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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6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근대 너머의 철학을 위하여 - 5. 푸코 : ‘경계허물기’의 철학, ‘침묵의 소리’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6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근대 너머의 철학을 위하여 - 5. 푸코 : ‘경계허물기’의 철학, ‘침묵의 소리’

건방진방랑자 2022. 3. 26.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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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소리

 

 

푸코의 사상 전반을 특징짓는 가장 커다란 기획은 정상과 비정상, 동일자와 타자, 내부와 외부 사이에 만들어진 경계를 허무는 것입니다. 예컨대 과학이라고 간주된 것과 비과학이라고 비난받는 것 사이의 경계, 정상인과 아직정상인이 아닌 자들 사이를 가르는 경계, 이성과 비이성을 가르는 경계, 혹은 이성의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정신이 나간’, 정신이 들어온이란 말을 생각해 보세요)가 그것입니다. 한마디로 내부이자 정상과 동일시될 수 있는 동일자 와 거기에 동일시될 수 없기에 배제되어야 할 타자 사이를 가르는 경계를 푸코는 허물려고 하는 것입니다(여기서 타자란 말은 라캉이 쓰는 것과는 정반대의 뜻입니다. 라캉에게 그것은 기존의 질서를 집약하고 있는 자아 외부의 구조로서, 푸코의 용어에서는 차라리 동일자에 가깝습니다).

 

이 경계를 이해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유용합니다. ‘광인이란 무엇인가? 혹은 정신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상인과 어떻게 다르며, 양자를 가르는 결정적인 구획선은 어디 있는가?

 

 

병원 설계도

감옥 아니냐고? 아니다. 틀림없이 병원이다. 감옥 같다고? 그렇다. 틀림없이 감옥 같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아주 중요한 사연이. 17세기에 들어오면서 광인들의 항해는 중단된다. 이제 그들은 부랑자, 가난뱅이, 게으름뱅이, 범죄자 등과 더불어 수용소에 갇힌다. 그 수용소 입구에는 이런 간판이 달린다. ‘종합병원’, 노트르담 성당을 습격했던, 파리 시내의 한 구역을 점거해서 자신들의 법과 규칙에 의해 독자적인 삶을 살아가던 이들이 이제는 그 새로운 이름의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광기란 이제 이성이 허용할 수 없는 외부가 되었고, 이성적이기 위해선 그 안에 광기가 없음을 증명해야 했다. 유사한 것에 속지 않으려는 데카르트의 편집증적 강박을 푸코는 이를 통해 설명한다.

사실 인간이 사는 이 세계가 정상임을 증명하기 위해선 무언가 정상이 아닌 것이 있어야 하듯, 이성이 정의되려면 무언가 비이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중세에는 나병환자를 가둔 수용소가 그 역할을 했고, 17세기 들어오면 수많은 사람들을 가둔 새로운 수용소가 이제 그 역할을 대신한다. 이성의 정체성/동일성(identity)을 증명하기 위해선, 배제되어야 할 타자들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이 저렇게 따로 없다면, 대체 내 어두운 정념 안에 광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떻게 참을 수 있을 것이며, 내가 광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질문은 영화를 볼 때면 종종 하게 되는 질문입니다. 예컨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란 영화는 정신병원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환자는 자기가 환자일 거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해 병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주인공 맥 머피로 분장한 배우 잭 니콜슨은 미친 사람인지 아닌지 병원에서도 오락가락하며 잘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가 하는 일을 봐도 앞뒤가 안 맞는 게 아니라 매우 사리에 맞으며, 그로 인해 많은 환자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지요. 심지어 인간에 대한 불신 속에서 귀머거리로 행세하던 인디언에게까지 말입니다. 도대체 이들 가운데 누가 정말환자고 누가 가짜환자인 걸까요? 이들이 퇴원을 하려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걸까요?

 

터미네이터 2에서 여주인공 사라 코너는 정신병원에 갇혀 있지요. 미래에서 터미네이터가 왔다느니, 또 올 거라느니 하는 얘기를 하다 그렇게 된 걸 겁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우리는 답답하고 짜증이 납니다. 왜 저 사람들은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자 취급하고 가두느냐고 말입니다.

 

물론 판단은 병원과 의사가 하지요. 하지만 잭 니콜슨은 광기와 정신병을 고치려는 그들의 치료를 받고는 구제불능의 병자가 되지요. 의사들이 정상인을 정신병자로 만든 겁니다. 사라 코너를 가둔 의사들의 판단 역시 그걸 보는 우리에겐 아무런 신뢰도 주지 못합니다. 사실 그들이 사람을 병원에 수용하고 내보내는 기준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했다고 반드시 정상인인 것도 아니고, 병원에 있다고 반드시 환자인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정신병원의 의사들도 정기적으로 다른 의사들에게 정상인지 아닌지 검사를 받는다고 합니다.

 

요컨대 푸코는 이런 식의 매우 심술궂은 질문을 통해서 정상인과 광인 사이의 경계가 과학과 진리가 보증해 주는 확실한 게 결코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경계를 허묽으로써 동일자의 외부, 정상 외부에 대해 사고하고자 합니다. 이는 정상인의 관점에서 광인을 사고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차라리 광인에 대해 올바로 사고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정상인의 관점, 정상인이란 환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비로소 광인의 목소리를, 타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란 것입니다. 동일자에 의해 어둠 속에 갇혀 버린 침묵의 소리를 말입니다.

 

 

감옥

감옥을 한국에선 교도소’(矯導所)라고 부른다. 바로잡아 이끄는 곳이란 뜻이다. 그러나 들어가 보지 않아도 우리는 감옥이 그와 정반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수인들 자신이 감옥을 국립대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뜻이야 다 알겠지만, 굳이 말하면 범죄를 배우고, 범죄를 할 인연을 만드는 곳이란 뜻이다. 확실히 그런 점에서 감옥은 실패했다. 푸코는 근대사회에서 일반화된 권력의 모델을 감옥에서 발견했지만, 사실 그것은 적어도 감옥에서는 철저하게 실패했다는 것 또한 인정한다. 이는 감옥의 관리자들도, 법조계 인사들도, 학자들도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왜 저렇게 거대한 감옥이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우선 사회의 질서를 해치는 해충들을 추방하고 격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곳에 있지 않은 우리 자신의 정상성을 믿기 위해서일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이 아직은 정상을 벗어나지 않았으며, 이성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믿기 위해서, 혹자는 비슷하지만 아주 다르게 말한다. “감옥은, 이 사회 전체가 감옥이 아니라는 것을 가시화하기 위하여 저기 저렇게 따로 존재한다.” 푸코는 좀 다른 식으로 말한다. “감옥이 저렇게 분명하게 있지 않다면, 범죄자들이 저렇게 명확히 가시화되어 있지 않다면, 대체 누가 저 거대한 경찰조직과 억압적인 국가장치들의 존재 이유를 인정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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