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탐욕의 제국: 고전으로 살펴보는 윤리적 기업이란?
그렇다면 기업의 윤리성은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이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자본 중심의 기업 구조’를 ‘사람 중심의 기업 구조’로 바꿔야 한다고 말이다. 이런 깨달음은 이미 선조들의 지혜 속에 들어있었고 당연히 우리에게도 전수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로 급격하게 변해가면서 가장 먼저 제거하려 했던 게 이러한 지혜였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끝없는 욕망을 인간의 본성으로 받아들이게 하며, 그 욕망을 극단으로 추구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하는 구조인데, 선조들의 지혜는 이에 반하기 때문이다.
▲ 질문에 답변을 해주고 있는 홍리경 감독.
『대학』과 ‘경주 최부자의 가훈’으로 보는 기업윤리
잃어버린 선조들의 지혜는 『대학』이란 책과 ‘경주 최부자의 가훈’에 잘 드러나 있다. 어떤 내용들이 있나 살펴보자.
노나라의 현명한 대부 맹헌자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두마차 정도의 말을 기르는 정도의 상등의 신분上士이라면, 닭과 돼지를 길러 돈벌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얼음을 잘라 제사지내는데 쓰는 정도의 고등한 신분大夫이라면, 소나 양을 길러 돈벌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방 백리의 영지를 소유하는 경대부卿大夫의 신분(兵車 百乘을 낼 수 있는 경대부)이라면, 영지의 인민들로부터 중세重稅를 거두어들이는 신하를 거느리지는 아니한다. 중세를 거두어들이는 신하를 둘 바에는 차라리 도둑질하는 신하를 두어라.”
이것을 일컬어, ‘나라는 이익을 취하는 것만을 이利로 삼지 아니 하고, 의義를 구현하는 것을 이로 삼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해석: 김용옥, 『대학ㆍ학기 한글역주』)
孟獻子曰 “畜馬乘, 不察於鷄豚, 伐氷之家, 不畜牛羊; 百乘之家, 不畜聚斂之臣, 與其有聚斂之臣, 寧有盜臣. 此謂國不以利爲利, 以義爲利也.” -『大學』 10장
▲ 돈벌이엔 양심이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먹을거리로 장난치는 경우도 있는 거다.
누구나 자신이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데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나의 행동을 통해 누군가가 피해를 받게 된다면, 그러한 행동은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각 직책별로 키워서는 안 되는 동물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규제라는 말조차 죄악시하는 요즘 시대(현대통령은 “일자리 창출 막는 규제를 단두대에 올려 처리하게 될 것”이라는 말로 ‘규제는 무조건 없애야 할 것’이란 생각을 드러냈음)에 ‘쪼잔시럽게 세세한 걸 다 정해놓고 난리네’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규제는 당연히 있어야만 한다. 『대학』에선 이런 식의 규제를 나라를 다스리는 비결이라 말하며, ‘이익’ 따위를 중시하기보다 ‘올바름’을 중시하는 것이라 천명하고 있다.
一.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
一.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一.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一.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一.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一.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六訓』
경주 최부자의 가훈도 『대학』의 가르침처럼 ‘욕망을 끝까지 추구할 게 아니라, 적당선에서 멈출 수 있도록 하라’라는 부분에선 동일하다. 하지만 좀 더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그건 자신의 욕망을 조절하는 것에서 머무르지 말고 ‘적극적으로 외부와 상생할 수 있도록 도모하라’라는 가르침까지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부 욕망은 추스르고, 외부 존재들과는 상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내외부를 아우르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경주 최부자는 지금까지 존경받는 가문이 된 것이다.
▲ 선인들의 지혜는 욕망을 부추겨야 한다는 게 아닌, 욕망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였다.
진정한 ‘또 하나의 가족’ 삼성이길 바라며
『대학』의 가르침과 최부자 가훈의 가르침을 기업의 입장에서 곧바로 적용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만큼 의식의 전환이 있지 않고서야 힘든 문제이니 말이다. 하지만 최근에 이르러서야 삼성은 대책위-반올림과 함께 대책회의를 하는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줬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던 때와 비교하면 많은 진척이 있었다고 볼 수 있지만, 대화하는 척만 하고 실질적인 대책이 없다면 오히려 삼성은 더 큰 비판을 받을 것이다.
▲ 교섭을 위해 참석한 유가족들. 가운데 하얀 머리이신 분이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인 황상기씨다.
가족을 잃은 상처와 권력의 막강한 힘에 짓눌린 아픔까지 겪은 직원 가족에게 삼성은 더 이상 아픔을 줘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보상금과 같은 돈이란 잣대만을 들이대서도 안 된다. 지금 삼성이 보여야 하는 자세는 ‘적극적으로 외부와 상생하려는 자세’이니 말이다. 최부자가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듯, 삼성도 삼성의 직원들의 아픔을 함께 하며 소외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분명한 입장 변화가 필요하며, 작은 손해에 구애받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화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와 같이 노력한다면, ‘초일류 기업 삼성’이 아닌, 진정한 ‘또 하나의 가족 삼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삼성 스스로가 그러한 삼성이 되길 바랄 것이라는 전제 하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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