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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7부 열매② - 6장 최후의 국제전, 변수는 미국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7부 열매② - 6장 최후의 국제전, 변수는 미국

건방진방랑자 2022. 1. 30.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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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수는 미국

 

 

처칠 내각이 성립한 바로 그날(1940510)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본격적인 작전을 개시했다. 공군과의 긴밀한 공조 체제로 작전을 수행하는 독일의 막강한 기계화 부대는 손쉽게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장악하고 프랑스 국경에 다가섰다. 그러나 코앞에까지 접근한 독일군을 두고도 영국과 프랑스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프랑스가 믿은 것은 육군장관 앙드레 마지노의 건의에 따라 1938년에 완공한 마지노선이었다. 독일과의 접경지대를 따라 두꺼운 콘크리트로 벽을 만들고 중화력을 구비하고 공기 조절 장치와 주거 시설, 휴게 시설, 보급 창고까지 갖춘 마지노선, 그러나 이 완벽한 요새에 대한 독일의 대응 방식은 지극히 단순하고도 효과적이었다. 강하면 피하라. 독일군은 마지노선을 굳이 정면 돌파하려 하지 않고 벨기에 쪽으로 우회해버렸다. 마지노선을 지키던 프랑스군은 닭 쫓던 개꼴이 되었다.

 

독일의 우회 작전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단절시키는 부수 효과를 낳았다. 독일군이 밀려오자 벨기에에 고립된 영국군은 서둘러 본토로 철수했고, 프랑스 영내로 진군한 독일은 614일 마침내 파리를 점령했다. 이로써 프랑스 영토의 3분의 2가 독일로 강제 편입되었으며, 나머지 지역은 자유지대라는 이름으로 페탱(Henri Philippe Pétain, 1856 1951)이 이끄는 비시 괴뢰정권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페탱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의 전쟁 영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흘러간 과거의 명예였고, 그는 이미 여든넷의 쓸모없는 늙은이였을 뿐이다. 괴뢰정권의 수반이 되는, 더욱 쓸모없는 짓을 한 대가로 그는 종전 후 프랑스 정부에 의해 종신금고형을 선고받고 아흔다섯 살로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쓸쓸히 만년을 보내야 했다. 에스파냐의 프랑코 파시즘 정권에 이어 독일의 프랑스 점령으로 영국을 제외한 서유럽 전역이 국제 파시즘의 세력 하에 들어간 것이다(남유럽은 이탈리아의 담당이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 9개월 만의 일이었으니 150년 전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보다도 빠른 기록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영국이다. 서유럽을 손에 넣었어도 영국이 존재하는 한 유럽의 패권은 없다. 루이 14세의 시대나 나폴레옹의 시대나 늘 그랬고, 히틀러의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그 점을 익히 알고 있던 히틀러는 프랑스를 정복한 즉시 영국과 타협을 모색했다.

 

사실 그는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부터 영국과는 정면 대결을 피하고 강화를 이루려 했으나 거절당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강경파인 처칠이 버티고 있었으니 다시 거절당한 것은 당연했다. 결국 히틀러는 19407월 영국 본토를 공격하기로 노선을 바꾸고 제공권 장악을 위해 영국의 공군기지와 전투기들에 대한 공습에 나섰다. 9월에는 런던 시내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같은 달에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은 삼국동맹을 체결했다. 전 세계 파시즘은 한 몸이 되었고, 전쟁은 바야흐로 점입가경으로 접어들었다.

 

영국을 최대, 최후의 적수로 본 독일의 판단은 옳았다. 다만 그 판단이 실제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이다. 영국은 과연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독일 공군은 런던만이 아니라 영국 주요 도시들에까지 무차별 공습을 했으나 좀처럼 승세를 탈 수 없었다. 작전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서 독일은 전선을 더욱 넓히기로 결정했다. 나폴레옹도 영국 공격에 실패하자 대륙 전체의 정복에 나서 대륙봉쇄령을 내리지 않았던가? 히틀러는 영국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대륙의 완전한 정복을 꾀했다. 그것은 유일하게 파시즘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는 소련을 공격하는 것이었다아직까지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있는 나라들 가운데 국제 파시즘에 대한 장애 세력은 소련 이외에 또 한 나라가 있었다. 바로 미국이었다. 그러 히틀러는 미국에 관해서는 일단 걱정하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이 처리할 몫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히틀러가 소련 공격에 나선 이유는 유럽 전선에서 소련을 맡아줌으로써 아시아에서 일본의 부담을 줄여준다는 의미도 있었다. 파시즘적 형제애라고 할까?. 나폴레옹의 꿈을 실현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폴레옹의 결과까지 답습한 셈이 되었다.

 

19416, 독일은 118개 보병사단과 15개 기계화사단, 19개 전차사단, 300만 명의 병력, 3600대의 전차, 27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해 소련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다. 옛날에 나폴레옹이 그랬듯이, 히틀러도 3~4개월이면 능히 소련의 주력군을 격파하고 자원 지대 우크라이나를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개전 초기 파죽지세로 모스크바까지 밀고 나간 것도 나폴레옹 전쟁과 똑같았다. 그러나 좋은 측면의 모방은 여기까지였다. 나폴레옹이 그랬듯이, 독일군은 초겨울 무렵인 10월에 모스크바 공략을 개시했다. 소련 역시 옛 러시아처럼 후퇴 전략으로 대응했다. 혹독한 추위를 견디지 못한 독일군이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자 소련군은 12월부터 반격에 나섰다. 역사의 시계추는 가혹하게 되풀이되었다.

