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불국토의 이상향을 재현한 경주박물관
대릉원에서 나와 한적한 들길을 따라 걷는다. 잘 꾸며 있기에 사람들도 많더라. 작년에 함양에 있는 상림숲에 갔었는데 그때 느꼈던 운치와 거의 흡사했다. 풀내음이 코끝을 자극하니, 여기야말로 ‘천국’, ‘극락’이 아닐까하는 착각마저 들더라. 정말 두고두고 다시 오고 싶은 길이었고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고 싶은 길이었다.
잠시 걷는 것만으로도 신라의 주요 건축물들을 볼 수 있다
조금 가다보니 첨성대가 보이더라. 들길 한복판에 솟아 있는 첨성대가 특이해 보이는 건 그 때문이었다. 가까이 가서 보기 위해서는 500원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멀리서도 충분히 볼 수 있었고 들어간다 해도 첨성대에 올라갈 수는 없었기에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돌로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하긴 석굴암, 불국사 등 걸출한 예술품들을 만들어낸 신라 사람들에게 있어 첨성대쯤의 ‘작은’ 건축물은 아무 것도 아니었겠지. 그곳에 올라 별자리의 운행을 연구하며 국가의 흥망성쇠를 연구했을 옛 사람들을 떠올려 봤다.
안압지는 신라 왕실 정원의 웅장함을 여지없이 느끼게 해줬다. 조선 왕실의 연못인 경회루와는 다른 운치다. 하지만 그렇다고 초라하거나 그러진 않더라. 오히려 경회루보다 규모도 더 커보였다. 그곳에서 온갖 연회도 이루어졌겠지.
▲ 한복판에 놓인 첨성대, 그리고 안압지.
경주박물관과 전주박물관의 비교
거기서 조금 내려오니 바로 경주국립박물관이더라. 경주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이곳을 꼭 찾아야 한다.
박물관의 규모부터가 엄청나서 역사의 도시라는 이름을 내건 전주박물관은 비교조차 되지 않더라. 하긴 그건 단순히 규모 문제만은 아니었다. 박물관 내에 소장한 물품의 질과 밀접하게 관련 있으니까. 경주는 경주에서 출토된 유물만으로도 경주국립박물관을 유지하기에 충분했지만, 전주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그래서 대부분은 모조품으로 한 것이다. 이런 차이는 박물관의 질과 관련이 있고 그건 곧 관람객의 많고 적음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위치상의 차이도 간과할 순 없다. 경주는 다양한 유적지를 보며 걷다보면 박물관이 나오는데 반해, 전주는 유명한 곳과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다. 한옥마을ㆍ전동성당을 보고 나서 한참을 달려야 박물관에 갈 수 있는 것이다. 접근성까지도 별로이다 보니 당연히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결국 전주박물관이 살기 위해선 박물관 주변에 전주를 대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하고, 소장품의 질도 높여야 한다.
좌: 경주박물관, 우: 전주박물관 / 박물관의 접근성부터 전시된 유물들까지 경주박물관이 압도한다.
경주박물관에서 신라왕국의 불국토 이상향을 보다
경주 박물관 입구 쪽엔 성덕대왕신종이 있다. 그 우람한 종을 만들었다니 기술이 놀랍더라. 근데 그 뿐인가? 그걸 매단 신라인들의 기술력은 현재로도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라고 한다. 그 무겁고도 큰 종을 매달고 그걸 버텨낼 수 있는 것을 만들 정도였으니, 고대인들의 과학은 현재 과학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 기술이란 게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건 아닌가 보다. 단절되기도 하고 비약되기도 하는 걸지도. 종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아쉽더라.
▲ 우리에겐 '에밀레종'으로 더 유명하다. 이 종이야말로 과학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도록 만들어준다.
박물관에는 안압지에서 발굴한 유물들로 꾸며진 곳과 불교 예술품으로 꾸며진 곳, 신라의 발굴품으로 꾸며진 곳이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곳은 불교 예술품으로 꾸며진 곳이었다. 돌부처상을 보고 있으니 왠지 마음이 울리더라. 무언가 뜨거운 게 느껴졌다. 불자가 아닌 나도 이러는데 불자였으면 더 심했겠지. 여긴 신라인들의 ‘왕국토’였을 것이다. 곳곳에 보이는 사찰과 불교 예술품, 그리고 황룡사지의 웅장함을 보면서 중생들은 마음의 위로를 얻었을 것이다. 윤회의 업을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들어가기 위해 늘 불심을 되돌아 봤겠지. 황룡사지는 터만 남아있지만 박물관에 복원도가 있었다. 여느 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규모도 크고 9층탑의 위용은 엄청 나더라. 그 실물을 보지 못하는 게 어찌나 아쉽던지.
▲ 불국사는 산 깊은 곳에 있지만, 황룡사지는 경주 한 복판에 있는 랜드마크다.
경주에서의 로맨스??
여행을 끝내고 터미널로 향하는 길에 아리따운 낭자를 만났다. 청초한 얼굴에 수수해 보이는 모습까지.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화들짝 놀랐다. 타지에서까지 ‘도를 아십니까?’를 만나다니^^ 얘기를 조금 들어보니 미륵불을 연구하는 사람이란다. 여기가 경주 아니랄까봐, 단순히 ‘도를 아십니까?’도 아니고 미륵불 이야기를 해준단다. 참 재밌는 사건이다. 하지만 시간이 없기에 도망치듯 걸어왔다.
▲ 한껏 폼을 잡고 경주를 느끼다.
역사가 묻어 있는 곳, 그래서 우린 그곳에 가야 한다
경주, 딱 한마디로 말하면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은 사람이 와야 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한 2박 3일간 머무를 각오를 하고 와야 한다. 많은 걸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를 보더라도 여유롭게 보기 위해서다. 대릉원에서, 황룡사지에서 하루를 꼬박 보낸다 해도 아쉽지 않으리라. 마음의 정리가 필요한 사람, 이런 저런 문제로 골머리 앓고 있는 사람, 삶의 여유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라면 한 번 와보길 바란다. 천년전의 자취를 느끼다보면 오늘을 살고 있는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도 자연히 알게 될 테니까. 역사는 지난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의 나로 인해 끊임없이 새롭게 쓰여 져야 하는 게 역사일 뿐이다.
▲ 경주는 예전엔 수학여행 필수 코스였지만, 지금은 언제든 맘만 맞으면 오고 싶은 곳이 되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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