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의 일반용법
불트만의 이러한 언급은 매우 부당하다. 물론 그의 논지의 핵심을 내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지나치게 요한복음을 영지주의적 세계관이라는 틀 속에서 자리매김 하고 있으며, 더욱이 영지주의라는 것을 지나치게 하나의 특수한 신화적 세계관으로 고정시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매우 낡은 사고방식이다. 희랍철학이란 몇몇 철학자의 단편 속에 담긴 특수한 사유체계가 아니다. 희랍어를 사용하던 당대의 사람들의 삶과 언어에 배어있는 일반적 윤리관이나 사고의 경향성을 대변하는 문화적 가치이다. 요한복음의 저가는 희랍어를 사용하는 지식대중을 향하여 복음을 설파하기 위해서 ‘로고스’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면, 그 로고스는 이미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us, BC 540~480)로부터 스토아철학에 걸쳐 6세기 동안 전개되어온 바로 그 일반적 상식을 대상으로 설파된 것이다. 그러한 전통과 무관한 특수한 로고스는 이해될 길이 없다.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요한복음 주석을 달면서 요한복음 1장의 로고스는 희랍철학의 로고스와는 무관한 것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는 경향성이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무지막지한 비성찰의 졸언이다. 때로 그것은 철학에 대한 단순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철학과 신학을 그렇게 단절시키면 철학은 점점 드라이해져 어렵게만 느껴지고 신학은 점점 우리의 상식적 삶의 이해구조로부터 소외되기만 한다. 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을 펼치면 그 모두(冒頭)에 나오는 말부터 이미 요한복음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로고스의 성격과 결코 무관한 것일 수 없다는 확신을 갖는다. 그 논리적 심층결구와 그것이 노리는 메시지의 내용이 상이한 것이라 해도. 그러나 지금 내가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 단편을 펼쳐서 유창하게 해설하기 시작하면 독자들이 또다시 나의 현란한 논술에 놀라 도망갈 것이다(기실 그 대강의 철학적 맥락을 나는 나의 『요한복음강해』 67~110에서 강술하였다). 그러한 전거에 대한 지식의 전제가 없이 도대체 ‘태초에 말씀이 계시었다’는 말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의 일상언어에 비추어 소박하게 논의해 들어가는 것이 정도일 것이다.
‘로고스’는 아주 평범한 일상적 희랍어로서, ‘말한다’라는 동사 ‘레고’(lego: to say, to tell, to utter in words)의 명사형이다. 그러니까 ‘말’ ‘말함’의 뜻이며 ‘말씀’(Word)이라는 번역은 매우 좋은 정확한 번역이다. 그런데 과연 ‘말씀’이라는 게 무엇인가? 한번 이렇게 생각해보자! 우리가 말을 못한다면 어떠할까? 우리에게 ‘말씀’이라는 것이 없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있어날까? 이것은 내가 벙어리라서 말을 못한다는 뜻이 아니고, 나의 머릿속에 언어라는 장치가 전혀 없다고 생각해보자! 과연 이 세계는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이 세계는 저기 저 바위에게는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말씀은 반드시 사고를 전제로 하고, 사고는 사고작용 그러니까 흔히 우리가 정신(mind) 혹은 영혼(spirit)이라 부르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것이다. 우리가 저기 저 바위나 개와 다를 수 있는 것은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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