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의 중요 명제들
이제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중요한 명제들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는 “이데올로기 ― 이것은 ‘이데올로기 일반’을 뜻합니다 ― 는 역사가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이데올로기는 영원하다는 뜻으로, 어떤 사회에도 이데올로기는 있을 거라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에 비유합니다. 물론 개개의 이데올로기들이야 역사를 갖겠지만 말입니다.
둘째, “이데올로기는 현실적 존재 조건에 대한 상상적 관계의 표상”이라고 합니다. 즉 이데올로기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나 현실관계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럴 것이다’라고 당연시되어 있는 방향으로 변형된 관계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가 아니란 뜻에서 이러한 ‘비현실적’ 관계를 마치 ‘있는 그대로의 현실적 관계’로 상상하고 오인(méconnaissance)토록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유럽에서 실업문제가 심각해지자, 취업문이 좁아진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그렇게 된 게 외국인 노동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사실 자본가들이 노동력을 싼값에 풍부하게 구하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들을 끌어들였고, 경기가 나빠지자 고용을 줄여서 그런 것이지요. 그러나 노동자들은 개인으로서 자본가와 계약하기 때문에 자신이 고용되지 못하는 것을 마치 다른 노동자, 특히 외국에서 이주한 노동자들 때문이라고 ‘오인’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고용되고 개인적으로 해고되는 걸 당연시하는 ‘표상체계’에 의해 상상된 관계요, 거기서 정해놓은 허구적 관계를 인정(reconnaissance)하는 ‘오인’입니다.
셋째,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인 효과를 갖는 물질적 존재며, 물질적 장치를 통해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는 결국 이데올로기가 물질적 장치를 통해 제도화된 특정한 방식의 실천을 통해 존재하고 작동한다는 말입니다. 그는 “무릎 꿇고 기도하라. 그러면 믿을 것이다”는 파스칼의 말을 인용합니다. 종교적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믿음’이나 ‘관념’이 아니라, 매주 교회에 나가고, 가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실천을 통해 작동하는 물질적 존재라는 겁니다. 이처럼 특정한 실천들을 지속화하는 장치를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고 합니다. 학교나 교회, 가족 등등이 그것입니다.
넷째, “이데올로기는 항상-이미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고 합니다. 이는 그의 이데올로기론에서 매우 핵심적인 주장인데, 예컨대 “너는 신의 어린 양이다” “너는 누구의 아들이다” 또는 “너는 한국인이다” “너는 백인이다”와 같이 너는 누구’라고 불러주는 것이 호명(interpellation)입니다. 그 뒤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너는 (한국인이니) 이걸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말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장면이 매우 많지요? 신의 부름을 받은 모세나 다른 선지자들이 그 부름에 따라 무언가를 합니다. 즉 신이라는 호명한 주체(이를 큰 주체Subject라고 합니다)에 복속되어 그가 지시하는 바를 따르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건 ‘신의 백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집니다.
여기서 ‘항상-이미’라는 말을 쓴 것은, 예컨대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나는 누구의 아들이고 한국인이고 황색인종이라는 등의 호명이 항상-이미 정해진 채 기다리고 있기에 그런 것입니다. 즉 내가 불리어질 호칭은 항상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지요. 그에 대해 내가 “예”하고 대답하는 순간, 나는 큰 주체(예컨대 ‘한국인’)의 부름을 내 것으로(“나는 한국인이야”) 하게 됩니다. 이로써 나는 ‘주체’가 되는 것이지요. 그게 말 잘 듣는 주체든, 말썽 피우는 주체는 혹은 삐딱한 주체든 간에 말입니다. 이것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s | other | |
⤪ | ||
me | ← | S(Sujet) |
여기서 S(큰주체)에서 me로 이어지는 선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항상-이미 존재하는 호명, 즉 내게 주어질 나의 자리요, 내가 호명에 답해 채워야 할 질서 속의 빈자리입니다. 그리고 S의 호명에 답함으로써 나는 s(주체/신하)로 되고, 그것이 부르는 내 이름(예컨대 ‘한국인’)을 내 안에 옮겨 놓게 됩니다. 그게 바로 내 안의 주체지요. 라캉이 말하는 에스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주체의 부름에 답하는 다양한 방법, 형태가 other입니다. ‘조국의 부름을 받은’ 용감한 군인이 되기도 했다가, 힘든 생활을 견디지 못해 빠져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근면한 근로자가 되지만 종종 힘든 삶에 찌들어 술을 따르는 ‘편한’ 직업의 유혹에 넘어가기도 하는 것 등이 그것입니다.
이로써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개인이 항상-이미 주체로 구성되어 가는 메커니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항상-이미 호명된 주체로 개개인이 ‘주체화’ 되어 가는 메커니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메커니즘 자체가, 타자에 의해 개개인이 주체로 되어가는 라캉의 메커니즘과 거의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라캉에게 생기는 난점들 역시 마찬가지로 제기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