학, 이 모두가 거짓된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설악산의 공룡능선과 같은 매우 날카로운 능선을 걸어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오른쪽에는 ‘시간’이라는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고, 왼쪽에는 ‘영원’이란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능선을 걷다보면, 여러분은 자신만의 철학, 그 정상부에 오를 수 있게 될 겁니다. 마치 우리가 험준한 길을 걸어 설악산의 정상, 대청봉에 오르게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에게는 각자 홀로 오를 수밖에 없는 철학적 정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아직 어떤 처녀봉에도 오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모든 철학자가 위대한 이유는 그들이 자신만의 능선을 지혜롭게 올라타서 자신만의 정상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철학사란 일종의 처녀봉 등정 기록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이제 여러분은 철학이란 학문을 접하면서 어떤 특이한 측면 하나를 눈치 챘을 것입니다.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철학이란 학문이 다른 학문과는 달리 바로 고유명(proper name)과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플라톤(Platon, BC 428~348)의 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의 철학, 스피노자(Spinoza, 1633~1677)의 철학, 헤겔(Hegel, 1770~1831)의 철학, 니체의 철학, 알튀세르(L, Althusser, 1918~1990)의 철학 등등. 이 때문에 플라톤을 아리스토텔레스로 설명하거나, 데카르트를 스피노자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한 작업입니다. 이런 시도는 단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반복하거나 스피노자 철학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철학자를 고유명에 입각해서 사유하는 것,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철학 책을 읽어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 점에서 철학 책을 읽는다는 것은 위대한 문학자의 걸작을 읽을 때와 같은 인문학적 경험, 행복한 경험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물론 철학 책은 매우 어렵습니다. 높은 봉우리에 오르기가 매우 어려운 일인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철학 책을 읽는 경험은 우리에게 이런 고달픔만을 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이 올랐던 봉우리에 여러분이 오르게 되었다고 생각해보세요. 확 트인 전망! 시원한 바람! 그리고 여러분의 삶을 내려다보기에 충분한 높이! 오직 고되게 정상에 오른 자만이 이런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들뢰즈가 지은 책 중 『스피노자: 실천 철학(Spinoza: Philosophie practique)』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 제일 앞부분에는 말라무드(B. Malamud, 1914~1986)라는 작가가 지은 소설, 『수리공(The Fixe)』에서 빌려온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구절이 보입니다.
나는 그의 책을 인근 도시의 한 골동품상에게서 구입했습니다. 값으로 1코펙을 지불했는데, 벌기 힘든 돈을 그렇게 책 사는 데 낭비했다고 금방 후회했습니다. 얼마 후 몇 쪽을 읽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마치 돌풍이 등을 밀고 있기라도 하듯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에게 말씀드리지만, 제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을 접하게 되자마자, 우리는 마치 요술쟁이의 빗자루를 타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이전과 동일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수리공』
스피노자【스피노자는 유대 교회로부터 파문당한 채, 죽을 때까지 안경알을 갈고 닦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치밀하고 파괴적인 자연주의 철학을 구성한다. 그의 철학은 의식의 독립성, 선의 절대성, 신의 인격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베르그손이 “모든 철학자들은 자신만의 철학과 동시에 스피노자의 철학을 가진다”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그의 철학적 영향력은 막강했다. 주요 저서로 『윤리학』, 『신학 - 정치학 논고』 등이 있다】를 읽은 소설 속의 이 인물은 강렬한 쾌감과 전율을 느낍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이전과는 결코 동일한 인간일 수 없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강렬한 돌풍의 이미지, 요술쟁이의 빗자루를 탄 것과 같은 고도감은, 산 정상에 오른 순간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희열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설의 주인공은 매우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스피노자라는 거대한 봉우리, 압도적인 전망과 싸늘한 돌풍을 제공하는 높은 봉우리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곳에 잠시 머물며 봉우리 아래 펼쳐진 전경을 살펴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요술쟁이의 빗자루에서 내려야 하듯이, 그도 스피노자라는 봉우리에서 곧 내려오게 될 것입니다. 사실 그 봉우리는 스피노자의 것이지, 그 자신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산에 오르는 이유도, 산에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아주 보잘것없을 정도로 작게 조망할 수 있는 고도감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산에 오른다는 것은 그래서 우리 자신이 사는 곳과 우리가 살 수 없는 곳 사이의 차이를 즐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참된 철학은 ‘now-here’와 ‘no-where’의 사이에 있으려고 하는 의지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no-where’가 의미 있는 이유는, 그것이 ‘now-here’를 반성하고 극복할 수 있는 충분한 거리감, 혹은 낯섦을 우리에게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이 주는 조망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철학자들을 온전히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이 올랐던 봉우리에 직접 올라가보아야만 합니다. 그들이 만들어준 조망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의 삶과 사유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주위에서 칭송이 자자한 철학자도 분명 있습니다. 이 철학자를 제대로 알면 우리의 삶을 잘 조망할 수 있는 시선을 얻게 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스스로가 그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그를 직접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철학자가 보았던 것을 직접 한번 살펴보기 바랍니다. 만약 그의 조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서둘러 내려오면 됩니다. 이런 과정을 몇 번 거치면 여러분 앞의 선배 철학자들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두 종류로 구분될 것입니다. 자주 올라가고 싶은 봉우리 같은 철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다시는 올라가고 싶지 않은 전망을 가진 철학자들도 있겠지요.
저 역시도 그렇습니다. 물론 제가 좋아하는 철학자와 여러분이 좋아하는 철학자가 서로 일치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건 저의 삶과 여러분의 삶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역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철학자들이 올랐던 정상을, 그들의 안내에 따라 직접 올라가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다리는 튼튼해지고, 우리의 균형 감각도 단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이런 훈련도 결국 여러분만의 산봉우리를 찾기 위한 연습에 불과하다는 점을 말입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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