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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6부 열매① - 3장 자본주의의 출범, 세계 정복을 향해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6부 열매① - 3장 자본주의의 출범, 세계 정복을 향해

건방진방랑자 2022. 1. 9.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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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정복을 향해

 

 

영국이라는 튼튼한 계승자가 있었기에 에스파냐가 몰락해도 서유럽 문명의 세계 진출은 위축되기는커녕 그 반대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하지만 영국보다 먼저 그 바통을 이어 받은 것은 네덜란드였다. 영국이 엘리자베스 시대의 번영을 이어가지 못하고 내전의 도가니에 휘말려 있는 동안,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에서 독립해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순식간에 최대의 무역국으로 급성장했다. 플랑드르 시절부터 중개무역에는 일가견이 있는 데다 모직물 산업과 조선업의 발전까지 등에 업은 네덜란드의 무역은 말 그대로 무역풍에 돛단 격이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피땀 흘려 닦아놓은 대서양 항로에는 점차 네덜란드의 상선들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항로에는 원래 임자가 없는 데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이베리아의 항로 독점권을 인정해준 교황도 이제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했다. 몰락해가는 에스파냐의 유산은 한때 에스파냐의 자식이었던 네덜란드에 거의 다 상속되었다. 네덜란드는 원래부터 텃밭이던 발트 해와 북해의 무역뿐 아니라, 예전보다는 많이 쇠퇴했지만 아직 짭짤한 수익을 낳는 지중해 무역, 게다가 대서양 항로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이제 네덜란드가 에스파냐에 이어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지위를 계승하는 걸까? 하지만 바로 그때 영국이 등장했다.

 

이미 엘리자베스 시대 말기인 1600년에 네덜란드는 동인도(당시 유럽인들은 아메리카를 인도라고 착각한 콜럼버스의 실수때문에 진짜 인도를 동인도라고 불렀다)를 경략하기 위해 동인도회사를 만들었다. 그러자 네덜란드를 바짝 뒤쫓고 있던 영국도 그해에 동인도회사를 세워 경쟁자로 자처했다. 하지만 아직 영국은 무역의 면에서 네덜란드의 한 수 아래였다. 게다가 영국은 제임스 1세의 반동 정책으로 국내 사정이 어지러웠으므로 네덜란드처럼 총력을 기울일 입장이 못 되었다. 1602년 네덜란드는 10여 개로 난립하던 민간 동인도회사를 하나의 국책 동인도회사로 통합하고 인도는 물론 말레이시아, 수마트라, 일본에까지 손을 뻗쳐 본격적인 아시아 무역에 나섰다특히 이 무렵에 형성된 네덜란드와 일본의 관계는 사뭇 각별하다. 일본에는 16세기 중반부터 포르투갈 상인들이 출입했으나 일본인들은 무식한 장사꾼의 이미지에다 가톨릭을 앞세우는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반면 네덜란드 상인들은 포르투갈인들에 비해 훨씬 신사였고 종교를 그리 강요하지 않는 신교도였으므로 바쿠후와 쇼군(將軍)의 호감을 샀다. 그런 탓에 17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약 200여 년간의 공식적인 쇄국기에도 바쿠후는 네덜란드 상인들에게만큼은 나가사키 항구에 별도의 구역을 설정해 무역을 허락했다. 이후 18세기 초반 일본에서는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 문물을 연구하는 란가쿠(蘭學)라는 학문이 성행하게 되는데, 우리로 치면 북학(北學)에 해당한다.

 

그러나 언제든 영국이 제 몸을 추스르고 나선다면 네덜란드는 뒤처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 이유는 비교 우위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력과 해운력에서는 그 이전부터 영국이 네덜란드에 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무적함대의 격파로도 증명된다), 네덜란드가 장기로 삼고 있는 모직물 공업은 바로 영국의 주력 산업이기도 했던 것이다. 무역과 상업만으로 승부하는 중상주의 경기에서는 무승부지만 산업적 생산력을 필요로 하는 자본주의 경기에서는 영국의 잠재력이 훨씬 컸다. 결국 영국이 제 몸을 어느 정도 추슬렀을 때 네덜란드는 잠시 누린 일인자의 지위를 내주어야 했다.

