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11장 요한복음과 로고스기독론 - 말씀과 세계 본문

고전/성경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11장 요한복음과 로고스기독론 - 말씀과 세계

건방진방랑자 2022. 3. 3. 09:35
728x90
반응형

말씀과 세계

 

 

우리는 저 나무를 어떻게 쳐다보고 있는가? 나무는 저기 우뚝 서있는 물리적 나무이기 이전에 나무라는 말씀이다. 나무라는 말씀으로 인하여 저 나무가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저 나무가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생물학에서 말하는 세포구조의 매우 자세한 말씀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저 나무를 우리가 평상적으로 바라보는 것과는 매우 다르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물리학의 심오한 말씀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분명히 우리가 일상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과는 다른 세계를 바라보고 살게 된다. 그것은 분명 우리의 일상적 체험과는 다른 또 하나의 우주다. 다시 말해서 말씀은 우주를 창조하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철자한다’ ‘말을 구성한다라는 것을 영어로는 ‘to spell’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동시에 주술을 건다는 의미가 된다. 말씀은 예로부터 창조의 주술로 인식되어왔던 것이다. 요한복음의 첫 장 첫 말은 구약성서의 창세기의 첫 장 첫 말과 상통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1:3)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하는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셨으니, 결국 이 세계를, 이 우주의 모든 것을 창조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어진 것이 아무것도 그가 없이는 지어진 것이 없느니라. (1:3)

 

 

그리고 요한복음보다 600년이나 앞서 쓰여진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

 

 

내가 아무리 말씀(Logos)에 관하여 기술을 하여도 사람들은 항상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 말씀을 듣기 전이나, 말씀을 들을 때조차도 똑같이 말씀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만물이 이 말씀에 따라 일어나지 않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말씀에 관한 체험이 없다. 내가 설명하는 대로 말과 행위를 체험하고 있을 때에도, 내가 만물을 그 구성에 따라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분별시켜 주어도 사람들은 말씀에 무지한 듯하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고 있는 동안에 무엇을 했는지를 망각하는 것처럼 눈뜨고 있을 동안에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Diels-Kranz, Die Fragmente der Vorsokratiker의 번호, Fr. 1)

 

 

다시 한번 반복해서 논구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요, 예수를 믿는다 하는 것은 예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고 나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가? 바로 예수의 말씀을 알아차릴 수 있는 나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과 나의 말씀은 하나로 통한다.

 

하나님의 말씀
III
예수님의 말씀
III
내 마음의 말씀

 

 

그런데 요한복음이 쓰여질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미 예수라는 역사적 지평은 사라지고 없었다. 갈릴리 마차길의 풍진 속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 아래, 골고다의 언덕 위에 십자가에 못박혀 목말라 하던 예수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았는가? 요한시대의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예수님의 말씀뿐이었다. 한번 이렇게 생각을 해보자.

 

 

 

 

인용

목차

성경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