 

모든 것을 속전속결로 끝낸다는 독일의 의도는 여기서 비로소 꺾였고, 2차 세계대전의 클라이맥스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유럽의 전세는 장기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41127일에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태평양전쟁을 도발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인해 그때까지 연합국측에 군수품만 공급하던 미국도 본격적으로 참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미국 상선을 공격해 미국의 참전을 유발했다면,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아예 미군 기지를 폭격해 미국을 전선으로 끌어냈다. 전선은 자연스럽게 아시아에서 미국과 일본이 맞서고, 유럽과 아프리카에서는 영국과 소련이 독일과 이탈리아에 맞서는 형국이 되었다.

 

 

실수의 되풀이 히틀러는 실제로 의도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130년 전 나폴레옹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다. 영국을 제외한 대륙을 모조리 장악한 것도 그랬고, 영국 본토의 공격에 실패한 것도 그랬다. 마지막 닮은꼴은 소련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그랬듯이, 히틀러도 소련을 힘으로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봤으나 문제는 또다시 동장군이었다. 사진은 러시아의 설원을 힘겹게 행군하는 독일군의 모습이다.

 

 

진주만 기습부터 1942년 봄까지 몇 개월간은 추축국의 세력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그러나 원래 공격자는 속전속결이 유리한 법이므로 장기전이 되면서 불리해지는 쪽은 그들이었다. 더욱이 제1차 세계대전도 그랬지만 개전 초기에는 참전하지 않았던 미국을 전쟁에 불러들인 것은, 장기전으로 갈수록 승산이 희박해진다는 것을 뜻했다.

 

과연 역전의 계기는 태평양에서 먼저 생겨났다. 19422월에 영국 동북아시아군의 항복을 받아 제해권을 장악하고,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미얀마를 손에 넣을 때까지 일본의 활약은 눈부셨다. 이로써 그들이 구호로 내세운 대동아공영권은 달성된 듯했다. 그러나 미국이 정신을 차리면서 전황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5월 남태평양의 코랄 해전에서 일본군은 개전 후 첫 패배를 맛보았고, 다음 달에는 미드웨이에서 미국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해군의 주력을 상실했다.

 

역전의 바통은 아프리카에서 이어받았다. ‘사막의 여우로멜의 탁월한 전술에 밀리던 영국군은 10월부터 반격에 나섰으며, 11월에는 아이젠하워가 이끄는 미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하면서 전세를 뒤집었다. 동부전선에서도 독일군은 전선의 교착을 깨기 위해 다시금 대규모 공세를 취했다가 소련군의 반격을 받아 1943년 초에 30만 명의 병력이 궤멸당하는 패배를 맛보았다. 같은 달 태평양의 솔로몬 제도에서는 미군이 격전 끝에 과달카날을 점령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2차 세계대전의 승부는 이 시점에 사실상 결정되었다.

 

19446월에 미군과 영국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프랑스로 진격했다. 이어 8월에는 파리 시민들의 투쟁으로 프랑스가 독일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었다프랑스는 본토를 독일에 점령당했지만, 영국에 망명한 드골 정부가 연합국 측으로 참전했고, 조국의 해방도 스스로의 손으로 이루었다. 만약 그러지 못했다면 아무리 프랑스가 유럽에서 대접받는 국가였다 하더라도 종전 후 별로 발언권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와는 달랐다. 1930년대 전성기를 맞았던 우리 민족의 항일 무장투쟁은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더욱 투쟁의 고삐를 죄어야 할 상황에서 오히려 크게 위축되었다. 게다가 일본의 강압으로 징병까지 당한 탓에 종전 후 연합국 측은 한동안 한반도를 피해자로 보지 않고 일본의 협력자로 여겼다. 7월에 태평양에서는 미군이 사이판을 점령하고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에 나섰다. 1945년 초부터 승리를 확신하게 된 연합국 측은 전후 처리에 관해 협상을 시작했다.

 

나머지는 마무리에 불과했다. 3월에 연합군은 독일의 영내로 진격했다. 4월에는 무솔리니가 스위스로 도망치려다 이탈리아 유격대의 손에 피살되었고, 소련군이 베를린에 진입하자 히틀러가 자살했다. 그 일주일 뒤인 57일 독일이 항복했다. 끝까지 저항하던 일본은 8월에 두 차례의 원자폭탄 공격을 받은 끝에 항복했다.

 

 

파시스트의 최후 파시즘이 대중에게 불어넣은 환상은 파시즘이 힘을 잃으면서 깨졌다. 파시즘이 패하는 것을 본 대중은 간사하게도(?) 파시즘에 대한 혹독한 탄압으로 돌아섰다. 사진은 무솔리니와 그의 애인이 유격대의 손에 의해 총살되어 거꾸로 매달린 장면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전범들의 등장

파시즘의 힘

준비된 전쟁

변수는 미국

항구적인 국제 질서의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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