 

청교도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크롬웰은 네덜란드를 따라잡기 위해 1651년에 새로운 항해조례를 제정했다. 그 주요 내용은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산출된 물건을 영국이나 영국 식민지로 운송할 때는 영국의 선박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분명히 네덜란드를 겨냥한 조치였다. 항해조례에 따라 곳곳에서 네덜란드 상선들이 영국 군함에 검문을 당하는 사태가 잇따랐다.

 

 

크롬웰의 유제 고집스러워 보이는 크롬웰의 데스마스크다. 그는 생전에도 내전을 일으키고 철권통치로 일관했지만 죽은 뒤에도 분쟁의 씨앗을 남겼다. 영국의 무역 독점을 위해 그가 제정한 항해조례는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낳았다.

 

 

결국 전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1052년부터 2년간 양측은 전쟁에 돌입했다. 육건이 없고 해군끼리의 전쟁이었으므로 그렇게 기열히지는 않았고 이내 양측이 강화조약을 맺고 끝냈으나 누가 보아도 영국의 승리임은 부인할 수 없었다. 이후 네덜란드는 1665년과 1672년 두 차례에 걸쳐 영국에 다시 도전했지만 이미 승부의 추는 기울어졌다(게다가 17세기 후반부터는 프랑스가 해외 식민지 건설에 뛰어들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대결이 더 중요해졌다)항해조례는 중상주의 정책에 따른 조치였지만 실상은 자본주의 발달에 더 크게 기여했다. 이후에도 항해조례는 영국이 해외 식민지를 확장해나가는 시대에 계속 통용되다가 자본주의가 성숙해지는 19세기 중반에 효력을 잃고 폐지된다.

 

이제 영국은 에스파냐의 뒤를 이어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명성을 물려받고 세계 진출의 선두 주자로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흥하는 시대였던 만큼 영국의 세계 진출은 두 세기 전의 에스파냐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차이는 식민지의 이용 방식이었다. 대항해시대에는 식민지에서 필요한 물자를 들여오는 게 중요했지만, 자본주의 시대에는 무엇보다 시장이 가장 중요했다. 따라서 에스파냐는 식민지에 대한 철저한 착취를 통해 단기간에 단물을 빼먹는 방식을 썼지만, 영국은 식민지를 장기적이고 다목적적인 용도로, 즉 원료 공급처인 동시에 수출품 시장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 지배가 필수적이었다. 에스파냐는 식민지의 원주민 국가들을 한번 휩쓸어 정복하는 것으로 끝냈고 또 그것으로 충분했으나, 영국은 식민지에 본국과 어울리는 정치·행정 구조를 갖추어놓고 장기적으로 경영하려 했다. 가장 대표적인 영국의 식민지는 서쪽으로는 나중에 미국이 되는 아메리카였고, 동쪽으로는 19세기에 칼라일이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라고 말한 인도였다(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을 강조하려 한 말이지만 인도인들의 생각과는 전혀 무관한 망언이다).

 

그러나 17세기 후반까지 영국은 아메리카와 인도에 식민지의 거점만 마련하는 데 그쳤고, 본격적인 식민지 지배는 뒤로 미루어야 했다. 유럽 대륙의 정세가 다시 큰 용틀임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 유럽에 근대국가 체제를 확립시킨 30년 전쟁은 알고 보니 사태의 종결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일차적 영토 분할은 끝났고, 당시 유럽 각국은 그것으로 종결되었다고 여겼지만, 실상 그것은 원대한 변화의 출발점이었다. 바둑으로 치면 전투가 끝나고 집을 세어 승부를 가리는 단계가 아니라 포석을 마치고 본격적인 전투를 개시하는 단계였다. 하기야, 근대국가라면 가장 중요하고도 민감한 게 바로 영토 문제인데, 그것이 그 정도의 전쟁과 조약으로 완전히 매듭지어질 수는 없었다.

 

 

해양 제국의 계승자 에스파냐가 무너짐으로써 영국과 네덜란드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영예로운 별명을 얻기 위해 다투게 되었다. 그림은 크롬웰의 항해조례로 비롯된 영국-네덜란드 전쟁인데, 이 해전에서 영국이 승리함으로써 해양 제국의 계승자가 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국부의 탄생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바람

세계 정복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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