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는 글: 반복이 만든 여행, 반복이 만들 이야기
삶이란 하나의 도화지에 자신의 색채로 그림을 그려가는 일이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부모가 ‘삶을 맘껏 누비며 살아봐라’라고 말하듯, 삶이란 백색의 도화지에 자신만이 지닌 채색 도구로 한 획 한 획 그려가는 일이다. 그게 어떤 그림이 될지는 주위 사람도 모르고,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다.
도화지에 어떤 그림을 그릴까?
물론 도화지는 채색 공간의 한계를, 채색도구는 색상의 한계를 가지고 있어 자신의 상상을 맘껏 펼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이걸 ‘생의 비극’이라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맘대로 그릴 수 있다’는 말 자체가 거짓은 아닐까? 누구도 현실을 벗어난, 한계를 넘어선 것을 표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건 ‘새로움’이라기보다 ‘기이함’에 가까울 것이고, ‘선구적’이라기보다 ‘선정적’에 가까울 것이다.
‘해 아래 새것은 없다’는 말처럼 모든 것은 기존에 있던 것을 기반으로 탄생한다. 그렇기에 ‘기존에 있던 것’을 한계로 느끼는 사람에겐 ‘절대 넘어설 수 없는 완고한 벽’으로 남을 것이고, 가능성으로 느끼는 사람에겐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로 남을 것이다. 도화지의 가능성, 채색도구의 가능성으로 우리는 어떤 삶을 그리려 하는가?
▲ 경로를 정하고 묵을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 분주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그림을 그리려 하지만 막막하다
아이들과 생활하다 보면 간혹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보이곤 한다. 뭔가를 하고 싶긴 한데, 뭘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공부가 하고 싶어요”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 말 속에 갇혀 생각을 진척시키지 못한다. 우리 사회에서 공부라는 게 지니고 있는 위압감이 클뿐더러 기대치 또한 높기 때문이다. 그러니 ‘국영수 위주로 공부해야 하고, 한 만큼 성취해야 한다’는 압박이 은연중에 자리한다. 그래서 막상 말을 꺼낸 당사자도 할 엄두를 내지 못해 그저 ‘메아리 없는 웅성거림’으로 끝내고 마는 것이다.
이쯤에서 맹자라는 사람이 말한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 잠시 들어보자. 조선시대 때만 해도 성인으로 추앙받던 사람이었으니 뭔가 대단한 명언을 해줄지도 모른다. “공부하는 방법이란 다른 게 없다. 그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뿐이다(學問之道無他, 求其放心而已矣).” 어떤가, 당신의 기대를 충족해주는 말인가? 아마도 대부분은 황당해하며 “역시 소문난 잔치에 먹잘 게 없다니까. 그런 시답잖은 소리 누가 못하오”라고 불만을 쏟아낼 것이다. 공부하는 방법에 대한 대답이 겨우 ‘잃어버린(언제 잃어버린지도 모르는) 마음을 찾아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게 과연 시답잖은 소리이기만 할까?
▲ 자전거 여행 넷째 날에, 충주 탄금대에서 현세는 내 모자에 앉은 잠자리를 보고 있다.
막막하지만 반복해서 선이라도 그어봐
며칠 전 준규쌤과 이야기를 하다가, 준규쌤이 “세상은 반복으로 형성되었어요.”라는 알쏭달쏭한 말씀을 꺼내시더니 “반복적으로 10년만 하다 보면 전문가가 되죠.”라고 말씀을 맺으셨다. 나에게 그 말은 어떤 철학을 담고 있는 말이라기보다 대단히 현실적인 조언처럼 들렸다. 그 이유는 ‘하찮은 일이 결코 하찮지 않다’로 들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기엔 작은 일들이 반복되고 유지될 때, 그 변화는 상상을 초월한다는 얘기이니 말이다.
그 얘기를 토대로 공부에 대입해 보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책만 보거나, 공만 드리블하거나,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거나 하는 등의 하찮은 일조차 꾸준히 할 수만 있다면, 그것 또한 무시하지 못할 내공이 된다는 얘기다. 이런 관점에서 맹자의 말을 다시 보면 작지만 중요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게 된다. 기본 중의 기본(마음)을 놓치고선 그 다음을 향해 나아갈 수도 없으며,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서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라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과 공명하는 말이 『암살』이란 영화에서 나온다. 안옥윤은 두 명의 거물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경성에 왔지만, 계획이 들통 나며 사살엔 실패한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 그녀를 청부살해하기 위해 온 하와이 피스톨이란 사람이었다. 하와이 피스톨은 안옥윤을 죽이지 않고 병원에 데려가 치료를 해준 후 말한다.
하와이 피스톨: “솔직히 조선군 사령관하고 강인국을 죽인다고 독립이 되나?”
안옥윤: “우리 만주에선 지붕에서 물이 세거나 벽이 부서져도 고치질 않았어. 곧 독립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갈 텐데 뭐 하러 고치겠어. 둘을 죽인다고 독립이 되냐고? 모르지. 그치만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돈 때문에 뭐든지 하는 당신처럼 살 순 없잖아.”
몇 명 죽인다고 독립은 되지 않는다. 그건 어찌 보면 ‘난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는 위안을 위한 행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작은 일조차 하지 않으면 독립이란 커다란 목표는 더욱 더 요원해지고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패배감만 짙어질 뿐이다.
그렇기에 안옥윤은 그런 패배감, 현실적인 한계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그치만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것이다. 이런 안옥윤의 마음이야말로 하찮은 일처럼 보일지라도 최선을 다해 하려는 마음이라 할 수 있고, 그건 곧 도화지에 멋들어진 그림을 그리진 못하더라도, 선이라도 긋고자 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 패배주의가 감돌 때, 절망이 감쌀 때 우린 조심해야 한다. 그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그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낙동강-한강 자전거 여행은 선이라도 긋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다시 처음으로 돌려 보자. 처음에 ‘삶이란 하나의 도화지에 자신의 색채로 그림을 그려가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순간순간 그린 그림들이 모이고 쌓여 그게 삶을 만들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계속 얘기했듯이 그런 순간순간의 그림들이 대단할 이유도, 뭔가 엄청난 의미를 지닐 필요도, 남들 보기에 그럴 듯해 보여야 할 이유도 없다. 그저 작은 일일지라도 그 순간을 수놓으며 반복적으로 해나갈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달성군에서 서울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려고요”라고 말하면 ‘언제 거기까지 간대요?’라고 말하거나, ‘뭐 하러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 말만 들으면 엄두도 나지 않을뿐더러 괜한 짓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대부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이 묵살되고 억압받아 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린 그런 말에 주눅 들지 않고 하려 한다. 물론 우리가 하는 일이 안옥윤 같이 대의를 위한 독립운동이나 사회변혁을 위한 일은 아니지만, ‘도화지에 선을 반복적으로 긋는 행위’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우린 그걸 하려 하는 것이다. 반복적으로 페달을 밟는 행위를 통해, 어떤 잃어버린 마음을 찾았는지, 그리고 어떤 삶의 그림을 그려 왔는지 이제부터 얘기해보기로 하자.
▲ 우리들이 6박 7일의 기간 동안 페달을 밟는 작은 행위로 그려 나간 그림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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