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탐욕의 제국: 영화와의 마주침
우연한 마주침이 일으킨 작은 변주가 ‘책씨’로까지 이어지는 과정도 다이내믹하다. 그래서 ‘삶은 알 수 없다’는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페이스북을 통해 돌베개 출판사에서 다채로운 행사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출판사가 파주에 있기에 대부분의 행사는 그곳에서 진행되지만 서울에서도 적지 않은 행사를 하고 있었다.
마주침은 거리의 문제가 아닌 마음의 문제
전주에서 살았을 때만해도 대도시에서 하는 행사들을 보면, ‘그림의 떡’으로 생각하며 참석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럴 땐 지방에 산다는 게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어서 ‘서울에서 살게 된다면 모든 행사에 다 참여할 거야’라고 외치곤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막상 서울에 올라오고 난 후엔 그러한 포부들이 시들해졌기 때문이다. 자기 소유물이 아닐 땐 그렇게 갖고 싶다가도 막상 자기 소유가 되는 순간 시들해지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그럴 때 핑계는 무수히도 많았다. ‘학교생활에 적응하느라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언제든 맘만 먹으면 할 수 있기에, 좀 더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할 거다’, ‘문화생활을 즐기기엔 아직 돈이 부족하다’ 등등 말이다. 그렇게 ‘못해야만 하는 이유’를 수천수만 가지 만들어내며 다양한 마주침의 기회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산앵두꽃이 흔들리고 흔들리네. 어찌 너를 생각하지 않으랴? 다만 집이 멀뿐.’이라는 시에 대해 공자는 “생각이 없는 것이지, 어찌 멀기 때문이겠는가.”라고 말했다.
“唐棣之華, 偏其反而. 豈不爾思? 室是遠而.” 子曰:“未之思也, 夫何遠之有?” -『論語』 「子罕」 30
봄이 되어 새싹이 솟아나며 꽃이 피는 시기엔 누구나 설레고 애틋해지게 마련이다. 이럴 때 사랑하는 연인이 멀리 떨어져 있다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더 간절히 보고 싶을 것이다. 과연 당신이라면 그 연인에게 편지를 띄울 것인가, 아니면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찾아가서 얼굴이라도 보고 올 것인가?
위에 인용한 시의 작가는 그대가 아무리 그립고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지라도, 거리가 멀기 때문에 찾아갈 수 없다고 체념하고 있다. 나 또한 이 시의 작가처럼 마음은 있지만, 이러저러한 상황들로 하지 못한다고 선을 긋고 있었던 것이다. 그럴 때 “생각이 없는 건 아냐, 하지만 현실이 이 모양이어서 어쩔 수 없어”라는 간단한 핑계를 대면 스스로 용납이 되었다.
하지만 공자는 일찍부터 이와 같이 ‘현실을 탓하며 행동을 가로막는 체념적인 어조’를 많이 경험해봤나 보다. 그래서 일언지하에 ‘생각이 없을 뿐’이라고 결론짓는다. ‘멀다’는 게 아무리 현실적인 문제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걸 이유로 대는 순간 ‘할 맘이 없다’고 자인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 그러냐면 『구렁덩덩 신선비』의 아내처럼 남편이 보고 싶으면 이승과 저승의 끝까지라도 찾아가며, 『맹자』라는 책에 나오는 양혜왕처럼 맹자의 고견을 듣기 위해 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갈(不遠千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공자는 마주치려 하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의 문제인 것이지, 거리상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밝히며 ‘못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일침을 놓고 있는 것이다.
▲ [구렁덩덩 새선비]의 장면들. 남편을 찾기 위해 여러 과제를 수행하며 찾아간다. 심지어는 저승까지도 찾아간다.
『탐욕의 제국』과의 마주침
어느덧 서울에 올라와 생활하게 된지 3년이 흘렀다. 이 시간은 정말 귀한 시간들이었지만, 어찌 보면 정작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들을 미룬 시간이기도 했다. 이젠 더 이상 ‘멀다’라는 핑계나 ‘여유가 없다’라는 합리화가 먹히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에 살게 되면 하고 싶었던 일’을 이제부턴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핑계는 핑계를 낳을 뿐이기에, 하고 싶다면 시간과 돈을 쪼개어서라도 해야 한다. ‘못해야만 하는 이유’를 애써 찾기보다, ‘해야만 하는 이유’를 찾아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이 후회 없는 삶을 사는 방법일 테니 말이다.
그런 생각으로 페이스북 뉴스피드를 살펴보던 중, 한 게시글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같으면 그냥 훑고 지나쳤겠지만, 이때는 유독 오래도록 그 글을 차근차근 살펴보고 있었다. 그 글이 바로 ‘책씨’란 글로, 『탐욕의 제국』을 소개하고 있었다.
‘책씨’는 책 한권을 살 수 있는 돈으로 영화도 보고 책도 볼 수 있는 일석이조의 기획이었다. 더욱이 영상매체와 문자매체의 만남으로 서로의 내용이 깊어지며 확장된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문자매체의 한계인 생생한 현장감을 영상을 통해 보완하고, 영상매체의 한계인 자세한 상황설명을 문자를 통해 보충하기에, 어렵고 복잡하여 이해하기 어렵던 내용들이 훨씬 쉽게 이해하게 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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