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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6부 열매① - 3장 자본주의의 출범, 국부의 탄생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6부 열매① - 3장 자본주의의 출범, 국부의 탄생

건방진방랑자 2022. 1. 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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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자본주의의 출범

 

 

국부의 탄생

 

 

유럽의 17세기 전반부는 역사상 유례없는 전란의 시대였다. 대륙에서는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30년 전쟁이 일어났고, 영국에서는 왕과 의회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무수한 사람이 죽고 많은 도시가 파괴되었으며, 각국의 정치와 사회는 지극히 혼란스러웠다. 문명의 종말인가? 물론 지금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유럽 문명은 종말을 맞기는커녕 이후 더욱 성장하고 더욱 힘을 키워 나중에는 세계 정복에 성공하니까. 그럼 그 죽음과 파괴, 혼란은 어떤 의미였을까??

 

배고프면 단결하지만 배부르면 분열하게 마련이다. 빵 덩어리가 작을 때는 그것을 키우기 위해 힘을 합치지만 먹을 만큼 커지면 거기서 각자 제 몫을 더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17세기 전반의 유럽이 대체로 그런 상황이었다. 아메리카의 발견으로 부를 쌓은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서유럽의 패권을 꿈꾼 것이나, 조금 일찍 영토 국가의 개념을 깨우친 프랑스가 동부(알자스-로렌)의 영토를 노리고 30년 전쟁에 개입한 것이나, 엘리자베스 시대의 번영을 계기로 한껏 커진 국력(구체적으로는 과세권)을 틀어쥐기 위해 영국의 왕과 의회가 싸운 것이나, 모두 배고픈 시절에는 생각지도 못한 행동들이었다. 신성의 외피를 두르고 시작한 전쟁들이 막상 전쟁이 진행되면서 모두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으로 바뀐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17세기의 30년 전쟁과 영국 내전은 서유럽이 근대사회로 접어드는 데 따르는 진통이었고, 어찌 보면 근대로 들어가는 입장료였다.

 

먹고살 만해지니까 싸우기 시작했다면, 그 전쟁들을 촉발시킨 원인이 되는 서유럽의 부는 어떻게 형성된 걸까? 그 단초는 대항해시대에 생겼다. 이 시대에 동양과 아메리카에서 에스파냐를 통해 유입된 물자들은 향료나 금과 은처럼 현금과 다름없는 것들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옥수수와 감자 같은 새로운 농작물, 설탕과 차, 염료, 가죽, 목재, 소금, 수산물 등 극히 다양한 생필품이었다. 특히 동양 항로를 장악한 포르투갈은 총포를 내주고 물자를 교환하는 경제적 무역에 그쳤지만, 신대륙을 정치적으로 정복한 에스파냐의 경우에는 무상으로 현지의 물자를 빼앗았다. 게다가 풍부한 노예 노동력이 생산한 농업 생산물이 서유럽으로 대량 유입되었으니 서유럽이 부자가 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판이었다(설령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서유럽의 교통경찰이던 로마 교황은 이렇게 급증한 부를 교통정리하지 못해 어차피 무너졌을 것이다).

 

 

영국의 중산층 자본주의는 신분상으로는 평민이면서 생활상으로는 귀족이나 다름없는 신흥 증산충을 만들어냈다. 영국에서는 젠트리, 프랑스에서는 부르주아지가 바로 그들이었다(지주 냄새를 풍기는 젠트리는 주로 산업 자본가들이었고, 산업가 냄새를 풍기는 부르주아지는 주로 지주들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림은 18세기 영국 화가인 게인즈버러가 그린 앤드루스 부부로, 전형적인 중산층의 모습을 보여준다.

 

 

부가 급속히 늘어나자 서유럽 각국은 저마다 제 몫을 챙기려 들었다. 특히 합스부르크가 여기저기 전쟁을 벌이면서 흥청망청 돈을 쓴 것은 서유럽 지역 전체로 보면 부의 국제적 재분배를 대신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그런 점에서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는 서유럽 번영의 일등공신이다. 비록 때문에 에스파냐는 쫄딱 망했지만, 펠리페의 재산은 1556~1573년 기간 동안 그 이전 재산의 두 배가 되었고, 다시 20년 뒤에는 또 재산이 두 배로 늘었다. 그러나 지출은더 엄청났다. 예를 들면 1571년의 레판토 해전에 지출된 전비 400만 두카트(ducat: 당시 유럽의 금화와 은화 단위) 중 상당 부분이 그가 한 지출이었으며, 무적함대 육성에도 1000만 두카트가 들었다. 그러나 유럽 문명의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의 주체가 된 국가들은 그만큼 돈 쓸 곳도 많았다. 절대주의의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려면 관료와 상비군이 있어야 했고, 그 밖에도 국가 기구들을 운영하기 위한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재원을 확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쟁이다. 다른 나라를 집어삼키거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국가의 부를 단 기간에 크게 늘릴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의도에서 서유럽 각국은 국가 재정의 상당 부분을 군사 부문에 투입했는데, 이는 말하자면 가장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재투자에 해당한다(오늘날의 경제학에서는 군사 부문의 국가 지출을 비생산적 소비 부문의 지출로 간주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방식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다. 아무 나라나 먹는다고 될 일이 아니라 부유한 나라를 정복해야 한다. 그런데 부유한 나라는 힘이 세다그러나 개별 국가 체제의 초기였기 때문에 이따금 경제적 부와 군사력이 일치하지 않는 나라가 있었다. 이런 나라가 일차적인 정복의 대상이 되는데, 예를 들면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은 네덜란드 같은 경우다. 또한 거꾸로 경제력에 비해 군사력이 상대적으로 강한 나라도 있었다. 오늘날에는 경제력이 강해야 군사력도 증강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경제력이 좀 약하면 군사력으로 극복하는 것도 가능했다. 나중에 보겠지만 프로이센 같은 나라가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국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전쟁이 아닌 다른 방식도 필요했다. 그래서 각국이 주목한 게 바로 무역이다.

 

원리는 오늘날 보호무역주의와 기본적으로 같다. 즉 수입을 줄이고 수출을 늘리면 국가의 부가 쌓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호관세가 필요하다. 강물의 흐름을 통제하려면 댐이 필요하듯이, 수입을 억제하고 수출을 증대하려면 관세의 장벽을 높이 세워야 한다. 수출 증대와 보호관세를 내세우는 이 무렵 서유럽 각국의 정책을 중상주의(mercantilism)라고 부른다(이런 경제 정책은 서유럽 세계가 정치적으로 각 국가별로 분립되지 않은 시기, 즉 중세라면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근대사회로 향하는 물꼬를 먼저 튼 것은 경제보다 정치일 수도 있다).

 

이제 국가는 정치의 주체만이 아니라 역사상 처음으로 경제의 주체가 되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개념이 탄생했다. 바로 국부(國富)라는 개념이다. 서유럽 세계가 통합적이었던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는 경제가 자연스럽게 흘렀고 누구도 인위적으로 통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근대에 접어들어 서유럽 세계가 각국별로 분립된 중상주의 시대에 이르면 경제에도 국적이 생겨났고 일국적인 부의 형성이 가능해졌다. 이 국부의 개념은 곧 이어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체제를 가능케 했다. 이로부터 한 세기가 지나면서 국부의 개념이 충분히 성숙했을 때, 즉 자본주의의 정체가 뚜렷이 드러났을 때, 영국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이라는 책을 쓰게 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국부의 탄생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바람

세계 정복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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