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튀세르 철학의 모순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비판은 ‘기능주의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의 이론은 기존의 지배적인 사회가 개개인을 호명함으로써 항상 이미 존재하는 기존 질서 속에 포섭하고, 거기서 요구되는 역할을 자신의 일로 ‘인정’ ‘오인’하고 수행한다는 결과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란 개념은 기존의 지배적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고 기능하는가 하는 메커니즘만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며, 이 질서의 변화와 전복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전혀 설명할 수 없다는 비판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얘기한 것만으로는 이러한 비판을 반박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이는 아마도 이데올로기를 ‘재생산’이란 관점에서 정의하고 개념화하려는 문제설정에서 근본적으로 연유하는 것 같습니다. 즉 이데올로기가 어떤 식으로 기존 질서를 재생산하며, 그 속에서 개인들을 ‘주체’로서 재생산하는가를 설명해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알튀세르가 이런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제시하는 개념이 바로 ‘계급투쟁’입니다. 즉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로 존립하고 작동하는 게 아니라 계급투쟁을 통해 변화되고 그것을 통해서만 작동한다”는 테제를 제시합니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가 대중에 대한 계급투쟁이며, 대중의 투쟁을 포섭하여 수용가능한 것으로 전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대중들이 가진 이데올로기 역시 계급투쟁을 통해 가변화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는 또 다른 난점을 야기하게 됩니다. 다 접어두고 근본적인 것만을 본다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따르면 “이데올로기 없이는 어떠한 실천도 불가능”합니다. 그건 표상체계 없는 판단, 무의식 없는 의식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렇다면 이데올로기 없이는 어떠한 계급투쟁(실천!)도 불가능한 것이 됩니다. 계급투쟁은 이데올로기 외부에 있지 않으며, 이데올로기에 의해 작동되고 설명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이 추가한 테제는 이 계급투쟁이 이데올로기의 성립과 변화를 설명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면 이데올로기는 계급투쟁에 의해, 그리고 계급투쟁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는 악순환에 빠지고 맙니다. 이는 “이데올로기의 외부는 없으며 이데올로기 없는 실천은 없다”는, 라캉적인 이데올로기 개념으로선 결코 잘라낼 수 없는 테제와 계급투쟁을 중심에 두는 맑스주의의 테제가 서로 근본적인 모순에 처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커다란 주제와 관련해 요약하면, 알튀세르는 근대적인 주체 철학과 인간주의에 대해 명시적인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함으로써 근대적인 출발점을 벗어납니다. 그리고 거꾸로 주체나 인간이란 사회적 관계의 효과로써 만들어지는 결과물이란 점을 분명히 합니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명제를 이데올로기 개념의 발전을 통해 개개인이 주체화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이론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다른 한편 알튀세르는 초기의 과학주의에 대한 자기비판을 통해 과학주의라는 근대적 정당화주의를 벗어납니다. 그는 심지어 인식론이란 분과 자체가 부르주아적이고 법적인 정당화주의임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통해 진리/허위의 근대적 이분법을 깨뜨립니다. 이로써 어떤 지식이나 관념들을 하나의 현실적 실재로 간주하고 그 효과를 사고하는 이론적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를 과학으로서 추구하려는 태도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았고, 그 결과 당파적 과학이라는 역설적 정의를 도입하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결국 이러한 알튀세르의 시도는 이데올로기 개념을 통해 근대적 문제설정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으로 요약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재생산을 넘어 항상 이미 존재하는 체계의 전복을 사고하기 곤란하다는 난점에 부닥칩니다. 그리고 보다시피 이 난점을 계급투쟁이란 개념을 통해 극복하려고 합니다. 마치 맑스가 ‘실천’이란 개념을 통해 근대적 문제설정을 넘어서려 하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그가 발딛고 있는 라캉적인 이데올로기 개념은 계급투쟁 개념과 근본적으로 상충되는 모순적 요소였기에, 이러한 극복의 시도는 해결하기 힘든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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