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4.3항쟁을 영상으로 제대로 담아낸 지슬
역사적인 상황을 묘사한 영화이기 때문에 과연 시간 순으로 사건을 전개할지, 주제별로 사건을 전개할지 기대됐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러한 생각을 모두 깼다.
▲ 우린 4.3항쟁을 직접 대한 사람이 아니니 영화를 통해 간접 체험을 할 수밖에 없다.
영화로 제사를 지내다
제사형식을 빌어 사건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오멸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4.3항쟁으로 저물어간 무수한 인명들에게 씻김굿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위神位(죽은 사람의 영혼이 의지하는 자리)’, ‘신묘神廟(조상의 신주를 모신 사당)’, ‘음복飮福(제사를 마치고 제사에 쓰인 술이나 음식을 나누어 먹음)’, ‘소지燒紙(지방을 태우는 일)’ 네 가지 제사 형식에 따라 영화를 편집했다. 어쩐지 처음 장면이 제기가 넘어진 장면에서 시작한다 했다. 첫 장면은 마지막과 맞물려 있다. 첫 장면에 넘어져 있던 제기들이 마지막 장면에선 지방紙榜이 타며 촛대에는 촛불이 켜져 있는 장면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 마지막 장면에선 촛불이 켜져 있고 지방이 불에 타고 있다.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이 음복에 해당되는 부분이었다. 무동의 어머니는 일제 때에도 별일이 없었다면서 집에 남기로 한다. 그때 지슬(감자의 제주도 방언)을 챙겨주는데, 무동내외는 산에 그냥 오르고 만다. 그 후 무동은 어머니의 안부가 궁금해 넓은궤에서 내려오는데 어머니는 이미 토벌대에 죽임을 당했고 집도 불에 탄 후였다. 남은 것은 불에 익은 지슬 밖에 없다. 한바탕 울분을 토해내던 무동이는 그제야 지슬을 챙겨 큰넓궤로 돌아간다. 마을사람들은 무동에게 어머니의 안부를 묻지만 무동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무동이가 가져온 지슬을 마을 사람들과 나눠 먹을 뿐이다. 음복은 제사음식을 나눠 먹는다는 뜻인데, 무동의 어머니가 남긴 지슬을 모두 함께 나눠 먹는 것으로 음복을 표현한 것이다. 죽은 자가 남긴 음식을 산 자가 먹으며,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다.
▲ 영화 초반에 쏟아지던 지슬들과 불탄 집에서 복받쳐 우는 무동이.
연출이 살린 영화
안개는 이 영화의 잔인함을 가리며 극적인 긴장은 유지하게 만드는 장치로 자주 활용된다. 하늘에서 본 제주가 희뿌연 안개가 덮여있다. 토벌대가 민가에 침입하여 민간인을 죽이는 장면에서도 안개가 짙게 깔렸다. 카메라는 안개 속의 인간의 행방을 무심한 듯 비추고 있다. 토벌대의 진행 방향에 따라 카메라가 이동하며 희뿌연 안개는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비명소리도 없이 사람들은 죽어간다. 끔찍할 수도 있는 장면에 안개가 사용됨으로 끔찍하지 않은, 그러면서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알 수 없게 장면을 연출했다. 이러한 연출 덕에 영화는 잔인하지만은 않게 진행될 수 있었다.
▲ 연기는 여러 장면에서 등장한다. 불명확한 시점이 긴장을 고조시킨다.
그 뿐인가. 여러 장면이 ‘롱테이크’로 숨고를 틈 없이 진행된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돌발 상황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게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롱테이크 연출이 어려운 이유는 카메라의 동선, 연기자의 동선, 그러면서도 연기자의 연기까지 어느 하나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건 촬영팀, 연출팀, 음향팀, 배우 모두의 궁합이 맞아야만 가능하다.
특히 큰넓궤 장면의 연출은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좁은 동굴을 영화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더욱이 동굴의 특성상 어둡기에 조명을 비춰 사람의 모습을 잡아낼 수도 없다. 그런데 오멸 감독은 동굴 안에서 핀 짚불에 사람이 비치는 형식으로 사람의 모습을 보여줬으며 카메라를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한 사람씩 대사를 하는 방식으로 동굴의 특성을 보여줬다. 밀폐된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도록 연출하기 위해, 카메라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사람들의 움직임을 최소화한 것이다. 이런 간단한 연출로 동굴의 답답한 특성을 담아냈다는 점이 이 영화의 강점이다.
▲ 큰넓궤를 묘사한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한 사람씩 돌아가며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백미다.
자막이 필요한 국산영화
국산 영화인데 자막이 있어야 볼 수 있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전라도 사람이라 경상도 사투리가 나오는 영화를 볼 때 간혹 말길을 알아듣지 못해 영화에 집중할 수 없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문맥상으로 내용을 이해할 수는 있었기에 자막까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볼 때는 전혀 달랐다. 자막이 없인 아예 한 부분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단어가 다른 경우도 많았으며, 이해가 되지 않는 조사들도 많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자막에 눈을 떼지 않고 영화를 봐야만 했다.
그렇지만 제주도 방언으로만 영화를 만든 것은 매우 잘한 결정이란 생각이 든다. 표준어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영화 몰입도는 높아졌을지 몰라도 현실감은 더욱 낮아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제주도 방언은 사라지고 있는데, 이런 영화를 통해서 제주도방언을 들을 수 있다는 건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러면서 제주도 방언을 지키기 위한 국가적인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정길이란 인물에 집중하자
토벌대는 살벌한 인간으로 나온다. “빨갱이 목을 따오지 않으면 먹지도 마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으며 살인을 부추긴다. 그런데 이들의 살벌함과는 반대되는 인물이 나온다. 그 사람이 바로 정길이라는 인물이다.
정길이는 한 번도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하지 않고 물을 나르거나, 상사에게 수건을 주거나, 같은 병사들이 먹을 돼지를 가마솥에 넣고 끓이는 역할만 한다. 그는 마을이 초토화되거나 민간인이 죽음을 당한 후에 중심적인 인물로 카메라에 잡힌다. 늘 철모에 가려져 안 보이던 눈이 그제야 보이며 슬픔을 온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는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아파하고 괴로워한다.
그래서 정길을 보고 있으면, 관객의 시선을 대변하는 인물이 아닌지 착각하게 된다. 실제로 마지막 장면에선 극 중 가장 잔인한 인간으로 묘사되던 상사를 가마솥에 넣고 끓이며 “이제 그만 죽이고 잘 가세요.”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아무도 토벌대를 응징할 수 없었는데, 정길이만 유독 토벌대를 처단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제주도를 만들었다는 설문대 할망을 정길이란 인물을 통해 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여신의 눈빛을 가진 전지전능한 존재를 영화 안에 넣고 싶었고 그게 정길이었다. 정길은 실제로 한 번도 군인의 일을 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통해 정길이란 인물이 극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 인물인 줄 제대로 알게 된다. 이러한 배경지식을 알고 영화를 본다면, 영화는 훨씬 재밌을 것이다.
▲ 정길이는 설문대 할망을 묘사한 인물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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