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정림사지와 금동대향로로 본 백제
정림사지는 사비로 수도를 옮기고 나서 처음으로 지은 절이라고 한다. 그런 역사적 의미에 걸맞게 절의 규모는 상당히 컸다. 물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절터와 오층석탑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 경주의 황룡사에 비하면 뭘까 싶겠지만, 여기엔 백제의 마음이 스며 있다.
정림사지, 중흥의 찬가와 절망의 애가
박물관에 복원된 모형이 있었는데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정림사의 크기를 알만 했다.
무엇보다도 긴 회랑이 눈에 쏙 들어왔다. 백제의 절 건축술은 당대에 알아줬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의 호류사도 지어줬단다. 호류사는 지금도 볼 수 있으나, 정림사는 절터만 볼 수 있으니 씁쓸하다.
▲ 또렷하게 볼 수 있는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새긴 글씨.
정림사라는 절 자체가 새 희망을 위한 찬가에 비유될 수 있다면, 오층석탑은 절망의 애가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오층석탑의 1층 탑신엔 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이 직접 새긴 “크나큰 당나라가 백제국을 평정한 것을 새긴 비석大唐平百濟國碑銘”(이런 치욕적인 글자를 보는 순간, 인조가 청 태종에게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절하는 것三跪九叩頭’의 降禮를 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참 비운의 역사다)이라는 글씨가 또렷이 보이기 때문이다. 같은 장소에 전혀 다른 의미가 새겨진 정림사를 우린 그냥 스쳐 지나가서는 안 된다.
▲ 좌: 정림사지 복원, 우: 호류사 / 백제 불교문화의 정수를 호류사에서 볼 수 있다.
석불좌상, 겉이 아닌 속으로
그 다음엔 석탑 바로 뒤에 있는 석불좌상을 보러 갔다. 여느 부처와 같지 않게 동글동글한 얼굴에 미소를 한껏 짓고 있어 웃음이 절로 난다. 석불좌상은 고려에 만들어졌으나, 조선시대 말에 머리 부분이 떨어져나가 향민들에 의해 얼굴과 모자가 각각 연자방아의 밑 부분 및 큰 바위로 대체된 채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아이들은 석불을 나하고 똑같이 생겼다고 놀려댔지만, 솔직히 나에게 그건 칭찬으로 들렸다. 어떤 완벽한 모습보다 저와 같은 불완전하지만 훈훈한 미소가 더 보기 좋기 때문이다. 이런 부처의 모습이야말로 진정 한국다운 부처의 모습이 아닐까. 예수 또한 지금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유대인의 모습이 아니다. 예수는 중동사람이기에 흑인 예수였을지도 모른다.
그 분이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든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독교에선 그러한 상상조차도 신성모독 운운하며 정죄하려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보이는 것 너머의 본질을 보려는 몸부림이 종교의 모습일 텐데 너무나 말초신경의 자극에만 몰두 하는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다. 석불좌상도 지금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부여에선 원래의 모습으로 석불좌상을 복원하려 한다던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정림사지를 떠났다.
▲ 장난기가 발동한 아이들 석불좌상 같은 포즈를 취하며 맘껏 감상했다.
부여박물관과 금동대향로
박물관을 천천히 둘러보면 사비백제의 역사를 훤히 알 수 있다. 사비로 천도한 성왕은 국가중흥을 위해 절을 짓고 기반을 다진다. 그 후 나제동맹羅濟同盟을 깬 신라를 응징하기 위해 대가야와 함께 공격했다가 신라와 금관가야의 역공을 받아 전사하고 만다. 성왕의 뒤를 이은 위덕왕은 성왕의 넋을 기리기 위해 능산리에 절을 짓고 금동대향로를 만든다. 이런 역사를 지닌 금동대향로는 단연 부여박물관의 하이라이트다.
▲ 향로는 제사를 지낼 때 향을 피우는 기구다. 이처럼 웅장하며 장엄하게 만든 향로라니.
여기엔 불교 사상뿐만 아니라 도교 사상도 담겨 있다고 한다. 봉황은 하늘세계를 상징하고 오악사와 연꽃은 인간 세계를, 용은 지하세계를 상징한단다. 용의 꼬리와 다리로 구성된 밑받침은 정확히 세 곳만 땅과 닿기에 안정되게 서있을 수 있다고 한다.
어슴프레한 조명에 비치는 금동대향로는 시선을 한없이 붙들어 맸다. 과거와 현재를 단순히 비교할 땐 현재가 더욱 발전되었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 내면을 꼼꼼히 살펴보면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듯이 일직선상의 발전이란 있는지 의심스럽다. 일장일단이 있듯이 어느 한 부분이 발전하면 다른 한 부분은 퇴보하게 마련이다. 고로 발전과 퇴보는 같이 간다. 그 순환 과정이야말로 역사의 흐름이지 않을까. 선덕대왕신종의 미스터리나 금동대향로의 미스터리는 오늘날의 과학으로도 도무지 풀지 못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발전한 건 무엇이고, 퇴보한 건 무엇인가?
▲ 역시 박물관을 가서 모든 걸 다 보려 하기보다 그때 끌리는 것만 보고 오는 게 더 좋다.
구드래 돌쌈밥
저녁을 먹으러 구드래 돌쌈밥집에 들어갔다. 맛집이라는 이름을 듣고 애써 찾아왔다.
대략적인 위치만 알고 왔기에 주변에서 한참이나 헤맸다. 1인당 14.000원이나 한다. 그래도 맛있기만 한다면야, 그 정도 가격은 충분히 치룰 수 있다고 생각해서 찾아온 것이다. 가게의 인테리어는 특이하여 구경거리가 많았다. 옛날 영화 포스터가 걸려 있기도 했고 여기 저기 진귀한 물건이 많았다.
그렇다면 과연 음식은 어떨까? 잔뜩 기대를 하고 있으니, 밑반찬을 한 상 가득 깔아준다. 그리고 쌈도 한가득 준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각각 2인분씩 시킨 편육과 불고기는 입맛만 보라는 듯이 적게 줬다. 어찌나 황당하던지. 가격이 지금보다 싸다면 모를까, 14.000원이나 주고 먹기엔 왠지 아깝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오늘 저녁 맛집은 실패!
▲ 인테리어도 끝내주고 분위기도 좋지만 음식은 실망이었다.
그린피아찜질방, 잘 수 없는 찜질방
잠은 ‘그린피아 찜질방’에서 잤다. 찜질방마다 공간 구성이 모두 다르기에, 이 곳은 어떨까 걱정이 됐다. 우선 찜질방 치고는 건물이 작고 오래된 편이어서 깜짝 놀랐다. 이 곳의 특징은 남녀공용찜질방이 아니라는 점이다. 남성찜질방은 바로 남탕 옆에 붙어 있어 남자들만 이용할 수 있다. 우리야 찜질이 문제가 아니라 잠을 자러 이곳에 왔으니, 수면실이 있느냐 하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막상 수면실이 있긴 한데, 여긴 무늬만 수면실이지, 목욕탕 옆에 붙어 있는 쪽방에 불과했다. 자는 내내 한기가 느껴지기도 했고 목욕탕에 티비가 새벽까지 켜져 있어 소음과 빛공해에 시달려야 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여관을 갈 걸 그랬다. 후회 백배!
원랜 8시에 일어나기로 했는데, 옆에서 밀리터리룩을 입고 주무시던 분의 알람소리가 계속 울리는 바람에 잠을 깼다. 그 분은 어찌나 깊이 잠 드셨는지, 반복해서 울리는데도 일어날 생각을 안 하시더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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